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부모형제와 함께 살 때 여행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분명 그 때 나는 '우리' 가족이라는 말이 어울리지만 '내'
가족이라는 말은 어딘가 어색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결혼하고 나서 '내' 가족이 생겼다. '내' 가족이 생기면서 책임과 의무가 더욱
늘었고, 나만의 자유와 평화의 영역은 매우 축소됐다. 그러나 혼자였던 '나'는 또 다른 '나' 둘을 더 얻었다. 숫자로만 볼 수
없는 부유함이 내 안을 가득 채우고 있다. 8월 초 휴가 때 내 가족과 함께 한 첫 여행을 다녀왔다.
하지만 첫날부터 휴가길은 심상치 않았다. 토요일 아침 7시에 집을 나섰지만, 뉴스에서는 영동고속도로가 새벽부터 시작된 정체로 몸살을 앓고 있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물론 영동고속도로뿐만 아니라 서울을 빠져 나가는 모든 고속도로는 아침부터 심한 정체를 겪고 있었다. 휴가를 8월초로 몰아주는 우리나라 현실이 고속도로에 여실이 드러나 있었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1년에 한번 있는 휴가, 이렇게 고행을 해서라도 가야지 그렇지 않으면 갈 수 있는 시간이 없는 참 꽤재재한 현실을.
첫날 여행지는 담양. 8월의 뜨거운 태양 아래, 그것도 휴가철인 일요일 집을 나선 것이 잘못이다. 어디를 가도 사람들에 치일 거라고 예상은 했어도 시골에 그렇게 사람이 많이 몰릴 것은 전혀 예상 밖이었다. 담양 소쇄원은 세번째 찾은 것이었는데, 예전처럼 고즈넉한 맛을 볼 수 없었다. 그 작은 전통 정원과 가옥에 그리 많은 사람들이 들어갈 수 있음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어디를 담아도 멋진 풍경이 나왔던 소쇄원은 어디를 찍어도 낯선 사람들의 사진으로 채워질 수밖에 없었다. 어쩌다 운좋게 자리잡은 평상은 우리가 앉은 이후 채 10분도 안되서 다른 사람들로 꽉 채워지고 말았으니, 저 위의 평상 사진은 정말 운이 좋게 잘 나온 사진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나마 사촌누이의 소개로 어렵게 찾아간 명옥헌원림은 잘 알려지지 않은 조용한 정자라서 그런지 그나마 조용히 머물 수 있었던 곳이다. 물론 이곳에도 꾸준히 사람들이 찾아왔고, 그 중에는 일본인과 서양인도 있었다. 하지만 연못과 그 주변의 배롱나무들에서 활짝 핀 꽃이 제법 운치있는 곳이었다. 담양 여행 중 민서가 가장 잘 웃고 행복에 겨웠던 곳이 아마 이곳이 아니었을까.
죽녹원은 입구의 주차전쟁부터 만만치 않았다. 죽녹원 내부에서는 온갖 사투리를 다 들을 수 있었다. 날이 날인만큼 대나무 숲의 시원함보다는 짜증이 밀려올 정도로 사람과 날씨에 치였다. 그래도 간간히 나들이가 마냥 즐거운 딸내미 덕분에 웃었다.
월요일에는 함양의 서암정사와 상림공원을 다녀왔다. 이날은 장모님도 함께 했는데, 서암정사 주변은 한창 공사중이라서 덤프트럭들이 바로 절 앞까지 오갈 정도로 부산했다. 그래도 서암정사 본래의 모습은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서 장모님이나 아내는 대만족이었다. 상림공원은 날씨를 생각하면 가지 않는게 좋을 뻔했다. 그래도 상림공원 앞 늘봄식당에서 오곡정식은 나쁘지 않았다.
셋쨋날은 순천 송광사를 돌아보고 계곡에서 간단히 물놀이를 즐겼다. 이곳에서 민서와 처음으로 물놀이를 했는데, 민서는 차가운 계곡물이 신기한지 발로 물장구를 치면서 장난을 치면서 까르르 숨넘어가는 웃음을 던졌다. 태어난지 8개월 된 민서에게 모든 게 신기하기도 하지만, 하루종일 돌아다니는 피곤함도 만만치 않았다. 넷쨋날은 장모님 모시고 병원에 갔다가 구례의 위안리 계곡에서 물놀이를 즐겼다.
처음으로 큰아버지와 단둘이 함께 한 여행은 시제를 지내러 간 남해였다. 대학 때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벌써 10년이 훌쩍 넘어 20년 가까이 지난 세월이다. 허물어져가는 종가집이라지만, 그래도 나름 종손이라고 해, 나만 유일하게 남해의 조상 묘소에 찾아간 것이다. 큰아버지와의 여행을 통해 나는 나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나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형제분들이 낳은 자손이 지금도 하나의 마을을 이루며 살고 있다.
큰아버지의 이야기는 구례로 들어와 일가를 이룬 앞 세대의 고난에 대한 이야기이다. 마치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찾아 떠나는 유태인들의 이야기처럼 장대한 대서사시가 큰아버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하지만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이야기는 그 당시 나로서는 양자역학에서 나오는 소립자 이론만큼이나 실체가 불분명하고 이해가 어려운 이야기였다. 당시의 나로서는 내가 이 세상에 나오기까지 지난한 과정의 앞세대의 삶이 있었다는 새로운 인식을 심어주는 것으로 충분했을지도 모른다. 그 누구도 내 선조에 대해 이야기를 해 주는 이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큰아버지의 조촐한 고희연이 지난 토요일 구례에서 있었다. 큰아버지의 동생과 그 자식 손자, 그리고 친척분들만 참석한 자리지만 식당 한켠을 온전히 차지하며 시끌벅적했다. 손자손녀들도 큰애가 이제 어린이집에 다니는 정도이지만 제법 소리를 내는 터라 정신이 없긴 매한가지였다. 그래도 오랜만에 일가친척들만의 자리라 제법 즐겁고 유쾌한 자리가 마련된 것이다. 돌아보면 나로서는 몹시 아쉬움이 남는다. 큰아버지가 가진 삶의 무게는 한 인간의 역사가 아니라 그 전 세대의 삶의 이야기를 고스란히 간직한 역사의 무게가 느껴지기 때문이다. 언제가 기회가 된다면 큰아버지의 옛날 이야기들을 녹취해 볼 생각이다. 우리의 아이들에게 먼저 살다간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삶을 들려주는 것도 삶의 뿌리와 정체성을 알아가는 데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
농번기에는 부엌의 부지깽이도 돕고, 부뚜막의 고양이 손도 아쉽단다. 아버지는 그래서 시골의 모내기에 맞춰 고향에 내려가셨다. 아버지의 고향은 전라남도 구례의 산골마을이다.
그리고 나와 어머니는 현충일이 낀 연휴에 맞춰, 그러니까 국민MT(72시간 릴레이 촛불집회) 기간에 구례로 내려갔다. 일손을 돕자는 생각이었다. 물론 이 기간에 아버지의 생신도 끼어 있기도 했다.
5일 오후 3시 15분 영등포역에서 출발하는 무궁화호에 몸을 실었다. 집에 차가 생긴 이후 기차를 타고 시골집에 내려갈 일은 없었다. 오래만의 기차여행이다. 어머니와 함께 맥주도 사서 마시고 삶은 계란 껍질도 벗겨보았다. 그러다가 영등포역에서 구입한 <한겨레21> 잡지를 보기도 하고, 또 그러다 시큰둥해지면 창밖으로 지나가는 풍경에 멍한 시선을 던지기도 했다. 오랜만의 기차여행이라서 그런걸까. 생각보다 금방 시간이 흘러갔다. 구례구역에는 아버지가 마중나와 계셨다.
가운데 적갈색 기와집이 큰집이다. 대부분이 양옥집으로 바뀌었지만 여전히 큰집은 옛집 그대로의 모습이다.
내가 내려갔을 때는 이미 모내기가 거의 끝나 있었다. 아버지는 뜨거운 뙤약볕 아래에서 지붕수리를 하고, 새롭게 페인트칠까지 마무리하셨다.
모내기 끝났다고 할일이 없을까. 큰집에서 멀지 않은 고모집에 갔을 때는 감자수확에 나섰다. 알이 퉁실하게 커다란 감자들이 울렁울렁대며 흙밭에서 나오는 모양새가 재밌다.
고모네 아들, 그러니까 나에게는 사촌이 되겠는데, 그는 몇년전 베트남 여성과 국제결혼을 했다. 지금 둘에게는 유라는 세살박이 딸이 있는데, 항창 엄마아빠를 찾는다. 이날도 감자밭까지 쫓아나왔다. 엄마아빠, 그리고 우리 가족까지 거들어 감자를 캐는데, 이 걸음마도 서툰 아기도 일손을 돕는다. 캐논 감자를 주워 바구니에 넣는데, 그저 재밌다. 엄마는 목욕한지 얼마 안됐다고 속상해 하면서도 그런 모습이 기특했나보다. 한참동안 나와 함께 감자줍기 '놀이'를 하며 밭에서 뒹굴었다. 거침없이 흙을 만지는 그 앙증맞은 손이 어쩜 그리도 귀여울 수 있을까.
일을 마치고 저녁이 됐다. 고향 마을 뒤편 산속에서는 얼마전부터 큰공사가 한창이다. 광양과 전주를 잇는 고속도로가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2010년이면 완공된다고 한다. 이 문제 때문에 한때 동네 인심이 흉흉해진 일도 있다.
이 도로가 생긴다면 고향 내려가기가 훨씬 수월해질 것이다. 하지만 마을 가까이 생기는 고속도로로 인해 생길 수 있는 여러가지 피해를 생각할 때 그리 유쾌하지 않다.
저녁을 함께 먹고나서, 큰어머니는 산책 겸 그 고속도로에 올라가 보자고 하신다.
"아니 공사현장에, 그것도 고속도로에 함부로 올라가도 되요?"
"꺽정말어. 밤에는 사람도 없당께. 마을 사람들도 가끔 거그로 마실나가고 그랴. 암시랑토 안혀."
그렇게 해서 야밤에 고속도로로 올라가는 마실을 나갔다.
오른쪽 멀리 끄트머리에 있는 산이 지리산 노고단 봉우리 근처다.
고속도로 위에서 찍은 사진이다. 셔터속도를 길게 놓고, 노출도 좀 올려줬더니 마치 대낮처럼 지나치게 밝게 나왔다. 하지만 가로등 사진에서 알 수 있듯이 저녁무렵에 찍었다. 물론 완전히 어두워지기 전이다. 앞에 보이는 마을이 고향마을이다. 지리산과 우리마을 사이에 평야지대가 있다. 거기에는 큰아버지의 논도 있고, 작은아버지의 밭도 있다. 산책을 하다보니 어두워졌다.
큰어머니는 이제 논둑에 콩만 심으면 거진 일이 마무리됐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그건 그저 눈에 보이는 일만 마무리 되셨다는 말일게다. 논에 모만 심어놓는다고 잘 자랄 일이 아니다. 비가 오면 오는대로, 가물면 가문대로 신경 쓸 일이 많다. 논일만 있을까, 상추며 고추며 밭에서 자라는 곡물들은 병충해가 올까 노심초사해야 한다. 일도 일이지만 농약치는 일은 노령의 나이에 하실만한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하신다. 아침저녁을 벌통을 살피는 일도 쉬지 않는다. 뜨거운 여름한철 벌들의 활동이 왕성하기 때문이다. 기르는 가축들도 살핀다. 큰집에서는 개 한마리와 닭몇마리를 키우는 게 고작이지만, 그래도 신경쓸 구석은 많다.
아무튼 생명을 싹 띄우게 하고, 알맞게 성장할 수 있도록 보살피며, 그 결실을 제대로 맺을 수 있게 하는 일련의 과정은 참으로 숭고한 일이다. 우리 입안에 들어가는 우리 먹거리에 대해 그것이 어떤 과정과 노력을 거쳐 만들어지는지에 대해 잘 모른다 하더라도 최소한의 경외심은 가질 필요가 있다.
지금의 촛불집회가 벌어지는 배경에는 어쩌면 생명에 대한 경시가 있는 것이 아닐까. 풀을 먹는 소에게 육식을 시키는 것이나, 대규모로 사육되는 가축들의 환경이나, 안전한 먹거리 생산에 대한 철학보다는 자본의 이익을 위해 생명도 조작할 수 있다는 그 무서운 몰이해가 자리하고 있다.
산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동네 뒤에 생기는 고속도로도 대운하만큼 이곳사람들에겐 버거운 일이다. 도시사람들의 부와 편익만을 보장하고, 그 길 옆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명과 안녕은 돌보지 않는 일은 대운하에만 국한된 일이 아니다. 이것이 어쩌면 우리 마음 안에 대운하가 아닐까.
큰아버지는 내가 사진찍는 모양새를 보고 동네 입구에 세워놓은 "범죄없는 마을" 표지판을 찍으라고 하셨다. 오래전에 세워진 이 표지판은 이 마을에 대한 큰아버지의 자부심이다. 사진을 찍으며 내 마음 안의 대운하도 찍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