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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잃고 길을 찾다 



- 백두대간 지리산에서 덕유산까지 9박10일의 이야기 5
- 고기삼거리 - 여원재 - 매요리(18.2km)

- 2008.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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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보니 전날밤 늦게 잠들었다. 방안에는 빨래와 젖은 물건들을 늘어놓아 한쪽 구석에서 초라하게 잠들었다. 밤새 방바닥은 뜨겁게 달궈졌다. 주인께 방에 불을 넣어달라고 말했기 때문인데, 더워도 젖은 물건들을 말리기 위해서는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늦잠을 잤다. 오랜만의 게으름이다. 기상 예보는 오전 중에 날이 갤 것이라고 알려왔다. 휴대전화를 꺼내 전원을 켜보았다. 그러나 응답이 없다. 젖어서 내부기판에 무리가 갔을 수도 있다. 배터리를 분리하고 당분간 휴대전화는 켜지 않기로 했다.


9시에 밖으로 나왔을 때는 가랑비가 좀 내리고 있었다. 이 정도 비는 그냥 맞고 가자고 생각했다. 짐을 정리하는데, 다행히 옷가지와 물건들이 대부분 잘 말랐다. 신발 역시 완전하지는 않지만 그럭저럭 신을만했다. 10시에 나와 보니 날이 갰다. 비가 그친 것이다. 준비했던 우의를 가방에 넣고 가볍게 발걸음을 옮겼다.  


백두대간은 우리가 묵었던 마을처럼 낮은 자세로 마을들을 지날 때가 있다. 여기서는 지방도로를 따라 북쪽으로 향한다. 이런 길도 백두대간일까 싶지만, 해발 500m 이상에 위치해 있는 대간의 한 줄기다. 본격적인 산행길로 들어서는 가재마을까지는 한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어제 몰아친 비바람 때문인지, 멀리까지 시야가 맑게 트였다. 고기삼거리에서는 우리처럼 백두대간을 타는 사람들이 산행을 준비하는 모습이 보였다. 반갑게 인사했다. 이날은 일요일이라 많은 이들이 산악회나 산모임 등으로 백두대간 산행에 나섰다.


우리는 예전 추억을 되새기면서 가재마을 가게 앞에서 막걸리를 주문해 한잔 했다. 동행과 함께 하는 막걸리 한잔은 멋진 추억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다. 지리산 자락 사람들은 대부분 지하수를 끌어다 마시는 편인데, 가재마을의 노치샘은 고기삼거리 민박집에서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했다. 심지어 노치샘에 비하면 자신들이 마시는 지하수는 썩은 물이라는 비교도 서슴지 않을 정도다.


노치샘을 지나 산등성이로 올라가기 시작하니 여기저기 대간 등산객들이 많이 보인다. 이미 대단위의 등산팀들이 이곳을 지나친 흔적도 보였다. 가재마을에서 수정봉으로 가는 길은 예전에도 한번 지났던 길이다. 2006년에 수정봉을 찾았을 때는 팻말도 없이 ‘수정봉’이라고 쓰인 종이만 나뭇가지에 걸려있었는데, 지금은 잘 다듬어진 나무팻말이 박혀 있다. 그만큼 백두대간에 대한 정부와 지자체의 관심이 많아진 것이다. 사실 이런 작은 봉우리를 넘어가겠다고 전국 각지에서 사람들이 찾아오고 노치샘이 있는 가재마을에 사람들이 북적이게 된 것도 순전히 백두대간 덕분이다.


아침 안개가 옅게 드리워졌지만, 등산에는 지장이 없다. 소나무 군락지를 이루고 있는 이 길은 산 타는 것을 힘들어 하는 이들에게도 충분히 즐기면서 산행을 할 수 있는 곳이다.


“유니콘이라도 튀어 나올 것 같다.”


기석이 던진 말처럼 여원재까지 가는 등산길은 몽환적이고 환상적인 분위기를 보여주고 있었다.








여원재에서 점심을 먹고 기석은 서울로 향했다. 나를 혼자 두고 가는 것이 미안하다는 친구다. 난 고맙다며 힘있게 그의 손을 잡았다. 진심으로 함께 한 1박2일 산행이 나에게는 큰 힘이 되었고, 서울로 도망가고 싶었던 나의 등을 산으로 밀어준 큰 격려였다. 그 친구가 아니었다면 이 산행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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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여원재를 떠나 고남산을 향해 가기 시작하면 본격적인 난관이 시작됐다. 잡풀이 어제처럼 발목을 잡았다. 여원재까지 오면서 거의 마르기 시작한 등산화는 다시 젖기 시작했다. 독도도 어렵고, 길잡이를 해준 리본들도 어지럽게 헷갈린다. 결국은 길을 잃고 말았다.

친구와 헤어지고 길을 잃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벌어지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대간길이라 생각하고 올라가는데, 어느덧 벌목된 나무들로 인해 길잡이 리본들은 도통 볼 수가 없다. 대략 지도정보와 눈에 보이는 봉우리와 길들을 짐작해 찾아 올라가는데 뜬금없이 큰 무덤 하나가 딱 길을 가로막고 있다.
거기에서 길이 끊겼다.

이리저리 살펴보고 내 위치를 짐작해 보니 장치로 올라가는 길을 잘못 잡은 것 같았다. 이름모를 무덤의 주인장에게 길을 물어본다고 가르쳐줄 리도 없고, 그저 주저앉아서 나침반과 지도만을 보고 내가 가야할 길을 가늠해 보았다. 무덤 뒤편 능선을 향해 치고 올라가면 대간길과 만날 수 있을 거라는 짐작으로 길을 만들기 시작했다.
토끼들이나 지났을까, 길은 보이지 않고 온갖 잡목들이 온몸을 붙잡았다. 간신히 능선길로 올라갔지만, 대간길이 아니다. 다시 양옆의 능선이 보였다. 이러다 길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마는 것이 아닐까 덜컥 겁이 났다.

다시 지도를 살폈다. 마을을 두고 왼쪽으로 빙둘러가는 대간길을 유심히 보았다. 분명 고남산은 오른편에 있지만, 마을길과 비교해보면 왼편에 대간의 마루금이 걸려 있을 것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왼편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마침내 대간길과 만날 수 있었다. 지도를 보니 장치와 합민성을 그냥 지나친 듯싶다. 한시간 가까이 헤맨 결과치고는 나쁘지 않다. 최악의 경우 여원재로 다시 돌아가 길을 되찾아야 하는 상황에서 다행히 지도를 잘 살피고, 지형지물에 대해 제대로 판단한 것이 좋은 결과를 가져왔다.


우여곡절 끝에 홀로 고남산에 올랐다. 고남산까지 오르는 길은 오랜만의 가파른 등반길이긴 하지만 그렇게 힘들지 않다. 게다가 능선길이라서 산등성이를 타고 넘어오는 바람이 시원하다. 소나무숲이 잘 만들어져 있어 숲길을 걷는 즐거움도 크다. 하지만 고남산을 넘자 다시 길이 헷갈린다. 길잡이 리본도 여기저기 어지럽다. 다시 지도를 수시로 꺼내놓고 길을 찾아야 한다. 임도와 산길을 수시로 오가면서 길은 진행된다. 다시 구름이 짙게 드리워지고 이슬비가 살살 내리기 시작했다.






길을 찾느라 고생한 때문인지 매요마을에는 예정보다 늦은 시간에 도착했다. 마을 적당한 공터에 텐트를 쳐야겠다고 생각하고, 백두대간 때문에 유명해진 매요휴게소를 찾아갔다. 그러나 매요휴게소는 사람들 싸움에 어수선했다. 주먹다짐까지 오가는 싸움을 옆에서 보고 있는 것도 아닌 것 같아 바깥으로 짐을 들고 나왔다. 길을 가는 할머니에게 마을회관 앞 공터에 텐트를 쳐도 되겠느냐고 물어보니, 괜찮지만 이왕이면 민박집에서 쉬지 그러냐고 물으신다. 매요마을에 민박집이 있을 거라는 건 전혀 모르고 있었기에 좀더 자세히 물어보았다. 마을 위쪽에 노부부가 민박집을 하나 내서 운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음날 산행을 위해서는 텐트보다는 당연히 민박집이 좋다. 물론 비용이 들기 마련이지만, 잘 쉬는 것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민박집은 어렵지 않게 찾았다. 얼마냐고 물어보니 알아서 달라고 하셨다. 민박집에서 신문지를 얻어 등산화 안에 채우고 조금 남은 저녁볕에 말렸다. 그리고 여전히 먹통인 휴대전화 때문에 민박집 전화를 빌려 집에 전화했다. 마지막으로 김치를 좀 얻어 저녁찬과 아침찬으로 해결했다.




내가 묵게 된 민박집은 2층인데, 아래층은 주인 내외분이 사시고, 2층을 손님들에게 빌려주었다. 방에는 살림이나 세간이 그대로 있었다. 책상에는 읽던 책들이 그대로 꽂혀 있다. TV는 없었지만 라디오와 오디오기도 있었다. 민박집 치고는 좀 황당하다 싶었지만, 그런대로 인간미가 넘쳤다. 2층 베란다는 꽤 넓고 민박집이 산자락에 붙어있어 매요마을이 한눈에 들어왔다.


이날밤은 쓸쓸히 혼자 보냈다. 친구의 빈자리가 크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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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 동행, 비바람을 뚫다




- 백두대간 지리산에서 덕유산까지 9박10일의 이야기 4

- 성삼재휴게소 >> 만복대 >> 정령치휴게소 >> 고기삼거리(11.2km)
- 2008.06.28




친구 기석은 새벽 2시가 좀 넘은 시간에 찾아왔다. 이번 종주 구간 중 1박 2일 동안 함께 동행하기로 했다. 지금까지 동행없이 가도 많은 사람들이 오고가는 구간이라 심심하지 않지만, 이제부터가 외로운 여행이 될 수밖에 없다. 지리산 종주 코스를 벗어나면 이런 장마철에 산을 찾아올 이가 드물기 때문이다. 물론
내면과의 동행이라 여기겠다는 다짐을 했지만, 막상 그것은 험난한 과정일 수밖에 없다.


혼자 가면 또 누군가를 만나지 않겠냐고 하는 사람도 있다. 그렇다면 또 즐거운 일이다. 그런 기대감이 여행을 즐겁게 한다. 그러나 산중 여행이라 그것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러기 때문에 백두대간을 함께 할 수 있는 동행은 절실하다. 친구는 약해지고 있던 나에게 큰 힘이 되어 주었다. ‘나’보다는 ‘우리’가 더 강하다.


우리는 잠깐 선잠을 잤다. 2시간 정도의 옅은 잠이었다. 이날 기상예보는 중부지방에 돌풍을 동반한 40~100mm의 비가 내린다고 알려왔다. 4시 반에 일어난 우리는 터미널로 나갔다. 터미널에서 콩나물국밥으로 식사를 하고 김밥을 2줄 준비했다. 6시 성삼재로 오르는 버스에 올랐다.








 

성삼재로 올라가는 길부터 심상치 않은 구름들이 산등성이를 올라가는 게 보였다. 가는 비가 뿌려지는 가운데 우리는 우의를 꺼내 입었다. 버스가 올라온 861번 지방도의 진행방향으로 좀더 나아가면 고리봉-만복대 방향 길이 좁게 나있다. 다시 능선에 올라서 고리봉으로 오르는 길, 기석은 인터넷을 통해 이 구간은 헌옷을 입어야 한다는 글을 봤다고 말했다. 길이 험한가 보다 싶었지만, 실제로 길을 걷다보니 왜 헌옷을 입으라고 했는지 실감이 났다. 숱한 잡목들이 살을 스쳤고, 가방을 잡아끌었으며, 발을 걸어왔다. 우의를 걸쳐 입어도, 신발 안으로 스며드는 빗물은 어쩔 수 없었다. 반바지를 입었기 때문에 빗물은 무릎과 정강이를 타고 발목 안부터 젖어들었다. 산행을 하고 불과 2시간도 안되어 신발은 푹 젖어버렸다. 등산화 자체는 방수처리가 잘 되어 있지만, 다리를 타고 안으로 스며드는 빗물은 어쩔 수가 없다. 신발 안까지 젖어버리니 온몸이 젖어든 듯하다.


묘봉치 전까지 길을 덮어버릴 정도로 무수히 자란 잡목들 때문에 앞으로 나아가기가 쉽지 않다. 편한 복장도 아닌데 우의를 입고 길을 뚫자니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니다. 게다가 온몸은 젖어버렸고 신발도 질퍽거렸다. 발이 젖어버리면 물집이 쉽게 잡히고, 발바닥 살이 찝혀서 걸음걸이가 힘들다. 총체적인 난국이다. 하필 친구가 도와주러 내려온 마당에 이런 험한 일을 당하니 도움을 청한 나로서는 미안하기만 하다.


묘봉치를 넘어가면 그나마 거친 잡목들의 방해는 벗어날 수 있다. 잘 만들어진 능선길이 만복대까지 만들어져 있다. 하지만 여기부터는 바람의 본격적인 방해가 시작됐다. 이전까지는 잡목과 풀들이 바람을 막아주었지만 묘봉치에서 만복대를 오르는 구간은 바람을 막아줄만한 것이 없다. 가을이면 억새가 우거져 장관을 이룬다고 하지만 6월이라 그만한 억새들은 어디에도 없다. 무거운 배낭을 메고서도 바람에 휘청거린다. 예전 설악산에서 만난 바람만큼은 아니지만, 엄청난 돌풍이 비와 섞여서 귀청을 때렸다. 한걸음 내딛는 것도 쉽지 않았다.


날씨만 좋았다면 만복대에서 쉬면서 준비한 맥주도 한잔 했을 것이다. 정상에 오를수록 더욱 거세게 몰아지는 비바람에 곁눈질로만 만복대와 인사하고 곧장 내리막길로 내려섰다. 다시 잡목숲을 지나니 바람은 잦아들었다.


만복대에서 내려서 정령치 휴게소에 들렸을 때는 몸이 말이 아니었다. 당연히 정령치 휴게소가 열려 있을 거라고 판단한 우리는 휴게소로 들어가려 했으나 모든 문이 잠겨 있었고 공사중이라는 팻말이 붙어 있었다. 아무도 없는 휴게소의 바깥 어디에도 비바람을 피할 곳이 없었다. 이곳에서 대충 싸온 맥주와 김밥으로 점심을 때워야 하는 판에 난감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비바람이 몰아치는 바깥에서 먹을 수도 없고, 쫄쫄 굶으면서 몇시간을 다시 산을 넘어야 하는 것도 쉽지 않다.


다행히 공사 준비를 위해 나와 있던 휴게소 소장님이 우리를 도와주었다. 공사를 위해 임시로 설치한 컨테이너 박스를 빌려 준 것이다. 온몸이 흠뻑 젖어 물에 빠진 생쥐꼴을 하고 있는 우리 모습은 정말 가관이었다. 소장님은 이런 비바람에 산을 탈 사람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며 혀를 내둘렀다. 그리고 친절하게 커피도 손수 타주시면서 컨테이너 박스 안에서 충분히 쉬었다가 가란다. 우리는 거듭 고개 숙여 감사인사를 드렸다. 공사도구로 어지럽던 박스 안이었지만 비바람을 피하고 잠시라도 휴식을 취할 수 있어 정말 다행이었다. 맥주와 김밥으로 간단히 허기를 채운 우리는 다시 단단히 차려입고 길을 나섰다.


정령치 휴게소를 떠나 큰고리봉까지는 급한 오르막길이 이어진다. 큰고리봉에서는 철쭉으로 유명한 바래봉능선으로 갈라지는 길이 나온다. 여기서 대간은 고기리 마을 방향으로 뚝 떨어진다. 내리막길은 더욱 미끄러워 서두를 수가 없이 더디기만 했다. 짙은 구름 속에서 어쩔 줄 모르고 방황하는 나그네들이었다. 비바람은 좀처럼 멈추지 않았다. 열심히 걸어 온몸이 열이 올랐지만 비바람 때문에 금방 식었다. 우리는 오늘의 목적지를 수정할 필요를 느꼈다. 이렇게 온몸이 젖어 계속 간다는 것은 무리수라는 판단에서였다. 당초 목적지였던 수정봉을 포기하고 우선 고기삼거리의 민박집으로 들어가 비를 피하기로 했다.


고기리 삼거리에 내려서서 가까운 민박집-약촌산장-을 찾아들어가니, 이미 등산객 한팀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어디서 왔어요?”

“네, 성삼재에서 출발했어요.”

“허, 우리도 거기서 왔는데, 늦게 출발했나봐요.”

“네, 7시 쯤 출발했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반가운 인사가 매우 살갑게 들렸다. 우리만 산을 탔으려니 생각했지만 이미 우리 앞으로 간 사람들이 꽤 있었던 것이다. 이런 궂은 날씨에 함께 산을 탄 사람이 있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큰 위안이 되곤 한다. 같이 역경을 이겨냈다는 동질감이다.


방으로 들어선 우리는 먼저 푹 젖은 신발과 옷과 가방을 말리는 데 중점을 두었다. 내일도 산을 타야 한다면 최대한 잘 말려야 하기 때문이다. 방은 온통 젖은 옷가지와 물건들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옷걸이에 걸어놓은 배낭에서는 물이 뚝뚝 떨어져 밑에 수건을 받쳐야 했다. 신발은 깔창을 분리해 흙만 씻어내고, 방안 한 구석에 비닐을 깔아 올려놓았다. 대충 정리하는 데도 버겁기만 하다.




 

민박집 주인에게 부탁해 늦은 점심을 청했다. 식사와 함께 반주를 청해 친구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른 친구들 얘기부터 다시 시작한 연애 이야기, 그리고 미래의 꿈에 대한 이야기들이 오갔다.


“요즘 시골에 땅보러 다닌다.”


뜬금없는 소리에 의아했다. 이 친구가 투기를 하려는 건가 싶었기 때문이다.


“내 꿈은 이런 산골이나 경치 좋은 곳에 작은 집 하나 짓고, 가끔 숙박 손님들도 받아 살아가는 거야.”


친구의 꿈은 어쩌면 많은 이들이 꿈꾸는 소박한 꿈이 아닐까. 지금부터 돈을 잘 모아보겠다고 한다. 지금은 그저 경치 좋은 곳에 가끔 여행 삼아 가면서 어디에 집을 지을까 고민하는 정도다. 보통 사람들이 땅 보러 다닌다면 시세나 투자가치 등을 따지는 것일 텐데, 그에게 그런 것은 아직 안중에 없다. 즉 땅보러 다닌다는 말의 의미는 여행 삼아 다니는 산골마을의 경치를 눈여겨본다는 말이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로 산골마을의 시간은 잘도 흘러갔다. 활짝 열린 미닫이 문 너머로 비는 추적추적 계속 내렸다. 바람은 그세 많이 잦았나 보다. 서서히 어둠이 내려앉는 산골마을에서 멀리 개짖는 소리가 들린다. 우리의 밤은 그렇게 깊어갔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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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하수와 하늘정원


- 백두대간 지리산에서 덕유산까지 9박10일의 이야기 3
- 연하천대피소 >> 토끼봉 >> 노고단 >> 성삼재휴게소(13.9km)
- 2008.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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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연하천산장에서 난 평생 잊지 못할 풍경과 만났다. 그리고 매번 지리산을 올 때면 그 풍경을 다시 내 눈안에 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지리산 맑은 밤하늘에 강물처럼 흐르는 별들, 이쪽 하늘에서 저쪽 하늘로 줄줄이 이어져가는 별의 강. 젊은 날에 본 지리산 은하수는 내 감성의 주춧돌이 되었고, 지금까지도 그 은하수를 잊지 못해 지리산을 찾는다. 내게는 일출보다 소중한 풍경이다.


전날밤, 예전 그 광경을 다시 보고 싶은 마음에 밖으로 나와 보았지만, 짙은 구름에 가려져 별빛 한줄기도 찾기 어렵다. 이른 새벽 일찌감치 산장 밖으로 나섰지만, 초승달만 휑하게 나뭇가지에 걸려 있다. 밤하늘 성긴 별들이 산자락으로 흘러가는 모습을 보지 못함이 안타깝다.


전날처럼 6시에 산장을 나왔다. 이른 아침 숲길로 나서니 비스듬히 내려앉은 착한 햇살이 마중 나왔다. 욕심조차 이슬로 맑게 정화되는 하루의 시작이다. 연하천 산장을 나오면 곧바로 얕은 오르막이 시작된다. 명선봉이다. 급한 오르막길의 끝에는 작지만 안락한 공터가 나온다. 배낭을 풀어놓고 쉬어가는 길손들의 쉼터다.


명선봉을 지나 몇 개의 작은 봉우리를 넘어가면 본격적인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종전의 봉우리와는 다른 급한 오르막의 끝이 보이지 않는다. 토끼봉이다. 노고단에서 종주를 시작하면 제일 먼저 만나는 힘든 구간이 이곳이다. 토끼봉을 넘어가면 헬기장이 나오고, 이곳에서 가방을 풀어놓고 숨을 가다듬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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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봉을 지나 급한 내리막을 내려가면 화개재가 나온다. 날씨가 수시로 바뀌었다. 화개재는 맑았다. 구름도 많이 걷혔다. 멀리 구름이 낮게 깔려 있지만, 머리 위로는 해가 맑게 떠있었다.
지리산 여름 날씨는 좀처럼 종잡을 수가 없다. 다행히 이날 기상정보에 비소식은 없었다.


화개재에서 삼도봉으로 오르는 길에는 유명한 240m 계단이 기다리고 있다. 일명 600계단이라고 불리는 곳으로 정말 끝이 없이 이어지는 계단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다. 힘들여 계단에 올라서면 삼도봉이다. 전라남도, 전라북도, 경상남도가 하나의 꼭지점에서 나누어진다.


이번 지리산에서는 많은 대학생들을 만났다. 전국 각양각지에서 올라온 학생들을 만나는 재미도 쏠쏠하다. 서울이나 경기 지역보다 지방이 많고, 지방에서도 특히 영남지방 학생들이 많았다. 영남 학생들이 대규모 단위가 많고, 또 그러다 보니 말이 많고 활기차서 눈에 띈 것일 수도 있겠다. 호남이나 서울 경기 지역 학생들은 좀처럼 보기 만나기 어렵다는 게 의아하다. 하지만 산에서 그 경계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경상도와 전라도를 오가는 전국 각지의 등산객들이 영호남의 경계를 무색하게 하고 있다.


삼도봉을 지나면 곧 노루목이다. 반야봉으로 갈라지는 갈림길이 여기에 있다. 갈까말까 망설이다가 그냥 노고단으로 빠졌다. 이글을 쓰는 지금은 무척 후회된다. 어차피 시간이 남았는데 천천히 반야봉을 둘러보고 와도 좋았다. 이번 가을 다시 지리산을 찾는다면 꼭 들려야겠다.



▲ 화개재 삼거리 모습. 예전보다 복원작업이 잘 되어 있는 편이다.



노루목에서 작은 봉우리를 하나 넘으면 곧 임걸령 샘터다. 풍부하게 나오는 물이 반갑다. 연하천을 나오면서 물을 가득 떠왔지만 4시간 가까이 산행을 하면서 거의 떨어졌기 때문이다. 갈증이 한창일 때 마시는 시원한 샘물은 이 세상 어떤 음료수보다 짜릿하다. 지리산은 적당한 곳에 맞춤으로 샘이 있어 좋다.


임걸령부터 노고단까지는 산뜻한 산길이다. 오르내림도 적고, 길도 평탄한 구간이 많다. 노고단으로 가는 길이 완만한 오르막이지만 짧다. 지리산 능선에서 벽소령 구간과 함께 가장 걷기 편하고 즐거운 길 중의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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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루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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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걸령 샘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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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끼봉 헬기장



노고단에 도착한 시간은 11시 20분. 고갯마루에 짐을 풀어놓았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과도한 짐이다. 텐트까지 들어가 있으니 그렇게 무거울 수가 없다. 일부 짐을 소포나 택배로 되돌려 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찰나 친구 기석의 전화를 받았다. 주말을 맞아 지원을 나오겠다고 한다. 동행이 있어 기쁘기도 하고, 소포나 택배가 아닌 친구에게 부탁해 불필요한 짐을 서울로 보낼 수 있겠다 싶어 반갑다.


노고단 정상이 개방된 것은 최근이다. 스무 번 가까이 지리산을 찾아왔지만 노고단 정상에 올라선 것은 처음이다. 시간이 많이 남는 만큼 짐은 노고단 고개에 놓고, 카메라만 들고 노고단 정상을 향했다. 나무데크가 편하게 정상까지 연결되어 있다. 노고단 정상으로 이어지는 나무데크는 약 750M에 이른다. 양 옆으로 낮게 자란 풀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이 정겹다. 산 아래에서는 구름이 가득했지만 노고단 정상은 햇볕이 따가웠다.


노고단 정상은 ‘하늘정원’이라는 멋들어진 이름으로 불려지고 있다. 약 30만평에 이르는 넒은 초지에 여름에는 약 35~40종의 야생화들이 군락을 이룬다. 1507M의 고산지대라 바람이 심해서 나무들도 키가 작아 야생화가 자라기에 좋은 조건이다. 데크 양 옆으로 작은 관목들과 초지를 살피면서도 멀리 노고단 운해가 펼쳐져 있는 모습을 구경할 수 있다. 이런 즐거움 사이로 틈틈이 세찬 바람이 흐르는 땀을 씻어 주니 이 또한 등산은 즐거움이다.


노고단고개에서 내려서면 곧 노고단 대피소가 나온다. 여기서 성삼재까지는 편한 임도를 따라 한시간 가까이 내려간다. 이날은 여기서 버스를 타고 구례로 내려갔다. 친구가 밤기차로 새벽에 오기로 했다.






 

▲ 노고단 정상과 연결된 나무데크





▲ 성삼재에서 바라본 구례군 지역




▲ 성삼재 휴게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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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혼자서 왔어?


- 백두대간 지리산에서 덕유산까지 9박10일의 이야기 2
- 장터목산장 >> 촛대봉 >> 벽소령 >> 연하천산장(12.8km)
- 2008.06.26



장터목산장은 이른 새벽부터 어수선하다.
3시반부터 부시럭거리는 소리가 잠결에 들린다. 대부분 일찍부터 일출을 보러 천왕봉에 오르려는 사람들이다. 산장 게시판에는 이날 일출이 5시 15분 경에 있을 거라고 예고하고 있었다. 하지만 구름이 위아래로 가득했던 엊저녁의 풍경은 멋진 일출을 보여줄리 만무하다. 만일 날이 좋았다면 나는 촛대봉 일출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하지만 그 생각은 날씨 때문에 접었다. 4시경에 일어났다. 일찍 일어났지만 잠은 충분했다. 이미 많은 침상이 비어있다. 모포가 어지럽게 널린 곳도 있다. 대충 꾸리다가 만 배낭도 보인다. 급하게 나간 모양새다.


핸드폰을 열어보았다.


내일 지리산 최저

14도 최고 21도

구름 조금 강수확률

오전 10% 오후 20%


후배 환국이가 문자를 보내주었다. 이번에 떠나오면서 아무래도 기상정보는 접하기 어렵다 싶어 환국에게 다음날 기상정보를 문자로 보내달라고 부탁해 놨다. 오기 전에도 무운을 빌어준 후배였고, 여행 내내 문자를 보내 준 것에 다시 한번 고맙다고 말하고 싶다.


햇반으로 아침을 먹었다. 산 아래서 준비해온 카레와 더불어 먹으니 먹을 만하다. 새벽 공기가 약간 서늘하지만 상쾌하다. 멀리 구름이 잔뜩 껴있다. 밥을 먹고 나니 새벽에 천왕봉에 다녀온 이들이 하나둘 들어오기 시작한다. 예상대로 일출은 없었다. 사람들 얼굴 여기저기에는 피곤하고 실망한 모습이 역력하다. 장터목의 아침은 일출에 따라 표정은 확 달라진다. 멋진 일출이라도 있던 날이면 축제 분위기지만, 그렇지 않으면 이렇듯 침울하다. 날씨랑 똑같다.


5시 반, 식사를 마치고 배낭을 꾸렸다. 어제는 배낭을 잘못 꾸려서 힘들었다. 배낭을 꾸릴 때는 부피에 비해 무거운 것을 아래로 넣고, 가벼운 순서대로 차곡차곡 쌓아올려야 한다. 양말이나 속옷, 여분의 옷은 딱딱한 물건들 사이사이에 끼어 넣는 게 효율적이다. 물론 배낭에 짐을 넣기 전 김장비닐을 넣어 침수에 대비하는 것도 요령이다. 또 옷들은 지퍼 팩이나 작은 비닐주머니에 소단위로 나눠 놓으면 효율적으로 배낭을 채울 수 있다. 우의나 배낭커버는 유사시 바로 꺼낼 수 있도록 배낭 위쪽이나 옆주머니에 넣어둔다. 그러나 이날 같을 경우 비올 확률이 매우 낮아서 안쪽 깊이 넣어버렸다. 우의도 부피에 비해 무게가 많이 나가는 물건이기 때문이다.


배낭을 잘못 꾸리면 배낭에 따라 몸의 중심이 흔들리기 쉽다. 그러면 무릎이나 발목, 허리 등에 더 많은 무리가 가고 피로감도 급격히 찾아온다. 배낭은 최소한 몇 시간 동안 짊어지고 가는 것인 만큼 많이 고민하고 신중하게 꾸려야 한다.


6시, 장터목 산장을 떠났다. 아침 공기가 상쾌하다. 반팔에 반바지를 입고 나왔지만, 곧 몸이 더워졌다. 연하봉에서부터 슬슬 구름이 다시 몰려들었다. 하얀 파도처럼 아주 천천히 밀려오는 게 보였다.





7시 20분 촛대봉에 도착했다. 봉우리 모양새가 촛농이 흐른 촛대처럼 보인다해서 촛대봉이다. 이미 짙은 구름으로 10m 앞을 보기가 어렵다. 넓은 세석평전이 한눈에 들어와야 하는데, 그저 답답하기만 하다. 세석산장은 들리지 않고 곧장 영신봉으로 치고 올랐다. 여름 꽃들이 아침이 되자 만개하고 있다. 초록의 숲에서 피어난 수수한 순백의 꽃들은 별처럼 반짝이며 길잡이를 하고 있다.








약간의 오르내림이 있지만, 지리산 마루금은 그다지 힘들지 않다. 대부분의 봉우리들이 1500m의 고봉이지만 한시간 이상 이어지는 오르막길은 드물다. 8시에 영신봉을 올랐다. 영신봉에서 떨어지는 급한 내리막에서는 잘 만들어진 나무계단이 있어 편하다. 눈앞으로 펼쳐진 광경이 구름으로 가려져 아쉽지만 키큰 나무들이 펼쳐진 협곡의 모습은 지리산에서 놓칠 수 없는 풍경 중 하나다.


영신봉을 넘어서면 곧이어 갖가지 모양의 암봉이 삐쭉 솟아 있는 칠선봉에 이른다. 잠시 배낭을 풀어 내려놓고 시간과 자연이 빚은 바위 모습을 보면서 감상에 젖어본다. 다시 배낭을 메고 길을 나서면 맑은 샘을 만날 수 있다. 선비샘이라고 불리는 이곳은 언제나 수량이 많아서 오가는 이들의 갈증을 해소해 주고 물통을 가득 채워주고 있다. 이곳까지 오는 내내 나와 같은 여정을 가는 사람을 보기 드물었는데, 선비샘에서 아저씨 두분이 동행이 되었다. 산에서 말을 트는 인사말은 대개 이렇다. “어디서 오셨어요?” 혹은 “어디로 가세요?” 길을 가는 사람들에게 오고 가는 길을 묻는 건 당연한 일, 그렇게 해서 대화가 시작되고 동행이 되는 것이다.


“왜 혼자 왔어?”

“아, 네. 다들 시간이 잘 안 맞아서요.”

“혼자 지리산 오는 사람은 보통 고민이 있어 오잖아.”

“……”

“결혼, 연애, 사업, 직장 등등 뭐 그런 고민들을 짊어지고 오지.”


혼자 지리산을 찾은 건 이번이 두 번째다. 지난 96년 군을 제대하고 나서 홀로 지리산을 찾아 하루 동안 광란의 질주로 천왕봉까지 달렸다. 마땅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답답한 마음을 지리산에 의탁해 보는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이런 마음은 비단 나만 그렇지는 않다. 많은 이들이 그런 마음과 정신을 치유받기 위해 숲을 찾고 지리산을 걷는다. 숲의 마루금을 걸으면서 아픈 가슴은 맑은 산공기로 가득 채우고, 복잡한 머릿속은 숲의 공명으로 채운다. 아무 생각없이 걷다가 봉우리에서 깊은 숨을 몰아쉬어 보고, 산 아래 펼쳐진 장난감 같이 조그마한 세상풍경을 보며 위안을 받아 보는 것이다. 지리산에서 사람들은 고통, 우울, 절망, 실패, 좌절을 버리고 온다. 그 깊고 깊은 계곡에서 푹푹 썩어가고 있는 나쁜 감정과 생각들은 다시 우리에게 희망이라는 선물로 돌아오고 있다. 혼자서 산을 가도 좋은 이유다.



 


 


 


 


 


12시에 벽소령에 도착했다. 이제 여기서 연하천까지는 넉넉잡고 2시간이면 간다. 점심을 먹으며 푹 쉬기로 했다. 먼저 쉬고 있는 두 사람이 보였다. 역시 여느때와 같은 인사말로 말을 건네본다.


“어디서 오셨어요?”

“연하천에서 왔어요.”

“연하천에서 몇시에 나오셨는데요?”

“여기까지 네 시간 걸렸네요?”

“네 시간이나요?”


두 시간이면 가는 거리를 네 시간이나 걸렸다고 하니 깜짝 놀랐다. 길이 바뀐 것일까. 건장하게 보이는 그 사람의 모습을 봤을 때 아무리 생각해도 네 시간이나 걸릴 이유가 없다 싶었다. 길이 바뀌지 않고서야... 그러나 잠시후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됐다.


“그렇게 됐네요. 제 친구가 시각 장애인이거든요.”

“네?”

“앞을 거의 못 봐요. 빛을 감지는 하지만 물체를 구별할 수가 없지요.”


벽소령산장 앞 테이블에서 쉬고 있는 한 사람의 시선은 허공을 향하고 있었다. 힘들어서 멍하게 하늘만 쳐다보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 앞을 보지 못하는 눈이었던 것이다. 그런 핸디캡을 가지고 지리산을 종주하고 있다. 이번 지리산 종주는 시각장애인 친구의 바람을 비장애인 친구가 도와주고 있는 것이다.


“한 4박5일 동안 종주하겠다는 마음으로 가고 있어요. 그래서 짐도 엄청 많아요. 저 친구는 앞을 못 봐서 힘들고, 저는 짐 때문에 힘들고 그러네요.”


이제 점심식사를 마친 그들은 세석으로 가겠다고 한다. 또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지 그들도 자신할 수 없다. 연하천에서 벽소령까지 4시간이라면, 다시 세석산장까지 4시간 이상 걸릴 수도 있다. 보통 사람이라면 천왕봉도 오를 수 있는 하루의 여정이건만 아주 천천히 지리산 마루금을 밟아가고 있다.


그들은 음료수 하나씩 나눠 마시고 일어섰다. 둘 사이에는 노란끈이 연결되어 있었다. 세석까지 결코 쉽지 않은 봉우리들을 몇 개나 넘어야 한다.


“조심히 가세요.”


난 일부러 큰 소리로 인사했다. 시각장애인 청년이 허공을 향해 대답했다.


“네, 잘 가세요.”


그들을 연결하고 있는 노란끈은 짧지만 그들이 가야할 길은 멀기만 하다. 하지만 그 노란끈이 끊어지지 않는 이상 그들은 천왕봉까지 무사히 가고 말 것이다. 우리는 모두 함께 올라야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경쟁이 아니라 협력과 협동이며,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배려다. 산은 그런 진리를 몸소 보여주었다.


벽소령에서 뜻깊은 만남을 가진 후 다시 짐을 꾸리고 길을 나섰다. 연하천까지 가는 길은 형제봉을 넘고, 삼각봉을 지나 어렵지 않게 연하천에 도착했다. 다시 한번 이 구간을 함께 지났을 두 사람의 모습이 눈에 어린다.





연하천은 작은 산장이다. 얼마전에 증축해서 시설이 좀 좋아졌다고 하지만 고작해야 60여명 정도 수용할 수 있는 대피소다. 하지만 물이 가깝게 있고, 풍부해서 많은 사람들이 산행 중 반드시 쉬어가는 곳 중의 하나다. 이날은 여기서 머물기로 했다.


단체로 온 대학생들이 속속 넘어오고 있다. 모두들 여기서 한바탕 쉬고 가고 있다. 50여명 정도의 대인원이 함께 지리산을 타고 있다. 선발대와 후발대가 1시간 이상 차이가 날 정도다. 그래도 젊고 활기찬 모습이 보기 좋다. 함께 지리산을 탄다는 것은 서로의 차이를 알고 그것을 배려하는 과정에서 동기애와 우정을 나누는 것이다. 힘든 여정에서 우정은 더욱 빛을 발하며 고귀하다. 하지만 이기적인 일부의 행동은 전체를 위기로 몰아갈 수도 있다. 다음의 사건이 그러했다.


산장 관리인 아저씨가 연하천에서 묶는 O대학교 동아리팀에게 삼겹살 한근을 선물로 주었다. 약 20여명으로 이루어진 팀에게 고기 한근은 턱없이 부족한 양이다. 그러자 일부 학생들이 후발대가 오기 전에 먼저 구워먹자고 주장했다. 어차피 한점씩 나눠 먹기 힘들다면 빨리 먹어치우고 안 먹은 것처럼 숨기자는 것이다. 너무나 황당한 주장이었지만, 제3자인 내가 뭐라고 말 할 게재는 아니다. 그렇다고 고기를 준 산장 관리인이 그 자리에 있었던 것도 아니다. 내부 의견은 그렇게 급속도로 모아졌다. 속으로 정말 철이 없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다가 결국 선발대의 선배가 현명한 결정을 내렸다. 얼마 안 되지만 나눠 먹어야 한다는 것이다. 삼겹살로 먹으면 모두가 먹기 힘들겠지만 잘게 잘라서 김치와 함께 볶아서 모두가 골고루 나눠 먹자는 결론이 내려졌다.


경쟁 중심주의 사회가 만들어낸 희극이다. 먼저 왔으니 먼저 누릴 권리가 있다는 것, 거기에는 약자나 함께 살아가는 동료에 대한 배려나 연민은 없다. 승자독식주의만 자리잡고 있다.


이날 본 두개의 풍경, 시각장애인의 지리산 종주와 연하천 삼겹살 논란은 이 사회의 희망과 절망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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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 글은 지난 2007년 3월 8일에 네이버 블로그에 올렸던 글을 옮겨 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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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을 완주한 이우학교 학생들.

2006년 11월 12일은 이우학교 56명의 학생들에게는 특별한 날이었을 것이다. 바로 2005년 3월부터 시작한 백두대간의 마지막 구간을 마친 날이기 때문이다. 2005년 3월부터 40여개 구간으로 나누어 매달 격주로 산을 찾아가는 노력 끝에 이루어낸 성과다.


이 결과는 쉽게 얻어진 것이 아니었다. 백두대간 종주는 어른들도 어려운 일이다. 게다가 단체 산행이라 탈이 없지도 않았다. 경북 문경 조령산 삼두봉을 지날 때는 폭설로 중학생과 여학생들이 조난을 당할 뻔도 했다. 자칫 큰 사고가 날 뻔했지만, 서로가 서로를 격려하며 무사히 마칠 수 있었던 것이다.


백두대간 종주는 어린 학생들에게 어떤 경험이었을까. 끈기와 인내심, 그리고 성취감을 얻어낼 수 있지 않았을까. 백두대간 종주는, 아니 산행이라는 것 자체가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며 자신을 누르고 산에 더 다가서려는 끊임없는 도전이 필요한 싸움이다.


인쇄업을 하는 박용기(58) 씨는 백두대간 종주를 통해 인생의 새로운 전환을 이루어냈다. 박씨는 구제금융의 한파가 몰아치던 그 시절, 자살까지 고민했다고 한다. 그를 삶의 절망에서 구한 것은 산이었다. 그는 당시 위기에 처해 술과 절망으로 나날을 보내던 자신을 반성하고 하루도 빠짐없이 북한산과 청계산을 오르면서 삶의 의지를 불태웠다. 다행히 공장을 팔고 리스한 인쇄기도 외딴 곳에 옮겨 새로 일을 시작하며 서서히 삶의 본 궤도를 되찾아 지금에 이르고 있다.


삶이 정상 궤도로 올라서던 2002년, 그는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그해 6월부터 본격적으로 백두대간을 타기 시작한 그는, 매번의 구간 산행을 할 때마다 화두를 잡고 출발해 소형 녹음기를 들고 다니며 끊임없이 자신과 대화했다. 그리고 2년 2개월만인 2004년 8월1일 종주가 끝났다. 그리고 백두대간과 나눈 자신의 대화를 풀어 책으로 펴냈다. <백두대간에서 산이 되리라>(소나무)는 그의 고통과 좌절과 희망과 열정이 담겨 있는 기록이다.


이처럼 백두대간은 어린 학생들에게는 끈기와 인내를 배우는 학습터이면서 절망한 어른들에게는 자신을 돌아보고 삶을 향한 불씨를 되살리는 현장의 연장선이었다. 이런 백두대간을 처음 타본 사람은 누구였을까.


근대 이후 오랫동안 백두대간은 우리 민족의 생활 속에 있지 않았다. 아니 땅과 하늘은 그대로였지만 사람들은 백두대간을 알아보지 못했다. 숨쉬고 있는 공기처럼, 마시고 사는 물처럼 그 존재를 옆에 두고도 까맣게 잊고 살았다. 1980년대 이우형 선생에 의해 백두대간의 존재가 점차 구체화되면서 가장 먼저 백두대간을 종주한 이는 남성도 아닌 여성산악인 남난희씨였다.


남난희 씨는 1984년 1월 1일 부산 금정산에서 출발, 3월 16일 진부령에 도착할 때까지 76일간 백두대간을 단독으로 종주해 내며 대한민국의 산악인을 놀라게 했다. 이후 대학산악반을 중심으로 백두대간 종주팀이 줄지어 꾸려졌다. 90년대 중반부터는 일반인들도 가세하며 최근에는 기업 단위, 중고등학교까지 백두대간에 도전하고 있다. 그러나 그 중 남난희 씨를 기억하는 이는 얼마나 될까. 첫발자국의 고독과 어려움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하다.


“30kg 이상 나가는 배낭의 무게를 줄이기 위해 머리빗과 칫솔을 반토막만 준비하고 모든 구간의 식사를 빵으로만 했지요. 강원도로 접어든 첫날밤에는 혼자 있기 싫어 살을 에는 듯한 추위에도 불구하고 텐트 밖으로 나가 눈사람을 만들기 시작했어요. 그러나 갓 내린 눈이라 뭉쳐지지 않았어요. 그때 엄습해 오던 고독감이라니…. 그날은 울면서 꼬박 밤을 새웠지요. 육체와 정신적인 갈등 사이에 잠깐 미쳤었나 봐요. 너무너무 힘들었지만 마음놓고 쉬지도 못했지요. 나 자신 내가 아니었으니까요.” - 월간중앙 1999년 4월1일 인터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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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난희 씨는 당시의 기록을 <하얀 능선에 서며>라는 책으로 냈다. 이후에도 그의 끊임없는 도전은 계속 됐다. 1986년 네팔 히말라야 강가푸르나(7455m)를 여성 최초로 등반한 기록을 가지고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1991년 2월 25일 토왕성 빙폭등반을 11시간 50분만에 등반해 다시 한번 세상을 놀라게 했다.


이제 그는 지리산 골짜기에서 소박한 삶을 살고 있다. 가장 최근에 낸 그의 저서인 <낮은 산이 낫다>(2004 학고재)는 그의 소박한 자기성찰이 담겨 있다. 그는 이 책에서 그동안 산은 오로지 오르는 것만이 목적이었는데, 이제는 오르지 않고 그냥 바라만 보아도 좋은 편안한 산을 만났다고 한다.


“게다가 한 곳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나무들의 삶은 내겐 부러움의 대상이기도 하였다. 그때 나무들을 보면서 항상 방황하고 항상 떠돌아다녔던 내게 정착이라는 말의 의미가 새로이 다가왔다. 나무에도 체온이 있다는 것을 그 산행에서 처음 알게 되었다.”(<낮은 산이 낫다> 중에서)


백두대간을 종주한 시인도 있다. 이성부 시인이다. 그는 8년간에 걸쳐 백두대간을 종주했으며 백두대간에서 얻은 시심을 <지리산>(2001 창작과비평)과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린다>(2005 창비)에 담았다.


그는 ‘왜 산에 오르는가’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고 한다. 산에 오르는 것이 무엇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어렵게 올라가는 과정이 좋고, 그것들이 되풀이됨으로써 형언할 수 없는 만족감과 성취감을 느끼기 때문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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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산이 큰 산을 가린다>에 있는 시 ‘지팡이’가 그와 산을 이야기하고 있다.



나무 지팡이

-내가 걷는 백두대간 84

                                                 이성부



풀섶에 버려진 나무 지팡이 하나 쓸 만해서

집어들고 산을 내려간다

오랜만에 짚어보는 지팡이 모가지 잡은

내 왼손을 거쳐

땅 기운이 내 몸속으로 들어오는 것을 알겠다

언젠가 다른 산에서도 느껴 알아차렸던

그 편안한 가슴 트임 같은 것

내 손가락 발가락 끝 모세혈관까지

힘이 실려 도는 소리 같은 것

죽은 나무마저 땅과 사람을 잇는구나

저녁 하늘이 불그레하게 옆으로 드러누워

나도 너의 편이다라고 말씀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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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이 강을 건너고 강은 산을 넘고 있다.

자원개발을 위해 만들어진 산맥지도.

백두산에서 비롯된 큰 줄기’ 백두대간(白頭大幹). 고등학교 때까지 배운 지리책 어디에서도 백두대간이라는 단어를 만난 적이 없다. 이렇듯 중요한 백두대간을 왜 우리는 배우지 못했을까? 백두대간이라는 말은 언제 생겼을까? 최근에 생긴 말일까? 우리가 배우고 베스트셀러 소설의 제목이 되기도 한 ‘태백산맥’은 잘못된 말이었을까?

‘백두대간’이라는 말을 고문헌에서 찾아보면, 이익의 ‘성호사설’(1760년경)에서 그 실마리를 풀어볼 수 있다. 여기에는 “도선이 지은 <옥룡기>에 ‘우리나라의 산은 백두산에서 일어나 지리산에서 끝났으니’라는” 설명을 인용하고 있다. 백두대간의 줄기를 명확히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도선이 10세기 인물이니 백두대간은 천년 전에도 이미 이 땅의 주요 지표 중의 하나였다 의미다.


만일 그렇다면 천년을 이어온 백두대간을 우리는 배우지 못했을까. 천년을 이어온 백두대간은 이 땅이 외세에 침탈되면서 운명을 같이했다. 일본학자 고토 분지로가 일제 강점기에 한반도 지질조사 후 새로운 산맥체계를 발표했다. 그것이 우리가 어렸을 때 배운 태백산맥, 소백산맥, 차령산맥, 노령산맥이다. 이런 산맥체계는 1910년 전후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계속 이어져 왔다.


백두대간이 세상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은 불과 30년도 안됐다. <대동여지도>를 연구하던 재야 지도연구가이자 산악인인 이우형 선생이 우연히 고문서 <산경표>를 발견하면서부터다. <산경표>는 1800년대 초 여암 신경준에 의해 편찬된 것으로 보이며 이 책에는 ‘백두대간’에 대한 제대로 된 설명이 담겨 있다. 무엇보다 우리나라 산에 대한 체계적인 분류체계가 확립되어 완전한 백두대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우형 선생이 발견한 <산경표>는 1913년 조선광문회가 활자본으로 간행한 것으로 <대동여지도>를 연구하던 이우형 선생에게는 오랜 가뭄의 단비와 같은 존재였다.


강은 산을 건너지 않고 강은 산을 넘지 않는다.

<산경표>에 따른 산맥지도.

이후 산악인을 중심으로 산 관련 잡지와 단체에서 백두대간에 대한 종주가 시작되고 백두대간 관련 학술지가 연이어 발간됐다. 박용수 선생에 의해 조선광문회본 <산경표>에 해설과 함께 영인본으로 나오고 조석필은 1993년 <산경표를 위하여>를, 1997년에는 이를 보완한 <태백산맥은 없다>를 펴냈다.


2005년 1월 국토연구원이 작성한 새로운 한반도 산맥지도가 나왔다. 이 지도는 놀랍게도 신경준의 <산경표>와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와 일치되는 부분이 많다. 그러나 지질학자들은 현행 산줄기는 지질학적 근거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주장이다. 즉 산의 마루금을 연결하여 만들어낸 산줄기인 백두대간은 땅속의 지질을 근거로 한 산맥체계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기준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한편으로 세계의 산맥들도 모두 이러한 지질분석에 따라 만들어져 있다며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땅속의 지질에 따라 산맥체계로 분류하는 것은 인간이 자연을 개발하기 위해 땅속을 알아야 하는 개발시대의 논리다. 산을 산 그대로 보고 강을 강 그대로 보는 자연 중심의 지도가 아닌 것이다. 백두대간은 '산은 강을 건너지 않고 강은 산을 넘지 않는' 그야 말로 자연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땅속의 지질구조를 중심으로 하는 기존의 산맥체계는 지질학적인 연구의 필요로 남겨두자. 그러나 실제 땅위를 달리는 산줄기의 지도는 백두대간을 살려야 한다. 백두대간에 따라 같은 산줄기에 사는 사람의 말이 비슷하고 먹는 게 비슷하고 사는 모습도 비슷하다. 산줄기를 따라 강이 같이 흐르고 마을이 생기면서 도시가 발전했다. 백두대간과 우리 민족이 함께 살아온 것이다. 백두대간을 알아간다는 것은 곧 우리의 삶을 알아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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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사이트 http://www.anga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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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3월 1일 네이버 블로그에 올렸던 글을 다시 옮겨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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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떠남은 여행의 시작  


- 백두대간 지리산에서 덕유산까지 9박10일의 이야기 1
- 중산리 >> 천왕봉 >> 장터목산장(6.7km)
- 2008.06.24~25




 

떠남은 여행의 시작이다. 물론 준비하는 그 순간부터가 여행의 시작이다. 하지만 떠나기 전까지 여행은 불확실의 세계에 머물고 있는 공상에 불과하다. 하루짜리 나들이도 칫솔이 부러졌다는 하찮은 이유만으로 좌절되는 일은 허다하다. 상상 속에서 얼마든지 여행을 떠나지만 그 실행은 어렵다는 얘기다. 그러기 때문에 떠남은 진짜 여행의 시작이다.


떠나기 전 지인을 만났다. 그는 내가 떠나는 것도 몰랐지만, 어찌됐든 배웅 아닌 배웅을 맞아 소주를 한잔 하며 이야기를 나눴다. 실상 나는 매우 두려운 상황이었고, 누구든지 툭 건들면 주저 앉아버릴 수도 있었다. 그럴 때 걱정을 나누고 원정을 독려하는 이를 만난다면 고맙다.


실상 미안한 감도 있다. 누구는 거리에서 물대포를 맞고, 곤봉과 방패, 군화발에 짓눌리고 있는데, 한가하게 백두대간이나 타겠다고 나선다는 죄책감이다. 어쩌면 현실에서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나보다. 하지만 내가 이겨내야 할 것은 무기력이었고, 되찾아야 하는 것은 내 자신에 대한 희망이다. 그래서 고되고 외롭고 쓸쓸한 여행을 선택했다.


적당히 취해 진주행 심야 고속버스에 올랐다. 쉽게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는데, 소주 덕분인지 곧 잠이 들 수 있었다. 버스는 3시간 반만에 머나먼 남쪽 진주에 나를 내동댕이쳤다. 휑하게 텅빈 진주 버스터미널의 새벽은 내 여행의 고단함을 예견하는 듯했다.



 

가게들은 닫혀 있고, 터미널 한쪽은 공사 중이라 어수선했다. 피곤에 지친 아저씨가 터미널 화장실에서 청소를 하고 있었고, 터미널 바깥에서 졸고 있는 아줌마의 리어카에는 식어가는 간식거리들만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택시기사는 새벽첫차로 내려온 내 모습을 보고 지리산 가는 걸 대번에 알아봤는지, 중산리로 가자고 보챘다. 야간 산행을 해야할만큼 길이 급하지도 않아 거절했다. 길 건너 편의점에 가서 부족한 물건을 몇가지 사고 다시 터미널로 왔다. 새벽 3시에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첫차는 6시가 넘어서 있다. 잠을 청했다. 불편한 의자에 누워 새우잠을 청했다. 깊은 잠은 없었다.


어차피 여행은 기다림이 필요하다. 그것은 또한 인내의 시간이다. 패키지여행처럼 틈이 없이 뱅뱅 돌리며 구경하기 바쁜 여행도 있지만, 어차피 내 여행은 그런 여행과는 거리가 멀다. 오늘은 어디까지 얼마만한 시간을 걸어야 도착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가는 여행이다. 하루종일 걷는다는 건 시간을 또 그만큼 보내며 목적지가 눈앞에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졸다 깨다를 반복하다 보니 기다리는 시간이 왔다. 5시에 나가서 간단히 아침을 해결하고 점심으로 먹을 김밥을 2줄 샀다. 그리고 6시 30분 중산리로 떠나는 첫차에 올랐다.


시간반을 달려 중산리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리는 등산객은 나와 고등학생 3명이 전부다. 아이들은 새벽잠을 물리치고 산을 찾아왔다. 가볍게 멘 아이들의 가방만큼 표정도 밝고 가볍다. 잠이 많을 나이에 지리산을 가겠다고 아침 첫차에 오르는 아이들의 모습이 괜히 반갑다. 아이들이 까불면서 등산로를 향해 갈 때 나는 다시 신발끈을 고쳐 메고, 스틱을 꺼내 길이를 맞추었다.


“우리 너무 널널하게 가는 거 아니냐? 저 사람 좀 봐. 우리도 저 정도는 준비해야 하잖아.”


내가 준비하는 폼이 꽤 진지했을까. 아이들의 대화가 재밌다. 하지만 지리산은 가볍게 가도 괜찮다. 지리산에는 편의시설이 잘 되어 있기 때문이다. 행색보다는 마음이 중요하다. 새벽 첫차에 몸을 실고 온 그 마음 그대로 산에 올라가렴.



 



8시 10분 지리산 중산리 탐방지원센터를 지났다. 덩치 큰 바위들로 채워진 계곡에서는 물소리가 우렁우렁 울린다. 지원센터에서 칼바위까지 약 1시간 10분의 거리는 계곡을 따라 이어진다. 아침부터 계곡 물소리를 들으니 기분이 상쾌해진다. 엊저녁까지 있었던 마음 한자락의 두려움도 씻겨나갔다.


칼바위부터는 계곡과 멀어지고 본격적인 산속길을 걷는다. 코끝으로 바람새는 소리가 조금씩 거칠어진다. 밤새 잠을 설쳐서 그럴까. 한걸음 한걸음이 무겁다. 이번 산행을 위해 체력단련을 따로 하지 않았다. 평소에 자전거를 타고 다닌 것이 그나마 운동이라고 할 수 있는데, 사실 운동이라고 할만큼 말하기도 부끄러운 정도다. 그러니 헉헉거리는 것도 당연하다. 어차피 워밍업이라고 생각하고 천천히 올랐다. 장기 산행인만큼 처음부터 힘빼지 말자는 거다. 어깨에도 힘을 빼고 다리도 폼잡지 말것이며 고개도 얌전히 숙이고 가자. 그렇지만 한 발에 한땀이 목줄기를 타고 흐른다.






로타리 산장에 도착한 것은 그렇게 산과 첫호흡을 맞추어 갈 때였다. 여기서 준비한 김밥 한줄을 먹어 시장기가 돌기 시작한 속을 달랬다. 나머지 한줄은 천왕봉에서 먹기 위해서다. 김밥을 먹고 있을 때 대학생 2명이 내려왔다. 역시 라면을 끓여 먹을 준비를 한다. 젓가락이 없어 산장 매점에 젓가락을 부탁하자 일회용 젓가락은 없다며 나뭇가지를 사용하라는 말이 나왔다. 그러자 매점 더 안쪽에서 한소리 흘러나온다.


“생나뭇가지를 부러뜨리란 말이냐. 그냥 우리 젓가락 빌려드려라.”


일회용이 편리하지만 가급적 사용하지 않는 것이 산에 온 사람의 예의다. 젓가락을 준비하지 않은 학생들의 불찰도 있지만, 그렇다고 나뭇가지를 (부러뜨려) 사용하라는 직원의 말도 산장 직원으로서 적절치 못한 언행이다. 산에 왔으면 단지 발자국만 남기고 가면 된다. 되도록 아무것도 남겨서도 안 되며, 아무것도 가져가서는 안 된다.




 

6월의 여름산은 온통 녹색이다. 조그만 흙이라도 있으면 풀들이 삐쭉 고개를 내밀고 있다. 빛이 잘 들지 않는 바위에는 초록의 이끼가 축축하게 묻어 있다. 온갖 들풀들과 야생화, 나무들이 한껏 초록의 경쟁을 벌이고 있다. 그많은 풀들과 야생화, 나무의 이름들을 나는 잘 모른다. 누가 알려주지 않아서라는 것을 핑계로 대지만 언제 제대로 알아보려나 했을까. 다음에는 정말 식물도감이라도 하나 사서 돌아다녀야겠다.


로타리 산장 이후부터는 된비알(몹시 험한 비탈)이다. 길이 급하게 천왕봉으로 달린다. 경사가 급하고 험해 코끝이 땅에 닿아 코재라는 이름이 붙은 노고단 고개만큼 힘들다. 게다가 날카로운 돌들이 불안하게 엉켜있다. 자칫하면 앞사람의 험한 발디딤에 뒷사람에게 날선 돌들이 굴러갈 판이다. 힘들다고 함부로 발을 디뎠다가는 자신도 위험하고 뒷사람도 위험한 구간이다. 한걸음이 조심스러운 곳이다.





 

천왕봉에 가까워지자 나무에 가려졌던 조망이 트이기 시작했다. 산 아래 마을도 구름에 덮여있고, 하늘의 해도 구름이 가리고 있다. 묘한 풍경이다. 장마라는 게 이런 건가 싶다. 그리되니 산은 딴세상이다. 속세와 선계 사이에 머물러 있는 듯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산을 찾는 것일까. 세상과 떨어져서 하늘과 가까운 곳에서 바라본다는 것.


그렇다 해도 이번에도 일출보기는 글렀다. 저리 구름이 위아래로 잔뜩 끼어 있으니 말이다. 애초에 덕이 없는 놈이니 어쩌겠나. 3대가 덕을 쌓아야 볼 수 있다는 일출을 그렇게 뻔질나게 지리산을 오갔으면서 여직까지 못 봤다는 것은 내 부덕의 소치다. 그러나 좋은 것일수록 아껴두는 법, 언젠가 일출을 볼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




 

"韓國人의 氣像

여기서 發源되다"


* 기상(氣像) : 사람이 타고난 기개나 마음씨. 또는 그것이 겉으로 드러난 모양.


사람들은 백두대간의 남쪽 시작점을 이곳 지리산 천왕봉으로 잡고 있다. 물론 백두대간을 처음으로 종주한 이는 부산 금정산에서 출발했고, 어떤 이는 한라산으로 보는 이도 있지만, 지리산 천왕봉을 그 시작점으로 잡은 것은 지리산이 주는 특별함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지리산을 찾는 이들이 마지막에 하는 일 중 하나가 이 1.5m짜리 표지석에 서서 자신의 기상을 뽐내며 사진을 찍는 일이다. 지리산이 가진 그 기개와 마음씨를 소중히 받아 안고 갔으면 좋겠다.


이곳에서 남은 김밥 한줄을 먹었다. 바람이 몹시 불었다. 6월 말이라지만 날씨가 흐리고 바람이 세차게 불어대니 살갗에 소름이 돋기 시작한다. 바람을 피해 바위 뒤에서 웅크리고 앉아 김밥을 먹었다. 천왕봉에는 사람들이 한두명 밖에 없었다. 날파리들만 어지럽게 날아다녔다. 쓸쓸하고 어지러운 점심시간이었다.








 

천왕봉을 넘어 제석봉으로 들어서면 황량한 벌판에 듬성듬성 서 있는 고사목들을 만난다. 이영광 시인의 <고사목 지대>는 이렇게 시작한다.


죽은 나무들이 씽씽한 바람소릴 낸다

죽음이란 다시 죽지 않는 것,

서서 쓰러진 그 자리에서 새로이

수십년씩 살아가고 있었다


여기 고사목들은 억울한 죽음 때문인지 서서 죽어, 자신을 증명하고 있다. 살아있는 나무들이 그들 밑에서 새삶을 이어가고 있지만, 생사의 양상은 그렇게 구별되지 않았다. 고사목들은 살아있는 나무들을 지키기 위해 그렇게 서서 죽어가며 사람들을 노려보고 있다. 고사목들도 그들만의 방식으로 산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죽어도 죽지 못하는 나무들의 억울함을 우리는 알까. 무심히 들리는 내 카메라의 셔터소리가 섬뜩하다.



 



 

장터목에 도착했다. 예정보다 일찍 도착하니 산장은 한산하다. 좀더 갈까? 내처 생각하다가 그만 두기로 했다. 어디까지나 첫날은 준비운동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오랜만에 지리산을 천천히 구경하기로 마음먹었다. 쉬고 싶은 곳에서 쉬고, 구경할 곳에서 구경하면서 가는 거다.


시간이 지나자 사람들이 세석과 백무동쪽에서 넘어오기 시작한다. 80%는 대학생들이다. 단체로 온 학생들도 많다. 그러고보니 지리산과 나와의 인연도 대학 1학년때다. 그때는 텐트에다가 버너도 없어 요즘 말하는 브루스타까지 챙겨왔던터라 짐이 꽤 많았다. 힘들었지만 동기들과 함께해서 즐거웠던 산행이었다. 요즘 학생들의 짐은 단출하다. 등산장비가 좋아진 점도 있지만, 단체 여행의 좋은 점은 짐을 많이 나눌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행렬이 길어지고 통제가 어렵다는 단점도 있지만, 최소한 버거운 짐에 시달릴 일은 없다.


기다리면서 보니 천왕봉에서 보았던 할머니도 내려왔다. 할머니는 여느 시골할머니의 나들이 복장 같았다. 파란 꽃무늬 잠뱅이에 몸빼바지, 그리고 하얀 단화를 신고 나무지팡이를 짚고 다녔다. 몸 어디에도 등산에 어울리는 모습은 없었다. 취사장에 들어온 할머니는 아이들 쌕같은 가방에서 양은냄비와 버너를 꺼냈다. 버너는 낡았지만 그래도 내 것과 견줄만했다(내 버너는 족히 6~7년은 된 물건이다). 그런데 양은냄비라니, 최첨단 코펠들이 여기저기서 물을 끓이고 있고, 손바닥보다 작은 최첨단 버너가 여기저기서 불을 피우고 있는데 말이다. 할머니는 버너를 킬 줄을 몰라 옆의 아저씨에게 도움을 청했다. 아저씨는 흔쾌하게 불을 댕기면서 물었다.


“할머니 혼자 오셨어요?”

“예, 혼자 왔어요.”

“어디서 오셨어요?”

“노고단에서 여까지 왔지요.”

“사시는 곳은 어딘데요?”

“청양서 왔어요.”

“지리산에는 처음이세요?”

“네, 지리산은 꼭 한번 와보고 싶었는데, 그래서 이번에 맘 먹고 왔지요. 하룻밤은 저기 어디냐, 백소령인가 거기서 잤지요.”

“할머니 대단하시네요.”


지리산의 매력은 이런데 있다. 참으로 다양한 사람들, 남녀노소가 여기에 모여든다. 할머니를 보며 튼튼한 스틱과 고가의 등산화로 무장한 내 자신이 참 초라해 보였다. 할머니의 그 순수한 마음이 보였기 때문이다. 장비에 의지하려던 내 부족함은 체력이 아니라 마음이었음을 새삼 깨닫는 순간이었다. 이날 할머니의 양은냄비는 나에게 잊지 못할 장면 중의 하나였다.



 

일찌감치 저녁을 먹고 짐을 챙겨 들어갔다. 예약을 하지 못했는데, 다행히 자리가 있다. 평일이라서 가능하다. 대규모 대학생 단체 등산객들이 있었지만 장터목 산장이 워낙 크다 보니 가능한 일이다. 밤에 잠깐 바깥으로 나와 보았다. 역시 구름 때문에 별은 볼 수 없었다. 산장 안에서는 곳곳에서 코고는 소리가 들렸다. 대부분 내일 하산하는 사람들이다. 내일 날씨가 좋기를 바라며 잠들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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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아도 9일, 길면 10일의 백두대간 구간 종주를 떠난다. 경상남도 진주에서 출발해 전라북도 무주로 나올 예정이다. 지리산에서 덕유산까지 백두대간 코스다. 보통 남한의 백두대간 코스가 총 650km(도상)라고 한다. 지금 가지고 있는 지도가 24구간으로 나와있고, 그중 4개 구간을 걷는 것이니 대충 계산해 보면, 650÷24×4=108.3333...이 나온다. 100km 산악행군인 셈이다.


내가 제대한 군대에서 100km 행군을 한 적이 있다. 물론 100km의 실제 도상거리는 약 80km였다. 그렇지만 이 구간을 24시간만에 행군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침 8시에 출발해 다음날 아침 8시에 부대 귀환이라는 지독히도 고통스러운 행군이었다.


이번 산행은 도상 100km인 만큼 실측은 아마도 120km 정도는 될 것으로 예상된다. 물론 기간이 길다. 예상은 8박9일. 산장이 없는 구간이 많고 노숙을 해야 할 필요도 있다. 텐트를 가져가는 이유다. 짐을 대충 풀어놓으니 만만치 않다. 막상 배낭에 넣어보는데 아무리 고민을 해봐도 공간이 부족하다. 결국 짐을 더 줄여야 했다. 막판에는 텐트에서 플라이마저 제거했다. 텐트에서 잘 때 비오면 대책 없다. 이런 부담 때문에 동행을 구하고자 여러 후배들에게 같이 가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결국 혼자 간다. 처음부터 혼자서 간다는 전제하에 모든 준비를 진행했지만, 부담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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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에 동행이 있다는 건 얼마나 좋은 일인가. 영화 <모터사이클 다이어리>에서 게바라의 친구 알베르토는 8개월간의 남미 여행을 함께했다. 동행은 갈림길에서 같이 논의하고, 어려움을 함께 겪으며, 축제와 기쁨을 함께 경험하고, 배고픔과 질병을 공유하는 사람이다. 여행의 소소하고 자잘한 찌꺼기까지 남김없이 함께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럴 사람도 없이 혼자서 간다.


그래, 혼자서 가라. 거기서 만나는 사람과 나무와 들꽃과 새들과 인사하자. 힘들면 나무에 기대어 쉬고, 지나가는 바람에 의지해 휘파람을 불자. 낯선 여행객들에게 안부를 묻고, 행선지가 같으면 함께 걷자. 천천히 걸으며 발밑에 피어난 들꽃들에게 인사하고 세상에 지쳐 돌아보지 않았던 나를 위로하자. 낯선 공간에서 내 삶의 영역을 확장하는 것, 그것은 더 큰 내가 존재하다는 깨달음의 시작이고 자기성찰의 변곡점이다. 온갖 땅부자들이 넘쳐흐르지만, 정작 땅한평도 가지지 못한 나는 여기 지리에서 덕유까지 이 공간을 내 삶의 영역으로 확장한다. 등기부등본에 기록된 땅보다 더 소중한 공간이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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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은 두려운 곳이다. 그것도 혼자서 깊고 깊은 산 속을 헤매며 다닐 생각을 하면 벌써부터 가슴이 졸아든다. 지리산이야 오가는 사람이 많고, 거기서 길을 잃은 없겠지만 지리산을 벗어나 덕유산으로 가는 길은 생소하기도 할뿐더러 길도 쉽게 앞을 틔어주지 않을 것이다. 또 혼자 가는 길에 짐은 왜 이리도 많은지, 이제까지 산행의 경험 중에 가장 무거운 배낭을 짊어지고 가게 됐다. 배낭은 산더미 같은 무게로 어깨와 허리 무릎과 발목을 짓누를 것이다. 그러나 인생의 무게는 더 무겁다.


어떤 일들이 일어날까. 무사히 종주를 마칠 수는 있을까. 나의 귀환은 가난할까, 풍요로울까. 다시 돌아온 자리는 지금 생각하는 그 자리와 다를까, 같을까. 예수는 깨달음을 전파하기 위해 집을 떠났고, 부처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 집을 나왔다. 주몽은 부여를 떠나서 고구려를 세웠고, 온조는 고구려를 나와 백제를 세웠다. 말썽꾸러기 골칫덩어리 손오공은 1만8천리 서역길을 가면서 고귀한 신분으로 다시 태어났고, 더불어 불경도 얻었다. 그에게 불경보다 더욱 소중한 것은 여행을 통해 만난 삼장법사의 가르침과 저팔계, 사오정과의 우정일 것이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 진정한 여행은 떠남-역경-만남-헤어짐-성숙-깨달음-귀환의 과정에서 수많은 세속의 잡념들과 상념들을 정화시켜준다. 벌거벗은 체 내던져진 여행이 주는 선물이다. 내 여행은 무엇을 얻을까. 나는 슬기로운 여행자가 될 수 있을까.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처럼 병든 조선을 구하지는 못할망정 나 하나라도 구원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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