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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마음의 순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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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미노 데 산티아고’, 즉 산티아고 가는 길을 다녀온 서명숙 씨는 각자의 공간에 ‘카미노’를 만들어야 한다는 말에 공감을 하고 자신의 고향 제주도에 ‘제주올레’를 만들었다. ‘올레’란 ‘거리길에서 대문까지 집으로 통하는 아주 좁은 골목길’을 뜻하는 제주 방언이다. 아무리 길이 흔하다고 하지만 걷고 싶은 길을 만든다는 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길이 있다고 해서 다 걷기 좋은 길도 아니다. 걷고 싶은 길에는 문화가 담긴 풍경이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 이야기가 있어야 한다. 이야기는 그 지역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지만, 스스로 순례자가 되어 만들어가는 이야기도 길 위에서 꽃핀다. 또 길을 만들어도 사람이 다니지 않는다면 그 길은 지워지기 마련이다. 앞사람의 발자취가 느껴지고 뒷사람을 위해 함부로 발 디딜 수 없는 그런 길이 진짜 길이다.

제주도 여행 둘째 날은 바로 그 제주올레 첫 번째 길을 걸어 보기로 했다. 뜨거운 땡볕 아래서 6시간 이상 20km 가까이 걸어야 한다. 쉽지 않을 것이다. 이번 트래킹은 내가 넣자고 강력히 주장했다. 백두대간의 여운이었을까, 걷는 게 좋다. 트래킹이 없었다면 제주에 가지 않았을 것이다.



첫번째 길의 시작점인 시흥초등학교는 먼저 성산까지 렌트카로 이동하고 그곳에 차를 주차한 다음 시흥초등학교까지 택시로 이동했다. 렌트카가 없을 경우 제주나 서귀포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동회선 일주도로를 왕복하는 시외버스를 타고 시흥리에 내리면 된다. 1시간 좀 더 걸리며, 운임은 3000원 정도(변동 가능). 우리가 시흥초등학교에 도착한 시간은 10시 45분. 중산간 지역에 있는 학교라서 그런걸까. 작은 규모이지만 깔끔한 잔디운동장이 마음에 쏙 든다. 데굴데굴 굴러다녀도 먼지 하나 묻지 않을 것 같은 깨끗함이 느껴졌다. 시간만 된다면야 폴짝폴짝 뒤어다니면서 다방구 놀이라도 하고 싶지만, 이날 가야할 길이 멀다.





▲ 뒤에 보이는 작은 언덕이 말미오름(혹은 말오름)이다.
올레 첫길은 초등학교 옆으로 돌아서 그 오름을 오른다.


걷는 것은 좋은 일이다. 비단 육체적 건강만을 생각해서 하는 말이 아니다. 우리는 얼마나 바쁘게 살아가는가. 경보 하듯이 걸어다니거나 심지어는 뛰어 다닌다. 대중교통이 1~2분만 지연되도 분노수치가 올라간다. 빨리빨리에 익숙한 나머지 걷는 것도 잊어버렸다. 걸음을 못 걷는다는 말이 아니다. 우리는 걸으면서 주위 사물과 교감하고 하늘을 보며, 땅을 생각한다. 자연과 인간의 삶을 한번 더 살펴보고 관조할 수 있는 여유와 철학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산티아고 길을 걷는 여행객들이나 오체투지로 라싸까지 가는 사람들이나 그들의 목적지는 라싸나 산티아고가 아닌 바로 그 자신이다. 신 앞에 겸손해진 자아를 이끌어내며 걷는 것, 그것이 걷기의 철학이고 순례길이 담고 있는 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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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미오름에서 맞는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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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올레는 길바닥과 돌담, 전봇대에 진행방향을 가르쳐 주는 안내 표시가 있다. 백두대간처럼 리본으로 길 안내를 하던 것에 익숙한 나로서는 페인트로 칠해진 화살표가 낯설고 눈에 거슬린다. 조만간 많은 사람들이 찾는 길이 된다면 멋들어진 이정표가 사람들을 맞아주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아무튼 길 잃어버릴 일은 별로 없다. 단지 주위를 둘러볼 줄 아는 여유만 있다면 충분히 길을 찾아갈 수 있다.

시흥초등학교 옆길로 해서 말미오름을 옆으로 돌아가는 돌담길이 나온다. 바닥에 나온 표시에 주의하면 길은 찾기 쉽다. 한적한 돌담길을 걷다보면 슬슬 땡볕이 거슬린다. 바람이라도 시원하게 불어주면 좋겠지만, 산밑이라서 아직은 덜 시원했다. 여름에는 덥더라도 반드시 긴팔을 준비하는 게 좋겠다. 제주도 햇살을 쉽게 봤다가 지금 팔뚝이 허물을 벗고 있다.

그래도 고즈넉한 제주도 시골길을 걷는 기분이 좋다. 밭일 마치셨는지 망태기 들고 점심 드시러 가는 할망(할머니의 제주도 방언)을 만나면 공손히 인사도 드리자. 반갑게 웃어주는 할망의 주름진 얼굴도 제주가 주는 선물이다. 환국은 배가 고팠는지 돌담 옆에 버려진 감자에 관심을 가졌다. 얼마전까지 밭에는 감자가 심어져 있었나보다.



 

말미오름을 본격적으로 오르는 초입에는 시흥리 청년들이 내건 현수막도 눈에 띈다. 제주올레를 방문하신 분들을 환영한다는 내용이다. 오름에 오르는 길은 사람의 손길이 많이 가 있어 편했다. 이곳을 찾는 여행객들이 많아져서기도 하겠지만, 제주올레를 만드는 이곳 사람들의 정성과 관심이 꽤 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한 20분 정도 오르니 목장으로 들어가는 문이 나왔다. 제주올레 팸플릿에는 걸쇠를 열고 들어갈 수 있다고 했는데, 걸쇠가 아닌 끈으로 묶여 있었다. 넘어가면서부터는 목장이다. 말이나 소가 도망가지 못하게 하려고 문을 잠가 놓는데, 이후에 나오는 다른 문들은 걸쇠로 되어 있어 쉽게 통과할 수 있었다.

오름에서 본 풍경은 장관이었다. 연무 때문에 아주 멀리까지는 보기 어려웠지만, 그래도 오름 아랫동네와 성산 앞바다까지는 아주 잘 보였다. 예전 한라산에서 봤던 풍경과는 사뭇 다르다. 제주도가 보다 친근하게 가까이 다가선 듯한 느낌이다. 바람은 또 어찌나 시원하게 불어주던지, 여기 오면서 흘렸던 땀을 순식간에 날려 보낼 수 있었다.




▲ 제주의 검은 흙이 녹색과 대비되어 두드러지게 보였다. 밭을 갈아 놓은 뒤 아직 작물을 심지 않았다.

▲ 멀리 희미하게 성산일출봉이 보인다. 까마득하다.
그러니까 이날 걸어야 하는 거리는 저기를 넘어 그 다음 섭지코지다.




▲ 여행객들을 위해 벤치도 마련해 놓았다. 목책을 따라 가면 길을 찾기가 어렵지 않다.







▲ 가능하면 카메라를 가져가자. 휴대전화 카메라까지 동원됐다. 각자가 담은 풍경들은...


설마 클릭하는 건 아니지?

말똥. 목장은 지뢰밭.

우리가 걸었던 길은 목장길이다. 목장길이니 말이 뛰어다니고 소들이 풀을 뜯고 있다. 우리가 지나가는 길에는 소보다 말이 많았다. 말들이 뛰어다니고 힝힝거리며 발을 구르는 모습을 텔레비전이 아닌 목장에서 보는 재미도 좋다.

단, 발밑을 조심하자. 말똥이 천지다. 유감스럽게 아무도 똥을 밟지 않았는데, 나만 두 번이나 밟았다. 풀들을 먹고 사는 놈이라 똥이 냄새도 없고 또 오래된 똥은 흙색과 비슷한데다가 풀속에 숨어있어서 잘 보고 다녀야 피할 수 있다. 경치 좋다고 둘레둘레 다니다가 똥을 두 번 밟았지만, 소똥 밟으면 재수가 좋다는 말에 빗대어 히히덕거리며 좋아라했다. 똥 밟는게 좋을리 없지만 경치나 바람, 그리고 걷는다는 것에 취했던 것이다.

천연거름 덕분인지 야생화가 참 많고, 그에 어울리는 갖가지 나비들이 춤을 춘다. 새끼손톱보다 작은 이름모를 야생화들 틈으로 훨훨 날아다니는 나비들은 목가적 풍경의 하나를 이루고 있다. 여기에 멀리 펼쳐진 제주의 들판과 바다를 보는 재미가 합쳐졌다. 원경과 근경 모두가 즐겁다.

 





▲ 말미오름을 잠깐 내려와서 오름과 밭 사이로 난 오솔길.




▲ 초지에 길표시가 없다고 걱정할 것 없다. 땅에 있는 돌맹이 위에도 표시가 있고, 나무에도 표시가 있다.




▲ 배가 고프다며 쳐지기 시작한 환국. 나중에 알고 보니 너무 배고파 산딸기도 따먹었다고 한다.











▲ 말들을 풀어 키우고 있고, 목장 한곳에는 제주도식 무덤도 있다.



▲ 좋댄다.



▲ 내 앞에 간 죄로 뒷모습만 찍혔다. 물론 의도적으로 현상이는 사진찍히는 걸 피했다.



▲ 사람들이 오니 경계를 하는 눈빛이 역력했다. 하지만 가까이 가지 않는다면 먼저 달려드는 일은 없다.



▲ 이렇게 해서 오름 걷기는 끝났다. 이제 종다리 마을로 가는 길이다.


오름에서 준비한 간식을 먹었다. 미리 감자와 샌드위치를 좀 만들어 왔는데, 아주 요긴하게 먹었다. 간식거리는 시흥리 마을에 있는 구멍가게에서도 구할 수 있다고 한다. 역시 많이 걸을 때는 수시로 먹는 일이 중요하다. 모두가 배가 고파 혼났고, 무엇보다 환국이는 지쳐버렸다. 그래도 감자 하나를 먹으니 속이 든든하다. 오름 여행을 끝낸 시간은 12시 반 정도. 약 1시간 반의 여행이었다. 짧지만 꽤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목장을 나와 다시 시작되는 길은 시멘트 길과 중산간도로인 아스팔트길이다. 뜨거운 지면을 따라 걷는 일이 목장길을 걸었을 때보다 좀 힘들다. 시멘트길에서는 간간히 빗물이 고인 곳이 많아서 까다로웠고, 아스팔트 국도길은 가끔씩 지나다니는 차량에 신경을 써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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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달리에서 성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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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름의 감동과 재미 때문인지, 종달리 마을까지 가는 길은 좀 지루했다. 다들 점점 더 뜨거워지는 태양에 조금씩 지쳐갔다. 마침내 종달리 마을 앞 표지석에 도착했고, 더위도 식힐 겸, 입구의 매점에 잠시 들렸다.

처음 시흥초등학교 앞에서 보았던 밝은 미소는 발갛게 달구어진 뺨 때문에 지워졌다. 서영 선배는 다시 선크림을 발랐고, 나는 매점 앞 수도꼭지를 틀어 등목을 했다. 생각해보니 이렇게 밖에서 등목을 해본 게 까마득하다. 한참을 쉬었다가 다시 길을 나섰다. 이제 종다리 마을로 들어가서 옛소금밭을 지나서 종다리 해안가로 가야 한다. 그리고 시흥해녀의집에서 늦은 점심을 해결할 것이다.

 

▶ 종달리 폭낭.
종달리 마을길에서 만나는 나무.
우리가 지날 때도 동네 어르신들이
나무 그늘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옆에 서 있는 표지석에는
종달리 소금밭의 유래가 적혀있다.
자세히 보지는 못했다.




 



▲ 종달리 소금밭 사잇길. 물론 지금은 소금밭의 흔적만 남았다.


▲ 지금 소금밭은 이처럼 무성한 잡풀들이 점령했다.



종달리 마을을 지나면 곧 해안도로가 나온다. 2006년 나는 이 도로를 달려 서귀포시에서 제주시로 갔다. 그때는 엄청난 바람 때문에 힘겹게 달렸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러나 이날만큼 바람이 제일 고맙다. 걷는 걸 방해할 만큼의 바람이 거세지 않았고, 시원하게 쌩쌩 불어주어 땡볕 더위도 잊을 수 있었다. 걷는다는 것은 자전거조차 가기 어려운 길을 걷는다는 것이다. 길도 나있지 않은 오름은 물론 해안가 바위들 사이나 모래사장은 자전거라도 가기 어려운 길이다. 이런 길을 걷는 재미는 자전거와 다른 맛이 있다.
제주도 여행하는 내내 자전거 여행자들을 많이 봤다. 대부분 고등학생이나 대학생으로 젊은이들이었는데,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힘겹게 페달을 밟는 모습을 보면 예전 내 생각이 나 코끝이 찡해진다. 자전거 여행도 좋지만, 제주올레도 추천하고 싶다.

제주도는 크게 제주시와 서귀포시로 나누는데, 종달리와 시흥리는 바로 제주시와 서귀포시의 경계다. 종달리와 시흥리는 인접해 있지만 전자는 제주시에 속해있고, 후자는 서귀포시에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두 곳 모두 해녀들이 많고, 일제시대에는 이 지역 일대 해녀들이 일제의 폭압적인 수탈정책에 거세게 저항했던 역사가 서려있다고 한다.



▲ 종달리와 시흥리의 경계지역. 오징어를 말리고 있던 곳이다. 이때가 막 2시를 넘어 갈 때였다.



▲ 오징어를 말리고 있던 곳에서는 직접 오징어를 파는데, 맛이 괜찮다.



▲ 완전히 마른 오징어가 아니라 반건조 오징어를 살짝 구워주는데, 짜지 않고 쫄깃쫄깃해서 먹을 만하다.
한마리에 1000원~1500원 한다.


▲ 종달리 해안도로에서 찍은 바다사진. 맑고 투명했으며 해초가 많았다.


점심 때가 훨씬 지나도록 먹은 게 없으니 다들 힘들었다. 2시가 넘어서야 시흥리로 들어섰는데, 시흥 해녀의집이 눈앞에 보이자 그제서야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우리가 점심을 먹기로 계획했던 곳이기 때문이다. 시흥 외에도 오조리나 섭지에도 해녀의집이 있다. 모두 그 마을 어촌계에서 운영하는 곳이고 지역 해녀분들이 따온 싱싱한 해산물을 싸게 내놓고 있어 맛있는 식사를 해결할 수 있는 곳이다. 미국산 쇠고기가 싸고 질좋다고 한다면 여기 음식은 그야말로 천상의 음식이라고 할만하다. 시흥 해녀의집은 제주올레에서 추천한 맛집으로 조개죽이 일품이다. 우리 일행들도 이곳에서 조개죽과 전복죽을 시켜서 먹었다. 죽이라고 해서 얕보면 큰코 다친다. 커다란 사기 사발에 하나 가득 나오고 반찬거리로 나오는 지짐도 부족하면 더 가져다 주어 그야말로 배가 터지도록 먹을 수 있었다. 특히 제주도에서 나는 반찬들을 하나씩 먹어보는 것도 지역의 맛과 멋을 알아가는 재미다.

당연한 말이지만, 조개죽에 조개가 참 많았다. 물큰 씹히는 조개와 살살 녹는 쌀알이 오묘하게 어우러져 입안에 맴돈다. 전복죽도 하나 시켰는데, 그렇게 덩어리째 들어간 전복죽 구경은 처음이다. 보통 서울시내에서 전복죽을 먹으면 전복이 그 실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잘게 썰어져 있는데, 이곳 해녀의집 전복은 모양 그대로 살려 듬벙듬벙 죽속에 빠져있다. 전복을 좋아하는 이들에게는 전복죽도 추천할 만하다. 맥주 한 병을 시켜 똑같이 나누어서 마셨다. 열린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닷바람이 벽에 달린 선풍기를 무색하게 했다. 조개죽은 6,000원, 전복죽은 9,000원이다.


▲ 이런 전이 나오는 식당이 나는 정말 좋다. 우리가 너무 잘 먹자 아주머니가 하나 더 갖다 주셨다.

▲ 겡이 튀김이라고 부른다. 해안가 바위틈에 돌아다니는 게를 잡아서 튀긴 것으로 바싹하니 맛이 좋다.


▲ 조개죽. 먹다 보니 사진찍은 걸 잊었더랬다. 조개의 시원한 해물맛이 일품이다. 입에 착착 붙는다.


시흥해녀의집 맞은편에는 조가비박물관도 있다. 조가비박물관을 보고 갈까 했으나 예상했던 시간보다 많이 지났다. 천천히 쉬엄쉬엄 구경하자는 취지였는데도 불구하고 출발이 늦어지는 바람에 서둘러 길을 나섰다. 시흥리해녀의집을 나온 시간은 3시 반경이었다.

식사가 달콤했던 탓일까. 다시 힘차게 길을 나섰다. 성산이 이제 뚜렷하게 보였다. 바다 저 멀리 우도도 눈에 들어왔다. 해안도로를 걷다가 물이 빠진 바닷가를 거닐었다. 해초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다. 걸으면서 조개도 줍고 소라도 주웠다. 제주에서 주워온 조개와 소라는 지금 우리집 어항에 들어가 있다. 어항이 한결 더 예뻐졌다.






▲ 해안가를 거닐었다. 썰물 때라서 걷기가 좋았다. 바닷물이 빠지자 해안가는 여기저기 해초들이 어지럽다.








▲ 성산항에 정박해 있는 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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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산봉에 올라 꽃을 던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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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차를 주차해 놓았던 성산봉에 도착한 시간이 4시 30분 경, 여기까지 5시간 반정도 걸린 셈이다. 중간에 식사 시간이 좀 길었고, 매점에서 쉬었던 시간도 있었다. 그렇다면 늦지 않게 온 것이지만, 성산봉을 올랐다가 다시 섭지코지까지 걷는다면 해가 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체력적인 한계를 느끼기 시작했다. 성산봉 오르는 길도 쉽지 않으니 아마도 몇몇은 여기서 여정을 정리해야 할 듯싶었다. 제주올레도 여기서 성산봉을 오르지 않고 옆으로 돌아가는만큼 힘든 이들은 그 길을 선택해도 되겠다.

생각해 보니 성산봉 꼭대기에 올라가 본 적이 없다. 성산봉에 입장료 내고 들어와 본 게 대학 수학여행 때로 기억되는데, 그때도 꼭대기는 오르지 않았다. 아마도 전날 술먹고 힘들어서 포기했을 거다. 술이 웬수다. 하지만 오늘은 멀쩡한 정신과 건강한 체력이 뒷받침 해주고 있다. 좀 지치긴 했지만, 이 정도는 백두대간 여행에 비하면 식은죽 먹기다.

물론 성산봉은 꼭대기에 오르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성산봉으로 오르는 길 좌우측으로 난 산책길을 걷는 것도 성산봉의 절경을 볼 수 있는 방법이다. 성산봉을 제대로 구경하려면 아마도 2~3시간 잡아야 하지 않을까. 입장권(2,000원)을 끊으면서 물어보니 왕복 40분 소요된다고 한다. 쉬엄쉬엄 1시간을 잡을 수 있다. 그러니 성산봉 곳곳을 모두 둘러본다면 2~3시간 정도는 잡는 게 맞다.


▲ 완만한 비탈길이 끝나고 성산봉에 가까워 오면 줄기찬 계단길이 이어진다.







▲ 오랜 세월에 걸쳐 이어졌다는 제주도와 성산봉의 증거.

▲ 성산봉 분화구. 가운데 나무 한그루가 인상적이다.









▲ 서영선배는 줄곧 머리에 꽂아 두었던 꽃을 여기 분화구로 던졌다.













▲ 성산봉 한켠에 마련된 매점 겸 식당. 밑에서는 해녀들이 갓잡은 회와 조개류, 해삼 멍개 등을 판매하고 있다.
시간이 되면 내려가서 소주 한잔 해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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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산봉은 줄곧 계단길이다. 꼭대기에 오르면 분화구가 훤히 보인다. 성산봉은 제주도와 마찬가지로 바다에 생긴 화산섬이다. 오랜 세월 제주도와 성산봉 사이의 바다가 모래로 메워지면서 자연스럽게 연결됐다. 

어렵게 올라가자 아담한 분화구 너머 넓게 펼쳐진 바다가 시원하게 들어온다. 봉우리에 가려져 오지 않던 바람도 여기에서는 시원하게 이마를 쓸어주었다. 치마를 입고 온 젊은 처자도 있고, 샌달을 신고 올라온 총각도 보인다. 아이들은 더더욱 신났다. 힘든 것도 모를 때다. 숨이 턱끝까지 올라온 아저씨 아주머니도 꼭대기에 올라서서 길게 한번 숨을 쉬어 본다. 보고 듣고 냄새 맡고 살갗에 닿는 모든 것들이 시원하다.

성산봉 꼭대기에는 토끼가 한가족을 이루고 살고 있다. 환국이가 신났다. 거북이가 토끼를 만났으니 아니반가울까. 토실토실하게 살이 찐 토끼는 사람들이 익숙한지 적당한 거리를 두면서 풀을 뜯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도 도망가지 않더니 손길이 닿으면 토라진 여인처럼 돌아서서 멀리 뛰어갔다.

서영 선배는 길가에서 꺾어 온 꽃 한송이를 이곳 분화구를 향해 던졌다. 제주의 아름다움에 대한 찬사일까. 아니면 힘겨운 여정을 마무리하는 통과제의였을까. 꽃을 던지는 손이 곱다. 하긴 이렇게 오래 걸어보는 것도 오랜만일 것이다. 결국 서영선배와 현상이는 이곳에서 차를 타고 섭지코지로 가 우리를 기다리기로 했다. 멀리 섭지코지가 흐릿하게 보이지만 까마득하다. 아마도 1시간 정도는 걸리지 않을까 어림잡아 보았다(결국 2시간 정도 걸렸다).

이제 나와 환국이만 남은 길을 걷기로 했다.



▲ 수마포 해안. 잘 보면 동굴이 보인다.


섭지에서 지는 해를 보다

 

이렇게 되니 나와 환국이가 2004년 함께 지리산을 갔을 때가 생각났다. 그때도 4명이 같이 갔었는데, 서영선배만 다르고 3명이 이번 제주여행에 같이 온 셈이다. 비슷한 점은 당시에도 2명이 마지막 천왕봉을 오르지 못해 환국과 나만 올랐는데, 이번에도 2명이 빠지고 나와 환국이가 마무리 화룡정점을 찍으러 가는 것이었다. 묘한 우연이다.

위의 사진은 수마포라고 한다. 성산의 옆모습이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일본군이 만들어 놓은 동굴로 대공포 기지가 있었다. 4.3 당시에는 이곳에서 토벌대에 의해 양민 학살이 자행된 것이라고 한다. 제주의 뼈저린 아픔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이다. 나와 환국은 여기서 과감하게 바닷가로 내려섰다. 썰물 때라 바닷물이 꽤 많이 빠졌다. 샌들을 챙기지 않은 것이 두고두고 후회가 됐다.
































▲ 순비기. 나무의 줄기가 모래땅 속으로 숨어서 뻗어나가므로 해녀들이 '물에 들어간다'는 의미의 제주어 '숨비기'라는 명칭이 붙었다.



▲ 모래사구.  간조 때 모래가 쓸려가는 걸 방지하기 위해 나무를 이용해 방책을 세웠다.



▲ 어느 노인이 그물을 손질하나 싶었는데,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외국인이 글을 쓰고 있었다.



수마포 해안을 지나면 광치기 해변으로 접어든다. 기나긴 해변이 멀리 섭지까지 펼쳐졌다. 종달리 해안가에서는 해안도로를 따라 거닐었는데, 성산봉을 나와서는 줄곧 바닷가로만 걸었다. 2시간 가까이 걷는 길이 지루하다고 보면 오산이다. 갖가지 바다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해변가는 모래사장도 있고, 너럭바위 지대도 있다. 모래사구 언덕길에는 순비기 군락도 볼 수 있다. 바위지대에는 자잘한 이끼들의 색깔이 탐스럽다. 잘 짜여진 융단처럼 넓은 바위에 깔려 있는 이끼들이 좋다고 함부로 발걸음을 떼어서는 위험하다. 꽤 미끄럽다. 하지만 조심스럽게 내딛는 발걸음 때문에 더 많은 것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순비기는 30~60cm정도 자라는 키작은 나무인데 바닷가에 이렇게 어여쁜 꽃나무가 자란다는 게 놀라웠다. 반짝반짝 빛나는 연두색 잎사귀는 작고 탐스러운데다가 연보랏빛의 맑고 투명한 꽃잎이 마음을 사로잡는다. 천지로 피어난 꽃들과 잎들을 만져보다 보면 길에서 만난 행복이 이런 것이구나 싶다.

바닷가 모래사장이라고 모든 곳이 해수욕장일 수는 없지만, 해수욕장이 아니라고 해서 해수욕을 해서는 안된다는 법도 없다. 이 길을 가다 보면 해수욕장이 아닌데도 해수욕을 즐기는 사람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홀로 바닷가에 앉아서 글을 쓰던 외국 노인은 인상적이었다. 아마도 노년의 휴가로 제주를 찾은 듯하다. 반갑게 "안녕하세요"라는 인사를 건넸다. 외국인이지만 한국에 왔으니 한국어 인사말 정도는 알 것이라고 생각했다. 실상 어느 나라 사람인지도 모르는데, 영어로 '헬로우'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아무튼 먼바다를 보며 글을 쓰는 그의 모습은 내게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환국은 글을 쓰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틀림없이 지금 쓰는 글에 우리의 모습이 담겼을 거라며 의기양양이다.

모래사구 근처에서는 버려져 돌아다니는 가느다란 대나무 막대기도 주웠다. 너럭바위 지대는 미끄러울 수도 있고, 모래사장은 푹푹 빠지니 지팡이가 필요하다. 그렇다고 잘 꽂혀 있는 모래사구 방책용 나무를 뽑지는 말자. 걷다 보면 버려진 대나무들이 천지다.

길을 걷다 보니 꽤 긴 거리다. 1시간이면 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런저런 구경도 하고 천천히 길을 가다보니 2시간이 다 되어갔다. 7시 반을 넘어가니 서녘 하늘로 해가 넘어가는 모습이 보인다. 어디쯤 왔냐는 일행의 전화도 계속 왔다. 섭지에서도 계속 바닷가 길로 가라고 제주올레 팜플릿은 적혀 있는데, 우리는 그냥 시멘트 포장길로 해서 섭지코지로 올랐다.



▲ 해가 지고 있다. 섭지에서.



▲ 섭지코지 등대

▲ 저 봐라. 대나무 작대기에 모자는 삐뚤하고 바지는 둘둘말아 걷어 올리고, 얼굴은 맛이 갔네.
 물고기 잡으러 가나????(섭지코지 드라마 셋트장)


 

이로서 제주에서의 둘째 날, 제주올레 첫 번째 길 걷기가 끝났다. 생각 같아서는 두 번째 길도 걷고 세 번째 길도 걷고 싶다. 하지만 내일 들어가는 우도도 기대된다. 이날 내가 걸었던 길은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제주에 한걸음 더 다가선 듯하다. 제주도에는 별 관심이 없었던 나에게 제주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생겼다. 물론 쉽지 않은 길이다. 11시에 시작한 여행이 8시가 다 되어서 끝났다. 식사 시간을 포함해서 9시간이 걸렸다. 뜨거운 햇볕을 우습게 본 덕분에 숙소에 들어와 화끈거리는 팔뚝에 화상치료제를 발라야 했다. 지금 어깨의 살갗은 허물을 벗고 있지만 후기를 쓰고 있는 지금은 다시 그 길을 걷는 듯한 기분으로 즐겁기만 하다. 다음에 제주를 갈때는 첫 번째 길을 다시 걷고, 두 번째 길에 나서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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