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를 하면서 다시 책들을 정리했다. 이전에 아내와 책들을 합칠 때보다 더 정밀한 구분 작업을 했다. 시와 한국 소설 쪽은 출판사 별로 하거나 시리즈별로 해야 보기 좋게 정리되었다. 하지만 이는 보기에는 좋아도 실제적인 활용에서는 불편하기 그지 없다. 그래서 작가 이름 순서로 정리해 보았다. 동일 작가의 작품들이 가지런히 배열되니 책을 보는 느낌이 다르다. 시에서는 신경림 시인의 시집이 7권으로 가장 많았고, 그 다음으로 안도현, 김용택, 김남주의 순서를 나타냈다. 소설에서는 황석영의 소설이 5종으로 많았다. 이렇게 정리하다 보니 아내와 내가 둘다 가지고 있는 시집이나 소설이 몇권 나타났다. 교양과학과 역사(신화) 관련 책을 한칸에 몰았다. 경제와 환경 관련 서적도 일단 하나의 칸에 몰았다. 사회비평은 홀로 온전히 한칸을 몽땅 차지했다. 취미실용 중에 여행과 사진은 따로 칸을 마련해 두고 나머지는 함께 몰아두었다.

뿌연 먼지를 날리며 반나절을 꼬박 작은 방에서 그 작업을 했다. 잃어버렸던 책꽂이는 발견했지만, 역시나 정체모를 돈 따위는 나타나지 않았다. 오히려 중복된 책들이 여러 권 발견됐다. 게다가 복잡한 책장에 자리가 부족한만큼 불필요한 책들을 과감히 버리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방한구석에는 노끈에 단단히 묶인 책들이 쌓였다. 마치 중죄를 지은 죄인처럼 포박을 당한 채 쪼그라져 있는 모습은 보기에도 안타까워 보였다. 책들은 이제 형장, 아니 고물상에서 이슬을 맞으며 사라질 일만 남은 듯하다. 물론 도서관에 기증할 생각도 없는 건 아니다. 그런 책들은 그럴 운명으로 분류되지만, 그렇지 못한 책들이 문제다. 만일 꿈꾸는 책들의 도시 부흐하임이 있다면, 그 도시의 지하 세계에서 산다는 그림자 제왕에게 보낼 수 있다면?



이 책의 주인공은 공룡 미텐메츠다. 이런, 사람도 아니고 공룡이 주인공이다. 아니 정정하자. 이 책의 주인공은 책이었다. 시종일관 책들은 주인공을 괴롭히고, 위기로 몰아넣고, 생명을 위협하며, 심지어 중독과 최면을 걸기도 한다. 책을 찾아다니다가 지하 세계 깊숙한 곳까지 떨어지고 고대의 룬문자로 쓰인 책들의 기운에 휩싸인 채 책사냥꾼의 표적이 되어 도망 다니다가 부흐링이라는 책을 먹는 종족도 만난다. 부흐링족이 책을 먹는다는 것은 인간들의 읽는 행위와 같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부흐링이라는 종족은 책을 읽어야 영양분을 흡수하고 배가 부르단다. 심지어 바로크 소설을 한꺼번에 세권을 읽은 어느 부흐링족 청년은 다이어트를 위해 수일간 하루에 시 3편만 읽어야 한다고 말한다. 아무튼 이런 세상에서 이야기의 주인공 미텐메츠는 대부의 유언대로 부흐하임에 왔다가 온갖 일들에 휩쌓인다. 그리고 마침내 잊혀진 책들의 지하세계, 그 곳의 왕 그림자 제왕과도 극적인 만남을 가진다.

다시 말하지만 이 책의 주인공은 어디까지 '책' 그 자체다. 책을 읽는 내내 책을 손에서 내려놓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장장 800쪽에 가까운 분량이지만, 책은 충분히 나에게 마법의 주문을 외쳐 나를 지하세계로 질질 끌고 내려가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책을 즐기는 사람, 책을 사랑하는 사람, 책을 읽는 즐거움을 아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이 책을 읽고 즐길 수 있다.


꿈꾸는책들의도시(전2권SET)
카테고리 소설 > 독일소설
지은이 발터 뫼르스 (들녘, 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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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내 방에 처박혀서 버려질 시간만 기다리고 있는 저 책들이 마지막에 닿을 저 세상은 부흐하임의 깊은 지하 세계이길 바라는 마음은 그래서 고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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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편지를 썼다. 받는 이는 장모님이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편지라는 걸 마지막으로 썼던 게 언제였는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 이번에 쓴 편지에는 장모님의 건강을 기원하면서 민서를 포함한 우리 가족의 소소한 일상을 재미있게 담아보았다. 아내의 말에 의하면 장모님은 편지를 받고 무척 기뻐하셨다고 한다. 편지를 다 보자마자 아내에게 전화를 해서 각별한 말씀을 전하셨다.

……………………

편지라는 것은 형식상 누군가에게 일방적으로 자기 이야기를 담아 보내는 공간이다. 하지만 글을 쓰는 시간부터 답장이 오는 시간까지 그 시간이 길다. 자연히 소통의 시간이 길어지고, 사색의 여백은 넓어지기 마련이다. 이런 특징으로 편지는 독특한 문학 장르로 분류된다. 다양한 서간문이 교과서에 등장하는 이유다.

안토니오 그람시의 '감옥에서 보낸 편지'가 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2'로 선정된 이유도 그런 맥락일 것이다. 그람시의 문학적인 감수성과 철학과 역사에 대한 견해, 인생에 대한 자기성찰 등이 때로는 명료하게, 때로는 낭만적으로, 때로는 인간적으로 나타나 있다.

많은 독재자들은 저항하는 사상가들을 감옥에 보냈다. 그 중에 많은 이들이 감옥에서 죽거나 감옥에서 얻은 병으로 죽었다. 그람시의 경우도 10여년의 옥살이에서 얻은 지병으로 인해 사망했다. 부당한 권력일수록 사상가들의 생각을 가두는 방법으로 가장 손쉬운 감옥을 선택했고, 그람시 역시 무솔리니의 파시스트에 투항하지 않는 대신 감옥을 선택해 죽음을 맞이했다.

파시즘의 행태는 졸렬했다. 그람시의 생각이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해 그를 가두는 것뿐만 아니라 그에게 팬과 종이를 허락하지 않았으며 그가 쓴 모든 편지를 검열했다. 그러기에 그는 짧은 편지 안에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마음을 담아야 했고, 그만큼 정제된 내용들이 편지에 담겼다. 시간이 지나면서 좀더 많은 팬과 종이가 허락되었다고 하지만 그의 사상과 철학을 전달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을 것이다.

그의 편지에서는 인간적인 고뇌도 담겨 있다. 어린 자식을 둔 아비의 심정이 절절히 담긴 편지에서는 그가 돌보지 못하는 자녀에 대한 안타까움이 묻어나 있다. 그러나 그는 또한 늙은 어머니를 둔 자식이었다. 그의 어머니가 투항하지 않는 그로 인해 괴로워하고 안타까워했지만 그는 사상가로서의 명예와 존엄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다며 어머니를 설득하려 했다.

이탈리아 파시즘과 고독하게 맞섰던 사상가 그람시의 인간적인 면을 볼 수 있는 '감옥에서 보낸 편지'는 '절판'되었다. 아무래도 읽기가 수월하지 않은 여러 단점들이 이 책에는 있따. 편지글이라는 게 다분히 사적인 내용이다 보니 좀 실망스러운 부분도 있고, 그람시가 쓴 역사철학적인 내용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는 당시의 이탈리아에 대한 역사적 지식도 필요하다 보니 책을 읽어 나가는 게 그렇게 수월하지는 않다. 물론 다양한 각주들이 친절하게 붙어 있지만 각주와 편지를 번갈아 읽어내려가는 번거로움은 술술 읽어내려가는 독서의 즐거움을 방해한다. 마치 냉온탕을 번갈아 오가는 느낌인데, 이런 독서에 길들여지지 않은 독자라면 쉽지 않은 읽기가 될 것이다. 그렇다고 각주를 버리고 읽어나가자니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너무 많다. 아마도 이런 이유 때문에 이 책이 더이상 나오지 않는 것이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이제 쉽게 접할 수 없는 책이 되었다. 그람시라는 인물이 현대 사상사에서 차지하고 있는 비중을 생각할 때 안타까운 일이다. 물론 지금 세계에 맑스마저도 석기시대 이야기처럼 치부되고 있으니 이상할 것도 없겠다. 허나 적어도 파시스트에 맞서 감옥에서 생을 마감해야 했던 사상가의 인간적인 면과 문학적인 감수성이 담겨져 있는 책 한권이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어 안타깝다.


……………………

길고 긴 소통의 시간과 사색의 여백이 큰 편지가 묘한 매력으로 다가오고 있다. 이제는 낯설고 오래된 통신수단이 되어 버린 편지가 어떤 의미가 있을까 모르겠지만, 당분간 지인들에게 편지를 써 보는 건 어떨까 생각해 보고 있다.





감옥에서 보낸 편지(세계문학전집 42) 상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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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상나무

네가 보는 책들,한권한권이 모두 영혼을 가지고 있어.그것을 쓴 사람의 영혼과 그것을 읽고 살면서 꿈꾸었던 이들의 영혼 말이야.한권의 책이 새주인의 손에 들어갈 때마다,누군가가 책의 페이지들로 시선을 미끄러뜨릴때마다,그 영혼은 자라고 강인해진단다.-바람의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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