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에 뜨는 별/서가에 피는 꽃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구상나무 2026. 2. 28. 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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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겨울부터 시작된 파반느와의 만남이 얼마전 막을 내렸다. 그동안 나는 박민규의 원작 소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를 천천히 읽었고, 중간쯤 읽고 있을 때 KBS 라디오 극장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를 출퇴근 시간에 틈나는대로 듣기 시작했다. 책은 시처럼 읽다가 쉬다가 다시 읽었고, 라디오는 귓속으로 들어오는 성우들의 맑은 목소리와 대사의 생동감으로 느꼈다. 그리고 얼마전 넷플릭스로 <파반느>가 개봉했다. 책을 다 읽고, 라디오 극장도 끝난 후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시청한 <파반느>는 그럭저럭 괜찮았지만 책이 주었던 상상력과 라디오 극장이 더한 생명력이 영화에서는 충분히 살려주지 못한 아쉬움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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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놈팽이였어. 어머니가 피땀 흘려 밖에서 벌어오면 그 돈으로 자기를 치장하고 영화판을 기웃거리며 자신의 출세길만 생각했던 거지. 그렇게 아버지는 어머니와 나를 버리고 돈 많은 여자와 결혼했어. 애시당초 그 남자는 어머니를 사랑하지 않았던 거야. 동정도 아니었고 호의도 아니었으며 연민도 없었지. 그저 빌붙어 피를 빨아먹은 거머리였어. 그 남자가 떠나고 난 뒤에도 엄마는 한참동안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어. '나'의 이 유년의 기억들은 사랑에 대해 회의하고 그 감정을 하찮게 여기게 만들었어. 아버지는 '나'의 상처이자 나를 단련한 용광로였고, 내가 살아가는 힘이었지. 얼굴값? 꼴값... 

그러던 어느날 '그녀'가 나타났다. 모두에게 놀림받고 터부시되며 다가서는 안될 존재로, 버림받은 개처럼 지하주차장 한켠에 내버려진 여자. 그저 못생겼다는 이유로 누구도 가까이 하지 않고 심지어 놀잇감으로 전락해 잔뜩 찌그러져 있는 사람. 그에게 '나'는 눈길이 갔어. 아버지에게 버려진 어머니 때문일까? 아마도 시작은 그럴 거야.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그저 그의 겉모습만 보고 그 가치를 폄훼하는 현상, 이 잔인한 자본주의의 총화 백화점에서는 세 걸음마다 한 번씩 볼 수 있을만큼 자주 마주치는 현상 아니던가? 

그래서 그녀에게 눈길이 간 거다. 그리고 말했다. "우리 친구할래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 하지만 쟤는 진심(眞心)이야.

 

그렇게 요한 형과 '나'와 '그녀'는 켄터키치킨 집에서 맞은편 bear 가게의 간판을 보며 'hope'를 들이마시고 많은 이야기를 하며 살았지. 그렇게 우리는 사랑했어. 3개의 창(연민, 호의, 동정)을 말하며 걱정스럽게 나를 보던 요한 형의 우려와는 다르게 '나'는 '그녀'를 '사랑'으로 마주했으니까. 그녀와 내가 헤어진다는 건 마치 "손끝 발끝의 모세혈관에까지 뿌리를 내건 나무 하나를, 통째로 흔들어 뽑아 버렸다"는 것과 같다고 말했어.

그러다가 '나'는 지하주차장 일을 그만두고 대학에 진학했어. 소설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에서였지. 대학이라는 곳은 또 얼마나 낭만적인가? 그렇게 켄터키치킨과 멀어지고 hope 대신 학교 앞 hof 집을 다녔고, bear 대신 beer를 마시기 시작했지.

그런데 어느날 요한 형이 손목을 그었어. 정신병동에 갇힌 요한 형을 만났지만 그저 멍한 눈으로 한곳만 보고 있는 형을 만났지. 그렇게 수다스럽던 형은 왜 스스로를 가두고 입을 닫아버렸을까? 그리고 그녀와의 연락도 끊겼어. 그녀는 나에게 장문의 편지를 남기고 백화점을 그만두었지. 잘생긴 '나'와 못생긴 '그녀'는 서로를 사랑하지만 사회가 만들어 놓은 편견과 차별의 벽을 넘지 못한 거야. 나를 사랑하니까, 떠난다는 그녀의 글을 보면서 아무말을 할 수가 없었어. 

하지만 세상은 여전히 차갑고, 당신의 곁에 서 있는 나의 모습이 당신을 힘들게 할까 봐 두렵습니다. 나는 이제 나를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외모가 아닌 오직 나의 존재만으로 살 수 있는 곳으로 떠나려 합니다.(중략) 부디 나를 찾지 마세요. 당신의 기억 속에서 나는 언제나 가장 아름다운 왕녀로 남고 싶습니다. 당신이 나에게 주었던 그 따뜻한 눈빛과 시간들을 평생의 보석으로 간직하며 살겠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잊혀질 거라 생각했어. 다시 지하주차장에서 일할 때는 '희재'라는 명품샵에서 일하는 예쁜 여자애도 만났지. 그저 껍데기만 좋아했지, 알맹이는 아무것도 아니더라. 그런데 희재를 통해 '그녀'의 주소를 알게 됐어. 집앞까지 찾아갔지만 그냥 돌아섰어. 스스로 나를 떠난 사람이잖아. 이렇게 불쑥 얼굴을 내미는 건 아니잖아. 아직 '그녀'는 나를 만날 준비를 하지 않았을 거야. 조용한 '그녀'의 삶에 다시 파문을 만들 수는 없잖아. 그래서 '나'도 장문의 편지를 남겼어. 12월 25일 다시 이곳에 올테니 만나고 싶다면 나와 달라고 남겼지. 

그렇게 그녀를 만났어. 우리는 서로의 마음을 다시 확인했어. 나는 여전히 그녀를 사랑하고 그녀도 나를 사랑하고 있었지. 그렇게 우리는 다시 만나기로 했어. 하지만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나는 지독히 내리던 눈에 미끄러진 버스가 전복되면서 큰 사고를 당해. 


여기서부터는 결론이 두 개야.

하나는 그 사고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나는 그야말로 또 다시 기적적인 재활에 성공하고 그 이야기를 글로 담아 크게 성공하는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지. 하지만 그녀와 만난 이후 갑자기 연락을 끊은 나로 인해 그녀는 이미 한국에 남아 있지 않고 머나먼 독일에서 삶을 살고 있었지. 어렵게 알아낸 연락처를 들고 독일까지 찾아가 그녀를 만나고 다시 사랑을 하게 돼. 아름다운 이야기지. 

그런데 다른 하나는 달라. '나'는 그 버스 전복 사고로 세상을 떠나. 그리고 요한 형이 '나'와 '그녀'의 이야기를 소설로 써서 세상에 내놓지. 요한 형은 '그녀'와 결혼했어. 요한 형도 그녀의 외모가 아닌 내면의 아름다움을 보았던 거겠지. 그렇게 '나'의 젊은 날 세상의 편견과 싸우며 순수한 사랑을 보여 주었던 '나'와 '그녀'의 이야기가 세상에 나오게 되지. 


스무살. 어색하고 부끄러운 나이.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패기와 자신감도 충만하지만 그 이면에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부끄러움', '눈치'가 커가는 시기이기도 하다. 작가는 '못생김'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왜곡된 시선을 '그녀'가 닥치는 여러 현실과 '그녀'가 남긴 말과 행동과 글로 가감없이 드러냈다. 그녀와의 로맨스는 그래서 평범하지 않다. 그래서 소설은 거친 투쟁의 서사이며 날선 복수의 담론이다. 결국 이 싸움은 처절하고 슬프고 비참한 비극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 모리스 라벨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는 이 소설의 전체의 정서를 지배한다. 상상력을 부르짖는 요한은 그래서 모순적이다. 못생김을 못생김으로만 받아들이지 말고 상상력을 키우라고 하지만, 사실 사랑은 상대를 상상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실체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이라는 점을 '나'는 강변했다. 

'죽은 왕녀'는 그래서 못생김을 이유로 지워져 버린 것들에 대한 진혼곡이다. 온갖 전설과 동화, 만화 속에서 많은 왕자와 용사들이 왕녀를 구하기 위해 용의 동굴로 돌진한다. 그런 왕녀는 반드시 아름다워야 하고 구하고 지킬 가치가 있어야 한다. 시각적 자극이 남발되는 현대 사회에서는 왕녀들이 더더욱 아름다워지고 고귀해진다. 그녀는 용에 잡혀 있고나 높은 성에 붙잡혀 있을 뿐인데 말이다.

작가는 시각적 자극으로 대변되는 우리 사회의 편견을 비판하면서 음악적인 장치를 여기저기 두었다. 작품의 제목도 그러하지만 80년대 팝송과 가요들이 작품의 곳곳에서 우울하고 비이성적인 사회상을 드러내 주고 있다. 컬처 클럽(Culture Club) - <Karma Chameleon>는 신나는 비트와 리듬의 곡이지만 겉모습에만 열광하는 세상의 풍경을 보여 주는 장치이다. 

우리가 말다툼할 때 당신은 매일 거짓말을 하는군요. 그게 당신의 방식이라면 난 당신을 믿을 수 없어요. 내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나요? 아니면 내가 듣고 싶은 말만 하는 건가요? 당신은 감정을 숨기려 하지만, 당신의 눈동자엔 두려움이 가득해요.
-컬처 클럽(Culture Club) - <Karma Chameleon> 중에서

눈에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 외모 보다는 내면, 시각보다는 청각이 소설 전반을 지배하는 사상과 철학이다. 외모에 대한 시대의 폭력적 시선을 거두고 내면의 심장 소리를 듣는 음악처럼 느린 왈츠곡에서 빠른 비트의 팝송까지 글자라는 매체에만 얽매이지 않고 독자들에게 청각적 즐거움까지 누릴 수 있는 장치들을 만들었다. 소설을 읽다 보면 해당 음악이 나오는 장면에서는 굳이 읽는 것을 중단하고 등장인물들과 함께 그 음악을 듣다보면 이들과 함께 공간을 점유하고 있다는 상상을 하게 된다. 

또 작가는 행을 엉뚱한 곳에서 잘라 먹는다. 이 독특한 문단 배치는 처음에는 무척이나 어색하다. 왜 여기서 끊었는지를 생각하게 하고, 천천히 그 잘린 부분을 다시 읽게 한다. 즉 작가의 의도적인 이끌림에 독자가 빨려 들어가게 한다. 

 

이 독특한 줄바꿈, 그로 인한 여백은 독자들이 소설을 읽는 흐름을 끊어 버리는 단점도 있지만 중간 중간 중요한 지점에서 한번쯤 쉬어 가면서 여백에 담은 작가의 의도를 생각하게 한다. 책을 읽는 속도는 느려지지만 종종 시를 읽는다는 착각이 들게 만든다. 문장을 끝맺지 않고 다음 줄로 넘기거나 단 하나의 문장만 독립적으로 남겨 놓는 방식은 한 박자 쉬어 가게 만든다. 섬세한 인물의 심리 묘사나 중요한 사건의 전개에서 독자에게 보다 깊은 몰입을 준다. 쭉쭉 읽어가던 흐름이 발목이 걸린 것처럼 주춤하게 되고 작가의 의도에 끌려가는 기분도 들지만 소설을 다 읽고 나서 느끼지만 좋았다. 만일 내용이 80년대의 감성과 낭만, 연애를 다룬 소설이 아니라면 엄두를 내기 어려운 시도임에는 분명하다. 그런데 이 작품은 보기 좋게 성공했다. 때로는 시처럼 때로는 소설처럼 시대와 사랑을 느꼈다. 마음의 박자로 글자 바깥의 여백으로 이야기를 만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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