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에 뜨는 별/서가에 피는 꽃

형사는 어떻게 단련되는가? | <13.67>

구상나무 2026. 11. 1. 21:44
반응형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관통한다. 5.18과 87년 민주 항쟁, 전교조, IMF를 거쳐온 내 젊은 날도 그랬다. 한때는 통일 대한민국의 역사적 소명 의식을 품은 민족주의자로, 또 어떤 때는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사회주의자로, 그러다가 민주적 전통을 강조하는 시민으로 삶의 곳곳을 살아온 것 같다.

영웅들이 겪어낸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은 알게 모르게 인생의 중요한 순간마다 결정적인 나침반으로 작용해 삶의 방향을 뒤흔든다. 삶을 치열하게 살아온 영웅이라면 역사의 흐름과 일치하는 삶을 살 수밖에 없다. 덜 익은 신념이라고 누군가는 욕하겠지만, 그런 신념은 아직 증명되지 않은 진실을 치열한 삶으로 증명하는 과정이다. 고뇌와 갈등 속에서 삶은 강렬하게 빚어낸 이야기로 남아 역사가 되고, 그 역사에서 영웅이 탄생한다. 

소설 <13.67>에서는 권전둬 형사가 그렇다. 이 소설은 범인만 잡고 끝나는 평범한 추리 소설이 아니다. 홍콩의 현대사를 타임머신 탄 듯 거꾸로 훑고 올라가는, 꽤나 '사회파적인' 작품이다. 역사적 분기점마다 터진 대형 사건들을 배경으로 범죄가 일어나는데, 그 속에서 '100퍼센트 사건을 해결한 형사' 관전둬는 자신과 동기들과 후배들에게 묻는다. "대체 경찰이란 권력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80~90년대 우리가 열광했던 홍콩 영화 속 형사들은 늘 선택의 기로에 서 있었다. 부패한 경찰이 될 것인가, 시민을 지키는 형사가 될 것인가. 조폭과 경찰들이 뒤엉킨 그 영화의 바탕에는 홍콩 사람들의 깊은 정체성 혼란이 깔려 있다. 본래 중국 땅이었다가 100년간 영국의 조차지를 거쳐 다시 중국으로 돌아간 홍콩의 팔자처럼 말이다. 영화 <무간도>는 그런 홍콩의 정체성 혼란을 잘 보여 주는 영화였다. 나는 삼합회(조폭)인가, 형사인가? 두 주인공 중 한 명은 삼합회이면서 경찰에 잠입하고, 또 다른 주인공은 경찰이면서 삼합회 세계에 잠입해 활동한다. 이런 정체성 혼란의 역사 가운데에는 홍콩의 경찰이 있었다. 그야말로 어떤 정부 밑에 있느냐에 따라 뒤바뀌는 뒤웅박 팔자인 거다.

이 소설은 각 장마다 당시 홍콩을 뒤흔든 굵직한 역사적 사건들을 디딤돌로 삼아 달린다. 그 시절 홍콩이 어떤 스펙터클을 겪고 있었는지 살짝 들여다보면 이야기의 맛이 훨씬 살아난다.


 


1장 흑과 백 사이의 진실(2013)과 2장 죄수의 도의(2009): 돈과 조폭, 그리고 초고속 성장의 그늘

이야기의 시작(이자 관전둬의 인생 끝자락)인 2000년대 후반부터 2010년대의 홍콩은 그야말로 '금융과 자본의 천국'이자 삼합회가 신사복을 입고 기업형으로 진화하던 시기다. 거대 재벌의 유산 싸움과 조폭들의 경쟁이 심화되는데, 겉으로는 첨단 마천루가 솟아오른다. 그러나 화려하기 짝이 없는 풍경 뒤에는 극심한 빈부격차와 돈이면 다 되는 황금만능주의가 팽배했다. 관전둬는 침대 위에서 뇌파 모니터에 의존하면서도 이 탐욕스러운 인간들의 머리 꼭대기 위에서 놀아준다.

3장 가장 긴 하루(2003년): 마스크 속의 공포, 사스(SARS) 파동

2003년, 홍콩 전체가 사스(SARS)라는 비상의 바이러스와 싸우며 멘붕에 빠졌던 해다. 거리엔 사람도 없고 온 도시가 격리 병동 같던 그 시절, 악명 높은 탈옥수가 온 동네를 쏘다닌다. 시민들은 감염될까 무섭고, 경찰은 인력이 부족해 죽을 맛인 상황. 그 혼란 속에서 관전둬와 제자 뤄샤오밍은 바이러스와 살인마라는 '쌍둥이 악재'를 동시에 상대해야 했다.

4장 테미스의 천칭(1997년): "이제 주인이 바뀐다?" 홍콩 반환의 날

1997년 7월 1일, 99년간의 영국 통치가 끝나고 홍콩이 중국으로 돌아간 역사적 순간이다. 당시 홍콩 사람들의 불안감은 극에 달했다. "이민을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대혼란의 시기. 권력이 영국 총독부에서 중국 당국으로 넘어가는 대전환기 속에서, 경찰 내부의 부패와 눈치 보기는 최고조에 달한다. 정권이 바뀌는 서막에서 법과 정의의 균형을 잡으려는 관전둬의 외로운 저울질이 빛을 발하는 배경이다.

5장 빌려온 공간(1989년): 건너편에서 터진 대형 사고, 천안문 사태의 여파

1989년, 바다 건너 베이징에서 터진 천안문 사태는 홍콩 대중에게 엄청난 충격과 공포를 안겨주었다. "머지않아 우리에게도 저런 일이 터지는 거 아냐?"라는 불안감이 도시 전체를 감쌌고, 영국 스파이들과 중국의 공작원들이 홍콩이라는 '빌려온 공간'에서 치열한 암투를 벌였다. 이 시기 발생한 인질 사건의 뒤편엔 강대국들의 정치적 셈법과 거대한 음모가 얽혀 있었다.

6장 빌려온 시간(1967년): 낭만 따윈 없다, '67 폭동'과 신출내기 순경

소설의 하이라이트이자 결말인 1967년. 중국의 문화혁명 바람을 탄 좌파 단체의 테러와 이에 맞선 영국 총독부의 무자비한 진압으로 홍콩 전체가 피로 물들었던 '67 폭동' 시기다. 길거리엔 진짜 폭탄과 가짜 폭탄이 굴러다니고 무법천지가 따로 없던 시절, 이제 막 경찰 제복을 입은 신입 경찰이 뛰어난 추리력을 가진 점원의 도움을 받아 대규모 테러를 사전에 수습한다.


우리에게 홍콩은 <영웅본색>의 주윤발이 바바리코트를 휘날리며 쌍권총을 쏘던 무법도시로 기억되지만, 그 이면엔 좌파 테러와 백색 테러가 엇갈리며 피를 흘리던 비극의 역사가 숨어 있었다. 그 지옥 같은 혼란 속에서 시민들을 지키기 위해 발로 뛰고, 동시에 권력이 가진 모순과 외롭게 싸워야 했던 한 형사의 일생.

마지막 6장 '빌려온 시간'의 책장을 덮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깨닫게 된다. 전설적인 형사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시대의 비극과 모순이라는 혹독한 용광로 속에서 단련되어 만들어진다는 것을.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