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인극 페스티벌-덤 웨이터+이야기 심청

Posted by 구상나무 구상나무
몇년전 1인극 '콘트라베이스'를 본 적이 있다. 명배우 명계남이 혼자 두시간 가까이 이야기를 독백을 통해 연극이 전개된다. 캐릭터의 독창성과 이야기의 치밀함, 그리고 배우의 캐릭터 이해와 그에 따른 몰입도가 굉장히 중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쉽게 소모되고 재미가 없으며, 외면받기 쉽다. 그만큼 어려운 극이 1인극이다. 그렇다면 2인극은 어떨까?

지금 대학로에서는 열한 번째 2인극 페스티벌이 열리고 있다. 그 일환으로 전개된 위드블로그의 이벤트에서 당첨된 나는 아내와 함께 2인극 페스티벌에서 선보이는 연극 "덤 웨이투"와 "마당극 심청의 이야기"를 '정미소'라는 임시 소극장에서 관람했다.

"덤 웨이터"는 2명의 극단적인 캐릭터들이 팽팽한 긴장감을 갖추면서도 희화화되고 유머러스한 상황을 연출하면서 극을 전개한다. 1인극에 비해 2인극은 분명한 대립적 갈등 구조를 가지는 2명의 캐릭터가 눈길을 끈다. 하지만 "덤 웨이터"가 가지는 이야기의 서사적 탄탄함은 좀 아쉽다. 도대체 이 두명의 캐릭터가 왜 그 방안에서 무엇을 기다리고 있으며 왜 그들은 기다리고 있는지 나오질 않는다. 그저 한명이 그 상황에 회의를 느끼고 있다는 것만이 극에 등장하는 인물들간의 갈등을 야기하고 있다.

이 연극의 소개에서 보면 베게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아이디어를 가져 온 것 같은데, 사실 사전 지식 없이는 이 연극을 본다는 것은 조금 곤혹스럽기도 하다.

물론 연극에서의 긴장감과 스팩터클함, 깜짝깜짝 놀라게 하는 여러 장면들, 대립되는 인물 구도의 설정, 배우들의 탄탄한 연기력 등은 꽤 훌륭했다. 여기에 이야기의 사사적 측면만 조금 더 보강되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 다음으로 본 "이야기 심청"은 전통적인 마당극 형식을 빌었다.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위해 마지막에 나는 징을 들고 아내는 그 징을 치는 일에도 참여했다. 마당극은 자고로 관객과 놀이꾼(배우)이 함께 할 때 그 효과가 최고조에 달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 전 연극인 "덤 웨이터"의 극도의 연극적 긴장감을 완전히 풀어 해치는 일은 쉽지 않아 보였다. 사람들은 대부분 "덤 웨이터"를 본 사람들이 그대로 남아서 "이야기 심청"을 보았던 터라 극과 극의 롤러코스터를 타는 기분을 느꼈으리라.

"이야기 심청"의 재미는 물론 "덤 웨이터"를 뛰어넘는다. 아주 전통적인 고전을 약간 각색하고 다르게 생각해 보자는 제안으로 극이 시작되면서 사람들의 궁금증을 불러와 극을 이끌어 간다. 2명의 배우가 보여주는 다양한 연기와 재미있는 물건을 이용하여 관객의 상상력을 자극하는데는 성공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연극적인 재미는 덜했다. 막과 장이 없이 매번 병풍 뒤로 왔다갔다 하는 방식으로 등장과 극의 전환을 바꾸는 것은 연극의 전통적인 막과 장의 구별에서 올 수 있는 기대감을 씼어버렸기 때문이다.



사람마다 문화 공연을 보고 난 후의 느낌은 다를 것이다. 좋지 않은 감상 후기를 그것도 마감 이후 이렇게 뒤늦게 내놓았지만, 그럼에도 "야, 잘 보았다!"고 외치고 싶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봉하마을에 내려와서 한 그 일성처럼 보는 내내 고개를 갸웃거리기도 하고 박장대소도 하고, 졸기도 했지만 이런 일이 어디 흔한 일이랴. 내 인생은 내 아내와 함께 하는 2인극의 그 절정임을 그날따라 유난히 느끼게 되었으니, 이보다 더 큰 수확이 있겠는가.

미천한 블로그질을 하고 있는 나에게 이런 기회를 준 위드블로그 측에 더없이 감사드리며, 더불어 연극 문화 발달을 위해 애쓰고 있을 관계자들과 2인극 페스티벌 관계자들에게 더불어 감사하다는 말씀을 전하고 싶다.





저는 건강한 리뷰문화를 만들기 위한 그린리뷰 캠페인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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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부, 혹은 파출부, 때로는 식모라고도 불렸다. 지금은 간혹 가사도우미라고 불리기도 하며, 전문직업인의 느낌이 나는 가정관리사라는 이름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여성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직업이고, 여전히 저임금이며 고강도 노동에 처해 있고, 사회 안전망의 바깥쪽에 있는 직업군의 하나다.

돌봄 노동(육아, 식당, 청소 관련 업무)은 그 가치에 비해 천대받으면서 위협받고 있다. 우리 사회의 천박한 인식을 날것 그대로 드러내고자 했던 드라마 “로맨스 타운”에서 부잣집 아들 강태원은 자신의 집 가정부 노순금에게 이렇게 말한다.

“비위도 잘 맞추고 눈치도 잘 보고, 때론 비굴하다 싶을 정도로 남은 밥 남은 반찬 먹어치워 음식물 쓰레기 안 생기게 하고, 자기 처지 알고 주제 알고 몸 낮춰 빠질 줄도 알고 입 다물 줄 알고.”

표현이 지나치다는 비판을 받은 내용이긴 하지만, 우리 사회의 천박하고 저열한 인식을 생생하게 드러냈다는 지지도 받고 있다. “로맨스 타운”은 그만큼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계급적 차별의식을 담아내려는 시도와 돈 앞에 무너지는 위선적인 인간들의 모습을 잘 드러낸 수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맨스 타운”은 뿌리 깊은 계급적 차별의 지점을 순진한 낭만적 상상으로 뛰어넘으려 한다. 노순금이라는 순수하고 착하고 성실한 캐릭터의 노력으로 식모들 사이의 우정을 되찾고 왕자님(강태원)과의 사랑도 성취한다.

하지만 영화 “헬프”는 "로맨스 타운"의 한계에서 더 나아가서 반갑다. 저항하는 흑인에 대해 무법적인 살인과 테러가 공공연하게 벌어지는 사회, 모든 법질서가 백인에게 유리하고 흑인을 억압하고 있는 사회에서 흑인들이 선택할 수 있는 여지는 극히 좁다. 영화는 이 지점에서 용기를 낸 가정부들을 중심으로 끌고 왔다. 힐리를 중심으로 하는 상류층 백인 여성들과 스키터 엄마 등이 가진 위선적인 모습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계급적, 성적, 인종적으로 가장 열악하고 인간적 권리의 사각지대에서 신음하는 여성들이 자신들의 목소리를 담은 책을 냄으로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사회의 모순을 고발한다는 내용은 “로맨스 타운”의 한계를 뛰어넘는 카타르시스를 안겨준다.

잘못된 사회 시스템은 모두를 피해자로 만든다. 에이블린(흑인 주인공)이 힐리(인종차별주의자)에게 던지는 마지막 절규, “이제 그만하세요. 지겹지도 않으세요.”와 흐느끼는 힐리의 모습은 결국 흑인이든 백인이든 인종 차별의 거대한 벽에 모두 갇혀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 벽에 균열을 낼 수 있는 용기를 보여달라는 영화 “헬프”.

영화는 거의 두시간 가까운 분량이지만, 영화 내내 전혀 지루함을 느낄 수가 없었다. 유쾌하고 재미있는 미니와 애절한 아픔을 간직한 에이블린, 상큼발랄한 작가 지망생 스키터가 보여 주는 다양한 재미들이 쉴 새 없이 쏟아진다. 미국에서 3주 동안이나 박스 오피스 1위를 차지했을 정도였으니 재미라면 걱정하지 말고 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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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뮤지컬 서편제에 대한 리뷰는 '위드블로그'의 도움으로 작성된 것임을 밝힙니다.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빛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엄마나 누나야 강변 살자.
- 김소월, '엄마야 누나야'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 서정주, '국화 옆에서'


우리의 누이에 대한 이미지는 애잔하면서 그리운 존재이고, 힘들고 지칠 때 언제든 받아줄 수 있는 그런 아득하고 따뜻한, 그래서 엄마와 함께 찾아가고픈 품이다. 뮤지컬 서편제나 영화 서편제, 소설 서편제 모두에서 공통적으로 관통하는 정서는 바로 누이의 한이다. 누이의 한은 지독한 예술가적 편집증을 가진 아버지 유봉으로부터 발생하였고 동생 동호와의 이별과 만남에서도 애잔한 끓어오르는 정한으로 표현된다. 지난 금요일(10월 1일)에 본 뮤지컬 서편제에서도 누이의 한을 절절이 느껴보고 왔다.

뮤지컬 서편제는 영화와 달리 동호의 비중이 높다. 동호는 계부 유봉에 반발한다. 이는 아버지라는 전세대와의 갈등이면서 어머니를 죽인 '소리'라는 무형의 존재를 아버지라는 유형의 개체에 대입하고 있다. 소리 때문에 어머니가 죽었고, 그 소리는 아버지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의식에서 동호는 아버지를 증오하고 결국은 떠난다. 그러나 떠남은 또다른 상처를 누이 송화에게 심었다. 이후 유봉은 송화에게 약을 먹여 눈을 멀게 하고 득음을 재촉한다. 송화는 자신의 눈을 멀게 한 아버지를 원망하지만 결국 용서하고 소리를 찾아 유랑의 길을 함께 떠난다.

수십년이 흘러 동호와 송화는 극적으로 재회한다. 송화와 동호는 밤새 심청가를 부르며 서로의 아픔과 상처를 보듬어 안는다. 마지막 장면은 영화와 같지만 뮤지컬에서 주는 감동은 그 이상이다.

뮤지컬의 기획 의도에서 밝혔듯이 이 뮤지컬은 해외 라이센스 뮤지컬이 뮤지컬 전용관이나 대형 공연장을 차지하고 있는 지금의 현실에서 한국적인 뮤지컬을 만들어 보겠다는 기획에서 출발했다. 그래서 고른 것이 바로 이청준의 원작 소설 '서편제'. 우리나라 영화계에 백만 관객의 시대를 열어 준 영화 '서편제'에서 모티브를 따왔다. 하지만 영화 서편제에서는 판소리만 나왔던 것에서 뮤지컬 서편제는 서양음악의 기본 요소들도 함께 하면서 대중적인 뮤지컬로서 손색이 없는 내용을 갖추었다. 뮤지컬의 재미를 극대화하면서도 판소리의 궁극의 경지를 향한 노력은 게을리지 하지 않은 수작이다. 또한 무대를 꾸민 한지는 다양하게 교차하고 움직이면서 시간과 공간을 아우르는 한지의 멋을 느끼게 해주었다.

이로서 전세계에 내놓을 수 있는 가장 한국적인 뮤지컬로 '서편제'는 그 내용과 형식을 충분히 갖추었다. 마지막 장면에서 송화가 심청가를 열창하는 장면은 응어리진 가슴 속 한을 소리로 이끌어 내는 모습에서는 여느 뮤지컬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명장면으로 남아 있다.

이날 공연에서 송화 연기를 한 차지연의 연기는 그야말로 신들린 듯했으며, JK김동욱이 맡은 아버지 유봉은 김동욱 특유의 창법으로 아버지의 근엄하면서도 애끊는 마음을 절절이 전달했다. 동호 역할을 한 김태훈의 시원하게 내지르는 노랫소리는 락커의 반항과 피끓는 정열을 잘 드러내었다.

우리의 노래 우리의 뮤지컬 서편제가 전 세계인에게 많은 사랑을 받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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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겹게 비가 오고 있다. 9월 중순에 접어들고 있는데, 장대비가 하루 종일 온다. “이건 세상이 미치니까 하늘도 미친 거야.” 누군가가 낮게 뇌까렸다. 비가 오는 낙원상가 한편에 뿌연 헤드라이트 불빛들이 스쳐간다. 불과 며칠 전까지 뜨겁게 내리쬐던 여름의 흔적도 장대비 속에 사라져간다. 이날 나는 채만식의 삼대를 영화 속에서 다시 만나는 데자뷰를 경험했다. 박동훈 감독의 영화 <계몽영화>는 일제 강점기와 산업화 시대, 현대를 이어온 3대의 이야기를 때로는 재미있게, 때로는 슬프게, 때로는 가슴 뭉클하게 우리를 끌어들였다.


오해도 있었다. 3대의 이야기를 영화에서 다룬다고 하는데, 과연 그 엄청난 한국의 근현대사를 영화에 담는 게 가능한거야? 괜히 장엄한 근대사의 물결 어쩌구저쩌구하는 계몽 퍼레이드는 아니겠지? 아니면, 좌파적 감상으로 주류 기득권을 향한 냉소와 비판의식에 쩔어 있는 영화가 아닐까? 




아, 그 모든 내 상상력은 거기까지다. 그러니 나는 영화감독도 못하고 글도 못 쓰는 거다. 영화는 내 생각을 비웃듯이 꽤 재미있으면서 진지하고, 진지하려다가 갑자기 뒤통수를 확 잡아채는 짠함을 던져주고, 슬퍼지려는 격정 앞에서 다시 관객의 자세를 다잡아준다. 정학송과 그의 아내가 세 번째 만나는 국제중앙다방의 데이트는 시종일관 비실비실 웃음을 던져주었다. 하지만, 둘이 나누는 이야기에는 우리 세대가 모를 아픔이 고스란히 묻어 있었다. 둘은 피난길의 시체 이야기들로 핏대를 올렸는데, 결혼을 합의하려는 자리에서 생뚱맞은 시체 이야기는 그 시대의 상처가 무엇이었으며, 그것이 그 세대에게 어떻게 각인되어 있는지 유쾌하게 드러내고 있다.


나아가 정학송의 아버지 정길만의 이야기는 어떤가. 정길만은 동양척식주식회사를 다니면서 농부들의 핍박하는 조선인 앞잡이로 살지만, 그래도 일말의 양심은 있는지 밤에 농부들에게 살해당하는 꿈을 꾸는가 하면, 술김에 일본 간부에게 일의 문제점을 이실직고 하고 마는 순진한 애아빠다. 그런 그에게 어릴적 동네에서 함께 자랐지만 독립운동을 하고 있는 친구가 찾아온다. 그러나 정길만은 그 친구를 고발하고 자신의 일가를 보전한다. 




1대나 2대 모두 그렇게 악독하고 모진 사람들은 아니었다. 모진 시대의 흐름에 부대끼며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각만 하고 있었던 앞 세대의 진실이었을까.


김훈은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세상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모든 먹이 속에는 낚시바늘이 들어 있다. 우리는 먹이를 무는 순간에 낚시 바늘을 동시에 물게 된다. 낚시를 발려내고 먹이만을 집어 먹을 수는 없다.”


그네들은 그런 시대를 살았다. 시대가 어려울수록 낚시 바늘은 더욱 강고하고 튼튼했다. 가난의 시대, 억압의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의 삶에는 강한 낚시 바늘이 그들의 삶을 지배하고 있던 것이다. 1대의 진실 친일과 2대의 진실 가부장제는 여전히 우리 사회에 남아 우리 세대, 다음 세대를 흔들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거기서 벗어나려 하면 할수록 낚시바늘은 더욱 우리를 옥죄어 오고 우리에게 상처를 줄 것이다. 그렇다고 가만히 앉아 죽을 수만은 없다. 악함, 부정, 슬픔, 아픔 등은 모두 없었으면 하는 것들이지만, 실상 우리 삶의 한 부분이다. 모두 선함, 긍정, 기쁨, 즐거움이라는 가치와 서로 의지하면서 존재하는 것들이다.






고통스럽고 비극적인 과거의 일들을 재조명해 보는 일은 그래서 필요하다. 감출 필요도 없고 부정할 필요도 없고 단죄는 더더욱 신중해야 한다. 역사의 희생자들이 있다면 보듬어 안고 가는 일만 남았다. 죽어가던 정학송은 내내 침대에 손이 묶여 있었다. 친일 부역자의 자식이며 가부장제의 화신인 그가 마지막 가는 길에는 침대에 꽁꽁 손이 묶여 있었다. 영화는 정학송의 손을 풀고 다정히 손을 잡아주길 원하고 있다. 용서는 깊은 이해에서 나올 수 있고, 그 혜택은 현재를 살고 있는 사람에게 돌아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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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이 달린다'에 거북이는 없다

Posted by 구상나무 구상나무




영화에서는 다양한 갈등이 나온다. 가장 큰 갈등은 물론 형사(조필성)와 탈옥수(송기태)의 갈등이다. 여기에 서울의 무술 경관을 중심으로 한 특수수사대와 지방경찰서의 형사들 간의 갈등이 곁들여진다. 또 매끄러운 서울말씨를 쓰는 송기태와 예산 지역 건달들의 갈등도 한몫 크게 한다. 조필성과 그의 아내 사이의 갈등 역시 조필성의 행동에 적지 않은 영향을 준다. 경찰서 내에서 반장(상사)과 조필성(부하직원)의 갈등도 보인다.

이 모든 갈등의 해결은 모두 하나로 결론 내릴 수 있다. 즉 탈옥수 송기태를 잡는 일이다. 마치 하나의 깔때기로 물이 모이는 것처럼 여기저기 어지럽게 널려 있던 골치 아픈 문제들은 바로 조필성이 송기태를 검거해야 끝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시골 형사, 그것도 정직 먹은 형사가 무술형사 5명을 단숨에 때려잡은 탈옥수 송기태를 잡아낼 수 있을까. 어, 그런데 잡는다(그러니 영화겠지만). 소 뒷걸음치다가 쥐 잡는 게 이런 것일까? 물론 영화는 그런 우연으로 사건을 풀어가진 않았다. 영화의 재미는 바로 그런 시골 형사의 집요함과 치밀함과 끈질김을 그려내는 게 관건이었다.

이것이 ‘거북이 달린다’라는 제목이 나온 이유다. 날고뛰는 토끼를 잡는 방법은 거북이의 끈질김과 집요함이라는 걸 영화는 보여주고자 했다,라고 영화 보도자료는 말하고 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설정이 좀 애매하다. 어찌 보면 도망 다니는 탈옥수는 토끼가 아니라 사나운 멧돼지이고, 쫓는 조필성과 경찰들은 거북이가 아니라 사냥개가 아닌가? 사실 여기에 거북이는 없었다. 이 영화는 평범하게 집이나 지키던 똥개가, 서울로 압송되던 중 탈출한 멧돼지에 밟히더니 독기를 품은 사냥개가 되어 마침내 그 멧돼지를 잡고야 만다는 얘기다.

영화 끝나고도 뒷맛이 씁쓸하다 싶었는데, 거기에 거북이는 없었다는 생각이 뒤통수를 쳤다. 그저 웃음만 나올 뿐이다. 이 영화는 지친 일상을 살아가는 거북이(서민)를 위한 영화가 아니라 어찌 어찌하여 멧돼지를 잡은 평범한 사냥개(경찰)를 위한 영화일 뿐이다. 영화 마지막 장면을 돌아보자. 잘 다려진 정복을 입고 경찰 군악대의 연주에 맞춰 나타난 조필성 형사와 동료 경찰들이 아이들 앞에서 멋지게 경례를 한다. 이런 배달의 기수, 경찰편인가?

그래도 영화 전개는 빠르고 연기자들의 연기는 재밌다. 하지만 차라리 “야! 4885! 너지.”를 낮고 위압적인 목소리로 부르던 김윤석이 그립다.



거북이 달린다
감독 이연우 (2009 / 한국)
출연 김윤석, 정경호, 신정근, 선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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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를 괴물로 만든 것들

Posted by 구상나무 구상나무





엄마는 노심초사한다.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엄마는 자녀의 노예다. 아니다. 한국 사회의 자녀들은 엄마의 노리개이다. 정반대되는 두 개의 명제가 어찌됐든 현재의 한국 사회에서는 통용될 수 있는 논리다. 다시 말해 이것은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엄마들의 모순이다.

엄마와 자녀가 맺고 있는 관계의 모습(형식)이야 어떻든 그 내용은 지구 어디나 같다. ‘모정’, 단 두음절의 단어로 요약할 수 있다. 순수할 것만 같은 ‘모정’이라는 말도 정작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드러나는 모습은 그렇게 두터워 보이지만은 않는다. 최근의 ‘알파맘 VS 베타맘’ 논쟁도 그런 엄마들이 가진 모정의 형식을 두고 나타난 말이다.





우리 사회 엄마들이 자녀들에게 가지고 있는 최대 관심이 ‘교육’인지 아니면 ‘성적’인지 헷갈리고, 욕심과 욕망을 자녀들에게 투과하면서 ‘모정’으로 포장하며, 학원을 보내지 않거나 과외를 시키지 않는 것이 ‘무관심’으로 매도되는 우리 사회의 모습에서 ‘모정’이란 말은 깃털처럼 가벼워진지 오래다.

영화 <마더>의 엄마는 사실 이런 모습의 ‘모정’과는 다른 듯하며 같다. 스스로 자본주의의 괴물이 되어 어떻게든 옆의 친구들을 밟고 올라서야 한다며 약육강식의 모범자로 우뚝 선 우리 사회 엄마들의 모습과 <마더>의 엄마가 어찌 다를 수 있을까. 영화 속 주인공 엄마가 아들 도준에 대해 지나친 집착과 희생을 하다가 끝내 광기와 히스테리로 파국을 보여주는 것은 우리 사회의 엄마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단지 우리 엄마들은 아이의 성적에 집착하고 있고, 영화 속 엄마는 아들의 무죄에 집착할 뿐이다.

물론 영화 <마더>의 엄마는 ‘알파맘 베타맘’과는 천지차이가 있다. 바로 ‘가난’과 ‘장애’다. 알파맘이든 베타맘이든 가난과 장애 앞에서는 무력할 수밖에 없다. 사회에 의해 방치된 가난과 장애가 영화 속 엄마의 파국을 불러온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엄마를 괴물로 만든 것, 그것은 자녀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모순이다. 괴물 같은 사회에서 아이가 성공하기를 바란다는 것이 가지는 의미를 되새겨 본다.





마더
감독 봉준호 (2009 / 한국)
출연 김혜자, 원빈, 진구, 윤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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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생명은 있는 힘껏 생을 살아간다. 생명이 붙어 있는 한 삶의 가느다란 끈을 결코 놓는 법이 없다. 하물며 함께 살아가는 인간과 동물에 대해서는 무슨 말이 필요할까? 하지만 딱히 그렇지만은 않은가 보다. 인간중심주의, 모든 생명들에게는 지옥의 묵시록과 같은 그 말. 다시 행복을 정의해야할 때이다. 영화 <워낭소리>가 말하는 참삶에 귀기울여 보자.

우리는 24개월령 미만의 소들만을 안심하고 먹을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 24개월의 소들도 온갖 항생제를 맞으면서 억지로 살을 찌우고, 깨끗한 풀이 아닌 가공된 사료만을 먹여 키운 것들이다. 평생 들판을 자유롭게 누비지 못하고 제 몸도 제대로 가누기 어려운 좁은 우리에 갇혀 자기가 쌓은 똥과 오줌 범벅으로 살아간다. 고작해야 30개월의 삶을 살다가 미치거나 주저앉거나 도살된다. 그게 우리 시대의 소들의 삶인가? 아니다.

우리는 우리 입으로 들어가는 그 고기의 가치를 자본의 가치로 환원시켜 생명이 가지는 고유한 가치에 대해서는 잊고 살고 있다. 그런 고기를 먹고 우리는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 그 뜨거운 우리의 촛불은 건강한 먹을거리를 요구하는 촛불이 아니라 그렇게 죽어간 소들을 향한 기도의 촛불이어야 했다.

삶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돈? 명예? 권력? 그래 그런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들은 모두가 공유할 수 없는 것들이다. 영화 <워낭소리>가 그 해답을 우리에게 알려주었다. 노동, 생명, 교감, 진정 행복한 삶의 근간은 바로 그곳에 있다. 누구나 공유할 수 있지만, 아무나 실천할 수 없는 것에 큰 기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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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엄마 찾아 삼만리, 언더더쎄임문

Posted by 구상나무 구상나무
언더더쎄임문

어떻게 우연이 잘 맞아서 영화 이벤트에 뽑혔다. 서대문 드림시네마, 영화관마저 생소하고 영화제목도 생소하다. 대충 보아하니 멕시코 영화다. 큰 기대도 안하고 영화 한번 공짜로 본다는 기분에 영화관에 찾아갔는데, 결론은 뜻밖의 수확이다.

영화 <언더더쎄임문>은 21세기판 엄마 찾아 삼만리라고 할 수 있겠다. 할머니와 단둘이 살고 있는 9살 꼬마 까를리토스. 엄마는 4년 전부터 머나먼 미국의 LA에서 일하며 매달 300불씩 보내주고 있다. 그 돈으로 할머니의 병원비와 약값을 데고도 그렇게 부족하지 않은 삶을 사는 까를리토스는, 그러나 엄마가 한창 보고 싶은 꼬마 아이일 뿐이다. 매주 일요일 엄마로부터 오는 전화만 손꼽아 기다리던 어느날, 갑자기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그리고 이제 홀로남은 까를리토스의 머나먼 여정이 시작된다. 'LA, 도미노 피자집 옆 건너 버스 정류장에 있는 공중전화, 벽화가 보이고 플라스틱 선물가게가 있는 곳', 단서는 이것에 불과하다. 불법 체류자이기 때문에 주소도 모른다. 연락처도 없다. 로드무비이면서 성장영화이고 무엇보다 미국 사회에서 마이너리티로 존재하는 멕시코 이민자들의 생활을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는 영화는 매우 탄탄한 짜임새로 어느 것 하나 놓칠 수 없는 영화적 재미를 보여주었다. 촌철살인의 명대사들도 우리를 감동시키지만, 영상 하나하나에 담겨 있는 메시지들이 가슴을 촉촉히 적셔온다.

까를로토스는 엄마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미국으로 가려는 불법이민자들이 겪어야 하는 생사의 고비를 넘고, 돈을 잃어버려 빈털털이 신세가 되어 마약중독자의 손에 의해 인신매매 될 뻔도 한다. 하지만 같은 처지의 불법이민자들을 돕는 아주머니의 손에 구출되고 그들과 함께 일터에서 일하다가 이민국에 쫓겨 달아난다. 그때 만난 아저씨가 아버지를 찾아주기도 하지만, 아버지는 끝내 아들을 돕지 않고 숨고 만다. 엄마나 아빠가 모두 자기를 버린다고 좌절할 때 아저씨는 한마디 한다.
"누구보다 너희 엄마는 널 사랑한다. 네가 여기까지 오면서 겪은 일을 생각해 봐라. 목숨을 걸고 국경을 넘고, 토마토 농장에서 이민국에 쫓겨 달아나고, 접시닦기로 숙식을 구하고,... 누가 이런 삶을 살길 원하겠냐. 그러나 이런 삶을 네 엄마는 살고 있다. 바로 너를 위해서 말이다."(정확한 대사는 아님)

미국이라는 거대한 부의 그늘에 가리워진 멕시코 불법체류자들의 비참한 삶에서 따뜻한 시선을 끌어올린 영화감독에게 찬사를 보낸다. 올해 나에게 있어 가장 감동적인 영화 중의 하나로 이 영화를 추천하는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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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촌철살인의 명대사 한마디

"그래그래 너, 킹왕짱이다."
>> 엄마를 찾는 까를리토스를 도와 함께 LA까지 간 엔리케가 까를리토스의 잔소리에ㅣ 대답하는 말.
 
"미국의 역사? 간단해, 처음에는 원주민을 착취하고, 다음에는 흑인들을 착취하고, 지금은 멕식코인들을 착취하고 있어."
>> 미국 시민권을 얻기 위해 시험을 준비 중인 로자리오(엄마역)가 미국 역사가 어렵다고 하자 친구가 하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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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가을 아바의 음악에 젖다, 맘마미아

Posted by 구상나무 구상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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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배로부터 <맘마미아>의 OST를 받아 들었을 때부터 ‘아, 이 영화 꼭 보고 싶다’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좋다는 입소문이야 같이 일하는 여직원들로부터 심심치 않게 듣던 터였지만, 익숙한 아바의 음악이 이끄는 매력은 그 입소문보다 확실히 대단했다.

‘원스’가 저예산 영화에서 출발한 음악 영화의 소박한 순수함이 있다면, ‘맘마미아’는 기획된 영화의 기교와 멋이 한껏 드러나 있다. 제대로 된 음악 영화를 갈구하던 대중들은 ‘맘마미아’의 출현에 환호했다. 4주 동안 전국 317만 명을 끌어들여 2004년 <오페라의 유령>이 세운 200만 명을 훌쩍 넘어섰다.

우선 재밌다. 영화 시작하자마자 얼마 안 있어 노래가 시작되더니 정말 줄기차게 노래가 나온다. 심지어 영화가 다 끝나도 앙코르 영상을 통해 따로 보여주는 노래들도 좀처럼 자리를 뜨기 어렵게 한다. 이미 만들어진 노래들로 꾸며졌다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극 전개에서 하나의 흐트러짐도 보기 힘들다. 서사구조가 탄탄하니 노래가 더욱 돋보이며, 심금을 울린다. 특히 <The Winner Take It All>을 목놓아 부르는 장면은 그리스의 눈부신 바다 풍경과 함께 눈시울을 자극할 만큼 자극적이었다.

<The Winner Take It All>는 아바의 아그네타가 남편 비요른과 갈등을 빚던 시기에 발표된 곡이었는데, 그 깊이나 완성도가 뛰어나 아바의 대표곡으로 손꼽히고 있다. ‘이긴 사람이 모든 걸 갖는다’면서 실패한 사랑, 이별을 앞둔 사랑의 아픔을 절절하게 노래한 이 노래는 그 깊이 있는 가사와 절절한 가락으로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고, 뮤지컬 제작자 주디 크레이머에게 아바의 노래로 뮤지컬을 만들겠다는 영감을 주기도 했다.

영화관에서 신나는 음악들로 저절로 무릎을 흔들고 고개를 까딱거리게 하는 경험은 흔치 않다. 게다가 요즘 이 OST 덕분에 점심시간 이후의 식곤증을 몰아내고 있다. 이 가을은 적어도 이 OST만으로도 우울할 일은 없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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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바논에서 온 달콤함 <카라멜>

Posted by 구상나무 구상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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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설지만 재밌었던 레바논 영화 <카라멜>. 사실 이 영화가 어느 나라 영화인지는 인터넷을 뒤져보고 알았다. 영화를 보고서는 알 수 있는 정보가 없었고, 영화 팸플릿에도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화에서는 이슬람과 그리스도교가 공존하는 모습이 곳곳에 드러나고 있다. 연애결혼을 인정하면서도 아랍의 보수적인 문화로 미혼 여성이 혼자 호텔을 예약할 수 없고, 혼전 성관계가 용납되지 않지만 그러기 때문에 아이러니하게도 처녀막 재생 수술이 보편화되어 있는 곳에서 살아가야 하는 레바논 여성들의 솔직하고 유쾌한 이야기가 지중해의 따스한 빛과 카라멜의 황금빛 영상으로 스크린을 감싸고 있다. 


영화 <카라멜>은 그런 배경을 묵직하게 깔았지만, 여성 감독의 섬세한 연출이 닿아 유쾌하고 발랄하게 상황을 이끌어갔다. 우리나라 영화 <싱글즈>를 연상할 수 있지만, 다양한 연령대의 레바논 여성이 처한 시대적 상황과 어려움이 세심하게 드러내고 있어 볼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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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상나무

네가 보는 책들,한권한권이 모두 영혼을 가지고 있어.그것을 쓴 사람의 영혼과 그것을 읽고 살면서 꿈꾸었던 이들의 영혼 말이야.한권의 책이 새주인의 손에 들어갈 때마다,누군가가 책의 페이지들로 시선을 미끄러뜨릴때마다,그 영혼은 자라고 강인해진단다.-바람의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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