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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겹게 비가 오고 있다. 9월 중순에 접어들고 있는데, 장대비가 하루 종일 온다. “이건 세상이 미치니까 하늘도 미친 거야.” 누군가가 낮게 뇌까렸다. 비가 오는 낙원상가 한편에 뿌연 헤드라이트 불빛들이 스쳐간다. 불과 며칠 전까지 뜨겁게 내리쬐던 여름의 흔적도 장대비 속에 사라져간다. 이날 나는 채만식의 삼대를 영화 속에서 다시 만나는 데자뷰를 경험했다. 박동훈 감독의 영화 <계몽영화>는 일제 강점기와 산업화 시대, 현대를 이어온 3대의 이야기를 때로는 재미있게, 때로는 슬프게, 때로는 가슴 뭉클하게 우리를 끌어들였다.


오해도 있었다. 3대의 이야기를 영화에서 다룬다고 하는데, 과연 그 엄청난 한국의 근현대사를 영화에 담는 게 가능한거야? 괜히 장엄한 근대사의 물결 어쩌구저쩌구하는 계몽 퍼레이드는 아니겠지? 아니면, 좌파적 감상으로 주류 기득권을 향한 냉소와 비판의식에 쩔어 있는 영화가 아닐까? 




아, 그 모든 내 상상력은 거기까지다. 그러니 나는 영화감독도 못하고 글도 못 쓰는 거다. 영화는 내 생각을 비웃듯이 꽤 재미있으면서 진지하고, 진지하려다가 갑자기 뒤통수를 확 잡아채는 짠함을 던져주고, 슬퍼지려는 격정 앞에서 다시 관객의 자세를 다잡아준다. 정학송과 그의 아내가 세 번째 만나는 국제중앙다방의 데이트는 시종일관 비실비실 웃음을 던져주었다. 하지만, 둘이 나누는 이야기에는 우리 세대가 모를 아픔이 고스란히 묻어 있었다. 둘은 피난길의 시체 이야기들로 핏대를 올렸는데, 결혼을 합의하려는 자리에서 생뚱맞은 시체 이야기는 그 시대의 상처가 무엇이었으며, 그것이 그 세대에게 어떻게 각인되어 있는지 유쾌하게 드러내고 있다.


나아가 정학송의 아버지 정길만의 이야기는 어떤가. 정길만은 동양척식주식회사를 다니면서 농부들의 핍박하는 조선인 앞잡이로 살지만, 그래도 일말의 양심은 있는지 밤에 농부들에게 살해당하는 꿈을 꾸는가 하면, 술김에 일본 간부에게 일의 문제점을 이실직고 하고 마는 순진한 애아빠다. 그런 그에게 어릴적 동네에서 함께 자랐지만 독립운동을 하고 있는 친구가 찾아온다. 그러나 정길만은 그 친구를 고발하고 자신의 일가를 보전한다. 




1대나 2대 모두 그렇게 악독하고 모진 사람들은 아니었다. 모진 시대의 흐름에 부대끼며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각만 하고 있었던 앞 세대의 진실이었을까.


김훈은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세상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모든 먹이 속에는 낚시바늘이 들어 있다. 우리는 먹이를 무는 순간에 낚시 바늘을 동시에 물게 된다. 낚시를 발려내고 먹이만을 집어 먹을 수는 없다.”


그네들은 그런 시대를 살았다. 시대가 어려울수록 낚시 바늘은 더욱 강고하고 튼튼했다. 가난의 시대, 억압의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의 삶에는 강한 낚시 바늘이 그들의 삶을 지배하고 있던 것이다. 1대의 진실 친일과 2대의 진실 가부장제는 여전히 우리 사회에 남아 우리 세대, 다음 세대를 흔들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거기서 벗어나려 하면 할수록 낚시바늘은 더욱 우리를 옥죄어 오고 우리에게 상처를 줄 것이다. 그렇다고 가만히 앉아 죽을 수만은 없다. 악함, 부정, 슬픔, 아픔 등은 모두 없었으면 하는 것들이지만, 실상 우리 삶의 한 부분이다. 모두 선함, 긍정, 기쁨, 즐거움이라는 가치와 서로 의지하면서 존재하는 것들이다.






고통스럽고 비극적인 과거의 일들을 재조명해 보는 일은 그래서 필요하다. 감출 필요도 없고 부정할 필요도 없고 단죄는 더더욱 신중해야 한다. 역사의 희생자들이 있다면 보듬어 안고 가는 일만 남았다. 죽어가던 정학송은 내내 침대에 손이 묶여 있었다. 친일 부역자의 자식이며 가부장제의 화신인 그가 마지막 가는 길에는 침대에 꽁꽁 손이 묶여 있었다. 영화는 정학송의 손을 풀고 다정히 손을 잡아주길 원하고 있다. 용서는 깊은 이해에서 나올 수 있고, 그 혜택은 현재를 살고 있는 사람에게 돌아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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