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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나이에 군대를 간다는 것에 대해 잘 안다. 나보다 한참 어린 조교들이 내리는 지시에 따라 이리저리 굴러야 하는 일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어매이징(Amazing)한 일일 것이다. 물론 군생활이라는 것이 그런 것이라는 걸 배워가는 게 훈련소 생활이니, 현빈은, 아니 김태평씨는 사회지도층이나 연기자가 아닌 평범한 훈련병으로서 국민의 의무를 충실히 수행하고 있을 것이다. 물론 그의 군기 잡힌 모습은 분명 연기가 아닐 것이다. 해병대 군기가 보통 군기인가!


군대를 다녀온 남성들 대부분은 1년 이상 똑같은 악몽에 시달린다. 바로 군에 재입대하는 꿈인데, 이런 꿈도 여러 가지 버전이 있다. 비상사태가 발생해서 다시 재입대하는 경우가 가장 흔하고, 군행정 시스템이 잘못되어 아직 군에 입대하지 않은 것으로 처리되었으므로 시스템이 복원되기까지는 일단 재입대하라는 황당무계한 꿈도 꾼다. 때로는 꿈속에서 자다가 눈을 떴는데, 아주 익숙한 내무반이더라는 꿈도 지겹게 재방영된다. 그럴 때마다 등에서는 식은땀을 주룩주룩 흘리며 꿈에서 깨어난다. 꿈이 얼마나 생생했는지, 불을 켜서 일어난 방이 내무반이 아님을 확인해야 간신히 다시 잠들 수 있을 정도다.

정신의학자들은 트라우마 또는 외상 후 스트레스와 비슷한 것이라고 한다. 군대가 주는 정신적 충격이 크다는 말이다. 실제로 많은 남성들이 심각한 정신적 충격으로 병원을 다니는 것도 사실이다. 다양한 원인이 있겠지만, 여전히 자행되고 있는 군대 내 구타 및 가혹행위도 그 중요한 원인 중 하나다.

해병대의 군기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김태평씨가 다니는 해병대의 군기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쎄다”라고 이야기한다. 도대체 해병대 군기의 정체는 무엇일까? 과연 그 군기가 우리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데 한몫을 해 줄까?

지난 3월 24일 국가인권위원회는 해병대에 대한 직권조사 내용을 발표했다. 그것은 참담하게도 군기가 “쎄다”는 해병대 내에서의 구타∙가혹행위에 대한 내용이었다.(관련 보도자료)

사실 이번 직권조사는 국가인권위원회가 부대 내 구타 및 가혹행위에 대해 “우리 사회의 우려와 달리 군 내부적으로 상당한 노력과 성과가 나타나고 있”다고 밝혔음에도(2006년 2월 군대내 인권상황 실태조사 및 개선방안 연구), 유독 해병대에서만 이런 현상이 잘 사라지지 않고 있다고 판단해 실시했다고 밝혔다.

조사결과에 따르면, 2010년 해병대 의무대 환자발생보고서에 따르면 고막천공 30여건, 비골∙늑골, 대퇴부 파열 등 타박상 기록이 250여건에 이르는데 발병 경위 등은 부실하게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또 대부분의 가해자가 후임병 시절 유사한 구타∙가혹행위를 당했고 이를 참고 견디는 것을 ‘해병대 전통’으로 알고 있다고 진술했다. 게다가 폭행사건을 상급자에게 발설할 경우 기수열외 등 2차 피해를 주는 폐쇄적 조직 문화가 팽배했다(기수열외: 해병대 조직에서 배제하는 것을 의미하며, 구체적 방식은 가해자인 선임이 피해자 보다 후임기수에게 피해자에 대해 반말과 폭행을 가하게 하여 인격적 수치심을 주는 행위). 게다가 지휘∙감독자들은 부대의 명예훼손 및 불이익을 우려해 ‘구타에 대해 엄정히 사법처리하라’는 관련 원칙을 준수하지 않고, 경미하게 처리하려는 경향이 강했다.

“이게 최선입니까? 확실해요?”

앞에서 전한 꿈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 보자. 대개의 군대 꿈은 결코 행복하지 않다. 20대의 꽃같은 젊은 날을 같은 또래의 젊은이들끼리 보내는 공간이 왜 이렇게 비극적인 기억으로 남아야 하는 걸까. 그것은 군대라는 특수한 공간이 가지는 한계도 있지만, 비합리적인 조직 문화와 고리타분한 관행 때문이다.

군인복무규율 규정에 따르면 ‘군인은 어떠한 경우에도 사적 제재를 할 수 없도록 금지’하고 있다. 이것은 헌법에 보장된 신체의 안전과 자유를 침해하는 행위이다. 헌법을 지키고 수호해야 할 군대가 헌법의 가치를 무시하는 행태를 간과한다면, 그것은 곧 국민의 생명과 재산에 대한 위협이 될 수밖에 없다.

김태평씨, 아니 현빈의 무사 제대를 기원한다. 그가 말한 유행어로 이 글을 정리한다.

“여긴 당신네들이 생각하는 그런 훈련소가 아니야. 뛰어난 교관과 조교들이 훈련생들 한명 한명을 열과 성의를 다해 인권적 가치로서 대하는 그런 곳이야. 한마디로 목숨을 바쳐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국토를 지킬 수 있는 어메이징한 군인을 만드는 곳이지.”



별별이야기에 보낸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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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금을 차별하자

Posted by 구상나무 구상나무


상황1.
대기업 회장 P씨는 비행기 안에서 술에 취해 난동을 부린 혐의로 기소됐다. 1심 재판에서는 “P씨 탓에 항공기 출발이 1시간 지연돼 다른 승객들이 겪은 불편을 감안하면 벌금형은 너무 가볍다”며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2심에서는 검찰 구형대로 벌금 1000만원을 선고하며 재판은 마무리됐다.


상황2.
서울 청계천 근처에서 옷장사를 하는 K씨는 경기 악화로 가계수표 2500만원을 막지 못해 부도를 냈다. 그는 벌금 300만원으로 약식 기소됐는데, 입원 중인 남편 치료비도 모자라 쩔쩔매던 김씨는 결국 “벌금을 낼 돈이 없다”며 법원에 정식재판을 청구했다. 판사 앞에 선 김씨는 “어려운 형편을 좀 봐달라. 벌금형보다 차라리 징역형을 선고받는 게 낫겠다.”라고 하소연하였다.(2011년 2월 10일자 세계일보에서 발췌)


상황3.
지난해 8월, 한 스피드광이 고급 승용차를 몰고 고속도로에서 시속 300km로 광란의 질주를 벌이다가 경찰의 단속에 걸렸다. 그는 경찰 조사를 받고 곧바로 풀려났지만, 약 65만파운드(당시 환율로 약 12억원) 상당의 벌금을 내게 될 것이라고 외신은 전했다. 역대 사상 최대의 벌금으로 기록될 것으로 보인다.


상황1과 2는 우리나라에서 쉽게 벌어지는 일이다. 물론 일반인에게 벌금 1000만원이 결코 적은 돈이 아니다. 그러나 대기업 회장인 P씨의 경우 습관적으로 정치인을 대상으로 1만 달러를 1만원이라고 부를 정도의 배포와 재력이 있던 사람이다. 그의 셈법대로라면 1만 원짜리 벌금을 낸 셈이다. 그렇다면 그에게 징역형을 선고하는 것은 어떨까? 이 역시 인권의 원칙에 맞지 않다.


하지만 벌금 300만 원을 낼 수가 없는 K씨의 경우는 어떠한가. 사실상 가정 경제가 부도를 맞은 상황에서 교도소행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그에게 우리 법은 어떤 대안을 줄 수 있을까? 실제로 우리나라 경제 상황이 악화되면서 벌금형보다 징역형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크게 늘었다고 한다. 현재 우리나라의 법은 벌금을 내지 못할 경우 노역장 유치 규정을 두고 있는데, 사실상 경제적 약자에게 벌금의 자유형화(징역형화)를 조장하는 불합리한 결과를 초래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 상황3은 벌금형의 차별화를 통해 부유층에게 막대한 벌금형을 준 사례로 일명 일수벌금제라고도 한다. 1920년대 스웨덴에서 처음 도입돼 일부 유럽 국가에서 시행 중인 이 제도는 하루 소득이 100만원인 사람과 10만원인 사람이 동일한 범죄를 저질렀을 때 벌금을 각각 10만원, 1만 원 등으로 차등 부과하는 제도를 말한다.


국가인권위원회는 “형법 일부 개정 법률안 의견 표명”을 통해 이런 일수벌금제도에 대한 도입을 고려할 것을 권고했다. 법무부도 이전부터 탄력적 양형기준을 마련해 생계형 법규 위반자에 대한 구제조치를 마련하고 있다. 그러나 인권위는 구체적으로 벌금의 자유형화라는 조항의 실질적인 폐지가 바람직하다고 밝히고 있다.


이밖에도 국가인권위원회는 사형제도 폐지, 보호수용제 도입 반대, 범죄의 경중을 고려한 선거권 제한, 구류형 폐지, 외국에서의 수형기간을 형집행 기간에 포함, 정신장애자의 범위 명확화 등을 이번 의견 표명에 담았다. 모두 우리 사회에서 오랫동안 인권의 가치에서 논의되어 온 과제들이다.


형법은 시민의 자유와 권리를 직접적으로 제한하는 많은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런 만큼 인권의 관점에서 보다 세심한 접근이 필요하다. 이번 개정안은 1953년 ‘형법’이 제정된 이후 60 여년만의 총칙 부분에 대한 전부 개정이라고 한다. 그동안 축적된 판례와 발전된 형법이론 및 형법의 세계화 경향을 반영하는 등 긍정적인 면이 크다. 하지만 인권의 측면에서 보다 면밀한 접근이 필요하다. 이번 형법 개정안을 통해 우리 사회의 인권이 보다 진일보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국가인권위원회 별별이야기에 보낸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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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live)만한 집, 살(buy)만한 집

Posted by 구상나무 구상나무

최근 아이가 태어나고 전세 계약 만료일도 다가와 이사를 하기로 결정했다. 막상 집을 구하자니, 턱없이 높아진 전세금으로 집을 구하는 것이 어려웠고 그마저도 물량이 없어 부동산 시장이 얼어 있다는 말이 실감났다. 결국 처음 예상했던 금액보다 더 많은 금액에 가까스로 전세를 구할 수 있었다. 물론 초과된 금액은 빚을 지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재미있는 계산을 해 보았다. 수도권에서 전세 2억짜리 아파트에서 산다고 했을 때, 하루 숙박비를 계산하면 얼마가 나올까? 은행 정기예금 금리를 연 4%로 생각하고, 2억원을 은행에 넣어두면 받을 수 있는 이자 소득은 하루 18,630원 정도가 된다. 물론 이자에 대한 세금 15% 제외한 금액이다. 따라서 2억 원의 전셋집에서 살 경우 2만 원 정도를 매일 숙박비로 지불하는 셈이다. 물론 여타 생활비용(가스, 전기, 수도 등)을 제외하고 말이다.

우리나라 가구당 평균 자산은 약 2억7천만 원. 그중 부동산은 2억6백만 원으로 약 75.8%정도다. 게다가 가게 부채가 약 4천2백만 원인데, ‘빚이 없다면 부자’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집을 사거나 전세로 들어가는 과정에서 많은 가구가 빚을 안고 살고 있다. 우리나라 4인 가족의 한달 평균 수입이 284만원으로 1년 연봉으로 3400만원 정도다. 1년 동안 번 돈 모두를 한푼도 쓰지 않아도 부채를 갚지 못한다. 가계 부채 중 부동산이 차지하고 있는 비중이 사상 최대치를 경신하고 있는 요즘, 뛰는 물가 위에서 날고 있는 전세값의 고공 행진이 사람들 가슴을 억누르고 있다. 과연 우리의 주거권은 안녕할까?
 

지금의 전세값 고공 행진의 원인에 대해 신규 주택 공급의 부족과 신혼부부 등 신규 가계의 자연 증가 등이 맞물려 벌어지는 현상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많은 가계가 불안한 주택 가격의 변동으로 집을 구입하기보다 원금 보존이 가능한 전세 수요로 몰리고 있는 점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더욱 설득력 있다. 집값 상승의 요인이 없지는 않더라도 대세는 여전히 관망에 방점을 두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같은 흐름은 집을 주거의 공간, 문화의 공간이 아닌 재산적 가치로만 보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다. 물론 현대 사회에서 집은 단순한 주거 공간이 아닌 경제적 가치를 분명히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우리나라는 더욱 특수한 부동산 역사를 가지고 있어, 집의 경제적 가치에 대중이 몰입하고 있는 경향이 매우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전세 가격의 고공 행진, 부동산 가격의 불안 혹은 급상승 등은 주거의 본래적 의미를 퇴색시키고 말았다.
 

일반적으로 주거권이라고 하면 가장 가난한 사람들만의 것으로 인식되기 쉽다. 예를 들어 철거민이나 홈리스, 저소득 임차가구 등의 권리는 당연히 가장 우선시 되어야 하는 과제임에는 분명하다. 하지만, 일반 중산층이나 일부 고소득 임차가구 등의 주거권도 보호되어야 할 기본권이다.
 

여전히 강제 철거가 아무렇지도 않게 자행되고 있는 우리나라 현실에 비추어 볼 때 분명 중산층의 주거권 문제는 인권적인 측면에서 그다지 시급한 문제로 취급되지 않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보다 광범위한 접근을 통해 주거권의 문제를 인권의 문제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다양한 인권 활동이 필요하다.
 

1996년에 제2차 세계 주거 회의(Habitat Ⅱ)에서 채택된 의제는 주거권과 관련된 가장 포괄적이고 중요한 국제 문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동안의 주거권과 관련된 국제적인 합의들을 종합하고, 또 주거권의 실현과 관련한 주거권의 구체적인 여러 측면들을 검토하고, 실천의 지침을 공동으로 작성한 것이다. 여기에서는 국가가 적어도 다음과 같은 정책을 실시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적절한 주거를 누릴 수 없는 사람들을 포함하여, 주택을 거주 가능하고, 경제적으로 부담가능하면서 이용 가능하도록 하기 위해 다른 여러 가지 중에서 특히 다음과 같은 정책을 채택하여야 한다.

① 적절한 규제 장치와 시장 경제에 기반한 유인책을 통해 경제적으로 부담할 수 있는 주택의 공급을 늘인다.

② 가난한 사람에 대한 보조금과 임대료 및 다른 형태의 주택자금 지원을 통해 부담 능력을 향상시킨다.

③ 지역 사회에 기반한 협동 주택과 비영리 임대주택, 자가 주택 사업을 지원한다.

④ 집 없는 사람들과 그밖의 취약한 집단에 대한 지원을 확대한다.

⑤ 주택과 지역 사회 개발을 위해 재정과 공공 및 민간 부문의 다양한 자원들을 혁신적으로 활용한다.

⑥ 경제적으로 부담할 수 있는 임대주택과 자가 주택에 대한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시장 경제에 기반을 둔 각종 유인책을 실시하여 민간부문을 활성화시킨다.

⑦ 일자리, 재화와 서비스, 편의시설을 쉽게 구하고 이용할 수 있는 지속가능한 공간 개발 형태와 교통체계를 장려한다.

⑧ 집 없는 사람과 부적절한 주택의 정도를 파악하는 것을 비롯하여 주거 조건에 대한 평가와 효과적인 감시를 하고, 취약한 인구 집단에 대한 상담을 통해서 각종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적절한 주택 정책을 채택하고 공식화하며 효과적인 계획과 전략을 수행하여야 한다.


 

위의 정책적 권고들은 주거권 보장을 위한 주요 원칙으로 모든 계층에게 적용될 수 있는 내용들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에 대한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경제적인 부분도 있지만 문화적인 부분도 분명 존재한다. 주거가 가지는 가치를 재평가하는 데에 있어 국가가 해야 할 역할은 참으로 막중하다. 우리 사회가 주거권의 문제를 경제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인권적인 측면에서 접근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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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아동의 권리를 찾아서

Posted by 구상나무 구상나무


보통 아기를 데리고 차량으로 이동할 때 반드시 장착해야 하는 것이 카시트이다. 유럽의 경우 카시트 장착률이 95%를 넘지만 우리나라는 아직 40%대에 머물고 있다고 한다. 카시트가 없을 경우 보통 엄마가 아이를 안고 타게 된다. 그렇지만 이것이 아동에게 더 위험하다. 아이들의 경우 관성을 이기는 힘이 약하기 때문에 브레이크를 세게 밟으면 엄마는 본능적으로 아이를 끌어안게 되고 아이의 목은 순간적으로 꺾이면서 아이의 요추와 경추가 다치는 일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급박한 상황에서 아이를 보호하려는 엄마의 자세가 오히려 아이를 다치게 하는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카시트 장착을 의무화하는 제도가 마련된 것이다.


얼마전 국가인권위원회의 ‘이주아동 교육권 보장 종합 대책 마련 권고’를 보면서 카시트가 떠올랐다. 위원회 권고는 이주아동의 부모가 처한 입장과 처지에 의해 아동의 교육권이 불가피하게 침해받는 상황을 개선하고, 유엔아동권리 협약 등에서 보장하고 있는 아동의 교육권을 국가와 사회가 책임감을 가지고 지켜주도록 제도 개선을 하라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위원회는 이주아동들이 학교 내에서 피부색, 종교, 발음 등으로 차별이나 놀림을 받지 않도록 다양한 제도적인 장치가 마련되어야 한다는 지적과 함께, 무엇보다 그 부모가 처한 상황, 즉 부모가 단속이나 강제 퇴거 등으로 재학 중 학기를 끝내지 못하고 쫓겨나는 상황에 대해서도 지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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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사회적 약자이며 소수자인 이주아동에 대한 지원 체계를 갖출 것을 주문하였다. 우선 65%에 가까운 이주이동들이 한국어 능력 부족으로 입학을 거부당하고 있는 현실에 비추어 공공시스템에 의한 한국어 교육 강화와, 입학절차나 학교생활에 대한 모국어 정보 제공 조치를 강화하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밝힌 것이다. 또 실태조사에서도 나타났듯이 여전히 15%의 이주아동이 학교측의 일방적인 거부로 입학을 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므로 이주학생에 대한 학교의 전입학 거부행위를 못하도록 관련 법 조항을 정비하고 철저한 행정지도와 관리감독을 요청했다.

 

일부 이주민들이 우리나라의 실정법을 어기면서 체류하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의 아동들까지 아동이 누려야 할 기본적인 교육권을 보장받지 못하는 사회가 인권의 가치를 제대로 실현시킬 수 있는 사회인지 자문해 볼 필요가 있다. 아이들을 교통사고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카시트 보급률을 높이고자 사회적 제도를 마련하는 것과 같이, 이주아동의 교육권을 보장하기 위해 우리 사회가 보여야 할 최소한의 진심과 노력이 제도적인 움직임으로 구체화되어야 할 것이다.




국가인권위원회 블로그 별별이야기에 보낸 글. 조금 많이 아쉬운 글임. 이주아동의 권리를 지켜주기 위한 사회적인 관심을 위해 카시트를 끌어들였는데, 뭔가 좀 부족하다는 느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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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에 빚지다2 - 달력을 사다

Posted by 구상나무 구상나무




2011년 달력을 한 부를 샀다.
내년에는 부디 우리 사회의 비인간적인 차별이 없애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아인슈타인은 이렇게 말했다.
"하루에도 백번씩 나는 나의 삶이, 살아있는 혹은 죽은 사람의 노고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되새긴다. 그리고 받은 것 만큼 되돌려 주기 위해 얼마나 많이 노력해야만 하는가를 스스로 일깨운다."

우리는 단 하루 한시라도 다른 사람에게 빚지고 있다는 생각을 잊어서는 안된다. 세상은 혼자 사는 삶이 아니라는 것을 어렸을 때부터 배웠으면서도 이 세상의 어두운 곳을 비추려는 노력에 대해서는 애써 눈을 돌리곤 한다. 내 지금의 안락이 누군가의 희생 덕분이라는 것을, 그리고 내 삶도 그 누군가를 위해 도움을 주는 삶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자. 여기 최소한의 변화를 원하는 작가들의 카메라가 일을 벌였다. 무한도전의 달력 보다 재미는 없을지 모르지만, 사진 안에 담긴 이야기는 우리가 결코 그냥 넘어갈 수 있는 단순한 이야기들은 아닐 것이다. 토요일 저녁을 즐겁게 해주는 무한도전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어떤 세상에 살고 있으며, 무엇에 빚지고 있는지 이야기하는 사진들도 우리에게는 소중한 존재 가치가 있다.

2011년 달력이 다 끝나기 전까지 우리 사회의 차별과 반인권이 사라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다면, 부디 작은 혹은 최소한의 관심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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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의 최고의 날

Posted by 구상나무 구상나무



누구에게나 그런 날이 있다. 하늘은 눈부시게 푸르고 태양은 나를 향해 비추며, 바람마저 내 귀밑머리를 부드럽게 쓸어 넘겨준다. 새들의 노랫소리도 나를 축복하고 꽃들도 내 아름다움 앞에서는 고개를 숙이는 그런 날들. 내 사랑과 열정이 넘쳐나던 젊은 날을 떠올릴 수 있고, 동네 골목길을 뛰어다니거나 산골짜기를 오르내리던 유년 시절을 떠올리는 이도 있겠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전직 군인이었던 한 여성은 구금자들 앞에서 찍은 사진을 내 보이며 “내 삶의 최고의 날”이라고 했다. 그이에게는 군대에 있던 젊은 날이 국가를 위해 헌신과 봉사를 하며 내적, 외적 아름다움을 이루었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제목을 붙였을 것이다. 그에게는 자랑스러운 날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관련 기사: 이스라엘 여군 “내 최고의 날” 페이스북 사진 인권침해 논란



그러나 아름다운 삶은 지금 있는 위치에서 다른 사람들과 나눌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타인의 불행이나 고통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며 아름답다고 말한다면 그 사진은 인간이 지금까지 쌓아온 정신적 문명이 망가지는 장면을 담은 것일 뿐이다. 눈이 가려지고 손목이 묶인 수감자들의 심정을 생각하지 않은 것, 타인의 고통과 수치심, 절망감에 대해서 아랑곳 하지 않고 그들을 그저 사진 속 배경에 처리해 버린 것은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저버린 것이다.


윌리엄 아서 워드는 “언젠가 우리는 모두 생활(수준)의 기준이 아니라 삶의 기준으로, 부(가진 것)의 척도가 아니라 나눔의 척도로, 표면적인 위대함이 아니라 내면적인 선함으로 평가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개개인마다 생각하는 최고의 날로 다시 돌아가 보자. 과연 그 최고의 날은 생활수준의 기준으로 잡았던 것일까? 부의 척도로 재단했던 것일까? 아니다, 내면적인 선함, 인간성의 순수함에서 비롯된 것일 게다.


다가오는 8월 22일은 역사적인 제네바 협약이 맺어진 날이었다. 1864년 8월 22일 제네바에서는 전쟁에서 군대 부상자의 상태 개선에 관한 협약을 맺는 것으로 출발해 지금은 전시에서의 민간인 보호에 관한 조항까지 전쟁 상황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한 인류의 약속으로 자리매김했다. 제네바 협약의 정신은 치열한 전쟁 상황에서도 야만적인 상황을 멈추게 하여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이스라엘 여성이 놓친 것은 인간의 존엄성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그 사진은 ‘내 삶의 최고의 날’일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다른 누구에게 분명 ‘내 삶의 최악의 날’이 되는 사진이다. 우리 스스로 인간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으면 다른 이들의 인간적 존엄성을 배울 수 없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대립과 갈등의 배경이 저 사진 안에 있다고 생각하니 씁쓸하다.





국가인권위원회 블로그 '별별이야기'에 보낸 글을 재수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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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금과 천국의 아이들

Posted by 구상나무 구상나무



이슬람의 문제가 아니다

최근 이란에 대한 경제 제재에 우리나라가 동참하면서 이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이 과정에서 대부분의 언론들은 이란과의 경제 교류 분야에서 있을 우리 기업의 피해를 걱정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이란 사람들의 삶과 의식에 대한 접근은 찾아보기 어렵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이란을 과격한 종교의 나라로 오해하고 있는 이면에는 언론의 책임이 크다.


이전부터 서방 세계와 끊임없이 마찰을 빚어 온 이란은 서방 언론 매체를 통해 과격한 종교 국가의 이미지가 강하게 자리 잡고 있다. 물론 지난해 반정부시위의 강경 진압 과정에서 보여준 이란 정부의 대응은 지나치다는 지적은 타당하다. 그러나 여기에 ‘이슬람’이라는 편견을 씌우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2003년 노벨평화상을 받은 이란의 여성 변호사 시린 에바디는 2009년 만해평화상 수상을 위해 한국을 방문했을 때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물론 유감스러운 사건이 있지만 그게 이슬람의 전부는 아닙니다. 같은 이슬람 정부라고 해도 여성 총리가 나온 나라가 있을 정도로 이슬람도 다양한 해석을 가지고 있으며 충분히 인권과 조화를 이루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어요. 다만 비민주적인 정부들이 인권을 억압하는 정책에 ‘이슬람’이란 말을 남용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립스틱 지하드, 하이힐 혁명

지난해 있었던 이란의 반정부 시위는 일명 ‘립스틱 지하드(성전)’, ‘하이힐 혁명’으로도 불린다. 단어에서 알 수 있듯이 여성들의 활약이 눈부셨다는 것이다. 이란의 젊은 여성들은 6~7월 반정부 시위 과정에서 개혁파의 상징색인 녹색 스카프나 깃발을 든 채 거리를 누비고 다녔다. 여성의 정치 사회 운동 기반과 민주주의 의식의 저변 확대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모습이다.


이전부터 이란은 다른 나라에 비해 자유롭고 실용주의적인 부분이 상대적으로 많았다. 공식적인 옷차림 규제는 매우 엄격하지만 많은 젊은이들이 허용치를 넘나드는 즐거움을 누리고 있다. 10대들은 속이 비치는 머리스카프로 흉내만 내면서 엉덩이도 덮이지 않는 짧은 겉옷을 입고 다닐 정도다.


또 이란의 인터넷과 휴대폰 보급, 그리고 그 여파도 이번 시위에 큰 역할을 했다. 온라인 상에서 빠르게 전파되는 시위 소식은 그대로 전 세계에 생중계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이란 내에서 일어나고 있는 유혈 사태를 곧바로 감지할 수 있어서 세계 여론을 끌어들이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


유혈 진압의 상처와 그 치유

결과적으로 지난해 대통령 선거는 이란 역사에서 한 획을 긋는 중대한 사건이 되고 말았다. 선거 부정에 대한 여러 의혹들이 제기되었고, 그 의혹을 표출하는 이란 민심에 대한 무자비한 유혈진압이 일어났다. 국제 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는 2010년 보고서에서 “지난 1년간 이란 정부의 국민통제는 더욱 강화됐고 혁명수비대와 ‘바시지’ 민병대, 경찰의 민간인 탄압과 불법체포, 감금, 폭행이 상시화 됐다”고 발표했다. 이에 앞서 국제엠네스티는 1년간 체포된 이란 반정부시위대가 5,000명이 넘는다는 보고서를 냈다.


또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이란 교도관들이 수감자를 구타하고 강제로 수감자의 손톱을 뽑는 등 가혹행위를 저지른 사실이 온라인 등을 통해 국민들에게 알려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에 최고지도자 하메네이는 수감자에 대한 인권침해로 악명 높은 카리작 구치소를 폐쇄하라고 지시했으며, 이란 사법부는 반정부 시위 과정에서 체포된 140명을 즉각 석방하기에 이르렀다.


이란의 지난해 유혈 사태는 쉽게 치유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인권과 민주주의를 향한 전 세계인의 양심이 지켜보고 응원한다면 그 치유 과정 역시 빠르게 전개될 수 있다. 눈여겨 볼 사실은 이란은 세계 최대의 난민 수용 국가라는 점이다. 유엔 난민고등판무관 자료에 따르면, 이란은 100만 명이 넘는 난민에게 거처를 제공하고 있으며 이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숫자라고 한다. 주로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쿠르드족 출신인 이들에게 이란 정부는 거액을 들여 사회보장을 제공하고 있으며, 대신 그들로부터 값싼 노동력을 제공받고 있다고 한다.




장금이와 천국의 아이들

이란과 대한민국의 관계는 경제 분야뿐만 아니라 인권과 민주주의 분야에서도 꾸준한 교류를 통해 더욱 발전된 관계를 이룰 수 있다. 많은 이란인의 가슴 속에는 온갖 역경과 어려움을 이겨낸 한국 드라마의 ‘대장금’(2006년 이란 국영 TV IRIB에서 방영해 80%의 시청률을 기록하는 등 이란 국민들의 인기를 얻었다)이 새겨져 있고, 많은 대한민국 사람들은 ‘천국의 아이들’(마지드 마지디 감독의 이란 영화, 2001년 국내 개봉)과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이란 영화, 2009년 국내 개봉)의 맑고 투명한 눈망울을 기억하고 있다. 서로의 문화적 차이를 극복하고 인권과 민주주의에서 한층 나아진 모습으로 경쟁할 때 세계 평화와 인류애는 더욱 커질 수 있을 것이다.



출처




이 글은 국가인권위원회 블로그 '별별이야기'에 보낸 글을 재수록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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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매'는 없다

Posted by 구상나무 구상나무

“너희들은 말이 통하지 않아! 지금 이건 너희들이 자초한 거다.”

“이게 다 너희들을 위해서다. 이렇게 해야 사고가 나지 않으니까.”

“역시 맞아야 제대로 돌아가지.”

“너희들한테 나쁜 감정이 있는 건 아니다. 우리도 어쩔 수 없다.”


내 군대 시절, ‘집합’이라고 불리는 얼차려 시간에 고참병들이 늘어놓는 말이었다. 공식적으로 군은 병사 간에 신체적 폭력을 동반하는 얼차려나 기합을 금지하고 있다. 내 군대 시절도 벌써 10년 전 일이고 실제 군대를 다녀온 많은 후배들이 지금은 ‘집합’ 같은 건 없다고 하니 다행이다.


“많은 아이들을 통제하려면 어쩔 수 없이 매를 들어야 합니다.”

“아이들을 위해서 하는 거죠. 우리도 그게 좋아서 하는 거겠습니까?”

“애들은 맞으면서 크는 거죠.”

“사랑의 매라는 것도 있지 않습니까. 감정 없는 체벌은 필요합니다.”


군대 내에서 들었던 고참들의 말과 다를 바가 없다. 학교 현장에서 수많은 아이들을 통제하려는 과정에서 체벌은 강력한 수단으로 이용되어 왔다. 하지만 신체적 체벌은 아동에게 장단기적인 잠재적 피해를 가져온다는 사실이 개인과 사회에서 확실하게 나타나고 있다. 2006년에 발간된 ‘UN아동 폭력에 대한 최종 보고서’에서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아동은 시종일관 모든 폭력이 없어지기를 간절히 바랬다. 어른들의 용인과 승인 하에서 이루어지던 폭력은 아동에게 신체적 그리고 심리적 피해를 가져왔다.”


전 세계의 아이들은 애타게 자신이 신체적․정신적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길 원하고 있다. 그것은 인간적인 권리이며, 아동청소년 역시 인권의 주체라는 점은 새삼 거론할 필요가 없다. 우리 사회가 헌법적․법률적으로 어떤 인간에게도 신체적 정신적 폭력에 대해 관대하지 않음에도 유독 아동에게만 체벌을 가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는 것은 왜일까.


많은 어른들이 아이를 때리는 것은 아이를 올바른 길로 안내하기 위한 수단으로 여기고 있고 실제로 그런 마음으로 매를 들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보통 여성이나 일반 성인에게 행해지는 신체적․정신적 폭력에 대해서 사회적으로 어떠한 것도 인정하지 않고, 최소한의 폭력 수준이라는 기준점도 마련하지 않고 있는 것처럼 아동 역시 그런 폭력의 허용이나 기준선 마련은 불필요한 것이다.


한편에서 법제정자들과 정부, 학교 당국자 등은 체벌과 관련한 기준선을 제시하는 규정을 통해 아동을 보호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실상 그 규정이라는 것은 ‘아동을 때리는 방법, 나이에 따른 강도, 몸의 부분, 사용되는 도구’ 등을 정하고 있는 것인데, 사실 이것은 매우 위험한 것이다. 이러한 규정을 세계에 내놓는다면, 선진화를 외치고 있고 G20 회의를 개최하는 나라로서 망신만 당하고 말 것이다. 이미 아동권리위원회가 지난 2003년 우리나라에 체벌 금지를 권고한바 있다.


체벌을 원천적으로 금지하는 규정을 두는 것 자체가 어쩌면 우리 사회가 아동청소년을 바라보는 전근대적인 문화적 수준을 보여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또한 세계에 내놓기 부끄러운 규정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라도 해서 보편화되어 있는 체벌에 대한 인식을 바꿀 필요가 있다.


국가인권위는 2002년 교육부가 발표한 학교생활규정(안)을 검토한 뒤, 직접적으로 체벌 금지를 권고했다. 당시 교육부 발표 내용은 위에서 언급했듯이 구체적인 체벌의 기준을 마련해 놓고 있었다. 그에 따르면 ‘별도의 장소에서 제3자를 동반하여 실시, 체벌 도구는 지름 1.5cm 내외, 길이 60cm 이하의 직선형 나무, 체벌 부위는 남자 둔부ㆍ여자 대퇴부, 1회 체벌봉 사용 횟수는 10회 이내’ 등으로 자세하게 나와 있었다. 국가인권위는 이에 대해 원칙적으로 체벌 금지를 권고했다.


체벌은 일시적으로 아동을 통제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체벌의 공포에 직면한 아동들은 불안감, 우울증, 학교강박증, 적개심 등 부정적 감정을 버리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오히려 아동들은 학교나 가정에서 어른들이 훈육이라는 논리로 아동을 때리는 것을 보아오면서, 자신보다 약한 다른 아동이나 동생들을 똑같은 논리를 이용해 폭력적으로 가르치려는 행동을 답습하게 될지도 모른다.


‘사랑의 매’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만일 ‘사랑의 매’가 있다면, 그 대상은 어른이 되어야지 아동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지난 해 3월 유엔아동권리협약 20주년을 기념해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열린 ‘학생체벌 금지와 교육적 대안 모색’ 국제워크숍에서 기조연설을 한 피터 뉴웰 대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성인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인격적 신체적 존엄성을 아동들은 아직 온전히 보호받지 못하고 있다. 체벌을 법으로 금지해야 하는 것은 부모를 기소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성인을 때리면 안 되는데 아동은 때려도 괜찮다는 인식과 상황을 바꾸기 위한 것이다.”






국가인권위원회 블로그 '별별이야기'에 보낸 글을 재수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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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항의 "이제 됐어?"


끊임없이 홀로 전장터로 내몰리는 전사의 비애였을 것이다. 수없이 무찌르고 베어냈지만 여전히 몰려드는 검투사들, 끝나지 않을 원형경기장의 전투. 그렇게 원형경기장의 중앙에 우뚝 섰지만, 저 시체들 너머 더 큰경기장에서 더 잔인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고 누군가가 알려줬을 것이다. 아니, 이미 중앙에 올랐을 때 그는 알았을 것이다. 나는 누구를 쓰러뜨리고 내일을 기약해야 하는가. 더군다나 내 자리를 빼앗기 위해 달려드는 다른 검투사들과의 싸움은 언제쯤 끝날 것인가. 이 피의 비는 언제 그칠 것인가.

사실 우리 모두는 그렇게 경쟁 사회에 익숙해져갔다. 다행히 살아남았다는 이유로 우리는 더 강한 자라고 자위하고 있다. 사실 원형경기장의 전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대학에 들어가서도, 대학을 나와서도, 직장에 다니면서도, 그 치열한 전투의 트라우마는 번번이 삶의 한가운데서 불쑥 불쑥 고개를 내밀기 일쑤다. 그렇게 흔들리는 삶을 살아가며 끝나지 않은 전투를 벌이고 있다. 더 큰 원형경기장에서 더 큰 어른들과 벌이는 전투는 그저 성적표의 성적이 좀 떨어지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삶을 뭉텅이로 도려내고 나락으로 처박아 버릴 수 있는 잔인한 싸움이다.





어쩌면 그 아이는 물음표가 아닌 느낌표를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이제 됐어?"와 "이제 됐어!" 그가 마지막에 썼다는 그 물음표는 오히려 느낌표 보다 더 강렬하게 우리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지금 아이들은 포기하지 않고 극렬히 저항하고 있다. 그네들이 저항할 수 있는 모든 수단들은 철저히 막혀 있고, 아이들이 할 수 있는 마지막 저항인 자살로 내몰리고 있다. 절규하고 아파하는 아이들을 외면하는 사회는 결코 오래갈 수 없다. 학생인권조례를 통해 학교 안에서라도 아이들이 숨쉴 수 있게 하자는 것을 이념 갈등으로 치부하는 저 몰지각한 어른들에게 우리 아이들의 절규는 들리지 않는 것일까.

이 잔인하고 비열한 전투는 모두를 패배자로 만들었다. 단지 몇몇 한줌도 안되는 승자, 그것도 엄청난 재력과 권력을 이용해 등극한 승자들을 위한 요식행위에 동원되는 그저그런 사람들을 피할 수 없는 패배자, 루저의 나락으로 내볼고 있는 것이다.

다른 생각을 꿈꿀 수 있고, 더불어 사는 세상을 이야기하는 교육, 그것은 원형경기장의 담장을 허물어 버리는 시작이다. 틀렸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다르다고 말하고 서로의 가치들이 존중받을 수 있는 사회가 아이들을 구하고 미래를 지켜낼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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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돌아가신 김대중 전 대통령은 역대 대통령 중에서 가장 오랜 기간인 5년여의 수감 생활을 하신 분이죠. 그러나 그는 감옥 생활에는 또 다른 즐거움이 있던 공간이었다고 회상했습니다.

“나의 경우, 감옥 안에서 네 가지 즐거움을 맛보았습니다. 그 첫째이자 가장 큰 것이 독서의 즐거움이었습니다. 과거 1977년 청주 교도소에서 2년간의 생활은 그야말로 독서의 생활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철학·신학·정치·경제·역사·문학 등 다방면의 책을 동서양의 두 분야에 걸쳐서 읽었습니다. (중략) 진주와 청주에서의 4년여의 감옥 생활은 나에게 다시없는 교육의 과정이었습니다. 그리고 정신적 충만과 향상의 기쁨을 얻는 지적 행복의 나날이었습니다.”
-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중에서

얼마전 사형수의 자살이 사회적 이슈가 되었습니다. 그가 남긴 글에서는 사형에 대한 두려움이 담겨 있었다고 합니다.

한나라당 박민식 의원에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2005년 이후 전국 교정시설에서 자사를 시도한 사람의 수는 422명에 달하며, 이중 72명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나왔습니다. 이중 살인(28명, 38.9%)으로 복역 중인 수용자가 가장 많았고, 다음으로 성폭력 범죄를 저지르고 자살한 수용자(15명, 20.8%)가 그 뒤를 따르고 있습니다.

타인의 신체에 직접적인 해를 끼치고 복역하는 수용자들의 자살이 절반을 넘습니다. 이런 이들에 대한 마땅한 교육 시스템은 여전히 부재한 실정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가난한 이들에게 인문학을 전파하는 클레멘트 코스를 창안한 인문학자 얼 쇼리스의 유명한 일화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1995년 얼 쇼리스 교수는 한 여죄수와 만나서 대화를 나눕니다. 가난과 범죄의 악순환을 고민하는 그에게 그 여죄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방법은 간단해요. 우리 아이들에게 시내 중심가 사람들의 ‘정신적 삶’을 가르쳐야 합니다.”

이에 얼 쇼리스는 범죄자를 포함해, 알콜 중독자, 노숙자, 실업자 등에 대한 ‘인문학’ 강의를 하는 클레멘트 코스를 전파합니다.

“당신은 이 수업을 통해 도대체 무엇을 얻으려 합니까?”

“인문학을 배우기 전에는 욕이나 주먹이 먼저 나갔어요. 그런데 이젠 그러지 않아요. (왜냐하면) 나를 설명할 수 있게 됐거든요.”*

나를 설명하는 힘, 그것은 상대를 이해하는 바탕이 되었고, 그들로 하여금 새로운 희망을 가지고 새로운 시각으로 사회를 바라볼 수 있는 눈을 가지게 하였습니다. 그들에 대한 인문학 과정은 사회적 약자로 만들었던 ‘조건들’에 대해 과거와 다르게 대응하는 힘을 갖게 한 것이죠.

범죄자들이 수형 시설에서 사회를 원망하고 이웃을 저주할 때, 인문학 과정은 새로운 대안이 되어 줄 수 있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감옥에서 읽었던 대부분의 서적들-철학·신학·정치·경제·역사·문학 등은 모두 인문학의 영역에 있는 책들입니다. 지금의 세상과 사람에 대해 보다 분명하고 구체적인 시각과 관점을 심어줄 수 있는 인문학 독서가 김대중이라는 시대적 위인을 만들어냈듯이 수용시설의 수용자들에게 펼쳐지는 인문학 강의도 그들 자신과 우리 사회에 매우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감옥에서의 독서를 통해 얻었다는 정신적 충만과 향상의 기쁨을 수용자들도 누릴 수 있기를 기대해 봅니다.



* EBS <지식채널e>의 일부를 옮겨왔습니다.



국가인권위원회 블로그 별별이야기에 보낸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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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상나무

네가 보는 책들,한권한권이 모두 영혼을 가지고 있어.그것을 쓴 사람의 영혼과 그것을 읽고 살면서 꿈꾸었던 이들의 영혼 말이야.한권의 책이 새주인의 손에 들어갈 때마다,누군가가 책의 페이지들로 시선을 미끄러뜨릴때마다,그 영혼은 자라고 강인해진단다.-바람의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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