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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전노장 드라이버 써니 헤이스로 분한 브래드 피트는 수트만 입어도 서킷을 런웨이로 만들어 버릴 정도로 멋진 사내다. 좋은 대우를 버리고 다 망해가는 팀으로 걸어오는 그의 모습은 자고로 멋이란 옷이나 외모가 아니라 자세와 태도에 있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한다.

      F1이라는 경기는 또 어떤가? 시속 300km 이상의 속도로 질주하며 중력가속도를 온몸으로 버텨야 하는 극한의 스포츠이다. 젊은 루키 조슈아가 써니를 보며 속으로 ‘우리 형님 서킷 위에서 뒷목 잡으시는 거 아닌가?’ 걱정했을 거라는 데 내 돈 500원과 SK하이닉스 주식을 걸겠다. 다행히 피트 형님의 에이징 커브는 서킷의 급커브보다 훨씬 부드럽더라. 물론 그 잘난 얼굴이 중력가속도에 일그러지는 모습을 헬멧으로 감춘 건 영화상 설정일 뿐 배우 보호 차원의 설정은 아니었겠지.

 

     뜨거운 엔진음과 심장을 타격하는 속도감, 영화 <F1 더 무비>는 단지 트랙 위를 달리는 머신의 외형만을 보여 주는 작품이 아니다. <탑건: 매버릭>의 조셉 코신스키 감독과 브래드 피트가 만난 이 영화는, 잘 만들어진 스포츠 영화가 어떻게 관객의 심박수를 통제하고 감동을 이끌어내는지 그 정석을 보여 주었다.

     여기서는 <F1 더 무비>에 나타나는 스포츠 영화의 고전적인 문법을 짚어보겠다. 이를 통해 이 영화가 가진 독특한 매력과 마지막에 던지는 통렬한 한방에 관해 이야기해 보려 한다.

 

슈퍼 루키와 늙은 노장의 만남

     1990년대 끔찍한 사고 이후 서킷을 떠났던 써니 헤이스(브래드 피트). 그가 지역의 그저그런 레이싱 대회를 다니다가 F1 그랑프리 대회에 출전하며 다시 머신(F1에 출전하는 차량을 부르는 말)의 운전대를 잡는 순간은 전형적이지만 가장 가슴 뛰는 오프닝이자 갈등의 전조가 된다. 팀의 신예 조슈아 피어스(댐슨 이드리스)는 오만하고 개인주의적인 성향이며 SNS와 미디어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에 더 신경 쓰는 한편 좀 더 나은 조건의 다른 팀으로 이적할 기회를 엿보고 있다. 써니와 조슈아가 피트인(Pit In) 공간과 트랙 위에서 거칠게 부딪히는 초반부의 장면에는 이런 배경이 숨어 있어 극적 긴장감을 팽팽하게 당긴다.

     영화는 레이싱이 결코 드라이버 혼자만의 독주가 아님을 끊임없이 보여 준다. 우리가 미디어를 통해 보는 F1이라는 스포츠는 드라이버들이 이상한 차를 타고 누가 더 빠른가를 겨루는 모습으로만 비추어지지만, 사실 F1 레이싱은 0.001초를 다투는 극한의 세계이며, 여기에는 철저한 리더십과 팀워크가 요구된다.

     후반부 경기가 재개되는 순간, 써니 헤이스는 팀 루키 조슈아를 우승시키기 위해 온몸을 던져 자신을 희생하며 나선다. 마지막 레이싱에서 다른 머신들과 치열하게 접전을 버리며 질주하는 장면을 보고 있으면, 관객도 서킷에서 회전 중력을 이겨내려는 드라이버처럼 온몸이 경직되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우승 기회를 내려놓고 팀의 승리와 루키 조슈아의 질주를 위해 뒤따라오는 경쟁 머신들을 막아서는 써니 헤이스의 모습은 팀의 승리를 위해 희생하는 스포츠 선수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 준다. 또, 팀을 이끄는 진정한 리더십은 바로 자신을 제일 먼저 희생할 수 있는 숭고한 정신에서 나온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 장면이다. 단순히 속도 경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치밀한 전략과 퍼포먼스로 상대를 압도하고 팀을 하나로 뭉치게 할 수 있는 노장의 열정이 우리의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것이다. 나이든 레이서의 플랜C가 경기를 압도하는 모습을 보라!

 

F1이 가진 독특한 특성의 시각화

     시속 300km가 넘는 속도로 질주하는 머신들이 경쟁하는 장면을 보면 내 심장도 같이 심박수 150까지 치솟는 느낌을 받는다. 달리는 머신에서 티타늄 스파크 불빛이 번쩍이는 것을 보면 군대에서 기관총을 쏠 때 날아가는 발광탄을 봤을 때처럼 심장이 두근더린다. 문득 영화를 보다가 ‘저 속도면 귀성길 전라남도 구례까지 300km도 한 시간이면 가겠구나’ 싶다가도, F1 머신은 과속 방지턱 하나 넘는 순간 차체가 박살 난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귀성길에는 그냥 내 차 K3로 마음에 드는 휴게소마다 피트인 하면서 쉬엄쉬엄 가는 걸로...

     F1 머신은 오직 달리기 위해 존재하는 차량이다. 이를 위해 문도 없고 헤드라이트도 없다. 오직 서킷에서만 달릴 수 있는 차량이지만 온갖 과학적 장치와 센서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다. 시즌 중에도 끊임없이 차량을 점검하고 업데이트하며 더 빠른 차를 만들기 위해 경쟁한다. 여기에는 첨단 공기역학과 물리학, 재료공학이 총동원되기 마련이다. 헤시스 팀의 총괄 기술자 케이트도 전직은 나사의 우주항공 기술 연구원이었다. 이처럼 머신은 지상 탈것의 첨단과학기술의 총아로, 사람들은 머신을 지상 위의 전투기라고도 부른다.

     이 영화의 큰 장점 중 하나는 일반 대중에게는 다소 낯설 수 있는 F1의 메커니즘을 영리하게 극에 녹여냈다는 점이다. 단순한 속도 경쟁이 아니라, 타이어의 마모 상태, 다운포스(차체를 아래로 누르는 공기역학적 힘)를 위한 엔지니어들의 치열한 기술 개발, 그리고 피트 스톱(Pit Stop)에서 몇 초 만에 타이어를 교체하는 크루들의 일사불란함 등이 화면에 등장한다. 써니 헤이스가 팀 머신의 한계를 진단하고 공기역학적 업그레이드를 제안하는 장면은 이 스포츠가 '인간과 기술의 가장 완벽한 결합체'라는 특성을 잘 보여 주는 대목이다.

 

가장 자본주의적인 스포츠 F1에 통쾌한 한 방

     영화의 클라이맥스는 단순히 경기에서 승리했다는 쾌감에 머무르지 않는다. 이 영화가 진짜 위대해지는 지점은 바로 '상업주의에 오염된 대회에 필요한 스포츠 정신의 회복'에 있다. 시즌 중반 내내 투자자들과 거대 자본은 팀의 가치와 존폐를 오직 '수익성'과 '마케팅 효과'로만 저울질한다. 스폰서와 돈의 논리에 휘둘리며 팀이 공중분해 될 위기에 처했을 때, 써니 헤이스는 신체적 부상과 법적 위험을 모두 자신이 짊어지겠다는 각서를 쓰고 마지막 트랙으로 향한다. 돈으로 모든 가치를 재단하려는 거대 자본의 얄팍한 속성을 비웃듯, 엔진의 굉음과 함께 체커 플래그(경기가 끝났음을 알리는, 검은색과 흰색의 체크무늬 깃발)를 향해 질주하는 머신들의 모습은 그 자체로 통렬한 카타르시스를 준다.

"당신들이 계산기를 두드릴 때, 우리는 목숨을 걸고 달린다."

     영화의 결말은 자본주의적 시스템이 아무리 스포츠를 상업적으로 이용하려 해도, 승리를 향한 드라이버들의 순수한 열정과 희생, 그리고 스포츠 본연의 각본 없는 드라마는 결코 돈으로 살 수 없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던진다.

     써니 헤이스는 가장 영광어린 순간에 모든 걸 던져버리고 無로 돌아간... 아니 자신의 미니버스를 타고 떠난다. 까짓거 나도 세상에 무시당할 것 없이 장대한 질주 본능을 품에 안고 거침없이 떠나고 싶지만, 소시민의 삶은 여전히 개미털이에 당하는 주식시장처럼 통장 잔고에 가슴 아파하거나 포머라는 말에 상처받고 전설의 복서 조지 포머에게 한 대라도 맞으면 정신 차릴 것 같다는 헛소리를 하고 있는 게 일상이다.

 

     <F1 더 무비>는 거친 엔진 소리 뒤에 인간의 뜨거운 심장 소리를 숨겨둔 작품이다. 스포츠 영화의 완벽한 문법 속에서 피어난 베테랑의 리더십, 그리고 상업주의를 맹렬하게 받아치는 마지막 한 방까지. 영화가 끝나는 순간까지도 가슴속에 진한 배기음이 남는 듯한 정말 잘 만든 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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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 생활을 하면서도 직장 동료들이 가끔씩 던지는 말이 있다. 젊었을 때는 절대 하지 않았던 말인데, 나이가 드니 저절로 입밖으로 터진다. 변하지 않는 구조와 회사의 인식에 대한 자괴감을 담아서 이렇게...

"어차피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넷플릭스 드라마에서 20대의 젊은 청년 조일병이 내뱉던 그 말은 바닥을 알 수 없는 절망의 끝에서 내지르는 비명이었다. 무시무시한 폭력 앞에 내던져졌지만 아무도 도와주지 않고 누구도 손내밀지 않았으며 모두가 방관했다. 그 절망 앞에서 그는 마지막을 향해 폭주했다. 누가 착하고 순했던 조일병을 그렇게 만들었을까라는 질문은 의미없다. 답은 모두가 알고 있다. 그래서 누구나 떠들 수 있다. 하지만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다. 

 

군 시절(1993~1995) 중대 행정반 게시판에는 군부대 사건사고들이 매주 업데이트 되었다. 나름 경각심을 주기 위해 사례들을 제시함으로써 불미스러운 사고(?)를 막겠다는 취지였지만, 사고의 디테일한 내용이 다 드러나지는 않는다. 그저 누가 어떤 일로 어느 정도의 부상(또는 사망)을 당했으며 어떻게 처리되었다는 정도만 나올 뿐이다. 제시된 내용으로 보면, 대부분의 사고들은 부주의가 원인이거나 병사간 사적 충돌이었고, 일부 상급자의 가혹행위로 인한 단순 사고였다. 

군에 있을 때 옆 대대의 병사가 목욕탕에서 상급자의 폭력에 의해 사망한 사고가 있었다. 부대 전체가 발칵 뒤집히고 소원수리함이 다시 설치되고 모든 병사들이 장교들에게 불려가 일대일 면담을 진행했다. 이런 사고를 원천적으로 막겠다는 것 보다는 병사들의 군기를 다시 잡겠다는 의지로 보였고, 그 기간 중 내무반은 거짓된 엄숙함과 적막함으로 채워졌다. 그 결과는? 군대 내 대부분의 일들이 그러하듯이 크게 변하는 건 없었다. "어차피 변하지 않는다."와 "그래도 국방부 시계는 돌아간다"는 말로 한 시기가 지나가길 기다릴 뿐이다. 

드라마 <D.P.> 속 주 공간은 군 병영과 내무반이며 이곳은 짐승들의 공간이다. 내가 다닌 1990년대의 군대와 똑같았다. 내무반의 침상과 관물대, 모포 각잡기, 붉은 취침등 밑에서 주전자로 물을 뿌리고 신라면 뽀글이를 먹는 모습까지 판박이다. 심지어 은밀한 폭력의 공간인 건물 뒷편, 비품 창고, 초소도 아픈 옛 기억을 떠올리게 만든다. 폭력과 부조리, 비합리가 계급과 상명하복이라는 명분으로 공공연하게 벌어졌던 공간들이다. 

드라마 속 시간(2014년)은 나와는 한참 멀다. 그런데 폭력의 정도는 극악할 정도다. 물론 영화 속 폭력이 모든 군부대에 똑같이 적용되긴 어려울 것이다. 1990년대 군 복무를 했던 나와 2010년대 군 복무를 했던 사람들은 20년의 시간 차이에도 불구하고 하나도 변한게 없다. 국방부 시계는 돌아간다고 말했지만, 어쩌면 국방부 시계는 멈추어 있거나 아주 느리게 갔던 것은 아닐까?

변화와 희망을 이야기해야 하는 젊은 20대 청년들을, 계급으로 나누고 복종을 강요하고 다름을 용납하지 않도록 훈련했던 군대의 본질적인 내용이 변화했을까? 난 여전히 답을 모르겠고, 질문도 할 수 없으며, 관심을 가지기가 두렵다. 군 제대 이후 한참동안 군에 재입대하는 꿈을 꾸었다. 언제가부터 이제 그런 꿈을 꾸지 않았는데, 이 드라마 <D.P.>를 보면서 그 꿈이 다시 나타날까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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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부터 집을 나오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작년부터 새로운 집에서 홀로 살고 있다. 본가에서 멀지 않다. 사람들은 의아해한다. 직장이 멀어서, 혹은 결혼 때문에, 아니면 집이 멀리 이사가니까 등등의 이유가 아니면 독립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본가와 한동네라니 이상하게 볼만도 하다.
가족. 참 슬프고 억장이 내려앉는 말이다. 태어나자마자 속하게 되는 집단이고, 그 집단의 보호 아래 성장하고 자라왔으며, 이만큼 살아왔던 고마운 곳이다. 그러나 어떤 때는 그곳은 감옥이 된다. 내 말과 행동과 생각을 구속하는 일이 생긴다. 머리가 커지면서, 대가리에 피가 마른다는 어느 시점에서 가족이 나에게 던지는 말 한마디 한마디는 위로보다 상처가 될 때가 많다.

영화 <가족의 탄생>을 보며 입안이 텁텁해지는 건 왜일까. 엄마가 둘(친엄마는 없다)인 채연(정유미)과 아버지가 다른 누나 선경(공효진) 밑에서 자란 경석(봉태규)이 채연의 집에서 이룬 행복의 가능성의 근간에는 따뜻한 정과 이해, 그리고 믿음이 담겨 있다. 그것은 누구에게나 필요한 사랑의 공통된 감정일 것이다.

1년 반동안 집을 나와 살면서 조금씩 부모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주말마다 집에 가면 다를 것 없는 일상이 여전히 또아리 틀고 있는 분위기지만, 이해받기를 원해고 사랑해 주길 바라던 나는 변했다. 아니 그 떨어져 사는 기간동안 가족들도 조금씩 변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해체와 재생성, 나는 요즘 다시 집에 들어가 사는 걸 생각 중이다.

 
영화는 기차 안에서 만난 남녀로 시작한다. 처음 보는 남자에게 악수를 청하며 깜찍한 미소를 짓는 채연에게 경석은 흠뻑 빠져든다. “삶은 계란에는 사이다가 있어야” 한다며 넋두리를 풀어놓는 경석이 채연도 싫지 않다.
다시 영화는 억척스럽게 살아가는 미라(문소리)를 보여준다. 집 나간 뒤 5년 만에 찾아오는 남동생 소식에 설레는 미라는 정 많고 걱정 많고 일 많은 평범한 누이의 모습이다. 그런데 5년 만에 찾아온 형철(엄태웅)은 그렇지 않다. 이모 뻘 되는 여자 무신(고두심)을 아내라고 데리고 와 미라에게 태연하게 소개하지만 미라는 당혹스럽다. 게다가 무신의 전 남편의 전 부인의 아이가 찾아와 상황은 더욱 복잡해진다. 형철과 무신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무신이 어떤 사연이 있는 여자인지, 왜 미라는 결혼을 하지 않는지 짐작조차 되지 않는다. 다만 형철이라는 비뚫어진 가부장에 의해 삶이 이상하게 꼬인 무신과 미라만 있다.

다시 영화는 선경(공효진)을 비춘다. 선경은 유부남과 사랑에 빠져 아이까지 덜컥 나아버린 엄마가 밉다. 아무데나 정을 주고 상처받았던 엄마가, 그래서 함께 상처받은 자신의 과거가 싫었기 때문이다. 남자친구(류승범)와의 사랑도 쉽지 않다.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소리쳐 보지만 “변했다”는 말밖에는 없다. 변한 것은 선경일까, 아니면 사랑일까. 선경은 헷갈린다. 가족도 연인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이 땅을 떠나고 싶은 간절한 소망이 어렵게 어렵게 성사되기 일보직전 선경의 엄마가 세상을 뜬다. 엄마가 떠난 다음에야 엄마의 마음을 이해하게 된 선경. 그리고 남겨진 배다른 남동생. 선경은 떠나지 않기로 결심한다.

다시 영화는 처음 기차 안에 만난 남자와 여자의 이야기다. 유난하게도 모든 사람에게 잘 해주는 채연(정유미) 때문에 남자친구 경석(봉태규)은 괴롭기 그지없다. 경석은 누나의 조언을 듣고자 채연을 집으로 초대한다. 그러나 약속한 날 채연은 집나간 다른 남자의 아이를 찾아 헤매느라 경석의 집에 오지 못한다. 화가 난 경석이 채연에게 이별을 선언하고, 채연은 집으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싣는다. 여기까지 경석이가 쫓아와 다시 화해를 요청하지만 뜽금없이 채연에게 온 전화 때문에 다시 언성이 높아진다.

“네가 나에게 어떻게 그럴 수 있니?”
“사랑하잖아.”
 

채연의 집 앞에서 헤어질 찰나 집안에서 나온 미라가 경석을 발견한다. 여기까지 왔으니 집에서 밥이나 먹으라는 권유를 뿌리치기 위해 채연이 “우리 헤어졌어요.”라고 하지만, 미라는 “헤어지는 게 뭐라고. 밥은 먹고 가”라며 억지로 끌고 들어온다.

채연에게 엄마가 둘이다. 아빠는 없다. 그런데 두 엄마 모두 친엄마가 아니다. 그러나 이들은 가족이다. 채연의 ‘헤픈’ 정은 두 엄마가 준 정의 깊이였을 거다. 경석에게 가족은 누나 뿐이다. 어렸을 때 엄마가 죽었지만, 엄마에 대한 인상은 ‘구질구질’하다라는 거다. 그러나 누나는 “정이 많은 분”이라고 한다. 경석은 그런 정을 느끼지 못받고 살아왔다.

그렇게 ‘또 하나의 가족’이 탄생했다. S그룹이 말하는 가전제품들과의 가족 보다는 더 리얼하고, 어찌보면 황당하며, 그래도 따뜻한 사랑이 담겨 있는 가족의 탄생이다. 누가 주인공이라고 할 수 없이 배우 하나하나의 연기가 돋보였던, 정말 사랑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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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극 <콘트라베이스>(명계남의 모노드라마)를 보고

어느 누구나 자기가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살아가는 이유다. 콘트라베이스든, 첼로든, 팀파니든 각자가 고유한 역할과 소리가 어우러져 합중주든 오케스트라든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박수갈채를 받는 대표는 지휘자이거나 좀 더 나아가면 피아니스트나 바이올리니스트다. 이쯤 되면 다른 악기들의 불만도 있을 법하다. 왜 저들만 나서야 되냐구요~

그런 불만이 가장 큰 것은 콘트라베이스일 것이다. 하긴 그럴만한 게, 역대 유명 짜하다는 작곡가 중에 이 콘트라베이스를 위한 독주곡을 만들어 준 사람은, 없다! 현악기 중 가장 낮은 저음으로 오케스트라에 무게를 실어주고 중심과 기초를 튼튼하게 하는 악기인데 그 가치를 제대로 알아주는 작곡가들은 많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랬을까? 프랑스의 작가 파트리크 쥐스킨스가 이 무식하게 큰(총 길이 190cm) 녀석을 주인공으로 소설을 썼고, 한국의 괴짜 연극배우가 2시간여 동안 혼자 연기를 했다고 한다. 결국 음악 쪽에서 인정받지 못하다가 문학에서 등단하고 연극 무대에 서게 된 콘트라베이스, 이것을 울어야 하나 웃어야 하나.

그런데 신기한 것은 작가의 필력인지, 배우의 연기력 때문인지, 책은 불티나게 팔렸다고 하고 배우는 10년 만에 앙코르 공연을 다시 열고 있다. 이 놀라온 흡입력은 지옥 끝에서 울려나오는 우울한 저음의 콘트라베이스의 마음을 어여쁜 메조소프라노의 앳된 볼처럼 발갛게 달아오르게 만들 만하다. 평생 변변한 독주곡도 하나 가져보지 못한 콘트라베이스에게 이는 참으로 낯설고 황당한 경험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찌됐건 첼로와 비올라의 음을 구분하지 못하는 나로서는 이 기회를 통해 콘트라베이스가 제일 낮은 음이라는 것을 알게 됐으니, 콘트라베이스와 나의 경계는 조금씩 허물어져가고 있다. 그리고 오늘 나는 프랑스의 해괴한 작가 파트리크 쥐스킨스의 소설 <콘트라베이스>을 과감하게 인터넷 구매했다. 거금 4,800원!

어찌됐거나 참 재미있는 연극이었다. 이 연극을 보여준 K양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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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직된 인간들은 다 불쌍해, 살아온 날들을 말해 주잖아.”

솔직히 말하면, 나도 경직된 인간이다. 그래서였는지, 경직된 인간들을 보면 난 항상 느꼈다. 어린 시절의 그늘들이 느껴졌다. 그 그늘을 만든 게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학창시절 만난 또래일 수도 있고, 가족일 수도 있다. 대학 시절에 만났던 많은 사람들 중에 그런 그늘을 가진 후배들이 있었다. 그 친구들을 만날 때면 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나처럼 살아왔겠구나 라는 슬픈 예감이었다. 

이지안(이지은 역)에 대해 박동훈(이선균 역)이 느꼈던 감정들은 어쩌면 연민의 감정과 맞닿아 있다. 인간이 다른 이에게 약점을 드러내는 것은 위험하다는 것을 어렸을 적부터 몸으로 배워 온 이지안은 주위 사람들에게 냉랭하고 불친절하게 대하면서 자기를 가리고 보호한다. 다시는 상처받지 않기 위해 찬 바람으로 자신을 보호하지만 오히려 그러한 행동들이 박동훈에게는 안쓰럽고 불쌍하게 다가왔다. 

연민의 마음은 인간 본성이지만, 그 연민을 모두가 느낄 수 있는 건 아니다. 연민은 또다른 연민과 맞닿을 때 의미있다. 때로 우울하고 깊이를 알 수 없는 슬픔에 잠길 때에도 가급적 감추고 함부로 꺼내 남에게 드러내지 못한다. 그럴려면 자존심이 나서서 머릿속에 수치심을 쏟아 붓는다. 그래서 연민은 동정과 다른 것이다. 연민은 연민을 알아보고 수치심의 수치를 낮추어 주며 자존심을 달래 준다. 나와 같은 인간, 나처럼 아픈 사람, 함께 아파할 사람...

박동훈은 위기에 처해 있다. 하루하루 숨 가쁘게 달려가지만 도저히 메꿔지지 않는 공허한 가슴 한쪽의 아픔들. 가족을 위해 살아오고 희생했다고 위로하지만 내 아들이 나처럼 살지 않기를 바라는 삶을 살아왔다는 자괴감. 다시 이렇게 살아도 될까라는 계속된 의문에 답을 할 수 없는 수렁에 빠진 인생. 나름의 전문성으로 대기업 부장까지 올라왔지만 아내는 잘 나가는 변호사가 되었고, 대학 후배가 대표이사로 발탁되어 들어왔다. 아내는 점점 일에 빠져서 가정이나 남편에게는 관심이 없다. 형과 동생마저 폐인이 되어 어머니 집에 의탁해 살아간다. 통장 잔고는 29만원밖에 없고, 집을 담보로 은행 대출을 받아 형제들 분식집이라도 차려주자는 엄마를 만류한 그 때, 어디서 누가 보낸지도 모르는 5천만원 어치 상품권 뇌물의 유혹. 

이지안은 지칠 수가 없다. 할머니 요양원 비용을 대고, 빚 독촉을 핑계로 괴롭히는 광일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밤낮을 제대로 누워보는 일도 없이 일을 한다. 접시닦이 일을 하는 곳에서 음식을 훔쳐와 저녁을 때우고, 회사 탕비실의 커피믹스를 훔쳐 불면의 밤을 만든다. 빚은 끝이 없고, 할머니 요양원 비용도 밀려서 야반도주를 해야 했다. 가난한 조손 가정이라고 도움을 주는 손길이 없었을까? 열심히 살아가는 지안의 모습을 안타깝게 봐준 이가 없었을까? 하지만 그것도 네 번까지. 이지안이 살인을 했었다는 과거를 알면 눈빛이 흔들리고 도망가 버렸다.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은 삶. 삼만 살을 살았는데도 자꾸 왜 태어나는지 모를 삶. 

 

상처 받은 아이들은 너무 일찍 커버려.
그래 보여. 걔 지난날들을 알아보기가 겁난다.

 

많은 사람들의 값싼 동정에 시달려 보았던 이지안은 그녀가 불쌍하다는 박동훈의 말에 욕을 한다. 복수를 생각한다. 이지안에게는 월 오륙백만 원씩 받으면서 출근하는 박동훈의 그 말이 마치 고양이 쥐 생각하는 것처럼 고깝게 여겨진다. 부족할 것 없는 박동훈이 매일같이 지옥에 끌려가는 인상을 쓰는 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박동훈에게 배달된 뇌물 봉투를 훔치고, 그를 회사에서 쫓아내려는 도준영의 음모를 돕는 것도 이지안에게는 생존을 위한 지옥 같은 삶의 연장일 뿐이다. 박동훈의 삶은 그에게 의미 없다. 

박동훈은 우연히 만난 이지안이 홀로 할머니를 모시고 산다는 것을 알게 됐다. 억척같이 살아가면서도 할머니를 정성스럽게 모시는 이지안의 모습은 착하다. 싸가지없이 굴지만 지안의 깊은 곳에 있는 측은지심의 마음을 박동훈이 알았다. 이지안을 돕고 그녀의 과거를 연민의 마음으로 알아간다. 언제부터인지 확실하지 않지만, 이지안이 사람을 죽였다는 걸 박동훈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아는 척하지 않고,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는다. 

 

 

모른 척 해 줄게. 너에 대해서 무슨 이야기를 들어도, 모른 척 해 줄게. 약속해 주라. 너도 모른 척 해 준다고. 겁나. 너는 말 안 해도 다 알 것 같아서···· 
그러면 누가 알 때까지 무서울 텐데, 누가 알까···· 만나는 사람마다 이 사람은 언제쯤 알게 될까, 혹시 벌써 알고 있나···· 어쩔 땐 이렇게 평생 불안하게 사느니 그냥 세상 사람들 다 알게 광화문 전광판에 떴으면 좋겠던데···· 

 

처음 이선균, 이지은 주연에 <나의 아저씨>라니! 오해받기 딱 좋았다. 드라마 안에서도 그랬지만 드라마 밖에서는 더욱 시끄러웠다. 아저씨와 어린 소녀의 사랑? <도깨비>가 대박을 내니 판타지가 아닌 현실 내용으로 재탕하려는 것이냐는 비난도 있었다. 나 역시 그런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삐닥하게 본 것이다. 시리즈가 전개된던 시기에는 프로젝트 작업으로 한창 바쁠 때여서 못 보다가, 아내의 시청 평이 워낙 좋아 나중에 보자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야 봤다. 이런 드라마를 지금에서야 보다니 내가 나쁜 아저씨다. 

좋은 이야기는 스스로의 삶을 돌아보게 한다. 이 드라마의 박동훈은 나의 삶을 돌아보게 했고, 나는 박동훈과 박상훈(맏이)과 박기훈(막내)의 어디쯤에 있는 아무개라고 생각할만큼 인물들에 공감했다. 때로는 박상훈처럼 지질하고 눈물 많고 겁도 많은 데다 개저씨 같을 때도 있고, 어떨 때는 개폼 잡으며 큰소리치고 싶은 박기훈 같은 면도 있다. 나름 회사 중간 간부라는 직책에 회사-집-회사 외에는 별 볼 일 없이 사는 박동훈 같은 면도 있다. 

하지만 박상훈의 인간성에는 부족하고, 박기훈의 용기에는 못미치고, 박동훈의 실력과도 거리가 멀다. 드라마는 판타지라지만 열패감이 드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 그럼에도 볼수록 빠져드는 매력에 정신줄을 놓아버릴 것만 같았다. 드라마를 보면서 저 세 형제보다 못하다는 열패감은 깊어졌지만, 더 나아질 수 있다는 기대감은 그것을 상쇄할 만큼 거대해졌다. 희망이 보이는 삶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다···· 그말을 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없어.

 

어른이 되면 홀로서야 한다. 행동에 책임져야 하는 것이다. 처음 책임질 일을 맡아서 진행할 때의 그 두려움을 기억해 보자. 실패하면 어떻게 할까, 두려움에 떨었던 일들이 엊그제 같았는데, 어느새 큰 프로젝트일들을 여러 사람을 지휘하며 해내고 있다. 그렇지만 두려움은 항상 등 뒤에 따라온다. 

게다가 비슷한 또래의 주위 사람이 실패를 맛보고 떨어져 나가는 모습도 자주 보인다. 작은 실수들에 조금씩 내상을 입게 되면서 그런 두려움은 커져간다. 아무도 나에게 괜찮다,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해 줄 사람이 없어진다. 홀로 섰다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기댈 곳을 찾는 게 사람이다. 경제적인 독립을 위해 달리고 있지만 여전히 삶은 간당간당 외줄타기 같다. 마음도 지치고 몸도 지치는 나이가 되었지만 멈추면 쓰러지는 자전거처럼 계속 달린다. 둘 중 하나가 아닐까 겁먹는다. 지쳐 쓰러지거나 실패해 쓰러지거나···· 

 

"너···· 나 왜 좋아하는 줄 알아? 내가 불쌍해서 그래. 네가 불쌍하니까, 너처럼 불쌍한 나, 끌어안고 우는 거야."
"아저씬 나한테 왜 잘해줬는데요? 똑같은 거 아닌가? 우린 둘다 자기가 불쌍해요."

 

20대와 40대의 화해는 이렇게 서로의 슬픔과 고충을 알아가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로맨스가 아니다. 우리 사회가 끌어안고 가야 할 슬픔을 직시하고 그 안에서 서로의 기댈 곳이 되어 주려는 작은 움직임들이 필요하다. 서로의 상처를 치유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좀더 좋은 어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 이 드라마에 감사를 전한다.

 

"사람 알아버리면 그 사람이 무슨 짓을 해도 상관없어. 내가 널 알아."

 

이보다 멋진 엔딩이 어디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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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이의 친구 헤나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클레이에게는 보통 친구가 아니다. 약간의 밀당도 있었다. 어색하지만 키스도 했다. 풋풋한 사랑이라고 여길 수 있는 사이였다. 그런 친구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2017년에 나온 미국의 웹드라마 루머의 루머의 루머(13 Reasons Why)”는 클레이가 헤나의 자살 이유를 찾아가는 미스터리 드라마이다. 테이프에서 헤나가 자신의 죽음의 이유로 언급한 인물들은 헤나의 고등학교 시절을 슬픔과 외로움으로 몰아 넣은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 사람 중에는 주인공 클레이도 포함되었다. 클레이는 헤나의 자살 이유를 하나하나 알아가면서 주변 인물들에 대해 증오와 미움을 드러내면서도 자신이 왜 이 테이프에 언급되는지를 내내 두려워하며 진실을 향해 한발씩 다가간다. 클레이의 신경을 팽팽하게 당기는 그 긴장감이 이 드라마의 핵심이다. 

드라마 속 미국의 고등학교는 우리 고등학교와는 너무나 다르다. 수업 때마다 교실을 옮기고, 과목마다 함께 공부하는 학생이 달라진다. 교실 복도에 가득한 사물함과 거기서 벌어지는 남녀 학생들의 과도한 스킨십 등은 상상하기 어려운 모습이다. 부모가 없는 빈집에서 파티를 열어 술을 마시는 모습도 이질적이다. 미국의 고등학교라는 공간은 우리에게는 너무나 낯설고 공감하기 어려운 곳이다. 자극적인 화면도 많이 등장한다. 자살을 소재로 했지만 마약, 섹스, 폭력(강간 포함)은 이것이 정말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드라마가 맞는지 의심이 든다

이렇게 이질적인데도 불구하고 이야기는 우리를 빠져들게 한다. 공간이나 환경, 소재가 주는 이질감보다는 질풍노도의 청소년 시기에 겪을 수 있는 우정과 고독, 사랑과 미움, 믿음과 배신의 이야기가 통속성을 뛰어넘는 인과관계로 짜임새 있게 엮여 있다. 주요 갈등은 헤나를 둘러싼 인물들 사이의 사건과 그로 인해 퍼지는 오해와 소문이 학생들 사이에서 독버섯처럼 자라는 과정이다. 그리고 그것은 헤나의 깊고 깊은 상처로 이어지고 마침내 헤나는 쓰러진다. 헤나가 이겨내려고 애쓰면서 발버둥치는 모습과, 그런 헤나를 생각하며 때로는 분노하고, 때로는 절망하는 클레이의 모습에서 우리는 함께 감정이입이 된다. 

헤나 베이커. 그는 절망끝에 죽음을 선택하고 그 이유를 녹음으로 남겼다. 

헤나는 전학을 온 이후 적응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 과정에서 클레이를 알게 되었고 둘은 친해진다. 그런데 헤나에 대한 좋지 않은 소문이 퍼지기 시작하고, 헤나 주변의 인물들은 헤나를 멀리하기 시작한다. 극심한 외로움과 존재에 대한 환멸을 느낀 끝에 자신이 자살하는 이유를 테이프로 남기고 자살한다. 드라마는 그 테이프를 클레이가 받고 그가 들으면서 시작한다.

청소년 시기는 민감하다. 성에 대한 관심도 사람에 대한 관심도 높다. 그 둘의 경계가 때로는 모호해지고, 욕망에서 타오르는 충동이 쉽게 자아가 잠식된다. 아이들의 관심과 애정은 소문을 낳고 소문은 다시 재미가 되어 퍼진다. 악의적이지 않은 장난은, 그러나 누군가에게는 치명적이다. 말들이 무성한 세상이다. SNS는 손쉽게 글과 이미지를 생성하고 그것이 퍼져가면서 헛된 이야기를 만들어 내며 돌고돌아 마침내 이야기의 주인공의 가슴을 정면으로 조준해 명중시킨다.

헤나가 느낀 가장 큰 절망감, 세상에서 나라는 존재는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 어떤 사람과도 닿아 있지 않은 떨어진 끈 같은 존재감에서 오는 절망이었다드라마에서 헤나의 죽음은 학교의 방관 혹은 구조적 문제에 대한 논란으로 소송까지 이어진다. 시즌2의 주요 내용은 헤나의 죽음을 놓고 학교와 부모가 벌이는 재판이 주요한 배경이 된다

 

클레이는 헤나가 나긴 테이프에서 헤나의 죽음을 둘러싼 진실을 찾아간다.

 

우리나라는 OECD 자살률 1위의 불명예를 달고 있다. 청소년들의 주관적 행복지수는 OECD에서 가장 낮다. 우리나라 청소년의 첫 번째 자살 이유는 원인은 가정불화-가정문제가 제일 많다. 의외로 성적 문제는 세번째 이유. 우울증과 염세비관이 두 번째를 차지하고 있다. 오른쪽 자료가 2000년대 후반부터 2012년까지의 자살 청소년에 대한 분석이다. 벌써 10년전의 통계인만큼 지금과는 좀 다를 수도 있을 것이다.

청소년 자살 소식은 이제는 흔한 뉴스가 되어 버렸다. 삶의 문제에 있어 죽음을 염두할만큼 우리 아이들은 진지하다. 그러나 돌파구가 없는 캄캄한 암흑의 결투장을 만들어 놓은 건 우리 사회이며 나와 같은 어른들이다. 

'학교 폭력'이라는 말의 법률적 정의는 ""학교폭력"이란 학교 내외에서 학생을 대상으로 발생한 상해, 폭행, 감금, 협박, 약취·유인, 명예훼손·모욕, 공갈, 강요·강제적인 심부름 및 성폭력, 따돌림, 사이버 따돌림, 정보통신망을 이용한 음란·폭력 정보 등에 의하여 신체·정신 또는 재산상의 피해를 수반하는 행위"라고 분명하게 규정되어 있다.

"루머의 루머"시리즈에서도 이와 관련된 내용들이 끊임없이 헤나를 괴롭히고 결국 그를 되돌아올 수 없는 절벽에서 밀어버렸다. 헤나의 죽음을 둘러싼 진실은 아이들 사이에서 논란이 되고, 누군가는 죄책감에 빠져들고 누구는 분노에 사로잡힌다. 한 아이를 죽음으로 몰고 간 행동에 대한 책임을 아이들은 저마다의 삶의 무게로 짊어지고 나아갈 것이다. 

우리는 행동에는 결과가 따라온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무심코 올리는 포스팅 하나도, 누군가의 글에 다는 댓글 하나도 결과는 있다. 타인에 대한 무관심 역시 마땅한 결과를 발생시킨다. 타인을 향한 폭력적인 관심도, 상처받고 있는 타인에 대한 무관심도 언젠가는 우리가 짊어질 책임으로 다가올 것이다. 그때가서 나는 몰랐다고 해도, 그럴 의도가 아니었다고 해도 소용없다. 세상은 내가 살아 있는 한 삶의 존재에 대한 책임을 요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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