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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젝트 헤일메리>가 증명한 SF의 진화

 

     내 젊은 시절 SF는 은하계를 누비는 은하철도 999나 인간과 구별되지 않는 로봇이 지구를 지배하는 터미네이터 또는 생명과학을 이용해 인간과 너무나도 흡사한 괴물을 만들어 내는 미친 과학자 이야기인 프랑켄슈타인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런 이야기에서 던지는 '무엇이 인간적인가'라는 질문은 철학적 생각거리를 던져 이야기를 살리는 주요 레시피 중 하나인 셈이다. 아시모프(로봇 3원칙, <I, Robot>)나 클라크("충분히 발달한 과학 기술은 마법과 구분할 수 없다")의 시대엔 과학이 알 수 없는 미래와 인간관을 받치는 '배경'이었다면, 앤디 위어의 소설 <프로젝트 헤일메리>는 현대 SF의 결이 너무나도 다름을 보여 준다. 번뜩이는 가설과 치밀한 검증의 과정이 스펙터클 하게 펼쳐지는 과학은 액션 스릴러를 넘어서는 재미다. 과학, 너 이렇게 섹시해? 과학자가 이렇게 멋져도 되는 거야?

낭만의 시대에서 '공학'의 시대로

      과거의 SF가 “우주는 경이로운 미지의 영역이다”, “인간성 상실의 미래는 암울하다 라며 독자를 미지의 세계로 유영하게 만들었다면, 최근의 SF는 “그래서 11광년 떨어진 별까지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라고 묻는다. <프로젝트 헤일메리>의 주인공 그레이스에게 낭만 따윈 없다.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자마자 자신의 이름도 기억나지 않으면서 내가 타고 있는 우주선이 어디에 있는지, 중력이 얼마인지부터 확인한다. 과거의 SF 주인공이 우주선 창밖을 보며 사색에 잠기고 인간성에 대해 회의할 때, 현대의 주인공은 우주선 벽에 보드 마커펜으로 미적분 방정식을 갈겨쓰며 생존 방법을 찾는다. '우주 미아'라는 설정은 같지만, 대처하는 방식이 '철학'에서 '공학'으로 진화한 것이다. 계속해서 닥쳐오는 위기 때마다 과학적 가설과 이를 증명하는 방법을 통해 해법을 마련한다.

 

"내가 누구지?"… 기억상실과 과학적 퍼즐 맞추기

      소설의 도입부, 주인공 그레이스는 혼수상태에서 깨어난다. 주위엔 알 수 없는 시체만 있고, 몸은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데다 발음까지 이상하다.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난다. 보통의 드라마라면 여기서 뜬금없는 가족애를 떠올리며 울겠지만, 우리의 주인공은 다르다. 그는 본능적으로 주변 기기들을 뜯어보고,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고, 우주선에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중력 가속도를 측정하기 시작한다. 이 과정을 보며 ‘와, 나라면 일단 울면서 문부터 두드렸을 텐데, 이 사람은 물리 법칙부터 확인하네?’라고 했을 것이다. 자신의 기억을 되찾아가는 과정이 마치 최고 난도의 고급 방탈출 게임을 지켜보는 듯한 쾌감을 준다. 아니, 우주 한복판에서 방탈출 게임? 나가면 어디? 

 

과학은 '장식'이 아니라 '서사' 그 자체

      과거 SF가 과학을 다룰 때, 독자들은 작가가 정해준 과학적 사실을 그냥 받아들이거나 상상의 나래 한껏 펼치기 위한 도구였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독자들도 인터넷으로 최신 물리 가설을 꿰고 있다. SF를 좀 안다는 독자들에게 양자역학과 상대성 이론은 이제 이해하기 어려운 난제가 아니다. 그래서 작가들은 더 이상 대충 얼버무릴 수 없다.

      <프로젝트 헤일메리>에서 태양을 먹어 치우는 '아스트로파지'를 다루는 방식은 압권이다. 이 물질은 단순히 신비한 아이템이 아니라, 열역학적 법칙 안에서 굴러가는 하나의 '실체'로 존재한다. 물론 작가가 상상해 낸 크리쳐이지만 그 생명체에 대해 알아가는 과정의 디테일함은 치밀하다. 과학적 디테일이 서사의 엔진이 되어, 독자가 그 계산 과정을 따라가며 주인공과 함께 땀을 쥐게 만드는 것. 이것이 현대 SF가 과거와 차별화되는 가장 큰 포인트이다. 태양을 삼키는 미생물이라니, 이런 상상력은 도대체 어디서 나타나는 것인지...

 

"이봐, 돌덩이 친구?"… 소통도 데이터로!

      외계인 '로키'와의 조우 장면은 과거 SF와 가장 극명하게 갈리는 지점입니다. 옛날 SF 영화였다면 외계인과 만나는 순간 텔레파시나 우연한 언어 습득으로 대화가 시작됐다. 심지어 외계인이 친절하게 영어를 한다. “Hi, everyone. Nice meet you.” 우리는 외계인과 대화하기 위해 그토록 영어 공부를 열심히 했었나?

      하지만 이 소설은 다르다. 발성법도 다르고 살아온 환경도 천지차이에다가 시각이 거의 없는 스톤, 청각이 미개한 인간이 서로 소통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하지만 두 지성체는 수학과 물리 상수를 주고받으며 '데이터의 교환'을 통해 신뢰를 쌓는다. 수학과 물리는 별과 별을 이어주는 최초의 소통 도구가 되는 셈이다. 진리 앞에, 과학이 얼마나 정교한 소통의 도구인지 깨닫게 된다. 이건 마치 우주적 규모의 '고품격 펜팔'이라 할 수 있겠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처럼 소설 <프로젝트 헤일메리>는 과학적 디테일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과거의 SF가 우리에게 '상상력의 확장'을 선물했다면, 현대의 SF는 '과학적 탐구의 희열'을 선사한다. 영화를 보고자 하는 분이 있다면 단언컨대 먼저 소설을 보기를 추천한다. 영화는 영상미를 살리기 위해 소설이 주는 진짜 재미를 많이 생략하고 외계인 로키와 지구인 그레이스의 우정이 중심축이 되어 아쉬운 점이 많다. 그러니 꼭 영화보다 소설을 먼저 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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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겨울부터 시작된 파반느와의 만남이 얼마전 막을 내렸다. 그동안 나는 박민규의 원작 소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를 천천히 읽었고, 중간쯤 읽고 있을 때 KBS 라디오 극장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를 출퇴근 시간에 틈나는대로 듣기 시작했다. 책은 시처럼 읽다가 쉬다가 다시 읽었고, 라디오는 귓속으로 들어오는 성우들의 맑은 목소리와 대사의 생동감으로 느꼈다. 그리고 얼마전 넷플릭스로 <파반느>가 개봉했다. 책을 다 읽고, 라디오 극장도 끝난 후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시청한 <파반느>는 그럭저럭 괜찮았지만 책이 주었던 상상력과 라디오 극장이 더한 생명력이 영화에서는 충분히 살려주지 못한 아쉬움도 있다. 

012

 

 


아버지는 놈팽이였어. 어머니가 피땀 흘려 밖에서 벌어오면 그 돈으로 자기를 치장하고 영화판을 기웃거리며 자신의 출세길만 생각했던 거지. 그렇게 아버지는 어머니와 나를 버리고 돈 많은 여자와 결혼했어. 애시당초 그 남자는 어머니를 사랑하지 않았던 거야. 동정도 아니었고 호의도 아니었으며 연민도 없었지. 그저 빌붙어 피를 빨아먹은 거머리였어. 그 남자가 떠나고 난 뒤에도 엄마는 한참동안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어. '나'의 이 유년의 기억들은 사랑에 대해 회의하고 그 감정을 하찮게 여기게 만들었어. 아버지는 '나'의 상처이자 나를 단련한 용광로였고, 내가 살아가는 힘이었지. 얼굴값? 꼴값... 

그러던 어느날 '그녀'가 나타났다. 모두에게 놀림받고 터부시되며 다가서는 안될 존재로, 버림받은 개처럼 지하주차장 한켠에 내버려진 여자. 그저 못생겼다는 이유로 누구도 가까이 하지 않고 심지어 놀잇감으로 전락해 잔뜩 찌그러져 있는 사람. 그에게 '나'는 눈길이 갔어. 아버지에게 버려진 어머니 때문일까? 아마도 시작은 그럴 거야.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그저 그의 겉모습만 보고 그 가치를 폄훼하는 현상, 이 잔인한 자본주의의 총화 백화점에서는 세 걸음마다 한 번씩 볼 수 있을만큼 자주 마주치는 현상 아니던가? 

그래서 그녀에게 눈길이 간 거다. 그리고 말했다. "우리 친구할래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 하지만 쟤는 진심(眞心)이야.

 

그렇게 요한 형과 '나'와 '그녀'는 켄터키치킨 집에서 맞은편 bear 가게의 간판을 보며 'hope'를 들이마시고 많은 이야기를 하며 살았지. 그렇게 우리는 사랑했어. 3개의 창(연민, 호의, 동정)을 말하며 걱정스럽게 나를 보던 요한 형의 우려와는 다르게 '나'는 '그녀'를 '사랑'으로 마주했으니까. 그녀와 내가 헤어진다는 건 마치 "손끝 발끝의 모세혈관에까지 뿌리를 내건 나무 하나를, 통째로 흔들어 뽑아 버렸다"는 것과 같다고 말했어.

그러다가 '나'는 지하주차장 일을 그만두고 대학에 진학했어. 소설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에서였지. 대학이라는 곳은 또 얼마나 낭만적인가? 그렇게 켄터키치킨과 멀어지고 hope 대신 학교 앞 hof 집을 다녔고, bear 대신 beer를 마시기 시작했지.

그런데 어느날 요한 형이 손목을 그었어. 정신병동에 갇힌 요한 형을 만났지만 그저 멍한 눈으로 한곳만 보고 있는 형을 만났지. 그렇게 수다스럽던 형은 왜 스스로를 가두고 입을 닫아버렸을까? 그리고 그녀와의 연락도 끊겼어. 그녀는 나에게 장문의 편지를 남기고 백화점을 그만두었지. 잘생긴 '나'와 못생긴 '그녀'는 서로를 사랑하지만 사회가 만들어 놓은 편견과 차별의 벽을 넘지 못한 거야. 나를 사랑하니까, 떠난다는 그녀의 글을 보면서 아무말을 할 수가 없었어. 

하지만 세상은 여전히 차갑고, 당신의 곁에 서 있는 나의 모습이 당신을 힘들게 할까 봐 두렵습니다. 나는 이제 나를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외모가 아닌 오직 나의 존재만으로 살 수 있는 곳으로 떠나려 합니다.(중략) 부디 나를 찾지 마세요. 당신의 기억 속에서 나는 언제나 가장 아름다운 왕녀로 남고 싶습니다. 당신이 나에게 주었던 그 따뜻한 눈빛과 시간들을 평생의 보석으로 간직하며 살겠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잊혀질 거라 생각했어. 다시 지하주차장에서 일할 때는 '희재'라는 명품샵에서 일하는 예쁜 여자애도 만났지. 그저 껍데기만 좋아했지, 알맹이는 아무것도 아니더라. 그런데 희재를 통해 '그녀'의 주소를 알게 됐어. 집앞까지 찾아갔지만 그냥 돌아섰어. 스스로 나를 떠난 사람이잖아. 이렇게 불쑥 얼굴을 내미는 건 아니잖아. 아직 '그녀'는 나를 만날 준비를 하지 않았을 거야. 조용한 '그녀'의 삶에 다시 파문을 만들 수는 없잖아. 그래서 '나'도 장문의 편지를 남겼어. 12월 25일 다시 이곳에 올테니 만나고 싶다면 나와 달라고 남겼지. 

그렇게 그녀를 만났어. 우리는 서로의 마음을 다시 확인했어. 나는 여전히 그녀를 사랑하고 그녀도 나를 사랑하고 있었지. 그렇게 우리는 다시 만나기로 했어. 하지만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나는 지독히 내리던 눈에 미끄러진 버스가 전복되면서 큰 사고를 당해. 


여기서부터는 결론이 두 개야.

하나는 그 사고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나는 그야말로 또 다시 기적적인 재활에 성공하고 그 이야기를 글로 담아 크게 성공하는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지. 하지만 그녀와 만난 이후 갑자기 연락을 끊은 나로 인해 그녀는 이미 한국에 남아 있지 않고 머나먼 독일에서 삶을 살고 있었지. 어렵게 알아낸 연락처를 들고 독일까지 찾아가 그녀를 만나고 다시 사랑을 하게 돼. 아름다운 이야기지. 

그런데 다른 하나는 달라. '나'는 그 버스 전복 사고로 세상을 떠나. 그리고 요한 형이 '나'와 '그녀'의 이야기를 소설로 써서 세상에 내놓지. 요한 형은 '그녀'와 결혼했어. 요한 형도 그녀의 외모가 아닌 내면의 아름다움을 보았던 거겠지. 그렇게 '나'의 젊은 날 세상의 편견과 싸우며 순수한 사랑을 보여 주었던 '나'와 '그녀'의 이야기가 세상에 나오게 되지. 


스무살. 어색하고 부끄러운 나이.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패기와 자신감도 충만하지만 그 이면에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부끄러움', '눈치'가 커가는 시기이기도 하다. 작가는 '못생김'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왜곡된 시선을 '그녀'가 닥치는 여러 현실과 '그녀'가 남긴 말과 행동과 글로 가감없이 드러냈다. 그녀와의 로맨스는 그래서 평범하지 않다. 그래서 소설은 거친 투쟁의 서사이며 날선 복수의 담론이다. 결국 이 싸움은 처절하고 슬프고 비참한 비극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 모리스 라벨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는 이 소설의 전체의 정서를 지배한다. 상상력을 부르짖는 요한은 그래서 모순적이다. 못생김을 못생김으로만 받아들이지 말고 상상력을 키우라고 하지만, 사실 사랑은 상대를 상상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실체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이라는 점을 '나'는 강변했다. 

'죽은 왕녀'는 그래서 못생김을 이유로 지워져 버린 것들에 대한 진혼곡이다. 온갖 전설과 동화, 만화 속에서 많은 왕자와 용사들이 왕녀를 구하기 위해 용의 동굴로 돌진한다. 그런 왕녀는 반드시 아름다워야 하고 구하고 지킬 가치가 있어야 한다. 시각적 자극이 남발되는 현대 사회에서는 왕녀들이 더더욱 아름다워지고 고귀해진다. 그녀는 용에 잡혀 있고나 높은 성에 붙잡혀 있을 뿐인데 말이다.

작가는 시각적 자극으로 대변되는 우리 사회의 편견을 비판하면서 음악적인 장치를 여기저기 두었다. 작품의 제목도 그러하지만 80년대 팝송과 가요들이 작품의 곳곳에서 우울하고 비이성적인 사회상을 드러내 주고 있다. 컬처 클럽(Culture Club) - <Karma Chameleon>는 신나는 비트와 리듬의 곡이지만 겉모습에만 열광하는 세상의 풍경을 보여 주는 장치이다. 

우리가 말다툼할 때 당신은 매일 거짓말을 하는군요. 그게 당신의 방식이라면 난 당신을 믿을 수 없어요. 내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나요? 아니면 내가 듣고 싶은 말만 하는 건가요? 당신은 감정을 숨기려 하지만, 당신의 눈동자엔 두려움이 가득해요.
-컬처 클럽(Culture Club) - <Karma Chameleon> 중에서

눈에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 외모 보다는 내면, 시각보다는 청각이 소설 전반을 지배하는 사상과 철학이다. 외모에 대한 시대의 폭력적 시선을 거두고 내면의 심장 소리를 듣는 음악처럼 느린 왈츠곡에서 빠른 비트의 팝송까지 글자라는 매체에만 얽매이지 않고 독자들에게 청각적 즐거움까지 누릴 수 있는 장치들을 만들었다. 소설을 읽다 보면 해당 음악이 나오는 장면에서는 굳이 읽는 것을 중단하고 등장인물들과 함께 그 음악을 듣다보면 이들과 함께 공간을 점유하고 있다는 상상을 하게 된다. 

또 작가는 행을 엉뚱한 곳에서 잘라 먹는다. 이 독특한 문단 배치는 처음에는 무척이나 어색하다. 왜 여기서 끊었는지를 생각하게 하고, 천천히 그 잘린 부분을 다시 읽게 한다. 즉 작가의 의도적인 이끌림에 독자가 빨려 들어가게 한다. 

 

이 독특한 줄바꿈, 그로 인한 여백은 독자들이 소설을 읽는 흐름을 끊어 버리는 단점도 있지만 중간 중간 중요한 지점에서 한번쯤 쉬어 가면서 여백에 담은 작가의 의도를 생각하게 한다. 책을 읽는 속도는 느려지지만 종종 시를 읽는다는 착각이 들게 만든다. 문장을 끝맺지 않고 다음 줄로 넘기거나 단 하나의 문장만 독립적으로 남겨 놓는 방식은 한 박자 쉬어 가게 만든다. 섬세한 인물의 심리 묘사나 중요한 사건의 전개에서 독자에게 보다 깊은 몰입을 준다. 쭉쭉 읽어가던 흐름이 발목이 걸린 것처럼 주춤하게 되고 작가의 의도에 끌려가는 기분도 들지만 소설을 다 읽고 나서 느끼지만 좋았다. 만일 내용이 80년대의 감성과 낭만, 연애를 다룬 소설이 아니라면 엄두를 내기 어려운 시도임에는 분명하다. 그런데 이 작품은 보기 좋게 성공했다. 때로는 시처럼 때로는 소설처럼 시대와 사랑을 느꼈다. 마음의 박자로 글자 바깥의 여백으로 이야기를 만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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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한 편의점 (벚꽃 에디션) - 8점
김호연 지음/나무옆의자
 
 

편의점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구심력과 원심력
"불편한 편의점"은 이문구의 "관촌수필"처럼 하나의 장소에서 여러 군상들이 어우러지는 모습을 그려낸 연작 소설이다. 24시간 돌아가는 편의점에서 만들어지는 이야기는 마치 원운동하는 물체에 작용하는 구심력처럼 우리의 마음을 끌어들인다. 이런 강한 구심력이 있기에 물체는 원심력을 발휘해 힘차게 원운동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야기의 중심을 잡아주는 구심력은 바로 인간에 대한 관심, 그로부터 시작되는 구원에 대한 믿음이다. 이 중심에는 '독고'와 '사장 할머니 염영숙'가 있다. 반면 이야기를 재미있고 풍부하게 하는 힘이 원심력이다. 원심력을 받는 이야기의 인물로는 20대 여성이며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며 편의점 알바를 하는 '시현',  50대 여성으로 생계를 위해 편의점 알바를 하는 '오선숙', 배우로 활동하다가 극작가로 변신한 '정인경', 의료기기 영업사원으로 일하는 40대 중년의 사내 '경만', 경찰로 재직하다가 불명예 퇴직하고 사설 흥신소에서 일하는 60대 '곽 씨'가 있다. 편의점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 군상들의 이야기가 바로 이야기를 재미있게 돌리는 원심력이 된다. 사장 할머니(염영숙)로부터 시작된 인간을 향한 관심과 구원에 대한 믿음, 그리고 용서로 이어지는 경애의 마음이 '독고'라는 정체 불명의 노숙자로 전달되고 이것이 크게 확산하면서 이야기의 꽃을 피워 냈다. 

현대 사회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공기처럼 숨쉬며 접하는 공간 '편의점'이라는 공간에서 만나는 알바들이 있고, 편의점을 찾는 동네 할머니와 꼬맹이부터 술취한 사람들과 진상들 이야기는 양념처럼 이야기의 재미를 더한다. 거기에 흔하게 볼 수 있는 알바라고 불리는 직원들의 모습도 어느 편의점에서나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그네들의 문제 있는 사연들이 '독고'라는 노숙자를 만나면서 삶의 변곡점을 지나고 좀더 희망을 가져 보는 변화를 겪는 모습은 이 책을 읽을 때 독자가 품게 되는 감동 중 하나이다. 

이야기는 연작 소설처럼 각각의 이야기들이 있고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인물 '독고'의 이야기가 씨줄과 날줄로 엮여 잇다. '독고'와 '편의점 사장 할머니'가 잃어버린 지갑을 연으로 이어지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를 시작으로 편의점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그곳을 드나드는 사람들, 할머니의 가족과 거기서 다시 연결된 곽 씨까지 이야기는 줄줄이 엮여 이어진다. 

불편하지만 괜찮아
여러 이야기 중 책 제목과 동일한 소제목의 '불편한 편의점' 이야기는 좀 불편했다. 대학로 배우였다가 대본 작가로 활동하지만 신춘문예 말고는 자기 작품을 연극 무대에 올려본 적이 없는 작가의 이야기. '독고'라는 인물과 편의점을 글로 써낸다는 설정으로 이 책의 작가가 불쑥 등장하는 느낌이다. 이 소설 전반적으로 다양한 군상들이 편의점에서 어우러지고 있는데, 그 대부분은 보편화된 대중의 모습을 잘 드러내고 있지만 이 부분에서만 등장하는 작가의 모습은 그다지 일반적인 모습이라고 보기 어렵다. 아마도 작가가 자신이 받은 사회의 도움에 은혜를 갚는다는 느낌으로 끼워 넣은 건 아닐까 생각되는 여러 부분이 있지만 전체 이야기 중에 가장 이질적인 느낌이 드는 부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전반적으로 따뜻하다. 보편화된 장소라는 편의점, 내 이웃 혹은 독자 자신을 닮은 인물들이 하나같이 상처받고 아파하면서 편의점을 찾고, 여기서 다시 희망을 갖고 살아간다는 이야기는 도시 동화의 틀을 잘 갖추고 있다. 사람에 지치고 용서와 구원의 길을 잃은 이들에게 잠시 삶의 고단함을 잊고 나침반을 다시 보게 하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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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온한 책, 불온한 사상


사람의 생각은 말과 글로 전달된다. 누군가를 설득하기 위해 대화를 하듯이, 많은 이에게 생각을 전달하기 위해서는 글이 필요하다. 여러 권력자들이 자신의 독재 권력을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 반대자들의 말과 글을 차단했다. 때로는 죽음으로, 때로는 금서라는 형식으로····

중세 시대 고대 인문학 관련 서적들은 이교도의 사상이라는 이유로 종교적 권력 아래 대중에게서 격리되었다. 격리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시간의 무차별적인 공격 앞에 속절없이 사라져 갔던 고대 문헌들을 기어이 끄집어 내어 세상앞에 내놓았던 사람들이 있다. 이 책 <1417 근대의 탄생>은 그런 사람 중의 한 명인 포조 브라촐리니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포조는 중세의 기독교 권력의 몰락해 가던 모습을 옆에서 지켜 보았던 로마 교황청 서기이기도 했고, 인문학과 과학 부흥을 기뻐하고 적극적으로 고대 서적 발굴에 앞장섰던 인문학자이기도 했다. 어느 시대나 경계인이 가졌던 모순을 모두 가진 인물이었고, 생각과 사상도 어느 하나로 대변하기 어려운 다양성을 갖고 있던 인물이다. 그런 경계인이었던 포조가 르네상스의 시기 어떤 역할을 했으며 어떤 삶을 살았을까?

이 책은 중세의 몰락과 르네상스의 시작점에 있던 한 인물-포조 브라촐리니-이 독일의 오래된 수도원에서 발견한 책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의 의미를 쫓아가는 내용이다.

2천년 전에 쓰인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

기원전 1세기 고대 로마의 시인 루크레티우스의 철학 서사시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의 핵심적 내용들은 더 거슬러 올라 기원전 4세기 에피쿠로스의 철학에 다다른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에피쿠로스는 무엇이 좋고 악한지는 쾌락과 고통을 기준으로 판단할 수 있고, 가장 좋은 쾌락은 지적 탐구에서 얻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 죽음은 몸과 영혼의 종말이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며, 신은 인간을 벌주거나 보상하는데 관심이 없고, 우주는 무한하고 영원하며, 세상의 모든 현상들은 궁극적으로 빈 공간을 움직이는 원자들의 움직임과 상호 작용으로부터 나온다고 주장했다.

기원전 4세기의 이런 주장들은 지금 돌아보아도 매우 놀랍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죽음 이후의 세계를 믿고 있고, 신이 인간사에 개입하여 상과 벌을 주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런 사상은 신의 권능으로 세상을 지배하던 성직자들이 있던 중세에서 용납될 수 없는 사상이다. 아니 중세 유럽만이 아니라 태양계 바깥까지 우주선을 보내고 있는 현재도 일부 종교인들이 들으면 펄쩍 뛸만한 무신론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물론 세상에 영원한 진리는 없을 것이다. 먼 훗날 어떤 과학적 발견이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단서를 발견할지도 모르고, 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까지 인류가 이루어 낸 과학적 철학적 사실들로 본다면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다.

루크레티우스의 서사시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를 중심으로 저자는 14세기 유럽의 과학적 발견, 종교적 갈등, 철학적 성찰 등을 꼼꼼한 고증 자료와 함께 엮었다. 하나의 사건을 통해 시대의 변화를 유추해 내는 힘은 단순한 상상상력을 넘어 치밀한 고증이 있을 때 더 빛이 난다.

교황청 서기였고 피렌체의 총리까지 지냈으며 탁월한 책 사냥꾼이었던 인문학자 포조의 기록과 그가 다른 학자들과 어울렸던 편지들, 그의 행적을 정리한 기록물들을 중심으로 보다 역동적인 시대의 흐름을 살펴볼 수 있게 하였다. 특히 종교재판의 잔혹함과 비이성적 광기, 당시 고위 성직자들의 위선과 타락을 포조의 글과 기록을 통해 보면, 가장 어두울 때 빛나는 작은 불씨들의 위대함을 엿볼 수 있다.

인간은 어떤 동물보다 추상화 능력이 뛰어나다고 하며 이것이 인류가 사회성을 갖고 지금까지 발달할 수 있었던 배경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인류의 상상력은 신에 대한 공포와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갈망으로 나타나면서 진실을 외면하고 진리에 대한 성찰을 가로막았다. 죽음 이후의 세계는 존재하지 않으며 신은 설령 존재한다 하더라도 인간에게 관심이 없을 거라는 오래된 진실이 21세기를 사는 많은 사람들에게 외면 받고 있는 현실은 참 아이러니하다.


<장미의 이름>과 <1417 근대의 탄생>

중세시대 가장 불온했다는 책이 가장 빛나는 세상을 만드는 데 일조했다. 분노와 공포로 사람들의 마음을 현혹하고 그들이 생명과 재산을 갈취하던 권력이 과학의 발전과 인문학적 사상에 밀려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졌다.

<1417 근대의 탄생>은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을 떠올리게 했다. <장미의 이름>은 어느 수도원에서 발생한 연쇄 살인 사건을 다룬 작품이다. 이 살인은 광신도였던 늙은 수도승이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논리를 담고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읽는 수도사들을 살해하고 그들의 죽음을 신을 배신한 자들에 대한 신의 심판으로 위장하여 공포를 조장하려는 음모였다. <장미의 이름>은 이미 부패할대로 부패했던 당시 기독교 권력의 모습과 함께 분노와 공포로 대중을 지배하려던 성직자들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 준 작품이다.

두 책은 모두 중세 시대의 종교 권력이 무너지는 과정과 함께 고대 문헌이 가져온 충격이 당시의 성직자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잘 보여 준 책이다. <1417 근대의 탄생>은 실제 당시 사람들의 활동과 기록을 통해 탐사 보도 형식으로 사실을 전달했다면 <장미의 이름>은 살인사건을 쫓는 수도사의 이야기로 당시의 광기를 고발하고 있다. <1417 근대의 탄생>이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의 철학과 사상이 르네상스 시기와 인문학과 과학과 만나는 지점에 좀더 집중했다면, <장미의 이름>은 중세 기독교의 타락과 비이성에 더 집중했다.

<장미의 이름>을 재미있게 읽은 독자라면 중세에서 르네상스로 세상이 바뀌는 과정의 이야기에 좀더 흥미를 갖고 <1417 근대의 탄생>을 읽기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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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박현옥 | 문이당 | 2006년 5월 읽음

<아내가 결혼했다>
당황스러운 제목이다. 누군가 소개해줬을 때 이혼 이후의 얘기라고 짐작했다. 드라마 ‘연애시대’처럼(사실 이 드라마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이혼 이후에도 관계를 이어가는 남녀의 이야기는 흔한 소재였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책장을 열 때부터 심상치 않다. “모든 것은 축구로부터 시작되었다.”라고 시작하는 소설의 첫머리. 제목-아내가 결혼했다-은 남자들에게 비난받기 좋고 첫머리-모든 것은 축구로부터-는 남자들의 시선을 끌어들인다. 물론 여기서 말한 남자들이란 ‘모든’ 남자를 말하기 보다는 ‘대부분’의 남자들을 말한다. 아내가 결혼하는 걸 좋아할 남자들은 극히 드물 것이며, 축구를 싫어하는 남자보다는 좋아하는 남자가 훨씬 많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렇게 작가는 보통의 남자들에 심성을 가진 나를 끌었다 놓았다 하며 내 눈을 꽉 잡았다.
책을 읽는 내내 아내의 결혼에 대해 심정적으로, 적극적으로 거부하면서도 ‘사랑’이라는 이유로 현실을 받아들이는 ‘나’가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은 ‘아내’의 논리정연하고 한편으로 사랑스러운 설득 때문이었다. 읽는 나도 눈물겹게(?) 동감할 수밖에 없었다.
여전히 간통이 법률적으로 처벌을 받는 우리나라 현실에서 아내의 사랑은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사회적 반역행위다. 하지만 ‘사랑’은 ‘제도’보다 우선하는 것이다. 끝내 아내의 또 다른 남자를 인정하지 않는 ‘나’는 결국 아내의 설득에 못 이겨 호주에서 ‘나’와 ‘아내’와 ‘그놈’과 ‘딸’이 한 가족을 이루며 살기로 약속한다.
긴장과 갈등, 분노와 슬픔 등 온갖 감정들이 난무하는 상황을 축구장에 빗대 놓은 작가의 탁월한 구성이 이 책을 단숨에 읽게 만들었다. 그러나 ‘폴리아모리’(비독점적 다자연애)는 여전히 낯선 단어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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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존 키건(역자 정병선)
출판사 : 지호
정가 : 18,000원

두 달 전이었을 거다. 인터넷으로 한꺼번에 책을 구입했다. 그 중에 하나였고, 책에 대한 평이 괜찮아서 구입했는데, 중간중간 들쳐보니 어느 부대가 어쨌느니, 진형이 어쨌느니, 병사들의 상태가 어쨌느니 하는 이야기라 재미없다 싶어서 뒤로 미뤄두다가 요즘에야 차근차근 읽고 있다.

우선은 의외로 재밌다. 아니, 흥미롭다고 이야기해야 할 것 같다. 군대를 다녀온 사람이 아니더라도, 한순간 전투(혹은 싸움)의 극도의 흥분상태를 경험해 본 이들에게 가장 공식적이고 파괴적인 폭력인 전쟁의 전투가 어떤 모습이며, 그것을 움직이는 역동적인 힘이 어디에 나오고, 그리고 각각의 병사들이 전투의 순간에 경험하는 것이 무엇이며, 그것이 전투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 이처럼 객관적이고 간결하고 자세히 묘사할 수 있다는 데서 놀라울 뿐이다. (이 책의 저자는 전쟁이나 전투에 한번도 참여해 본 적이 없다고 한다. 그래서 더욱 놀랍다.)

저자의 기록은 종전의 전투기록이 영웅적 리더십과 상투적 이미지, 그리고 승자 중심의 기록(선별적 기록) 등으로 전쟁(전투)의 본래 모습을 많이 가리고 있다고 보고 있다. 고대의 전투기록을 서사적으로 묘사한 여러 작품들을 통해서도 이러한 사실은 잘 드러난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가 대표적인 경우다.

[병사들은 두려움 때문에 싸운다. 첫째는 전투 거부의 결과(처벌)에 대한 두려움이고, 둘째는 잘 싸우지 못한 결과(살육)에 대한 두려움이다.]

전쟁은 무서운 폭력이다. 그것은 살육에 대한 두려움을 극한으로 몰고 가며, 광기에 어린 흥분으로 문명을 지우는 행위이고, 인간성의 최저점으로 치달아가는 야만이다. 세상 어디에서도 이런 폭력이 더 이상 문명(혹은 인권)의 이름으로 치장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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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干證)  1. 자신의 종교적 체험을 고백함으로써 하나님의 존재를 증언하는 일. 
               2. 예전에, 남의 범죄에 관련된 증인

 

타라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타라가 떠난 뒤에도 여전히 자신들의 과거를 간증하러 다녔다. 타라의 가족에게 일어났던 사건은 아버지에게는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그 사건은 책임져야 할 누군가의 무지에서 비롯된 비참한 사고였을 뿐이다. 타라는 이 책 <배움의 발견(원제 Educated)>에서 그 무지에 대해 고발하고 있다. 

 

아버지는 정부가 강제로 우리를 학교에 가도록 만들지 않을까 걱정하지만, 그럴 일은 없었다. 왜냐하면 정부는 우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부모님의 일곱 자녀 중 네 명은 출생증명서가 없다. 가정 분만으로 태어나서, 한 번도 의사나 간호사에게 가본 적이 없기 때문에 의료 기록도 전혀 없다.”

 

타라에게 아버지는 곧 하나님이었고, 아버지의 명령은 곧 하나님의 명령이었다. 아버지의 명령에 따라 학교에 가지 않았고, 지저분하고 위험한 폐철 처리장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으며, 아버지의 일을 돕기 위해 단 하루 만에 크레인의 조종간을 잡아야 했고 위험한 고철더미에 올라갔다가 큰 부상을 입기도 했음에도 병원 치료 대신 엄마가 만든 오일과 약초로 치료를 받아야 했다. 

주체적 자아로 성장할 수 없었던 막내딸 타라에게 선택권은 없었다. 모든 결정은 아버지가 내렸고, 그 다음의 권력은 오빠들이었다. 어머니는 순종했다. 나아가 딸들을 지키지 않았고, 아버지의 권력에 동조하였으며 오빠의 폭력을 은폐하면서 타라를 속였다. 아버지의 병력을 물려받은 오빠는 자신의 분노를 극단적인 폭력으로 쏟아냈다. 오빠의 무자비한 폭력에 시달렸던 타라는 그 사실을 부모에게 이야기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부모님은 오빠가 달라졌으며, 하나님에게 회계를 했다며 타라에게 용서를 강요했다. 하지만 오빠는 달라지지 않았다. 오빠의 폭력은 타라가 떠난 이후 그의 아내에게로 이어졌고 이를 알아챈 타라가 부모에게 다시 재차 경고했지만, 아버지와 어머니는 오히려 타라가 오해한 것이며, 심지어 그것은 거짓된 환각이고 악마의 유혹에 굴복한 것이라고 비난했다. 다른 가족들은 타라의 말을 믿지 않았고, 그녀를 악마의 꾐에 넘어가 정부가 주는 돈을 받고 공교육을 받으며 타락한 여자라며 비난했다. 

 

“이제 ‘창녀’라는 단어는 행동보다 본질에 관한 묘사가 됐다. 내가 잘못된 행동을 해서가 아니라 내 존재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뜻이었다.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뭔가 불순한 요소가 들어 있었다.”

 

어쩌면 타라는 그냥 순종적인 딸이 되었을 수도 있다. 오빠의 폭력을 받아내는 건 이제 그의 아내 몫이 되었으니 더이상 폭력에 시달릴 일도 없었을 거다. 아버지의 말을 듣고 아버지가 내린다는 ‘축복’을 받았다면, 가족과의 인연을 이어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어머니의 사업이 번창하였기 때문에 보다 풍요로운 삶의 공간도 확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어머니를 따라 산파가 되었을 것이고 산약초를 이용한 오일을 만들어 팔면서 살다가 어느 평범한 몰몬교 청년을 만나 결혼해 조용히 삶을 마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타라는 그러지 않았다.

 

“나는 잘못 알고 있던 사실을 바로잡히는 일이 어떤 느낌인지 안다. 잘못 알고 있던 규모가 너무도 커서 그것을 바로잡으면 세상 전체가 변할 정도였다. 이제 역사를 이해하는 길로 통하는 문을 지키는 위대한 문지기들이 어떻게 자신들의 무지와 편견을 해결했는지를 알아야만 했다.”

 

OMR카드의 사용법도 모르던 16살 소녀가 혼자 독학을 시작했다. 17살에 대학수학능력 시험을 통과하고 난생처음으로 학교(브리검 영 대학교)라는 곳에 들어간 뒤의 그녀는 너무나도 다른 두 개의 세상에서 혼란을 겪었다. 하나는 몰몬교의 정신을 가진 아버지 밑에서 자란 아이다호의 산골 아이의 모습이고, 다른 하나는 역사와 철학을 탐구하며 세상의 지식을 탐하는 대학생의 모습이다. 산골 아이는 단순히 남자아이 앞에서 살짝 웃었다는 이유로 ‘창녀’라는 욕을 들으며 오빠에 의해 머리가 변기 속에 처박혔던 소녀였다. 하지만 대학생이 되면서 ‘홀로코스트’에 대해 알아가고, ‘페미니스트’의 뜻을 탐구하면서 홀로 서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과정은 순탄치 못했다. 그 과정은 피부를 온통 벗겨내는 것처럼 아픈 과정이었다. 그 누구보다 아버지를 부정하고 그 아버지의 막내딸로 살아온 자신의 이전 삶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일이었다. 가족 모두가 그녀를 비난하고 그녀를 집단적으로 따돌려 버렸다. 타라는 자신이 가족을 오해한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에 시달리다가 심각한 우울증에 시달리기까지 했다. 

타라는 결국 멈추지 않고 계속 나아갔다. 그리고 독립적이며 존엄한 인간으로 다시 태어났다. 이 책이 ‘배움의 발견(원제: Educated)’인 것은 그녀가 배움을 통해 자신의 삶을 아이다호의 산골에서 전 세계로 확장할 수 있었으며, 그 과정에서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무지와 폭력을 이겨낼 수 있었음을 드러내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삶의 주인은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너무나도 자명한 사실을 받아들이기까지 무척 힘들고 어려운 과정을 담아낸 이야기인 것이다. 누구의 말대로 이 이야기가 소설이 아니라 실제했던 내용이라는 점에서 믿어지지 않을 만큼 가슴이 먹먹해 온다. 

이 책이 배움에 대해 생각해 보는 모든 이들에게 한줄기 찬란한 빛이 되어 줄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배움은 세계와 나를 잇는 과정이며, 세계 속에 묻힌 ‘나’가 아닌 ‘나’ 안에서 세계가 이해되는 과정이다. 

 

[누가 역사를 쓰는가?] 나는 [바로 나]라고 생각했다.

 

Photo by Adam Glanzman/Northeastern University

배움의 발견 - 10점
타라 웨스트오버 지음, 김희정 옮김/열린책들

 

책을 다 읽은 분들은 저자 타라 웨스트오버가 2019년 5월 3일 노스이스턴 대학교에서 한 졸업 축사도 읽어보기 바랍니다. 
링크: https://blog.naver.com/openbooks21/221851681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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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인문학 열풍이 불었다. 인문학이 사회생활에 필수적인 교양으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먹고사니즘과는 하등 관계가 없는데 인문학은 왜 인기를 끌었을까? 

2019년 OECD 자료에 따르면, 한국 성인(25~64세)의 49%가 대학교육을 이수했다. 이는 조사 대상 46개국 중 가장 많은 것이었다. 조사 연령대를 낮추어 25~34세의 성인은 거의 70%에 가까운 대학 교육 이수율을 보인다. (기사 링크

이처럼 높은 교육 수준을 가진 대한민국 사람들에게 ‘인문학’은 그리 어렵지도 않은 학문이다. 우리는 인문학의 주요 학문 분과를 ‘교양’이라고 부르며 대학 시절에 다양한 방법으로 접해 왔다. 이른바 ‘문-사-철’ 즉, ‘문학’ ‘역사’ ‘철학(윤리)’ 등이며, 여기에 ‘정치’ ‘경제’ 등도 엮여 있다. 시작은 아마도 애플의 창업자인 스티브 잡스의 한마디였을 것이다. 자신이 만든 회사 ‘애플’은 인문학과 기술의 융합을 중요시한다는 언급이었다. 시장은 인문학을 상품화했고, 다양한 책과 강연, 모임이 시장에 쏟아져 나왔고 새로운 소비 트렌드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 책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은 그런 흐름에서 대박을 터뜨렸다. 

 

“창의적인 제품을 만드는 비결은 우리가 항상 기술과 인문학의 교차점에 있고자 했기 때문이다.”

 

먹고사는 문제에서 어느 정도 여유가 생긴 사람들이 보다 품위 있는 관계(?), 즉 지적 대화를 위해 인문학을 탐하고 있다. 저자 채사장은 모 방송국 강연(유튜브)에서 인문학 공부 열풍을 비판했다. 인문학이 사회를 바꾸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이 되고 있는 모습을 지적했다. 

‘인문학’을 배우는 이유가 ‘교양’일 수도 있다. 그것은 지적 대화를 위한 폭넓고 상식적인 개념화된 지식을 익힌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보다 큰 의미로서 ‘인문학’은 ‘내가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이며, ‘사회는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이고, ‘나와 사회의 관계’를 찾아가는 여정이다. 

 

이를 위해 채사장은 ‘역사, 정치, 사회, 윤리’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풀었다. 인류가 쌓아온 지식의 그 깊이는 매우 깊을 수 있어서 책 한 권에 자세히 풀어내는 게 가능할까 싶지만, 재미있는 비유와 쉬운 어휘를 사용하는 저자의 능력은 우리를 보다 쉽게 인문학의 도입부에 발을 디딜 수 있게 해 주었다. 여기에 집필 당시의 사회적 문제를 대입하여 나름의 시각에서 해석을 얹었다. 인문학의 응용이다. 잘 쓰는 저자와 탄탄한 기획과 시대적 흐름으로 만들어진 책이다. 여기서는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1>의 내용을 간략히 정리해 보겠다.


먼저 ‘역사’ 편에서는 지금의 자본주의를 설명하기 위한 생산수단의 개념을 설명하고 원시 공산사회에서 고대 노예제 사회, 중세 봉건제 사회, 근대 자본주의까지의 단계별로 생산수단의 변화와 생산관계를 중심으로 살펴본다. 이후 근대 자본주의가 태동한 후 자본주의의 모순에 의해 세계대전이 벌어지기까지의 과정을 설명해 주고 있다. 

다음 ‘정치’ 편에서는 흔히 말하는 ‘보수’와 ‘진보’의 구분하는 기준과 방식이 결국 경제 체제를 무엇으로 할 것인가에 대한 이론적 구분에 따라 결정되는 것임을 설명하며 현실 정치 즉 FTA, 무상급식, 민영화 등에서 경제 체제적 관점에서 보수와 진보를 구분하고 있다. 나아가 민주주의의 문제점과 독재 정치와의 구분, 자유민주주의, 공산주의, 사회 민주주의를 구분하는 기준에 대해 설명하고, 생산수단과 자본을 가진 보수층이 사회의 프로파간다를 조작하거나 장악하면서 정치적으로 보수를 지지할 수 없는 서민, 노동자, 자영업자, 농민 등이 보수를 지지하는 기현상이 발생한다고 설명했다. 

세 번째는 ‘사회’ 편이다. 사회에서는 인간의 기본적 권리와 헌법에서 규정하는 의무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개인과 사회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개인주의와 집단주의의 개념적 차이가 무엇인지, 자연권의 탄생과 발전, 전체주의와 세금의 문제 등을 다루었다. 마지막으로 미디어에 대해서는 ‘미디어는 어떻게 거짓을 말하는가’를 통해 자본의 지배를 받는 미디어의 속성과 그로 인해 보수화될 수밖에 없는 언론의 문제를 지적했다. 

마지막으로 ‘윤리’ 편이다. 우리를 시험에 빠뜨리는 윤리적 상황, 즉 딜레마에 대해 다룬다. 그 상황에서 어떤 판단이 가장 윤리적일까에 대한 논란의 역사를 통해 윤리의 문제를 정리하고 있다. 먼저 윤리적 판단, 의무론과 목적론, 정언명법, 목적론과 공리주의 등 인류가 가진 윤리의 문제를 각각의 관점에서 살펴보고 있다. 나아가 어떤 사회가 윤리적인 사회인지에 대해서는 이 책이 쓰일 당시에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었던 ‘송파구 세 모녀 사건’을 화두로 던졌다. 사회 변화를 위한 과정과 절차, 그리고 최종 목적이 모두 조화로울 수 있을까? 여전히 우리가 가져가야 할 윤리적 화두다.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1 - 8점
채사장 지음/웨일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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