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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전노장 드라이버 써니 헤이스로 분한 브래드 피트는 수트만 입어도 서킷을 런웨이로 만들어 버릴 정도로 멋진 사내다. 좋은 대우를 버리고 다 망해가는 팀으로 걸어오는 그의 모습은 자고로 멋이란 옷이나 외모가 아니라 자세와 태도에 있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한다.

      F1이라는 경기는 또 어떤가? 시속 300km 이상의 속도로 질주하며 중력가속도를 온몸으로 버텨야 하는 극한의 스포츠이다. 젊은 루키 조슈아가 써니를 보며 속으로 ‘우리 형님 서킷 위에서 뒷목 잡으시는 거 아닌가?’ 걱정했을 거라는 데 내 돈 500원과 SK하이닉스 주식을 걸겠다. 다행히 피트 형님의 에이징 커브는 서킷의 급커브보다 훨씬 부드럽더라. 물론 그 잘난 얼굴이 중력가속도에 일그러지는 모습을 헬멧으로 감춘 건 영화상 설정일 뿐 배우 보호 차원의 설정은 아니었겠지.

 

     뜨거운 엔진음과 심장을 타격하는 속도감, 영화 <F1 더 무비>는 단지 트랙 위를 달리는 머신의 외형만을 보여 주는 작품이 아니다. <탑건: 매버릭>의 조셉 코신스키 감독과 브래드 피트가 만난 이 영화는, 잘 만들어진 스포츠 영화가 어떻게 관객의 심박수를 통제하고 감동을 이끌어내는지 그 정석을 보여 주었다.

     여기서는 <F1 더 무비>에 나타나는 스포츠 영화의 고전적인 문법을 짚어보겠다. 이를 통해 이 영화가 가진 독특한 매력과 마지막에 던지는 통렬한 한방에 관해 이야기해 보려 한다.

 

슈퍼 루키와 늙은 노장의 만남

     1990년대 끔찍한 사고 이후 서킷을 떠났던 써니 헤이스(브래드 피트). 그가 지역의 그저그런 레이싱 대회를 다니다가 F1 그랑프리 대회에 출전하며 다시 머신(F1에 출전하는 차량을 부르는 말)의 운전대를 잡는 순간은 전형적이지만 가장 가슴 뛰는 오프닝이자 갈등의 전조가 된다. 팀의 신예 조슈아 피어스(댐슨 이드리스)는 오만하고 개인주의적인 성향이며 SNS와 미디어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에 더 신경 쓰는 한편 좀 더 나은 조건의 다른 팀으로 이적할 기회를 엿보고 있다. 써니와 조슈아가 피트인(Pit In) 공간과 트랙 위에서 거칠게 부딪히는 초반부의 장면에는 이런 배경이 숨어 있어 극적 긴장감을 팽팽하게 당긴다.

     영화는 레이싱이 결코 드라이버 혼자만의 독주가 아님을 끊임없이 보여 준다. 우리가 미디어를 통해 보는 F1이라는 스포츠는 드라이버들이 이상한 차를 타고 누가 더 빠른가를 겨루는 모습으로만 비추어지지만, 사실 F1 레이싱은 0.001초를 다투는 극한의 세계이며, 여기에는 철저한 리더십과 팀워크가 요구된다.

     후반부 경기가 재개되는 순간, 써니 헤이스는 팀 루키 조슈아를 우승시키기 위해 온몸을 던져 자신을 희생하며 나선다. 마지막 레이싱에서 다른 머신들과 치열하게 접전을 버리며 질주하는 장면을 보고 있으면, 관객도 서킷에서 회전 중력을 이겨내려는 드라이버처럼 온몸이 경직되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우승 기회를 내려놓고 팀의 승리와 루키 조슈아의 질주를 위해 뒤따라오는 경쟁 머신들을 막아서는 써니 헤이스의 모습은 팀의 승리를 위해 희생하는 스포츠 선수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 준다. 또, 팀을 이끄는 진정한 리더십은 바로 자신을 제일 먼저 희생할 수 있는 숭고한 정신에서 나온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 장면이다. 단순히 속도 경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치밀한 전략과 퍼포먼스로 상대를 압도하고 팀을 하나로 뭉치게 할 수 있는 노장의 열정이 우리의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것이다. 나이든 레이서의 플랜C가 경기를 압도하는 모습을 보라!

 

F1이 가진 독특한 특성의 시각화

     시속 300km가 넘는 속도로 질주하는 머신들이 경쟁하는 장면을 보면 내 심장도 같이 심박수 150까지 치솟는 느낌을 받는다. 달리는 머신에서 티타늄 스파크 불빛이 번쩍이는 것을 보면 군대에서 기관총을 쏠 때 날아가는 발광탄을 봤을 때처럼 심장이 두근더린다. 문득 영화를 보다가 ‘저 속도면 귀성길 전라남도 구례까지 300km도 한 시간이면 가겠구나’ 싶다가도, F1 머신은 과속 방지턱 하나 넘는 순간 차체가 박살 난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귀성길에는 그냥 내 차 K3로 마음에 드는 휴게소마다 피트인 하면서 쉬엄쉬엄 가는 걸로...

     F1 머신은 오직 달리기 위해 존재하는 차량이다. 이를 위해 문도 없고 헤드라이트도 없다. 오직 서킷에서만 달릴 수 있는 차량이지만 온갖 과학적 장치와 센서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다. 시즌 중에도 끊임없이 차량을 점검하고 업데이트하며 더 빠른 차를 만들기 위해 경쟁한다. 여기에는 첨단 공기역학과 물리학, 재료공학이 총동원되기 마련이다. 헤시스 팀의 총괄 기술자 케이트도 전직은 나사의 우주항공 기술 연구원이었다. 이처럼 머신은 지상 탈것의 첨단과학기술의 총아로, 사람들은 머신을 지상 위의 전투기라고도 부른다.

     이 영화의 큰 장점 중 하나는 일반 대중에게는 다소 낯설 수 있는 F1의 메커니즘을 영리하게 극에 녹여냈다는 점이다. 단순한 속도 경쟁이 아니라, 타이어의 마모 상태, 다운포스(차체를 아래로 누르는 공기역학적 힘)를 위한 엔지니어들의 치열한 기술 개발, 그리고 피트 스톱(Pit Stop)에서 몇 초 만에 타이어를 교체하는 크루들의 일사불란함 등이 화면에 등장한다. 써니 헤이스가 팀 머신의 한계를 진단하고 공기역학적 업그레이드를 제안하는 장면은 이 스포츠가 '인간과 기술의 가장 완벽한 결합체'라는 특성을 잘 보여 주는 대목이다.

 

가장 자본주의적인 스포츠 F1에 통쾌한 한 방

     영화의 클라이맥스는 단순히 경기에서 승리했다는 쾌감에 머무르지 않는다. 이 영화가 진짜 위대해지는 지점은 바로 '상업주의에 오염된 대회에 필요한 스포츠 정신의 회복'에 있다. 시즌 중반 내내 투자자들과 거대 자본은 팀의 가치와 존폐를 오직 '수익성'과 '마케팅 효과'로만 저울질한다. 스폰서와 돈의 논리에 휘둘리며 팀이 공중분해 될 위기에 처했을 때, 써니 헤이스는 신체적 부상과 법적 위험을 모두 자신이 짊어지겠다는 각서를 쓰고 마지막 트랙으로 향한다. 돈으로 모든 가치를 재단하려는 거대 자본의 얄팍한 속성을 비웃듯, 엔진의 굉음과 함께 체커 플래그(경기가 끝났음을 알리는, 검은색과 흰색의 체크무늬 깃발)를 향해 질주하는 머신들의 모습은 그 자체로 통렬한 카타르시스를 준다.

"당신들이 계산기를 두드릴 때, 우리는 목숨을 걸고 달린다."

     영화의 결말은 자본주의적 시스템이 아무리 스포츠를 상업적으로 이용하려 해도, 승리를 향한 드라이버들의 순수한 열정과 희생, 그리고 스포츠 본연의 각본 없는 드라마는 결코 돈으로 살 수 없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던진다.

     써니 헤이스는 가장 영광어린 순간에 모든 걸 던져버리고 無로 돌아간... 아니 자신의 미니버스를 타고 떠난다. 까짓거 나도 세상에 무시당할 것 없이 장대한 질주 본능을 품에 안고 거침없이 떠나고 싶지만, 소시민의 삶은 여전히 개미털이에 당하는 주식시장처럼 통장 잔고에 가슴 아파하거나 포머라는 말에 상처받고 전설의 복서 조지 포머에게 한 대라도 맞으면 정신 차릴 것 같다는 헛소리를 하고 있는 게 일상이다.

 

     <F1 더 무비>는 거친 엔진 소리 뒤에 인간의 뜨거운 심장 소리를 숨겨둔 작품이다. 스포츠 영화의 완벽한 문법 속에서 피어난 베테랑의 리더십, 그리고 상업주의를 맹렬하게 받아치는 마지막 한 방까지. 영화가 끝나는 순간까지도 가슴속에 진한 배기음이 남는 듯한 정말 잘 만든 영화이다.

 

이 글은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된 글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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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4. 26.

      아이의 중간고사 기간. 아이는 혼자 집에 있고 싶다고 했다. 조용히 아내와 단둘이 집을 나섰다. 쫓겨난 거 아니다. 부부 데이트의 날이다. 아무튼 그렇다. 때로는 그렇게 사는 거다. 무엇보다 아내가 좋아한다.  

      조계사에 들렸다. 관광객과 불자들로 북적였다. '부처님 오신 날'을 한 달여 앞두고 있다. 마당 한쪽에서는 법회 준비로 임시 의자들이 늘어서 있고, 또 다른 쪽에서는 힙한 찬불가에 맞춰 춤 공연 연습이 한창이다. 입구에 있는 북은 오가는 이들이 시시때때로 두들겨 대니 3초에 한 번씩 북소리가 울려 퍼진다. 북소리와 염불 외는 소리, 힙합 음악 소리까지 21세기 서울 한복판의 절에서 경험하는 꽤 신비하고 그로테스크한 풍경이다.

      그러나 저러나 아내는 또 아이의 복을 기원하겠다고 연등을 달자고 한다. 얼마나 하겠냐 싶어 그러라고 했는데, 연등 하나가 3만원이다. 연등 접수를 받던 아주머니는 가족 모두 하라고 영업(?)하신다. 물론 복을 기원하는데 어디 한 명만 하는 건 이상하긴 하지. 늙으신 어머니, 장모님의 건강도 기원해야 하고, 아직 장가 안 간 동생에게 좋은 배우자가 생기는 것도 바라야 하고, 우리 부부의 건강, 나의 안정적인 직장 생활도 기원하고... 복을 바라는 일들은 쎄고 쎘는데 딸아이 하나의 복만 바라는 것은 어딘가 뒤통수가 가려운 일임에는 틀림없다. 허나 그 복을 기원하는 것도 다 돈이다. 그러니 오늘은 아이 건강과 성공만 빌기로 한다.

      그렇게 연등이 달리는 모습도 보고, 사진도 찍고 차도 한잔 마시고 오늘의 두 번째 나들이 장소인 불교중앙박물관을 향하던 중이었다. 어, 그런데 조계사 문 바깥에서 외국 승려가 알수 없는 말로 뭐라고 하면서 웃으면서 우리 팔목에 염주를 들고 안아주고 법석을 떨며 사람 좋은 웃음을 짓는다. 예예~ 하다가 시주하라며 안내장을 보여 주었고, 어어 하다가 2만 원을 주고 돌아섰다.
      "응? 뭐지?" 
      그제야 나와 아내는 정신을 차리고 당했음을 직감했다. 역시 서울은 눈감으면 코 베어가는 곳이다. 아니 서울토박이들이 외국 승려에게 당했다. 두고두고 속이 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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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도 웃으며 불교중앙박물관을 찾았다. 오늘의 메인 이벤트. 도솔산 선운사의 삼지장보살. 
      1936년 선운사의 금동지장보살좌상이 도둑을 맞는다. 도둑맞은 불상은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런데 불상이 소유한 사람이 꿈을 꾼다. 불상이 꿈속에 나와 "나는 원래 전북 고창 선운사에 있었으니 속히 돌려보내 달라."라고 말하는 꿈이다. 대수롭지 않게 여긴 소장자들에게는 자꾸 이상한 일이 생긴다. 병이 생기거나 사업이 망하거나 하는데 다른 곳에 팔아넘기면 그 사람에게도 똑같은 꿈과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결국 마지막 소장자가 고창 경찰서에 자진 신고해 아무 조건 없이 불상을 넘기겠다고 밝히게 된 것.

      자고로 지장보살은 지옥에 단 한 명의 중생이라도 남아 있는 한 결코 성불하지 않겠다면서 지옥을 떠돌며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자신을 헌신하신 분이다. 인간들을 구제하겠다고 지상으로 내려왔다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와 같은 분이다. 자발적인 희생, 숭고한 사랑을 상징하는 분이다. 험악한 지옥을 떠돌며 단 한명의 중생이라도 구하겠다고 떠도는 지장보살을 만들어 낸 우리의 조상들은 도대체 어떤 삶을 살았던 것일까? 삼지장보살의 모습을 보면서 가슴 한쪽이 먹먹해진다. 

      이와 함께 익살스러운 승려들의 조각상도 그간 불교 사찰에서 보지 못했던 모습이다. 익살스러운 동작-곰방대로 자기 코를 위로 찌그려뜨리는 모습이라든지, 곰방대로 등을 긁는 모습, 앞니가 빠진 웃음으로 다른 중을 손가락질하는 모습, 품 안에 고양이와 노는 모습 등을 보니 사람 사는 모습이 천년전이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나 싶었다. 삶의 잔잔한 기쁨과 슬픔, 해학과 풍자로 고단하고 힘든 삶을 이겨내고 수도의 길을 걷는 것. 중이나 나나 다를 바 없다. 그저 스스로 추구하는 가치와 믿음을 다시 돌아볼 뿐.

      조계사 앞마당에 울려퍼지던 21세기 힙합 음악이, 500년 전 조상들이 만든 재미있는 승려 조각상과 통한다. 오래간만에 먼 조상들과 멋지게 인사한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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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물관을 나와 이제 경복궁을 갈 차례. 가기 전 점심을 먹어야겠다. 북촌손만둣국을 찾아들어갔다. 나는 북촌손만둣국, 아내는 북촌피냉면. 둘 다 얼큰하고 매운맛이다. 북촌손만둣국은 얼큰한 국물이 일품이다. 밥 말아 먹어도 맛있겠다 싶었지만 아내가 추가로 주문한 만두까지 먹으니 배가 불러서 밥은 못 먹겠더라. 피냉면은 알싸하다. 매우 맵다. 입이 좀 얼얼해진다. 

      배불리 먹었으니 걷자. 몇년만에 들린 경복궁. 역시 외국인이 절반이다. 그 절반 중 여자가 절반인데 절반 가까이가 한복을 입고 다닌다. 머리장식까지 예쁘게 하니 정말 어여쁜 외국처자들이 조선의 궁궐을 쏘다니며 사진을 찍고 다닌다. 아내와 나는 결혼 전 데이트할 때 고즈넉한 창경궁에서 비 오는 궁궐 안을 조용히 돌아다니며 소곤소곤 이야기하거나 조용히 자신의 발소리만 들으면서 걷거나 처마 밑에 앉아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을 보며 둘 다 아무 말 없이 시간을 보내기도 했었다. 그 기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우리는 시시때때로 그때의 이야기를 하곤 했고, 이번 경복궁도 그래서 오게 된 건데... 물론 15년도 훌쩍 넘기 옛이야기이고, 지금은 외국인 관광객 1천만 시대이고, 그 외국인들이 즐겨 찾는 경복궁이니 소란스럽기 그지없는 건 어느 정도 각오하고 갔더랬다. 

      그런데, 여기저기 이벤트로 펼쳐진 내용들을 살짝씩 구경했는데, 공연의 질이 좋지 않은 건 아니지만 궁궐 안에서 오일장 공연하듯, 마당놀이 하듯 공연하는 게 맞나 싶다. 관광객의 참여를 독려하고 끌어들이는 모습 등은 민속촌이면 족하다. 궁궐에서까지 그래야 할까? 생각해 볼 문제다. 

      그나마 소득이라면 최근 복원되었다는 건천궁이다. 명성황후가 일제의 자객들에게 시해된 역사적 장소이다. 다른 장소와 달리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여러 아이들이 강사 선생님과 함께 이곳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을미사변의 역사적 장소가 복원되었으니 보다 생생하게 역사적 사건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다시는 한 나라의 주권이 그렇듯 처참하고 잔인하게 밟히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어떤 나라이건 말이다. 그렇게 경복궁 구경까지 마치고 나니 아내와 나는 녹초가 된다. 경복궁을 나와 정부종합청사 옆길로 돌아서 세종문화회관을 건너 광화문 광장을 거쳐 시청 앞을 지나 버스정류장까지 한참을 걸었다. 서울시의회를 지날 즈음 성공회성당도 구경했다. 그리고 버스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내와 나는 다시 앞으로 몇 년간은 경복궁은 쳐다도 보지 않을 것 같다고 했다. 시간이 되고 여력이 되면 덕수궁이나 창경궁, 종묘로 발길이 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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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항에 변화를 주었다. 플라스틱 수초 장식물을 들어내고 진짜 수초를 넣은 것이다. 인공 수초를 빼는 과정에서 플래티의 새끼들이 많이 보인다. 플래티를 키우면서 번식하는 걸 보지 못했는데 이번에 처음 본다.

오늘은 물갈이를 보다 더 편하게 하기 위해 사이펀과 연결한 여과 장치를 만들었다. 좀더 효율적이고 편리한 환수를 할 수 있을 듯하다.

가만히 어항 속 세계를 본다. 인공수초와 달리 진짜 수초들은 어항 속에서 광합성을 한다. 이산화탄소를 흡수하고 산소를 내는 활동을 말한다. 그래서 수초가 들어간 다음부터 조명은 매우 중요하다. 중학교 상식이지만 식물은 밝을 때만 광합성을 한다. 빛이 부족하면 광합성이 이루어지지 않아 어항 속 수질이 악화되는 데다가 수초들도 죽는다.

얼마전 사무실에도 식물을 들여놓았는데 어항까지 초록이들이 자란다. 마음에 봄바람이 부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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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동료들과 점심을 먹는데, 주말 농장 이야기가 나온다. 나 포함해 넷 중 둘은 작년까지 주말 농장을 다녔고, 다른 한 명도 예전에 주말 농장을 한 경험이 있다. 그러니 셋은 농사꾼인셈. 감자, 고구마, 대파, 쪽파, 무, 배추, 오이 등등 각자가 쏟아내는 농사꾼 경험이 점심식탁에 푸짐하게 차려진다. 어떤 작물은 언제 심어야 하며, 어떤 건 약도 뿌려야 할만큼 병충해에 취약해 키우기 고약하다는 말도 한다. 

순댓국에 밥 말아 먹으면서도 농사 이야기가 쏙쏙 들어와 흥미롭다. 기껏해야 사무실에 식물 몇개 들여 놓고 쳐다보는 재미로 살고 있는데, 누구는 주말마다 먼길을 마다하지 않고 달려가 다채롭게 농작물을 키우고 있었다니 같이 식사하는 동료들이 다르게 보인다. 내 사무실에는 오래전부터 키우던 페페가 하나 있다. 어쩌다보니 다 죽었는데, 한가닥 살려서 물꽂이로 키우는데, 거기서 다시 새싹도 나오고 있어 감회가 새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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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아리병 속에서는 새싹이 돋아나고 있었다. 파란컵 잔에서도 뿌리가 내리고 무언가 꿈틀거리고 있다.

 

회사 생활의 단조로움을 피하기 위해 애완식물로 페페만 기르고 있었지만 봄의 기운을 보다 더 가깝게 느끼고자 피토니아와 테이블야자를 들여 놓았다. 전문 농사꾼들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얘네들을 잘 키울 수 있을지 걱정이다. 내가 먼저 회사를 그만둘지, 얘네들이 먼저 사망할지 ㅎㅎ 어찌됐든 끈질기게 삶을 이어가는 모든 것들에게 건투를 빌어 보는 봄이다. 

 

피토니아(화이트 애나)
테이블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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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겨울부터 시작된 파반느와의 만남이 얼마전 막을 내렸다. 그동안 나는 박민규의 원작 소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를 천천히 읽었고, 중간쯤 읽고 있을 때 KBS 라디오 극장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를 출퇴근 시간에 틈나는대로 듣기 시작했다. 책은 시처럼 읽다가 쉬다가 다시 읽었고, 라디오는 귓속으로 들어오는 성우들의 맑은 목소리와 대사의 생동감으로 느꼈다. 그리고 얼마전 넷플릭스로 <파반느>가 개봉했다. 책을 다 읽고, 라디오 극장도 끝난 후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시청한 <파반느>는 그럭저럭 괜찮았지만 책이 주었던 상상력과 라디오 극장이 더한 생명력이 영화에서는 충분히 살려주지 못한 아쉬움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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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놈팽이였어. 어머니가 피땀 흘려 밖에서 벌어오면 그 돈으로 자기를 치장하고 영화판을 기웃거리며 자신의 출세길만 생각했던 거지. 그렇게 아버지는 어머니와 나를 버리고 돈 많은 여자와 결혼했어. 애시당초 그 남자는 어머니를 사랑하지 않았던 거야. 동정도 아니었고 호의도 아니었으며 연민도 없었지. 그저 빌붙어 피를 빨아먹은 거머리였어. 그 남자가 떠나고 난 뒤에도 엄마는 한참동안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어. '나'의 이 유년의 기억들은 사랑에 대해 회의하고 그 감정을 하찮게 여기게 만들었어. 아버지는 '나'의 상처이자 나를 단련한 용광로였고, 내가 살아가는 힘이었지. 얼굴값? 꼴값... 

그러던 어느날 '그녀'가 나타났다. 모두에게 놀림받고 터부시되며 다가서는 안될 존재로, 버림받은 개처럼 지하주차장 한켠에 내버려진 여자. 그저 못생겼다는 이유로 누구도 가까이 하지 않고 심지어 놀잇감으로 전락해 잔뜩 찌그러져 있는 사람. 그에게 '나'는 눈길이 갔어. 아버지에게 버려진 어머니 때문일까? 아마도 시작은 그럴 거야.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그저 그의 겉모습만 보고 그 가치를 폄훼하는 현상, 이 잔인한 자본주의의 총화 백화점에서는 세 걸음마다 한 번씩 볼 수 있을만큼 자주 마주치는 현상 아니던가? 

그래서 그녀에게 눈길이 간 거다. 그리고 말했다. "우리 친구할래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 하지만 쟤는 진심(眞心)이야.

 

그렇게 요한 형과 '나'와 '그녀'는 켄터키치킨 집에서 맞은편 bear 가게의 간판을 보며 'hope'를 들이마시고 많은 이야기를 하며 살았지. 그렇게 우리는 사랑했어. 3개의 창(연민, 호의, 동정)을 말하며 걱정스럽게 나를 보던 요한 형의 우려와는 다르게 '나'는 '그녀'를 '사랑'으로 마주했으니까. 그녀와 내가 헤어진다는 건 마치 "손끝 발끝의 모세혈관에까지 뿌리를 내건 나무 하나를, 통째로 흔들어 뽑아 버렸다"는 것과 같다고 말했어.

그러다가 '나'는 지하주차장 일을 그만두고 대학에 진학했어. 소설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에서였지. 대학이라는 곳은 또 얼마나 낭만적인가? 그렇게 켄터키치킨과 멀어지고 hope 대신 학교 앞 hof 집을 다녔고, bear 대신 beer를 마시기 시작했지.

그런데 어느날 요한 형이 손목을 그었어. 정신병동에 갇힌 요한 형을 만났지만 그저 멍한 눈으로 한곳만 보고 있는 형을 만났지. 그렇게 수다스럽던 형은 왜 스스로를 가두고 입을 닫아버렸을까? 그리고 그녀와의 연락도 끊겼어. 그녀는 나에게 장문의 편지를 남기고 백화점을 그만두었지. 잘생긴 '나'와 못생긴 '그녀'는 서로를 사랑하지만 사회가 만들어 놓은 편견과 차별의 벽을 넘지 못한 거야. 나를 사랑하니까, 떠난다는 그녀의 글을 보면서 아무말을 할 수가 없었어. 

하지만 세상은 여전히 차갑고, 당신의 곁에 서 있는 나의 모습이 당신을 힘들게 할까 봐 두렵습니다. 나는 이제 나를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외모가 아닌 오직 나의 존재만으로 살 수 있는 곳으로 떠나려 합니다.(중략) 부디 나를 찾지 마세요. 당신의 기억 속에서 나는 언제나 가장 아름다운 왕녀로 남고 싶습니다. 당신이 나에게 주었던 그 따뜻한 눈빛과 시간들을 평생의 보석으로 간직하며 살겠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잊혀질 거라 생각했어. 다시 지하주차장에서 일할 때는 '희재'라는 명품샵에서 일하는 예쁜 여자애도 만났지. 그저 껍데기만 좋아했지, 알맹이는 아무것도 아니더라. 그런데 희재를 통해 '그녀'의 주소를 알게 됐어. 집앞까지 찾아갔지만 그냥 돌아섰어. 스스로 나를 떠난 사람이잖아. 이렇게 불쑥 얼굴을 내미는 건 아니잖아. 아직 '그녀'는 나를 만날 준비를 하지 않았을 거야. 조용한 '그녀'의 삶에 다시 파문을 만들 수는 없잖아. 그래서 '나'도 장문의 편지를 남겼어. 12월 25일 다시 이곳에 올테니 만나고 싶다면 나와 달라고 남겼지. 

그렇게 그녀를 만났어. 우리는 서로의 마음을 다시 확인했어. 나는 여전히 그녀를 사랑하고 그녀도 나를 사랑하고 있었지. 그렇게 우리는 다시 만나기로 했어. 하지만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나는 지독히 내리던 눈에 미끄러진 버스가 전복되면서 큰 사고를 당해. 


여기서부터는 결론이 두 개야.

하나는 그 사고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나는 그야말로 또 다시 기적적인 재활에 성공하고 그 이야기를 글로 담아 크게 성공하는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지. 하지만 그녀와 만난 이후 갑자기 연락을 끊은 나로 인해 그녀는 이미 한국에 남아 있지 않고 머나먼 독일에서 삶을 살고 있었지. 어렵게 알아낸 연락처를 들고 독일까지 찾아가 그녀를 만나고 다시 사랑을 하게 돼. 아름다운 이야기지. 

그런데 다른 하나는 달라. '나'는 그 버스 전복 사고로 세상을 떠나. 그리고 요한 형이 '나'와 '그녀'의 이야기를 소설로 써서 세상에 내놓지. 요한 형은 '그녀'와 결혼했어. 요한 형도 그녀의 외모가 아닌 내면의 아름다움을 보았던 거겠지. 그렇게 '나'의 젊은 날 세상의 편견과 싸우며 순수한 사랑을 보여 주었던 '나'와 '그녀'의 이야기가 세상에 나오게 되지. 


스무살. 어색하고 부끄러운 나이.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패기와 자신감도 충만하지만 그 이면에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부끄러움', '눈치'가 커가는 시기이기도 하다. 작가는 '못생김'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왜곡된 시선을 '그녀'가 닥치는 여러 현실과 '그녀'가 남긴 말과 행동과 글로 가감없이 드러냈다. 그녀와의 로맨스는 그래서 평범하지 않다. 그래서 소설은 거친 투쟁의 서사이며 날선 복수의 담론이다. 결국 이 싸움은 처절하고 슬프고 비참한 비극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 모리스 라벨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는 이 소설의 전체의 정서를 지배한다. 상상력을 부르짖는 요한은 그래서 모순적이다. 못생김을 못생김으로만 받아들이지 말고 상상력을 키우라고 하지만, 사실 사랑은 상대를 상상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실체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이라는 점을 '나'는 강변했다. 

'죽은 왕녀'는 그래서 못생김을 이유로 지워져 버린 것들에 대한 진혼곡이다. 온갖 전설과 동화, 만화 속에서 많은 왕자와 용사들이 왕녀를 구하기 위해 용의 동굴로 돌진한다. 그런 왕녀는 반드시 아름다워야 하고 구하고 지킬 가치가 있어야 한다. 시각적 자극이 남발되는 현대 사회에서는 왕녀들이 더더욱 아름다워지고 고귀해진다. 그녀는 용에 잡혀 있고나 높은 성에 붙잡혀 있을 뿐인데 말이다.

작가는 시각적 자극으로 대변되는 우리 사회의 편견을 비판하면서 음악적인 장치를 여기저기 두었다. 작품의 제목도 그러하지만 80년대 팝송과 가요들이 작품의 곳곳에서 우울하고 비이성적인 사회상을 드러내 주고 있다. 컬처 클럽(Culture Club) - <Karma Chameleon>는 신나는 비트와 리듬의 곡이지만 겉모습에만 열광하는 세상의 풍경을 보여 주는 장치이다. 

우리가 말다툼할 때 당신은 매일 거짓말을 하는군요. 그게 당신의 방식이라면 난 당신을 믿을 수 없어요. 내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나요? 아니면 내가 듣고 싶은 말만 하는 건가요? 당신은 감정을 숨기려 하지만, 당신의 눈동자엔 두려움이 가득해요.
-컬처 클럽(Culture Club) - <Karma Chameleon> 중에서

눈에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 외모 보다는 내면, 시각보다는 청각이 소설 전반을 지배하는 사상과 철학이다. 외모에 대한 시대의 폭력적 시선을 거두고 내면의 심장 소리를 듣는 음악처럼 느린 왈츠곡에서 빠른 비트의 팝송까지 글자라는 매체에만 얽매이지 않고 독자들에게 청각적 즐거움까지 누릴 수 있는 장치들을 만들었다. 소설을 읽다 보면 해당 음악이 나오는 장면에서는 굳이 읽는 것을 중단하고 등장인물들과 함께 그 음악을 듣다보면 이들과 함께 공간을 점유하고 있다는 상상을 하게 된다. 

또 작가는 행을 엉뚱한 곳에서 잘라 먹는다. 이 독특한 문단 배치는 처음에는 무척이나 어색하다. 왜 여기서 끊었는지를 생각하게 하고, 천천히 그 잘린 부분을 다시 읽게 한다. 즉 작가의 의도적인 이끌림에 독자가 빨려 들어가게 한다. 

 

이 독특한 줄바꿈, 그로 인한 여백은 독자들이 소설을 읽는 흐름을 끊어 버리는 단점도 있지만 중간 중간 중요한 지점에서 한번쯤 쉬어 가면서 여백에 담은 작가의 의도를 생각하게 한다. 책을 읽는 속도는 느려지지만 종종 시를 읽는다는 착각이 들게 만든다. 문장을 끝맺지 않고 다음 줄로 넘기거나 단 하나의 문장만 독립적으로 남겨 놓는 방식은 한 박자 쉬어 가게 만든다. 섬세한 인물의 심리 묘사나 중요한 사건의 전개에서 독자에게 보다 깊은 몰입을 준다. 쭉쭉 읽어가던 흐름이 발목이 걸린 것처럼 주춤하게 되고 작가의 의도에 끌려가는 기분도 들지만 소설을 다 읽고 나서 느끼지만 좋았다. 만일 내용이 80년대의 감성과 낭만, 연애를 다룬 소설이 아니라면 엄두를 내기 어려운 시도임에는 분명하다. 그런데 이 작품은 보기 좋게 성공했다. 때로는 시처럼 때로는 소설처럼 시대와 사랑을 느꼈다. 마음의 박자로 글자 바깥의 여백으로 이야기를 만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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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딸과 함께 영화 <반지의 제왕-왕의 귀환>을 보았다. 아주 오래전 비디오를 빌려다가 집에서 봤었는데 최근 OTT를 통해  <반지의 제왕 1,2>편을 보게 되면서 다시 한 번 톨킨이 구축한 세계관에 압도되는 경험을 했다.  

다시 영화관에 재개봉한 <반지의 제왕>은, 지축을 흔드는 듯한 말발굽 소리가 선명한 돌비 시스템으로 전해지고 절대반지를 없애기 위한 프로도와 샘의 고통스럽고 힘겨운 여정이 바로 눈앞에 펼쳐진다. 

딸 덕분에 20년전 영화를 다시 보니 감회가 새롭다. 허나 영화가 시작하기 전부터 나를 설레게 한 것은 따로 있다. 바로 새로 개봉되는 영화를 광고하는데 <폭풍의 언덕>이 영화로 나왔나 보다. 

"린턴을 사랑하는 내 마음은 무성한 숲의 나뭇잎 같은 거야. 겨울이 오고 시간이 지나면 변할 거라는 거 잘 알아. 하지만 히스클리프를 향한 내 사랑은 그 숲 아래의 영원히 변하지 않는 바위와 같아. 눈에 띄는 즐거움을 주는 건 아니지만 꼭 거기 있어야 하는 존재. 넬리, 내가 곧 히스클리프야!"

지독한 집착적 사랑의 히스클리프와 자유로운 영혼 캐서린의 광기어린 사랑. 책 전반에 짙게 깔린 분위기, 음침하고 어둡고 쓸쓸하기까지했던 느낌이 가셔지지 않는다. 오랜만에 책을 다시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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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한 편의점 (벚꽃 에디션) - 8점
김호연 지음/나무옆의자
 
 

편의점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구심력과 원심력
"불편한 편의점"은 이문구의 "관촌수필"처럼 하나의 장소에서 여러 군상들이 어우러지는 모습을 그려낸 연작 소설이다. 24시간 돌아가는 편의점에서 만들어지는 이야기는 마치 원운동하는 물체에 작용하는 구심력처럼 우리의 마음을 끌어들인다. 이런 강한 구심력이 있기에 물체는 원심력을 발휘해 힘차게 원운동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야기의 중심을 잡아주는 구심력은 바로 인간에 대한 관심, 그로부터 시작되는 구원에 대한 믿음이다. 이 중심에는 '독고'와 '사장 할머니 염영숙'가 있다. 반면 이야기를 재미있고 풍부하게 하는 힘이 원심력이다. 원심력을 받는 이야기의 인물로는 20대 여성이며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며 편의점 알바를 하는 '시현',  50대 여성으로 생계를 위해 편의점 알바를 하는 '오선숙', 배우로 활동하다가 극작가로 변신한 '정인경', 의료기기 영업사원으로 일하는 40대 중년의 사내 '경만', 경찰로 재직하다가 불명예 퇴직하고 사설 흥신소에서 일하는 60대 '곽 씨'가 있다. 편의점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 군상들의 이야기가 바로 이야기를 재미있게 돌리는 원심력이 된다. 사장 할머니(염영숙)로부터 시작된 인간을 향한 관심과 구원에 대한 믿음, 그리고 용서로 이어지는 경애의 마음이 '독고'라는 정체 불명의 노숙자로 전달되고 이것이 크게 확산하면서 이야기의 꽃을 피워 냈다. 

현대 사회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공기처럼 숨쉬며 접하는 공간 '편의점'이라는 공간에서 만나는 알바들이 있고, 편의점을 찾는 동네 할머니와 꼬맹이부터 술취한 사람들과 진상들 이야기는 양념처럼 이야기의 재미를 더한다. 거기에 흔하게 볼 수 있는 알바라고 불리는 직원들의 모습도 어느 편의점에서나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그네들의 문제 있는 사연들이 '독고'라는 노숙자를 만나면서 삶의 변곡점을 지나고 좀더 희망을 가져 보는 변화를 겪는 모습은 이 책을 읽을 때 독자가 품게 되는 감동 중 하나이다. 

이야기는 연작 소설처럼 각각의 이야기들이 있고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인물 '독고'의 이야기가 씨줄과 날줄로 엮여 잇다. '독고'와 '편의점 사장 할머니'가 잃어버린 지갑을 연으로 이어지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를 시작으로 편의점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그곳을 드나드는 사람들, 할머니의 가족과 거기서 다시 연결된 곽 씨까지 이야기는 줄줄이 엮여 이어진다. 

불편하지만 괜찮아
여러 이야기 중 책 제목과 동일한 소제목의 '불편한 편의점' 이야기는 좀 불편했다. 대학로 배우였다가 대본 작가로 활동하지만 신춘문예 말고는 자기 작품을 연극 무대에 올려본 적이 없는 작가의 이야기. '독고'라는 인물과 편의점을 글로 써낸다는 설정으로 이 책의 작가가 불쑥 등장하는 느낌이다. 이 소설 전반적으로 다양한 군상들이 편의점에서 어우러지고 있는데, 그 대부분은 보편화된 대중의 모습을 잘 드러내고 있지만 이 부분에서만 등장하는 작가의 모습은 그다지 일반적인 모습이라고 보기 어렵다. 아마도 작가가 자신이 받은 사회의 도움에 은혜를 갚는다는 느낌으로 끼워 넣은 건 아닐까 생각되는 여러 부분이 있지만 전체 이야기 중에 가장 이질적인 느낌이 드는 부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전반적으로 따뜻하다. 보편화된 장소라는 편의점, 내 이웃 혹은 독자 자신을 닮은 인물들이 하나같이 상처받고 아파하면서 편의점을 찾고, 여기서 다시 희망을 갖고 살아간다는 이야기는 도시 동화의 틀을 잘 갖추고 있다. 사람에 지치고 용서와 구원의 길을 잃은 이들에게 잠시 삶의 고단함을 잊고 나침반을 다시 보게 하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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