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딸과 함께 영화 을 보았다. 아주 오래전 비디오를 빌려다가 집에서 봤었는데 최근 OTT를 통해 편을 보게 되면서 다시 한 번 톨킨이 구축한 세계관에 압도되는 경험을 했다. 다시 영화관에 재개봉한 은, 지축을 흔드는 듯한 말발굽 소리가 선명한 돌비 시스템으로 전해지고 절대반지를 없애기 위한 프로도와 샘의 고통스럽고 힘겨운 여정이 바로 눈앞에 펼쳐진다. 딸 덕분에 20년전 영화를 다시 보니 감회가 새롭다. 허나 영화가 시작하기 전부터 나를 설레게 한 것은 따로 있다. 바로 새로 개봉되는 영화를 광고하는데 이 영화로 나왔나 보다. "린턴을 사랑하는 내 마음은 무성한 숲의 나뭇잎 같은 거야. 겨울이 오고 시간이 지나면 변할 거라는 거 잘 알아. 하지만 히스클리프를 향한 내 사랑은 그 숲 아래의 영원히..
불편한 편의점 (벚꽃 에디션) - 김호연 지음/나무옆의자 편의점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구심력과 원심력 "불편한 편의점"은 이문구의 "관촌수필"처럼 하나의 장소에서 여러 군상들이 어우러지는 모습을 그려낸 연작 소설이다. 24시간 돌아가는 편의점에서 만들어지는 이야기는 마치 원운동하는 물체에 작용하는 구심력처럼 우리의 마음을 끌어들인다. 이런 강한 구심력이 있기에 물체는 원심력을 발휘해 힘차게 원운동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야기의 중심을 잡아주는 구심력은 바로 인간에 대한 관심, 그로부터 시작되는 구원에 대한 믿음이다. 이 중심에는 '독고'와 '사장 할머니 염영숙'가 있다. 반면 이야기를 재미있고 풍부하게 하는 힘이 원심력이다. 원심력을 받는 이야기의 인물로는 20대 여성이며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며 편의점 ..
살면서 겪게되는 아픈 갈등들은 시간이 지나 원인과 결과만 남은 앙상한 기억만 남는다. 그런 기억들은 아무렇지 않게 뚝뚝 꺾어 추억의 불쏘시개로 쓰인다. 그래서 인간은 실수를 반복하고 고통은 계속되는 거다. 그 이유와 해결 과정은 모두 망각한 채 다시 반복되는 갈등의 골로 시나브로 빠져들어간다. 함정에 빠져버리면 다시 빠져나오려고 골머리를 앓지만 앙상한 기억들을 떠올려보는 일은 허튼 수작에 불과하다. 그냥 슬픈 일이다. 속상해하고 화를 낼 일이 아니다. 슬프고 슬프게 받아들일 일이다. 갈등은 결국 슬프다. 연민일 수도, 동정일 수도 있다. 씁쓸하다 못해 아리기까지 한 입맛을 느끼는 일이다. 무슨 짓을 해도 무력함에서 헤어나오기 힘들다. 이럴 때는 어쩔 수가 없는 일이다. 슬픈 일이 생긴 것이다. 그냥 슬픔..
버스 정류장 화단이 또 예쁘게 꾸며졌다. 도시에서 살면 이런 사소하지만 구석구석까지 뻗어 있는 심미적 구조물들을 쉽게 접할 수 있다. 인공적이지만 세심한 인간의 도시 문명을 접하면 경이로울 수밖에 없다. 그에 비해 시골 정류장은 어떨까? 어느 지리산 산골마을은 하루 3~5회 정도 버스가 온다. 정류장 구석에는 거미줄이 커다랗게 쳐져 있고 언제 붙였는지 모를 광고판들이 여기저기 색이 바래고 귀퉁이가 떨어져 바람에 팔랑거린다. 아무렇게나 써져있는 콜택시 번호 중에는 017도 있더라. 자연스럽게 낡아가는 인공 구조물 밖으로 조금만 눈을 돌리면 숲과 들판에서 자라는 나무와 풀들이 낡은 정류장과 묘한 조화를 이룬다. 이또한 경이롭다. 오래되어 낡음을 생생한 자연이 감싸안은 듯하다. 존재들에 이유를 분이고 엮일 것..
혼자 걷는 길, 같이 걷는 길 지리산둘레길을 시작할 때는 가족과 함께 걸었다. 그러다가 친구들과 걸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혼자 걸었다. 홀로 여행을 다녀온 게 언제였더라. 기억도 나지 않는다. 아주 오래전 20대의 젊은 날 혼자 지리산 종주를 했던 게 기억난다. 아, 물론 1박 없는 홀로 여행은 종종 다니곤 했다. 직업도 어딜 돌아다니는 일이 없이 붙박이 사무 업무만 하는 거라 출장도 드물다. 사정이 이러니 1박 이상의 여행을 혼자 떠난다는 것이 무척 낯설다. 설레거나 두려움도 무뎌질 나이가 되고 있다. 허나 나이가 얼마든 여행은 언제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건 사실이다. 혼자 길을 걷는다는 것은 온전히 나에게 집중할 수 있어 좋다. 늘상 관계 안에서 긴장하고 주위 사람을 살피면서 때로는 눈치를 받거..
한날 거의 동시간에 찍은 두 개의 나무 사진이다. 여의도 LG빌딩에서 마포대교로 넘어가는 교차로, 이곳 횡단보도를 사이에 두고 마주 서 있는 두 대왕참나무 그늘목이 너무 상반된 모습이다. 같은 공간에서 하나는 지난 가을에 떨어지지 못한 잎들이 무수히 매달려 있고, 다른 나무에는 마른 나뭇잎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우리 생각에는 잎을 떨구지 못한 나무가 이상해 보인다. 두 나무에서 나타나는 외관상 극명한 차이가 무엇 때문인지 궁금해졌다. 이를 위해 먼저 “나무는 왜 가을에 잎을 떨어뜨릴까?”를 알아보았다. 나무는 추운 겨울을 나기 위해서 에너지를 성장보다는 보존으로 전환한다. 즉, 낮의 길이가 점차 짧아짐에 따라 광합성의 효율이 떨어지기 시작하면, 나무는 잎에 가는 영양분을 줄인다. 이때 잎과 나뭇가지..
다시 다음 교육과정 준비에 들어가고 있다. 집필진을 꾸리고, 차기 교육과정의 개정 방향을 확인하고, 수업 방식과 교육 현장의 요구 등을 정리하고 있다. 편집자를 새로 뽑고 있다. 많은 편집자가 이 시기에 필요하다. 길면 2년의 프로젝트 업무라서 계약직을 뽑는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출판의 전 과정을 깊이 있게 다뤄보는 경험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교과서 출판은 해 볼만한 일이다. 일부 과목은 지원자를 찾기가 어렵다. 국영수사과 등의 주요 과목은 계속해서 개발이 있고, 업무 연속성도 있어서 지원자도 많고 경험자도 많지만 예체능 계열이나 선택 과목(기술가정, 한문, 정보 등등)은 구인난에 시달린다. 출판으로 직업의 길을 선택하는 사람이 많이 줄었다. 콘텐츠 사업 중에서도 출판은 어쩌면 매력이 많이 떨어진 업..
겨우내 물꽂이로 키워 온 페페의 뿌리가 풍성했다. 오늘 흙에 옮겨 심었다. 흙은 예전 산세브리아를 키우던 화분에서 가져 왔다. 흙색은 검었다. 한창 세계 3대 곡창지역이라는 우크라이나 땅의 흙도 검다고 들었다. 아주 좋은 흙이다. 흙도 방치하면 건조하고 푸석푸석해지며 빈약해진다. 비록 화분이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었지만, 틈틈히 물꽂이에 있던 물들을 부어주면서 흙을 건강하게 키웠다. 무생물인 흙이 건강하다? 말도 안되는 일이겠지만, 흙에서 살아가는 미생물들이 건강하게 제 역할을 할 수 있다면 그것은 건강한 흙이다. 물꽂이로 사용된 물이 흙속에서 식물과 어울리는 환경을 만들어준다. 식물의 뿌리에는 여러 미생물들이 자란다고 한다. 마치 우리의 장과 같다. 장에 사는 미생물들이 우리가 먹은 음식들을 잘 분해해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