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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잃고 길을 찾다 



- 백두대간 지리산에서 덕유산까지 9박10일의 이야기 5
- 고기삼거리 - 여원재 - 매요리(18.2km)

- 2008.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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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보니 전날밤 늦게 잠들었다. 방안에는 빨래와 젖은 물건들을 늘어놓아 한쪽 구석에서 초라하게 잠들었다. 밤새 방바닥은 뜨겁게 달궈졌다. 주인께 방에 불을 넣어달라고 말했기 때문인데, 더워도 젖은 물건들을 말리기 위해서는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늦잠을 잤다. 오랜만의 게으름이다. 기상 예보는 오전 중에 날이 갤 것이라고 알려왔다. 휴대전화를 꺼내 전원을 켜보았다. 그러나 응답이 없다. 젖어서 내부기판에 무리가 갔을 수도 있다. 배터리를 분리하고 당분간 휴대전화는 켜지 않기로 했다.


9시에 밖으로 나왔을 때는 가랑비가 좀 내리고 있었다. 이 정도 비는 그냥 맞고 가자고 생각했다. 짐을 정리하는데, 다행히 옷가지와 물건들이 대부분 잘 말랐다. 신발 역시 완전하지는 않지만 그럭저럭 신을만했다. 10시에 나와 보니 날이 갰다. 비가 그친 것이다. 준비했던 우의를 가방에 넣고 가볍게 발걸음을 옮겼다.  


백두대간은 우리가 묵었던 마을처럼 낮은 자세로 마을들을 지날 때가 있다. 여기서는 지방도로를 따라 북쪽으로 향한다. 이런 길도 백두대간일까 싶지만, 해발 500m 이상에 위치해 있는 대간의 한 줄기다. 본격적인 산행길로 들어서는 가재마을까지는 한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어제 몰아친 비바람 때문인지, 멀리까지 시야가 맑게 트였다. 고기삼거리에서는 우리처럼 백두대간을 타는 사람들이 산행을 준비하는 모습이 보였다. 반갑게 인사했다. 이날은 일요일이라 많은 이들이 산악회나 산모임 등으로 백두대간 산행에 나섰다.


우리는 예전 추억을 되새기면서 가재마을 가게 앞에서 막걸리를 주문해 한잔 했다. 동행과 함께 하는 막걸리 한잔은 멋진 추억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다. 지리산 자락 사람들은 대부분 지하수를 끌어다 마시는 편인데, 가재마을의 노치샘은 고기삼거리 민박집에서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했다. 심지어 노치샘에 비하면 자신들이 마시는 지하수는 썩은 물이라는 비교도 서슴지 않을 정도다.


노치샘을 지나 산등성이로 올라가기 시작하니 여기저기 대간 등산객들이 많이 보인다. 이미 대단위의 등산팀들이 이곳을 지나친 흔적도 보였다. 가재마을에서 수정봉으로 가는 길은 예전에도 한번 지났던 길이다. 2006년에 수정봉을 찾았을 때는 팻말도 없이 ‘수정봉’이라고 쓰인 종이만 나뭇가지에 걸려있었는데, 지금은 잘 다듬어진 나무팻말이 박혀 있다. 그만큼 백두대간에 대한 정부와 지자체의 관심이 많아진 것이다. 사실 이런 작은 봉우리를 넘어가겠다고 전국 각지에서 사람들이 찾아오고 노치샘이 있는 가재마을에 사람들이 북적이게 된 것도 순전히 백두대간 덕분이다.


아침 안개가 옅게 드리워졌지만, 등산에는 지장이 없다. 소나무 군락지를 이루고 있는 이 길은 산 타는 것을 힘들어 하는 이들에게도 충분히 즐기면서 산행을 할 수 있는 곳이다.


“유니콘이라도 튀어 나올 것 같다.”


기석이 던진 말처럼 여원재까지 가는 등산길은 몽환적이고 환상적인 분위기를 보여주고 있었다.








여원재에서 점심을 먹고 기석은 서울로 향했다. 나를 혼자 두고 가는 것이 미안하다는 친구다. 난 고맙다며 힘있게 그의 손을 잡았다. 진심으로 함께 한 1박2일 산행이 나에게는 큰 힘이 되었고, 서울로 도망가고 싶었던 나의 등을 산으로 밀어준 큰 격려였다. 그 친구가 아니었다면 이 산행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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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여원재를 떠나 고남산을 향해 가기 시작하면 본격적인 난관이 시작됐다. 잡풀이 어제처럼 발목을 잡았다. 여원재까지 오면서 거의 마르기 시작한 등산화는 다시 젖기 시작했다. 독도도 어렵고, 길잡이를 해준 리본들도 어지럽게 헷갈린다. 결국은 길을 잃고 말았다.

친구와 헤어지고 길을 잃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벌어지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대간길이라 생각하고 올라가는데, 어느덧 벌목된 나무들로 인해 길잡이 리본들은 도통 볼 수가 없다. 대략 지도정보와 눈에 보이는 봉우리와 길들을 짐작해 찾아 올라가는데 뜬금없이 큰 무덤 하나가 딱 길을 가로막고 있다.
거기에서 길이 끊겼다.

이리저리 살펴보고 내 위치를 짐작해 보니 장치로 올라가는 길을 잘못 잡은 것 같았다. 이름모를 무덤의 주인장에게 길을 물어본다고 가르쳐줄 리도 없고, 그저 주저앉아서 나침반과 지도만을 보고 내가 가야할 길을 가늠해 보았다. 무덤 뒤편 능선을 향해 치고 올라가면 대간길과 만날 수 있을 거라는 짐작으로 길을 만들기 시작했다.
토끼들이나 지났을까, 길은 보이지 않고 온갖 잡목들이 온몸을 붙잡았다. 간신히 능선길로 올라갔지만, 대간길이 아니다. 다시 양옆의 능선이 보였다. 이러다 길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마는 것이 아닐까 덜컥 겁이 났다.

다시 지도를 살폈다. 마을을 두고 왼쪽으로 빙둘러가는 대간길을 유심히 보았다. 분명 고남산은 오른편에 있지만, 마을길과 비교해보면 왼편에 대간의 마루금이 걸려 있을 것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왼편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마침내 대간길과 만날 수 있었다. 지도를 보니 장치와 합민성을 그냥 지나친 듯싶다. 한시간 가까이 헤맨 결과치고는 나쁘지 않다. 최악의 경우 여원재로 다시 돌아가 길을 되찾아야 하는 상황에서 다행히 지도를 잘 살피고, 지형지물에 대해 제대로 판단한 것이 좋은 결과를 가져왔다.


우여곡절 끝에 홀로 고남산에 올랐다. 고남산까지 오르는 길은 오랜만의 가파른 등반길이긴 하지만 그렇게 힘들지 않다. 게다가 능선길이라서 산등성이를 타고 넘어오는 바람이 시원하다. 소나무숲이 잘 만들어져 있어 숲길을 걷는 즐거움도 크다. 하지만 고남산을 넘자 다시 길이 헷갈린다. 길잡이 리본도 여기저기 어지럽다. 다시 지도를 수시로 꺼내놓고 길을 찾아야 한다. 임도와 산길을 수시로 오가면서 길은 진행된다. 다시 구름이 짙게 드리워지고 이슬비가 살살 내리기 시작했다.






길을 찾느라 고생한 때문인지 매요마을에는 예정보다 늦은 시간에 도착했다. 마을 적당한 공터에 텐트를 쳐야겠다고 생각하고, 백두대간 때문에 유명해진 매요휴게소를 찾아갔다. 그러나 매요휴게소는 사람들 싸움에 어수선했다. 주먹다짐까지 오가는 싸움을 옆에서 보고 있는 것도 아닌 것 같아 바깥으로 짐을 들고 나왔다. 길을 가는 할머니에게 마을회관 앞 공터에 텐트를 쳐도 되겠느냐고 물어보니, 괜찮지만 이왕이면 민박집에서 쉬지 그러냐고 물으신다. 매요마을에 민박집이 있을 거라는 건 전혀 모르고 있었기에 좀더 자세히 물어보았다. 마을 위쪽에 노부부가 민박집을 하나 내서 운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음날 산행을 위해서는 텐트보다는 당연히 민박집이 좋다. 물론 비용이 들기 마련이지만, 잘 쉬는 것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민박집은 어렵지 않게 찾았다. 얼마냐고 물어보니 알아서 달라고 하셨다. 민박집에서 신문지를 얻어 등산화 안에 채우고 조금 남은 저녁볕에 말렸다. 그리고 여전히 먹통인 휴대전화 때문에 민박집 전화를 빌려 집에 전화했다. 마지막으로 김치를 좀 얻어 저녁찬과 아침찬으로 해결했다.




내가 묵게 된 민박집은 2층인데, 아래층은 주인 내외분이 사시고, 2층을 손님들에게 빌려주었다. 방에는 살림이나 세간이 그대로 있었다. 책상에는 읽던 책들이 그대로 꽂혀 있다. TV는 없었지만 라디오와 오디오기도 있었다. 민박집 치고는 좀 황당하다 싶었지만, 그런대로 인간미가 넘쳤다. 2층 베란다는 꽤 넓고 민박집이 산자락에 붙어있어 매요마을이 한눈에 들어왔다.


이날밤은 쓸쓸히 혼자 보냈다. 친구의 빈자리가 크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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