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강하구둑


 

어느덧 충청북도까지 왔다. 내일은 공주를 지나 천안까지 갈 계획이다. 오늘보다 긴 여정이다. 예정대로 간다면 내일은 경기도의 코앞에 가는 것이다. 서울에서 경기도로 첫발을 내딛던 여행 첫 날이 생각났다. 이 긴 여행이 이제 막바지에 이르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무언가 아쉽다. 이 여행이 나에게 무엇을 남겼을까. 거의 매일같이 쓴 이 여행기에는 많은 이야기들이 담겨있고, 그보다 많은 추억이 내 머리와 가슴 속에 머물러 있다. 길에서 만난 다양한 세상과의 조우는 내가 한단계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이 되어줄까? 그 답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 내가 생활하는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다. 일상은 여행보다 무겁기 때문이다.

여러 생각들이 좌충우돌한다. 이 여행을 통해 내 안에 있는 나쁜 기운들이 파괴됐다. 낙심과 좌절, 불안과 부정이 파괴된 자리에 희망과 기대, 긍정과 자신감이 자리잡고 있다. 여행은 그 자체가 낭만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깨달음이다. 길이 곧 도(道)이며, 도(道)는 곧 길이다. 여행의 끝에 새로운 시작이 기다리고 있음을 느낀다. 그리고 그 시작은 나를 좀더 파괴하고 더욱 새로워지고 싶다는 욕망에서 시작될 것임을 알 수 있다.

오늘 아침에는 근이형의 글읽는 소리에 잠이 깼다. 글 읽는 소리의 가락과 높낮이는 아침저녁으로 공부에 여념이 없는 근이형의 품성을 그대로 담아 물흐르듯이 흘러가는 듯하다. 듣기 참 좋다. 간단히 아침식사를 하고 다시 짐을 쌌다. 근이형도 오늘은 문화회관에 강연을 나간다고 한다.


▲ 금강에 머물러있는 철새들




다시 29번 국도로 나와 군산을 향했다. 만경을 지나 대야까지는 금방 내달렸다. 어제처럼 평야지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점차 북풍이 강해지기 시작했다. 출발전부터 북상할 때 북풍이 있을 거라는 짐작은 했지만, 막상 거센 북풍을 맞으며 자전거를 타려니 속도가 나지 않는다. 군산으로 들어가지 않고 바로 금강하구둑으로 향했다. 금강하구둑은 어제까지 철새축제가 한참이었나 보다. 여기저기 철새축제를 알리는 팻말과 현수막이 눈에 띈다. 금강하구둑을 건너면서도 많은 철새들을 보았다. 철새 무리들이 잔잔하게 흘러가는 금강의 물살에 몸을 얹히고 한가로이 거니는 모습을 보았다. 이제 저들도 곧 긴 여행을 떠날 것이다. 계절이 바뀌고 더 나은 땅을 찾아 무리를 지어 떠나는 철새들의 여행은 또 얼마나 힘들고 고단할까. 하지만 그 여행을 통해 또 한세대가 삶을 이어가고 종족이 번영하는 것이다. 그들의 아름다운 비행처럼 내 자전거 여행도 내 더 나은 삶을 향한 길찾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금강하구둑을 넘어 부여로 가는 북상길에서는 더욱 심해진 바람을 느낄 수 있었다. 게다가 조그마한 언덕과 고개들도 이제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부여는 백제의 수도였던만큼 많은 산성과 요새로 지켜진 땅이다 보니 부여로 들어가는 길이 쉽지 않다.



▲ 일을 나가는 농부




▲ 늦가을과 초겨울 사이, 한가한 들녘 풍경




부여읍에 도착했다. 부여읍 중심가는 군청소재지이지만 소박했다. 지금까지 지나온 군청소재지들의 규모에 비해 아담하다는 느낌이다. 부여의 관광지도를 보니 부여주변에 볼거리가 많다. 하지만 시간이 늦어져 마땅히 가볼 시간이 되지 않는다. 이런 때가 좀 안타깝다. 바삐 올라가는 길이니 볼거리를 제대로 보지 못한다.

내일은 힘든 날이 될 것 같다. 또 터널을 피해 큰 고개를 하나 넘어야 한다. 공주로 들어가는 여정에서 얼마나 많은 언덕과 씨름해야 할지 알 수 없다.


주행거리 : 약 67km(도상)
주행시간 : 6시간
주행경로 : 김제학성강당 > 만경고교 > (29번국도) > 만경대교 > 대야면 > 금강하구둑 > 화양면 > 한산면 > 임천면 > 규암면 > 부여경찰서 > 부여군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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찜질방은 항상 어수선하다. 밤늦게까지 TV시청이 이어지고 끊임없이 이어지는 아주머니들의 그 많은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이 끝나는가 싶으면 남자들은 갖가지 잠자리 기행-예를 들어 코골기, 이빨갈기, 잠꼬대 등등-을 선보이고, 새벽에 자지러지게 깨어나 우는 아이들까지 참 많은 것을 겪기 마련이다. 그런 상태에서도 잠을 잘 수 있는 내성을 키운지는 오래지만, 간간히 그렇게 잠이 깨면 부시시 일어나 물이라도 한모금 마셔서 화를 삭힌다.

어쨌든 그럴걸 알기 때문에 일찌감치 사람들이 <주몽>을 보느라 정신없는 시간에 나는 눈을 붙였다. 새벽에 두어번 깨고, 6시에 잠자리를 털고 일어나 욕탕에 들어가 잠시 잠든 몸을 한번 더 깨웠다. 찜질방에서 자는 날은 항상 그렇다. 솔직히 욕탕에 들어가 있으면 이제 그만 쉬고싶다는 마음이 굴뚝같다. 그렇지만 서울까지 가야한다는 생각에 미치면 마음을 다시 단단히 부여잡는다.

정읍을 나왔을 때 오늘의 목표는 군산이었다. 705번 지방도를 타고 이평면까지 가고 거기서 710번 지방도를 타고 신태인방향으로 향했다. 이길 옆에 만석보유적지가 있다. 동학혁명의 발원지인 것이다. 정읍 여기저기에는 동학혁명을 기리는 장소와 유적이 많다.

신태인 방향으로 가다가 신태인으로 들어가지 않고 30번 국도를 타고 부안-김제 이정표를 보고 달렸다. 조금만 달리면 부안으로 가는 30번 국도와 김제로 가는 29번 국도 갈림길이 나오는데 여기서 29번 국도를 타고 김제로 향했다. 김제에 들어섰다는 것을 실감한 것은 바로 '지평선'이었다. 쭉 뻗은 도로의 끝에도 지평선이 보이고 양옆으로 펼쳐진 논에도 지평선이 보였다. 여기가 그 넓다는 김제평야다. 시원스럽게 지평선을 향해 내달리며 이 넓고 풍요로운 땅을 보는 것만으로 흐뭇해졌다.






김제시내로 들어가지 않고 바로 군산방향으로 길을 틀어 달리기 시작했다. 김제에서 군산 가는 길에 학성강당에 들려볼 생각이었다. 이곳에서 대학동기가 공부를 하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정읍에서 전화를 했더니, 그 사이에 어느새 임용고시도 보고 발령도 받아 올해부터 광주의 모중학교에서 한문을 가르치고 있다고 한다. 정읍에서 전화했을 때에서야 알았으니, 미리 알았다면 광주에서 얼굴이라도 볼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그러나 같이 공부하는 형이 그런 아쉬움을 단숨에 털어버리게 했다.

"시골에 왔는데, 하룻밤 묵고 가야제."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에 내 발목이 잡혔다. 아마도 비때문에 짧게 갔던 것을 빼고는 오늘 최단시간을 달렸다. 10시에 하루 여정을 마쳤으니 말이다. 하지만 형 덕분에 큰 스승님까지 뵐 수 있었고, 좋은 말씀도 들을 수 있었다. 형은 이곳에서 일가를 이루었다. 강당에서 10년 공부를 마치고 분가해 지금은 학성강당 옆에 손수 한옥집을 짓고,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하며 살고 있다. 지금은 가족들과 함께 된장을 만들어 판매하기 위해 준비 중이다. 옛 유학자들은 모두 주경야독을 했다면서 자기는 아직 깨달음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에 계속 공부하고 학문을 익힐 거라고 한다.

격물치지, 어떤 일을 하던, 어떤 물건을 보던 그 안에 들어 있는 이치를 깨닫는 것, 그것이 공부란다. 학문은 묻고 배우면서 익히는 것이고 공부는 일하면서 익히는 거라고 한다. 어떤 일이든, 그것이 가지고 있는 이치를 깨닫기 위해 노력해야 하며, 그것이 학문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무슨 일을 하던, 어떤 자리에 있던 거기서 최선을 다하는 것, 그래서 세상이 돌아가는 진리를 터득해 가는 것, 그것이 삶이다. 직접 집을 짓는 근이 형을 돕기 위해 난생 처음 전기톱으로 나무를 손질하면서 '일'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 본다. 그리고 나는 어떤 '일'을 하며 거기서 무엇을 생각하고 배울 것이냐는 자문에, 떨어지는 무수한 톱밥보다 많은 생각에 생각이 겹쳐지는 것을 보았다.





주행거리 : 43km
주행시간 : 3시간
주행구간 : 정읍>이평면>신태인>김제>학성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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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상나무

네가 보는 책들,한권한권이 모두 영혼을 가지고 있어.그것을 쓴 사람의 영혼과 그것을 읽고 살면서 꿈꾸었던 이들의 영혼 말이야.한권의 책이 새주인의 손에 들어갈 때마다,누군가가 책의 페이지들로 시선을 미끄러뜨릴때마다,그 영혼은 자라고 강인해진단다.-바람의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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