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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종 고척도서관에 간다. 대학 때 이후로 이렇게 자주 도서관에 드나드는 건 정말 오랜만이다. 쉬는 게 이래서 좋은 건가, 싶으면서도 뭐 이런 생활이 언제까지 가겠냐 싶다. 그래서 즐긴다.


아무튼 도서관에 가다보면, 반드시 고척근린공원을 지난다. 제법 규모가 큰 공원이며 광장 외에 스탠드가 갖추어진 운동장도 있고, 미취학 아동들이 즐길만한 조그만 놀이터도 있으며, 운동시설도 갖추고 있다. 평상도 여기저기에 갖추어져 있어 한낮에 아이들과 산책나온 주부들이나 심심풀이로 나온 노인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이날은 사생대회가 있었는지, 여기저기 중고등학생들이 많다. 이런 일은 드물다. 평일 한낮에 학생들을 흔하게 볼 수 있는 일은 없다는 말이다. 현수막을 보니 구로구에서 주최하는 구민 사생대회다. 학생뿐만 아니라 주부 등 일반인도 참가하는 대회로 보인다. 호기심에 한바퀴 둘러보자는 마음에 공원을 거닐었다. 그리고 뜻밖의 풍경들을 만났다.


광장의 쉼터는 크게 3군데로 나누어진다. 무대 양편에 한곳씩, 무대 맞은편에 한 곳 이렇게 세 곳에는 그늘막과 평상과 벤치가 놓여져 있다. 사생대회가 끝나고 찾아간 그곳은 흘러가는 시간을 즐기는 사람들의 심심풀이 오락장이었다.


먼저 무대를 마주보고 왼쪽에서는 반상위에서 흑백의 대결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다. 대략 60대 이상의 남성노인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저 바둑판들이 어디서 나온 것일까 신기할 정도다. 공원측에서 마련한 것 같지는 않다. 바둑이란게 한번 빠지면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른다고 하는데, 여기의 노인장들은 썩을 도끼 같은 건 없을 듯하다. 이런 노년이라면 행복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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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무대의 오른편 쉼터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곳은 한나라와 초나라의 싸움판이다. 장이야 멍이야 큰소리가 오가고 장기알이 세차게 장기판을 두드리는 소리가 요란하다. 지나가는 말처럼 흘려내는 훈수에 화들짝 놀라는 할아버지의 고함이 어딘가 익숙하다. 서울 한복판 공원에서 이렇게 재미있게 장기를 두시는 분들이 바로 이 공원에 있었다.


마지막으로 무대 맞은편 쉼터로 가본다. 멀리서 보니 이곳에는 앞의 두 곳과 다르게 아주머니와 할머니들이 대세다. 간간히 할아버지도 있지만, 극소수에 불과하다. 좀전까지 흑과 백, 한나라와 초나라가 싸우는 판이었다면, 여기는 꽃들이 싸운다. 화투. 여기저기 웃음꽃이 끊이지 않는다. 작은 군용 모포까지 준비되어 있다. 거기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판돈들은 죄다 10원짜리. 세상은 10원짜리가 모자르다고 난리인데, 이 동네 10원짜리는 죄다 여기 모여 있나 보다. 간혹 100원짜리도 나오겠지만 판은 더 이상 커지지 않는 듯하다.


나같이 젊은 놈들이 낄 판은 어디에도 없다. 한 세상 건너오며 이리저리 치인 분들이 이제 딱정이마저 굳어버린 삶의 상처들을 부려놓고 남은 시간들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추운 겨울에는 어려웠을 아주 재미있는 풍경들이 5월의 따스한 봄날 공원을 메우고 있다.


물론 이렇게 이야기한다고 해서 이 공원에 어르신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농구장에는 10대 학생들이 던지는 공 2~3개가 골대를 번질나게 오가고 있고, 광장은 꼬맹이들의 위험하기 짝이 없는 자전거질과 인라인을 배우는 초보 젊은 여성의 위태로운 몸동작이 눈에 잡힌다. 우레탄길 운동코스를 열심이 걷거나 뛰고 있는 이들은 대부분 청장년층이다.


일상에 바빠서 찾아다니지 않았던 고척근린공원의 봄은 그렇게 따스하게 우리 곁에 성큼 다가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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