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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가 변하면서 청춘의 문제도 바뀐다. 난 지금의 청춘을 모른다. 관심이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안다고 나서는 게 더 볼품없는 일이다. 문제를 안다면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실천을 해야 할 텐데, 그 실천과는 관계 없는 삶을 살고 있다. 어느덧 중년을 넘어가다 보니 조직 내에서의 위치 역시 청춘을 이용해 삶을 연명하는 건 아닌지 하는 자괴감도 없지 않다. 거대한 시스템의 챗바퀴에 어느 누구는 깔리거나 힘겹게 돌리고 있다면, 난 그 챗바퀴에 올라타거나 손쉽게 밀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편안한 삶일까? 그럴리가 있나. 나 또한 거대한 시스템의 모순 속에서 살아가는 한낱 나사일 뿐인데 말이다. 살아 있다는 것에 만족하고, 선택적 가난이라고 위안하면서 지금에 만족하고 있는 삶이다. 나이가 있으니 상처들은 딱딱하게 굳어 갑옷이 되었고, 얼굴에 핀 주름들은 속마음을 감추는 가면이 되어 준다. 아이의 재롱과 가족의 편안함이 작은 위로가 된다. 그렇다. 현재의 시스템을 바꾸고 싶은 마음이 없다. 내 청춘은 그렇게 게으른 중년이 되었다. 살면서 쥐꼬리만큼 쌓아온 것들에 의지하면서 스스로 치유하는 힘은 점점 사라져가는 나이가 되고 있다. 난 다른 삶을 꿈꾸지 못한지 오래됐다.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스스로를 치유하는 힘이 있다. 초식 동물들은 상한 과일이나 버섯으로 중독되었을 때 그것을 치유할 풀을 찾아 씹어 먹는다. 맹수들도 영역 다툼의 과정에서 다친 상처들을 자신의 혀로 핥아가며 다음 싸움을 기다린다. 모름지기 살아 있는 생물들은 유전자 속에 깊이 간직된, 자신의 어미와 아비로부터 이어받았을 그 고갱이의 흔적으로 스스로를 치유하고 상처를 이겨낸다. 


사람도 다친다. 눈에 보이는 상처나 분명하게 나타나는 통증은 병원에 가서 치료한다. 그러면 대개는 낫는다. 하지만 세상이 복잡해지고, 사람과 사람 사이가 얽히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상처, 잘 드러나지 않는 통증들이 나타났다. 이 상처와 통증들은 사람의 마음을 갉아먹었다. 공허와 분노, 상실감과 허무함만이 남아 먹어도 채워지지 않은 허기와, 마셔도 가셔지지 않는 갈증, 자도 자도 끝이 없는 불면의 고통을 헤매이게 된다. 


아직 익숙지 않은 이 시대의 상처와 치유들은 어떻게 극복될까? 영화 <리틀 포레스트>는 이 마음에 난 상처와 통증들의 치유 과정을 담아 내고 있다. 그러면서 우리들에게도 스스로의 마음을 치유하고 통증을 가시게 할 자신만의 방법을 찾아가라고 속삭이고 있다. 영화 속에서 담아낸 치유의 기술들을 살펴보자. 


음식.

영화 속에서 주인공 혜원은 끊임없이 음식을 만들어 낸다. 집에 들어온 순간부터 굶주려 있던 배를 채우기 위해 밥을 짓고 국을 끓여낸다. 국에 밥을 말아 훌훌 들이키는 단촐한 식사였다. 하지만 그가 도시에서 먹었던 컵밥과 편의점 간편 음식들과 비교할 수 없다. 도망치듯 내려온 고향집에서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음식을 지어 주린 배를 채운 것이다. 도시에서 채울 수 없었던 몸과 마음의 허기를 시골 고향집에서 갓지은 밥과 국에서 해소한 것이다.  


농사. 

여름날 밭에서 일하던 혜원의 목덜미를 흐르던 땀방울들은 영롱하게 빛났다. 혜원은 도시에서 편의점 알바를 비롯해 끊임없이 일하며 공부도 하고 생계도 유지해야 했다. 노동의 가치를 따지는 건 한가로운 몽상가들에게나 어울릴 말이었다. 그런데 혜원에게 농촌에서의 노동은 달랐다. 돈을 벌기 위해 했던 도시의 노동과 먹거리를 얻기 위해 지은 농사는 자본주의적 가치로 따지자면 비교가 안되겠지만, 노동의 가치에서 농사는 달랐다. 한여름 뙤약볕 아래에서 텃밭의 농작물들을 위해 구슬땀을 흘리며 잡초를 뽑았고, 밤새 휘몰아친 폭풍으로 쓰러진 벼들을 허리가 끊어질 듯 아플 때까지 묶어 세웠다. 이 농사일은 온전히 그에게 돌아와 먹을거리가 되어 주고 주린 배를 채워주었다. 잊기 위해 시작한 농사일이 잊을 수 없는 충만함으로 돌아왔을 때 혜원은 결심을 굳히게 된다. 


엄마.

혜원의 엄마는 혜원이 대학에 합격하자 먼저 고향집을 떠났다. 그리고 어디로 갔는지 소식도 전하지 않았다. 하지만 혜원이 집에 돌아오자 감자 요리 레시피를 혜원에게 보낸다. 여기에 자신의 신상에 대한 내용은 전혀 없었다. 맛있게 요리하는 법, 오직 그것만을 알려주고 있다. 도시에 있을 때는 소식 한 번 주고받지 않았던 엄마가, 혜원이 시골집에 내려온 것을 어떻게 알고 혜원에게 편지를 보냈을까. 그리고 요리법이라니... 엄마는 여전히 기다리고 있었다. 걸음마를 시작하는 아이들은 넘어지기 마련이다. 넘어진 아이는 스스로 일어서는 법을 배운다. 이제 막 고등학교를 졸업한 딸에게 홀로서기를 강요하며 집을 나간 엄마는 도시 생활에 지친 딸이 집으로 돌아오자 감자 레시피로 맞아주었다. 엄마는 넘어진 딸이 고향집에서 일어서기를 기다린 것이다. 딸 혜원이 스스로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고 통증을 이겨낼 수 있는 길을 찾기를 기다렸다. 그 방법은 이미 엄마가 오랜 세월 동안 전수한 것, 요리. 어린 혜원에게 엄마는 두려움과 공포 속에서 기댈 존재였다. 사춘기를 지나면서 엄마는 넘어서야 할 대상이 되었다. 엄마가 먼저 떠났고, 혜원도 고향집을 떠났다. 하지만 다시 고향집에 돌아왔을 때, 혜원에게 엄마는 어떤 존재일까? 




영화는 스스로를 치유하며 진정한 홀로서기로 나아가는 젊은이의 과정을 그리고 있다. 여전히 쫄아들어 있는 나는 이 영화가 참 좋다. 누구에게나 부모에게서 알게 모르게 배운 치유의 기술이 있다. 나에게는 무엇이 있을까?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하지만 찾아보고 싶다. 이 영화가 그렇게 나를 자극했다. 유난히 추웠던 이 겨울의 끝, 기다리던 봄의 초입에서 만난 영화 <리틀 포레스트>는 내 안의 상처와 통증을 다시 되돌아보게 하는 정말 좋은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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