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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직된 인간들은 다 불쌍해, 살아온 날들을 말해 주잖아.”

솔직히 말하면, 나도 경직된 인간이다. 그래서였는지, 경직된 인간들을 보면 난 항상 느꼈다. 어린 시절의 그늘들이 느껴졌다. 그 그늘을 만든 게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학창시절 만난 또래일 수도 있고, 가족일 수도 있다. 대학 시절에 만났던 많은 사람들 중에 그런 그늘을 가진 후배들이 있었다. 그 친구들을 만날 때면 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나처럼 살아왔겠구나 라는 슬픈 예감이었다. 

이지안(이지은 역)에 대해 박동훈(이선균 역)이 느꼈던 감정들은 어쩌면 연민의 감정과 맞닿아 있다. 인간이 다른 이에게 약점을 드러내는 것은 위험하다는 것을 어렸을 적부터 몸으로 배워 온 이지안은 주위 사람들에게 냉랭하고 불친절하게 대하면서 자기를 가리고 보호한다. 다시는 상처받지 않기 위해 찬 바람으로 자신을 보호하지만 오히려 그러한 행동들이 박동훈에게는 안쓰럽고 불쌍하게 다가왔다. 

연민의 마음은 인간 본성이지만, 그 연민을 모두가 느낄 수 있는 건 아니다. 연민은 또다른 연민과 맞닿을 때 의미있다. 때로 우울하고 깊이를 알 수 없는 슬픔에 잠길 때에도 가급적 감추고 함부로 꺼내 남에게 드러내지 못한다. 그럴려면 자존심이 나서서 머릿속에 수치심을 쏟아 붓는다. 그래서 연민은 동정과 다른 것이다. 연민은 연민을 알아보고 수치심의 수치를 낮추어 주며 자존심을 달래 준다. 나와 같은 인간, 나처럼 아픈 사람, 함께 아파할 사람...

박동훈은 위기에 처해 있다. 하루하루 숨 가쁘게 달려가지만 도저히 메꿔지지 않는 공허한 가슴 한쪽의 아픔들. 가족을 위해 살아오고 희생했다고 위로하지만 내 아들이 나처럼 살지 않기를 바라는 삶을 살아왔다는 자괴감. 다시 이렇게 살아도 될까라는 계속된 의문에 답을 할 수 없는 수렁에 빠진 인생. 나름의 전문성으로 대기업 부장까지 올라왔지만 아내는 잘 나가는 변호사가 되었고, 대학 후배가 대표이사로 발탁되어 들어왔다. 아내는 점점 일에 빠져서 가정이나 남편에게는 관심이 없다. 형과 동생마저 폐인이 되어 어머니 집에 의탁해 살아간다. 통장 잔고는 29만원밖에 없고, 집을 담보로 은행 대출을 받아 형제들 분식집이라도 차려주자는 엄마를 만류한 그 때, 어디서 누가 보낸지도 모르는 5천만원 어치 상품권 뇌물의 유혹. 

이지안은 지칠 수가 없다. 할머니 요양원 비용을 대고, 빚 독촉을 핑계로 괴롭히는 광일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밤낮을 제대로 누워보는 일도 없이 일을 한다. 접시닦이 일을 하는 곳에서 음식을 훔쳐와 저녁을 때우고, 회사 탕비실의 커피믹스를 훔쳐 불면의 밤을 만든다. 빚은 끝이 없고, 할머니 요양원 비용도 밀려서 야반도주를 해야 했다. 가난한 조손 가정이라고 도움을 주는 손길이 없었을까? 열심히 살아가는 지안의 모습을 안타깝게 봐준 이가 없었을까? 하지만 그것도 네 번까지. 이지안이 살인을 했었다는 과거를 알면 눈빛이 흔들리고 도망가 버렸다.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은 삶. 삼만 살을 살았는데도 자꾸 왜 태어나는지 모를 삶. 

 

상처 받은 아이들은 너무 일찍 커버려.
그래 보여. 걔 지난날들을 알아보기가 겁난다.

 

많은 사람들의 값싼 동정에 시달려 보았던 이지안은 그녀가 불쌍하다는 박동훈의 말에 욕을 한다. 복수를 생각한다. 이지안에게는 월 오륙백만 원씩 받으면서 출근하는 박동훈의 그 말이 마치 고양이 쥐 생각하는 것처럼 고깝게 여겨진다. 부족할 것 없는 박동훈이 매일같이 지옥에 끌려가는 인상을 쓰는 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박동훈에게 배달된 뇌물 봉투를 훔치고, 그를 회사에서 쫓아내려는 도준영의 음모를 돕는 것도 이지안에게는 생존을 위한 지옥 같은 삶의 연장일 뿐이다. 박동훈의 삶은 그에게 의미 없다. 

박동훈은 우연히 만난 이지안이 홀로 할머니를 모시고 산다는 것을 알게 됐다. 억척같이 살아가면서도 할머니를 정성스럽게 모시는 이지안의 모습은 착하다. 싸가지없이 굴지만 지안의 깊은 곳에 있는 측은지심의 마음을 박동훈이 알았다. 이지안을 돕고 그녀의 과거를 연민의 마음으로 알아간다. 언제부터인지 확실하지 않지만, 이지안이 사람을 죽였다는 걸 박동훈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아는 척하지 않고,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는다. 

 

 

모른 척 해 줄게. 너에 대해서 무슨 이야기를 들어도, 모른 척 해 줄게. 약속해 주라. 너도 모른 척 해 준다고. 겁나. 너는 말 안 해도 다 알 것 같아서···· 
그러면 누가 알 때까지 무서울 텐데, 누가 알까···· 만나는 사람마다 이 사람은 언제쯤 알게 될까, 혹시 벌써 알고 있나···· 어쩔 땐 이렇게 평생 불안하게 사느니 그냥 세상 사람들 다 알게 광화문 전광판에 떴으면 좋겠던데···· 

 

처음 이선균, 이지은 주연에 <나의 아저씨>라니! 오해받기 딱 좋았다. 드라마 안에서도 그랬지만 드라마 밖에서는 더욱 시끄러웠다. 아저씨와 어린 소녀의 사랑? <도깨비>가 대박을 내니 판타지가 아닌 현실 내용으로 재탕하려는 것이냐는 비난도 있었다. 나 역시 그런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삐닥하게 본 것이다. 시리즈가 전개된던 시기에는 프로젝트 작업으로 한창 바쁠 때여서 못 보다가, 아내의 시청 평이 워낙 좋아 나중에 보자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야 봤다. 이런 드라마를 지금에서야 보다니 내가 나쁜 아저씨다. 

좋은 이야기는 스스로의 삶을 돌아보게 한다. 이 드라마의 박동훈은 나의 삶을 돌아보게 했고, 나는 박동훈과 박상훈(맏이)과 박기훈(막내)의 어디쯤에 있는 아무개라고 생각할만큼 인물들에 공감했다. 때로는 박상훈처럼 지질하고 눈물 많고 겁도 많은 데다 개저씨 같을 때도 있고, 어떨 때는 개폼 잡으며 큰소리치고 싶은 박기훈 같은 면도 있다. 나름 회사 중간 간부라는 직책에 회사-집-회사 외에는 별 볼 일 없이 사는 박동훈 같은 면도 있다. 

하지만 박상훈의 인간성에는 부족하고, 박기훈의 용기에는 못미치고, 박동훈의 실력과도 거리가 멀다. 드라마는 판타지라지만 열패감이 드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 그럼에도 볼수록 빠져드는 매력에 정신줄을 놓아버릴 것만 같았다. 드라마를 보면서 저 세 형제보다 못하다는 열패감은 깊어졌지만, 더 나아질 수 있다는 기대감은 그것을 상쇄할 만큼 거대해졌다. 희망이 보이는 삶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다···· 그말을 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없어.

 

어른이 되면 홀로서야 한다. 행동에 책임져야 하는 것이다. 처음 책임질 일을 맡아서 진행할 때의 그 두려움을 기억해 보자. 실패하면 어떻게 할까, 두려움에 떨었던 일들이 엊그제 같았는데, 어느새 큰 프로젝트일들을 여러 사람을 지휘하며 해내고 있다. 그렇지만 두려움은 항상 등 뒤에 따라온다. 

게다가 비슷한 또래의 주위 사람이 실패를 맛보고 떨어져 나가는 모습도 자주 보인다. 작은 실수들에 조금씩 내상을 입게 되면서 그런 두려움은 커져간다. 아무도 나에게 괜찮다,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해 줄 사람이 없어진다. 홀로 섰다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기댈 곳을 찾는 게 사람이다. 경제적인 독립을 위해 달리고 있지만 여전히 삶은 간당간당 외줄타기 같다. 마음도 지치고 몸도 지치는 나이가 되었지만 멈추면 쓰러지는 자전거처럼 계속 달린다. 둘 중 하나가 아닐까 겁먹는다. 지쳐 쓰러지거나 실패해 쓰러지거나···· 

 

"너···· 나 왜 좋아하는 줄 알아? 내가 불쌍해서 그래. 네가 불쌍하니까, 너처럼 불쌍한 나, 끌어안고 우는 거야."
"아저씬 나한테 왜 잘해줬는데요? 똑같은 거 아닌가? 우린 둘다 자기가 불쌍해요."

 

20대와 40대의 화해는 이렇게 서로의 슬픔과 고충을 알아가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로맨스가 아니다. 우리 사회가 끌어안고 가야 할 슬픔을 직시하고 그 안에서 서로의 기댈 곳이 되어 주려는 작은 움직임들이 필요하다. 서로의 상처를 치유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좀더 좋은 어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 이 드라마에 감사를 전한다.

 

"사람 알아버리면 그 사람이 무슨 짓을 해도 상관없어. 내가 널 알아."

 

이보다 멋진 엔딩이 어디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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