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편지를 썼다. 받는 이는 장모님이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편지라는 걸 마지막으로 썼던 게 언제였는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 이번에 쓴 편지에는 장모님의 건강을 기원하면서 민서를 포함한 우리 가족의 소소한 일상을 재미있게 담아보았다. 아내의 말에 의하면 장모님은 편지를 받고 무척 기뻐하셨다고 한다. 편지를 다 보자마자 아내에게 전화를 해서 각별한 말씀을 전하셨다.

……………………

편지라는 것은 형식상 누군가에게 일방적으로 자기 이야기를 담아 보내는 공간이다. 하지만 글을 쓰는 시간부터 답장이 오는 시간까지 그 시간이 길다. 자연히 소통의 시간이 길어지고, 사색의 여백은 넓어지기 마련이다. 이런 특징으로 편지는 독특한 문학 장르로 분류된다. 다양한 서간문이 교과서에 등장하는 이유다.

안토니오 그람시의 '감옥에서 보낸 편지'가 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2'로 선정된 이유도 그런 맥락일 것이다. 그람시의 문학적인 감수성과 철학과 역사에 대한 견해, 인생에 대한 자기성찰 등이 때로는 명료하게, 때로는 낭만적으로, 때로는 인간적으로 나타나 있다.

많은 독재자들은 저항하는 사상가들을 감옥에 보냈다. 그 중에 많은 이들이 감옥에서 죽거나 감옥에서 얻은 병으로 죽었다. 그람시의 경우도 10여년의 옥살이에서 얻은 지병으로 인해 사망했다. 부당한 권력일수록 사상가들의 생각을 가두는 방법으로 가장 손쉬운 감옥을 선택했고, 그람시 역시 무솔리니의 파시스트에 투항하지 않는 대신 감옥을 선택해 죽음을 맞이했다.

파시즘의 행태는 졸렬했다. 그람시의 생각이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해 그를 가두는 것뿐만 아니라 그에게 팬과 종이를 허락하지 않았으며 그가 쓴 모든 편지를 검열했다. 그러기에 그는 짧은 편지 안에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마음을 담아야 했고, 그만큼 정제된 내용들이 편지에 담겼다. 시간이 지나면서 좀더 많은 팬과 종이가 허락되었다고 하지만 그의 사상과 철학을 전달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을 것이다.

그의 편지에서는 인간적인 고뇌도 담겨 있다. 어린 자식을 둔 아비의 심정이 절절히 담긴 편지에서는 그가 돌보지 못하는 자녀에 대한 안타까움이 묻어나 있다. 그러나 그는 또한 늙은 어머니를 둔 자식이었다. 그의 어머니가 투항하지 않는 그로 인해 괴로워하고 안타까워했지만 그는 사상가로서의 명예와 존엄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다며 어머니를 설득하려 했다.

이탈리아 파시즘과 고독하게 맞섰던 사상가 그람시의 인간적인 면을 볼 수 있는 '감옥에서 보낸 편지'는 '절판'되었다. 아무래도 읽기가 수월하지 않은 여러 단점들이 이 책에는 있따. 편지글이라는 게 다분히 사적인 내용이다 보니 좀 실망스러운 부분도 있고, 그람시가 쓴 역사철학적인 내용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는 당시의 이탈리아에 대한 역사적 지식도 필요하다 보니 책을 읽어 나가는 게 그렇게 수월하지는 않다. 물론 다양한 각주들이 친절하게 붙어 있지만 각주와 편지를 번갈아 읽어내려가는 번거로움은 술술 읽어내려가는 독서의 즐거움을 방해한다. 마치 냉온탕을 번갈아 오가는 느낌인데, 이런 독서에 길들여지지 않은 독자라면 쉽지 않은 읽기가 될 것이다. 그렇다고 각주를 버리고 읽어나가자니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너무 많다. 아마도 이런 이유 때문에 이 책이 더이상 나오지 않는 것이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이제 쉽게 접할 수 없는 책이 되었다. 그람시라는 인물이 현대 사상사에서 차지하고 있는 비중을 생각할 때 안타까운 일이다. 물론 지금 세계에 맑스마저도 석기시대 이야기처럼 치부되고 있으니 이상할 것도 없겠다. 허나 적어도 파시스트에 맞서 감옥에서 생을 마감해야 했던 사상가의 인간적인 면과 문학적인 감수성이 담겨져 있는 책 한권이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어 안타깝다.


……………………

길고 긴 소통의 시간과 사색의 여백이 큰 편지가 묘한 매력으로 다가오고 있다. 이제는 낯설고 오래된 통신수단이 되어 버린 편지가 어떤 의미가 있을까 모르겠지만, 당분간 지인들에게 편지를 써 보는 건 어떨까 생각해 보고 있다.





감옥에서 보낸 편지(세계문학전집 42) 상세보기


책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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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 하세요?”

상대방을 알고자 할 때 가장 쉽게 던지는 말이다. 그 사람이 하는 일이 그 사람을 말해 준다는 오래된 관념이 투영되어 있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때로는 편견을 담는 말이다.

“편집자에요. 책 만드는 일을 하죠.”


내 설명은 그것으로 끝이다. 그럼 상대방은 여러 가지 상상을 할 것이다. 상대방의 지인 중에 편집자가 있다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좀 절망스럽다. 세상의 모든 작가들이 어떻게 편집자를 묘사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라. 작가가 받는 스트레스의 근원은 보통 편집자 혹은 편집장의 마감 독촉이다. 마감 독촉을 하는 편집자의 모습을 작가들은 사악하고 이기적인 모습으로 그리고 있다. 마감 원고를 받기 위해서는 옆에서 밤새도록 방문앞을 지키는 것도 마다하지 않을 독종들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의 <천사의 게임>에 나오는 코렐리라는 편집자는 작가의 영혼마저 담보로 잡고 있지 않나.


사실 편집자야 말로 음지에서 양지를 지향하는 사람들이다. 예전 교과서 편집자들에게 오가는 속설 중에 이런 말이 있다. ‘편집자가 교과서에 나오면 그 책은 심사에서 떨어진다.’ 물론 지금은 편집자의 이름도 버젓이 박혀서 교과서가 나오고 있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편집자들은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꺼려했다.


한 권의 책이 나오기 위해서는 기획, 집필, 디자인, 조판, 교정, 제판, 인쇄, 제본 등등의 과정을 거친다. 이 과정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들이 책을 만드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만, 정작 자기가 만드는 책이 어떤 책인지 속속들이 알고 있는 사람은 저자도 아니고 바로 편집자다. 편집자는 저 모든 과정에 개입해서 일일이 조정하고 합의하며 때로는 피터지게 싸우면서 한권의 책을 독자에게 선사하는 것이다. 훌륭한 오케스트라 연주를 위해서 지휘자가 필요하고, 대중을 사로잡는 영화를 만들려면 뛰어난 영화감독이 필요하듯이, 역사에 길이 남을 책이 세상에 나오는 데는 편집자의 역할이 매우 중요한 것이다.


이 책 <편집자란 무엇인가>는 편집자에 대한 모든 것을 담고 있다. 이 책은 책에 관심이 있는 사람-편집자, 저자, 북디자이너, 인쇄공-이라면 반드시 읽어볼 많은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좋은 책을 만들기 위해 어떤 노력과 과정이 필요하며, 어느 과정에서는 무엇에 세심하고 이런저런 치명적인 실수에 유의해야 하는지 일목요연하게 잘 설명하고 있다. 무엇보다 이 책이 나에게 준 감명은 사명감과 자부심이다. 



미국의 대표적인 출판사 가운데 하나인 사이먼 앤드 슈스터사에서 41년 동안 편집자로 일한 집시 다 실바는 기고문 <편집자와 저자>에서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며 이렇게 고백한다. "편집자는 대부분 알려지지 않는다. 우리는 글, 창조적 아이디어, 책을 사랑하기에 이 일에 매진할 뿐, 우리가 주목받길 기대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의 공헌을 깊게 이해한 저자가 머리말이나 감사의 글에서 우리의 이름을 언급하고자 하면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허락할 뿐이다. 우리는 편집자라는 직업이 최선의 책을 위해 묵묵히, 무명으로 공헌하는 직업임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이로 인해 우리 스스로를 하찮게 여기지 않는다."



나는 사폰이 그의 책 <바람의 그림자>에서 이야기했듯이, 모든 책은 영혼을 가지고 있다는 말을 믿는다. 한 권의 책은 수많은 밤을 새우면서 글자 하나하나 눈에 박아 넣었을 편집자들의 피와 땀을 머금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영혼이 더욱 깊어질수록 이 세상은 더 풍요로워질 수 있는 것이다.


올해로 책 만드는 일을 한지 횟수로 10년을 채웠다. 그동안 내 손을 거쳐간 책들이 지금 이 시간에도 이땅 어디에서 누군가에게 읽히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의 영혼과 내 영혼이 그 책에서 만나고 있는 것이다. 편집자라는 직업을 결코 버릴 수 없는 매력이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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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9일 실시된 제17대 대통령 선거 투표율은 62.9%인 것으로 잠정 집계됐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따르면, 총 선거인수 3765만 3518명 중 모두 2368만 3684명이 투표를 마쳐 투표율은 62.9%인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 대선 가운데 최저 투표율(70.8%)을 기록했던 16대 대통령선거보다 낮아 역대 최저 투표율 기록을 세웠다.”

어느 모 뉴스사이트에서 퍼 온 지난 대선 결과이다. 뉴스에서는 나오지 않았지만, 투표를 하지 않은 사람의 수는 정확히 1396만 9834명에 이른다. 이 중에서 정말 시간이나 여건이 안 되어 투표를 못하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할 것이다. 투표를 하지 않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이유는 다음으로 요약할 수 있다. 제일 많은 부분은, 어차피 내 한 표가 당락에 큰 영향을 끼치지 않음으로 차라리 놀러 가는 게 더 유익하다는 주장, 다음으로 더러운 정치판에는 관심 갖기 싫고 투표라는 행위가 귀찮기만 하다는 생각, 그리고 내 투표권을 기꺼이 양도할 만한 사람이 없어서 투표를 안 한다는 주장, 여기에 정말 아무 생각 없어서 투표를 안 하는 사람 등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태어나는 그 순간 평생 지킬 협정에 서명을 한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렇게 자문할 날이 온다, 누가 여기에 나 대신 서명을 했는가. -377쪽

이명박 정부 탄생 이후 나라 전체가 들썩거리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명박을 선택한 것을 후회하거나 투표를 하지 않음을 후회하고 있다. 누군가의 말처럼 우리는 우리가 선택한 것으로 이루어진다고 하지 않던가. 어쩌면 당신 주장대로 당신이 투표를 하건 안 하건, 세상은 돌아가기 마련이다. 하지만, 최근의 방송 드라마 시티홀의 남자 주인공 ‘조국’(차승원 분)은 좀 다른 생각을 가진 것 같다.

“여러분은 반성하셔야 합니다. 당신의 삶에서 당신이 원하는 걸 발견하지 못했다면 그건…당신의 선택이 잘못됐던 겁니다. 여러분은 지금 직장을 잃어도, 집을 잃어도, 그 흔한 문화시설 하나 없어도 다 내 팔자인 것입니다. 과연 여러분은 그런 팔자를 원하셨던 겁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여러분의 선택이 인주를 바꾸고. 인주가 바뀌어야 당신의 삶이 바뀌고. 당신 삶이 바뀌어야 당신 아이들의 삶이 바뀝니다…….”

소설 <눈뜬 자들의 도시>는 전작 <눈먼 자들의 도시>의 속편 격이다. 앞선 전작에서 작가 주제 사라마구는 눈을 뜨고 있으면서도 보지 않으려는 자들을 눈먼 자로, 그리고 눈뜬 자가 가져야 할 소명의식과 사명감을 어떻게 풀어갈 것인가를 세심하고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전작에서는 온 도시의 시민들이 눈먼 자가 되고 오직 한 명만 ‘눈뜬 자’였다면, <눈뜬 자들의 도시>는 시민들이 모두 ‘눈뜬 자’가 되어 부당하고 정의롭지 못한 사회 제도와 그런 제도를 유지하려는 기득권 세력에 맞서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온 나라가 백색 실명증에 걸리고 4년이 지난 후 치러진 총선. 그러나 유권자 중(투표자 중에서가 아니라 유권자 중에서다) 83%가 백지투표를 내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한다. 정부는 이 현상을 체제를 위협하는 불순분자의 선동으로 보고 비밀경찰을 이용한 불법 도감청 등의 방법으로 조사에 나섰지만, 뚜렷한 실체를 발견하지 못한다. 몇 번의 재선거에서도 똑같은 결과가 나오자 급기야 도시 전체를 반역자로 몰아 도시를 고립시킨다. 정부당국자들은 야밤에 수도를 빠져나가고, 계엄령을 내린 후 도시를 군대로 포위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정상적(?)으로 투표를 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마저 탈출을 거부당하고 사태가 일어나고 만다.

그러던 어느날 총리와 대통령 앞으로 편지가 한통 날아오는데, 4년전 온 나라가 백색실명증에 걸렸을 때 유일하게 눈이 멀지 않은 여인이 있었다는 내용으로, 정부 당국자들은 이것을 이번 백지투표와 연관시켜 수사하도록 경찰들을 도시로 보낸다.

경찰들은 도시를 오가면서 유일하게 눈이 멀지 않았던 의사의 아내를 비롯해 그와 함께 힘든 시기를 견뎌냈던 사람들을 만나며 탐문 수사에 들어가지만, 마땅한 혐의를 발견할 수 없었다.

그런 와중에 수사팀장인 경감은 수사에 회의를 느끼고, 정상적인 명령이나 지시가 아닌 의도적 함정 수사에 대해 의사의 아내에게 솔직히 털어놓게 된다. 정부는 이 사실을 모른 채 의사의 아내를 시민들의 반역(백지투표)의 주모한 반역자로 몰아가는 여론 몰이를 한다. 그러나 그들의 시도가 번번이 실패로 돌아가자 끝내는 극단적인 방법을 동원하기에 이른다.

우리는 반역자들이 이성에 귀를 기울이게 하려는 우리의 모든 시도가 하나하나 대실패로 끝나고 말았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한 실패의 원인은, 적어도 내 의견으로는, 우리가 선택한 탄압 조치가 가혹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지금까지 추구하던 전략을 계속 따른다면, 강압적인 방법들의 수위를 계속 높인다면, 또 반역자들의 반응이 계속 지금까지와 같다면, 즉 아무런 반응이 없다면, 우리는 독재적 성격을 가진 극적인 조치에 의지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 221쪽

지금으로부터 160여년 전에 핸리 데이빗 소로우는 이미 작은 정부의 필요성을 주창했다.

“우리는 먼저 인간이어야 하고, 그 다음에 국민이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법에 대한 존경심보다는 먼저 정의에 대한 존경심을 기르는 것이 바람직하다. 내가 떠맡을 권리가 있는 나의 유일한 책무는, 어떤 때이고 간에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행하는 일이다.”

우리는 우리가 속한 지금의 정부, 그리고 사회 제도는 지금의 우리가 원해서 된 것이 아니며, 과거의 잘못된 관행에서 이어져 온 온전치 못한 부당함과 비리를 품고 있음을 잘 알고 있다. 따라서 얼마든지 우리가 정의롭고 올바르다고 믿는 방향으로 바꾸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하루에도 수없이 많은 선택의 기로에 선다. 그리고 우리 자신의 정체성은 그 선택들로 이루어진다. 이 사회 역시 당신의 선택들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눈 감을 것인가, 눈 뜰 것인가.

검은 색과 빨간색으로 된 표제만 보더라도 각각의 신문에 어떤 내용이 담겨 있는지 우리도 대충은 짐작할 수 있다, 조국의 적들의 또 한 번의 전복 행위, 누가 복사기를 돌렸는가, 허위 정보의 위험, 누가 그 복사 값을 냈는가. - 419쪽

이 부분을 보면서 실소를 흘릴 수밖에 없었다. 언젠가 ‘그 많은 초들은 누가 돈을 댔느냐’며 화를 벌컥 냈다는 사람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눈뜬 자들의 도시 - 8점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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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행성에서 지적 생물이 성숙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생물이 자기의 존재 이유를 처음으로 알아냈을 때이다. 만약 우주의 다른 곳에서 지적으로 뛰어난 생물이 지구를 방문했을 때, 그들이 우리의 문명 수준을 파악하기 위해 맨 처음 던지는 질문은 "당신들은 진화를 발견했는가?"라는 물음일 것이다. - <이기적 유전자> 40쪽

어떤 나라에서 지적 사회가 성숙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사회가 자기의 존재 이유를 처음으로 알아냈을 때이다. 만약 지구의 다른 곳에서 문명이 뛰어난 사회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 그들이 우리의 문명 수준을 파악하기 위해 맨 처음 던지는 질문은 “당신들은 사회의 진화(진보)를 발견했는가?”라는 물음일 것이다.

원문을 쓴 리처드 도킨스에게는 참 미안한 말이지만, 우리 사회의 미개함을 꾸짖고 싶어 그의 글을 차용해 봤다. 이렇게 한 의도에는 작금의 현실의 야만성도 한몫했다. 쉽게 이야기되는 막장 문화는 둘째 치고, 여전히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벌어지는 연쇄살인의 극악함, 거기다가 밑도 끝도 없이 벌어지는 공권력의 무지막지함과 그 저열함에 있다. 우리 사회의 진보는 가능한가? 있기는 한가?

아,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얼마 전에 읽은 책 <이기적 유전자>(리처드 도킨스 저, 을유문화사)를 이야기하려는 의도였다. 그러니 본론으로 충실해 보자.

많은 이들(그러니까 나를 포함해서)이 이 책의 제목만으로 헛된 망상과 철학을 늘어놓았다. 이거 뭐지? 인간은 그러니까 그 근본부터 이기적 존재라는 것인가? 그러니 이 사회는 적자생존의 정글 논리가 지배하는 게 당연하고 약육강식에 따라 질서가 재편되어야 한다는 건가? 강한 놈이 이기는 것이니 재주껏 살아남을 수 있도록 강한 놈에게 빌붙어야 한다는 말인가? 그러고 보니 얼마전 강만수 장관이 돈 많은 사람들이 혜택을 보게 될 종부세 폐지를 밀어붙이고 감세정책을 발표하면서 "인간의 본성을 무시한 정책은 오래 가기 힘들다"라는 말을 했다고 하는데, 그 사람이 생각하는 인간의 본성이 아마 저런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이 책의 핵심은 이렇다.

지구 생명체의 진화는 유전자가 더 많은 복제품을 남기는 쪽으로 진행되었다. 이를 통해 유전자는 불멸의 생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에 따라 인간을 비롯해 모든 생명체는 그 유전자를 후세에 전달하기 위해 마련된 생체기계일 뿐이며, 생체 기계인 생명체는 유전자의 이익, 즉 후세에 유전자의 복제를 충실히 이행하기 위해 프로그램 되어 있다는 것이다. 진화의 기본단위는 유전자이며, 이 유전자를 이해할 때 진화를 이해할 수 있다고 그는 설명한다. 유전자의 자기 복제에 대한 욕구를 ‘이기적’이라는 말로 은유적으로 표현했는데, 나는 그런 엄청난 오해(?)를 하고 말았다. 무식해서 부끄러울 뿐이다. 강만수 당신도 무식한 건 마찬가지다.

생물학적으로 유전자 입장에서 본 이타성은 불가능한 개념이다. 그런 유전자가 있다면 애초에 사라지고 존재할 수 없는 것이 된다. 그러나 이것을 인간의 본성이라고 치환하는 오류를 범할 사람을 위해 리처드 도킨스는 이기적 유전자의 특성에 반하는 밈(Meme) 이론, 즉 문화유전론을 내놓았다.

우리에게는 우리를 낳아 준 이기적 유전자에 반항하거나 더 필요하다면 우리를 교화시킨 이기적 밈에게도 반항할 힘이 있다. 순수하고 사욕이 없는 이타주의라는 것은 자연계에는 안주할 여지가 없고 세계의 전 역사를 통해 과거에 존재한 예도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의식적으로 육성하고 교육하는 방법도 논할 수 있다. 우리는 유전자 기계로서 조립되었지만 밈 기계로서 교화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들의 창조자에게 대항할 힘이 있다. 이 지구에서는 우리 인간만이 유일하게 이기적인 자기 복제자들의 전제에 반항할 수 있는 것이다. - 349쪽

최근 우리 사회는 새로운 문화 유전자를 발견했다. 바로 집단지성이다. 물론 집단 지성은 대중의 의식과 별반 달라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단순한 의식의 반영이라는 대중 의식과 계속해서 발전하는 집단 지성 사이에는 가장 큰 차이가 있다. 바로 소통이다. 막장 드라마라면서도 계속해서 시청률을 상회할 수 있는 것은 소통이 없는 대중 의식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집단 지성은 이미 졸렬한 자극과 허무맹랑한 우연, 성찰이 없는 드라마를 막장으로 규정짓고 비판하고 있다. 소통이 만들어 낸 비판의식이다.

반면 소통을 거부하고 오로지 제 갈 길(?)만 가겠다고 외치며 앞에 거치적거리는 시민들을 무참히 살해하면서 나아가는 저 정부는 그야말로 막장 중의 막장이다. 시민들은 소통의 장에서 지금의 현실을 조목조목 비판하면서 그에 저항하고자 결집하고 있다.
권력과 전제에 대항할 수 있는 힘, 그것은 우리 스스로에게 있음을 <이기적 유전자>는 밝히고 있다.

다시 도킨스의 말을 차용해 와 정리해 보면,

우리에게는 우리가 먹여 살리는 공권력에 반항하거나 더 필요하다면 우리를 지배하려는 권력자에게도 반항할 힘이 있다. 순수하고 사욕이 없는 이타주의라는 것은 이 사회에는 안주할 여지가 없고 세계의 전 역사를 통해 과거에 존재한 예도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의식적으로 육성하고 교육하는 방법도 논할 수 있다. 우리는 시민의 한 사람이라는 형식으로 조립되었지만 국민으로서 교화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들 권력자들에게 대항할 힘이 있다. 이 대한민국에서 깨어있는 시민만이 유일하게 이기적인 권력자의 전제에 반항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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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대해

물론 <이기적 유전자>라는 책은 참 좋은 책이다. 하지만 이 책을 읽는데 참으로 오랜 시간이 걸렸다.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을 먼저 읽었던 나로서는 왜 이렇게 읽기가 더딘지, 이해가 안 가는 문장은 왜 이리 많은지 나의 무식을 탓해야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을유문화사에서 나온 책의 번역이 엉망이란다.

그러니 되도록 이 전에 나온 동아출판사 <이기적인 유전자>를 볼 것을 추천한다(물론 절판이다, 헌책방 뒤져야 한다). 나도 이 책 팔고 그 책을 찾아서 다시 볼까 생각중이다. 네이버에서 ‘이기적 유전자 번역’만 쳐도 관련 이야기는 쏟아져 나올 것이니 참고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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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자들은 생활에 지쳐 여행을 떠나지만, 그것이 며칠짜리 레저가 아니라면, 결국 여행이란 삶을 등지고 죽음의 냄새를 맡으러 가는 머나먼 길이다.
- <여행생활자> 유성용 | 갤리온 | 2007.6.1.


책 표지는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여행기’라고 버젓이 내보이고 있다. 쿨(cool)한 것도 지겨워 핫(hot)해 버린 세상에 ‘쓸쓸’이라는 못난 두글자를 내놓은 책이다. 도대체 이 작자는 어떤 여행을 했기에 이런 말을 표제에 내걸었을까.

제목도 생소하기 그지없다. <여행생활자>라니, 낯선 신조어 앞에서 고개만 갸웃거렸다. 책의 마지막 마침표를 핥고 나니 그 쓰디쓴 단어의 맛에 괜히 침울해진다. 여행이 생활이 된 자는 길위에서 죽음을 예고한다. 그것은 외롭고 구차한 삶이다. 생활을 잃어버리고 정처없이 떠돌다가 구천의 어느 하늘 아래에 조용히 숨을 거두어야 하는 삶은 슬프다. 그러니 쓸쓸한가.


여행생활자, 그 낯설고 우울하고 생소함


책의 시작은 여행의 시작처럼 설레임으로 시작된다. 여행자의 발걸음은, 리장의 축제에 어우러진 남녀의 춤처럼 가볍다. 아무도 두려워할 것도 없이 ‘무위(無爲)의 여정을 극진히 제 속에 새기’고 나아가는 일 뿐이 없다. 천장공로, 그러니까 중국의 시천에서 티베트로 이어지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에서는 눈 때문에 발이 묶여 끔찍하게 추운 밤을 지새워야 했다.

티베트에서는 일생동안 지은 죄의 업보를 씻겠다고 수미산 주위를 한바퀴 돌다가 중간에 쓰러지기도 했다. 이 산을 평생동안 여든두번째 돌고 있다는 칠순의 노인네도 만나고, 3개월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돌고 있다는 중년의 사내도 만나고, 오체투지로 산을 돌고 있는 여인네도 만났다. 이들은 이생에, 아니 전생에 무슨 업보가 그리 많아 이리도 많이 산을 돌고 있는 것일까. 여행자의 머릿속은 그저 ‘여행은 언젠가 끝이 날 것’이라는 생각만 맴돌았다고 한다.





인도에서는 이틀동안 버스를 타고 카슈미르 지역을 지나가야 했다. 군사적 긴장이 팽배하고 테러조직 알카에다의 그림자가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곳이다. 그의 여행은 이처럼 무모하기 그지없다. 그것이 세상의 끝이라 하더라도 길이 있다면 가야하는 여행생활자의 운명이기도 하다. 그래도 그 너머에서는 말도 통하지 않는 재봉사와 여러날 동안 깊은 교감을 나누었다. 교감은 이해를 바탕으로 이루어지며 이해는 말로만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지독히 가난한 나라, 불교의 나라, 스리랑카에서는 기원을 배운다. 수백명의 경건한 얼굴들에서 기원의 방법을 배운다. 기원은 자주 되뇌고, 암송하고, 잊지 않으면, 기원이 또한 나를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이다. 여행자는 여기서 무엇을 기원할까. 그 기원은 여행자를 기억해 줄까. 잊지 않을까.


여행, 그것은 제 밖으로 드러나는 길들을 오롯이 걷는 일


네팔에서는 ‘나마스테’, 만나는 이들을 위해 경배하였고, 묵티나르에 올라서 더 이상 길이 없는 길을 만나고야 만다. 나가르코트에서는 반군 게릴라 청년과 만나 지난 여름 불타올랐던 그의 열정, 지금은 차갑게 얼어붙고 있는 열정을 나에게 비춰본다.

인도에서 파키스탄으로 넘어가는 길목에서는 이라크에서 김선일 씨가 납치 피살됐다는 소식을 듣는다. 파키스탄이 어떤 나라던가. 알카에다의 은둔지로 점찍힌 곳이며 그에 못지 않은 보수적인 무슬림들의 분위기가 팽배한 나라 아닌가. 파키스탄에서도 금지된 곳, 아프가니스탄 접경지역까지 일부러 찾아가 거기서 살고 있는 아프가니스탄인들을 만나 삶의 팍팍한 일상을 엿본다. 죽어나가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는 난민촌까지 몰래 찾아들어가는 그 배포는 어디에 있었을까.




그리고 1년 반에 걸친 그의 여행은 끝났다. 그에게 여행은 무엇이었을까. 어쩌면 우리는 지금 생활이라는 삶이라는 여행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낯설고 무섭고 두려울 뿐이니까 말이다. 여행은 곧 ‘나’를 찾아가는 과정이고, ‘생활’을 찾는 과정이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온전히 ‘나’를 잊어야 하며 ‘생활’을 잊어야 한다. ‘알아도 모른척하며 온전히 제 밖에 드러나는 길들을 오롯이 걷는 일이 여행의 근간’이라고 여행자는 말한다.


여행생활자
카테고리 여행/기행
지은이 유성용 (갤리온,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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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상나무

네가 보는 책들,한권한권이 모두 영혼을 가지고 있어.그것을 쓴 사람의 영혼과 그것을 읽고 살면서 꿈꾸었던 이들의 영혼 말이야.한권의 책이 새주인의 손에 들어갈 때마다,누군가가 책의 페이지들로 시선을 미끄러뜨릴때마다,그 영혼은 자라고 강인해진단다.-바람의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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