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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7》로 홍콩 현대사를 관통해 온 한 형사를 통해 홍콩의 역사와 시민적 정의에 관해 이야기했던 찬호께이가 이번 작품 《고독한 용의자》에서는 현대사회의 고독을 소재로 자본주의의 딜레마 속으로 파고들었다. 《13.67》에서도 관전둬 형사는 법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공권력의 한계와 모순 속에서도 자신만의 남다른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했다. 《고독한 용의자》에서도 권력의 힘과 법의 정의가 미치지 않는 비극적 모순이 등장한다.

정의마저 빗겨간 곳에서 피어난 희생

사회 모순은 폭력적으로 단시간에 이루어지거나, 반대로 아주 긴 시간에 걸쳐 감각을 무디게 만들며 기억 바깥으로 사라져간다. 문제는 인간의 삶이 유한하다는 점이다. 인간에게 주어진 유한한 시간 안에서 정의는 기다리지 않는다. 그래서 법이 아닌 사적 처벌이 고개를 든다. 화려한 쫄티 입은 마블 영화 속 초인들이 늘 법과 정의의 딜레마에 빠지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러다면 악인을 규정하고 처벌할 힘은 누가 어떻게 정하는가? 하물며 이 소설의 주인공들은 지구를 구한 초인들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방구석에 갇혀 사회적으로 ‘패배자’라 손가락질받는 은둔자들이다. 하지만 이 ‘손가락질받던 방구석 히어로들’이 ‘자기희생’ 위에서 정의를 실현한다. 그래서 이들의 정의는 고독하다. 진짜 악을 처벌하는 정의는 자신을 버리는 희생 위에서만이 가능하고, 그 희생마저 영원히 드러나서는 안 되는 비밀이 되어야 했기 떄문이다.

20여 년간 방에만 틀어박혀 지냈다던 사람이 어느 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채 발견된다. 의심할 여지 없이 자살 사건인데, 그가 살던 방에서 의문의 인체 조각이 담긴 13개의 방부 유리병이 쏟아져 나온다. 조사 결과 모두 인체의 조각이며 젊은 남자와 여자의 시체임이 밝혀진다. 남자는 오래전에 죽은 것으로 추정되고 여자는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다. 자살한 은둔자와 유리병의 두 인물은 어떤 관계일까? 은둔형 외톨이로 지내던 그가 사실은 연쇄 살인마였던 것일까?

잔혹한 연쇄 살인처럼 보이는 이 사건은 사실 누군가를 보호하고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이 치밀하게 꾸며진 각본이었다. 트릭은 죽음으로 시작되었지만 완전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죽음을 파헤치는 과정에서 죽음은 목적을 이루었다. 죽음은 감추어져 있던 진실을 드러냈지만 또 반대편의 진실은 다시 깊은 어둠 속으로 숨겼다. 그리고 진실을 아는 이는 희생자가 못다한 삶의 무게를 견뎌내야 한다. 비정한 자본주의 사회의 잔인함과 불완전한 사회의 모순 속에서 뜨거운 인간애와 순결한 도덕성을 지키기 위해 개인이 감당할 비극의 무게는 얼마인가?

죽음을 통해 이루려 했던 정의. 진실은 살아남은 사람이 치러야 할 형벌인가? (그림은 AI 이미지)

 

고독한 죽음으로 감추어야 했던 진실

홍콩, 일본, 영국은 우리보다 앞서 은둔 청년의 고립 문제를 다루어왔다. 영국은 ‘외로움 담당 장관’을 신설하기까지 했다. 일본은 80대 부모가 50대 자녀를 돌보는 문제를 사회적 화두로 삼아 대응했다. 그렇지만 은둔 청년 문제의 뿌리에는 자본주의 사회가 가진 비정함과 모순이 얽혀 있다.

흥미로운 점은 이 소설에서 은둔자 세바이천은 사실 무기력한 은둔형 외톨이와는 거리가 멀다. 절친인 칸즈위안과 계속 교류하며 지냈고, 온라인을 이용해 충분히 수입을 내면서 자신의 생계를 꾸려 나가는 게 가능했던 능력자였다. 비극적인 사건만 아니었다면 그는 이 사회에서 더 큰 역할을 하며 살아갈 수 있었던 인재였다. 비록 그는 고독한 죽음을 선택했지만, 그 고독한 죽음마저 가장 인간적인 선택으로 만들기 위해 친구들과 끝까지 고군분투했다.

이 소설의 끝에서 우리가 마주하는 것은 한꺼번에 펼쳐지는 화려한 떡밥 회수의 쾌감만이 아니다. 작가가 던지는 질문은 여전히 풀리지 않은 자본주의 사회의 진짜 숙제다. 후반부에서 사건의 윤곽이 잡혀가며 이야기의 결말로 서서히 스며들어 갈수록 독자의 마음은 결코 편하지 않고 가슴먹먹한 여운과 씁쓸함이 길게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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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관통한다. 5.18과 87년 민주 항쟁, 전교조, IMF를 거쳐온 내 젊은 날도 그랬다. 한때는 통일 대한민국의 역사적 소명 의식을 품은 민족주의자로, 또 어떤 때는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사회주의자로, 그러다가 민주적 전통을 강조하는 시민으로 삶의 곳곳을 살아온 것 같다.

영웅들이 겪어낸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은 알게 모르게 인생의 중요한 순간마다 결정적인 나침반으로 작용해 삶의 방향을 뒤흔든다. 삶을 치열하게 살아온 영웅이라면 역사의 흐름과 일치하는 삶을 살 수밖에 없다. 덜 익은 신념이라고 누군가는 욕하겠지만, 그런 신념은 아직 증명되지 않은 진실을 치열한 삶으로 증명하는 과정이다. 고뇌와 갈등 속에서 삶은 강렬하게 빚어낸 이야기로 남아 역사가 되고, 그 역사에서 영웅이 탄생한다. 

소설 <13.67>에서는 권전둬 형사가 그렇다. 이 소설은 범인만 잡고 끝나는 평범한 추리 소설이 아니다. 홍콩의 현대사를 타임머신 탄 듯 거꾸로 훑고 올라가는, 꽤나 '사회파적인' 작품이다. 역사적 분기점마다 터진 대형 사건들을 배경으로 범죄가 일어나는데, 그 속에서 '100퍼센트 사건을 해결한 형사' 관전둬는 자신과 동기들과 후배들에게 묻는다. "대체 경찰이란 권력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80~90년대 우리가 열광했던 홍콩 영화 속 형사들은 늘 선택의 기로에 서 있었다. 부패한 경찰이 될 것인가, 시민을 지키는 형사가 될 것인가. 조폭과 경찰들이 뒤엉킨 그 영화의 바탕에는 홍콩 사람들의 깊은 정체성 혼란이 깔려 있다. 본래 중국 땅이었다가 100년간 영국의 조차지를 거쳐 다시 중국으로 돌아간 홍콩의 팔자처럼 말이다. 영화 <무간도>는 그런 홍콩의 정체성 혼란을 잘 보여 주는 영화였다. 나는 삼합회(조폭)인가, 형사인가? 두 주인공 중 한 명은 삼합회이면서 경찰에 잠입하고, 또 다른 주인공은 경찰이면서 삼합회 세계에 잠입해 활동한다. 이런 정체성 혼란의 역사 가운데에는 홍콩의 경찰이 있었다. 그야말로 어떤 정부 밑에 있느냐에 따라 뒤바뀌는 뒤웅박 팔자인 거다.

이 소설은 각 장마다 당시 홍콩을 뒤흔든 굵직한 역사적 사건들을 디딤돌로 삼아 달린다. 그 시절 홍콩이 어떤 스펙터클을 겪고 있었는지 살짝 들여다보면 이야기의 맛이 훨씬 살아난다.


 


1장 흑과 백 사이의 진실(2013)과 2장 죄수의 도의(2009): 돈과 조폭, 그리고 초고속 성장의 그늘

이야기의 시작(이자 관전둬의 인생 끝자락)인 2000년대 후반부터 2010년대의 홍콩은 그야말로 '금융과 자본의 천국'이자 삼합회가 신사복을 입고 기업형으로 진화하던 시기다. 거대 재벌의 유산 싸움과 조폭들의 경쟁이 심화되는데, 겉으로는 첨단 마천루가 솟아오른다. 그러나 화려하기 짝이 없는 풍경 뒤에는 극심한 빈부격차와 돈이면 다 되는 황금만능주의가 팽배했다. 관전둬는 침대 위에서 뇌파 모니터에 의존하면서도 이 탐욕스러운 인간들의 머리 꼭대기 위에서 놀아준다.

3장 가장 긴 하루(2003년): 마스크 속의 공포, 사스(SARS) 파동

2003년, 홍콩 전체가 사스(SARS)라는 비상의 바이러스와 싸우며 멘붕에 빠졌던 해다. 거리엔 사람도 없고 온 도시가 격리 병동 같던 그 시절, 악명 높은 탈옥수가 온 동네를 쏘다닌다. 시민들은 감염될까 무섭고, 경찰은 인력이 부족해 죽을 맛인 상황. 그 혼란 속에서 관전둬와 제자 뤄샤오밍은 바이러스와 살인마라는 '쌍둥이 악재'를 동시에 상대해야 했다.

4장 테미스의 천칭(1997년): "이제 주인이 바뀐다?" 홍콩 반환의 날

1997년 7월 1일, 99년간의 영국 통치가 끝나고 홍콩이 중국으로 돌아간 역사적 순간이다. 당시 홍콩 사람들의 불안감은 극에 달했다. "이민을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대혼란의 시기. 권력이 영국 총독부에서 중국 당국으로 넘어가는 대전환기 속에서, 경찰 내부의 부패와 눈치 보기는 최고조에 달한다. 정권이 바뀌는 서막에서 법과 정의의 균형을 잡으려는 관전둬의 외로운 저울질이 빛을 발하는 배경이다.

5장 빌려온 공간(1989년): 건너편에서 터진 대형 사고, 천안문 사태의 여파

1989년, 바다 건너 베이징에서 터진 천안문 사태는 홍콩 대중에게 엄청난 충격과 공포를 안겨주었다. "머지않아 우리에게도 저런 일이 터지는 거 아냐?"라는 불안감이 도시 전체를 감쌌고, 영국 스파이들과 중국의 공작원들이 홍콩이라는 '빌려온 공간'에서 치열한 암투를 벌였다. 이 시기 발생한 인질 사건의 뒤편엔 강대국들의 정치적 셈법과 거대한 음모가 얽혀 있었다.

6장 빌려온 시간(1967년): 낭만 따윈 없다, '67 폭동'과 신출내기 순경

소설의 하이라이트이자 결말인 1967년. 중국의 문화혁명 바람을 탄 좌파 단체의 테러와 이에 맞선 영국 총독부의 무자비한 진압으로 홍콩 전체가 피로 물들었던 '67 폭동' 시기다. 길거리엔 진짜 폭탄과 가짜 폭탄이 굴러다니고 무법천지가 따로 없던 시절, 이제 막 경찰 제복을 입은 신입 경찰이 뛰어난 추리력을 가진 점원의 도움을 받아 대규모 테러를 사전에 수습한다.


우리에게 홍콩은 <영웅본색>의 주윤발이 바바리코트를 휘날리며 쌍권총을 쏘던 무법도시로 기억되지만, 그 이면엔 좌파 테러와 백색 테러가 엇갈리며 피를 흘리던 비극의 역사가 숨어 있었다. 그 지옥 같은 혼란 속에서 시민들을 지키기 위해 발로 뛰고, 동시에 권력이 가진 모순과 외롭게 싸워야 했던 한 형사의 일생.

마지막 6장 '빌려온 시간'의 책장을 덮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깨닫게 된다. 전설적인 형사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시대의 비극과 모순이라는 혹독한 용광로 속에서 단련되어 만들어진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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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젝트 헤일메리>가 증명한 SF의 진화

 

     내 젊은 시절 SF는 은하계를 누비는 은하철도 999나 인간과 구별되지 않는 로봇이 지구를 지배하는 터미네이터 또는 생명과학을 이용해 인간과 너무나도 흡사한 괴물을 만들어 내는 미친 과학자 이야기인 프랑켄슈타인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런 이야기에서 던지는 '무엇이 인간적인가'라는 질문은 철학적 생각거리를 던져 이야기를 살리는 주요 레시피 중 하나인 셈이다. 아시모프(로봇 3원칙, <I, Robot>)나 클라크("충분히 발달한 과학 기술은 마법과 구분할 수 없다")의 시대엔 과학이 알 수 없는 미래와 인간관을 받치는 '배경'이었다면, 앤디 위어의 소설 <프로젝트 헤일메리>는 현대 SF의 결이 너무나도 다름을 보여 준다. 번뜩이는 가설과 치밀한 검증의 과정이 스펙터클 하게 펼쳐지는 과학은 액션 스릴러를 넘어서는 재미다. 과학, 너 이렇게 섹시해? 과학자가 이렇게 멋져도 되는 거야?

낭만의 시대에서 '공학'의 시대로

      과거의 SF가 “우주는 경이로운 미지의 영역이다”, “인간성 상실의 미래는 암울하다 ”라며 독자를 미지의 세계로 유영하게 만들었다면, 최근의 SF는 “그래서 11광년 떨어진 별까지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라고 묻는다. <프로젝트 헤일메리>의 주인공 그레이스에게 낭만 따윈 없다.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자마자 자신의 이름도 기억나지 않으면서 내가 타고 있는 우주선이 어디에 있는지, 중력이 얼마인지부터 확인한다. 과거의 SF 주인공이 우주선 창밖을 보며 사색에 잠기고 인간성에 대해 회의할 때, 현대의 주인공은 우주선 벽에 보드 마커펜으로 미적분 방정식을 갈겨쓰며 생존 방법을 찾는다. '우주 미아'라는 설정은 같지만, 대처하는 방식이 '철학'에서 '공학'으로 진화한 것이다. 계속해서 닥쳐오는 위기 때마다 과학적 가설과 이를 증명하는 방법을 통해 해법을 마련한다.

 

"내가 누구지?"… 기억상실과 과학적 퍼즐 맞추기

      소설의 도입부, 주인공 그레이스는 혼수상태에서 깨어난다. 주위엔 알 수 없는 시체만 있고, 몸은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데다 발음까지 이상하다.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난다. 보통의 드라마라면 여기서 뜬금없는 가족애를 떠올리며 울겠지만, 우리의 주인공은 다르다. 그는 본능적으로 주변 기기들을 뜯어보고,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고, 우주선에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중력 가속도를 측정하기 시작한다. 이 과정을 보며 ‘와, 나라면 일단 울면서 문부터 두드렸을 텐데, 이 사람은 물리 법칙부터 확인하네?’라고 했을 것이다. 자신의 기억을 되찾아가는 과정이 마치 최고 난도의 고급 방탈출 게임을 지켜보는 듯한 쾌감을 준다. 아니, 우주 한복판에서 방탈출 게임? 나가면 어디? 

 

과학은 '장식'이 아니라 '서사' 그 자체

      과거 SF가 과학을 다룰 때, 독자들은 작가가 정해준 과학적 사실을 그냥 받아들이거나 상상의 나래 한껏 펼치기 위한 도구였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독자들도 인터넷으로 최신 물리 가설을 꿰고 있다. SF를 좀 안다는 독자들에게 양자역학과 상대성 이론은 이제 이해하기 어려운 난제가 아니다. 그래서 작가들은 더 이상 대충 얼버무릴 수 없다.

      <프로젝트 헤일메리>에서 태양을 먹어 치우는 '아스트로파지'를 다루는 방식은 압권이다. 이 물질은 단순히 신비한 아이템이 아니라, 열역학적 법칙 안에서 굴러가는 하나의 '실체'로 존재한다. 물론 작가가 상상해 낸 크리쳐이지만 그 생명체에 대해 알아가는 과정의 디테일함은 치밀하다. 과학적 디테일이 서사의 엔진이 되어, 독자가 그 계산 과정을 따라가며 주인공과 함께 땀을 쥐게 만드는 것. 이것이 현대 SF가 과거와 차별화되는 가장 큰 포인트이다. 태양을 삼키는 미생물이라니, 이런 상상력은 도대체 어디서 나타나는 것인지...

 

"이봐, 돌덩이 친구?"… 소통도 데이터로!

      외계인 '로키'와의 조우 장면은 과거 SF와 가장 극명하게 갈리는 지점입니다. 옛날 SF 영화였다면 외계인과 만나는 순간 텔레파시나 우연한 언어 습득으로 대화가 시작됐다. 심지어 외계인이 친절하게 영어를 한다. “Hi, everyone. Nice meet you.” 우리는 외계인과 대화하기 위해 그토록 영어 공부를 열심히 했었나?

      하지만 이 소설은 다르다. 발성법도 다르고 살아온 환경도 천지차이에다가 시각이 거의 없는 스톤, 청각이 미개한 인간이 서로 소통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하지만 두 지성체는 수학과 물리 상수를 주고받으며 '데이터의 교환'을 통해 신뢰를 쌓는다. 수학과 물리는 별과 별을 이어주는 최초의 소통 도구가 되는 셈이다. 진리 앞에, 과학이 얼마나 정교한 소통의 도구인지 깨닫게 된다. 이건 마치 우주적 규모의 '고품격 펜팔'이라 할 수 있겠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처럼 소설 <프로젝트 헤일메리>는 과학적 디테일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과거의 SF가 우리에게 '상상력의 확장'을 선물했다면, 현대의 SF는 '과학적 탐구의 희열'을 선사한다. 영화를 보고자 하는 분이 있다면 단언컨대 먼저 소설을 보기를 추천한다. 영화는 영상미를 살리기 위해 소설이 주는 진짜 재미를 많이 생략하고 외계인 로키와 지구인 그레이스의 우정이 중심축이 되어 아쉬운 점이 많다. 그러니 꼭 영화보다 소설을 먼저 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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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겨울부터 시작된 파반느와의 만남이 얼마전 막을 내렸다. 그동안 나는 박민규의 원작 소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를 천천히 읽었고, 중간쯤 읽고 있을 때 KBS 라디오 극장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를 출퇴근 시간에 틈나는대로 듣기 시작했다. 책은 시처럼 읽다가 쉬다가 다시 읽었고, 라디오는 귓속으로 들어오는 성우들의 맑은 목소리와 대사의 생동감으로 느꼈다. 그리고 얼마전 넷플릭스로 <파반느>가 개봉했다. 책을 다 읽고, 라디오 극장도 끝난 후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시청한 <파반느>는 그럭저럭 괜찮았지만 책이 주었던 상상력과 라디오 극장이 더한 생명력이 영화에서는 충분히 살려주지 못한 아쉬움도 있다. 

012

 

 


아버지는 놈팽이였어. 어머니가 피땀 흘려 밖에서 벌어오면 그 돈으로 자기를 치장하고 영화판을 기웃거리며 자신의 출세길만 생각했던 거지. 그렇게 아버지는 어머니와 나를 버리고 돈 많은 여자와 결혼했어. 애시당초 그 남자는 어머니를 사랑하지 않았던 거야. 동정도 아니었고 호의도 아니었으며 연민도 없었지. 그저 빌붙어 피를 빨아먹은 거머리였어. 그 남자가 떠나고 난 뒤에도 엄마는 한참동안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어. '나'의 이 유년의 기억들은 사랑에 대해 회의하고 그 감정을 하찮게 여기게 만들었어. 아버지는 '나'의 상처이자 나를 단련한 용광로였고, 내가 살아가는 힘이었지. 얼굴값? 꼴값... 

그러던 어느날 '그녀'가 나타났다. 모두에게 놀림받고 터부시되며 다가서는 안될 존재로, 버림받은 개처럼 지하주차장 한켠에 내버려진 여자. 그저 못생겼다는 이유로 누구도 가까이 하지 않고 심지어 놀잇감으로 전락해 잔뜩 찌그러져 있는 사람. 그에게 '나'는 눈길이 갔어. 아버지에게 버려진 어머니 때문일까? 아마도 시작은 그럴 거야.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그저 그의 겉모습만 보고 그 가치를 폄훼하는 현상, 이 잔인한 자본주의의 총화 백화점에서는 세 걸음마다 한 번씩 볼 수 있을만큼 자주 마주치는 현상 아니던가? 

그래서 그녀에게 눈길이 간 거다. 그리고 말했다. "우리 친구할래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 하지만 쟤는 진심(眞心)이야.

 

그렇게 요한 형과 '나'와 '그녀'는 켄터키치킨 집에서 맞은편 bear 가게의 간판을 보며 'hope'를 들이마시고 많은 이야기를 하며 살았지. 그렇게 우리는 사랑했어. 3개의 창(연민, 호의, 동정)을 말하며 걱정스럽게 나를 보던 요한 형의 우려와는 다르게 '나'는 '그녀'를 '사랑'으로 마주했으니까. 그녀와 내가 헤어진다는 건 마치 "손끝 발끝의 모세혈관에까지 뿌리를 내건 나무 하나를, 통째로 흔들어 뽑아 버렸다"는 것과 같다고 말했어.

그러다가 '나'는 지하주차장 일을 그만두고 대학에 진학했어. 소설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에서였지. 대학이라는 곳은 또 얼마나 낭만적인가? 그렇게 켄터키치킨과 멀어지고 hope 대신 학교 앞 hof 집을 다녔고, bear 대신 beer를 마시기 시작했지.

그런데 어느날 요한 형이 손목을 그었어. 정신병동에 갇힌 요한 형을 만났지만 그저 멍한 눈으로 한곳만 보고 있는 형을 만났지. 그렇게 수다스럽던 형은 왜 스스로를 가두고 입을 닫아버렸을까? 그리고 그녀와의 연락도 끊겼어. 그녀는 나에게 장문의 편지를 남기고 백화점을 그만두었지. 잘생긴 '나'와 못생긴 '그녀'는 서로를 사랑하지만 사회가 만들어 놓은 편견과 차별의 벽을 넘지 못한 거야. 나를 사랑하니까, 떠난다는 그녀의 글을 보면서 아무말을 할 수가 없었어. 

하지만 세상은 여전히 차갑고, 당신의 곁에 서 있는 나의 모습이 당신을 힘들게 할까 봐 두렵습니다. 나는 이제 나를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외모가 아닌 오직 나의 존재만으로 살 수 있는 곳으로 떠나려 합니다.(중략) 부디 나를 찾지 마세요. 당신의 기억 속에서 나는 언제나 가장 아름다운 왕녀로 남고 싶습니다. 당신이 나에게 주었던 그 따뜻한 눈빛과 시간들을 평생의 보석으로 간직하며 살겠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잊혀질 거라 생각했어. 다시 지하주차장에서 일할 때는 '희재'라는 명품샵에서 일하는 예쁜 여자애도 만났지. 그저 껍데기만 좋아했지, 알맹이는 아무것도 아니더라. 그런데 희재를 통해 '그녀'의 주소를 알게 됐어. 집앞까지 찾아갔지만 그냥 돌아섰어. 스스로 나를 떠난 사람이잖아. 이렇게 불쑥 얼굴을 내미는 건 아니잖아. 아직 '그녀'는 나를 만날 준비를 하지 않았을 거야. 조용한 '그녀'의 삶에 다시 파문을 만들 수는 없잖아. 그래서 '나'도 장문의 편지를 남겼어. 12월 25일 다시 이곳에 올테니 만나고 싶다면 나와 달라고 남겼지. 

그렇게 그녀를 만났어. 우리는 서로의 마음을 다시 확인했어. 나는 여전히 그녀를 사랑하고 그녀도 나를 사랑하고 있었지. 그렇게 우리는 다시 만나기로 했어. 하지만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나는 지독히 내리던 눈에 미끄러진 버스가 전복되면서 큰 사고를 당해. 


여기서부터는 결론이 두 개야.

하나는 그 사고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나는 그야말로 또 다시 기적적인 재활에 성공하고 그 이야기를 글로 담아 크게 성공하는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지. 하지만 그녀와 만난 이후 갑자기 연락을 끊은 나로 인해 그녀는 이미 한국에 남아 있지 않고 머나먼 독일에서 삶을 살고 있었지. 어렵게 알아낸 연락처를 들고 독일까지 찾아가 그녀를 만나고 다시 사랑을 하게 돼. 아름다운 이야기지. 

그런데 다른 하나는 달라. '나'는 그 버스 전복 사고로 세상을 떠나. 그리고 요한 형이 '나'와 '그녀'의 이야기를 소설로 써서 세상에 내놓지. 요한 형은 '그녀'와 결혼했어. 요한 형도 그녀의 외모가 아닌 내면의 아름다움을 보았던 거겠지. 그렇게 '나'의 젊은 날 세상의 편견과 싸우며 순수한 사랑을 보여 주었던 '나'와 '그녀'의 이야기가 세상에 나오게 되지. 


스무살. 어색하고 부끄러운 나이.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패기와 자신감도 충만하지만 그 이면에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부끄러움', '눈치'가 커가는 시기이기도 하다. 작가는 '못생김'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왜곡된 시선을 '그녀'가 닥치는 여러 현실과 '그녀'가 남긴 말과 행동과 글로 가감없이 드러냈다. 그녀와의 로맨스는 그래서 평범하지 않다. 그래서 소설은 거친 투쟁의 서사이며 날선 복수의 담론이다. 결국 이 싸움은 처절하고 슬프고 비참한 비극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 모리스 라벨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는 이 소설의 전체의 정서를 지배한다. 상상력을 부르짖는 요한은 그래서 모순적이다. 못생김을 못생김으로만 받아들이지 말고 상상력을 키우라고 하지만, 사실 사랑은 상대를 상상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실체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이라는 점을 '나'는 강변했다. 

'죽은 왕녀'는 그래서 못생김을 이유로 지워져 버린 것들에 대한 진혼곡이다. 온갖 전설과 동화, 만화 속에서 많은 왕자와 용사들이 왕녀를 구하기 위해 용의 동굴로 돌진한다. 그런 왕녀는 반드시 아름다워야 하고 구하고 지킬 가치가 있어야 한다. 시각적 자극이 남발되는 현대 사회에서는 왕녀들이 더더욱 아름다워지고 고귀해진다. 그녀는 용에 잡혀 있고나 높은 성에 붙잡혀 있을 뿐인데 말이다.

작가는 시각적 자극으로 대변되는 우리 사회의 편견을 비판하면서 음악적인 장치를 여기저기 두었다. 작품의 제목도 그러하지만 80년대 팝송과 가요들이 작품의 곳곳에서 우울하고 비이성적인 사회상을 드러내 주고 있다. 컬처 클럽(Culture Club) - <Karma Chameleon>는 신나는 비트와 리듬의 곡이지만 겉모습에만 열광하는 세상의 풍경을 보여 주는 장치이다. 

우리가 말다툼할 때 당신은 매일 거짓말을 하는군요. 그게 당신의 방식이라면 난 당신을 믿을 수 없어요. 내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나요? 아니면 내가 듣고 싶은 말만 하는 건가요? 당신은 감정을 숨기려 하지만, 당신의 눈동자엔 두려움이 가득해요.
-컬처 클럽(Culture Club) - <Karma Chameleon> 중에서

눈에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 외모 보다는 내면, 시각보다는 청각이 소설 전반을 지배하는 사상과 철학이다. 외모에 대한 시대의 폭력적 시선을 거두고 내면의 심장 소리를 듣는 음악처럼 느린 왈츠곡에서 빠른 비트의 팝송까지 글자라는 매체에만 얽매이지 않고 독자들에게 청각적 즐거움까지 누릴 수 있는 장치들을 만들었다. 소설을 읽다 보면 해당 음악이 나오는 장면에서는 굳이 읽는 것을 중단하고 등장인물들과 함께 그 음악을 듣다보면 이들과 함께 공간을 점유하고 있다는 상상을 하게 된다. 

또 작가는 행을 엉뚱한 곳에서 잘라 먹는다. 이 독특한 문단 배치는 처음에는 무척이나 어색하다. 왜 여기서 끊었는지를 생각하게 하고, 천천히 그 잘린 부분을 다시 읽게 한다. 즉 작가의 의도적인 이끌림에 독자가 빨려 들어가게 한다. 

 

이 독특한 줄바꿈, 그로 인한 여백은 독자들이 소설을 읽는 흐름을 끊어 버리는 단점도 있지만 중간 중간 중요한 지점에서 한번쯤 쉬어 가면서 여백에 담은 작가의 의도를 생각하게 한다. 책을 읽는 속도는 느려지지만 종종 시를 읽는다는 착각이 들게 만든다. 문장을 끝맺지 않고 다음 줄로 넘기거나 단 하나의 문장만 독립적으로 남겨 놓는 방식은 한 박자 쉬어 가게 만든다. 섬세한 인물의 심리 묘사나 중요한 사건의 전개에서 독자에게 보다 깊은 몰입을 준다. 쭉쭉 읽어가던 흐름이 발목이 걸린 것처럼 주춤하게 되고 작가의 의도에 끌려가는 기분도 들지만 소설을 다 읽고 나서 느끼지만 좋았다. 만일 내용이 80년대의 감성과 낭만, 연애를 다룬 소설이 아니라면 엄두를 내기 어려운 시도임에는 분명하다. 그런데 이 작품은 보기 좋게 성공했다. 때로는 시처럼 때로는 소설처럼 시대와 사랑을 느꼈다. 마음의 박자로 글자 바깥의 여백으로 이야기를 만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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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한 편의점 (벚꽃 에디션) - 8점
김호연 지음/나무옆의자
 
 

편의점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구심력과 원심력
"불편한 편의점"은 이문구의 "관촌수필"처럼 하나의 장소에서 여러 군상들이 어우러지는 모습을 그려낸 연작 소설이다. 24시간 돌아가는 편의점에서 만들어지는 이야기는 마치 원운동하는 물체에 작용하는 구심력처럼 우리의 마음을 끌어들인다. 이런 강한 구심력이 있기에 물체는 원심력을 발휘해 힘차게 원운동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야기의 중심을 잡아주는 구심력은 바로 인간에 대한 관심, 그로부터 시작되는 구원에 대한 믿음이다. 이 중심에는 '독고'와 '사장 할머니 염영숙'가 있다. 반면 이야기를 재미있고 풍부하게 하는 힘이 원심력이다. 원심력을 받는 이야기의 인물로는 20대 여성이며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며 편의점 알바를 하는 '시현',  50대 여성으로 생계를 위해 편의점 알바를 하는 '오선숙', 배우로 활동하다가 극작가로 변신한 '정인경', 의료기기 영업사원으로 일하는 40대 중년의 사내 '경만', 경찰로 재직하다가 불명예 퇴직하고 사설 흥신소에서 일하는 60대 '곽 씨'가 있다. 편의점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 군상들의 이야기가 바로 이야기를 재미있게 돌리는 원심력이 된다. 사장 할머니(염영숙)로부터 시작된 인간을 향한 관심과 구원에 대한 믿음, 그리고 용서로 이어지는 경애의 마음이 '독고'라는 정체 불명의 노숙자로 전달되고 이것이 크게 확산하면서 이야기의 꽃을 피워 냈다. 

현대 사회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공기처럼 숨쉬며 접하는 공간 '편의점'이라는 공간에서 만나는 알바들이 있고, 편의점을 찾는 동네 할머니와 꼬맹이부터 술취한 사람들과 진상들 이야기는 양념처럼 이야기의 재미를 더한다. 거기에 흔하게 볼 수 있는 알바라고 불리는 직원들의 모습도 어느 편의점에서나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그네들의 문제 있는 사연들이 '독고'라는 노숙자를 만나면서 삶의 변곡점을 지나고 좀더 희망을 가져 보는 변화를 겪는 모습은 이 책을 읽을 때 독자가 품게 되는 감동 중 하나이다. 

이야기는 연작 소설처럼 각각의 이야기들이 있고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인물 '독고'의 이야기가 씨줄과 날줄로 엮여 잇다. '독고'와 '편의점 사장 할머니'가 잃어버린 지갑을 연으로 이어지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를 시작으로 편의점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그곳을 드나드는 사람들, 할머니의 가족과 거기서 다시 연결된 곽 씨까지 이야기는 줄줄이 엮여 이어진다. 

불편하지만 괜찮아
여러 이야기 중 책 제목과 동일한 소제목의 '불편한 편의점' 이야기는 좀 불편했다. 대학로 배우였다가 대본 작가로 활동하지만 신춘문예 말고는 자기 작품을 연극 무대에 올려본 적이 없는 작가의 이야기. '독고'라는 인물과 편의점을 글로 써낸다는 설정으로 이 책의 작가가 불쑥 등장하는 느낌이다. 이 소설 전반적으로 다양한 군상들이 편의점에서 어우러지고 있는데, 그 대부분은 보편화된 대중의 모습을 잘 드러내고 있지만 이 부분에서만 등장하는 작가의 모습은 그다지 일반적인 모습이라고 보기 어렵다. 아마도 작가가 자신이 받은 사회의 도움에 은혜를 갚는다는 느낌으로 끼워 넣은 건 아닐까 생각되는 여러 부분이 있지만 전체 이야기 중에 가장 이질적인 느낌이 드는 부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전반적으로 따뜻하다. 보편화된 장소라는 편의점, 내 이웃 혹은 독자 자신을 닮은 인물들이 하나같이 상처받고 아파하면서 편의점을 찾고, 여기서 다시 희망을 갖고 살아간다는 이야기는 도시 동화의 틀을 잘 갖추고 있다. 사람에 지치고 용서와 구원의 길을 잃은 이들에게 잠시 삶의 고단함을 잊고 나침반을 다시 보게 하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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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온한 책, 불온한 사상


사람의 생각은 말과 글로 전달된다. 누군가를 설득하기 위해 대화를 하듯이, 많은 이에게 생각을 전달하기 위해서는 글이 필요하다. 여러 권력자들이 자신의 독재 권력을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 반대자들의 말과 글을 차단했다. 때로는 죽음으로, 때로는 금서라는 형식으로····

중세 시대 고대 인문학 관련 서적들은 이교도의 사상이라는 이유로 종교적 권력 아래 대중에게서 격리되었다. 격리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시간의 무차별적인 공격 앞에 속절없이 사라져 갔던 고대 문헌들을 기어이 끄집어 내어 세상앞에 내놓았던 사람들이 있다. 이 책 <1417 근대의 탄생>은 그런 사람 중의 한 명인 포조 브라촐리니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포조는 중세의 기독교 권력의 몰락해 가던 모습을 옆에서 지켜 보았던 로마 교황청 서기이기도 했고, 인문학과 과학 부흥을 기뻐하고 적극적으로 고대 서적 발굴에 앞장섰던 인문학자이기도 했다. 어느 시대나 경계인이 가졌던 모순을 모두 가진 인물이었고, 생각과 사상도 어느 하나로 대변하기 어려운 다양성을 갖고 있던 인물이다. 그런 경계인이었던 포조가 르네상스의 시기 어떤 역할을 했으며 어떤 삶을 살았을까?

이 책은 중세의 몰락과 르네상스의 시작점에 있던 한 인물-포조 브라촐리니-이 독일의 오래된 수도원에서 발견한 책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의 의미를 쫓아가는 내용이다.

2천년 전에 쓰인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

기원전 1세기 고대 로마의 시인 루크레티우스의 철학 서사시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의 핵심적 내용들은 더 거슬러 올라 기원전 4세기 에피쿠로스의 철학에 다다른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에피쿠로스는 무엇이 좋고 악한지는 쾌락과 고통을 기준으로 판단할 수 있고, 가장 좋은 쾌락은 지적 탐구에서 얻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 죽음은 몸과 영혼의 종말이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며, 신은 인간을 벌주거나 보상하는데 관심이 없고, 우주는 무한하고 영원하며, 세상의 모든 현상들은 궁극적으로 빈 공간을 움직이는 원자들의 움직임과 상호 작용으로부터 나온다고 주장했다.

기원전 4세기의 이런 주장들은 지금 돌아보아도 매우 놀랍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죽음 이후의 세계를 믿고 있고, 신이 인간사에 개입하여 상과 벌을 주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런 사상은 신의 권능으로 세상을 지배하던 성직자들이 있던 중세에서 용납될 수 없는 사상이다. 아니 중세 유럽만이 아니라 태양계 바깥까지 우주선을 보내고 있는 현재도 일부 종교인들이 들으면 펄쩍 뛸만한 무신론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물론 세상에 영원한 진리는 없을 것이다. 먼 훗날 어떤 과학적 발견이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단서를 발견할지도 모르고, 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까지 인류가 이루어 낸 과학적 철학적 사실들로 본다면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다.

루크레티우스의 서사시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를 중심으로 저자는 14세기 유럽의 과학적 발견, 종교적 갈등, 철학적 성찰 등을 꼼꼼한 고증 자료와 함께 엮었다. 하나의 사건을 통해 시대의 변화를 유추해 내는 힘은 단순한 상상상력을 넘어 치밀한 고증이 있을 때 더 빛이 난다.

교황청 서기였고 피렌체의 총리까지 지냈으며 탁월한 책 사냥꾼이었던 인문학자 포조의 기록과 그가 다른 학자들과 어울렸던 편지들, 그의 행적을 정리한 기록물들을 중심으로 보다 역동적인 시대의 흐름을 살펴볼 수 있게 하였다. 특히 종교재판의 잔혹함과 비이성적 광기, 당시 고위 성직자들의 위선과 타락을 포조의 글과 기록을 통해 보면, 가장 어두울 때 빛나는 작은 불씨들의 위대함을 엿볼 수 있다.

인간은 어떤 동물보다 추상화 능력이 뛰어나다고 하며 이것이 인류가 사회성을 갖고 지금까지 발달할 수 있었던 배경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인류의 상상력은 신에 대한 공포와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갈망으로 나타나면서 진실을 외면하고 진리에 대한 성찰을 가로막았다. 죽음 이후의 세계는 존재하지 않으며 신은 설령 존재한다 하더라도 인간에게 관심이 없을 거라는 오래된 진실이 21세기를 사는 많은 사람들에게 외면 받고 있는 현실은 참 아이러니하다.


<장미의 이름>과 <1417 근대의 탄생>

중세시대 가장 불온했다는 책이 가장 빛나는 세상을 만드는 데 일조했다. 분노와 공포로 사람들의 마음을 현혹하고 그들이 생명과 재산을 갈취하던 권력이 과학의 발전과 인문학적 사상에 밀려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졌다.

<1417 근대의 탄생>은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을 떠올리게 했다. <장미의 이름>은 어느 수도원에서 발생한 연쇄 살인 사건을 다룬 작품이다. 이 살인은 광신도였던 늙은 수도승이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논리를 담고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읽는 수도사들을 살해하고 그들의 죽음을 신을 배신한 자들에 대한 신의 심판으로 위장하여 공포를 조장하려는 음모였다. <장미의 이름>은 이미 부패할대로 부패했던 당시 기독교 권력의 모습과 함께 분노와 공포로 대중을 지배하려던 성직자들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 준 작품이다.

두 책은 모두 중세 시대의 종교 권력이 무너지는 과정과 함께 고대 문헌이 가져온 충격이 당시의 성직자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잘 보여 준 책이다. <1417 근대의 탄생>은 실제 당시 사람들의 활동과 기록을 통해 탐사 보도 형식으로 사실을 전달했다면 <장미의 이름>은 살인사건을 쫓는 수도사의 이야기로 당시의 광기를 고발하고 있다. <1417 근대의 탄생>이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의 철학과 사상이 르네상스 시기와 인문학과 과학과 만나는 지점에 좀더 집중했다면, <장미의 이름>은 중세 기독교의 타락과 비이성에 더 집중했다.

<장미의 이름>을 재미있게 읽은 독자라면 중세에서 르네상스로 세상이 바뀌는 과정의 이야기에 좀더 흥미를 갖고 <1417 근대의 탄생>을 읽기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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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박현옥 | 문이당 | 2006년 5월 읽음

<아내가 결혼했다>
당황스러운 제목이다. 누군가 소개해줬을 때 이혼 이후의 얘기라고 짐작했다. 드라마 ‘연애시대’처럼(사실 이 드라마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이혼 이후에도 관계를 이어가는 남녀의 이야기는 흔한 소재였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책장을 열 때부터 심상치 않다. “모든 것은 축구로부터 시작되었다.”라고 시작하는 소설의 첫머리. 제목-아내가 결혼했다-은 남자들에게 비난받기 좋고 첫머리-모든 것은 축구로부터-는 남자들의 시선을 끌어들인다. 물론 여기서 말한 남자들이란 ‘모든’ 남자를 말하기 보다는 ‘대부분’의 남자들을 말한다. 아내가 결혼하는 걸 좋아할 남자들은 극히 드물 것이며, 축구를 싫어하는 남자보다는 좋아하는 남자가 훨씬 많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렇게 작가는 보통의 남자들에 심성을 가진 나를 끌었다 놓았다 하며 내 눈을 꽉 잡았다.
책을 읽는 내내 아내의 결혼에 대해 심정적으로, 적극적으로 거부하면서도 ‘사랑’이라는 이유로 현실을 받아들이는 ‘나’가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은 ‘아내’의 논리정연하고 한편으로 사랑스러운 설득 때문이었다. 읽는 나도 눈물겹게(?) 동감할 수밖에 없었다.
여전히 간통이 법률적으로 처벌을 받는 우리나라 현실에서 아내의 사랑은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사회적 반역행위다. 하지만 ‘사랑’은 ‘제도’보다 우선하는 것이다. 끝내 아내의 또 다른 남자를 인정하지 않는 ‘나’는 결국 아내의 설득에 못 이겨 호주에서 ‘나’와 ‘아내’와 ‘그놈’과 ‘딸’이 한 가족을 이루며 살기로 약속한다.
긴장과 갈등, 분노와 슬픔 등 온갖 감정들이 난무하는 상황을 축구장에 빗대 놓은 작가의 탁월한 구성이 이 책을 단숨에 읽게 만들었다. 그러나 ‘폴리아모리’(비독점적 다자연애)는 여전히 낯선 단어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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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존 키건(역자 정병선)
출판사 : 지호
정가 : 18,000원

두 달 전이었을 거다. 인터넷으로 한꺼번에 책을 구입했다. 그 중에 하나였고, 책에 대한 평이 괜찮아서 구입했는데, 중간중간 들쳐보니 어느 부대가 어쨌느니, 진형이 어쨌느니, 병사들의 상태가 어쨌느니 하는 이야기라 재미없다 싶어서 뒤로 미뤄두다가 요즘에야 차근차근 읽고 있다.

우선은 의외로 재밌다. 아니, 흥미롭다고 이야기해야 할 것 같다. 군대를 다녀온 사람이 아니더라도, 한순간 전투(혹은 싸움)의 극도의 흥분상태를 경험해 본 이들에게 가장 공식적이고 파괴적인 폭력인 전쟁의 전투가 어떤 모습이며, 그것을 움직이는 역동적인 힘이 어디에 나오고, 그리고 각각의 병사들이 전투의 순간에 경험하는 것이 무엇이며, 그것이 전투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 이처럼 객관적이고 간결하고 자세히 묘사할 수 있다는 데서 놀라울 뿐이다. (이 책의 저자는 전쟁이나 전투에 한번도 참여해 본 적이 없다고 한다. 그래서 더욱 놀랍다.)

저자의 기록은 종전의 전투기록이 영웅적 리더십과 상투적 이미지, 그리고 승자 중심의 기록(선별적 기록) 등으로 전쟁(전투)의 본래 모습을 많이 가리고 있다고 보고 있다. 고대의 전투기록을 서사적으로 묘사한 여러 작품들을 통해서도 이러한 사실은 잘 드러난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가 대표적인 경우다.

[병사들은 두려움 때문에 싸운다. 첫째는 전투 거부의 결과(처벌)에 대한 두려움이고, 둘째는 잘 싸우지 못한 결과(살육)에 대한 두려움이다.]

전쟁은 무서운 폭력이다. 그것은 살육에 대한 두려움을 극한으로 몰고 가며, 광기에 어린 흥분으로 문명을 지우는 행위이고, 인간성의 최저점으로 치달아가는 야만이다. 세상 어디에서도 이런 폭력이 더 이상 문명(혹은 인권)의 이름으로 치장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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