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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나이에 군대를 간다는 것에 대해 잘 안다. 나보다 한참 어린 조교들이 내리는 지시에 따라 이리저리 굴러야 하는 일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어매이징(Amazing)한 일일 것이다. 물론 군생활이라는 것이 그런 것이라는 걸 배워가는 게 훈련소 생활이니, 현빈은, 아니 김태평씨는 사회지도층이나 연기자가 아닌 평범한 훈련병으로서 국민의 의무를 충실히 수행하고 있을 것이다. 물론 그의 군기 잡힌 모습은 분명 연기가 아닐 것이다. 해병대 군기가 보통 군기인가!


군대를 다녀온 남성들 대부분은 1년 이상 똑같은 악몽에 시달린다. 바로 군에 재입대하는 꿈인데, 이런 꿈도 여러 가지 버전이 있다. 비상사태가 발생해서 다시 재입대하는 경우가 가장 흔하고, 군행정 시스템이 잘못되어 아직 군에 입대하지 않은 것으로 처리되었으므로 시스템이 복원되기까지는 일단 재입대하라는 황당무계한 꿈도 꾼다. 때로는 꿈속에서 자다가 눈을 떴는데, 아주 익숙한 내무반이더라는 꿈도 지겹게 재방영된다. 그럴 때마다 등에서는 식은땀을 주룩주룩 흘리며 꿈에서 깨어난다. 꿈이 얼마나 생생했는지, 불을 켜서 일어난 방이 내무반이 아님을 확인해야 간신히 다시 잠들 수 있을 정도다.

정신의학자들은 트라우마 또는 외상 후 스트레스와 비슷한 것이라고 한다. 군대가 주는 정신적 충격이 크다는 말이다. 실제로 많은 남성들이 심각한 정신적 충격으로 병원을 다니는 것도 사실이다. 다양한 원인이 있겠지만, 여전히 자행되고 있는 군대 내 구타 및 가혹행위도 그 중요한 원인 중 하나다.

해병대의 군기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김태평씨가 다니는 해병대의 군기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쎄다”라고 이야기한다. 도대체 해병대 군기의 정체는 무엇일까? 과연 그 군기가 우리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데 한몫을 해 줄까?

지난 3월 24일 국가인권위원회는 해병대에 대한 직권조사 내용을 발표했다. 그것은 참담하게도 군기가 “쎄다”는 해병대 내에서의 구타∙가혹행위에 대한 내용이었다.(관련 보도자료)

사실 이번 직권조사는 국가인권위원회가 부대 내 구타 및 가혹행위에 대해 “우리 사회의 우려와 달리 군 내부적으로 상당한 노력과 성과가 나타나고 있”다고 밝혔음에도(2006년 2월 군대내 인권상황 실태조사 및 개선방안 연구), 유독 해병대에서만 이런 현상이 잘 사라지지 않고 있다고 판단해 실시했다고 밝혔다.

조사결과에 따르면, 2010년 해병대 의무대 환자발생보고서에 따르면 고막천공 30여건, 비골∙늑골, 대퇴부 파열 등 타박상 기록이 250여건에 이르는데 발병 경위 등은 부실하게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또 대부분의 가해자가 후임병 시절 유사한 구타∙가혹행위를 당했고 이를 참고 견디는 것을 ‘해병대 전통’으로 알고 있다고 진술했다. 게다가 폭행사건을 상급자에게 발설할 경우 기수열외 등 2차 피해를 주는 폐쇄적 조직 문화가 팽배했다(기수열외: 해병대 조직에서 배제하는 것을 의미하며, 구체적 방식은 가해자인 선임이 피해자 보다 후임기수에게 피해자에 대해 반말과 폭행을 가하게 하여 인격적 수치심을 주는 행위). 게다가 지휘∙감독자들은 부대의 명예훼손 및 불이익을 우려해 ‘구타에 대해 엄정히 사법처리하라’는 관련 원칙을 준수하지 않고, 경미하게 처리하려는 경향이 강했다.

“이게 최선입니까? 확실해요?”

앞에서 전한 꿈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 보자. 대개의 군대 꿈은 결코 행복하지 않다. 20대의 꽃같은 젊은 날을 같은 또래의 젊은이들끼리 보내는 공간이 왜 이렇게 비극적인 기억으로 남아야 하는 걸까. 그것은 군대라는 특수한 공간이 가지는 한계도 있지만, 비합리적인 조직 문화와 고리타분한 관행 때문이다.

군인복무규율 규정에 따르면 ‘군인은 어떠한 경우에도 사적 제재를 할 수 없도록 금지’하고 있다. 이것은 헌법에 보장된 신체의 안전과 자유를 침해하는 행위이다. 헌법을 지키고 수호해야 할 군대가 헌법의 가치를 무시하는 행태를 간과한다면, 그것은 곧 국민의 생명과 재산에 대한 위협이 될 수밖에 없다.

김태평씨, 아니 현빈의 무사 제대를 기원한다. 그가 말한 유행어로 이 글을 정리한다.

“여긴 당신네들이 생각하는 그런 훈련소가 아니야. 뛰어난 교관과 조교들이 훈련생들 한명 한명을 열과 성의를 다해 인권적 가치로서 대하는 그런 곳이야. 한마디로 목숨을 바쳐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국토를 지킬 수 있는 어메이징한 군인을 만드는 곳이지.”



별별이야기에 보낸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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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금을 차별하자

Posted by 구상나무 구상나무


상황1.
대기업 회장 P씨는 비행기 안에서 술에 취해 난동을 부린 혐의로 기소됐다. 1심 재판에서는 “P씨 탓에 항공기 출발이 1시간 지연돼 다른 승객들이 겪은 불편을 감안하면 벌금형은 너무 가볍다”며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2심에서는 검찰 구형대로 벌금 1000만원을 선고하며 재판은 마무리됐다.


상황2.
서울 청계천 근처에서 옷장사를 하는 K씨는 경기 악화로 가계수표 2500만원을 막지 못해 부도를 냈다. 그는 벌금 300만원으로 약식 기소됐는데, 입원 중인 남편 치료비도 모자라 쩔쩔매던 김씨는 결국 “벌금을 낼 돈이 없다”며 법원에 정식재판을 청구했다. 판사 앞에 선 김씨는 “어려운 형편을 좀 봐달라. 벌금형보다 차라리 징역형을 선고받는 게 낫겠다.”라고 하소연하였다.(2011년 2월 10일자 세계일보에서 발췌)


상황3.
지난해 8월, 한 스피드광이 고급 승용차를 몰고 고속도로에서 시속 300km로 광란의 질주를 벌이다가 경찰의 단속에 걸렸다. 그는 경찰 조사를 받고 곧바로 풀려났지만, 약 65만파운드(당시 환율로 약 12억원) 상당의 벌금을 내게 될 것이라고 외신은 전했다. 역대 사상 최대의 벌금으로 기록될 것으로 보인다.


상황1과 2는 우리나라에서 쉽게 벌어지는 일이다. 물론 일반인에게 벌금 1000만원이 결코 적은 돈이 아니다. 그러나 대기업 회장인 P씨의 경우 습관적으로 정치인을 대상으로 1만 달러를 1만원이라고 부를 정도의 배포와 재력이 있던 사람이다. 그의 셈법대로라면 1만 원짜리 벌금을 낸 셈이다. 그렇다면 그에게 징역형을 선고하는 것은 어떨까? 이 역시 인권의 원칙에 맞지 않다.


하지만 벌금 300만 원을 낼 수가 없는 K씨의 경우는 어떠한가. 사실상 가정 경제가 부도를 맞은 상황에서 교도소행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그에게 우리 법은 어떤 대안을 줄 수 있을까? 실제로 우리나라 경제 상황이 악화되면서 벌금형보다 징역형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크게 늘었다고 한다. 현재 우리나라의 법은 벌금을 내지 못할 경우 노역장 유치 규정을 두고 있는데, 사실상 경제적 약자에게 벌금의 자유형화(징역형화)를 조장하는 불합리한 결과를 초래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 상황3은 벌금형의 차별화를 통해 부유층에게 막대한 벌금형을 준 사례로 일명 일수벌금제라고도 한다. 1920년대 스웨덴에서 처음 도입돼 일부 유럽 국가에서 시행 중인 이 제도는 하루 소득이 100만원인 사람과 10만원인 사람이 동일한 범죄를 저질렀을 때 벌금을 각각 10만원, 1만 원 등으로 차등 부과하는 제도를 말한다.


국가인권위원회는 “형법 일부 개정 법률안 의견 표명”을 통해 이런 일수벌금제도에 대한 도입을 고려할 것을 권고했다. 법무부도 이전부터 탄력적 양형기준을 마련해 생계형 법규 위반자에 대한 구제조치를 마련하고 있다. 그러나 인권위는 구체적으로 벌금의 자유형화라는 조항의 실질적인 폐지가 바람직하다고 밝히고 있다.


이밖에도 국가인권위원회는 사형제도 폐지, 보호수용제 도입 반대, 범죄의 경중을 고려한 선거권 제한, 구류형 폐지, 외국에서의 수형기간을 형집행 기간에 포함, 정신장애자의 범위 명확화 등을 이번 의견 표명에 담았다. 모두 우리 사회에서 오랫동안 인권의 가치에서 논의되어 온 과제들이다.


형법은 시민의 자유와 권리를 직접적으로 제한하는 많은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런 만큼 인권의 관점에서 보다 세심한 접근이 필요하다. 이번 개정안은 1953년 ‘형법’이 제정된 이후 60 여년만의 총칙 부분에 대한 전부 개정이라고 한다. 그동안 축적된 판례와 발전된 형법이론 및 형법의 세계화 경향을 반영하는 등 긍정적인 면이 크다. 하지만 인권의 측면에서 보다 면밀한 접근이 필요하다. 이번 형법 개정안을 통해 우리 사회의 인권이 보다 진일보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국가인권위원회 별별이야기에 보낸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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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live)만한 집, 살(buy)만한 집

Posted by 구상나무 구상나무

최근 아이가 태어나고 전세 계약 만료일도 다가와 이사를 하기로 결정했다. 막상 집을 구하자니, 턱없이 높아진 전세금으로 집을 구하는 것이 어려웠고 그마저도 물량이 없어 부동산 시장이 얼어 있다는 말이 실감났다. 결국 처음 예상했던 금액보다 더 많은 금액에 가까스로 전세를 구할 수 있었다. 물론 초과된 금액은 빚을 지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재미있는 계산을 해 보았다. 수도권에서 전세 2억짜리 아파트에서 산다고 했을 때, 하루 숙박비를 계산하면 얼마가 나올까? 은행 정기예금 금리를 연 4%로 생각하고, 2억원을 은행에 넣어두면 받을 수 있는 이자 소득은 하루 18,630원 정도가 된다. 물론 이자에 대한 세금 15% 제외한 금액이다. 따라서 2억 원의 전셋집에서 살 경우 2만 원 정도를 매일 숙박비로 지불하는 셈이다. 물론 여타 생활비용(가스, 전기, 수도 등)을 제외하고 말이다.

우리나라 가구당 평균 자산은 약 2억7천만 원. 그중 부동산은 2억6백만 원으로 약 75.8%정도다. 게다가 가게 부채가 약 4천2백만 원인데, ‘빚이 없다면 부자’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집을 사거나 전세로 들어가는 과정에서 많은 가구가 빚을 안고 살고 있다. 우리나라 4인 가족의 한달 평균 수입이 284만원으로 1년 연봉으로 3400만원 정도다. 1년 동안 번 돈 모두를 한푼도 쓰지 않아도 부채를 갚지 못한다. 가계 부채 중 부동산이 차지하고 있는 비중이 사상 최대치를 경신하고 있는 요즘, 뛰는 물가 위에서 날고 있는 전세값의 고공 행진이 사람들 가슴을 억누르고 있다. 과연 우리의 주거권은 안녕할까?
 

지금의 전세값 고공 행진의 원인에 대해 신규 주택 공급의 부족과 신혼부부 등 신규 가계의 자연 증가 등이 맞물려 벌어지는 현상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많은 가계가 불안한 주택 가격의 변동으로 집을 구입하기보다 원금 보존이 가능한 전세 수요로 몰리고 있는 점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더욱 설득력 있다. 집값 상승의 요인이 없지는 않더라도 대세는 여전히 관망에 방점을 두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같은 흐름은 집을 주거의 공간, 문화의 공간이 아닌 재산적 가치로만 보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다. 물론 현대 사회에서 집은 단순한 주거 공간이 아닌 경제적 가치를 분명히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우리나라는 더욱 특수한 부동산 역사를 가지고 있어, 집의 경제적 가치에 대중이 몰입하고 있는 경향이 매우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전세 가격의 고공 행진, 부동산 가격의 불안 혹은 급상승 등은 주거의 본래적 의미를 퇴색시키고 말았다.
 

일반적으로 주거권이라고 하면 가장 가난한 사람들만의 것으로 인식되기 쉽다. 예를 들어 철거민이나 홈리스, 저소득 임차가구 등의 권리는 당연히 가장 우선시 되어야 하는 과제임에는 분명하다. 하지만, 일반 중산층이나 일부 고소득 임차가구 등의 주거권도 보호되어야 할 기본권이다.
 

여전히 강제 철거가 아무렇지도 않게 자행되고 있는 우리나라 현실에 비추어 볼 때 분명 중산층의 주거권 문제는 인권적인 측면에서 그다지 시급한 문제로 취급되지 않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보다 광범위한 접근을 통해 주거권의 문제를 인권의 문제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다양한 인권 활동이 필요하다.
 

1996년에 제2차 세계 주거 회의(Habitat Ⅱ)에서 채택된 의제는 주거권과 관련된 가장 포괄적이고 중요한 국제 문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동안의 주거권과 관련된 국제적인 합의들을 종합하고, 또 주거권의 실현과 관련한 주거권의 구체적인 여러 측면들을 검토하고, 실천의 지침을 공동으로 작성한 것이다. 여기에서는 국가가 적어도 다음과 같은 정책을 실시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적절한 주거를 누릴 수 없는 사람들을 포함하여, 주택을 거주 가능하고, 경제적으로 부담가능하면서 이용 가능하도록 하기 위해 다른 여러 가지 중에서 특히 다음과 같은 정책을 채택하여야 한다.

① 적절한 규제 장치와 시장 경제에 기반한 유인책을 통해 경제적으로 부담할 수 있는 주택의 공급을 늘인다.

② 가난한 사람에 대한 보조금과 임대료 및 다른 형태의 주택자금 지원을 통해 부담 능력을 향상시킨다.

③ 지역 사회에 기반한 협동 주택과 비영리 임대주택, 자가 주택 사업을 지원한다.

④ 집 없는 사람들과 그밖의 취약한 집단에 대한 지원을 확대한다.

⑤ 주택과 지역 사회 개발을 위해 재정과 공공 및 민간 부문의 다양한 자원들을 혁신적으로 활용한다.

⑥ 경제적으로 부담할 수 있는 임대주택과 자가 주택에 대한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시장 경제에 기반을 둔 각종 유인책을 실시하여 민간부문을 활성화시킨다.

⑦ 일자리, 재화와 서비스, 편의시설을 쉽게 구하고 이용할 수 있는 지속가능한 공간 개발 형태와 교통체계를 장려한다.

⑧ 집 없는 사람과 부적절한 주택의 정도를 파악하는 것을 비롯하여 주거 조건에 대한 평가와 효과적인 감시를 하고, 취약한 인구 집단에 대한 상담을 통해서 각종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적절한 주택 정책을 채택하고 공식화하며 효과적인 계획과 전략을 수행하여야 한다.


 

위의 정책적 권고들은 주거권 보장을 위한 주요 원칙으로 모든 계층에게 적용될 수 있는 내용들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에 대한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경제적인 부분도 있지만 문화적인 부분도 분명 존재한다. 주거가 가지는 가치를 재평가하는 데에 있어 국가가 해야 할 역할은 참으로 막중하다. 우리 사회가 주거권의 문제를 경제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인권적인 측면에서 접근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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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아동의 권리를 찾아서

Posted by 구상나무 구상나무


보통 아기를 데리고 차량으로 이동할 때 반드시 장착해야 하는 것이 카시트이다. 유럽의 경우 카시트 장착률이 95%를 넘지만 우리나라는 아직 40%대에 머물고 있다고 한다. 카시트가 없을 경우 보통 엄마가 아이를 안고 타게 된다. 그렇지만 이것이 아동에게 더 위험하다. 아이들의 경우 관성을 이기는 힘이 약하기 때문에 브레이크를 세게 밟으면 엄마는 본능적으로 아이를 끌어안게 되고 아이의 목은 순간적으로 꺾이면서 아이의 요추와 경추가 다치는 일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급박한 상황에서 아이를 보호하려는 엄마의 자세가 오히려 아이를 다치게 하는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카시트 장착을 의무화하는 제도가 마련된 것이다.


얼마전 국가인권위원회의 ‘이주아동 교육권 보장 종합 대책 마련 권고’를 보면서 카시트가 떠올랐다. 위원회 권고는 이주아동의 부모가 처한 입장과 처지에 의해 아동의 교육권이 불가피하게 침해받는 상황을 개선하고, 유엔아동권리 협약 등에서 보장하고 있는 아동의 교육권을 국가와 사회가 책임감을 가지고 지켜주도록 제도 개선을 하라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위원회는 이주아동들이 학교 내에서 피부색, 종교, 발음 등으로 차별이나 놀림을 받지 않도록 다양한 제도적인 장치가 마련되어야 한다는 지적과 함께, 무엇보다 그 부모가 처한 상황, 즉 부모가 단속이나 강제 퇴거 등으로 재학 중 학기를 끝내지 못하고 쫓겨나는 상황에 대해서도 지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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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사회적 약자이며 소수자인 이주아동에 대한 지원 체계를 갖출 것을 주문하였다. 우선 65%에 가까운 이주이동들이 한국어 능력 부족으로 입학을 거부당하고 있는 현실에 비추어 공공시스템에 의한 한국어 교육 강화와, 입학절차나 학교생활에 대한 모국어 정보 제공 조치를 강화하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밝힌 것이다. 또 실태조사에서도 나타났듯이 여전히 15%의 이주아동이 학교측의 일방적인 거부로 입학을 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므로 이주학생에 대한 학교의 전입학 거부행위를 못하도록 관련 법 조항을 정비하고 철저한 행정지도와 관리감독을 요청했다.

 

일부 이주민들이 우리나라의 실정법을 어기면서 체류하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의 아동들까지 아동이 누려야 할 기본적인 교육권을 보장받지 못하는 사회가 인권의 가치를 제대로 실현시킬 수 있는 사회인지 자문해 볼 필요가 있다. 아이들을 교통사고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카시트 보급률을 높이고자 사회적 제도를 마련하는 것과 같이, 이주아동의 교육권을 보장하기 위해 우리 사회가 보여야 할 최소한의 진심과 노력이 제도적인 움직임으로 구체화되어야 할 것이다.




국가인권위원회 블로그 별별이야기에 보낸 글. 조금 많이 아쉬운 글임. 이주아동의 권리를 지켜주기 위한 사회적인 관심을 위해 카시트를 끌어들였는데, 뭔가 좀 부족하다는 느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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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 몰라?

분류없음 | 2011/03/01 20:32
Posted by 구상나무 구상나무


요새 술자리에서는 SNS 이야기가 빠짐없이 나온다. 얼마 전의 술자리도 그랬다. 이날도 대표적인 SNS 서비스 ‘페이스북’에 대한 이야기가 술안주로 올라왔다.


“페이스북이 무서운 건 ‘알 수도 있는 사람’에 나오는 인물의 면면이야.”

“그렇지. 몇 년 전에 소개팅으로 만나서 두세 번 만났던 사람을 ‘알 수도 있는 사람’에서 보았을 때는 멍해지더라.”

“나는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을 소개하더라. 아무것도 모르고 클릭했다가 친구 요청이라는 걸 하게 되어서 얼마나 기겁을 했는지 몰라.”

“×표시를 누르면 또 다른 사람을 보여주잖아. 이건 꼭 페이스북이 ‘이 사람 모르니?’라고 자꾸 물어보는 것 같아. × 누르면 또 다른 사람을 보여주면서 ‘그럼 이 사람은?’ ‘이 사람 몰라?’ ‘이 사람은 알텐데?’……‘잘 기억해 봐. 당신이 아는 사람이 틀림없어!’”


이처럼 페이스북 등의 SNS 서비스의 강점은 내가 찾아가지 않아도 시스템이 알아서 정보를 찾아서 배달해 준다는 점이다. 블로그나 웹카페 등은 사용자가 필요하다면 직접 찾아가서 정보를 확인해야 하지만, SNS는 사용자 간의 정보들이 수시로 왕래하면서 점차 해당 사용자의 취향과 성향에 맞춤형 서비스로 발전하는 것이다. 이러한 점이 SNS의 성장 동력이기도 하지만 개인 프라이버시 문제 등은 심각한 사회 문제를 일으키기도 한다. 최근 트위터에 등장한 폭언남 ‘아톰’의 경우도 트위터의 대문에 적은 신상과 제시된 정보를 토대로 여성 회원에게 접근한 것으로 보인다. SNS 서비스를 이용한 성희롱 등의 성범죄를 비롯해 우후죽순처럼 증가하는 소셜 커머스를 이용한 사기 피해와 금융 피싱 등 신종 범죄의 등장은 이 서비스가 광범위하게 사용되면서 한편으로 현신 세계와 거의 차이가 없이 활용되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개인정보의 유출과 사생활 침해는 사실상 정부와 기업의 합작품이라는 주장도 있다. 검찰은 사소한 사안에 대해서도 수년치 이메일을 법원의 영장 없이도 들여다 볼 수 있고, 경찰 등 수사기관이 인터넷 포털 서비스에 개인의 신상 정보를 요구하면 포털 사이트는 당사자에게 정보 제공 요청 확인도 받지 않은 채 신상 정보를 쉽게 제공한다. 정보의 자기 결정권이 정부 기관, 특히 수사 기관에 의해 무시되는 상황은 자연스럽게 개인정보에 대한 가치를 평가절하하게 된다.


기업은 기업대로 고객 관리와 영업 마케팅 차원에서 개인 정보를 무차별적으로 수집하고 있다. 기업 사이트의 고객코너에서 글 하나 올리더라도 사이트에 가입을 해야 하고 그 과정에서 주민등록번호 등 내밀한 개인정보들을 적어야 하는 게 우리 인터넷 현실이다. 또한 회원 가입을 하는 과정에서 동의한 약관에서는 내 개인정보가 어떤 상업적 목적으로 쓰이고, 누구에게 양도되는지에 대해 정확히 알 수 없도록 애매한 내용으로 정리하고 있다.


이런 문제점 때문에 최근 국회와 정부는 ‘개인정보보호법안’을 발위한 상태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지난 1월 19일 개인정보 보호 기구와 관련한 의견을 냈다. (관련 보도자료)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 인터넷 세상의 흐름에서 인권 보호는 이제야 눈을 뜨려고 한다. 물론 법안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도 넘어야 할 산이 많고, 법안이 만들어지고 개인정보보호기구가 발족하더라도 산적한 사안을 어떻게 풀어갈지는 산넘어 산이다.


하루 빨리 관련 법안과 기구가 정상적인 활동을 할 수 있는 길이 열리길 바란다.




위 글은 국가인권위원회 블로그 별별이야기에 보낸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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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TX여승무원 승소 소식을 접하고서...


처음에 그들은 그야말로 빛나는 존재였다. 지상의 스튜어디스라는 찬사도 들었다. 입사도 쉽지 않았다. 적게는 13대 1, 많게는 135대 1의 경쟁을 뚫어야 했다. 시속 300km의 거침없는 속도처럼 내달릴 인생을 꿈꾸었을 것이다. KTX 홍보 광고에도 단연 돋보였다. 그들을 선발할 때 철도공사 임원이 배석하여 키와 용모, 나이 등을 따져가면서 사람들을 선발했다. 선발된 이후에도 교육과 업무 지시, 감독 및 평가, 대외 홍보활동에까지 많은 부분에서 실질적으로 철도공사의 직원과 다름없이 활동했다. 그들은 단 한 번도 자신이 철도공사 직원임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런데 외주와 도급을 거쳐 그들은 비정규 계약직으로 신분이 바뀌었다. 그들은 거리로 나섰고 언론은 키 크고 예쁜 젊은 여성들의 거리 집회에 반짝 관심을 가져주었다. 그리고 4년이 흘렀다. 지난 27일 서울중앙지법은 이들이 사실상 한국철도공사(KTX)의 실질적인 정규직 근로자이며 철도공사는 이들에게 밀린 임금을 지급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그들은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 관련 기사 : “해고된 KTX 승무원들, 철도공사 근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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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시간을 돌려 2006년으로 가보자. 국가인권위원회는 2006년 2월에 KTX여승무원 관련 진정 2건을 받고 본격적인 조사에 착수했다. 여성에 대한 고용차별이라는, 아직은 우리 사회에 생소한 사안에 대한 조사는 쉽지 않았다. 처음 사건을 배당받았던 조사관은 월간 <인권>(2006년 11월호)에 이렇게 밝혔다.


“처음 사건을 배당받고 든 암담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가장 본질적인 비정규직 문제임에 분명하지만 법망에 걸리지 않는 간접고용 사건인 것이다. 직접고용 비정규직이던 새마을호 여승무원들은 성차별을 주장해 정규직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KTX 여승무원들은 그토록 열심히 싸웠지만 끝이 보이지 않는다.”                             >> 관련 기사 가기


지난한 과정 끝에 국가인권위원회는 2006년 9월 KTX 여승무원에 대해 성별을 이유로 하는 고용 차별이라며 한국철도공사에 시정을 권고했다. 그러나 권고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 관련 보도자료 가기


국가인권위원회가 지적한 차별의 내용을 보면 우리 사회에서 여성에 대한 고용 차별이 어떤 편견에서 비롯됐는지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는 4년이 지난 현실에서도 다르지 않게 나타나고 있다.


먼저, 채용 과정에서의 성차별 문제다. KTX여승무원 채용 과정에서 한국철도공사는 ‘서비스 업무에 적합한 용모의 여성’을 채용 조건으로 내세웠고, 신입직원의 경우 21세부터 25세까지로 나이를 제한하였으며, 162cm 이상을 신장 기준으로 제시했다. 그러나 철도공사는 업무에 있어 신장과 나이의 제한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어떠한 논리나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다. 여기에는 남성 중심 사회의 차별적이고 일방적인 시선만이 존재했다. 게다가 이는 남녀고용평등법 제7조 제1항 및 제2항의 규정(용모, 키 체중 등의 신체적 조건을 채용기준으로 제시하거나 요구하는 것을 금지)을 위반한 것이다.


다음은 ‘성차별에 근거한 분리 채용’의 내용이다. KTX승무원의 역할은 방송 시스템 취급, 승강문 취급 및 이례적인 사항 발생 시 조치 등 본질적인 업무 대부분을 수행하는데, 이 중 고객서비스 업무만을 단순 반복적인 업무로 보아 여성 승무원에게 전담시킴으로서 저임금과 고용 차별을 정당화했다.


이 문제는 여성의 일을 평가절하 하는 성차별적 편견에서 비롯됐다. 현대 사회는 여성을 사회적 노동 시장에 끌어들이면서도 여성의 노동을 공짜로 제공되어야 하는 어떤 것으로 보았다. 누군가를 보살피고(고객서비스, 돌봄, 간병 등), 청소하고, 요리하는 일에 대해 저평가하여 저임금을 지급하고, 외주나 도급화 등을 통해 차별하는 사례는 지금도 흔하게 볼 수 있다. KTX여승무원 사례는 승무원이 할 수 있는 다양한 업무를 모두 배제시키고 그중 돌봄의 영역(고객서비스)으로 축소하여 저임금 계약직으로 비정규직화 해 차별한 것이다.


지금이라도 철도공사가 법원의 판결을 받아들이고 이들에 대한 차별적 고용을 시정하는 한편, 오랜 세월 우리 사회의 차별에 가슴 아파했을 KTX여승무원들을 보듬어 안아야 할 것이다.





위 글은 국가인권위원회 블로그 "별별이야기"에 보낸 글을 재수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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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금과 천국의 아이들

Posted by 구상나무 구상나무



이슬람의 문제가 아니다

최근 이란에 대한 경제 제재에 우리나라가 동참하면서 이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이 과정에서 대부분의 언론들은 이란과의 경제 교류 분야에서 있을 우리 기업의 피해를 걱정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이란 사람들의 삶과 의식에 대한 접근은 찾아보기 어렵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이란을 과격한 종교의 나라로 오해하고 있는 이면에는 언론의 책임이 크다.


이전부터 서방 세계와 끊임없이 마찰을 빚어 온 이란은 서방 언론 매체를 통해 과격한 종교 국가의 이미지가 강하게 자리 잡고 있다. 물론 지난해 반정부시위의 강경 진압 과정에서 보여준 이란 정부의 대응은 지나치다는 지적은 타당하다. 그러나 여기에 ‘이슬람’이라는 편견을 씌우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2003년 노벨평화상을 받은 이란의 여성 변호사 시린 에바디는 2009년 만해평화상 수상을 위해 한국을 방문했을 때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물론 유감스러운 사건이 있지만 그게 이슬람의 전부는 아닙니다. 같은 이슬람 정부라고 해도 여성 총리가 나온 나라가 있을 정도로 이슬람도 다양한 해석을 가지고 있으며 충분히 인권과 조화를 이루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어요. 다만 비민주적인 정부들이 인권을 억압하는 정책에 ‘이슬람’이란 말을 남용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립스틱 지하드, 하이힐 혁명

지난해 있었던 이란의 반정부 시위는 일명 ‘립스틱 지하드(성전)’, ‘하이힐 혁명’으로도 불린다. 단어에서 알 수 있듯이 여성들의 활약이 눈부셨다는 것이다. 이란의 젊은 여성들은 6~7월 반정부 시위 과정에서 개혁파의 상징색인 녹색 스카프나 깃발을 든 채 거리를 누비고 다녔다. 여성의 정치 사회 운동 기반과 민주주의 의식의 저변 확대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모습이다.


이전부터 이란은 다른 나라에 비해 자유롭고 실용주의적인 부분이 상대적으로 많았다. 공식적인 옷차림 규제는 매우 엄격하지만 많은 젊은이들이 허용치를 넘나드는 즐거움을 누리고 있다. 10대들은 속이 비치는 머리스카프로 흉내만 내면서 엉덩이도 덮이지 않는 짧은 겉옷을 입고 다닐 정도다.


또 이란의 인터넷과 휴대폰 보급, 그리고 그 여파도 이번 시위에 큰 역할을 했다. 온라인 상에서 빠르게 전파되는 시위 소식은 그대로 전 세계에 생중계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이란 내에서 일어나고 있는 유혈 사태를 곧바로 감지할 수 있어서 세계 여론을 끌어들이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


유혈 진압의 상처와 그 치유

결과적으로 지난해 대통령 선거는 이란 역사에서 한 획을 긋는 중대한 사건이 되고 말았다. 선거 부정에 대한 여러 의혹들이 제기되었고, 그 의혹을 표출하는 이란 민심에 대한 무자비한 유혈진압이 일어났다. 국제 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는 2010년 보고서에서 “지난 1년간 이란 정부의 국민통제는 더욱 강화됐고 혁명수비대와 ‘바시지’ 민병대, 경찰의 민간인 탄압과 불법체포, 감금, 폭행이 상시화 됐다”고 발표했다. 이에 앞서 국제엠네스티는 1년간 체포된 이란 반정부시위대가 5,000명이 넘는다는 보고서를 냈다.


또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이란 교도관들이 수감자를 구타하고 강제로 수감자의 손톱을 뽑는 등 가혹행위를 저지른 사실이 온라인 등을 통해 국민들에게 알려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에 최고지도자 하메네이는 수감자에 대한 인권침해로 악명 높은 카리작 구치소를 폐쇄하라고 지시했으며, 이란 사법부는 반정부 시위 과정에서 체포된 140명을 즉각 석방하기에 이르렀다.


이란의 지난해 유혈 사태는 쉽게 치유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인권과 민주주의를 향한 전 세계인의 양심이 지켜보고 응원한다면 그 치유 과정 역시 빠르게 전개될 수 있다. 눈여겨 볼 사실은 이란은 세계 최대의 난민 수용 국가라는 점이다. 유엔 난민고등판무관 자료에 따르면, 이란은 100만 명이 넘는 난민에게 거처를 제공하고 있으며 이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숫자라고 한다. 주로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쿠르드족 출신인 이들에게 이란 정부는 거액을 들여 사회보장을 제공하고 있으며, 대신 그들로부터 값싼 노동력을 제공받고 있다고 한다.




장금이와 천국의 아이들

이란과 대한민국의 관계는 경제 분야뿐만 아니라 인권과 민주주의 분야에서도 꾸준한 교류를 통해 더욱 발전된 관계를 이룰 수 있다. 많은 이란인의 가슴 속에는 온갖 역경과 어려움을 이겨낸 한국 드라마의 ‘대장금’(2006년 이란 국영 TV IRIB에서 방영해 80%의 시청률을 기록하는 등 이란 국민들의 인기를 얻었다)이 새겨져 있고, 많은 대한민국 사람들은 ‘천국의 아이들’(마지드 마지디 감독의 이란 영화, 2001년 국내 개봉)과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이란 영화, 2009년 국내 개봉)의 맑고 투명한 눈망울을 기억하고 있다. 서로의 문화적 차이를 극복하고 인권과 민주주의에서 한층 나아진 모습으로 경쟁할 때 세계 평화와 인류애는 더욱 커질 수 있을 것이다.



출처




이 글은 국가인권위원회 블로그 '별별이야기'에 보낸 글을 재수록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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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아이들, 온전히 보듬자

Posted by 구상나무 구상나무






사람이란 무엇 하나로 정의 내리기 어려운 존재입니다. 스스로 저차원적인 욕망을 제어할 수 없는 동물과는 다른 존재로 비유하고 있으면서도 고차원적인 동작을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해내는 기계와도 다르다고 말합니다.


인간은 그렇게 복잡하고 알 수 없는 존재죠. 어느 하나로 결론지어 말하기 어렵기 때문에 우리는 다양성을 존중하고 차이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노동자가 일만 하는 기계가 아니듯이 아이들 역시 공부하는 기계가 아닙니다. 조금만 참고 바짝 쪼이면 잠시나마 성적을 올릴 수 있겠지만 아이들의 자주성과 창의성 등은 그 과정에 말살되기 쉽습니다. 많은 부모들이 아이의 장래(대개는 대학과 직업의 동의어입니다)를 위해 서로가 조금만 참고 노력하자고 합니다만 실상 보이는 현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성적을 통해 볼 수 있는 아이들의 미래는 극히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스스로 무언가를 하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끝까지 의지를 밀고 갈 수 있도록 책임감을 북돋우고, 필요한 조건과 환경을 같이 고민해 만들어 나아가고, 그 과정에서 절제와 인내의 힘을 배울 수 있게 하는 것, 그것이 우리 사회가 학교 공부를 통해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할 교훈이겠죠. 성적은 그 다음에 따라오는 긍정적 결과물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석차는 이 과정에서 교훈과는 전혀 관계없는 부산물일 뿐입니다. 석차는 사회가 필요로 해 아이들을 서열화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대학을 고르는 사회가 아니라 대학이 아이를 고르는 사회는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이런 모습은 바뀌어야 합니다.


뉴스뱅크F 서비스가 종료되었습니다


청소년들이 스스로 목숨을 버리고 있습니다. 지난해 통계청 결과에 따르면 15~24세의 사망 이유 중 자살이 1위를 차지하고 있다고 합니다. 물론 그 자살의 이유는 가족 문제나 이성 문제 등도 섞여 있겠죠. 하지만 학교 및 학업과 관련된 자살 기사는 심심치 않게 신문지면 한쪽을 채우고 있습니다. 청소년 자살률을 낮추기 위해 할 수 있는 사회적 노력이 무엇이 있을까 고민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조심스럽지만 학생인권조례에 대한 논의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한국 사회만큼 성적과 체벌을 통해 청소년의 삶을 옥죄고 있는 나라는 없습니다. 그들에게 책임과 의무에 대해 가르치기 위해서는 그에 따른 권리와 자유도 주어져야 합니다. 권리와 자유에 대한 경험이 없으니 책임과 의무에 대해 무지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책임과 의무에 대해 무지하다며 권리와 자유를 가르치지 않는다면 위의 악순환을 멈추게 할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그런 아이들에게서 우리의 미래를 볼 수 있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아이들을 험악한 원형경기장의 검투사로 만들어 옆의 친구를 쓰러뜨리고 살아남는 법을 가르치는 교육보다는 드넓은 자연에서 모험을 통해 협력과 협치를 이해하며 책임과 의무를 배울 수 있는 교육이 더 좋은 교육이 아닐까요? 틀렸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다르다고 말하고 서로의 가치들이 존중받을 수 있는 사회가 아이들을 죽음으로부터 구하고 미래를 지켜낼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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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매'는 없다

Posted by 구상나무 구상나무

“너희들은 말이 통하지 않아! 지금 이건 너희들이 자초한 거다.”

“이게 다 너희들을 위해서다. 이렇게 해야 사고가 나지 않으니까.”

“역시 맞아야 제대로 돌아가지.”

“너희들한테 나쁜 감정이 있는 건 아니다. 우리도 어쩔 수 없다.”


내 군대 시절, ‘집합’이라고 불리는 얼차려 시간에 고참병들이 늘어놓는 말이었다. 공식적으로 군은 병사 간에 신체적 폭력을 동반하는 얼차려나 기합을 금지하고 있다. 내 군대 시절도 벌써 10년 전 일이고 실제 군대를 다녀온 많은 후배들이 지금은 ‘집합’ 같은 건 없다고 하니 다행이다.


“많은 아이들을 통제하려면 어쩔 수 없이 매를 들어야 합니다.”

“아이들을 위해서 하는 거죠. 우리도 그게 좋아서 하는 거겠습니까?”

“애들은 맞으면서 크는 거죠.”

“사랑의 매라는 것도 있지 않습니까. 감정 없는 체벌은 필요합니다.”


군대 내에서 들었던 고참들의 말과 다를 바가 없다. 학교 현장에서 수많은 아이들을 통제하려는 과정에서 체벌은 강력한 수단으로 이용되어 왔다. 하지만 신체적 체벌은 아동에게 장단기적인 잠재적 피해를 가져온다는 사실이 개인과 사회에서 확실하게 나타나고 있다. 2006년에 발간된 ‘UN아동 폭력에 대한 최종 보고서’에서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아동은 시종일관 모든 폭력이 없어지기를 간절히 바랬다. 어른들의 용인과 승인 하에서 이루어지던 폭력은 아동에게 신체적 그리고 심리적 피해를 가져왔다.”


전 세계의 아이들은 애타게 자신이 신체적․정신적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길 원하고 있다. 그것은 인간적인 권리이며, 아동청소년 역시 인권의 주체라는 점은 새삼 거론할 필요가 없다. 우리 사회가 헌법적․법률적으로 어떤 인간에게도 신체적 정신적 폭력에 대해 관대하지 않음에도 유독 아동에게만 체벌을 가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는 것은 왜일까.


많은 어른들이 아이를 때리는 것은 아이를 올바른 길로 안내하기 위한 수단으로 여기고 있고 실제로 그런 마음으로 매를 들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보통 여성이나 일반 성인에게 행해지는 신체적․정신적 폭력에 대해서 사회적으로 어떠한 것도 인정하지 않고, 최소한의 폭력 수준이라는 기준점도 마련하지 않고 있는 것처럼 아동 역시 그런 폭력의 허용이나 기준선 마련은 불필요한 것이다.


한편에서 법제정자들과 정부, 학교 당국자 등은 체벌과 관련한 기준선을 제시하는 규정을 통해 아동을 보호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실상 그 규정이라는 것은 ‘아동을 때리는 방법, 나이에 따른 강도, 몸의 부분, 사용되는 도구’ 등을 정하고 있는 것인데, 사실 이것은 매우 위험한 것이다. 이러한 규정을 세계에 내놓는다면, 선진화를 외치고 있고 G20 회의를 개최하는 나라로서 망신만 당하고 말 것이다. 이미 아동권리위원회가 지난 2003년 우리나라에 체벌 금지를 권고한바 있다.


체벌을 원천적으로 금지하는 규정을 두는 것 자체가 어쩌면 우리 사회가 아동청소년을 바라보는 전근대적인 문화적 수준을 보여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또한 세계에 내놓기 부끄러운 규정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라도 해서 보편화되어 있는 체벌에 대한 인식을 바꿀 필요가 있다.


국가인권위는 2002년 교육부가 발표한 학교생활규정(안)을 검토한 뒤, 직접적으로 체벌 금지를 권고했다. 당시 교육부 발표 내용은 위에서 언급했듯이 구체적인 체벌의 기준을 마련해 놓고 있었다. 그에 따르면 ‘별도의 장소에서 제3자를 동반하여 실시, 체벌 도구는 지름 1.5cm 내외, 길이 60cm 이하의 직선형 나무, 체벌 부위는 남자 둔부ㆍ여자 대퇴부, 1회 체벌봉 사용 횟수는 10회 이내’ 등으로 자세하게 나와 있었다. 국가인권위는 이에 대해 원칙적으로 체벌 금지를 권고했다.


체벌은 일시적으로 아동을 통제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체벌의 공포에 직면한 아동들은 불안감, 우울증, 학교강박증, 적개심 등 부정적 감정을 버리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오히려 아동들은 학교나 가정에서 어른들이 훈육이라는 논리로 아동을 때리는 것을 보아오면서, 자신보다 약한 다른 아동이나 동생들을 똑같은 논리를 이용해 폭력적으로 가르치려는 행동을 답습하게 될지도 모른다.


‘사랑의 매’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만일 ‘사랑의 매’가 있다면, 그 대상은 어른이 되어야지 아동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지난 해 3월 유엔아동권리협약 20주년을 기념해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열린 ‘학생체벌 금지와 교육적 대안 모색’ 국제워크숍에서 기조연설을 한 피터 뉴웰 대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성인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인격적 신체적 존엄성을 아동들은 아직 온전히 보호받지 못하고 있다. 체벌을 법으로 금지해야 하는 것은 부모를 기소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성인을 때리면 안 되는데 아동은 때려도 괜찮다는 인식과 상황을 바꾸기 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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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계천에 있는 전태일 동상

지금 평화시장과 동대문 일대는 의류 패션 중심지로 거듭나고 있지요. 그러나 1970년 오늘 여기서 한 청년 노동자가 자신의 몸에 불을 붙였습니다. 그리고 시대의 어둠을 뚫고 빛나는 화염으로 세상을 밝히고 산화했습니다. 그의 이름은 전태일.


그는 매우 인간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어린 여공들이 점심을 굶는 것이 안타까워 서울 수유리 집에서 평화시장까지 걸어 다니면서 아낀 버스비로 여공들에게 점심을 사 먹인 일화는 그의 헌신과 희생이 깊은 인간애에게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또 연구자였습니다. 정규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어려운 한문이 가득한 근로기준법을 날이 새가면서 읽고 해석하며 스스로 이해하였습니다. 나아가 그는 이 근로기준법이 고통받는 여공들에게 따스한 햇살이 되어 줄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장기표 신문명연구원 원장은 전태일의 삶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한마디로 전태일은 고난 속에서 사랑을 얻는 사랑의 원리, 사랑을 통해 지혜를 얻는 지혜의 원리, 사랑과 지혜를 통해 높은 꿈을 이루는 꿈의 원리, 그리고 그 꿈을 이루는 가운데 법열을 얻는 인생의 원리를 보여주고 있으니, 이것 같이 소중한 교훈이 어디에 또 있겠는가?”(경향신문에서 재인용)


오늘 그가 산화하며 외쳤던 말을 다시 한번 되새겨 봅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노동자를 혹사하지 마라”


과연 지금 이 말은 얼마만큼 지켜지고 있을까 자문해 봅니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는 근로기준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일요일 공휴일도 없이 혹사당하고 있는 노동자들, 저의 시선에는 비정규직 노동자와 이주 노동자들의 모습이 겹쳐지고 있습니다.


노동자의 인권과 대우는 분명 나아지고 있는데, 우리 사회는 또 다시 한쪽에서 차별의 온상을 키우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다른 사람에 대한 차별과 그들의 희생을 담보로 우리의 삶을 지키고 있다면, 먼훗날 우리 아이들에게 올바른 삶을 살아왔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전태일은 정규교육을 거의 받지 못했지만, 당시로서는 안정적인 미래가 보장된 재단사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린 여공들의 고통과 아픔을 돌보다가 해고당하기까지 하죠. 그가 노동운동에 뛰어든 계기는 함께 일하던 여공이 가혹한 노동환경으로 인한 직업병인 폐렴으로 강제 해고를 당하는 것을 보고 느낀 충격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열악한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며 먼지구덩이 속에서 일하는 시다들을 ‘나의 나’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의 바탕은 누구나 누릴 수 있는 기본권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을 보며 ‘나의 나’를 볼 줄 아는 시선에 있습니다. 우리에게 전태일의 의미는 바로 ‘나의 나’를 보는 시선에 있는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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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상나무

네가 보는 책들,한권한권이 모두 영혼을 가지고 있어.그것을 쓴 사람의 영혼과 그것을 읽고 살면서 꿈꾸었던 이들의 영혼 말이야.한권의 책이 새주인의 손에 들어갈 때마다,누군가가 책의 페이지들로 시선을 미끄러뜨릴때마다,그 영혼은 자라고 강인해진단다.-바람의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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