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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줄거리                        

선비 이호창(송강호 분)은 유일한 출세의 길이었던 과거제도가 폐지되자 삶의 목표를 잃는다. 형은 시대적 울분을 안고 의병활동을 나서고, 아버지는 개화세력에 밀려 관직을 그만두고 서당을 운영한다. 아버지는 호창이 서당을 물려받기를 원하지만 호창은 과거 제도가 폐지된 후 암담한 미래 앞에서 글에는 관심 없고 공놀이만 즐긴다.

어느날 호창은 아버지 몰래 공을 차다가 공이 남의 집으로 들어가자 공을 찾으러 담을 넘는다. 그러다가 우연히 야구공을 보았고, 유학파 신여성인 민정림(김혜수 역)을 만나 야구를 시작하게 된다.

호창의 아버지는 아들이 서당을 물려받아 글공부를 하면서 초야의 선비로 지조 있게 살기를 바라지만, 호창은 그런 아버지의 마음을 받아들여 효도를 할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신문물을 적극 수용하는 한편, 마음에 품고 있는 정림에 대한 사랑을 키울 것인가를 놓고 갈등한다.

우여곡절 끝에 민정림이 활동하는 YMCA에서 ‘베쓰볼’ 팀이 모집되었다. 이 야구단이 황성기독교청년회 야구단이다. 야구를 전혀 모르는 구한말 조선의 백성들이 야구팀을 만들어 훈련하고 경기를 펼친다. 이후 덕어학교, 영어학교와의 경기에서 연승 행진을 하면서 조선 최고의 인기 야구팀이 되었지만, 을사조약 이후 나라의 위기로 인해 야구팀에도 위기가 찾아온다.

이들이 야구 연습을 하던 연습장에 일본군이 들어오고, 일본군 팀의 성남구락부와의 중요한 야구 경기가 펼쳐지지만, 주요 멤버인 오대현(김주혁 분)과 이호창의 불참으로 경기는 지고 만다. 패배와 함께 해체 위기에 놓인 YMCA 야구단은 다시 한 번 어렵게 일본 측과의 재경기가 성사되는데…



2. 첨삭하면 쉬워지는 교과서                          

① 개화기의 스포츠

1876년에 개항과 함께 본격적인 서구문화가 유입되면서 전통 체육도 근대적 체육 형태로 변화가 시작되었다. 근대적 체육의 특성인 체조, 유희, 스포츠 등이 나타난 것은 1894년 갑오경장부터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근대 체육의 도입은 특수층만의 유희나 무예적 체육에서 모든 학생들이 교과로서 참여하는 서민 본위의 체육으로 변천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1885년 2월에 고종이 발표한 ‘교육조서’에 따르면, 당시 교육의 실제는 ‘덕육, 체육, 지육’에 있다고 밝혔다. 이러한 근대적 교육의 3대 강령에 따라 1895년의 소학교령에서는 체육의 목표를 ‘아동 건강의 유지 증진과 발육 발달’로 삼았으며, 이를 위해 ‘체조’를 교육시키도록 하였다. 

근대적 스포츠의 도입 시기

경기

도입일시

최초 경기

체조

1895. 4. 16.

한성사범학교 설치령에 체조 교과가 정식으로 채택

육상

1896. 5. 2.

영어학교 교사 허치슨의 지도에 의한 화류회에서 경기 가짐.

검도

1896

경무청에서 검도를 경찰교습과목으로 채택

수영

1898. 5. 14.

무관학교 학생들에게 휴가시 수영 연습을 명함.

씨름

1899. 4. 30.

학부주최 관·사립학교 운동회에서 경기종목으로 채택

사격

1904. 9. 24.

육군연성학교에서 사격을 교과목으로 채택

야구

1905

미국인 선교사 질레트가 황성기독교청년회원들에게 지도

축구

1905

외국어학교의 외국인 교사들의 지도로 학생들이 축구를 함.

사이클

1906. 4. 22.

육군참위 권원식과 일본인 요시카와가 훈련원에서 경기 개최

유도

1906

일본인 내전양평에 의해 전래

농구

1907. 봄

황성기독교청년회 초대총무 질레트가 회원들에게 보급시킴

빙상

1908. 2. 1.

평양 대동강에서 일본인들이 빙상운동회 개최

정구

1908. 4. 18.

탁지부(현 재무부) 일반관리의 운동회 때 정구경기종목 채택

승마

1909. 6. 13.

근위기병대 군사들이 훈련원에서 기병경마회를 거행

▲ 자료: 『대한체육회사』, 대한체육회, 1965.



민정림 : 운동 좋아하시나봐요? 이호창 : (얼굴 표정 굳어지며) 나! 선비올시다!    



② 근대 스포츠의 발달을 주도한 야구

1912년 황성YMCA 야구단은 일본 원정을 떠났다. 당시 일본의 어느 신문은 이들의 모습에서 비장감을 느끼며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일본을 정복한다’는 결심으로 그 젊은이들의 피가 끓었다.”

이들에게 나타났던 결기는 1910년 일제에 의한 강제병탄으로 민족의 울분과 분노가 이들의 얼굴에 비쳐졌기 때문일까? 지금의 한일전처럼 당시에도 관심이 높았던 스포츠 경기에서 나타난 한일전의 각오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만큼 조선백성의 야구에 대한 관심은 대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소설가이자 시인이었던 심훈의 시 속에서는 야구에 대해 이렇게 묘사했다.

“식지 않은 피를 보려거든 야구장으로 오라!”

처음으로 우리나라에 야구를 전했던 질레트 선교사의 보고서에서도 야구에 대한 조선 사람들의 열정은 대단해서 한 겨울에도 야구 경기가 치러졌음을 알 수 있다.

“매달 6~9회의 야구 게임이 치러졌다. 심지어 12월에도 3번의 게임이 치러졌다.” - 1911년, 질레트의 <연간 보고서> 중에서

1909년에 치러졌던 재일 조선유학생 야구단과 황성기독교 청년회 서양선교사들의 야구 경기에는 경기를 보기 위해 약 500~600명이나 운집했다고 한다. 게다가 이 경기에서는 재일 조선 유학생이 19점을 내면서 9점을 낸 선교사 팀을 크게 제압했다. 재일 조선유학생 야구단은 이후 황성YMCA 야구단뿐만 아니라 야구에 대한 관심이 높아가던 조선 전역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호창: 나 4번 하기 싫소. 재수없소, 죽을 死! 민정림: 제일 잘치는 사람이 4번입니다. 이호창: (웃으며) 선비 士!


③ 일제시대의 스포츠 활동

한일강제병합 이후 일제는 1911년 조선교육령을 공포한다. 이는 한국인을 일제의 신민으로 육성하기 위한 교육정책을 담고 있었다. 당시의 학교교육령규칙에서 체육과의 내용 중에는 “자세를 단정히 하고 … 절제를 상하는 습관을 양함을 요지로 함”이라고 밝히고 있다. 일제는 이미 순종하는 국민을 양성하도록 하는 데에 체육의 목표를 두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체육 관련 정책의 과정에서 1913년 황성YMCA는 일제에 의해 해체되고 만다. 그러나 1920년 조선체육회가 창립되어 그해 11월에 배재고등보통학교 운동장에서 제1회 전조선야구대회를 개최하게 된다. 이 대회를 전국체전의 기원으로 보고 있다.

이처럼 체육 활동이 활발히 전개된 것은 체육활동이 청년들의 능력배양과 함께 일제에 대한 저항의 표현으로 인식되어 문화운동의 한 부분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일제는 전국규모의 체육대회를 개최하던 조선체육회를 일장기를 게양하지 않은 이유로 탄압하고 끝내 해체시키고 만다.

민정림: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어요. 을사오적, 오십적, 아니 오백적이 사라진다고 이 나라가 뭐가 달라질까. 그런 암적인 존재들이 사라진다고 사람들이 과연 기뻐하기나 할까?




YMCA 야구단 (2002)

YMCA Baseball Team 
6.8
감독
김현석
출연
송강호, 김혜수, 김주혁, 황정민, 이부 마사토
정보
코미디 | 한국 | 104 분 | 2002-10-03



** 이 글은 티칭허브에 올린 글을 가져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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