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유시민 작가의 인터뷰(2026.9.22.) 내용에 대해 구글 제미나이에게 요약하라고 한 뒤 이에 대한 비판의견을 정리해 달라고 요청했다. 아래와 같이 정리된 내용이 나왔는데, 너무나 잘 요약되어 있어 세상 흐름을 따라가는 데 도움이 된다.
유시민 작가의 비판점도 이에 대한 반대 비판도 나에겐 모두 흥미롭다.
유시민 작가의 인터뷰 내용 요약
이에 대한 비판 의견
검찰개혁 관련 발언 비판 ("왕이 아니곤 할 수 없는 말") ● 이재명 대통령이 검찰개혁 추진에 대해 "국회에 권한을 줬으니 책임도 질 것"이라는 취지로 발언한 점을 언급하며, "입법권은 대통령 본인의 것이 아닌데 권한을 준다는 표현은 충격적이며 왕이 아니곤 할 수 없는 발언"이라고 지적했습니다. ● 정부가 법무부 내 수사·기소 담당을 나누는 수준을 개혁의 최대치로 언급한 것에 대해, "검찰개혁을 주장해 온 이들 중 누구도 이를 개혁이라 부른 적이 없다"며 기존 입장과의 괴리를 문제 삼았습니다.
"대통령의 수사·기소 분리 의지와 제도 안착 현실을 무시한 단선적 비판" ● 반론 내용:이재명 대통령이 언급한 '수사·기소 분리' 및 법무부 내 역할 개편 등은 실무적·입법적 안정성을 고려한 현실적인 개혁안이라는 입장입니다. ●비판 요지: 검찰의 권한을 완전 해체 수준으로 가자는 요구는 입법 과정이나 법 집행 현장에서 극심한 혼란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국정 책임자인 대통령으로서 제도의 실행 가능성과 부작용을 줄이기 위해 단계적 수용안을 제시한 것인데, 이를 단순 '공약 후퇴'나 '국민을 속인 것'으로 규정한 것은 사정을 지나치게 단선적으로 바라본 비판이라는 지적입니다.
"정치적 어법에 대한 과도한 문맥 왜곡 및 '왕이 아니다' 비판의 부적절성" ● 반론 내용:대통령이 "국회에 권한을 줬다"고 표현한 맥락은 행정부 입장에서 여당 및 국회의 자율적 입법 논의 권한을 존중하고 그 결과에 책임을 위임했다는 국정 운영 원칙을 강조한 취지라는 설명입니다. ● 비판 요지: 표현의 세부 문구 하나만을 문제 삼아 "왕이 아니고는 할 수 없는 말"이라며 오만함으로 규정한 것은 대통령의 발언 맥락을 지나치게 왜곡하고 자극적 프레임을 씌운 비판이라는 반론이 제기됩니다.
국정 운영 및 지지율 하락 진단 ● 대통령 지지율 하락의 원인으로 정책적 실패와 더불어 검찰개혁 공약에 대해 "국민을 속인 꼴이 되었다"는 점을 들었습니다. ● 열렬히 지지했던 이들조차 현재는 등을 돌리고 있는 상황임을 지적하며, 단순한 '단합'을 호소하는 말로는 수습할 수 있는 국면을 이미 지났다고 분석했습니다.
"여권 내 자중지란을 유발하고 개혁 동력을 떨어뜨리는 쓴소리" ● 반론 내용:정부가 국정 과제를 완수하고 지지율을 회복하려면 당정 간의 단합과 국정 동력 확보가 최우선 과제라는 시각입니다. ●비판 요지: 범여권의 영향력 있는 인사가 외부 방송에서 정부와 대통령을 향해 '지방선거 전 지지자들의 이탈', '용역 비평' 등의 강도 높은 표현을 쓰며 공개 비난하는 것은 여권 내부 갈등만 유발할 뿐 개혁 동력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비판입니다.
여권 친명계 평론가들에 대한 비판 ("용역 비평") ● 여권 성향 일부 정치평론가들이 인사권자의 눈치를 보며 맹목적인 옹호에만 치중하고 있다고 꼬집었습니다. ● 이러한 소신 없는 비평 형태가 오히려 대통령의 국정 기반과 지지층을 무너뜨리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덧붙였습니다.
이틀간 비가 왔다. 안양천에서 올라오는 시쿰한 냄새는 옛날 어떤 생물체도 살 수 없었던 그 시절의 안양천 냄새를 떠올리게 한다. 하수구가 일제히 개방됐는지 냄새가 좀 역겹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척교와 광명교 사이의 축구장에서는 여성 축구단의 경기와 연습이 한참이다. 매번 9시~10시 사이에 이 구간을 뛰는데 그때마다 여성들의 경기 모습이나 훈련 모습을 본다.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인조잔디 위를 내달리며 공을 시원하게 발로 내지르는 호쾌함은 피구나 발야구와는 차원이 다를 것이다. 여전히 여자 고등학교에서 축구는 그다지 선호되지 않는 운동임에도 성인이 된 여자들은 이 한밤에 신나게 공을 차며 소리를 지르고 내달리고 있다.
체육교육은 '아는 것'과 '하는 것' 사이에서 항상 헤매고 있다. 교과서는 '아는 것'을 이야기하지만 체육의 성격은 '하는 것'과 닿아 있다. 나의 고교 시절에는 체육 교과도 필기 시험을 보았지만 지금은 수행평가만으로 평가를 진행하고 있다. '아는 것'보다는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정책으로 실행하기 시작한 것도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하지만 세상의 진리는 똑같다. '하는 것'이 없는 '아는 것'은 제대로 '아는 것'이 아니다.
'뛰면 건강해진다', '건강을 위해 뛰어야 한다'라는 것은 알지만 실제로 실행하는 것은 어렵다. 그만큼 '아는 것'보다 '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다. 백마디 말이 소용없다. 당장 신발 신고 문을 열고 나가서 하자.
내 젊은 시절 SF는 은하계를 누비는 은하철도 999나 인간과 구별되지 않는 로봇이 지구를 지배하는 터미네이터 또는 생명과학을 이용해 인간과 너무나도 흡사한 괴물을 만들어 내는 미친 과학자 이야기인 프랑켄슈타인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런 이야기에서 던지는 '무엇이 인간적인가'라는 질문은 철학적 생각거리를 던져 이야기를 살리는 주요 레시피 중 하나인 셈이다. 아시모프(로봇 3원칙, <I, Robot>)나 클라크("충분히 발달한 과학 기술은 마법과 구분할 수 없다")의 시대엔 과학이 알 수 없는 미래와 인간관을 받치는 '배경'이었다면, 앤디 위어의 소설 <프로젝트 헤일메리>는 현대 SF의 결이 너무나도 다름을 보여 준다. 번뜩이는 가설과 치밀한 검증의 과정이 스펙터클 하게 펼쳐지는 과학은 액션 스릴러를 넘어서는 재미다. 과학, 너 이렇게 섹시해? 과학자가 이렇게 멋져도 되는 거야?
낭만의 시대에서 '공학'의 시대로
과거의 SF가 “우주는 경이로운 미지의 영역이다”, “인간성 상실의 미래는 암울하다 ”라며 독자를 미지의 세계로 유영하게 만들었다면, 최근의 SF는 “그래서 11광년 떨어진 별까지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라고 묻는다. <프로젝트 헤일메리>의 주인공 그레이스에게 낭만 따윈 없다.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자마자 자신의 이름도 기억나지 않으면서 내가 타고 있는 우주선이 어디에 있는지, 중력이 얼마인지부터 확인한다. 과거의 SF 주인공이 우주선 창밖을 보며 사색에 잠기고 인간성에 대해 회의할 때, 현대의 주인공은 우주선 벽에 보드 마커펜으로 미적분 방정식을 갈겨쓰며 생존 방법을 찾는다. '우주 미아'라는 설정은 같지만, 대처하는 방식이 '철학'에서 '공학'으로 진화한 것이다. 계속해서 닥쳐오는 위기 때마다 과학적 가설과 이를 증명하는 방법을 통해 해법을 마련한다.
"내가 누구지?"… 기억상실과 과학적 퍼즐 맞추기
소설의 도입부, 주인공 그레이스는 혼수상태에서 깨어난다. 주위엔 알 수 없는 시체만 있고, 몸은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데다 발음까지 이상하다.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난다. 보통의 드라마라면 여기서 뜬금없는 가족애를 떠올리며 울겠지만, 우리의 주인공은 다르다. 그는 본능적으로 주변 기기들을 뜯어보고,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고, 우주선에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중력 가속도를 측정하기 시작한다. 이 과정을 보며 ‘와, 나라면 일단 울면서 문부터 두드렸을 텐데, 이 사람은 물리 법칙부터 확인하네?’라고 했을 것이다. 자신의 기억을 되찾아가는 과정이 마치 최고 난도의 고급 방탈출 게임을 지켜보는 듯한 쾌감을 준다. 아니, 우주 한복판에서 방탈출 게임? 나가면 어디?
과학은 '장식'이 아니라 '서사' 그 자체
과거 SF가 과학을 다룰 때, 독자들은 작가가 정해준 과학적 사실을 그냥 받아들이거나 상상의 나래 한껏 펼치기 위한 도구였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독자들도 인터넷으로 최신 물리 가설을 꿰고 있다. SF를 좀 안다는 독자들에게 양자역학과 상대성 이론은 이제 이해하기 어려운 난제가 아니다. 그래서 작가들은 더 이상 대충 얼버무릴 수 없다.
<프로젝트 헤일메리>에서 태양을 먹어 치우는 '아스트로파지'를 다루는 방식은 압권이다. 이 물질은 단순히 신비한 아이템이 아니라, 열역학적 법칙 안에서 굴러가는 하나의 '실체'로 존재한다. 물론 작가가 상상해 낸 크리쳐이지만 그 생명체에 대해 알아가는 과정의 디테일함은 치밀하다. 과학적 디테일이 서사의 엔진이 되어, 독자가 그 계산 과정을 따라가며 주인공과 함께 땀을 쥐게 만드는 것. 이것이 현대 SF가 과거와 차별화되는 가장 큰 포인트이다. 태양을 삼키는 미생물이라니, 이런 상상력은 도대체 어디서 나타나는 것인지...
"이봐, 돌덩이 친구?"… 소통도 데이터로!
외계인 '로키'와의 조우 장면은 과거 SF와 가장 극명하게 갈리는 지점입니다. 옛날 SF 영화였다면 외계인과 만나는 순간 텔레파시나 우연한 언어 습득으로 대화가 시작됐다. 심지어 외계인이 친절하게 영어를 한다. “Hi, everyone. Nice meet you.” 우리는 외계인과 대화하기 위해 그토록 영어 공부를 열심히 했었나?
하지만 이 소설은 다르다. 발성법도 다르고 살아온 환경도 천지차이에다가 시각이 거의 없는 스톤, 청각이 미개한 인간이 서로 소통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하지만 두 지성체는 수학과 물리 상수를 주고받으며 '데이터의 교환'을 통해 신뢰를 쌓는다. 수학과 물리는 별과 별을 이어주는 최초의 소통 도구가 되는 셈이다. 진리 앞에, 과학이 얼마나 정교한 소통의 도구인지 깨닫게 된다. 이건 마치 우주적 규모의 '고품격 펜팔'이라 할 수 있겠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처럼 소설 <프로젝트 헤일메리>는 과학적 디테일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과거의 SF가 우리에게 '상상력의 확장'을 선물했다면, 현대의 SF는 '과학적 탐구의 희열'을 선사한다. 영화를 보고자 하는 분이 있다면 단언컨대 먼저 소설을 보기를 추천한다. 영화는 영상미를 살리기 위해 소설이 주는 진짜 재미를 많이 생략하고 외계인 로키와 지구인 그레이스의 우정이 중심축이 되어 아쉬운 점이 많다. 그러니 꼭 영화보다 소설을 먼저 보기를 바란다.
백전노장 드라이버 써니 헤이스로 분한 브래드 피트는 수트만 입어도 서킷을 런웨이로 만들어 버릴 정도로 멋진 사내다. 좋은 대우를 버리고 다 망해가는 팀으로 걸어오는 그의 모습은 자고로 멋이란 옷이나 외모가 아니라 자세와 태도에 있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한다.
F1이라는 경기는 또 어떤가? 시속 300km 이상의 속도로 질주하며 중력가속도를 온몸으로 버텨야 하는 극한의 스포츠이다. 젊은 루키 조슈아가 써니를 보며 속으로 ‘우리 형님 서킷 위에서 뒷목 잡으시는 거 아닌가?’ 걱정했을 거라는 데 내 돈 500원과 SK하이닉스 주식을 걸겠다. 다행히 피트 형님의 에이징 커브는 서킷의 급커브보다 훨씬 부드럽더라. 물론 그 잘난 얼굴이 중력가속도에 일그러지는 모습을 헬멧으로 감춘 건 영화상 설정일 뿐 배우 보호 차원의 설정은 아니었겠지.
뜨거운 엔진음과 심장을 타격하는 속도감, 영화 <F1 더 무비>는 단지 트랙 위를 달리는 머신의 외형만을 보여 주는 작품이 아니다. <탑건: 매버릭>의 조셉 코신스키 감독과 브래드 피트가 만난 이 영화는, 잘 만들어진 스포츠 영화가 어떻게 관객의 심박수를 통제하고 감동을 이끌어내는지 그 정석을 보여 주었다.
여기서는 <F1 더 무비>에 나타나는 스포츠 영화의 고전적인 문법을 짚어보겠다. 이를 통해 이 영화가 가진 독특한 매력과 마지막에 던지는 통렬한 한방에 관해 이야기해 보려 한다.
슈퍼 루키와 늙은 노장의 만남
1990년대 끔찍한 사고 이후 서킷을 떠났던 써니 헤이스(브래드 피트). 그가 지역의 그저그런 레이싱 대회를 다니다가 F1 그랑프리 대회에 출전하며 다시 머신(F1에 출전하는 차량을 부르는 말)의 운전대를 잡는 순간은 전형적이지만 가장 가슴 뛰는 오프닝이자 갈등의 전조가 된다. 팀의 신예 조슈아 피어스(댐슨 이드리스)는 오만하고 개인주의적인 성향이며 SNS와 미디어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에 더 신경 쓰는 한편 좀 더 나은 조건의 다른 팀으로 이적할 기회를 엿보고 있다. 써니와 조슈아가 피트인(Pit In) 공간과 트랙 위에서 거칠게 부딪히는 초반부의 장면에는 이런 배경이 숨어 있어 극적 긴장감을 팽팽하게 당긴다.
영화는 레이싱이 결코 드라이버 혼자만의 독주가 아님을 끊임없이 보여 준다. 우리가 미디어를 통해 보는 F1이라는 스포츠는 드라이버들이 이상한 차를 타고 누가 더 빠른가를 겨루는 모습으로만 비추어지지만, 사실 F1 레이싱은 0.001초를 다투는 극한의 세계이며, 여기에는 철저한 리더십과 팀워크가 요구된다.
후반부 경기가 재개되는 순간, 써니 헤이스는 팀 루키 조슈아를 우승시키기 위해 온몸을 던져 자신을 희생하며 나선다. 마지막 레이싱에서 다른 머신들과 치열하게 접전을 버리며 질주하는 장면을 보고 있으면, 관객도 서킷에서 회전 중력을 이겨내려는 드라이버처럼 온몸이 경직되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우승 기회를 내려놓고 팀의 승리와 루키 조슈아의 질주를 위해 뒤따라오는 경쟁 머신들을 막아서는 써니 헤이스의 모습은 팀의 승리를 위해 희생하는 스포츠 선수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 준다. 또, 팀을 이끄는 진정한 리더십은 바로 자신을 제일 먼저 희생할 수 있는 숭고한 정신에서 나온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 장면이다. 단순히 속도 경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치밀한 전략과 퍼포먼스로 상대를 압도하고 팀을 하나로 뭉치게 할 수 있는 노장의 열정이 우리의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것이다. 나이든 레이서의 플랜C가 경기를 압도하는 모습을 보라!
F1이 가진 독특한 특성의 시각화
시속 300km가 넘는 속도로 질주하는 머신들이 경쟁하는 장면을 보면 내 심장도 같이 심박수 150까지 치솟는 느낌을 받는다. 달리는 머신에서 티타늄 스파크 불빛이 번쩍이는 것을 보면 군대에서 기관총을 쏠 때 날아가는 발광탄을 봤을 때처럼 심장이 두근더린다. 문득 영화를 보다가 ‘저 속도면 귀성길 전라남도 구례까지 300km도 한 시간이면 가겠구나’ 싶다가도, F1 머신은 과속 방지턱 하나 넘는 순간 차체가 박살 난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귀성길에는 그냥 내 차 K3로 마음에 드는 휴게소마다 피트인 하면서 쉬엄쉬엄 가는 걸로...
F1 머신은 오직 달리기 위해 존재하는 차량이다. 이를 위해 문도 없고 헤드라이트도 없다. 오직 서킷에서만 달릴 수 있는 차량이지만 온갖 과학적 장치와 센서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다. 시즌 중에도 끊임없이 차량을 점검하고 업데이트하며 더 빠른 차를 만들기 위해 경쟁한다. 여기에는 첨단 공기역학과 물리학, 재료공학이 총동원되기 마련이다. 헤시스 팀의 총괄 기술자 케이트도 전직은 나사의 우주항공 기술 연구원이었다. 이처럼 머신은 지상 탈것의 첨단과학기술의 총아로, 사람들은 머신을 지상 위의 전투기라고도 부른다.
이 영화의 큰 장점 중 하나는 일반 대중에게는 다소 낯설 수 있는 F1의 메커니즘을 영리하게 극에 녹여냈다는 점이다. 단순한 속도 경쟁이 아니라, 타이어의 마모 상태, 다운포스(차체를 아래로 누르는 공기역학적 힘)를 위한 엔지니어들의 치열한 기술 개발, 그리고 피트 스톱(Pit Stop)에서 몇 초 만에 타이어를 교체하는 크루들의 일사불란함 등이 화면에 등장한다. 써니 헤이스가 팀 머신의 한계를 진단하고 공기역학적 업그레이드를 제안하는 장면은 이 스포츠가 '인간과 기술의 가장 완벽한 결합체'라는 특성을 잘 보여 주는 대목이다.
가장 자본주의적인 스포츠 F1에 통쾌한 한 방
영화의 클라이맥스는 단순히 경기에서 승리했다는 쾌감에 머무르지 않는다. 이 영화가 진짜 위대해지는 지점은 바로 '상업주의에 오염된 대회에 필요한 스포츠 정신의 회복'에 있다. 시즌 중반 내내 투자자들과 거대 자본은 팀의 가치와 존폐를 오직 '수익성'과 '마케팅 효과'로만 저울질한다. 스폰서와 돈의 논리에 휘둘리며 팀이 공중분해 될 위기에 처했을 때, 써니 헤이스는 신체적 부상과 법적 위험을 모두 자신이 짊어지겠다는 각서를 쓰고 마지막 트랙으로 향한다. 돈으로 모든 가치를 재단하려는 거대 자본의 얄팍한 속성을 비웃듯, 엔진의 굉음과 함께 체커 플래그(경기가 끝났음을 알리는, 검은색과 흰색의 체크무늬 깃발)를 향해 질주하는 머신들의 모습은 그 자체로 통렬한 카타르시스를 준다.
"당신들이 계산기를 두드릴 때, 우리는 목숨을 걸고 달린다."
영화의 결말은 자본주의적 시스템이 아무리 스포츠를 상업적으로 이용하려 해도, 승리를 향한 드라이버들의 순수한 열정과 희생, 그리고 스포츠 본연의 각본 없는 드라마는 결코 돈으로 살 수 없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던진다.
써니 헤이스는 가장 영광어린 순간에 모든 걸 던져버리고 無로 돌아간... 아니 자신의 미니버스를 타고 떠난다. 까짓거 나도 세상에 무시당할 것 없이 장대한 질주 본능을 품에 안고 거침없이 떠나고 싶지만, 소시민의 삶은 여전히 개미털이에 당하는 주식시장처럼 통장 잔고에 가슴 아파하거나 포머라는 말에 상처받고 전설의 복서 조지 포머에게 한 대라도 맞으면 정신 차릴 것 같다는 헛소리를 하고 있는 게 일상이다.
<F1 더 무비>는 거친 엔진 소리 뒤에 인간의 뜨거운 심장 소리를 숨겨둔 작품이다. 스포츠 영화의 완벽한 문법 속에서 피어난 베테랑의 리더십, 그리고 상업주의를 맹렬하게 받아치는 마지막 한 방까지. 영화가 끝나는 순간까지도 가슴속에 진한 배기음이 남는 듯한 정말 잘 만든 영화이다.
아이의 중간고사 기간. 아이는 혼자 집에 있고 싶다고 했다. 조용히 아내와 단둘이 집을 나섰다. 쫓겨난 거 아니다. 부부 데이트의 날이다. 아무튼 그렇다. 때로는 그렇게 사는 거다. 무엇보다 아내가 좋아한다.
조계사에 들렸다. 관광객과 불자들로 북적였다. '부처님 오신 날'을 한 달여 앞두고 있다. 마당 한쪽에서는 법회 준비로 임시 의자들이 늘어서 있고, 또 다른 쪽에서는 힙한 찬불가에 맞춰 춤 공연 연습이 한창이다. 입구에 있는 북은 오가는 이들이 시시때때로 두들겨 대니 3초에 한 번씩 북소리가 울려 퍼진다. 북소리와 염불 외는 소리, 힙합 음악 소리까지 21세기 서울 한복판의 절에서 경험하는 꽤 신비하고 그로테스크한 풍경이다.
그러나 저러나 아내는 또 아이의 복을 기원하겠다고 연등을 달자고 한다. 얼마나 하겠냐 싶어 그러라고 했는데, 연등 하나가 3만원이다. 연등 접수를 받던 아주머니는 가족 모두 하라고 영업(?)하신다. 물론 복을 기원하는데 어디 한 명만 하는 건 이상하긴 하지. 늙으신 어머니, 장모님의 건강도 기원해야 하고, 아직 장가 안 간 동생에게 좋은 배우자가 생기는 것도 바라야 하고, 우리 부부의 건강, 나의 안정적인 직장 생활도 기원하고... 복을 바라는 일들은 쎄고 쎘는데 딸아이 하나의 복만 바라는 것은 어딘가 뒤통수가 가려운 일임에는 틀림없다. 허나 그 복을 기원하는 것도 다 돈이다. 그러니 오늘은 아이 건강과 성공만 빌기로 한다.
그렇게 연등이 달리는 모습도 보고, 사진도 찍고 차도 한잔 마시고 오늘의 두 번째 나들이 장소인 불교중앙박물관을 향하던 중이었다. 어, 그런데 조계사 문 바깥에서 외국 승려가 알수 없는 말로 뭐라고 하면서 웃으면서 우리 팔목에 염주를 들고 안아주고 법석을 떨며 사람 좋은 웃음을 짓는다. 예예~ 하다가 시주하라며 안내장을 보여 주었고, 어어 하다가 2만 원을 주고 돌아섰다. "응? 뭐지?" 그제야 나와 아내는 정신을 차리고 당했음을 직감했다. 역시 서울은 눈감으면 코 베어가는 곳이다. 아니 서울토박이들이 외국 승려에게 당했다. 두고두고 속이 쓰리다.
012
그래도 웃으며 불교중앙박물관을 찾았다. 오늘의 메인 이벤트. 도솔산 선운사의 삼지장보살. 1936년 선운사의 금동지장보살좌상이 도둑을 맞는다. 도둑맞은 불상은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런데 불상이 소유한 사람이 꿈을 꾼다. 불상이 꿈속에 나와 "나는 원래 전북 고창 선운사에 있었으니 속히 돌려보내 달라."라고 말하는 꿈이다. 대수롭지 않게 여긴 소장자들에게는 자꾸 이상한 일이 생긴다. 병이 생기거나 사업이 망하거나 하는데 다른 곳에 팔아넘기면 그 사람에게도 똑같은 꿈과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결국 마지막 소장자가 고창 경찰서에 자진 신고해 아무 조건 없이 불상을 넘기겠다고 밝히게 된 것.
자고로 지장보살은 지옥에 단 한 명의 중생이라도 남아 있는 한 결코 성불하지 않겠다면서 지옥을 떠돌며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자신을 헌신하신 분이다. 인간들을 구제하겠다고 지상으로 내려왔다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와 같은 분이다. 자발적인 희생, 숭고한 사랑을 상징하는 분이다. 험악한 지옥을 떠돌며 단 한명의 중생이라도 구하겠다고 떠도는 지장보살을 만들어 낸 우리의 조상들은 도대체 어떤 삶을 살았던 것일까? 삼지장보살의 모습을 보면서 가슴 한쪽이 먹먹해진다.
이와 함께 익살스러운 승려들의 조각상도 그간 불교 사찰에서 보지 못했던 모습이다. 익살스러운 동작-곰방대로 자기 코를 위로 찌그려뜨리는 모습이라든지, 곰방대로 등을 긁는 모습, 앞니가 빠진 웃음으로 다른 중을 손가락질하는 모습, 품 안에 고양이와 노는 모습 등을 보니 사람 사는 모습이 천년전이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나 싶었다. 삶의 잔잔한 기쁨과 슬픔, 해학과 풍자로 고단하고 힘든 삶을 이겨내고 수도의 길을 걷는 것. 중이나 나나 다를 바 없다. 그저 스스로 추구하는 가치와 믿음을 다시 돌아볼 뿐.
조계사 앞마당에 울려퍼지던 21세기 힙합 음악이, 500년 전 조상들이 만든 재미있는 승려 조각상과 통한다. 오래간만에 먼 조상들과 멋지게 인사한 날이다.
012
박물관을 나와 이제 경복궁을 갈 차례. 가기 전 점심을 먹어야겠다. 북촌손만둣국을 찾아들어갔다. 나는 북촌손만둣국, 아내는 북촌피냉면. 둘 다 얼큰하고 매운맛이다. 북촌손만둣국은 얼큰한 국물이 일품이다. 밥 말아 먹어도 맛있겠다 싶었지만 아내가 추가로 주문한 만두까지 먹으니 배가 불러서 밥은 못 먹겠더라. 피냉면은 알싸하다. 매우 맵다. 입이 좀 얼얼해진다.
배불리 먹었으니 걷자. 몇년만에 들린 경복궁. 역시 외국인이 절반이다. 그 절반 중 여자가 절반인데 절반 가까이가 한복을 입고 다닌다. 머리장식까지 예쁘게 하니 정말 어여쁜 외국처자들이 조선의 궁궐을 쏘다니며 사진을 찍고 다닌다. 아내와 나는 결혼 전 데이트할 때 고즈넉한 창경궁에서 비 오는 궁궐 안을 조용히 돌아다니며 소곤소곤 이야기하거나 조용히 자신의 발소리만 들으면서 걷거나 처마 밑에 앉아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을 보며 둘 다 아무 말 없이 시간을 보내기도 했었다. 그 기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우리는 시시때때로 그때의 이야기를 하곤 했고, 이번 경복궁도 그래서 오게 된 건데... 물론 15년도 훌쩍 넘기 옛이야기이고, 지금은 외국인 관광객 1천만 시대이고, 그 외국인들이 즐겨 찾는 경복궁이니 소란스럽기 그지없는 건 어느 정도 각오하고 갔더랬다.
그런데, 여기저기 이벤트로 펼쳐진 내용들을 살짝씩 구경했는데, 공연의 질이 좋지 않은 건 아니지만 궁궐 안에서 오일장 공연하듯, 마당놀이 하듯 공연하는 게 맞나 싶다. 관광객의 참여를 독려하고 끌어들이는 모습 등은 민속촌이면 족하다. 궁궐에서까지 그래야 할까? 생각해 볼 문제다.
그나마 소득이라면 최근 복원되었다는 건천궁이다. 명성황후가 일제의 자객들에게 시해된 역사적 장소이다. 다른 장소와 달리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여러 아이들이 강사 선생님과 함께 이곳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을미사변의 역사적 장소가 복원되었으니 보다 생생하게 역사적 사건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다시는 한 나라의 주권이 그렇듯 처참하고 잔인하게 밟히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어떤 나라이건 말이다. 그렇게 경복궁 구경까지 마치고 나니 아내와 나는 녹초가 된다. 경복궁을 나와 정부종합청사 옆길로 돌아서 세종문화회관을 건너 광화문 광장을 거쳐 시청 앞을 지나 버스정류장까지 한참을 걸었다. 서울시의회를 지날 즈음 성공회성당도 구경했다. 그리고 버스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내와 나는 다시 앞으로 몇 년간은 경복궁은 쳐다도 보지 않을 것 같다고 했다. 시간이 되고 여력이 되면 덕수궁이나 창경궁, 종묘로 발길이 갈 것 같다.
어항에 변화를 주었다. 플라스틱 수초 장식물을 들어내고 진짜 수초를 넣은 것이다. 인공 수초를 빼는 과정에서 플래티의 새끼들이 많이 보인다. 플래티를 키우면서 번식하는 걸 보지 못했는데 이번에 처음 본다. 오늘은 물갈이를 보다 더 편하게 하기 위해 사이펀과 연결한 여과 장치를 만들었다. 좀더 효율적이고 편리한 환수를 할 수 있을 듯하다. 가만히 어항 속 세계를 본다. 인공수초와 달리 진짜 수초들은 어항 속에서 광합성을 한다. 이산화탄소를 흡수하고 산소를 내는 활동을 말한다. 그래서 수초가 들어간 다음부터 조명은 매우 중요하다. 중학교 상식이지만 식물은 밝을 때만 광합성을 한다. 빛이 부족하면 광합성이 이루어지지 않아 어항 속 수질이 악화되는 데다가 수초들도 죽는다. 얼마전 사무실에도 식물을 들여놓았는데 어항까지 초록이들이 자란다. 마음에 봄바람이 부나보다.
오늘 동료들과 점심을 먹는데, 주말 농장 이야기가 나온다. 나 포함해 넷 중 둘은 작년까지 주말 농장을 다녔고, 다른 한 명도 예전에 주말 농장을 한 경험이 있다. 그러니 셋은 농사꾼인셈. 감자, 고구마, 대파, 쪽파, 무, 배추, 오이 등등 각자가 쏟아내는 농사꾼 경험이 점심식탁에 푸짐하게 차려진다. 어떤 작물은 언제 심어야 하며, 어떤 건 약도 뿌려야 할만큼 병충해에 취약해 키우기 고약하다는 말도 한다.
순댓국에 밥 말아 먹으면서도 농사 이야기가 쏙쏙 들어와 흥미롭다. 기껏해야 사무실에 식물 몇개 들여 놓고 쳐다보는 재미로 살고 있는데, 누구는 주말마다 먼길을 마다하지 않고 달려가 다채롭게 농작물을 키우고 있었다니 같이 식사하는 동료들이 다르게 보인다. 내 사무실에는 오래전부터 키우던 페페가 하나 있다. 어쩌다보니 다 죽었는데, 한가닥 살려서 물꽂이로 키우는데, 거기서 다시 새싹도 나오고 있어 감회가 새롭다.
012
항아리병 속에서는 새싹이 돋아나고 있었다. 파란컵 잔에서도 뿌리가 내리고 무언가 꿈틀거리고 있다.
회사 생활의 단조로움을 피하기 위해 애완식물로 페페만 기르고 있었지만 봄의 기운을 보다 더 가깝게 느끼고자 피토니아와 테이블야자를 들여 놓았다. 전문 농사꾼들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얘네들을 잘 키울 수 있을지 걱정이다. 내가 먼저 회사를 그만둘지, 얘네들이 먼저 사망할지 ㅎㅎ 어찌됐든 끈질기게 삶을 이어가는 모든 것들에게 건투를 빌어 보는 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