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젝트 헤일메리>가 증명한 SF의 진화

내 젊은 시절 SF는 은하계를 누비는 은하철도 999나 인간과 구별되지 않는 로봇이 지구를 지배하는 터미네이터 또는 생명과학을 이용해 인간과 너무나도 흡사한 괴물을 만들어 내는 미친 과학자 이야기인 프랑켄슈타인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런 이야기에서 던지는 '무엇이 인간적인가'라는 질문은 철학적 생각거리를 던져 이야기를 살리는 주요 레시피 중 하나인 셈이다. 아시모프(로봇 3원칙, <I, Robot>)나 클라크("충분히 발달한 과학 기술은 마법과 구분할 수 없다")의 시대엔 과학이 알 수 없는 미래와 인간관을 받치는 '배경'이었다면, 앤디 위어의 소설 <프로젝트 헤일메리>는 현대 SF의 결이 너무나도 다름을 보여 준다. 번뜩이는 가설과 치밀한 검증의 과정이 스펙터클 하게 펼쳐지는 과학은 액션 스릴러를 넘어서는 재미다. 과학, 너 이렇게 섹시해? 과학자가 이렇게 멋져도 되는 거야?
낭만의 시대에서 '공학'의 시대로
과거의 SF가 “우주는 경이로운 미지의 영역이다”, “인간성 상실의 미래는 암울하다 ”라며 독자를 미지의 세계로 유영하게 만들었다면, 최근의 SF는 “그래서 11광년 떨어진 별까지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라고 묻는다. <프로젝트 헤일메리>의 주인공 그레이스에게 낭만 따윈 없다.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자마자 자신의 이름도 기억나지 않으면서 내가 타고 있는 우주선이 어디에 있는지, 중력이 얼마인지부터 확인한다. 과거의 SF 주인공이 우주선 창밖을 보며 사색에 잠기고 인간성에 대해 회의할 때, 현대의 주인공은 우주선 벽에 보드 마커펜으로 미적분 방정식을 갈겨쓰며 생존 방법을 찾는다. '우주 미아'라는 설정은 같지만, 대처하는 방식이 '철학'에서 '공학'으로 진화한 것이다. 계속해서 닥쳐오는 위기 때마다 과학적 가설과 이를 증명하는 방법을 통해 해법을 마련한다.
"내가 누구지?"… 기억상실과 과학적 퍼즐 맞추기
소설의 도입부, 주인공 그레이스는 혼수상태에서 깨어난다. 주위엔 알 수 없는 시체만 있고, 몸은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데다 발음까지 이상하다.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난다. 보통의 드라마라면 여기서 뜬금없는 가족애를 떠올리며 울겠지만, 우리의 주인공은 다르다. 그는 본능적으로 주변 기기들을 뜯어보고,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고, 우주선에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중력 가속도를 측정하기 시작한다. 이 과정을 보며 ‘와, 나라면 일단 울면서 문부터 두드렸을 텐데, 이 사람은 물리 법칙부터 확인하네?’라고 했을 것이다. 자신의 기억을 되찾아가는 과정이 마치 최고 난도의 고급 방탈출 게임을 지켜보는 듯한 쾌감을 준다. 아니, 우주 한복판에서 방탈출 게임? 나가면 어디?
과학은 '장식'이 아니라 '서사' 그 자체
과거 SF가 과학을 다룰 때, 독자들은 작가가 정해준 과학적 사실을 그냥 받아들이거나 상상의 나래 한껏 펼치기 위한 도구였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독자들도 인터넷으로 최신 물리 가설을 꿰고 있다. SF를 좀 안다는 독자들에게 양자역학과 상대성 이론은 이제 이해하기 어려운 난제가 아니다. 그래서 작가들은 더 이상 대충 얼버무릴 수 없다.
<프로젝트 헤일메리>에서 태양을 먹어 치우는 '아스트로파지'를 다루는 방식은 압권이다. 이 물질은 단순히 신비한 아이템이 아니라, 열역학적 법칙 안에서 굴러가는 하나의 '실체'로 존재한다. 물론 작가가 상상해 낸 크리쳐이지만 그 생명체에 대해 알아가는 과정의 디테일함은 치밀하다. 과학적 디테일이 서사의 엔진이 되어, 독자가 그 계산 과정을 따라가며 주인공과 함께 땀을 쥐게 만드는 것. 이것이 현대 SF가 과거와 차별화되는 가장 큰 포인트이다. 태양을 삼키는 미생물이라니, 이런 상상력은 도대체 어디서 나타나는 것인지...
"이봐, 돌덩이 친구?"… 소통도 데이터로!
외계인 '로키'와의 조우 장면은 과거 SF와 가장 극명하게 갈리는 지점입니다. 옛날 SF 영화였다면 외계인과 만나는 순간 텔레파시나 우연한 언어 습득으로 대화가 시작됐다. 심지어 외계인이 친절하게 영어를 한다. “Hi, everyone. Nice meet you.” 우리는 외계인과 대화하기 위해 그토록 영어 공부를 열심히 했었나?
하지만 이 소설은 다르다. 발성법도 다르고 살아온 환경도 천지차이에다가 시각이 거의 없는 스톤, 청각이 미개한 인간이 서로 소통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하지만 두 지성체는 수학과 물리 상수를 주고받으며 '데이터의 교환'을 통해 신뢰를 쌓는다. 수학과 물리는 별과 별을 이어주는 최초의 소통 도구가 되는 셈이다. 진리 앞에, 과학이 얼마나 정교한 소통의 도구인지 깨닫게 된다. 이건 마치 우주적 규모의 '고품격 펜팔'이라 할 수 있겠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처럼 소설 <프로젝트 헤일메리>는 과학적 디테일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과거의 SF가 우리에게 '상상력의 확장'을 선물했다면, 현대의 SF는 '과학적 탐구의 희열'을 선사한다. 영화를 보고자 하는 분이 있다면 단언컨대 먼저 소설을 보기를 추천한다. 영화는 영상미를 살리기 위해 소설이 주는 진짜 재미를 많이 생략하고 외계인 로키와 지구인 그레이스의 우정이 중심축이 되어 아쉬운 점이 많다. 그러니 꼭 영화보다 소설을 먼저 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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