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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젝트 헤일메리>가 증명한 SF의 진화

 

     내 젊은 시절 SF는 은하계를 누비는 은하철도 999나 인간과 구별되지 않는 로봇이 지구를 지배하는 터미네이터 또는 생명과학을 이용해 인간과 너무나도 흡사한 괴물을 만들어 내는 미친 과학자 이야기인 프랑켄슈타인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런 이야기에서 던지는 '무엇이 인간적인가'라는 질문은 철학적 생각거리를 던져 이야기를 살리는 주요 레시피 중 하나인 셈이다. 아시모프(로봇 3원칙, <I, Robot>)나 클라크("충분히 발달한 과학 기술은 마법과 구분할 수 없다")의 시대엔 과학이 알 수 없는 미래와 인간관을 받치는 '배경'이었다면, 앤디 위어의 소설 <프로젝트 헤일메리>는 현대 SF의 결이 너무나도 다름을 보여 준다. 번뜩이는 가설과 치밀한 검증의 과정이 스펙터클 하게 펼쳐지는 과학은 액션 스릴러를 넘어서는 재미다. 과학, 너 이렇게 섹시해? 과학자가 이렇게 멋져도 되는 거야?

낭만의 시대에서 '공학'의 시대로

      과거의 SF가 “우주는 경이로운 미지의 영역이다”, “인간성 상실의 미래는 암울하다 라며 독자를 미지의 세계로 유영하게 만들었다면, 최근의 SF는 “그래서 11광년 떨어진 별까지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라고 묻는다. <프로젝트 헤일메리>의 주인공 그레이스에게 낭만 따윈 없다.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자마자 자신의 이름도 기억나지 않으면서 내가 타고 있는 우주선이 어디에 있는지, 중력이 얼마인지부터 확인한다. 과거의 SF 주인공이 우주선 창밖을 보며 사색에 잠기고 인간성에 대해 회의할 때, 현대의 주인공은 우주선 벽에 보드 마커펜으로 미적분 방정식을 갈겨쓰며 생존 방법을 찾는다. '우주 미아'라는 설정은 같지만, 대처하는 방식이 '철학'에서 '공학'으로 진화한 것이다. 계속해서 닥쳐오는 위기 때마다 과학적 가설과 이를 증명하는 방법을 통해 해법을 마련한다.

 

"내가 누구지?"… 기억상실과 과학적 퍼즐 맞추기

      소설의 도입부, 주인공 그레이스는 혼수상태에서 깨어난다. 주위엔 알 수 없는 시체만 있고, 몸은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데다 발음까지 이상하다.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난다. 보통의 드라마라면 여기서 뜬금없는 가족애를 떠올리며 울겠지만, 우리의 주인공은 다르다. 그는 본능적으로 주변 기기들을 뜯어보고,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고, 우주선에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중력 가속도를 측정하기 시작한다. 이 과정을 보며 ‘와, 나라면 일단 울면서 문부터 두드렸을 텐데, 이 사람은 물리 법칙부터 확인하네?’라고 했을 것이다. 자신의 기억을 되찾아가는 과정이 마치 최고 난도의 고급 방탈출 게임을 지켜보는 듯한 쾌감을 준다. 아니, 우주 한복판에서 방탈출 게임? 나가면 어디? 

 

과학은 '장식'이 아니라 '서사' 그 자체

      과거 SF가 과학을 다룰 때, 독자들은 작가가 정해준 과학적 사실을 그냥 받아들이거나 상상의 나래 한껏 펼치기 위한 도구였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독자들도 인터넷으로 최신 물리 가설을 꿰고 있다. SF를 좀 안다는 독자들에게 양자역학과 상대성 이론은 이제 이해하기 어려운 난제가 아니다. 그래서 작가들은 더 이상 대충 얼버무릴 수 없다.

      <프로젝트 헤일메리>에서 태양을 먹어 치우는 '아스트로파지'를 다루는 방식은 압권이다. 이 물질은 단순히 신비한 아이템이 아니라, 열역학적 법칙 안에서 굴러가는 하나의 '실체'로 존재한다. 물론 작가가 상상해 낸 크리쳐이지만 그 생명체에 대해 알아가는 과정의 디테일함은 치밀하다. 과학적 디테일이 서사의 엔진이 되어, 독자가 그 계산 과정을 따라가며 주인공과 함께 땀을 쥐게 만드는 것. 이것이 현대 SF가 과거와 차별화되는 가장 큰 포인트이다. 태양을 삼키는 미생물이라니, 이런 상상력은 도대체 어디서 나타나는 것인지...

 

"이봐, 돌덩이 친구?"… 소통도 데이터로!

      외계인 '로키'와의 조우 장면은 과거 SF와 가장 극명하게 갈리는 지점입니다. 옛날 SF 영화였다면 외계인과 만나는 순간 텔레파시나 우연한 언어 습득으로 대화가 시작됐다. 심지어 외계인이 친절하게 영어를 한다. “Hi, everyone. Nice meet you.” 우리는 외계인과 대화하기 위해 그토록 영어 공부를 열심히 했었나?

      하지만 이 소설은 다르다. 발성법도 다르고 살아온 환경도 천지차이에다가 시각이 거의 없는 스톤, 청각이 미개한 인간이 서로 소통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하지만 두 지성체는 수학과 물리 상수를 주고받으며 '데이터의 교환'을 통해 신뢰를 쌓는다. 수학과 물리는 별과 별을 이어주는 최초의 소통 도구가 되는 셈이다. 진리 앞에, 과학이 얼마나 정교한 소통의 도구인지 깨닫게 된다. 이건 마치 우주적 규모의 '고품격 펜팔'이라 할 수 있겠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처럼 소설 <프로젝트 헤일메리>는 과학적 디테일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과거의 SF가 우리에게 '상상력의 확장'을 선물했다면, 현대의 SF는 '과학적 탐구의 희열'을 선사한다. 영화를 보고자 하는 분이 있다면 단언컨대 먼저 소설을 보기를 추천한다. 영화는 영상미를 살리기 위해 소설이 주는 진짜 재미를 많이 생략하고 외계인 로키와 지구인 그레이스의 우정이 중심축이 되어 아쉬운 점이 많다. 그러니 꼭 영화보다 소설을 먼저 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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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전노장 드라이버 써니 헤이스로 분한 브래드 피트는 수트만 입어도 서킷을 런웨이로 만들어 버릴 정도로 멋진 사내다. 좋은 대우를 버리고 다 망해가는 팀으로 걸어오는 그의 모습은 자고로 멋이란 옷이나 외모가 아니라 자세와 태도에 있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한다.

      F1이라는 경기는 또 어떤가? 시속 300km 이상의 속도로 질주하며 중력가속도를 온몸으로 버텨야 하는 극한의 스포츠이다. 젊은 루키 조슈아가 써니를 보며 속으로 ‘우리 형님 서킷 위에서 뒷목 잡으시는 거 아닌가?’ 걱정했을 거라는 데 내 돈 500원과 SK하이닉스 주식을 걸겠다. 다행히 피트 형님의 에이징 커브는 서킷의 급커브보다 훨씬 부드럽더라. 물론 그 잘난 얼굴이 중력가속도에 일그러지는 모습을 헬멧으로 감춘 건 영화상 설정일 뿐 배우 보호 차원의 설정은 아니었겠지.

 

     뜨거운 엔진음과 심장을 타격하는 속도감, 영화 <F1 더 무비>는 단지 트랙 위를 달리는 머신의 외형만을 보여 주는 작품이 아니다. <탑건: 매버릭>의 조셉 코신스키 감독과 브래드 피트가 만난 이 영화는, 잘 만들어진 스포츠 영화가 어떻게 관객의 심박수를 통제하고 감동을 이끌어내는지 그 정석을 보여 주었다.

     여기서는 <F1 더 무비>에 나타나는 스포츠 영화의 고전적인 문법을 짚어보겠다. 이를 통해 이 영화가 가진 독특한 매력과 마지막에 던지는 통렬한 한방에 관해 이야기해 보려 한다.

 

슈퍼 루키와 늙은 노장의 만남

     1990년대 끔찍한 사고 이후 서킷을 떠났던 써니 헤이스(브래드 피트). 그가 지역의 그저그런 레이싱 대회를 다니다가 F1 그랑프리 대회에 출전하며 다시 머신(F1에 출전하는 차량을 부르는 말)의 운전대를 잡는 순간은 전형적이지만 가장 가슴 뛰는 오프닝이자 갈등의 전조가 된다. 팀의 신예 조슈아 피어스(댐슨 이드리스)는 오만하고 개인주의적인 성향이며 SNS와 미디어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에 더 신경 쓰는 한편 좀 더 나은 조건의 다른 팀으로 이적할 기회를 엿보고 있다. 써니와 조슈아가 피트인(Pit In) 공간과 트랙 위에서 거칠게 부딪히는 초반부의 장면에는 이런 배경이 숨어 있어 극적 긴장감을 팽팽하게 당긴다.

     영화는 레이싱이 결코 드라이버 혼자만의 독주가 아님을 끊임없이 보여 준다. 우리가 미디어를 통해 보는 F1이라는 스포츠는 드라이버들이 이상한 차를 타고 누가 더 빠른가를 겨루는 모습으로만 비추어지지만, 사실 F1 레이싱은 0.001초를 다투는 극한의 세계이며, 여기에는 철저한 리더십과 팀워크가 요구된다.

     후반부 경기가 재개되는 순간, 써니 헤이스는 팀 루키 조슈아를 우승시키기 위해 온몸을 던져 자신을 희생하며 나선다. 마지막 레이싱에서 다른 머신들과 치열하게 접전을 버리며 질주하는 장면을 보고 있으면, 관객도 서킷에서 회전 중력을 이겨내려는 드라이버처럼 온몸이 경직되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우승 기회를 내려놓고 팀의 승리와 루키 조슈아의 질주를 위해 뒤따라오는 경쟁 머신들을 막아서는 써니 헤이스의 모습은 팀의 승리를 위해 희생하는 스포츠 선수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 준다. 또, 팀을 이끄는 진정한 리더십은 바로 자신을 제일 먼저 희생할 수 있는 숭고한 정신에서 나온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 장면이다. 단순히 속도 경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치밀한 전략과 퍼포먼스로 상대를 압도하고 팀을 하나로 뭉치게 할 수 있는 노장의 열정이 우리의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것이다. 나이든 레이서의 플랜C가 경기를 압도하는 모습을 보라!

 

F1이 가진 독특한 특성의 시각화

     시속 300km가 넘는 속도로 질주하는 머신들이 경쟁하는 장면을 보면 내 심장도 같이 심박수 150까지 치솟는 느낌을 받는다. 달리는 머신에서 티타늄 스파크 불빛이 번쩍이는 것을 보면 군대에서 기관총을 쏠 때 날아가는 발광탄을 봤을 때처럼 심장이 두근더린다. 문득 영화를 보다가 ‘저 속도면 귀성길 전라남도 구례까지 300km도 한 시간이면 가겠구나’ 싶다가도, F1 머신은 과속 방지턱 하나 넘는 순간 차체가 박살 난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귀성길에는 그냥 내 차 K3로 마음에 드는 휴게소마다 피트인 하면서 쉬엄쉬엄 가는 걸로...

     F1 머신은 오직 달리기 위해 존재하는 차량이다. 이를 위해 문도 없고 헤드라이트도 없다. 오직 서킷에서만 달릴 수 있는 차량이지만 온갖 과학적 장치와 센서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다. 시즌 중에도 끊임없이 차량을 점검하고 업데이트하며 더 빠른 차를 만들기 위해 경쟁한다. 여기에는 첨단 공기역학과 물리학, 재료공학이 총동원되기 마련이다. 헤시스 팀의 총괄 기술자 케이트도 전직은 나사의 우주항공 기술 연구원이었다. 이처럼 머신은 지상 탈것의 첨단과학기술의 총아로, 사람들은 머신을 지상 위의 전투기라고도 부른다.

     이 영화의 큰 장점 중 하나는 일반 대중에게는 다소 낯설 수 있는 F1의 메커니즘을 영리하게 극에 녹여냈다는 점이다. 단순한 속도 경쟁이 아니라, 타이어의 마모 상태, 다운포스(차체를 아래로 누르는 공기역학적 힘)를 위한 엔지니어들의 치열한 기술 개발, 그리고 피트 스톱(Pit Stop)에서 몇 초 만에 타이어를 교체하는 크루들의 일사불란함 등이 화면에 등장한다. 써니 헤이스가 팀 머신의 한계를 진단하고 공기역학적 업그레이드를 제안하는 장면은 이 스포츠가 '인간과 기술의 가장 완벽한 결합체'라는 특성을 잘 보여 주는 대목이다.

 

가장 자본주의적인 스포츠 F1에 통쾌한 한 방

     영화의 클라이맥스는 단순히 경기에서 승리했다는 쾌감에 머무르지 않는다. 이 영화가 진짜 위대해지는 지점은 바로 '상업주의에 오염된 대회에 필요한 스포츠 정신의 회복'에 있다. 시즌 중반 내내 투자자들과 거대 자본은 팀의 가치와 존폐를 오직 '수익성'과 '마케팅 효과'로만 저울질한다. 스폰서와 돈의 논리에 휘둘리며 팀이 공중분해 될 위기에 처했을 때, 써니 헤이스는 신체적 부상과 법적 위험을 모두 자신이 짊어지겠다는 각서를 쓰고 마지막 트랙으로 향한다. 돈으로 모든 가치를 재단하려는 거대 자본의 얄팍한 속성을 비웃듯, 엔진의 굉음과 함께 체커 플래그(경기가 끝났음을 알리는, 검은색과 흰색의 체크무늬 깃발)를 향해 질주하는 머신들의 모습은 그 자체로 통렬한 카타르시스를 준다.

"당신들이 계산기를 두드릴 때, 우리는 목숨을 걸고 달린다."

     영화의 결말은 자본주의적 시스템이 아무리 스포츠를 상업적으로 이용하려 해도, 승리를 향한 드라이버들의 순수한 열정과 희생, 그리고 스포츠 본연의 각본 없는 드라마는 결코 돈으로 살 수 없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던진다.

     써니 헤이스는 가장 영광어린 순간에 모든 걸 던져버리고 無로 돌아간... 아니 자신의 미니버스를 타고 떠난다. 까짓거 나도 세상에 무시당할 것 없이 장대한 질주 본능을 품에 안고 거침없이 떠나고 싶지만, 소시민의 삶은 여전히 개미털이에 당하는 주식시장처럼 통장 잔고에 가슴 아파하거나 포머라는 말에 상처받고 전설의 복서 조지 포머에게 한 대라도 맞으면 정신 차릴 것 같다는 헛소리를 하고 있는 게 일상이다.

 

     <F1 더 무비>는 거친 엔진 소리 뒤에 인간의 뜨거운 심장 소리를 숨겨둔 작품이다. 스포츠 영화의 완벽한 문법 속에서 피어난 베테랑의 리더십, 그리고 상업주의를 맹렬하게 받아치는 마지막 한 방까지. 영화가 끝나는 순간까지도 가슴속에 진한 배기음이 남는 듯한 정말 잘 만든 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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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겨울부터 시작된 파반느와의 만남이 얼마전 막을 내렸다. 그동안 나는 박민규의 원작 소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를 천천히 읽었고, 중간쯤 읽고 있을 때 KBS 라디오 극장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를 출퇴근 시간에 틈나는대로 듣기 시작했다. 책은 시처럼 읽다가 쉬다가 다시 읽었고, 라디오는 귓속으로 들어오는 성우들의 맑은 목소리와 대사의 생동감으로 느꼈다. 그리고 얼마전 넷플릭스로 <파반느>가 개봉했다. 책을 다 읽고, 라디오 극장도 끝난 후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시청한 <파반느>는 그럭저럭 괜찮았지만 책이 주었던 상상력과 라디오 극장이 더한 생명력이 영화에서는 충분히 살려주지 못한 아쉬움도 있다. 

012

 

 


아버지는 놈팽이였어. 어머니가 피땀 흘려 밖에서 벌어오면 그 돈으로 자기를 치장하고 영화판을 기웃거리며 자신의 출세길만 생각했던 거지. 그렇게 아버지는 어머니와 나를 버리고 돈 많은 여자와 결혼했어. 애시당초 그 남자는 어머니를 사랑하지 않았던 거야. 동정도 아니었고 호의도 아니었으며 연민도 없었지. 그저 빌붙어 피를 빨아먹은 거머리였어. 그 남자가 떠나고 난 뒤에도 엄마는 한참동안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어. '나'의 이 유년의 기억들은 사랑에 대해 회의하고 그 감정을 하찮게 여기게 만들었어. 아버지는 '나'의 상처이자 나를 단련한 용광로였고, 내가 살아가는 힘이었지. 얼굴값? 꼴값... 

그러던 어느날 '그녀'가 나타났다. 모두에게 놀림받고 터부시되며 다가서는 안될 존재로, 버림받은 개처럼 지하주차장 한켠에 내버려진 여자. 그저 못생겼다는 이유로 누구도 가까이 하지 않고 심지어 놀잇감으로 전락해 잔뜩 찌그러져 있는 사람. 그에게 '나'는 눈길이 갔어. 아버지에게 버려진 어머니 때문일까? 아마도 시작은 그럴 거야.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그저 그의 겉모습만 보고 그 가치를 폄훼하는 현상, 이 잔인한 자본주의의 총화 백화점에서는 세 걸음마다 한 번씩 볼 수 있을만큼 자주 마주치는 현상 아니던가? 

그래서 그녀에게 눈길이 간 거다. 그리고 말했다. "우리 친구할래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 하지만 쟤는 진심(眞心)이야.

 

그렇게 요한 형과 '나'와 '그녀'는 켄터키치킨 집에서 맞은편 bear 가게의 간판을 보며 'hope'를 들이마시고 많은 이야기를 하며 살았지. 그렇게 우리는 사랑했어. 3개의 창(연민, 호의, 동정)을 말하며 걱정스럽게 나를 보던 요한 형의 우려와는 다르게 '나'는 '그녀'를 '사랑'으로 마주했으니까. 그녀와 내가 헤어진다는 건 마치 "손끝 발끝의 모세혈관에까지 뿌리를 내건 나무 하나를, 통째로 흔들어 뽑아 버렸다"는 것과 같다고 말했어.

그러다가 '나'는 지하주차장 일을 그만두고 대학에 진학했어. 소설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에서였지. 대학이라는 곳은 또 얼마나 낭만적인가? 그렇게 켄터키치킨과 멀어지고 hope 대신 학교 앞 hof 집을 다녔고, bear 대신 beer를 마시기 시작했지.

그런데 어느날 요한 형이 손목을 그었어. 정신병동에 갇힌 요한 형을 만났지만 그저 멍한 눈으로 한곳만 보고 있는 형을 만났지. 그렇게 수다스럽던 형은 왜 스스로를 가두고 입을 닫아버렸을까? 그리고 그녀와의 연락도 끊겼어. 그녀는 나에게 장문의 편지를 남기고 백화점을 그만두었지. 잘생긴 '나'와 못생긴 '그녀'는 서로를 사랑하지만 사회가 만들어 놓은 편견과 차별의 벽을 넘지 못한 거야. 나를 사랑하니까, 떠난다는 그녀의 글을 보면서 아무말을 할 수가 없었어. 

하지만 세상은 여전히 차갑고, 당신의 곁에 서 있는 나의 모습이 당신을 힘들게 할까 봐 두렵습니다. 나는 이제 나를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외모가 아닌 오직 나의 존재만으로 살 수 있는 곳으로 떠나려 합니다.(중략) 부디 나를 찾지 마세요. 당신의 기억 속에서 나는 언제나 가장 아름다운 왕녀로 남고 싶습니다. 당신이 나에게 주었던 그 따뜻한 눈빛과 시간들을 평생의 보석으로 간직하며 살겠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잊혀질 거라 생각했어. 다시 지하주차장에서 일할 때는 '희재'라는 명품샵에서 일하는 예쁜 여자애도 만났지. 그저 껍데기만 좋아했지, 알맹이는 아무것도 아니더라. 그런데 희재를 통해 '그녀'의 주소를 알게 됐어. 집앞까지 찾아갔지만 그냥 돌아섰어. 스스로 나를 떠난 사람이잖아. 이렇게 불쑥 얼굴을 내미는 건 아니잖아. 아직 '그녀'는 나를 만날 준비를 하지 않았을 거야. 조용한 '그녀'의 삶에 다시 파문을 만들 수는 없잖아. 그래서 '나'도 장문의 편지를 남겼어. 12월 25일 다시 이곳에 올테니 만나고 싶다면 나와 달라고 남겼지. 

그렇게 그녀를 만났어. 우리는 서로의 마음을 다시 확인했어. 나는 여전히 그녀를 사랑하고 그녀도 나를 사랑하고 있었지. 그렇게 우리는 다시 만나기로 했어. 하지만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나는 지독히 내리던 눈에 미끄러진 버스가 전복되면서 큰 사고를 당해. 


여기서부터는 결론이 두 개야.

하나는 그 사고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나는 그야말로 또 다시 기적적인 재활에 성공하고 그 이야기를 글로 담아 크게 성공하는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지. 하지만 그녀와 만난 이후 갑자기 연락을 끊은 나로 인해 그녀는 이미 한국에 남아 있지 않고 머나먼 독일에서 삶을 살고 있었지. 어렵게 알아낸 연락처를 들고 독일까지 찾아가 그녀를 만나고 다시 사랑을 하게 돼. 아름다운 이야기지. 

그런데 다른 하나는 달라. '나'는 그 버스 전복 사고로 세상을 떠나. 그리고 요한 형이 '나'와 '그녀'의 이야기를 소설로 써서 세상에 내놓지. 요한 형은 '그녀'와 결혼했어. 요한 형도 그녀의 외모가 아닌 내면의 아름다움을 보았던 거겠지. 그렇게 '나'의 젊은 날 세상의 편견과 싸우며 순수한 사랑을 보여 주었던 '나'와 '그녀'의 이야기가 세상에 나오게 되지. 


스무살. 어색하고 부끄러운 나이.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패기와 자신감도 충만하지만 그 이면에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부끄러움', '눈치'가 커가는 시기이기도 하다. 작가는 '못생김'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왜곡된 시선을 '그녀'가 닥치는 여러 현실과 '그녀'가 남긴 말과 행동과 글로 가감없이 드러냈다. 그녀와의 로맨스는 그래서 평범하지 않다. 그래서 소설은 거친 투쟁의 서사이며 날선 복수의 담론이다. 결국 이 싸움은 처절하고 슬프고 비참한 비극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 모리스 라벨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는 이 소설의 전체의 정서를 지배한다. 상상력을 부르짖는 요한은 그래서 모순적이다. 못생김을 못생김으로만 받아들이지 말고 상상력을 키우라고 하지만, 사실 사랑은 상대를 상상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실체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이라는 점을 '나'는 강변했다. 

'죽은 왕녀'는 그래서 못생김을 이유로 지워져 버린 것들에 대한 진혼곡이다. 온갖 전설과 동화, 만화 속에서 많은 왕자와 용사들이 왕녀를 구하기 위해 용의 동굴로 돌진한다. 그런 왕녀는 반드시 아름다워야 하고 구하고 지킬 가치가 있어야 한다. 시각적 자극이 남발되는 현대 사회에서는 왕녀들이 더더욱 아름다워지고 고귀해진다. 그녀는 용에 잡혀 있고나 높은 성에 붙잡혀 있을 뿐인데 말이다.

작가는 시각적 자극으로 대변되는 우리 사회의 편견을 비판하면서 음악적인 장치를 여기저기 두었다. 작품의 제목도 그러하지만 80년대 팝송과 가요들이 작품의 곳곳에서 우울하고 비이성적인 사회상을 드러내 주고 있다. 컬처 클럽(Culture Club) - <Karma Chameleon>는 신나는 비트와 리듬의 곡이지만 겉모습에만 열광하는 세상의 풍경을 보여 주는 장치이다. 

우리가 말다툼할 때 당신은 매일 거짓말을 하는군요. 그게 당신의 방식이라면 난 당신을 믿을 수 없어요. 내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나요? 아니면 내가 듣고 싶은 말만 하는 건가요? 당신은 감정을 숨기려 하지만, 당신의 눈동자엔 두려움이 가득해요.
-컬처 클럽(Culture Club) - <Karma Chameleon> 중에서

눈에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 외모 보다는 내면, 시각보다는 청각이 소설 전반을 지배하는 사상과 철학이다. 외모에 대한 시대의 폭력적 시선을 거두고 내면의 심장 소리를 듣는 음악처럼 느린 왈츠곡에서 빠른 비트의 팝송까지 글자라는 매체에만 얽매이지 않고 독자들에게 청각적 즐거움까지 누릴 수 있는 장치들을 만들었다. 소설을 읽다 보면 해당 음악이 나오는 장면에서는 굳이 읽는 것을 중단하고 등장인물들과 함께 그 음악을 듣다보면 이들과 함께 공간을 점유하고 있다는 상상을 하게 된다. 

또 작가는 행을 엉뚱한 곳에서 잘라 먹는다. 이 독특한 문단 배치는 처음에는 무척이나 어색하다. 왜 여기서 끊었는지를 생각하게 하고, 천천히 그 잘린 부분을 다시 읽게 한다. 즉 작가의 의도적인 이끌림에 독자가 빨려 들어가게 한다. 

 

이 독특한 줄바꿈, 그로 인한 여백은 독자들이 소설을 읽는 흐름을 끊어 버리는 단점도 있지만 중간 중간 중요한 지점에서 한번쯤 쉬어 가면서 여백에 담은 작가의 의도를 생각하게 한다. 책을 읽는 속도는 느려지지만 종종 시를 읽는다는 착각이 들게 만든다. 문장을 끝맺지 않고 다음 줄로 넘기거나 단 하나의 문장만 독립적으로 남겨 놓는 방식은 한 박자 쉬어 가게 만든다. 섬세한 인물의 심리 묘사나 중요한 사건의 전개에서 독자에게 보다 깊은 몰입을 준다. 쭉쭉 읽어가던 흐름이 발목이 걸린 것처럼 주춤하게 되고 작가의 의도에 끌려가는 기분도 들지만 소설을 다 읽고 나서 느끼지만 좋았다. 만일 내용이 80년대의 감성과 낭만, 연애를 다룬 소설이 아니라면 엄두를 내기 어려운 시도임에는 분명하다. 그런데 이 작품은 보기 좋게 성공했다. 때로는 시처럼 때로는 소설처럼 시대와 사랑을 느꼈다. 마음의 박자로 글자 바깥의 여백으로 이야기를 만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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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한 편의점 (벚꽃 에디션) - 8점
김호연 지음/나무옆의자
 
 

편의점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구심력과 원심력
"불편한 편의점"은 이문구의 "관촌수필"처럼 하나의 장소에서 여러 군상들이 어우러지는 모습을 그려낸 연작 소설이다. 24시간 돌아가는 편의점에서 만들어지는 이야기는 마치 원운동하는 물체에 작용하는 구심력처럼 우리의 마음을 끌어들인다. 이런 강한 구심력이 있기에 물체는 원심력을 발휘해 힘차게 원운동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야기의 중심을 잡아주는 구심력은 바로 인간에 대한 관심, 그로부터 시작되는 구원에 대한 믿음이다. 이 중심에는 '독고'와 '사장 할머니 염영숙'가 있다. 반면 이야기를 재미있고 풍부하게 하는 힘이 원심력이다. 원심력을 받는 이야기의 인물로는 20대 여성이며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며 편의점 알바를 하는 '시현',  50대 여성으로 생계를 위해 편의점 알바를 하는 '오선숙', 배우로 활동하다가 극작가로 변신한 '정인경', 의료기기 영업사원으로 일하는 40대 중년의 사내 '경만', 경찰로 재직하다가 불명예 퇴직하고 사설 흥신소에서 일하는 60대 '곽 씨'가 있다. 편의점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 군상들의 이야기가 바로 이야기를 재미있게 돌리는 원심력이 된다. 사장 할머니(염영숙)로부터 시작된 인간을 향한 관심과 구원에 대한 믿음, 그리고 용서로 이어지는 경애의 마음이 '독고'라는 정체 불명의 노숙자로 전달되고 이것이 크게 확산하면서 이야기의 꽃을 피워 냈다. 

현대 사회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공기처럼 숨쉬며 접하는 공간 '편의점'이라는 공간에서 만나는 알바들이 있고, 편의점을 찾는 동네 할머니와 꼬맹이부터 술취한 사람들과 진상들 이야기는 양념처럼 이야기의 재미를 더한다. 거기에 흔하게 볼 수 있는 알바라고 불리는 직원들의 모습도 어느 편의점에서나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그네들의 문제 있는 사연들이 '독고'라는 노숙자를 만나면서 삶의 변곡점을 지나고 좀더 희망을 가져 보는 변화를 겪는 모습은 이 책을 읽을 때 독자가 품게 되는 감동 중 하나이다. 

이야기는 연작 소설처럼 각각의 이야기들이 있고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인물 '독고'의 이야기가 씨줄과 날줄로 엮여 잇다. '독고'와 '편의점 사장 할머니'가 잃어버린 지갑을 연으로 이어지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를 시작으로 편의점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그곳을 드나드는 사람들, 할머니의 가족과 거기서 다시 연결된 곽 씨까지 이야기는 줄줄이 엮여 이어진다. 

불편하지만 괜찮아
여러 이야기 중 책 제목과 동일한 소제목의 '불편한 편의점' 이야기는 좀 불편했다. 대학로 배우였다가 대본 작가로 활동하지만 신춘문예 말고는 자기 작품을 연극 무대에 올려본 적이 없는 작가의 이야기. '독고'라는 인물과 편의점을 글로 써낸다는 설정으로 이 책의 작가가 불쑥 등장하는 느낌이다. 이 소설 전반적으로 다양한 군상들이 편의점에서 어우러지고 있는데, 그 대부분은 보편화된 대중의 모습을 잘 드러내고 있지만 이 부분에서만 등장하는 작가의 모습은 그다지 일반적인 모습이라고 보기 어렵다. 아마도 작가가 자신이 받은 사회의 도움에 은혜를 갚는다는 느낌으로 끼워 넣은 건 아닐까 생각되는 여러 부분이 있지만 전체 이야기 중에 가장 이질적인 느낌이 드는 부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전반적으로 따뜻하다. 보편화된 장소라는 편의점, 내 이웃 혹은 독자 자신을 닮은 인물들이 하나같이 상처받고 아파하면서 편의점을 찾고, 여기서 다시 희망을 갖고 살아간다는 이야기는 도시 동화의 틀을 잘 갖추고 있다. 사람에 지치고 용서와 구원의 길을 잃은 이들에게 잠시 삶의 고단함을 잊고 나침반을 다시 보게 하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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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온한 책, 불온한 사상


사람의 생각은 말과 글로 전달된다. 누군가를 설득하기 위해 대화를 하듯이, 많은 이에게 생각을 전달하기 위해서는 글이 필요하다. 여러 권력자들이 자신의 독재 권력을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 반대자들의 말과 글을 차단했다. 때로는 죽음으로, 때로는 금서라는 형식으로····

중세 시대 고대 인문학 관련 서적들은 이교도의 사상이라는 이유로 종교적 권력 아래 대중에게서 격리되었다. 격리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시간의 무차별적인 공격 앞에 속절없이 사라져 갔던 고대 문헌들을 기어이 끄집어 내어 세상앞에 내놓았던 사람들이 있다. 이 책 <1417 근대의 탄생>은 그런 사람 중의 한 명인 포조 브라촐리니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포조는 중세의 기독교 권력의 몰락해 가던 모습을 옆에서 지켜 보았던 로마 교황청 서기이기도 했고, 인문학과 과학 부흥을 기뻐하고 적극적으로 고대 서적 발굴에 앞장섰던 인문학자이기도 했다. 어느 시대나 경계인이 가졌던 모순을 모두 가진 인물이었고, 생각과 사상도 어느 하나로 대변하기 어려운 다양성을 갖고 있던 인물이다. 그런 경계인이었던 포조가 르네상스의 시기 어떤 역할을 했으며 어떤 삶을 살았을까?

이 책은 중세의 몰락과 르네상스의 시작점에 있던 한 인물-포조 브라촐리니-이 독일의 오래된 수도원에서 발견한 책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의 의미를 쫓아가는 내용이다.

2천년 전에 쓰인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

기원전 1세기 고대 로마의 시인 루크레티우스의 철학 서사시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의 핵심적 내용들은 더 거슬러 올라 기원전 4세기 에피쿠로스의 철학에 다다른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에피쿠로스는 무엇이 좋고 악한지는 쾌락과 고통을 기준으로 판단할 수 있고, 가장 좋은 쾌락은 지적 탐구에서 얻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 죽음은 몸과 영혼의 종말이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며, 신은 인간을 벌주거나 보상하는데 관심이 없고, 우주는 무한하고 영원하며, 세상의 모든 현상들은 궁극적으로 빈 공간을 움직이는 원자들의 움직임과 상호 작용으로부터 나온다고 주장했다.

기원전 4세기의 이런 주장들은 지금 돌아보아도 매우 놀랍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죽음 이후의 세계를 믿고 있고, 신이 인간사에 개입하여 상과 벌을 주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런 사상은 신의 권능으로 세상을 지배하던 성직자들이 있던 중세에서 용납될 수 없는 사상이다. 아니 중세 유럽만이 아니라 태양계 바깥까지 우주선을 보내고 있는 현재도 일부 종교인들이 들으면 펄쩍 뛸만한 무신론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물론 세상에 영원한 진리는 없을 것이다. 먼 훗날 어떤 과학적 발견이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단서를 발견할지도 모르고, 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까지 인류가 이루어 낸 과학적 철학적 사실들로 본다면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다.

루크레티우스의 서사시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를 중심으로 저자는 14세기 유럽의 과학적 발견, 종교적 갈등, 철학적 성찰 등을 꼼꼼한 고증 자료와 함께 엮었다. 하나의 사건을 통해 시대의 변화를 유추해 내는 힘은 단순한 상상상력을 넘어 치밀한 고증이 있을 때 더 빛이 난다.

교황청 서기였고 피렌체의 총리까지 지냈으며 탁월한 책 사냥꾼이었던 인문학자 포조의 기록과 그가 다른 학자들과 어울렸던 편지들, 그의 행적을 정리한 기록물들을 중심으로 보다 역동적인 시대의 흐름을 살펴볼 수 있게 하였다. 특히 종교재판의 잔혹함과 비이성적 광기, 당시 고위 성직자들의 위선과 타락을 포조의 글과 기록을 통해 보면, 가장 어두울 때 빛나는 작은 불씨들의 위대함을 엿볼 수 있다.

인간은 어떤 동물보다 추상화 능력이 뛰어나다고 하며 이것이 인류가 사회성을 갖고 지금까지 발달할 수 있었던 배경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인류의 상상력은 신에 대한 공포와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갈망으로 나타나면서 진실을 외면하고 진리에 대한 성찰을 가로막았다. 죽음 이후의 세계는 존재하지 않으며 신은 설령 존재한다 하더라도 인간에게 관심이 없을 거라는 오래된 진실이 21세기를 사는 많은 사람들에게 외면 받고 있는 현실은 참 아이러니하다.


<장미의 이름>과 <1417 근대의 탄생>

중세시대 가장 불온했다는 책이 가장 빛나는 세상을 만드는 데 일조했다. 분노와 공포로 사람들의 마음을 현혹하고 그들이 생명과 재산을 갈취하던 권력이 과학의 발전과 인문학적 사상에 밀려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졌다.

<1417 근대의 탄생>은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을 떠올리게 했다. <장미의 이름>은 어느 수도원에서 발생한 연쇄 살인 사건을 다룬 작품이다. 이 살인은 광신도였던 늙은 수도승이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논리를 담고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읽는 수도사들을 살해하고 그들의 죽음을 신을 배신한 자들에 대한 신의 심판으로 위장하여 공포를 조장하려는 음모였다. <장미의 이름>은 이미 부패할대로 부패했던 당시 기독교 권력의 모습과 함께 분노와 공포로 대중을 지배하려던 성직자들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 준 작품이다.

두 책은 모두 중세 시대의 종교 권력이 무너지는 과정과 함께 고대 문헌이 가져온 충격이 당시의 성직자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잘 보여 준 책이다. <1417 근대의 탄생>은 실제 당시 사람들의 활동과 기록을 통해 탐사 보도 형식으로 사실을 전달했다면 <장미의 이름>은 살인사건을 쫓는 수도사의 이야기로 당시의 광기를 고발하고 있다. <1417 근대의 탄생>이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의 철학과 사상이 르네상스 시기와 인문학과 과학과 만나는 지점에 좀더 집중했다면, <장미의 이름>은 중세 기독교의 타락과 비이성에 더 집중했다.

<장미의 이름>을 재미있게 읽은 독자라면 중세에서 르네상스로 세상이 바뀌는 과정의 이야기에 좀더 흥미를 갖고 <1417 근대의 탄생>을 읽기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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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 생활을 하면서도 직장 동료들이 가끔씩 던지는 말이 있다. 젊었을 때는 절대 하지 않았던 말인데, 나이가 드니 저절로 입밖으로 터진다. 변하지 않는 구조와 회사의 인식에 대한 자괴감을 담아서 이렇게...

"어차피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넷플릭스 드라마에서 20대의 젊은 청년 조일병이 내뱉던 그 말은 바닥을 알 수 없는 절망의 끝에서 내지르는 비명이었다. 무시무시한 폭력 앞에 내던져졌지만 아무도 도와주지 않고 누구도 손내밀지 않았으며 모두가 방관했다. 그 절망 앞에서 그는 마지막을 향해 폭주했다. 누가 착하고 순했던 조일병을 그렇게 만들었을까라는 질문은 의미없다. 답은 모두가 알고 있다. 그래서 누구나 떠들 수 있다. 하지만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다. 

 

군 시절(1993~1995) 중대 행정반 게시판에는 군부대 사건사고들이 매주 업데이트 되었다. 나름 경각심을 주기 위해 사례들을 제시함으로써 불미스러운 사고(?)를 막겠다는 취지였지만, 사고의 디테일한 내용이 다 드러나지는 않는다. 그저 누가 어떤 일로 어느 정도의 부상(또는 사망)을 당했으며 어떻게 처리되었다는 정도만 나올 뿐이다. 제시된 내용으로 보면, 대부분의 사고들은 부주의가 원인이거나 병사간 사적 충돌이었고, 일부 상급자의 가혹행위로 인한 단순 사고였다. 

군에 있을 때 옆 대대의 병사가 목욕탕에서 상급자의 폭력에 의해 사망한 사고가 있었다. 부대 전체가 발칵 뒤집히고 소원수리함이 다시 설치되고 모든 병사들이 장교들에게 불려가 일대일 면담을 진행했다. 이런 사고를 원천적으로 막겠다는 것 보다는 병사들의 군기를 다시 잡겠다는 의지로 보였고, 그 기간 중 내무반은 거짓된 엄숙함과 적막함으로 채워졌다. 그 결과는? 군대 내 대부분의 일들이 그러하듯이 크게 변하는 건 없었다. "어차피 변하지 않는다."와 "그래도 국방부 시계는 돌아간다"는 말로 한 시기가 지나가길 기다릴 뿐이다. 

드라마 <D.P.> 속 주 공간은 군 병영과 내무반이며 이곳은 짐승들의 공간이다. 내가 다닌 1990년대의 군대와 똑같았다. 내무반의 침상과 관물대, 모포 각잡기, 붉은 취침등 밑에서 주전자로 물을 뿌리고 신라면 뽀글이를 먹는 모습까지 판박이다. 심지어 은밀한 폭력의 공간인 건물 뒷편, 비품 창고, 초소도 아픈 옛 기억을 떠올리게 만든다. 폭력과 부조리, 비합리가 계급과 상명하복이라는 명분으로 공공연하게 벌어졌던 공간들이다. 

드라마 속 시간(2014년)은 나와는 한참 멀다. 그런데 폭력의 정도는 극악할 정도다. 물론 영화 속 폭력이 모든 군부대에 똑같이 적용되긴 어려울 것이다. 1990년대 군 복무를 했던 나와 2010년대 군 복무를 했던 사람들은 20년의 시간 차이에도 불구하고 하나도 변한게 없다. 국방부 시계는 돌아간다고 말했지만, 어쩌면 국방부 시계는 멈추어 있거나 아주 느리게 갔던 것은 아닐까?

변화와 희망을 이야기해야 하는 젊은 20대 청년들을, 계급으로 나누고 복종을 강요하고 다름을 용납하지 않도록 훈련했던 군대의 본질적인 내용이 변화했을까? 난 여전히 답을 모르겠고, 질문도 할 수 없으며, 관심을 가지기가 두렵다. 군 제대 이후 한참동안 군에 재입대하는 꿈을 꾸었다. 언제가부터 이제 그런 꿈을 꾸지 않았는데, 이 드라마 <D.P.>를 보면서 그 꿈이 다시 나타날까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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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박현옥 | 문이당 | 2006년 5월 읽음

<아내가 결혼했다>
당황스러운 제목이다. 누군가 소개해줬을 때 이혼 이후의 얘기라고 짐작했다. 드라마 ‘연애시대’처럼(사실 이 드라마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이혼 이후에도 관계를 이어가는 남녀의 이야기는 흔한 소재였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책장을 열 때부터 심상치 않다. “모든 것은 축구로부터 시작되었다.”라고 시작하는 소설의 첫머리. 제목-아내가 결혼했다-은 남자들에게 비난받기 좋고 첫머리-모든 것은 축구로부터-는 남자들의 시선을 끌어들인다. 물론 여기서 말한 남자들이란 ‘모든’ 남자를 말하기 보다는 ‘대부분’의 남자들을 말한다. 아내가 결혼하는 걸 좋아할 남자들은 극히 드물 것이며, 축구를 싫어하는 남자보다는 좋아하는 남자가 훨씬 많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렇게 작가는 보통의 남자들에 심성을 가진 나를 끌었다 놓았다 하며 내 눈을 꽉 잡았다.
책을 읽는 내내 아내의 결혼에 대해 심정적으로, 적극적으로 거부하면서도 ‘사랑’이라는 이유로 현실을 받아들이는 ‘나’가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은 ‘아내’의 논리정연하고 한편으로 사랑스러운 설득 때문이었다. 읽는 나도 눈물겹게(?) 동감할 수밖에 없었다.
여전히 간통이 법률적으로 처벌을 받는 우리나라 현실에서 아내의 사랑은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사회적 반역행위다. 하지만 ‘사랑’은 ‘제도’보다 우선하는 것이다. 끝내 아내의 또 다른 남자를 인정하지 않는 ‘나’는 결국 아내의 설득에 못 이겨 호주에서 ‘나’와 ‘아내’와 ‘그놈’과 ‘딸’이 한 가족을 이루며 살기로 약속한다.
긴장과 갈등, 분노와 슬픔 등 온갖 감정들이 난무하는 상황을 축구장에 빗대 놓은 작가의 탁월한 구성이 이 책을 단숨에 읽게 만들었다. 그러나 ‘폴리아모리’(비독점적 다자연애)는 여전히 낯선 단어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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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부터 집을 나오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작년부터 새로운 집에서 홀로 살고 있다. 본가에서 멀지 않다. 사람들은 의아해한다. 직장이 멀어서, 혹은 결혼 때문에, 아니면 집이 멀리 이사가니까 등등의 이유가 아니면 독립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본가와 한동네라니 이상하게 볼만도 하다.
가족. 참 슬프고 억장이 내려앉는 말이다. 태어나자마자 속하게 되는 집단이고, 그 집단의 보호 아래 성장하고 자라왔으며, 이만큼 살아왔던 고마운 곳이다. 그러나 어떤 때는 그곳은 감옥이 된다. 내 말과 행동과 생각을 구속하는 일이 생긴다. 머리가 커지면서, 대가리에 피가 마른다는 어느 시점에서 가족이 나에게 던지는 말 한마디 한마디는 위로보다 상처가 될 때가 많다.

영화 <가족의 탄생>을 보며 입안이 텁텁해지는 건 왜일까. 엄마가 둘(친엄마는 없다)인 채연(정유미)과 아버지가 다른 누나 선경(공효진) 밑에서 자란 경석(봉태규)이 채연의 집에서 이룬 행복의 가능성의 근간에는 따뜻한 정과 이해, 그리고 믿음이 담겨 있다. 그것은 누구에게나 필요한 사랑의 공통된 감정일 것이다.

1년 반동안 집을 나와 살면서 조금씩 부모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주말마다 집에 가면 다를 것 없는 일상이 여전히 또아리 틀고 있는 분위기지만, 이해받기를 원해고 사랑해 주길 바라던 나는 변했다. 아니 그 떨어져 사는 기간동안 가족들도 조금씩 변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해체와 재생성, 나는 요즘 다시 집에 들어가 사는 걸 생각 중이다.

 
영화는 기차 안에서 만난 남녀로 시작한다. 처음 보는 남자에게 악수를 청하며 깜찍한 미소를 짓는 채연에게 경석은 흠뻑 빠져든다. “삶은 계란에는 사이다가 있어야” 한다며 넋두리를 풀어놓는 경석이 채연도 싫지 않다.
다시 영화는 억척스럽게 살아가는 미라(문소리)를 보여준다. 집 나간 뒤 5년 만에 찾아오는 남동생 소식에 설레는 미라는 정 많고 걱정 많고 일 많은 평범한 누이의 모습이다. 그런데 5년 만에 찾아온 형철(엄태웅)은 그렇지 않다. 이모 뻘 되는 여자 무신(고두심)을 아내라고 데리고 와 미라에게 태연하게 소개하지만 미라는 당혹스럽다. 게다가 무신의 전 남편의 전 부인의 아이가 찾아와 상황은 더욱 복잡해진다. 형철과 무신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무신이 어떤 사연이 있는 여자인지, 왜 미라는 결혼을 하지 않는지 짐작조차 되지 않는다. 다만 형철이라는 비뚫어진 가부장에 의해 삶이 이상하게 꼬인 무신과 미라만 있다.

다시 영화는 선경(공효진)을 비춘다. 선경은 유부남과 사랑에 빠져 아이까지 덜컥 나아버린 엄마가 밉다. 아무데나 정을 주고 상처받았던 엄마가, 그래서 함께 상처받은 자신의 과거가 싫었기 때문이다. 남자친구(류승범)와의 사랑도 쉽지 않다.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소리쳐 보지만 “변했다”는 말밖에는 없다. 변한 것은 선경일까, 아니면 사랑일까. 선경은 헷갈린다. 가족도 연인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이 땅을 떠나고 싶은 간절한 소망이 어렵게 어렵게 성사되기 일보직전 선경의 엄마가 세상을 뜬다. 엄마가 떠난 다음에야 엄마의 마음을 이해하게 된 선경. 그리고 남겨진 배다른 남동생. 선경은 떠나지 않기로 결심한다.

다시 영화는 처음 기차 안에 만난 남자와 여자의 이야기다. 유난하게도 모든 사람에게 잘 해주는 채연(정유미) 때문에 남자친구 경석(봉태규)은 괴롭기 그지없다. 경석은 누나의 조언을 듣고자 채연을 집으로 초대한다. 그러나 약속한 날 채연은 집나간 다른 남자의 아이를 찾아 헤매느라 경석의 집에 오지 못한다. 화가 난 경석이 채연에게 이별을 선언하고, 채연은 집으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싣는다. 여기까지 경석이가 쫓아와 다시 화해를 요청하지만 뜽금없이 채연에게 온 전화 때문에 다시 언성이 높아진다.

“네가 나에게 어떻게 그럴 수 있니?”
“사랑하잖아.”
 

채연의 집 앞에서 헤어질 찰나 집안에서 나온 미라가 경석을 발견한다. 여기까지 왔으니 집에서 밥이나 먹으라는 권유를 뿌리치기 위해 채연이 “우리 헤어졌어요.”라고 하지만, 미라는 “헤어지는 게 뭐라고. 밥은 먹고 가”라며 억지로 끌고 들어온다.

채연에게 엄마가 둘이다. 아빠는 없다. 그런데 두 엄마 모두 친엄마가 아니다. 그러나 이들은 가족이다. 채연의 ‘헤픈’ 정은 두 엄마가 준 정의 깊이였을 거다. 경석에게 가족은 누나 뿐이다. 어렸을 때 엄마가 죽었지만, 엄마에 대한 인상은 ‘구질구질’하다라는 거다. 그러나 누나는 “정이 많은 분”이라고 한다. 경석은 그런 정을 느끼지 못받고 살아왔다.

그렇게 ‘또 하나의 가족’이 탄생했다. S그룹이 말하는 가전제품들과의 가족 보다는 더 리얼하고, 어찌보면 황당하며, 그래도 따뜻한 사랑이 담겨 있는 가족의 탄생이다. 누가 주인공이라고 할 수 없이 배우 하나하나의 연기가 돋보였던, 정말 사랑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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