2인극 페스티벌-덤 웨이터+이야기 심청

Posted by 구상나무 구상나무
몇년전 1인극 '콘트라베이스'를 본 적이 있다. 명배우 명계남이 혼자 두시간 가까이 이야기를 독백을 통해 연극이 전개된다. 캐릭터의 독창성과 이야기의 치밀함, 그리고 배우의 캐릭터 이해와 그에 따른 몰입도가 굉장히 중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쉽게 소모되고 재미가 없으며, 외면받기 쉽다. 그만큼 어려운 극이 1인극이다. 그렇다면 2인극은 어떨까?

지금 대학로에서는 열한 번째 2인극 페스티벌이 열리고 있다. 그 일환으로 전개된 위드블로그의 이벤트에서 당첨된 나는 아내와 함께 2인극 페스티벌에서 선보이는 연극 "덤 웨이투"와 "마당극 심청의 이야기"를 '정미소'라는 임시 소극장에서 관람했다.

"덤 웨이터"는 2명의 극단적인 캐릭터들이 팽팽한 긴장감을 갖추면서도 희화화되고 유머러스한 상황을 연출하면서 극을 전개한다. 1인극에 비해 2인극은 분명한 대립적 갈등 구조를 가지는 2명의 캐릭터가 눈길을 끈다. 하지만 "덤 웨이터"가 가지는 이야기의 서사적 탄탄함은 좀 아쉽다. 도대체 이 두명의 캐릭터가 왜 그 방안에서 무엇을 기다리고 있으며 왜 그들은 기다리고 있는지 나오질 않는다. 그저 한명이 그 상황에 회의를 느끼고 있다는 것만이 극에 등장하는 인물들간의 갈등을 야기하고 있다.

이 연극의 소개에서 보면 베게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아이디어를 가져 온 것 같은데, 사실 사전 지식 없이는 이 연극을 본다는 것은 조금 곤혹스럽기도 하다.

물론 연극에서의 긴장감과 스팩터클함, 깜짝깜짝 놀라게 하는 여러 장면들, 대립되는 인물 구도의 설정, 배우들의 탄탄한 연기력 등은 꽤 훌륭했다. 여기에 이야기의 사사적 측면만 조금 더 보강되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 다음으로 본 "이야기 심청"은 전통적인 마당극 형식을 빌었다.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위해 마지막에 나는 징을 들고 아내는 그 징을 치는 일에도 참여했다. 마당극은 자고로 관객과 놀이꾼(배우)이 함께 할 때 그 효과가 최고조에 달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 전 연극인 "덤 웨이터"의 극도의 연극적 긴장감을 완전히 풀어 해치는 일은 쉽지 않아 보였다. 사람들은 대부분 "덤 웨이터"를 본 사람들이 그대로 남아서 "이야기 심청"을 보았던 터라 극과 극의 롤러코스터를 타는 기분을 느꼈으리라.

"이야기 심청"의 재미는 물론 "덤 웨이터"를 뛰어넘는다. 아주 전통적인 고전을 약간 각색하고 다르게 생각해 보자는 제안으로 극이 시작되면서 사람들의 궁금증을 불러와 극을 이끌어 간다. 2명의 배우가 보여주는 다양한 연기와 재미있는 물건을 이용하여 관객의 상상력을 자극하는데는 성공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연극적인 재미는 덜했다. 막과 장이 없이 매번 병풍 뒤로 왔다갔다 하는 방식으로 등장과 극의 전환을 바꾸는 것은 연극의 전통적인 막과 장의 구별에서 올 수 있는 기대감을 씼어버렸기 때문이다.



사람마다 문화 공연을 보고 난 후의 느낌은 다를 것이다. 좋지 않은 감상 후기를 그것도 마감 이후 이렇게 뒤늦게 내놓았지만, 그럼에도 "야, 잘 보았다!"고 외치고 싶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봉하마을에 내려와서 한 그 일성처럼 보는 내내 고개를 갸웃거리기도 하고 박장대소도 하고, 졸기도 했지만 이런 일이 어디 흔한 일이랴. 내 인생은 내 아내와 함께 하는 2인극의 그 절정임을 그날따라 유난히 느끼게 되었으니, 이보다 더 큰 수확이 있겠는가.

미천한 블로그질을 하고 있는 나에게 이런 기회를 준 위드블로그 측에 더없이 감사드리며, 더불어 연극 문화 발달을 위해 애쓰고 있을 관계자들과 2인극 페스티벌 관계자들에게 더불어 감사하다는 말씀을 전하고 싶다.





저는 건강한 리뷰문화를 만들기 위한 그린리뷰 캠페인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동일 조건 변경 허락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가정부, 혹은 파출부, 때로는 식모라고도 불렸다. 지금은 간혹 가사도우미라고 불리기도 하며, 전문직업인의 느낌이 나는 가정관리사라는 이름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여성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직업이고, 여전히 저임금이며 고강도 노동에 처해 있고, 사회 안전망의 바깥쪽에 있는 직업군의 하나다.

돌봄 노동(육아, 식당, 청소 관련 업무)은 그 가치에 비해 천대받으면서 위협받고 있다. 우리 사회의 천박한 인식을 날것 그대로 드러내고자 했던 드라마 “로맨스 타운”에서 부잣집 아들 강태원은 자신의 집 가정부 노순금에게 이렇게 말한다.

“비위도 잘 맞추고 눈치도 잘 보고, 때론 비굴하다 싶을 정도로 남은 밥 남은 반찬 먹어치워 음식물 쓰레기 안 생기게 하고, 자기 처지 알고 주제 알고 몸 낮춰 빠질 줄도 알고 입 다물 줄 알고.”

표현이 지나치다는 비판을 받은 내용이긴 하지만, 우리 사회의 천박하고 저열한 인식을 생생하게 드러냈다는 지지도 받고 있다. “로맨스 타운”은 그만큼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계급적 차별의식을 담아내려는 시도와 돈 앞에 무너지는 위선적인 인간들의 모습을 잘 드러낸 수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맨스 타운”은 뿌리 깊은 계급적 차별의 지점을 순진한 낭만적 상상으로 뛰어넘으려 한다. 노순금이라는 순수하고 착하고 성실한 캐릭터의 노력으로 식모들 사이의 우정을 되찾고 왕자님(강태원)과의 사랑도 성취한다.

하지만 영화 “헬프”는 "로맨스 타운"의 한계에서 더 나아가서 반갑다. 저항하는 흑인에 대해 무법적인 살인과 테러가 공공연하게 벌어지는 사회, 모든 법질서가 백인에게 유리하고 흑인을 억압하고 있는 사회에서 흑인들이 선택할 수 있는 여지는 극히 좁다. 영화는 이 지점에서 용기를 낸 가정부들을 중심으로 끌고 왔다. 힐리를 중심으로 하는 상류층 백인 여성들과 스키터 엄마 등이 가진 위선적인 모습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계급적, 성적, 인종적으로 가장 열악하고 인간적 권리의 사각지대에서 신음하는 여성들이 자신들의 목소리를 담은 책을 냄으로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사회의 모순을 고발한다는 내용은 “로맨스 타운”의 한계를 뛰어넘는 카타르시스를 안겨준다.

잘못된 사회 시스템은 모두를 피해자로 만든다. 에이블린(흑인 주인공)이 힐리(인종차별주의자)에게 던지는 마지막 절규, “이제 그만하세요. 지겹지도 않으세요.”와 흐느끼는 힐리의 모습은 결국 흑인이든 백인이든 인종 차별의 거대한 벽에 모두 갇혀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 벽에 균열을 낼 수 있는 용기를 보여달라는 영화 “헬프”.

영화는 거의 두시간 가까운 분량이지만, 영화 내내 전혀 지루함을 느낄 수가 없었다. 유쾌하고 재미있는 미니와 애절한 아픔을 간직한 에이블린, 상큼발랄한 작가 지망생 스키터가 보여 주는 다양한 재미들이 쉴 새 없이 쏟아진다. 미국에서 3주 동안이나 박스 오피스 1위를 차지했을 정도였으니 재미라면 걱정하지 말고 보기를 바란다.




예고편 보기



저작자 표시 비영리 동일 조건 변경 허락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끝내 "내가 좀더 열심히 하면 된다"고 생각하면서 일만 하다가 도살장에 팔려간 말 복서가 생각난다. 사실 이 말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말 중의 하나다. 때로는 '성실' 때로는 '희생'으로 떠받들어지지만, 사실은 '무기력'의 다른 말일 수도 있고, '대안없음', '출구없음'의 비슷한 말이기도 하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체제와 시스템에 대한 무지는 결국 우리에게 성찰 없는 '희생'과 비판 없는 '성실'만을
요구할 뿐이다. 이런 체제가 바라는 것은 저항 없는 '무기력'의 상태이다.

길가에서 걸인이 굻어죽어도 그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유죄다. 하물며 생때같은 어린 목숨들이 고작 성적 때문에 제 목숨을 아스팔트 위로 던져버려도 꿈쩍도 안하는 나라에서 사는 우리 모두는 지금 무기력하다.

선거로 사람을 잘 뽑자는 이야기도, 나만 잘 하면 된다는 말도, 결국은 그 무기력 속에서 희망도 출구도 없는 세상을 향한 헛발질에 불구하다. 무지와 무기력은 결국 권력의 타락을 부추기고 방조하는 일이다.

민주당과 한나라당을 오가는 정치권력이 내온 결과는 처참할 뿐이다. 모든 불행한 일은 언제나 외부의 적(대부분 북한, 때때로 중국) 때문이라며 외치는 보수 언론은 여전히 막강한 권력을 쥐고 있다. 국민의 충견이 아닌 권력의 충견 노릇을 하는 검경부터, 체제에 순화되어 법의 정의를 고민하기 보다 승진과 권력에 욕심을 부리는 판사들, 빈곤의 그늘을 키우기에 여념없는 부자들, 교육의 숭고한 가치를 버리고 지식 장사에 나선 사학들, 그리고 이 모든 것에 안주하며 자신의 욕심만 채우고 있는 정치가들. 이 모든 것들이 나와 당신이 만든 그 '성실'과 '희생'이 만든 댓가다.

권력을 탐해 그에 아부하거나 기생하려는 자들이 넘쳐나는 사회는 곧 전체주의 사회이며 파시즘 사회이다. 사람들이 스스로 무지에서 벗어나고 무기력을 깨지 않는다면 공포의 마왕이 하늘에서 내려와 모두를 집어삼키고 말 것이다. 끔찍한 미래를 막기 위해서 우리가 할 일은 무잇일까?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은 그 해답을 마련해 놓고 있다. 




동물농장(세계문학전집5)
카테고리 소설 > 영미소설
지은이 조지 오웰 (민음사, 2009년)
상세보기


저작자 표시 비영리 동일 조건 변경 허락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이사를 하면서 다시 책들을 정리했다. 이전에 아내와 책들을 합칠 때보다 더 정밀한 구분 작업을 했다. 시와 한국 소설 쪽은 출판사 별로 하거나 시리즈별로 해야 보기 좋게 정리되었다. 하지만 이는 보기에는 좋아도 실제적인 활용에서는 불편하기 그지 없다. 그래서 작가 이름 순서로 정리해 보았다. 동일 작가의 작품들이 가지런히 배열되니 책을 보는 느낌이 다르다. 시에서는 신경림 시인의 시집이 7권으로 가장 많았고, 그 다음으로 안도현, 김용택, 김남주의 순서를 나타냈다. 소설에서는 황석영의 소설이 5종으로 많았다. 이렇게 정리하다 보니 아내와 내가 둘다 가지고 있는 시집이나 소설이 몇권 나타났다. 교양과학과 역사(신화) 관련 책을 한칸에 몰았다. 경제와 환경 관련 서적도 일단 하나의 칸에 몰았다. 사회비평은 홀로 온전히 한칸을 몽땅 차지했다. 취미실용 중에 여행과 사진은 따로 칸을 마련해 두고 나머지는 함께 몰아두었다.

뿌연 먼지를 날리며 반나절을 꼬박 작은 방에서 그 작업을 했다. 잃어버렸던 책꽂이는 발견했지만, 역시나 정체모를 돈 따위는 나타나지 않았다. 오히려 중복된 책들이 여러 권 발견됐다. 게다가 복잡한 책장에 자리가 부족한만큼 불필요한 책들을 과감히 버리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방한구석에는 노끈에 단단히 묶인 책들이 쌓였다. 마치 중죄를 지은 죄인처럼 포박을 당한 채 쪼그라져 있는 모습은 보기에도 안타까워 보였다. 책들은 이제 형장, 아니 고물상에서 이슬을 맞으며 사라질 일만 남은 듯하다. 물론 도서관에 기증할 생각도 없는 건 아니다. 그런 책들은 그럴 운명으로 분류되지만, 그렇지 못한 책들이 문제다. 만일 꿈꾸는 책들의 도시 부흐하임이 있다면, 그 도시의 지하 세계에서 산다는 그림자 제왕에게 보낼 수 있다면?



이 책의 주인공은 공룡 미텐메츠다. 이런, 사람도 아니고 공룡이 주인공이다. 아니 정정하자. 이 책의 주인공은 책이었다. 시종일관 책들은 주인공을 괴롭히고, 위기로 몰아넣고, 생명을 위협하며, 심지어 중독과 최면을 걸기도 한다. 책을 찾아다니다가 지하 세계 깊숙한 곳까지 떨어지고 고대의 룬문자로 쓰인 책들의 기운에 휩싸인 채 책사냥꾼의 표적이 되어 도망 다니다가 부흐링이라는 책을 먹는 종족도 만난다. 부흐링족이 책을 먹는다는 것은 인간들의 읽는 행위와 같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부흐링이라는 종족은 책을 읽어야 영양분을 흡수하고 배가 부르단다. 심지어 바로크 소설을 한꺼번에 세권을 읽은 어느 부흐링족 청년은 다이어트를 위해 수일간 하루에 시 3편만 읽어야 한다고 말한다. 아무튼 이런 세상에서 이야기의 주인공 미텐메츠는 대부의 유언대로 부흐하임에 왔다가 온갖 일들에 휩쌓인다. 그리고 마침내 잊혀진 책들의 지하세계, 그 곳의 왕 그림자 제왕과도 극적인 만남을 가진다.

다시 말하지만 이 책의 주인공은 어디까지 '책' 그 자체다. 책을 읽는 내내 책을 손에서 내려놓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장장 800쪽에 가까운 분량이지만, 책은 충분히 나에게 마법의 주문을 외쳐 나를 지하세계로 질질 끌고 내려가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책을 즐기는 사람, 책을 사랑하는 사람, 책을 읽는 즐거움을 아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이 책을 읽고 즐길 수 있다.


꿈꾸는책들의도시(전2권SET)
카테고리 소설 > 독일소설
지은이 발터 뫼르스 (들녘, 2005년)
상세보기


지금 내 방에 처박혀서 버려질 시간만 기다리고 있는 저 책들이 마지막에 닿을 저 세상은 부흐하임의 깊은 지하 세계이길 바라는 마음은 그래서 고귀하다.



책속으로





저작자 표시 비영리 동일 조건 변경 허락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아래 뮤지컬 서편제에 대한 리뷰는 '위드블로그'의 도움으로 작성된 것임을 밝힙니다.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빛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엄마나 누나야 강변 살자.
- 김소월, '엄마야 누나야'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 서정주, '국화 옆에서'


우리의 누이에 대한 이미지는 애잔하면서 그리운 존재이고, 힘들고 지칠 때 언제든 받아줄 수 있는 그런 아득하고 따뜻한, 그래서 엄마와 함께 찾아가고픈 품이다. 뮤지컬 서편제나 영화 서편제, 소설 서편제 모두에서 공통적으로 관통하는 정서는 바로 누이의 한이다. 누이의 한은 지독한 예술가적 편집증을 가진 아버지 유봉으로부터 발생하였고 동생 동호와의 이별과 만남에서도 애잔한 끓어오르는 정한으로 표현된다. 지난 금요일(10월 1일)에 본 뮤지컬 서편제에서도 누이의 한을 절절이 느껴보고 왔다.

뮤지컬 서편제는 영화와 달리 동호의 비중이 높다. 동호는 계부 유봉에 반발한다. 이는 아버지라는 전세대와의 갈등이면서 어머니를 죽인 '소리'라는 무형의 존재를 아버지라는 유형의 개체에 대입하고 있다. 소리 때문에 어머니가 죽었고, 그 소리는 아버지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의식에서 동호는 아버지를 증오하고 결국은 떠난다. 그러나 떠남은 또다른 상처를 누이 송화에게 심었다. 이후 유봉은 송화에게 약을 먹여 눈을 멀게 하고 득음을 재촉한다. 송화는 자신의 눈을 멀게 한 아버지를 원망하지만 결국 용서하고 소리를 찾아 유랑의 길을 함께 떠난다.

수십년이 흘러 동호와 송화는 극적으로 재회한다. 송화와 동호는 밤새 심청가를 부르며 서로의 아픔과 상처를 보듬어 안는다. 마지막 장면은 영화와 같지만 뮤지컬에서 주는 감동은 그 이상이다.

뮤지컬의 기획 의도에서 밝혔듯이 이 뮤지컬은 해외 라이센스 뮤지컬이 뮤지컬 전용관이나 대형 공연장을 차지하고 있는 지금의 현실에서 한국적인 뮤지컬을 만들어 보겠다는 기획에서 출발했다. 그래서 고른 것이 바로 이청준의 원작 소설 '서편제'. 우리나라 영화계에 백만 관객의 시대를 열어 준 영화 '서편제'에서 모티브를 따왔다. 하지만 영화 서편제에서는 판소리만 나왔던 것에서 뮤지컬 서편제는 서양음악의 기본 요소들도 함께 하면서 대중적인 뮤지컬로서 손색이 없는 내용을 갖추었다. 뮤지컬의 재미를 극대화하면서도 판소리의 궁극의 경지를 향한 노력은 게을리지 하지 않은 수작이다. 또한 무대를 꾸민 한지는 다양하게 교차하고 움직이면서 시간과 공간을 아우르는 한지의 멋을 느끼게 해주었다.

이로서 전세계에 내놓을 수 있는 가장 한국적인 뮤지컬로 '서편제'는 그 내용과 형식을 충분히 갖추었다. 마지막 장면에서 송화가 심청가를 열창하는 장면은 응어리진 가슴 속 한을 소리로 이끌어 내는 모습에서는 여느 뮤지컬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명장면으로 남아 있다.

이날 공연에서 송화 연기를 한 차지연의 연기는 그야말로 신들린 듯했으며, JK김동욱이 맡은 아버지 유봉은 김동욱 특유의 창법으로 아버지의 근엄하면서도 애끊는 마음을 절절이 전달했다. 동호 역할을 한 김태훈의 시원하게 내지르는 노랫소리는 락커의 반항과 피끓는 정열을 잘 드러내었다.

우리의 노래 우리의 뮤지컬 서편제가 전 세계인에게 많은 사랑을 받기를 기대해 본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동일 조건 변경 허락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지겹게 비가 오고 있다. 9월 중순에 접어들고 있는데, 장대비가 하루 종일 온다. “이건 세상이 미치니까 하늘도 미친 거야.” 누군가가 낮게 뇌까렸다. 비가 오는 낙원상가 한편에 뿌연 헤드라이트 불빛들이 스쳐간다. 불과 며칠 전까지 뜨겁게 내리쬐던 여름의 흔적도 장대비 속에 사라져간다. 이날 나는 채만식의 삼대를 영화 속에서 다시 만나는 데자뷰를 경험했다. 박동훈 감독의 영화 <계몽영화>는 일제 강점기와 산업화 시대, 현대를 이어온 3대의 이야기를 때로는 재미있게, 때로는 슬프게, 때로는 가슴 뭉클하게 우리를 끌어들였다.


오해도 있었다. 3대의 이야기를 영화에서 다룬다고 하는데, 과연 그 엄청난 한국의 근현대사를 영화에 담는 게 가능한거야? 괜히 장엄한 근대사의 물결 어쩌구저쩌구하는 계몽 퍼레이드는 아니겠지? 아니면, 좌파적 감상으로 주류 기득권을 향한 냉소와 비판의식에 쩔어 있는 영화가 아닐까? 




아, 그 모든 내 상상력은 거기까지다. 그러니 나는 영화감독도 못하고 글도 못 쓰는 거다. 영화는 내 생각을 비웃듯이 꽤 재미있으면서 진지하고, 진지하려다가 갑자기 뒤통수를 확 잡아채는 짠함을 던져주고, 슬퍼지려는 격정 앞에서 다시 관객의 자세를 다잡아준다. 정학송과 그의 아내가 세 번째 만나는 국제중앙다방의 데이트는 시종일관 비실비실 웃음을 던져주었다. 하지만, 둘이 나누는 이야기에는 우리 세대가 모를 아픔이 고스란히 묻어 있었다. 둘은 피난길의 시체 이야기들로 핏대를 올렸는데, 결혼을 합의하려는 자리에서 생뚱맞은 시체 이야기는 그 시대의 상처가 무엇이었으며, 그것이 그 세대에게 어떻게 각인되어 있는지 유쾌하게 드러내고 있다.


나아가 정학송의 아버지 정길만의 이야기는 어떤가. 정길만은 동양척식주식회사를 다니면서 농부들의 핍박하는 조선인 앞잡이로 살지만, 그래도 일말의 양심은 있는지 밤에 농부들에게 살해당하는 꿈을 꾸는가 하면, 술김에 일본 간부에게 일의 문제점을 이실직고 하고 마는 순진한 애아빠다. 그런 그에게 어릴적 동네에서 함께 자랐지만 독립운동을 하고 있는 친구가 찾아온다. 그러나 정길만은 그 친구를 고발하고 자신의 일가를 보전한다. 




1대나 2대 모두 그렇게 악독하고 모진 사람들은 아니었다. 모진 시대의 흐름에 부대끼며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각만 하고 있었던 앞 세대의 진실이었을까.


김훈은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세상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모든 먹이 속에는 낚시바늘이 들어 있다. 우리는 먹이를 무는 순간에 낚시 바늘을 동시에 물게 된다. 낚시를 발려내고 먹이만을 집어 먹을 수는 없다.”


그네들은 그런 시대를 살았다. 시대가 어려울수록 낚시 바늘은 더욱 강고하고 튼튼했다. 가난의 시대, 억압의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의 삶에는 강한 낚시 바늘이 그들의 삶을 지배하고 있던 것이다. 1대의 진실 친일과 2대의 진실 가부장제는 여전히 우리 사회에 남아 우리 세대, 다음 세대를 흔들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거기서 벗어나려 하면 할수록 낚시바늘은 더욱 우리를 옥죄어 오고 우리에게 상처를 줄 것이다. 그렇다고 가만히 앉아 죽을 수만은 없다. 악함, 부정, 슬픔, 아픔 등은 모두 없었으면 하는 것들이지만, 실상 우리 삶의 한 부분이다. 모두 선함, 긍정, 기쁨, 즐거움이라는 가치와 서로 의지하면서 존재하는 것들이다.






고통스럽고 비극적인 과거의 일들을 재조명해 보는 일은 그래서 필요하다. 감출 필요도 없고 부정할 필요도 없고 단죄는 더더욱 신중해야 한다. 역사의 희생자들이 있다면 보듬어 안고 가는 일만 남았다. 죽어가던 정학송은 내내 침대에 손이 묶여 있었다. 친일 부역자의 자식이며 가부장제의 화신인 그가 마지막 가는 길에는 침대에 꽁꽁 손이 묶여 있었다. 영화는 정학송의 손을 풀고 다정히 손을 잡아주길 원하고 있다. 용서는 깊은 이해에서 나올 수 있고, 그 혜택은 현재를 살고 있는 사람에게 돌아가기 때문이다.




더보기














저작자 표시 비영리 동일 조건 변경 허락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여기 한 남자가 모래 속에 갇혔다. 아니 그는 납치 감금됐다. 그리고 거기서 하는 일이란 하루 종일 모래를 퍼담아 올리는 강제노역이다. 그 옆에는 그 전부터 모래를 퍼 담는 일을 해온 여자가 있다. 여자는 물론 감시원이 아니다. 남자를 반겨하며 함께 일할 동료쯤으로 여기는 듯하다. 갇힌 것도 억울한데, 이런 여자의 반쪽 역할을 해야 한다니 남자는 기가 막힐 법하겠다. 그래서 남자는 호시탐탐 모래 밖으로 나가는 계략을 꾸민다. 계략으로 꾸민다는 게 고작 꽤병부리기 ,거짓말하기, 여자 괴롭히기가 다다. 유치하고 치졸하기가 그지없다. 아무튼 그는 안해 본 게 없다. 그러다가 딱 한 번 모래 구덩이를 빠져나가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얼마 못가 잡히고 말았다. 잡히는 꼴도 우습게 되고 말았다. 모래늪에 빠져 죽기 직전인 상황이 되어 추격자들에게 살려달라 구걸하면서 잡힌 것이다. 물론 그 다음 질질 끌려 다시 처음의 그 구덩이에 버려졌음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수순이었다.

원래 그가 이 마을에 찾아온 동기는 단순한 취미 생활에서 비롯됐다. 그는 모래에서 산다는 희귀한 벌레를 잡겠다고 귀한 휴가를 내어 바닷가 오지 마을을 찾아온 학교 선생에 불과하다. 그에게 작은 욕심이 있다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모래 속 벌레를 찾아내어 이름을 떨친다는 것. 그러나 그는 묘한 음모에 빠져 들어 하루종일 끈적한 모래 속에서 살아야 하는 지옥같은 일상에 갇히고 만 것이다.

모래의 여자 - 6점
아베 코보 지음, 김난주 옮김/민음사


반복되는 일상에 지루함을 느끼는 그에게 닥친 이 지루한 노동(모래 퍼담아 올리는 일)은 처음에는 살인 충동까지 불러올 정도로 말도 안되는 일이었다. 허나 시간이 지나면서 함께 일하는 여자와 정분이 나고 여자는 임신까지 한다. 도망가겠다는 생각을 버린 것은 아니라면서 이 여자와 라디오를 사겠다는 작은 꿈도 키운다. 결국 켜켜이 쌓이는 일상이 모래만큼 무겁게 삶을 덮쳐왔던 것이다. 일하지 않으면 모래에 파묻혀 버리는 모래구덩이처럼 우리의 일상도 조금만 게으름을 피우면 시간의 모래폭풍 속에 파묻혀 버릴 것이라는 경고일까.
아니면 본질을 잃어버린 노동의 무의미함에 대한 통렬한 경고일까. 흠, 그래 꿈보다 해몽이다.

그런데 말이다. 그렇게 많은 모래들은 어디로 갔을까? 가만 보니 남자가 갇힌 그 동네는 모두가 이 모래로 먹고 사는 동네인 듯한데, 그렇게 퍼담은 모래가 어디로 갔을까? 그러고 보니 남한 땅 곳곳에서도 모래를 퍼담아 나르는 일이 한참이구나. 물론 바닷가가 아니라 강속이라는 점이 다르지만 말이다. 모래는 모래인데 이 남자나 저 청기와 밑에서 골 때리고 있을 그 남자나 삽질하는 것은 어찌 그리 똑같나 모르겠다.



뉴스뱅크F 서비스가 종료되었습니다

사진은 본 책과 아무 관계가 없지만 굳이 관계를 찾는다면 힌트는 모래.



저작자 표시 비영리 동일 조건 변경 허락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어머니는 오랫동안 국세청 구내식당에서 일해 오셨다. 주로 밥과 국을 담당하셨다고 하니, 그 오랜 기간 동안 어머니가 차려준 밥을 먹어보지 않은 국세청 직원은 없을 것이다. 한때 국세청 구내식당이 직영으로 운영되었을 때만 해도 근무조건이나 환경은 꽤 좋은 편이었다. 그러다가 언제부턴가 위탁업체를 선정해 계약하고 있는 지금은 그저 그렇다는 게 어머니의 생각이다. 일이 고되고 힘들다 보니 사람이 자주 바뀌고, 하루 휴가를 내더라도 눈치 봐야 하며, 아파도 아픈 걸 이야기 힘들다. 그래도 어머니는 줄곧 국세청 구내식당에서 줄곧 밥 퍼주는 아줌마로 일하고 계시다. 근 20년 가까운 세월을 그곳에서 일하고 있지만 사정은 그다지 나아지지 않았다. 그래도 작은 월급이지만 아끼고 아끼셔서 가족들이 풍요롭게 살 수 있는 기반을 닦으셨고, 건축 현장 일을 하시던 아버지가 이제 은퇴하시고 집에만 머물러 있는 지금도 집안의 생계를 위해 새벽 일찍 일터로 나가신다.


대한민국의 어머니들은 고단하다. 젊은 날에는 여자라는 이유로 임금 차별을 당하더니 결혼하고 아이를 임신하면서 회사에서 주는 눈치 때문에 일을 그만두거나, 보육의 어려움 때문에 회사를 떠난다. 그러다가 어느 정도 아이들이 커서 다시 일자리를 찾다 보면 저임금 일자리만 넘쳐난다.


올해 최저임금위원회가 결정한 내년 최저임금은 시간당 4110원. 작년에 비해 2.7%만 인상됐다. 소비자 물가 상승을 감안하면 실질임금은 낮아졌다고 볼 수 있다. 재계는 당초 오히려 최저임금을 5.8% 인하할 것을 주장하면서 “최저임금의 지나친 인상은 영세·중소 사업장의 고용률 하락과 폐업으로 이어진다”고 주장했다. 과연 지금의 최저임금이 지나친 인상인지 의문이 들며, 최저임금의 인상이 고용률 하락과 폐업을 이어질지도 의문이다. 또 최저임금과 최저생계비간의 격차도 문제다. 4인가족의 최저생계비는 117만원인데, 최저생계비 기준이 1999년 도시근로자 가구 평균소득의 38.2%였으나, 2006년에는 31.1%까지 떨어졌다.또 근로자 가구의 중위 소득과 견줘도, 1999년에 44% 수준이었던 최저생계비가 2005년에는 36%로 낮아졌다. 빈곤저지선이라고 하는 최저 생계비가 이처럼 계속 후퇴하고 있는 것도 빈곤의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다는 반증이다. 과연 우리는 88만원의 최저임금으로, 4인가족의 최저생계비라는 117만원으로 한 달 동안 인간적인 삶을 살아가는 게 가능할까?


빈곤은 세습되고 있다. 최저임금을 받는 부모들은 빈곤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에 매달리게 되고, 이 과정에서 아이들은 방치되는 일이 잦아진다. 또 빈곤층이 살아야 하는 주거 환경 역시 열악해 온갖 범죄에 노출되고 있는 실정이다. 김길태가 범행을 저지른 곳도 재개발로 어수선한 치안의 사각지대였다. 가난은 온갖 범죄에 노출될 가능성을 높이고, 또 교육 여건과 질도 떨어뜨린다. 아이들은 쉽게 범죄의 대상이 되거나 가담하여 전과자 딱지를 붙인다. 그리고 저임금 노동으로 내몰리면서 헤어나기 힘든 빈곤의 늪으로 빠지는 악순환이 나타난다.



참세상 자료사진




폴리 토인비의 <거세된 희망>은 이처럼 악화되는 빈곤의 양극화와 빈곤의 악순환을 르포 작가의 체험으로 사실감 있게 보여 주었다. 누구에게 뒤지지 않는 넉넉한 중산층의 삶을 살면서 명성과 부를 가진 여성 칼럼니스트 폴리 토인비는 뜻하지 않는 제안을 받는다. 바로 저임금 노동자로 살아가는 체험을 하는 것. 그녀는 가난한 빈곤층 동네인 클램퍼파크의 허름한 아파트에서 사는 가난한 50대 여성 가장으로서 빌딩 청소원, 병원 환자 운반원, 빵공장 노동자, 급식업체 종업원, 텔레마케터, 보육교사, 간병인 등의 직업을 전전한다. 대부분의 직업이 여성이 종사하며 최저임금을 받는 일들이었다.


그녀는 더 이상 희망이 되지 못하는 노동의 절망을 이야기했다. 일을 해도 가난을 벗어날 수 없는 절망적 상황을 실제 체험에서 우러나는 글로 표현했고, 이를 통해 사회 제도와 시스템을 고발했다. 그러면서도 노동 현장에서 묵묵히 자기 일을 수행하고 있는 가난한 노동자들의 노고와 헌신에 경의를 표했다.


오늘날 가난을 광범위하게 정의하는 말이 있다면 바로 '제외'라는 말이리라. 평범한 즐거움에는 하나같이 '출입금지' 표지판이 대문짝만하게 걸려있다. 가난한 사람들을 향해 소비사회는 '출입금지'를 명한다. 이보다 더한 차별정책이 또 있으랴. '제외'는 도시 풍경을 살벌하게 만들었다. 이걸 사라, 저걸 사라며 소비자를 현혹하는 번쩍번쩍 빛나는 상점은 총 인구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사람들에게는 문을 단단히 걸어 잠갔다. 돈이 모자라 가장 싼 음식을 고르는 일은 결코 즐거운 쇼핑이 될 수 없었으며, 시간이 지날수록 괴로움만 더해갔다. - 383쪽


2004년 중앙생활보장위원회의 최저생계비 계측에서 ‘가족 단위 외식’은 빈곤층 삶의 질을 놓고 벌어진 첨예한 논쟁거리였다. 당시 위원회는 4인 가구 기준 최저생계비 가운데 식비 항목에 가족 단위 외식 비용은 반영하지 않았다. 아니 제외됐다. 가난은 이처럼 기본적인 가족 구성원이 누려야 할 작은 권리들을 무참히 제외시켜 버린다. 분명 대한민국의 가구당 외식 횟수가 석달 평균 2.93회를 기록했지만, 가난한 이들의 회식은 여기서 제외되고 만다.


아내와 함께 시장을 볼 때마다 평범한 두부판에 널려 있는 값싼 두부와 친환경 두부라는 글자를 큼직하게 찍어놓은 메이커(?) 두부 사이에서 항상 갈등한다. 돈이 모자라 가장 싼 음식을 고르는 일은 결코 즐거운 쇼핑이 될 수 없음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가난에 대해 민감할 수밖에 없다. 나는 지금 그 경계선에 서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엄습한다.


책 속으로


거세된 희망 상세보기


저작자 표시 비영리 동일 조건 변경 허락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길 위에 있는 모든 어른들에게

Posted by 구상나무 구상나무





유언 없는 지구의 차갑고 무자비한 회전.사정없는 어둠. 눈먼 개들처럼 달려가는 태양. 괴멸하는 시커먼 우주의 진공. 그리고 어딘가에는 쫓겨 다니며 숨어 있는 여우들처럼 몸을 떠는 두 짐승. 빌려온 시간과 빌려온 세계와 그것을 애달파하는 빌려온 눈. - 149쪽

남자의 손에 소년의 손이 잡혔다. 두툼한 외투와 헐어서 너덜너덜한 신발을 질질 끄는 사이로 바람은 발밑의 재를 쓸어 올리며 귀밑으로 달려들었다. 지구는 여전히 스스로 태양의 주위를 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상에서는 멈춘 지 오래다. 밤과 낮은 그 농도만 다를 뿐 똑같은 무채색이 지배하고 있다. 다시 기침이 시작됐다. 쉽게 멈추지 못할 때가 많다. 남자는 지도를 폈다. 남쪽으로, 남쪽으로 가는 길이다. 좀 더 따뜻하고 좀 더 안전한 곳. 그러나 그곳이 어디인지 그는 알지 못한다. 그의 뒤로는 수많은 길들이 닫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얼마나 많은 길이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지 알 수 없다. 그는 자신이 길 위에서 죽을 거라는 걸 알고 있다. 그럼에도 그가 고통스러운 길을 포기하지 않는 것은 그가 품고 있는 불, 바로 소년이 있기 때문이다.


소년은 안다. 자신이 태어나서 줄곧 보아온 회색빛 지구. 아빠는 한때 지구가 푸른빛을 띤 아름다운 행성이었다고 말해 주었다. 아무리 상상해 보아도 푸른빛의 지구를 상상할 수 없다.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는 것일까. 아빠는 남쪽으로 가는 거라고 말하지만 남쪽에 무엇이 있는지, 그곳에서는 이 여정이 끝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말해 주지 않았다. 길은 우리를 남쪽으로 안내하지만 길 위에는 항상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수시로 길을 버렸지만 다시 길 위에서 여정은 시작됐다.


세상의 문이 닫혔다. 남자와 소년은 닫힌 문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 문이 다시 열리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머물 수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들에게 준비된 삶은 길 위에 있었다. 둘은 서로에게 살아가야 할 이유가 되었다. 남자는 소년을 지키기 위해 살았고, 소년은 남자와 함께 있고 싶어서 살았다.


죽음 보다 못한 삶은 없다는 말을 한다. 그러나 <로드>에서 그려진 세계에서 삶은 끝없는 추락만이 기다리고 있는 깊은 낭떠러지처럼 보인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일이 모욕이며 고통의 삶. 잔인한 세상에 내 던져진 남자와 아이의 모습에서 이 세상 모든 아버지와 자식의 숙명을 보았다. 한 아이의 아빠가 된 내 모습이 보였다. 잔인한 세상에서 내 아이를 지키기에 내 몸은 너무 허약하고 내가 가진 것은 볼품없다. 어린 아이에게 남은 순수한 불, 그것은 세상에 대한 희망일 수도 있고, 인간에 대한 믿음일 수도 있을 것이다.


코맥 매카시는 우리가 어린 자녀들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고통스러운 성찰을 강요하고 있다. 세상은 여전히 잔인하고 무서운데, 그런 세상으로부터 자녀의 눈을 가리는 것도 불가능할뿐더러 그런 자녀들을 세상으로부터 보호하기에도 우리가 가진 건 총알 없는 빈총 밖에 없다. 몸은 점점 지쳐가고 숨 쉬는 것도 힘들어진다. 당신이 가고 있는 그 길, 그 삶은 안전하지 않지만 버릴 수도 없다. 그 길의 저 끝에 있을 행복이 있을까? 아니 우리는 끝을 향해 가는 게 아니라 지금을 위해 사는 것이다. 지금 곁에 있는 작은 희망들이 올망졸망 자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 지켜야 할 것들이 너무나 많다. 자녀의 가슴에 있는 불을 끄지 않는 것, 그것은 스스로 자녀의 희망이 되는 것이고, 괴물이 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절대 저를 떠나지 않는다고 하셨잖아요.
알아. 미안하다. 내 온 마음은 너한테 있어. 늘 그랬어. 너는 가장 좋은 사람이야. 늘 그랬지. 내가 여기 없어도 나한테 얘기할 수는 있어. 너는 나한테 얘기할 수 있고 나도 너하고 이야기를 할 거야. 두고 봐.
제가 들을 수 있나요?
그래. 들을 수 있지. 네가 상상하는 말처럼 만들어야 돼. 그럼 내 말을 듣게 될 거야. 연습을 해야 돼. 포기하지 마. 알았지?
알았어요.
- 315쪽



먼 훗날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날 때, 우리의 아이들에게 “온 마음은 너한테 있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그 아이들에게 희망이 될 수 있고 살아갈 용기가 될 수 있는 사람이 되자. 세상이 지옥 같다고 스스로 괴물이 되지는 말자.



로드(THE ROAD) 상세보기



저작자 표시 비영리 동일 조건 변경 허락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오랜만에 편지를 썼다. 받는 이는 장모님이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편지라는 걸 마지막으로 썼던 게 언제였는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 이번에 쓴 편지에는 장모님의 건강을 기원하면서 민서를 포함한 우리 가족의 소소한 일상을 재미있게 담아보았다. 아내의 말에 의하면 장모님은 편지를 받고 무척 기뻐하셨다고 한다. 편지를 다 보자마자 아내에게 전화를 해서 각별한 말씀을 전하셨다.

……………………

편지라는 것은 형식상 누군가에게 일방적으로 자기 이야기를 담아 보내는 공간이다. 하지만 글을 쓰는 시간부터 답장이 오는 시간까지 그 시간이 길다. 자연히 소통의 시간이 길어지고, 사색의 여백은 넓어지기 마련이다. 이런 특징으로 편지는 독특한 문학 장르로 분류된다. 다양한 서간문이 교과서에 등장하는 이유다.

안토니오 그람시의 '감옥에서 보낸 편지'가 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2'로 선정된 이유도 그런 맥락일 것이다. 그람시의 문학적인 감수성과 철학과 역사에 대한 견해, 인생에 대한 자기성찰 등이 때로는 명료하게, 때로는 낭만적으로, 때로는 인간적으로 나타나 있다.

많은 독재자들은 저항하는 사상가들을 감옥에 보냈다. 그 중에 많은 이들이 감옥에서 죽거나 감옥에서 얻은 병으로 죽었다. 그람시의 경우도 10여년의 옥살이에서 얻은 지병으로 인해 사망했다. 부당한 권력일수록 사상가들의 생각을 가두는 방법으로 가장 손쉬운 감옥을 선택했고, 그람시 역시 무솔리니의 파시스트에 투항하지 않는 대신 감옥을 선택해 죽음을 맞이했다.

파시즘의 행태는 졸렬했다. 그람시의 생각이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해 그를 가두는 것뿐만 아니라 그에게 팬과 종이를 허락하지 않았으며 그가 쓴 모든 편지를 검열했다. 그러기에 그는 짧은 편지 안에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마음을 담아야 했고, 그만큼 정제된 내용들이 편지에 담겼다. 시간이 지나면서 좀더 많은 팬과 종이가 허락되었다고 하지만 그의 사상과 철학을 전달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을 것이다.

그의 편지에서는 인간적인 고뇌도 담겨 있다. 어린 자식을 둔 아비의 심정이 절절히 담긴 편지에서는 그가 돌보지 못하는 자녀에 대한 안타까움이 묻어나 있다. 그러나 그는 또한 늙은 어머니를 둔 자식이었다. 그의 어머니가 투항하지 않는 그로 인해 괴로워하고 안타까워했지만 그는 사상가로서의 명예와 존엄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다며 어머니를 설득하려 했다.

이탈리아 파시즘과 고독하게 맞섰던 사상가 그람시의 인간적인 면을 볼 수 있는 '감옥에서 보낸 편지'는 '절판'되었다. 아무래도 읽기가 수월하지 않은 여러 단점들이 이 책에는 있따. 편지글이라는 게 다분히 사적인 내용이다 보니 좀 실망스러운 부분도 있고, 그람시가 쓴 역사철학적인 내용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는 당시의 이탈리아에 대한 역사적 지식도 필요하다 보니 책을 읽어 나가는 게 그렇게 수월하지는 않다. 물론 다양한 각주들이 친절하게 붙어 있지만 각주와 편지를 번갈아 읽어내려가는 번거로움은 술술 읽어내려가는 독서의 즐거움을 방해한다. 마치 냉온탕을 번갈아 오가는 느낌인데, 이런 독서에 길들여지지 않은 독자라면 쉽지 않은 읽기가 될 것이다. 그렇다고 각주를 버리고 읽어나가자니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너무 많다. 아마도 이런 이유 때문에 이 책이 더이상 나오지 않는 것이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이제 쉽게 접할 수 없는 책이 되었다. 그람시라는 인물이 현대 사상사에서 차지하고 있는 비중을 생각할 때 안타까운 일이다. 물론 지금 세계에 맑스마저도 석기시대 이야기처럼 치부되고 있으니 이상할 것도 없겠다. 허나 적어도 파시스트에 맞서 감옥에서 생을 마감해야 했던 사상가의 인간적인 면과 문학적인 감수성이 담겨져 있는 책 한권이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어 안타깝다.


……………………

길고 긴 소통의 시간과 사색의 여백이 큰 편지가 묘한 매력으로 다가오고 있다. 이제는 낯설고 오래된 통신수단이 되어 버린 편지가 어떤 의미가 있을까 모르겠지만, 당분간 지인들에게 편지를 써 보는 건 어떨까 생각해 보고 있다.





감옥에서 보낸 편지(세계문학전집 42) 상세보기


책속으로


저작자 표시 비영리 동일 조건 변경 허락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블로그 이미지

구상나무

네가 보는 책들,한권한권이 모두 영혼을 가지고 있어.그것을 쓴 사람의 영혼과 그것을 읽고 살면서 꿈꾸었던 이들의 영혼 말이야.한권의 책이 새주인의 손에 들어갈 때마다,누군가가 책의 페이지들로 시선을 미끄러뜨릴때마다,그 영혼은 자라고 강인해진단다.-바람의 그림자/

카테고리

분류 전체보기 (434)
구상나무 아래에서 (251)
생활 여행자 (141)
사막에 뜨는 별 (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