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부터 집을 나오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작년부터 새로운 집에서 홀로 살고 있다. 본가에서 멀지 않다. 사람들은 의아해한다. 직장이 멀어서, 혹은 결혼 때문에, 아니면 집이 멀리 이사가니까 등등의 이유가 아니면 독립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본가와 한동네라니 이상하게 볼만도 하다.
가족. 참 슬프고 억장이 내려앉는 말이다. 태어나자마자 속하게 되는 집단이고, 그 집단의 보호 아래 성장하고 자라왔으며, 이만큼 살아왔던 고마운 곳이다. 그러나 어떤 때는 그곳은 감옥이 된다. 내 말과 행동과 생각을 구속하는 일이 생긴다. 머리가 커지면서, 대가리에 피가 마른다는 어느 시점에서 가족이 나에게 던지는 말 한마디 한마디는 위로보다 상처가 될 때가 많다.

영화 <가족의 탄생>을 보며 입안이 텁텁해지는 건 왜일까. 엄마가 둘(친엄마는 없다)인 채연(정유미)과 아버지가 다른 누나 선경(공효진) 밑에서 자란 경석(봉태규)이 채연의 집에서 이룬 행복의 가능성의 근간에는 따뜻한 정과 이해, 그리고 믿음이 담겨 있다. 그것은 누구에게나 필요한 사랑의 공통된 감정일 것이다.

1년 반동안 집을 나와 살면서 조금씩 부모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주말마다 집에 가면 다를 것 없는 일상이 여전히 또아리 틀고 있는 분위기지만, 이해받기를 원해고 사랑해 주길 바라던 나는 변했다. 아니 그 떨어져 사는 기간동안 가족들도 조금씩 변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해체와 재생성, 나는 요즘 다시 집에 들어가 사는 걸 생각 중이다.

 
영화는 기차 안에서 만난 남녀로 시작한다. 처음 보는 남자에게 악수를 청하며 깜찍한 미소를 짓는 채연에게 경석은 흠뻑 빠져든다. “삶은 계란에는 사이다가 있어야” 한다며 넋두리를 풀어놓는 경석이 채연도 싫지 않다.
다시 영화는 억척스럽게 살아가는 미라(문소리)를 보여준다. 집 나간 뒤 5년 만에 찾아오는 남동생 소식에 설레는 미라는 정 많고 걱정 많고 일 많은 평범한 누이의 모습이다. 그런데 5년 만에 찾아온 형철(엄태웅)은 그렇지 않다. 이모 뻘 되는 여자 무신(고두심)을 아내라고 데리고 와 미라에게 태연하게 소개하지만 미라는 당혹스럽다. 게다가 무신의 전 남편의 전 부인의 아이가 찾아와 상황은 더욱 복잡해진다. 형철과 무신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무신이 어떤 사연이 있는 여자인지, 왜 미라는 결혼을 하지 않는지 짐작조차 되지 않는다. 다만 형철이라는 비뚫어진 가부장에 의해 삶이 이상하게 꼬인 무신과 미라만 있다.

다시 영화는 선경(공효진)을 비춘다. 선경은 유부남과 사랑에 빠져 아이까지 덜컥 나아버린 엄마가 밉다. 아무데나 정을 주고 상처받았던 엄마가, 그래서 함께 상처받은 자신의 과거가 싫었기 때문이다. 남자친구(류승범)와의 사랑도 쉽지 않다.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소리쳐 보지만 “변했다”는 말밖에는 없다. 변한 것은 선경일까, 아니면 사랑일까. 선경은 헷갈린다. 가족도 연인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이 땅을 떠나고 싶은 간절한 소망이 어렵게 어렵게 성사되기 일보직전 선경의 엄마가 세상을 뜬다. 엄마가 떠난 다음에야 엄마의 마음을 이해하게 된 선경. 그리고 남겨진 배다른 남동생. 선경은 떠나지 않기로 결심한다.

다시 영화는 처음 기차 안에 만난 남자와 여자의 이야기다. 유난하게도 모든 사람에게 잘 해주는 채연(정유미) 때문에 남자친구 경석(봉태규)은 괴롭기 그지없다. 경석은 누나의 조언을 듣고자 채연을 집으로 초대한다. 그러나 약속한 날 채연은 집나간 다른 남자의 아이를 찾아 헤매느라 경석의 집에 오지 못한다. 화가 난 경석이 채연에게 이별을 선언하고, 채연은 집으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싣는다. 여기까지 경석이가 쫓아와 다시 화해를 요청하지만 뜽금없이 채연에게 온 전화 때문에 다시 언성이 높아진다.

“네가 나에게 어떻게 그럴 수 있니?”
“사랑하잖아.”
 

채연의 집 앞에서 헤어질 찰나 집안에서 나온 미라가 경석을 발견한다. 여기까지 왔으니 집에서 밥이나 먹으라는 권유를 뿌리치기 위해 채연이 “우리 헤어졌어요.”라고 하지만, 미라는 “헤어지는 게 뭐라고. 밥은 먹고 가”라며 억지로 끌고 들어온다.

채연에게 엄마가 둘이다. 아빠는 없다. 그런데 두 엄마 모두 친엄마가 아니다. 그러나 이들은 가족이다. 채연의 ‘헤픈’ 정은 두 엄마가 준 정의 깊이였을 거다. 경석에게 가족은 누나 뿐이다. 어렸을 때 엄마가 죽었지만, 엄마에 대한 인상은 ‘구질구질’하다라는 거다. 그러나 누나는 “정이 많은 분”이라고 한다. 경석은 그런 정을 느끼지 못받고 살아왔다.

그렇게 ‘또 하나의 가족’이 탄생했다. S그룹이 말하는 가전제품들과의 가족 보다는 더 리얼하고, 어찌보면 황당하며, 그래도 따뜻한 사랑이 담겨 있는 가족의 탄생이다. 누가 주인공이라고 할 수 없이 배우 하나하나의 연기가 돋보였던, 정말 사랑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영화다.

 

- 연극 <콘트라베이스>(명계남의 모노드라마)를 보고

어느 누구나 자기가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살아가는 이유다. 콘트라베이스든, 첼로든, 팀파니든 각자가 고유한 역할과 소리가 어우러져 합중주든 오케스트라든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박수갈채를 받는 대표는 지휘자이거나 좀 더 나아가면 피아니스트나 바이올리니스트다. 이쯤 되면 다른 악기들의 불만도 있을 법하다. 왜 저들만 나서야 되냐구요~

그런 불만이 가장 큰 것은 콘트라베이스일 것이다. 하긴 그럴만한 게, 역대 유명 짜하다는 작곡가 중에 이 콘트라베이스를 위한 독주곡을 만들어 준 사람은, 없다! 현악기 중 가장 낮은 저음으로 오케스트라에 무게를 실어주고 중심과 기초를 튼튼하게 하는 악기인데 그 가치를 제대로 알아주는 작곡가들은 많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랬을까? 프랑스의 작가 파트리크 쥐스킨스가 이 무식하게 큰(총 길이 190cm) 녀석을 주인공으로 소설을 썼고, 한국의 괴짜 연극배우가 2시간여 동안 혼자 연기를 했다고 한다. 결국 음악 쪽에서 인정받지 못하다가 문학에서 등단하고 연극 무대에 서게 된 콘트라베이스, 이것을 울어야 하나 웃어야 하나.

그런데 신기한 것은 작가의 필력인지, 배우의 연기력 때문인지, 책은 불티나게 팔렸다고 하고 배우는 10년 만에 앙코르 공연을 다시 열고 있다. 이 놀라온 흡입력은 지옥 끝에서 울려나오는 우울한 저음의 콘트라베이스의 마음을 어여쁜 메조소프라노의 앳된 볼처럼 발갛게 달아오르게 만들 만하다. 평생 변변한 독주곡도 하나 가져보지 못한 콘트라베이스에게 이는 참으로 낯설고 황당한 경험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찌됐건 첼로와 비올라의 음을 구분하지 못하는 나로서는 이 기회를 통해 콘트라베이스가 제일 낮은 음이라는 것을 알게 됐으니, 콘트라베이스와 나의 경계는 조금씩 허물어져가고 있다. 그리고 오늘 나는 프랑스의 해괴한 작가 파트리크 쥐스킨스의 소설 <콘트라베이스>을 과감하게 인터넷 구매했다. 거금 4,800원!

어찌됐거나 참 재미있는 연극이었다. 이 연극을 보여준 K양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경직된 인간들은 다 불쌍해, 살아온 날들을 말해 주잖아.”

솔직히 말하면, 나도 경직된 인간이다. 그래서였는지, 경직된 인간들을 보면 난 항상 느꼈다. 어린 시절의 그늘들이 느껴졌다. 그 그늘을 만든 게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학창시절 만난 또래일 수도 있고, 가족일 수도 있다. 대학 시절에 만났던 많은 사람들 중에 그런 그늘을 가진 후배들이 있었다. 그 친구들을 만날 때면 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나처럼 살아왔겠구나 라는 슬픈 예감이었다. 

이지안(이지은 역)에 대해 박동훈(이선균 역)이 느꼈던 감정들은 어쩌면 연민의 감정과 맞닿아 있다. 인간이 다른 이에게 약점을 드러내는 것은 위험하다는 것을 어렸을 적부터 몸으로 배워 온 이지안은 주위 사람들에게 냉랭하고 불친절하게 대하면서 자기를 가리고 보호한다. 다시는 상처받지 않기 위해 찬 바람으로 자신을 보호하지만 오히려 그러한 행동들이 박동훈에게는 안쓰럽고 불쌍하게 다가왔다. 

연민의 마음은 인간 본성이지만, 그 연민을 모두가 느낄 수 있는 건 아니다. 연민은 또다른 연민과 맞닿을 때 의미있다. 때로 우울하고 깊이를 알 수 없는 슬픔에 잠길 때에도 가급적 감추고 함부로 꺼내 남에게 드러내지 못한다. 그럴려면 자존심이 나서서 머릿속에 수치심을 쏟아 붓는다. 그래서 연민은 동정과 다른 것이다. 연민은 연민을 알아보고 수치심의 수치를 낮추어 주며 자존심을 달래 준다. 나와 같은 인간, 나처럼 아픈 사람, 함께 아파할 사람...

박동훈은 위기에 처해 있다. 하루하루 숨 가쁘게 달려가지만 도저히 메꿔지지 않는 공허한 가슴 한쪽의 아픔들. 가족을 위해 살아오고 희생했다고 위로하지만 내 아들이 나처럼 살지 않기를 바라는 삶을 살아왔다는 자괴감. 다시 이렇게 살아도 될까라는 계속된 의문에 답을 할 수 없는 수렁에 빠진 인생. 나름의 전문성으로 대기업 부장까지 올라왔지만 아내는 잘 나가는 변호사가 되었고, 대학 후배가 대표이사로 발탁되어 들어왔다. 아내는 점점 일에 빠져서 가정이나 남편에게는 관심이 없다. 형과 동생마저 폐인이 되어 어머니 집에 의탁해 살아간다. 통장 잔고는 29만원밖에 없고, 집을 담보로 은행 대출을 받아 형제들 분식집이라도 차려주자는 엄마를 만류한 그 때, 어디서 누가 보낸지도 모르는 5천만원 어치 상품권 뇌물의 유혹. 

이지안은 지칠 수가 없다. 할머니 요양원 비용을 대고, 빚 독촉을 핑계로 괴롭히는 광일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밤낮을 제대로 누워보는 일도 없이 일을 한다. 접시닦이 일을 하는 곳에서 음식을 훔쳐와 저녁을 때우고, 회사 탕비실의 커피믹스를 훔쳐 불면의 밤을 만든다. 빚은 끝이 없고, 할머니 요양원 비용도 밀려서 야반도주를 해야 했다. 가난한 조손 가정이라고 도움을 주는 손길이 없었을까? 열심히 살아가는 지안의 모습을 안타깝게 봐준 이가 없었을까? 하지만 그것도 네 번까지. 이지안이 살인을 했었다는 과거를 알면 눈빛이 흔들리고 도망가 버렸다.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은 삶. 삼만 살을 살았는데도 자꾸 왜 태어나는지 모를 삶. 

 

상처 받은 아이들은 너무 일찍 커버려.
그래 보여. 걔 지난날들을 알아보기가 겁난다.

 

많은 사람들의 값싼 동정에 시달려 보았던 이지안은 그녀가 불쌍하다는 박동훈의 말에 욕을 한다. 복수를 생각한다. 이지안에게는 월 오륙백만 원씩 받으면서 출근하는 박동훈의 그 말이 마치 고양이 쥐 생각하는 것처럼 고깝게 여겨진다. 부족할 것 없는 박동훈이 매일같이 지옥에 끌려가는 인상을 쓰는 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박동훈에게 배달된 뇌물 봉투를 훔치고, 그를 회사에서 쫓아내려는 도준영의 음모를 돕는 것도 이지안에게는 생존을 위한 지옥 같은 삶의 연장일 뿐이다. 박동훈의 삶은 그에게 의미 없다. 

박동훈은 우연히 만난 이지안이 홀로 할머니를 모시고 산다는 것을 알게 됐다. 억척같이 살아가면서도 할머니를 정성스럽게 모시는 이지안의 모습은 착하다. 싸가지없이 굴지만 지안의 깊은 곳에 있는 측은지심의 마음을 박동훈이 알았다. 이지안을 돕고 그녀의 과거를 연민의 마음으로 알아간다. 언제부터인지 확실하지 않지만, 이지안이 사람을 죽였다는 걸 박동훈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아는 척하지 않고,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는다. 

 

 

모른 척 해 줄게. 너에 대해서 무슨 이야기를 들어도, 모른 척 해 줄게. 약속해 주라. 너도 모른 척 해 준다고. 겁나. 너는 말 안 해도 다 알 것 같아서···· 
그러면 누가 알 때까지 무서울 텐데, 누가 알까···· 만나는 사람마다 이 사람은 언제쯤 알게 될까, 혹시 벌써 알고 있나···· 어쩔 땐 이렇게 평생 불안하게 사느니 그냥 세상 사람들 다 알게 광화문 전광판에 떴으면 좋겠던데···· 

 

처음 이선균, 이지은 주연에 <나의 아저씨>라니! 오해받기 딱 좋았다. 드라마 안에서도 그랬지만 드라마 밖에서는 더욱 시끄러웠다. 아저씨와 어린 소녀의 사랑? <도깨비>가 대박을 내니 판타지가 아닌 현실 내용으로 재탕하려는 것이냐는 비난도 있었다. 나 역시 그런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삐닥하게 본 것이다. 시리즈가 전개된던 시기에는 프로젝트 작업으로 한창 바쁠 때여서 못 보다가, 아내의 시청 평이 워낙 좋아 나중에 보자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야 봤다. 이런 드라마를 지금에서야 보다니 내가 나쁜 아저씨다. 

좋은 이야기는 스스로의 삶을 돌아보게 한다. 이 드라마의 박동훈은 나의 삶을 돌아보게 했고, 나는 박동훈과 박상훈(맏이)과 박기훈(막내)의 어디쯤에 있는 아무개라고 생각할만큼 인물들에 공감했다. 때로는 박상훈처럼 지질하고 눈물 많고 겁도 많은 데다 개저씨 같을 때도 있고, 어떨 때는 개폼 잡으며 큰소리치고 싶은 박기훈 같은 면도 있다. 나름 회사 중간 간부라는 직책에 회사-집-회사 외에는 별 볼 일 없이 사는 박동훈 같은 면도 있다. 

하지만 박상훈의 인간성에는 부족하고, 박기훈의 용기에는 못미치고, 박동훈의 실력과도 거리가 멀다. 드라마는 판타지라지만 열패감이 드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 그럼에도 볼수록 빠져드는 매력에 정신줄을 놓아버릴 것만 같았다. 드라마를 보면서 저 세 형제보다 못하다는 열패감은 깊어졌지만, 더 나아질 수 있다는 기대감은 그것을 상쇄할 만큼 거대해졌다. 희망이 보이는 삶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다···· 그말을 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없어.

 

어른이 되면 홀로서야 한다. 행동에 책임져야 하는 것이다. 처음 책임질 일을 맡아서 진행할 때의 그 두려움을 기억해 보자. 실패하면 어떻게 할까, 두려움에 떨었던 일들이 엊그제 같았는데, 어느새 큰 프로젝트일들을 여러 사람을 지휘하며 해내고 있다. 그렇지만 두려움은 항상 등 뒤에 따라온다. 

게다가 비슷한 또래의 주위 사람이 실패를 맛보고 떨어져 나가는 모습도 자주 보인다. 작은 실수들에 조금씩 내상을 입게 되면서 그런 두려움은 커져간다. 아무도 나에게 괜찮다,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해 줄 사람이 없어진다. 홀로 섰다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기댈 곳을 찾는 게 사람이다. 경제적인 독립을 위해 달리고 있지만 여전히 삶은 간당간당 외줄타기 같다. 마음도 지치고 몸도 지치는 나이가 되었지만 멈추면 쓰러지는 자전거처럼 계속 달린다. 둘 중 하나가 아닐까 겁먹는다. 지쳐 쓰러지거나 실패해 쓰러지거나···· 

 

"너···· 나 왜 좋아하는 줄 알아? 내가 불쌍해서 그래. 네가 불쌍하니까, 너처럼 불쌍한 나, 끌어안고 우는 거야."
"아저씬 나한테 왜 잘해줬는데요? 똑같은 거 아닌가? 우린 둘다 자기가 불쌍해요."

 

20대와 40대의 화해는 이렇게 서로의 슬픔과 고충을 알아가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로맨스가 아니다. 우리 사회가 끌어안고 가야 할 슬픔을 직시하고 그 안에서 서로의 기댈 곳이 되어 주려는 작은 움직임들이 필요하다. 서로의 상처를 치유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좀더 좋은 어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 이 드라마에 감사를 전한다.

 

"사람 알아버리면 그 사람이 무슨 짓을 해도 상관없어. 내가 널 알아."

 

이보다 멋진 엔딩이 어디 있을까?

 

 

클레이의 친구 헤나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클레이에게는 보통 친구가 아니다. 약간의 밀당도 있었다. 어색하지만 키스도 했다. 풋풋한 사랑이라고 여길 수 있는 사이였다. 그런 친구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2017년에 나온 미국의 웹드라마 루머의 루머의 루머(13 Reasons Why)”는 클레이가 헤나의 자살 이유를 찾아가는 미스터리 드라마이다. 테이프에서 헤나가 자신의 죽음의 이유로 언급한 인물들은 헤나의 고등학교 시절을 슬픔과 외로움으로 몰아 넣은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 사람 중에는 주인공 클레이도 포함되었다. 클레이는 헤나의 자살 이유를 하나하나 알아가면서 주변 인물들에 대해 증오와 미움을 드러내면서도 자신이 왜 이 테이프에 언급되는지를 내내 두려워하며 진실을 향해 한발씩 다가간다. 클레이의 신경을 팽팽하게 당기는 그 긴장감이 이 드라마의 핵심이다. 

드라마 속 미국의 고등학교는 우리 고등학교와는 너무나 다르다. 수업 때마다 교실을 옮기고, 과목마다 함께 공부하는 학생이 달라진다. 교실 복도에 가득한 사물함과 거기서 벌어지는 남녀 학생들의 과도한 스킨십 등은 상상하기 어려운 모습이다. 부모가 없는 빈집에서 파티를 열어 술을 마시는 모습도 이질적이다. 미국의 고등학교라는 공간은 우리에게는 너무나 낯설고 공감하기 어려운 곳이다. 자극적인 화면도 많이 등장한다. 자살을 소재로 했지만 마약, 섹스, 폭력(강간 포함)은 이것이 정말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드라마가 맞는지 의심이 든다

이렇게 이질적인데도 불구하고 이야기는 우리를 빠져들게 한다. 공간이나 환경, 소재가 주는 이질감보다는 질풍노도의 청소년 시기에 겪을 수 있는 우정과 고독, 사랑과 미움, 믿음과 배신의 이야기가 통속성을 뛰어넘는 인과관계로 짜임새 있게 엮여 있다. 주요 갈등은 헤나를 둘러싼 인물들 사이의 사건과 그로 인해 퍼지는 오해와 소문이 학생들 사이에서 독버섯처럼 자라는 과정이다. 그리고 그것은 헤나의 깊고 깊은 상처로 이어지고 마침내 헤나는 쓰러진다. 헤나가 이겨내려고 애쓰면서 발버둥치는 모습과, 그런 헤나를 생각하며 때로는 분노하고, 때로는 절망하는 클레이의 모습에서 우리는 함께 감정이입이 된다. 

헤나 베이커. 그는 절망끝에 죽음을 선택하고 그 이유를 녹음으로 남겼다. 

헤나는 전학을 온 이후 적응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 과정에서 클레이를 알게 되었고 둘은 친해진다. 그런데 헤나에 대한 좋지 않은 소문이 퍼지기 시작하고, 헤나 주변의 인물들은 헤나를 멀리하기 시작한다. 극심한 외로움과 존재에 대한 환멸을 느낀 끝에 자신이 자살하는 이유를 테이프로 남기고 자살한다. 드라마는 그 테이프를 클레이가 받고 그가 들으면서 시작한다.

청소년 시기는 민감하다. 성에 대한 관심도 사람에 대한 관심도 높다. 그 둘의 경계가 때로는 모호해지고, 욕망에서 타오르는 충동이 쉽게 자아가 잠식된다. 아이들의 관심과 애정은 소문을 낳고 소문은 다시 재미가 되어 퍼진다. 악의적이지 않은 장난은, 그러나 누군가에게는 치명적이다. 말들이 무성한 세상이다. SNS는 손쉽게 글과 이미지를 생성하고 그것이 퍼져가면서 헛된 이야기를 만들어 내며 돌고돌아 마침내 이야기의 주인공의 가슴을 정면으로 조준해 명중시킨다.

헤나가 느낀 가장 큰 절망감, 세상에서 나라는 존재는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 어떤 사람과도 닿아 있지 않은 떨어진 끈 같은 존재감에서 오는 절망이었다드라마에서 헤나의 죽음은 학교의 방관 혹은 구조적 문제에 대한 논란으로 소송까지 이어진다. 시즌2의 주요 내용은 헤나의 죽음을 놓고 학교와 부모가 벌이는 재판이 주요한 배경이 된다

 

클레이는 헤나가 나긴 테이프에서 헤나의 죽음을 둘러싼 진실을 찾아간다.

 

우리나라는 OECD 자살률 1위의 불명예를 달고 있다. 청소년들의 주관적 행복지수는 OECD에서 가장 낮다. 우리나라 청소년의 첫 번째 자살 이유는 원인은 가정불화-가정문제가 제일 많다. 의외로 성적 문제는 세번째 이유. 우울증과 염세비관이 두 번째를 차지하고 있다. 오른쪽 자료가 2000년대 후반부터 2012년까지의 자살 청소년에 대한 분석이다. 벌써 10년전의 통계인만큼 지금과는 좀 다를 수도 있을 것이다.

청소년 자살 소식은 이제는 흔한 뉴스가 되어 버렸다. 삶의 문제에 있어 죽음을 염두할만큼 우리 아이들은 진지하다. 그러나 돌파구가 없는 캄캄한 암흑의 결투장을 만들어 놓은 건 우리 사회이며 나와 같은 어른들이다. 

'학교 폭력'이라는 말의 법률적 정의는 ""학교폭력"이란 학교 내외에서 학생을 대상으로 발생한 상해, 폭행, 감금, 협박, 약취·유인, 명예훼손·모욕, 공갈, 강요·강제적인 심부름 및 성폭력, 따돌림, 사이버 따돌림, 정보통신망을 이용한 음란·폭력 정보 등에 의하여 신체·정신 또는 재산상의 피해를 수반하는 행위"라고 분명하게 규정되어 있다.

"루머의 루머"시리즈에서도 이와 관련된 내용들이 끊임없이 헤나를 괴롭히고 결국 그를 되돌아올 수 없는 절벽에서 밀어버렸다. 헤나의 죽음을 둘러싼 진실은 아이들 사이에서 논란이 되고, 누군가는 죄책감에 빠져들고 누구는 분노에 사로잡힌다. 한 아이를 죽음으로 몰고 간 행동에 대한 책임을 아이들은 저마다의 삶의 무게로 짊어지고 나아갈 것이다. 

우리는 행동에는 결과가 따라온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무심코 올리는 포스팅 하나도, 누군가의 글에 다는 댓글 하나도 결과는 있다. 타인에 대한 무관심 역시 마땅한 결과를 발생시킨다. 타인을 향한 폭력적인 관심도, 상처받고 있는 타인에 대한 무관심도 언젠가는 우리가 짊어질 책임으로 다가올 것이다. 그때가서 나는 몰랐다고 해도, 그럴 의도가 아니었다고 해도 소용없다. 세상은 내가 살아 있는 한 삶의 존재에 대한 책임을 요구할 것이다. 

 



시대가 변하면서 청춘의 문제도 바뀐다. 난 지금의 청춘을 모른다. 관심이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안다고 나서는 게 더 볼품없는 일이다. 문제를 안다면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실천을 해야 할 텐데, 그 실천과는 관계 없는 삶을 살고 있다. 어느덧 중년을 넘어가다 보니 조직 내에서의 위치 역시 청춘을 이용해 삶을 연명하는 건 아닌지 하는 자괴감도 없지 않다. 거대한 시스템의 챗바퀴에 어느 누구는 깔리거나 힘겹게 돌리고 있다면, 난 그 챗바퀴에 올라타거나 손쉽게 밀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편안한 삶일까? 그럴리가 있나. 나 또한 거대한 시스템의 모순 속에서 살아가는 한낱 나사일 뿐인데 말이다. 살아 있다는 것에 만족하고, 선택적 가난이라고 위안하면서 지금에 만족하고 있는 삶이다. 나이가 있으니 상처들은 딱딱하게 굳어 갑옷이 되었고, 얼굴에 핀 주름들은 속마음을 감추는 가면이 되어 준다. 아이의 재롱과 가족의 편안함이 작은 위로가 된다. 그렇다. 현재의 시스템을 바꾸고 싶은 마음이 없다. 내 청춘은 그렇게 게으른 중년이 되었다. 살면서 쥐꼬리만큼 쌓아온 것들에 의지하면서 스스로 치유하는 힘은 점점 사라져가는 나이가 되고 있다. 난 다른 삶을 꿈꾸지 못한지 오래됐다.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스스로를 치유하는 힘이 있다. 초식 동물들은 상한 과일이나 버섯으로 중독되었을 때 그것을 치유할 풀을 찾아 씹어 먹는다. 맹수들도 영역 다툼의 과정에서 다친 상처들을 자신의 혀로 핥아가며 다음 싸움을 기다린다. 모름지기 살아 있는 생물들은 유전자 속에 깊이 간직된, 자신의 어미와 아비로부터 이어받았을 그 고갱이의 흔적으로 스스로를 치유하고 상처를 이겨낸다. 


사람도 다친다. 눈에 보이는 상처나 분명하게 나타나는 통증은 병원에 가서 치료한다. 그러면 대개는 낫는다. 하지만 세상이 복잡해지고, 사람과 사람 사이가 얽히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상처, 잘 드러나지 않는 통증들이 나타났다. 이 상처와 통증들은 사람의 마음을 갉아먹었다. 공허와 분노, 상실감과 허무함만이 남아 먹어도 채워지지 않은 허기와, 마셔도 가셔지지 않는 갈증, 자도 자도 끝이 없는 불면의 고통을 헤매이게 된다. 


아직 익숙지 않은 이 시대의 상처와 치유들은 어떻게 극복될까? 영화 <리틀 포레스트>는 이 마음에 난 상처와 통증들의 치유 과정을 담아 내고 있다. 그러면서 우리들에게도 스스로의 마음을 치유하고 통증을 가시게 할 자신만의 방법을 찾아가라고 속삭이고 있다. 영화 속에서 담아낸 치유의 기술들을 살펴보자. 


음식.

영화 속에서 주인공 혜원은 끊임없이 음식을 만들어 낸다. 집에 들어온 순간부터 굶주려 있던 배를 채우기 위해 밥을 짓고 국을 끓여낸다. 국에 밥을 말아 훌훌 들이키는 단촐한 식사였다. 하지만 그가 도시에서 먹었던 컵밥과 편의점 간편 음식들과 비교할 수 없다. 도망치듯 내려온 고향집에서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음식을 지어 주린 배를 채운 것이다. 도시에서 채울 수 없었던 몸과 마음의 허기를 시골 고향집에서 갓지은 밥과 국에서 해소한 것이다.  


농사. 

여름날 밭에서 일하던 혜원의 목덜미를 흐르던 땀방울들은 영롱하게 빛났다. 혜원은 도시에서 편의점 알바를 비롯해 끊임없이 일하며 공부도 하고 생계도 유지해야 했다. 노동의 가치를 따지는 건 한가로운 몽상가들에게나 어울릴 말이었다. 그런데 혜원에게 농촌에서의 노동은 달랐다. 돈을 벌기 위해 했던 도시의 노동과 먹거리를 얻기 위해 지은 농사는 자본주의적 가치로 따지자면 비교가 안되겠지만, 노동의 가치에서 농사는 달랐다. 한여름 뙤약볕 아래에서 텃밭의 농작물들을 위해 구슬땀을 흘리며 잡초를 뽑았고, 밤새 휘몰아친 폭풍으로 쓰러진 벼들을 허리가 끊어질 듯 아플 때까지 묶어 세웠다. 이 농사일은 온전히 그에게 돌아와 먹을거리가 되어 주고 주린 배를 채워주었다. 잊기 위해 시작한 농사일이 잊을 수 없는 충만함으로 돌아왔을 때 혜원은 결심을 굳히게 된다. 


엄마.

혜원의 엄마는 혜원이 대학에 합격하자 먼저 고향집을 떠났다. 그리고 어디로 갔는지 소식도 전하지 않았다. 하지만 혜원이 집에 돌아오자 감자 요리 레시피를 혜원에게 보낸다. 여기에 자신의 신상에 대한 내용은 전혀 없었다. 맛있게 요리하는 법, 오직 그것만을 알려주고 있다. 도시에 있을 때는 소식 한 번 주고받지 않았던 엄마가, 혜원이 시골집에 내려온 것을 어떻게 알고 혜원에게 편지를 보냈을까. 그리고 요리법이라니... 엄마는 여전히 기다리고 있었다. 걸음마를 시작하는 아이들은 넘어지기 마련이다. 넘어진 아이는 스스로 일어서는 법을 배운다. 이제 막 고등학교를 졸업한 딸에게 홀로서기를 강요하며 집을 나간 엄마는 도시 생활에 지친 딸이 집으로 돌아오자 감자 레시피로 맞아주었다. 엄마는 넘어진 딸이 고향집에서 일어서기를 기다린 것이다. 딸 혜원이 스스로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고 통증을 이겨낼 수 있는 길을 찾기를 기다렸다. 그 방법은 이미 엄마가 오랜 세월 동안 전수한 것, 요리. 어린 혜원에게 엄마는 두려움과 공포 속에서 기댈 존재였다. 사춘기를 지나면서 엄마는 넘어서야 할 대상이 되었다. 엄마가 먼저 떠났고, 혜원도 고향집을 떠났다. 하지만 다시 고향집에 돌아왔을 때, 혜원에게 엄마는 어떤 존재일까? 




영화는 스스로를 치유하며 진정한 홀로서기로 나아가는 젊은이의 과정을 그리고 있다. 여전히 쫄아들어 있는 나는 이 영화가 참 좋다. 누구에게나 부모에게서 알게 모르게 배운 치유의 기술이 있다. 나에게는 무엇이 있을까?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하지만 찾아보고 싶다. 이 영화가 그렇게 나를 자극했다. 유난히 추웠던 이 겨울의 끝, 기다리던 봄의 초입에서 만난 영화 <리틀 포레스트>는 내 안의 상처와 통증을 다시 되돌아보게 하는 정말 좋은 영화였다. 






1. 줄거리                    

11살 빌리는 영국 북부의 탄광촌에서 살고 있다. 아버지는 이곳에서 대대로 광부로 일해 왔고, 형 역시 광부이다. 하지만 광부들은 광산을 폐업하고자 하는 정부에 맞서 파업에 들어갔으며 경찰들과 대립하면서 힘겨운 나날을 이어가고 있었다. 아버지는 빌리를 체육관에 보내 권투를 배우게 하지만 정작 빌리는 발레를 하는 모습에 빠져들고 만다. 우연히 발레를 배우기 시작한 빌리는 점차 발레만의 매력에 빠져들었고, 발레 선생님 윌킨슨 부인은 빌리의 재능을 발견하고 그를 로열 발레단 학교에 보내고자 한다.

그러나 빌리가 발레를 배운다는 사실을 알게 된 형과 아버지는 남자는 발레가 아니라 권투나 축구를 해야 한다며 체육관 출입을 금지시키고, 더 이상 50펜스의 강습비도 주지 않는다. 그러나 빌리 안에 숨겨져 있던 재능은 감출 수가 없었다. 성탄절날 빌리가 자신의 친구 마이클에게 체육관에서 춤을 가르쳐 주고 있는 모습을 아버지가 보게 된다. 여기서 빌리는 아버지 앞에서 자신 안에 숨겨둔 춤에 대한 열정과 끼를 마음껏 펼친다. 아버지는 비로소 빌리에게 있는 재능을 키워주어야 한다고 마음을 바꾼다. 그리고 자신의 신념을 버리고 비겁자의 오명을 뒤집어쓰면서 빌리의 오디션 비용을 벌기 위해 일터로 향한다. 이런 아버지를 말리던 형 토니 역시 아버지의 진심을 알고 빌리를 돕기 위해 나선다.

빌리는 그렇게 주위의 도움과 가족의 희망을 안고 로얄 발레단 학교의 오디션을 본다. 그리고 기다리던 합격 통지서를 받아 학교에 입학한다. 그 와중에 파업은 노동조합의 패배로 끝나고 아버지를 비롯한 노동자들은 다시 광산으로 향한다.

시간이 흘러 빌리는 국립발레단의 공연 ‘백조의 호수’의 주인공이 되어 무대를 날아오른다. 첫 무대에서 아버지와 형, 친구 마이클도 참석해 그의 뜻깊은 첫 주연 공연을 지켜본다.




2. 첨삭하면 쉬워지는 교과서            

 ① 몸짓으로 표현되는 아름다움

인류가 지구상에 나타난 이후 말을 사용하기 전에는 손짓, 몸짓, 표정으로 의사를 전달했다. 이런 행동 점차 신에게 기원하는 수단으로, 축제 자리에서 흥을 돋우는 수단으로, 전쟁과 사냥을 준비하기 위한 단련의 수단으로 발전한다. 이처럼 무용은 다른 예술 장르와 달리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 마임과 호흡의 강약, 신체의 움직임을 표현 기교로 사용한다.

심미 표현 활동은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아름다운 움직임으로 표현하는 체험을 통하여 즐거움을 느끼는 활동이다. 또한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아름답게 표현하는 경험은 정서적인 안정을 가져올 뿐만 아니라 평상시에 경험해 보지 못한 예술적 창의력과 감상 능력을 높여준다.


심사위원: 춤을 추면 어떠니?

빌리: 춤을 추면 그냥 기분이 좋아요. 모든 걸 잊게 되요. 다 사라져버려요. 내몸 전체가 변하는 기분이죠. 마치 몸에 불이 붙어 변해 한 마리 새가 된 것 같아요. 전기처럼…








영화에서 빌리가 처음 발레에 빠진 것은 엄마의 피아노로 익힌 리듬감과 체육관에서 본 발레 동작의 역동성에 있다. 빌리는 발레 음악에 맞추어 자신도 모르게 복싱 경기 중 춤을 추었고 그 때문에 처음 링에 올라온 친구에게 한방 맞고 쓰러지면서 스스로 복싱에 재능이 없음을 깨닫는다. 그의 이런 경험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었다. 아버지나 형과의 갈등 상황에서도 그는 언어로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춤으로 혼자 승화시킨다. 발레 학교의 오디션에서도 그는 춤을 배우게 된 계기나 춤 추는 이유 등에 대해 제대로 된 표현을 못해 관객을 답답하게 하지만, 그것은 실상 아직 어린 나이의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예술적 본능에 대한 질문이었다. 대신 춤 출때의 기분에 대해 그는 ‘자신이 사라지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그가 할 수 있는 최대치의 표현이었지만, 그가 추는 춤만큼 제대로 된 표현이라고 할 수 있을까?

김혜리 영화 평론가는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아역배우의 깜직한 춤 솜씨보다 강한 힘으로 관객을 잡아끄는 것은 예술의 품에 안긴 어린 영혼의 멈칫거림. 아직 그의 피를 요동치게 하는 기운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빌리의 가슴은 리듬이 그를 들어 올릴 때마다 성취나 정복의 쾌감이 아닌 자아 소멸의 해방감에 수줍게 떨린다.”(원문 가기)


② 편견에 대한 거부

스포츠에서의 양성평등은 기존의 편견이나 고정관념과의 싸움이었다. 영화 ‘밀리언달러 베이비’에서 보듯 전통적인 스포츠에서 여성의 참여는 배제되거나 터부시되었다. 이는 사회현상의 다양성과 진보적 발전에도 불구하고 특정한 성별에 따른 우위적 사고가 오늘날의 사회적 가치와 규범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다. 복싱만 하더라도 올림픽에서 여성 종목이 정식을 채택된 것은 2012년 런던 올림픽에서부터였다. 하지만 반대로 리듬체조나 싱크로나이즈드스위밍 등 여성성이 강조되는 스포츠에서는 남성의 참여가 배제되는 현상도 있다.

스포츠에서의 성차별적인 편견이나 고정관념은 인간의 성적 행동에 대한 오래된 통념적인 가치나 사고가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남성은 남성의 가치를 보존하고 표출하기 위하여 강하거나 거친 스포츠를, 여성은 여성의 가치를 보존하기 위해 부드럽고 아름다운 스포츠를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정리할 수 있다.

이러한 편견과 고정관념은 영화 속에서는 동성애와 만나면서 보다 뚜렷하게 드러난다. 치마를 입고 화장을 하는 동성 친구 마이클을 보면서 빌리는 자연스럽게 그런 가치나 취향을 존중하고 자신이 발레를 좋아하는 것 역시 그저 취향과 가치일 뿐이라며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것이다.

이처럼 성차별은 정형화된 사회의 가치관 속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되어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을 말하며 이를 깨는 과정은 그런 정형화된 가치관에 대해 다르게 바라보는 관점을 가지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아빠: 발레?

빌리: 발레가 어때서요?

<중략>

아빠: 그래, 할머니한테는 그렇지 여자들에겐, 사내들은 아냐. 사내들은 축구나 권투나, 레슬링을 하는 거야. 빌어먹을 발레는 안 해.

<중략>

빌리: 호모나 하는 게 아니에요, 아빠. 발레 무용수는 운동선수만큼 단단하다고요. 웨인 슬립을 보세요. 그 사람도 발레 무용수잖아요. 













③ 발레에 대하여

발레의 동작들이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원리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첫째, 서두르지 않고 부드럽게, 우아하게 표현해야 한다. 둘째, 신체 라인은 어느 각도에서 보아도 아름답게 보이도록 움직임 요소를 음악에 맞추어 표현해야 한다. 셋째, 상체와 하체의 연결과 얼굴 표정이나 손끝의 모양까지 조화롭게 표현해야 한다. 넷째, 무중력의 환상을 만들어 내기 위해 발끝으로 서는 동작, 도약, 회전, 점프 등의 기술을 표현할 때에도 공중에 떠 있는 듯하게 표현해야 한다. 



윌킨스 부인: 어디 보자. 하나, 둘, 셋, 넷, 다섯. 정지. 움직이지 말고. 어디 좀 볼까? 뒤꿈치 빼고, 엉덩이 내리고, 좋아. 다리 선이 곧군. 굴곡도 좋고. 다리를 밖으로 돌려봐. 좋아.








영화 속에서 빌리가 윌킨스 선생님과 부둣가에서 듣는 음악은 차이코프스키의 ‘백조의 호수’였고, 빌리가 성인이 되어 첫 주연 공연에 나선 것도 ‘백조의 호수’였다. ‘백조의 호수’는 19세기 유럽의 발레가 쇠퇴하면서 러시아에서 발레가 전성기를 맞이하던 시기에 발표된 작품이다. 이 당시 토슈즈의 발전으로 높은 도약과 빠른 회전이 가능해졌으며 치마(튀뤼)는 더욱 짧아지게 되었다. 이 시기를 ‘고전주의 발레’라고 하며 대표적인 작품으로 ‘잠자는 숲속의 미녀’, ‘백조의 호수’, ‘인도의 무희’ 등이 있다.


◎발레의 기본 동작 익히기

고전 발레는 발의 표현을 상반신의 표현보다 중시하여 걷고, 뛰고, 회전하는 스텝 동작의 패턴이 엄격하게 정해져 있다.

- 다리와 팔 동작: 발레의 발 포지션은 제1, 2, 3, 4, 5번 동작으로 나뉘어지며, 팔 동작에는 앙바, 앙아방, 알라스꽁드, 앙오가 있다. 보통 팔과 다리의 동작을 분리하여 연습한 후 팔과 다리를 같이 연결하여 동작을 실시한다.



▲ 다리 동작


▲ 팔 동작


- 바 동작: 바에서의 연습은 동작의 평형을 유지하고 완전한 신체를 조절하기 위해 필요하다.


▲ 발끝이 바닥에서 떨어지지 않고, 밀었다 돌아오는 동작이다.


▲ 무릎을 굽히는 동작으로, 허벅지와 관련 된 근력을 기르기 위한 활동이다.



▲ 허리를 곧게 펴고 힘을 뺀 상태에서 시선 은 팔 움직임과 같이 한다.


작품 감상- 백조의 호수 |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발레 음악 중의 하나로 꼽히는 ‘백조의 호수’는 오늘날 음악 자체만으로도 널리 연주되는 발레 음악의 백미이다. ‘백조의 호수’는 발레리나가 한 무대에서 완전히 상반된 캐릭터를 동시에 보여 주어야 한다. 2막 호숫가 전경에서 지그프리트를 만난 백조가 공포에 떠는 몸짓, 점차 사랑을 느끼는 두 사람의 우아하고 고전적인 아다지오를 펼치다가 3막에서는 지그프리트를 유혹하는 오딜로 일순간에 변신해야 한다. 


3. 수업 활용 방안          

 - 발레에서 남성 무용수를 ‘발레리노’라고 부른다. 세계적인 발레리노에 대해 조사해 보자.

 - 유튜브 등을 통해 ‘백조의 호수’를 감상해 보고, 그 느낌을 정리해 보자.

- 영화 ‘밀리언달레 베이비’에서 발견할 수 있는 양성평등의 문제를 찾아내고 ‘빌리 엘리어트’와 비교해 보자.


참고문헌

 - 중학교 체육 교과서, 정철수 외, 금성출판사, 2013.

 - 스포츠 영화 속에 나타난 양성평등의 교육적 의미 탐구, 이기천, 한국스포츠교육학회지, 2006

 - 영화야 미안해, 김혜리, 씨네21, 2007

 - 사진: 네이버, 금성출판사 / - 동영상: 다음





빌리 엘리어트 (2001)

Billy Elliot 
9.4
감독
스티븐 달드리
출연
제이미 벨, 진 헤이우드, 제이미 드레이븐, 게리 루이스, 스튜어트 웰스
정보
코미디, 드라마 | 영국, 프랑스 | 109 분 | 2001-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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