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살아 천년 죽어 천년, 주목처럼 살아라
- 백두대간 지리산에서 덕유산까지 9박10일의 이야기 9
- 삿갓재대피소 >> 동엽령 >> 송계삼거리 >> 향적봉 >> 무주리조트(약 10.7km)
- 2008.07.03.
비는 그쳤다. 하지만,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한 날씨다. 배낭에만 우의를 둘러주었다. 다시 신발끈 꾹 메고 길을 나섰다. 이날만큼은 동행이 있다. 함께 삿갓재 대피소에 묵었던 아저씨다. 아저씨는 향적봉까지 가고 거기서 하산하겠다고 했다. 짧은 동행길이지만, 헤어지게 되면 몹시 흔들린다. 머릿속에서는 적당한 타협의 회로가 빠르게 돌아갔다.
‘그래, 어차피 덕유산 향적봉을 찍으면 다 온 거니까. 그리고 괜히 하룻밤을 더 묵는 것보다 그냥 하산하자. 다음에 다시 향적봉으로 올라와 나머지 구간을 계속 가면 되겠지.’
‘아냐, 그래도 처음 계획한대로 가야겠어. 그냥 하루 푹 쉬면 내일 수월하게 마무리할 수 있을 거야.’
아저씨가 먼저 출발한 다음,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많이 지쳤던 것일까. 이제 그만 돌아가고 싶다, 고 생각했다. 끝이 보이니 그 생각은 더욱 강했다. 가만히 있으니 드는 잡생각이다. 일단 걷자. 부지런히 아저씨 뒤를 쫓았다.
삿갓재 산장을 나오자마자 또 급한 오르막길이다. 보슬비까지 내리기 시작했다. 언제 장대비로 바뀔지 알 수 없다. 무룡산에 오르기 전, 먼저 출발했던 아저씨를 만났다. 아저씨는 우의를 꺼내 배낭을 감싸고 있었다. 무룡산에서 내려서면 순탄한 마루금길이다.
간간히 비가 쏟아졌다. 기상이 불안정한가 보다. 불행 중 다행으로 천둥번개는 멀리서 친다. 9시 20분 동엽령에 도착했다. 넓은 동엽령 지대는 짙은 구름 속에 가려져 있었다.
△ 왼쪽으로 가는 길이 신풍령 가는 길, 오른쪽은 삿갓재에서 내가 올로온 길.
동엽령에서 백암봉(송계삼거리)에 도착한 것은 10시 30분. 마침내 향적봉이 눈앞이다. 여기서향적봉으로 가는 길은 백두대간길이 아니다. 송계삼거리에서 신풍령 쪽으로 가는 길이 백두대간 길이다. 그러나 덕유산 주능선을 타면서 향적봉을 오르지 않는다는 건 너무 불행한 일이 아닐까. 대간길을 잠시 미루고 향적봉으로 발길을 돌렸다.
비는 계속 오락가락이다. 오전 중에 개인다는 일기예보는 역시 여기 덕유산에서는 통용될 수 없나 보다. 길가에는 간간히 원추리 꽃망울이 길쭉하게 나있다. 햇빛이 나지 않아서인지 보통 때면 활짝 개화를 하고 벌과 나비를 불러 모을 텐데 날씨가 안 좋아 개화시간이 좀 늦다. 덕유산도 지금 이맘때면 원추리가 한창이다. 귀품 있는 모양새며 도도한 줄기가 꽤나 운치가 있다. 카메라에 담지 못한게 못내 아쉽기만 하다.
△ 주목
삿갓재에서 이곳까지 동행한 아저씨는 여기서 곤돌라를 타고 내려가시겠단다. 바람이 많이 불어 뜨지 못하는 게 아닐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잘 운행되고 있다니 반가운 일이다. 아저씨와 작별하고 다시 향적봉 대피소로 내려왔다. 다시 갈등이 시작됐다. 여기서 하룻밤을 자고 내일 신풍령쪽을 탈까. 아니면 좀 무리가 되어도 신풍령으로 지금 출발할까. 그냥 향적봉에서 곤돌라를 타고 내려가 서울로 올라갈까. 무리를 해서 신풍령(13.1km)까지 간다고 해도 밤늦게나 떨어질 테니 서울 올라가긴 힘들 것이다. 그렇다고 대피소에서 하루를 쉬려고 하니 시간이 아깝다. 결국 난 다시 배낭을 메고 향적봉으로 올라갔다. 거기서 하산을 해 오늘 안으로 서울로 올라가기로 한 것이다. 남은 구간이 아쉽긴 하지만 향적봉에 왔으니 소기의 목적은 달성한 셈이다. 백두대간길은 여전히 많이 남아 있기 때문에 다음을 기약했다.
향적봉에서 약 30분 정도 내려오면 곤돌라 승강장이 나온다. 10m 앞도 안보이는 구름 때문에 승강장을 찾는데 애를 먹긴 했지만, 그래도 승강장을 만나니 반갑다. 편도 7000원의 표를 끊고 입구에 서니 끊임없이 이어지는 곤돌라들이 대기하고 있다. 하나의 곤돌라를 골라 올라타는데 승객은 나 하나다. 서서히 산을 내려가는 곤돌라 안에서 온 몸의 힘이 하나씩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긴장으로 굳어진 힘이었을 거다. 지상에 가까워올수록 구름은 걷히고 맑은 대지가 나타났다. 산 아랫동네는 빗방울 하나 보이지 않았다.
△ 오른쪽이 내가 타고온 곤돌라. 왼쪽의 리프트는 운행하지 않는다.
멋진 날이다. 버스를 기다리며 혼자 벤치에 앉아 있으려니 입가에서 웃음이 비실비실 나왔다.
'생활 여행자 > 백두대간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백두대간10 - 봄 찾으러 갔다가 구름에 쫓기다 (2) | 2010.03.05 |
---|---|
[산행계획]백두대간 4~5구간(백암봉->덕산재) 1박 2일 (4) | 2010.02.05 |
백두대간 8 - 삿갓재 노을에 기대어 서다 (0) | 2008.07.15 |
백두대간 7 - 산죽길에서 만나는 바람 (0) | 2008.07.13 |
백두대간 6 - 외롭고 높고 쓸쓸한 (4) | 2008.07.11 |
- Total
- Today
- Yesterday
- 두컴
- 아기
- 국가인권위원회
- 자전거출근
- 제주도
- 지리산
- 인권
- 백두대간
- 육아
- 생각코딩
- 교육
- 따릉이
- 촛불집회
- 여행
- 민주주의
- 자전거 출퇴근
- 별별이야기
- 지리산둘레길
- 자출기
- 전국일주
- 교과서
- 한강
- 영화
- 민서
- 자전거여행
- 생코
- 자전거
- 사진
- 안양천
- 자전거 여행
일 | 월 | 화 | 수 | 목 | 금 | 토 |
---|---|---|---|---|---|---|
1 | 2 | 3 | 4 |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