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박현옥 | 문이당 | 2006년 5월 읽음

<아내가 결혼했다>
당황스러운 제목이다. 누군가 소개해줬을 때 이혼 이후의 얘기라고 짐작했다. 드라마 ‘연애시대’처럼(사실 이 드라마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이혼 이후에도 관계를 이어가는 남녀의 이야기는 흔한 소재였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책장을 열 때부터 심상치 않다. “모든 것은 축구로부터 시작되었다.”라고 시작하는 소설의 첫머리. 제목-아내가 결혼했다-은 남자들에게 비난받기 좋고 첫머리-모든 것은 축구로부터-는 남자들의 시선을 끌어들인다. 물론 여기서 말한 남자들이란 ‘모든’ 남자를 말하기 보다는 ‘대부분’의 남자들을 말한다. 아내가 결혼하는 걸 좋아할 남자들은 극히 드물 것이며, 축구를 싫어하는 남자보다는 좋아하는 남자가 훨씬 많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렇게 작가는 보통의 남자들에 심성을 가진 나를 끌었다 놓았다 하며 내 눈을 꽉 잡았다.
책을 읽는 내내 아내의 결혼에 대해 심정적으로, 적극적으로 거부하면서도 ‘사랑’이라는 이유로 현실을 받아들이는 ‘나’가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은 ‘아내’의 논리정연하고 한편으로 사랑스러운 설득 때문이었다. 읽는 나도 눈물겹게(?) 동감할 수밖에 없었다.
여전히 간통이 법률적으로 처벌을 받는 우리나라 현실에서 아내의 사랑은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사회적 반역행위다. 하지만 ‘사랑’은 ‘제도’보다 우선하는 것이다. 끝내 아내의 또 다른 남자를 인정하지 않는 ‘나’는 결국 아내의 설득에 못 이겨 호주에서 ‘나’와 ‘아내’와 ‘그놈’과 ‘딸’이 한 가족을 이루며 살기로 약속한다.
긴장과 갈등, 분노와 슬픔 등 온갖 감정들이 난무하는 상황을 축구장에 빗대 놓은 작가의 탁월한 구성이 이 책을 단숨에 읽게 만들었다. 그러나 ‘폴리아모리’(비독점적 다자연애)는 여전히 낯선 단어일 뿐이다.

 

오래전부터 집을 나오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작년부터 새로운 집에서 홀로 살고 있다. 본가에서 멀지 않다. 사람들은 의아해한다. 직장이 멀어서, 혹은 결혼 때문에, 아니면 집이 멀리 이사가니까 등등의 이유가 아니면 독립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본가와 한동네라니 이상하게 볼만도 하다.
가족. 참 슬프고 억장이 내려앉는 말이다. 태어나자마자 속하게 되는 집단이고, 그 집단의 보호 아래 성장하고 자라왔으며, 이만큼 살아왔던 고마운 곳이다. 그러나 어떤 때는 그곳은 감옥이 된다. 내 말과 행동과 생각을 구속하는 일이 생긴다. 머리가 커지면서, 대가리에 피가 마른다는 어느 시점에서 가족이 나에게 던지는 말 한마디 한마디는 위로보다 상처가 될 때가 많다.

영화 <가족의 탄생>을 보며 입안이 텁텁해지는 건 왜일까. 엄마가 둘(친엄마는 없다)인 채연(정유미)과 아버지가 다른 누나 선경(공효진) 밑에서 자란 경석(봉태규)이 채연의 집에서 이룬 행복의 가능성의 근간에는 따뜻한 정과 이해, 그리고 믿음이 담겨 있다. 그것은 누구에게나 필요한 사랑의 공통된 감정일 것이다.

1년 반동안 집을 나와 살면서 조금씩 부모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주말마다 집에 가면 다를 것 없는 일상이 여전히 또아리 틀고 있는 분위기지만, 이해받기를 원해고 사랑해 주길 바라던 나는 변했다. 아니 그 떨어져 사는 기간동안 가족들도 조금씩 변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해체와 재생성, 나는 요즘 다시 집에 들어가 사는 걸 생각 중이다.

 
영화는 기차 안에서 만난 남녀로 시작한다. 처음 보는 남자에게 악수를 청하며 깜찍한 미소를 짓는 채연에게 경석은 흠뻑 빠져든다. “삶은 계란에는 사이다가 있어야” 한다며 넋두리를 풀어놓는 경석이 채연도 싫지 않다.
다시 영화는 억척스럽게 살아가는 미라(문소리)를 보여준다. 집 나간 뒤 5년 만에 찾아오는 남동생 소식에 설레는 미라는 정 많고 걱정 많고 일 많은 평범한 누이의 모습이다. 그런데 5년 만에 찾아온 형철(엄태웅)은 그렇지 않다. 이모 뻘 되는 여자 무신(고두심)을 아내라고 데리고 와 미라에게 태연하게 소개하지만 미라는 당혹스럽다. 게다가 무신의 전 남편의 전 부인의 아이가 찾아와 상황은 더욱 복잡해진다. 형철과 무신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무신이 어떤 사연이 있는 여자인지, 왜 미라는 결혼을 하지 않는지 짐작조차 되지 않는다. 다만 형철이라는 비뚫어진 가부장에 의해 삶이 이상하게 꼬인 무신과 미라만 있다.

다시 영화는 선경(공효진)을 비춘다. 선경은 유부남과 사랑에 빠져 아이까지 덜컥 나아버린 엄마가 밉다. 아무데나 정을 주고 상처받았던 엄마가, 그래서 함께 상처받은 자신의 과거가 싫었기 때문이다. 남자친구(류승범)와의 사랑도 쉽지 않다.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소리쳐 보지만 “변했다”는 말밖에는 없다. 변한 것은 선경일까, 아니면 사랑일까. 선경은 헷갈린다. 가족도 연인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이 땅을 떠나고 싶은 간절한 소망이 어렵게 어렵게 성사되기 일보직전 선경의 엄마가 세상을 뜬다. 엄마가 떠난 다음에야 엄마의 마음을 이해하게 된 선경. 그리고 남겨진 배다른 남동생. 선경은 떠나지 않기로 결심한다.

다시 영화는 처음 기차 안에 만난 남자와 여자의 이야기다. 유난하게도 모든 사람에게 잘 해주는 채연(정유미) 때문에 남자친구 경석(봉태규)은 괴롭기 그지없다. 경석은 누나의 조언을 듣고자 채연을 집으로 초대한다. 그러나 약속한 날 채연은 집나간 다른 남자의 아이를 찾아 헤매느라 경석의 집에 오지 못한다. 화가 난 경석이 채연에게 이별을 선언하고, 채연은 집으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싣는다. 여기까지 경석이가 쫓아와 다시 화해를 요청하지만 뜽금없이 채연에게 온 전화 때문에 다시 언성이 높아진다.

“네가 나에게 어떻게 그럴 수 있니?”
“사랑하잖아.”
 

채연의 집 앞에서 헤어질 찰나 집안에서 나온 미라가 경석을 발견한다. 여기까지 왔으니 집에서 밥이나 먹으라는 권유를 뿌리치기 위해 채연이 “우리 헤어졌어요.”라고 하지만, 미라는 “헤어지는 게 뭐라고. 밥은 먹고 가”라며 억지로 끌고 들어온다.

채연에게 엄마가 둘이다. 아빠는 없다. 그런데 두 엄마 모두 친엄마가 아니다. 그러나 이들은 가족이다. 채연의 ‘헤픈’ 정은 두 엄마가 준 정의 깊이였을 거다. 경석에게 가족은 누나 뿐이다. 어렸을 때 엄마가 죽었지만, 엄마에 대한 인상은 ‘구질구질’하다라는 거다. 그러나 누나는 “정이 많은 분”이라고 한다. 경석은 그런 정을 느끼지 못받고 살아왔다.

그렇게 ‘또 하나의 가족’이 탄생했다. S그룹이 말하는 가전제품들과의 가족 보다는 더 리얼하고, 어찌보면 황당하며, 그래도 따뜻한 사랑이 담겨 있는 가족의 탄생이다. 누가 주인공이라고 할 수 없이 배우 하나하나의 연기가 돋보였던, 정말 사랑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영화다.

 

“자, 이 사진을 보세요. 어떤 공통점이 있죠?”
학생들은 머뭇거리는 듯했지만 조그마한 목소리들이 하나둘씩 나온다.
“흑백이요.”
“한 사람이네요.”
“무언가를 표현하고 있어요.”
“사진의 질감이 거친데요.”
때로는 대답에 칭찬하고, 때로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감탄하는 모습을 보이며 학생들의 수업의지를 북돋우고 있는 이는 한금선 사진작가. 학생들은 광운대학교 미디어학부 학생들. 한금선 작가는 내가 만드는 잡지와도 꽤 깊은 인연을 갖고 있는 분이다.
“그래요. 그런 공통점들, 우리가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있으면 그 안에서 이 작가가 무엇을 표현하고자 하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거예요. 그럼 그게 무엇일까요?”
그야말로 토론수업이고 현장학습이었다. 학생들은 주위에 서성이는 관중들을 조금은 의식하는 듯해 보였지만 크게 개의치는 않았다. 주고받는 대화 속에서 나 스스로도 사진을 보는 관점과 사진으로 표현하는 것에 대해 배운다.
 


한금선 사진작가를 비롯해 김중만, 노익상, 박여선, 성남훈, 이갑철, 이규철, 임종진, 최항영 등 10명의 사진작가들이 국가인권위와 함께 얼마전에 사진집 <어디 핀들 꽃이 아니랴>를 발간했다. 그리고 현재 광화문 조흥갤러리에서 사진전을 열고 있다.
참여한 사진작가가 많은 만큼 다양한 사진기법을 관람할 수 있다. 다큐멘터리, 포토에세이, 포트레이트 등 작가들은 그들만의 방법으로 2005년 한 해 동안 도시의 뒷골목과 집회현장, 농촌, 어촌, 산간벽지 할 것 없이 전국을 떠돌며 봄부터 초겨울까지 우리의 모습을 기록했다.
거기에는 차별에 관한 열 가지 이야기가 담겨 있다. 뷰파인더에 잡힌 그늘은 보호시설의 정신장애인, 난민, 중국 동포, 장애인과 그 가족들, 비정규직 노동자들, 노인들과 어린이만 남은 농촌, 한국으로 시집온 아시아의 여성들, 산간벽지의 여성들, 조손가정의 어린이 등이다.
그렇다고 내내 어둡기만 하지 않다. 장애인과 그 가족들 사진은 단란하게 보이는 평범한 가족의 모습이다. 조손가정의 어린이들 모습에서는 애잔한 미소를 머금어도 좋다.
이번 전시회는 3월 17일날 시작되어 오는 28일까지 진행된다. 조금만 발품을 판다면 괜찮은 구경이 될 것이다.

- 연극 <콘트라베이스>(명계남의 모노드라마)를 보고

어느 누구나 자기가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살아가는 이유다. 콘트라베이스든, 첼로든, 팀파니든 각자가 고유한 역할과 소리가 어우러져 합중주든 오케스트라든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박수갈채를 받는 대표는 지휘자이거나 좀 더 나아가면 피아니스트나 바이올리니스트다. 이쯤 되면 다른 악기들의 불만도 있을 법하다. 왜 저들만 나서야 되냐구요~

그런 불만이 가장 큰 것은 콘트라베이스일 것이다. 하긴 그럴만한 게, 역대 유명 짜하다는 작곡가 중에 이 콘트라베이스를 위한 독주곡을 만들어 준 사람은, 없다! 현악기 중 가장 낮은 저음으로 오케스트라에 무게를 실어주고 중심과 기초를 튼튼하게 하는 악기인데 그 가치를 제대로 알아주는 작곡가들은 많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랬을까? 프랑스의 작가 파트리크 쥐스킨스가 이 무식하게 큰(총 길이 190cm) 녀석을 주인공으로 소설을 썼고, 한국의 괴짜 연극배우가 2시간여 동안 혼자 연기를 했다고 한다. 결국 음악 쪽에서 인정받지 못하다가 문학에서 등단하고 연극 무대에 서게 된 콘트라베이스, 이것을 울어야 하나 웃어야 하나.

그런데 신기한 것은 작가의 필력인지, 배우의 연기력 때문인지, 책은 불티나게 팔렸다고 하고 배우는 10년 만에 앙코르 공연을 다시 열고 있다. 이 놀라온 흡입력은 지옥 끝에서 울려나오는 우울한 저음의 콘트라베이스의 마음을 어여쁜 메조소프라노의 앳된 볼처럼 발갛게 달아오르게 만들 만하다. 평생 변변한 독주곡도 하나 가져보지 못한 콘트라베이스에게 이는 참으로 낯설고 황당한 경험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찌됐건 첼로와 비올라의 음을 구분하지 못하는 나로서는 이 기회를 통해 콘트라베이스가 제일 낮은 음이라는 것을 알게 됐으니, 콘트라베이스와 나의 경계는 조금씩 허물어져가고 있다. 그리고 오늘 나는 프랑스의 해괴한 작가 파트리크 쥐스킨스의 소설 <콘트라베이스>을 과감하게 인터넷 구매했다. 거금 4,800원!

어찌됐거나 참 재미있는 연극이었다. 이 연극을 보여준 K양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저자 : 존 키건(역자 정병선)
출판사 : 지호
정가 : 18,000원

두 달 전이었을 거다. 인터넷으로 한꺼번에 책을 구입했다. 그 중에 하나였고, 책에 대한 평이 괜찮아서 구입했는데, 중간중간 들쳐보니 어느 부대가 어쨌느니, 진형이 어쨌느니, 병사들의 상태가 어쨌느니 하는 이야기라 재미없다 싶어서 뒤로 미뤄두다가 요즘에야 차근차근 읽고 있다.

우선은 의외로 재밌다. 아니, 흥미롭다고 이야기해야 할 것 같다. 군대를 다녀온 사람이 아니더라도, 한순간 전투(혹은 싸움)의 극도의 흥분상태를 경험해 본 이들에게 가장 공식적이고 파괴적인 폭력인 전쟁의 전투가 어떤 모습이며, 그것을 움직이는 역동적인 힘이 어디에 나오고, 그리고 각각의 병사들이 전투의 순간에 경험하는 것이 무엇이며, 그것이 전투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 이처럼 객관적이고 간결하고 자세히 묘사할 수 있다는 데서 놀라울 뿐이다. (이 책의 저자는 전쟁이나 전투에 한번도 참여해 본 적이 없다고 한다. 그래서 더욱 놀랍다.)

저자의 기록은 종전의 전투기록이 영웅적 리더십과 상투적 이미지, 그리고 승자 중심의 기록(선별적 기록) 등으로 전쟁(전투)의 본래 모습을 많이 가리고 있다고 보고 있다. 고대의 전투기록을 서사적으로 묘사한 여러 작품들을 통해서도 이러한 사실은 잘 드러난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가 대표적인 경우다.

[병사들은 두려움 때문에 싸운다. 첫째는 전투 거부의 결과(처벌)에 대한 두려움이고, 둘째는 잘 싸우지 못한 결과(살육)에 대한 두려움이다.]

전쟁은 무서운 폭력이다. 그것은 살육에 대한 두려움을 극한으로 몰고 가며, 광기에 어린 흥분으로 문명을 지우는 행위이고, 인간성의 최저점으로 치달아가는 야만이다. 세상 어디에서도 이런 폭력이 더 이상 문명(혹은 인권)의 이름으로 치장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경직된 인간들은 다 불쌍해, 살아온 날들을 말해 주잖아.”

솔직히 말하면, 나도 경직된 인간이다. 그래서였는지, 경직된 인간들을 보면 난 항상 느꼈다. 어린 시절의 그늘들이 느껴졌다. 그 그늘을 만든 게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학창시절 만난 또래일 수도 있고, 가족일 수도 있다. 대학 시절에 만났던 많은 사람들 중에 그런 그늘을 가진 후배들이 있었다. 그 친구들을 만날 때면 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나처럼 살아왔겠구나 라는 슬픈 예감이었다. 

이지안(이지은 역)에 대해 박동훈(이선균 역)이 느꼈던 감정들은 어쩌면 연민의 감정과 맞닿아 있다. 인간이 다른 이에게 약점을 드러내는 것은 위험하다는 것을 어렸을 적부터 몸으로 배워 온 이지안은 주위 사람들에게 냉랭하고 불친절하게 대하면서 자기를 가리고 보호한다. 다시는 상처받지 않기 위해 찬 바람으로 자신을 보호하지만 오히려 그러한 행동들이 박동훈에게는 안쓰럽고 불쌍하게 다가왔다. 

연민의 마음은 인간 본성이지만, 그 연민을 모두가 느낄 수 있는 건 아니다. 연민은 또다른 연민과 맞닿을 때 의미있다. 때로 우울하고 깊이를 알 수 없는 슬픔에 잠길 때에도 가급적 감추고 함부로 꺼내 남에게 드러내지 못한다. 그럴려면 자존심이 나서서 머릿속에 수치심을 쏟아 붓는다. 그래서 연민은 동정과 다른 것이다. 연민은 연민을 알아보고 수치심의 수치를 낮추어 주며 자존심을 달래 준다. 나와 같은 인간, 나처럼 아픈 사람, 함께 아파할 사람...

박동훈은 위기에 처해 있다. 하루하루 숨 가쁘게 달려가지만 도저히 메꿔지지 않는 공허한 가슴 한쪽의 아픔들. 가족을 위해 살아오고 희생했다고 위로하지만 내 아들이 나처럼 살지 않기를 바라는 삶을 살아왔다는 자괴감. 다시 이렇게 살아도 될까라는 계속된 의문에 답을 할 수 없는 수렁에 빠진 인생. 나름의 전문성으로 대기업 부장까지 올라왔지만 아내는 잘 나가는 변호사가 되었고, 대학 후배가 대표이사로 발탁되어 들어왔다. 아내는 점점 일에 빠져서 가정이나 남편에게는 관심이 없다. 형과 동생마저 폐인이 되어 어머니 집에 의탁해 살아간다. 통장 잔고는 29만원밖에 없고, 집을 담보로 은행 대출을 받아 형제들 분식집이라도 차려주자는 엄마를 만류한 그 때, 어디서 누가 보낸지도 모르는 5천만원 어치 상품권 뇌물의 유혹. 

이지안은 지칠 수가 없다. 할머니 요양원 비용을 대고, 빚 독촉을 핑계로 괴롭히는 광일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밤낮을 제대로 누워보는 일도 없이 일을 한다. 접시닦이 일을 하는 곳에서 음식을 훔쳐와 저녁을 때우고, 회사 탕비실의 커피믹스를 훔쳐 불면의 밤을 만든다. 빚은 끝이 없고, 할머니 요양원 비용도 밀려서 야반도주를 해야 했다. 가난한 조손 가정이라고 도움을 주는 손길이 없었을까? 열심히 살아가는 지안의 모습을 안타깝게 봐준 이가 없었을까? 하지만 그것도 네 번까지. 이지안이 살인을 했었다는 과거를 알면 눈빛이 흔들리고 도망가 버렸다.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은 삶. 삼만 살을 살았는데도 자꾸 왜 태어나는지 모를 삶. 

 

상처 받은 아이들은 너무 일찍 커버려.
그래 보여. 걔 지난날들을 알아보기가 겁난다.

 

많은 사람들의 값싼 동정에 시달려 보았던 이지안은 그녀가 불쌍하다는 박동훈의 말에 욕을 한다. 복수를 생각한다. 이지안에게는 월 오륙백만 원씩 받으면서 출근하는 박동훈의 그 말이 마치 고양이 쥐 생각하는 것처럼 고깝게 여겨진다. 부족할 것 없는 박동훈이 매일같이 지옥에 끌려가는 인상을 쓰는 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박동훈에게 배달된 뇌물 봉투를 훔치고, 그를 회사에서 쫓아내려는 도준영의 음모를 돕는 것도 이지안에게는 생존을 위한 지옥 같은 삶의 연장일 뿐이다. 박동훈의 삶은 그에게 의미 없다. 

박동훈은 우연히 만난 이지안이 홀로 할머니를 모시고 산다는 것을 알게 됐다. 억척같이 살아가면서도 할머니를 정성스럽게 모시는 이지안의 모습은 착하다. 싸가지없이 굴지만 지안의 깊은 곳에 있는 측은지심의 마음을 박동훈이 알았다. 이지안을 돕고 그녀의 과거를 연민의 마음으로 알아간다. 언제부터인지 확실하지 않지만, 이지안이 사람을 죽였다는 걸 박동훈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아는 척하지 않고,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는다. 

 

 

모른 척 해 줄게. 너에 대해서 무슨 이야기를 들어도, 모른 척 해 줄게. 약속해 주라. 너도 모른 척 해 준다고. 겁나. 너는 말 안 해도 다 알 것 같아서···· 
그러면 누가 알 때까지 무서울 텐데, 누가 알까···· 만나는 사람마다 이 사람은 언제쯤 알게 될까, 혹시 벌써 알고 있나···· 어쩔 땐 이렇게 평생 불안하게 사느니 그냥 세상 사람들 다 알게 광화문 전광판에 떴으면 좋겠던데···· 

 

처음 이선균, 이지은 주연에 <나의 아저씨>라니! 오해받기 딱 좋았다. 드라마 안에서도 그랬지만 드라마 밖에서는 더욱 시끄러웠다. 아저씨와 어린 소녀의 사랑? <도깨비>가 대박을 내니 판타지가 아닌 현실 내용으로 재탕하려는 것이냐는 비난도 있었다. 나 역시 그런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삐닥하게 본 것이다. 시리즈가 전개된던 시기에는 프로젝트 작업으로 한창 바쁠 때여서 못 보다가, 아내의 시청 평이 워낙 좋아 나중에 보자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야 봤다. 이런 드라마를 지금에서야 보다니 내가 나쁜 아저씨다. 

좋은 이야기는 스스로의 삶을 돌아보게 한다. 이 드라마의 박동훈은 나의 삶을 돌아보게 했고, 나는 박동훈과 박상훈(맏이)과 박기훈(막내)의 어디쯤에 있는 아무개라고 생각할만큼 인물들에 공감했다. 때로는 박상훈처럼 지질하고 눈물 많고 겁도 많은 데다 개저씨 같을 때도 있고, 어떨 때는 개폼 잡으며 큰소리치고 싶은 박기훈 같은 면도 있다. 나름 회사 중간 간부라는 직책에 회사-집-회사 외에는 별 볼 일 없이 사는 박동훈 같은 면도 있다. 

하지만 박상훈의 인간성에는 부족하고, 박기훈의 용기에는 못미치고, 박동훈의 실력과도 거리가 멀다. 드라마는 판타지라지만 열패감이 드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 그럼에도 볼수록 빠져드는 매력에 정신줄을 놓아버릴 것만 같았다. 드라마를 보면서 저 세 형제보다 못하다는 열패감은 깊어졌지만, 더 나아질 수 있다는 기대감은 그것을 상쇄할 만큼 거대해졌다. 희망이 보이는 삶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다···· 그말을 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없어.

 

어른이 되면 홀로서야 한다. 행동에 책임져야 하는 것이다. 처음 책임질 일을 맡아서 진행할 때의 그 두려움을 기억해 보자. 실패하면 어떻게 할까, 두려움에 떨었던 일들이 엊그제 같았는데, 어느새 큰 프로젝트일들을 여러 사람을 지휘하며 해내고 있다. 그렇지만 두려움은 항상 등 뒤에 따라온다. 

게다가 비슷한 또래의 주위 사람이 실패를 맛보고 떨어져 나가는 모습도 자주 보인다. 작은 실수들에 조금씩 내상을 입게 되면서 그런 두려움은 커져간다. 아무도 나에게 괜찮다,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해 줄 사람이 없어진다. 홀로 섰다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기댈 곳을 찾는 게 사람이다. 경제적인 독립을 위해 달리고 있지만 여전히 삶은 간당간당 외줄타기 같다. 마음도 지치고 몸도 지치는 나이가 되었지만 멈추면 쓰러지는 자전거처럼 계속 달린다. 둘 중 하나가 아닐까 겁먹는다. 지쳐 쓰러지거나 실패해 쓰러지거나···· 

 

"너···· 나 왜 좋아하는 줄 알아? 내가 불쌍해서 그래. 네가 불쌍하니까, 너처럼 불쌍한 나, 끌어안고 우는 거야."
"아저씬 나한테 왜 잘해줬는데요? 똑같은 거 아닌가? 우린 둘다 자기가 불쌍해요."

 

20대와 40대의 화해는 이렇게 서로의 슬픔과 고충을 알아가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로맨스가 아니다. 우리 사회가 끌어안고 가야 할 슬픔을 직시하고 그 안에서 서로의 기댈 곳이 되어 주려는 작은 움직임들이 필요하다. 서로의 상처를 치유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좀더 좋은 어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 이 드라마에 감사를 전한다.

 

"사람 알아버리면 그 사람이 무슨 짓을 해도 상관없어. 내가 널 알아."

 

이보다 멋진 엔딩이 어디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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