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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허동천에서 오래 서성이다

 

으슬으슬한
저녁답, 가랑잎 부서지는 소리가
자꾸 발밑에서 들렸네

가을의 초입이라 하늘이 아슬아슬하다. 야근은 점입가경으로 빠져들었다. 살떨리는 주말 근무는 힘겹기만 하다. 휘어져 가는 볼펜꼭지가 불안하게 종이 위에 멈추어 서면 난 옥상에 나간다. 거기서 낮이든 밤이든 가을 하늘은 보면 좋다. 그곳에는 피곤을 달래주는 청명함이 있다. 이 가을의 서늘한 바람소리도 사무실 문앞에서 머뭇거린다. 열기 때문일까, 아니면 열병 때문일까. 사람들은 후끈 달아올라있다. 여기에 가을은 없다. 그래서 자연이 필요하다. 인위적인 흔적들을 지우는 곳이다. 인간의 몸이 자연과 동화하여 생명을 품을 수 있는 곳. 기계적인 시간의 흐름보다는 해가 뜨고 지고, 꽃이 피고 지는 자연의 시간이 우선인 곳. 배고픔처럼 강렬한 욕구가 나를 자극한다.

어두워지기 전에 강물은
푸른 회초리처럼 휘어졌다가
흉터 많은 내 이마를 후려치고,
아까보다는 훨씬 더 깊어져
불빛도 안 켜진 사람의 마을 쪽으로
그렁그렁 흘러갔네

함허동천 야영장에도 밤이 찾아온다. 가을은 더 깊숙이 옷깃을 파고든다. 오래만의 한기다. 겨울이 되면 시인의 말처럼 바람은 ‘푸른 회초리처럼 휘어졌다가 / 흉터 많은 내 이마를 후려치고’ 갈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아니다. 차갑지만 반갑다. 야영장 곳곳에 세워진 텐트에서도 밤의 적막이 찾아온다. 우리 옆에서는 고구마가 익어가고 있다. 아직은 이야기꽃을 끌 때가 아니다. 밤늦게까지 이런저런 이야기, 때로는 한밤의 정적을 가르기도 하고, 때로는 별들처럼 소곤대며 끝이 없이 이어진다. 불빛도 시나브로 졸고 있는 이 텐트의 마을에서 밤은 점점 깊어졌다.

- 내 눈에는 왜 모래알이
서걱이는지 몰라, 눈을 뜰 때마다
눈 못 뜨게 매운 연기가
어디서 차오르는지 몰라,

1397년 세종대왕으로부터 촉망받던 성균관생이 홀연 자취를 감추었다. 왕의 총애를 받으면서 최고의 학부에서 연구를 하던 이가 모든 걸 버리고 산속으로 들어갔다. 그의 이름은 유수이, 휘는 기화(己和)이며 어릴 적부터 지혜가 남달라 일찌감치 성균관에 들어가 학문을 닦고, 그곳에서도 두각을 보여 세종의 눈에 자주 띄었다. 그런 그에게 둘도 없는 지음이 있었다. 그렇게 함께 학문을 닦고 우정을 나누던 친구가 젊은 날에 갑자기 생을 놓고 말았다. 친구에 대한 원망과 삶에 대한 좌절 속에서 하루하루를 괴로워하던 유수이는 성균관을 떠난다. 매일 같이 친구를 위해 연서를 쓰고, 그리워하지만 끊임없이 차오르는 눈물을 막을 수는 없었다. 마치 눈에 모래알이 들어온 것처럼, 아니면 눈을 뜰때마다 연기가 찌르는 것처럼 눈이 아팠다. 아니 마음이 아팠다. 자꾸자꾸 눈에 차오르는 눈물의 이유를 물어서 어디에 쓸까.

잘못 살아왔다고, 너무
아프게 자책하지 말라고
갈 곳 없는 새들은
물에 잠긴 옛집 나무 그림자를 흔들며
석유곤로에 냄비밥을 안치는
독거獨居의 마음속으로 떼지어 날아들고


친구를 잃어버린 슬픔을 이겨내는 것은 또 얼마나 힘든 일인가. 나를 알아주고 내가 알아준 그 이가 세상에 없는 슬픔은 또 얼마나 많은 눈물이 필요할까. 유수이는 그 길로 속세를 떠난다. 다시는 그런 친구를 만들지 않겠다고, 다시는 인간 세상에 미련을 두지 않겠다는 그의 다짐은, 그러나 끊임없이 만나게 되는 옛우정의 흔적 앞에서 흔들렸다. 정처없이 서쪽으로 서쪽으로 걸어 마침내 닿은 곳은 마니산의 한 계곡. 신라 선덕왕 때 지어진 정수사를 끼고 있는 곳으로 거대한 너럭바위들이 제멋대로 흩어져 있으면서도, 태고의 질서에 순응하듯 물을 담아내고 있는 모습이 그의 마음에 들어왔나 보다. 그는 곧바로 좌선에 들어갔다. 너무나 아픈 자책도, 갈 곳 없는 외로움도, 물에 잠긴 쓸쓸함도 모두모두 저 황해바다에 풀어버리리라.

아무것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저녁답, 나는
집에 안 가려 떼를 쓰는
새끼염소나 달래면서

마침내 아무것도 아무 생각도 없다. 무녀무상. 곧바로 일어나 바위에 네 글자를 새긴다. ‘함허동천’ -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에 잠겨 있는 곳. 친구여 이제 잘 가라. 내 마음 속에서도 너는 편안히 잠들라. 한 점의 번뇌도 없이 맑은 마음으로 내 이곳에서 머물겠노라.

늦은밤에 도착한 함허동천. 모두가 고요히 잠든 숲길에서 고즈넉한 하늘을 바라보았다. 여기 친구를 잃은 슬픔을 승화시킨 한 스님의 일갈이 들리는 듯하다. 슬픔이 슬픔을 키운다. 외로움이 외로움을 기른다. 쓸쓸함이 쓸쓸함을 돌본다. 다시 좋은 삶이 무엇인가, 자문해 본다.

* 제목과 시는 전동균 시인의 시 ‘함허동천에서 오래 서성이다’를 그대로 옮겨 온 것이며, 안의 험허대사에 대한 이야기는 단편적인 사실을 나름대로 상상해 엮어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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