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박현옥 | 문이당 | 2006년 5월 읽음

<아내가 결혼했다>
당황스러운 제목이다. 누군가 소개해줬을 때 이혼 이후의 얘기라고 짐작했다. 드라마 ‘연애시대’처럼(사실 이 드라마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이혼 이후에도 관계를 이어가는 남녀의 이야기는 흔한 소재였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책장을 열 때부터 심상치 않다. “모든 것은 축구로부터 시작되었다.”라고 시작하는 소설의 첫머리. 제목-아내가 결혼했다-은 남자들에게 비난받기 좋고 첫머리-모든 것은 축구로부터-는 남자들의 시선을 끌어들인다. 물론 여기서 말한 남자들이란 ‘모든’ 남자를 말하기 보다는 ‘대부분’의 남자들을 말한다. 아내가 결혼하는 걸 좋아할 남자들은 극히 드물 것이며, 축구를 싫어하는 남자보다는 좋아하는 남자가 훨씬 많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렇게 작가는 보통의 남자들에 심성을 가진 나를 끌었다 놓았다 하며 내 눈을 꽉 잡았다.
책을 읽는 내내 아내의 결혼에 대해 심정적으로, 적극적으로 거부하면서도 ‘사랑’이라는 이유로 현실을 받아들이는 ‘나’가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은 ‘아내’의 논리정연하고 한편으로 사랑스러운 설득 때문이었다. 읽는 나도 눈물겹게(?) 동감할 수밖에 없었다.
여전히 간통이 법률적으로 처벌을 받는 우리나라 현실에서 아내의 사랑은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사회적 반역행위다. 하지만 ‘사랑’은 ‘제도’보다 우선하는 것이다. 끝내 아내의 또 다른 남자를 인정하지 않는 ‘나’는 결국 아내의 설득에 못 이겨 호주에서 ‘나’와 ‘아내’와 ‘그놈’과 ‘딸’이 한 가족을 이루며 살기로 약속한다.
긴장과 갈등, 분노와 슬픔 등 온갖 감정들이 난무하는 상황을 축구장에 빗대 놓은 작가의 탁월한 구성이 이 책을 단숨에 읽게 만들었다. 그러나 ‘폴리아모리’(비독점적 다자연애)는 여전히 낯선 단어일 뿐이다.

 


저자 : 존 키건(역자 정병선)
출판사 : 지호
정가 : 18,000원

두 달 전이었을 거다. 인터넷으로 한꺼번에 책을 구입했다. 그 중에 하나였고, 책에 대한 평이 괜찮아서 구입했는데, 중간중간 들쳐보니 어느 부대가 어쨌느니, 진형이 어쨌느니, 병사들의 상태가 어쨌느니 하는 이야기라 재미없다 싶어서 뒤로 미뤄두다가 요즘에야 차근차근 읽고 있다.

우선은 의외로 재밌다. 아니, 흥미롭다고 이야기해야 할 것 같다. 군대를 다녀온 사람이 아니더라도, 한순간 전투(혹은 싸움)의 극도의 흥분상태를 경험해 본 이들에게 가장 공식적이고 파괴적인 폭력인 전쟁의 전투가 어떤 모습이며, 그것을 움직이는 역동적인 힘이 어디에 나오고, 그리고 각각의 병사들이 전투의 순간에 경험하는 것이 무엇이며, 그것이 전투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 이처럼 객관적이고 간결하고 자세히 묘사할 수 있다는 데서 놀라울 뿐이다. (이 책의 저자는 전쟁이나 전투에 한번도 참여해 본 적이 없다고 한다. 그래서 더욱 놀랍다.)

저자의 기록은 종전의 전투기록이 영웅적 리더십과 상투적 이미지, 그리고 승자 중심의 기록(선별적 기록) 등으로 전쟁(전투)의 본래 모습을 많이 가리고 있다고 보고 있다. 고대의 전투기록을 서사적으로 묘사한 여러 작품들을 통해서도 이러한 사실은 잘 드러난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가 대표적인 경우다.

[병사들은 두려움 때문에 싸운다. 첫째는 전투 거부의 결과(처벌)에 대한 두려움이고, 둘째는 잘 싸우지 못한 결과(살육)에 대한 두려움이다.]

전쟁은 무서운 폭력이다. 그것은 살육에 대한 두려움을 극한으로 몰고 가며, 광기에 어린 흥분으로 문명을 지우는 행위이고, 인간성의 최저점으로 치달아가는 야만이다. 세상 어디에서도 이런 폭력이 더 이상 문명(혹은 인권)의 이름으로 치장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간증(干證)  1. 자신의 종교적 체험을 고백함으로써 하나님의 존재를 증언하는 일. 
               2. 예전에, 남의 범죄에 관련된 증인

 

타라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타라가 떠난 뒤에도 여전히 자신들의 과거를 간증하러 다녔다. 타라의 가족에게 일어났던 사건은 아버지에게는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그 사건은 책임져야 할 누군가의 무지에서 비롯된 비참한 사고였을 뿐이다. 타라는 이 책 <배움의 발견(원제 Educated)>에서 그 무지에 대해 고발하고 있다. 

 

아버지는 정부가 강제로 우리를 학교에 가도록 만들지 않을까 걱정하지만, 그럴 일은 없었다. 왜냐하면 정부는 우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부모님의 일곱 자녀 중 네 명은 출생증명서가 없다. 가정 분만으로 태어나서, 한 번도 의사나 간호사에게 가본 적이 없기 때문에 의료 기록도 전혀 없다.”

 

타라에게 아버지는 곧 하나님이었고, 아버지의 명령은 곧 하나님의 명령이었다. 아버지의 명령에 따라 학교에 가지 않았고, 지저분하고 위험한 폐철 처리장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으며, 아버지의 일을 돕기 위해 단 하루 만에 크레인의 조종간을 잡아야 했고 위험한 고철더미에 올라갔다가 큰 부상을 입기도 했음에도 병원 치료 대신 엄마가 만든 오일과 약초로 치료를 받아야 했다. 

주체적 자아로 성장할 수 없었던 막내딸 타라에게 선택권은 없었다. 모든 결정은 아버지가 내렸고, 그 다음의 권력은 오빠들이었다. 어머니는 순종했다. 나아가 딸들을 지키지 않았고, 아버지의 권력에 동조하였으며 오빠의 폭력을 은폐하면서 타라를 속였다. 아버지의 병력을 물려받은 오빠는 자신의 분노를 극단적인 폭력으로 쏟아냈다. 오빠의 무자비한 폭력에 시달렸던 타라는 그 사실을 부모에게 이야기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부모님은 오빠가 달라졌으며, 하나님에게 회계를 했다며 타라에게 용서를 강요했다. 하지만 오빠는 달라지지 않았다. 오빠의 폭력은 타라가 떠난 이후 그의 아내에게로 이어졌고 이를 알아챈 타라가 부모에게 다시 재차 경고했지만, 아버지와 어머니는 오히려 타라가 오해한 것이며, 심지어 그것은 거짓된 환각이고 악마의 유혹에 굴복한 것이라고 비난했다. 다른 가족들은 타라의 말을 믿지 않았고, 그녀를 악마의 꾐에 넘어가 정부가 주는 돈을 받고 공교육을 받으며 타락한 여자라며 비난했다. 

 

“이제 ‘창녀’라는 단어는 행동보다 본질에 관한 묘사가 됐다. 내가 잘못된 행동을 해서가 아니라 내 존재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뜻이었다.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뭔가 불순한 요소가 들어 있었다.”

 

어쩌면 타라는 그냥 순종적인 딸이 되었을 수도 있다. 오빠의 폭력을 받아내는 건 이제 그의 아내 몫이 되었으니 더이상 폭력에 시달릴 일도 없었을 거다. 아버지의 말을 듣고 아버지가 내린다는 ‘축복’을 받았다면, 가족과의 인연을 이어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어머니의 사업이 번창하였기 때문에 보다 풍요로운 삶의 공간도 확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어머니를 따라 산파가 되었을 것이고 산약초를 이용한 오일을 만들어 팔면서 살다가 어느 평범한 몰몬교 청년을 만나 결혼해 조용히 삶을 마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타라는 그러지 않았다.

 

“나는 잘못 알고 있던 사실을 바로잡히는 일이 어떤 느낌인지 안다. 잘못 알고 있던 규모가 너무도 커서 그것을 바로잡으면 세상 전체가 변할 정도였다. 이제 역사를 이해하는 길로 통하는 문을 지키는 위대한 문지기들이 어떻게 자신들의 무지와 편견을 해결했는지를 알아야만 했다.”

 

OMR카드의 사용법도 모르던 16살 소녀가 혼자 독학을 시작했다. 17살에 대학수학능력 시험을 통과하고 난생처음으로 학교(브리검 영 대학교)라는 곳에 들어간 뒤의 그녀는 너무나도 다른 두 개의 세상에서 혼란을 겪었다. 하나는 몰몬교의 정신을 가진 아버지 밑에서 자란 아이다호의 산골 아이의 모습이고, 다른 하나는 역사와 철학을 탐구하며 세상의 지식을 탐하는 대학생의 모습이다. 산골 아이는 단순히 남자아이 앞에서 살짝 웃었다는 이유로 ‘창녀’라는 욕을 들으며 오빠에 의해 머리가 변기 속에 처박혔던 소녀였다. 하지만 대학생이 되면서 ‘홀로코스트’에 대해 알아가고, ‘페미니스트’의 뜻을 탐구하면서 홀로 서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과정은 순탄치 못했다. 그 과정은 피부를 온통 벗겨내는 것처럼 아픈 과정이었다. 그 누구보다 아버지를 부정하고 그 아버지의 막내딸로 살아온 자신의 이전 삶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일이었다. 가족 모두가 그녀를 비난하고 그녀를 집단적으로 따돌려 버렸다. 타라는 자신이 가족을 오해한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에 시달리다가 심각한 우울증에 시달리기까지 했다. 

타라는 결국 멈추지 않고 계속 나아갔다. 그리고 독립적이며 존엄한 인간으로 다시 태어났다. 이 책이 ‘배움의 발견(원제: Educated)’인 것은 그녀가 배움을 통해 자신의 삶을 아이다호의 산골에서 전 세계로 확장할 수 있었으며, 그 과정에서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무지와 폭력을 이겨낼 수 있었음을 드러내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삶의 주인은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너무나도 자명한 사실을 받아들이기까지 무척 힘들고 어려운 과정을 담아낸 이야기인 것이다. 누구의 말대로 이 이야기가 소설이 아니라 실제했던 내용이라는 점에서 믿어지지 않을 만큼 가슴이 먹먹해 온다. 

이 책이 배움에 대해 생각해 보는 모든 이들에게 한줄기 찬란한 빛이 되어 줄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배움은 세계와 나를 잇는 과정이며, 세계 속에 묻힌 ‘나’가 아닌 ‘나’ 안에서 세계가 이해되는 과정이다. 

 

[누가 역사를 쓰는가?] 나는 [바로 나]라고 생각했다.

 

Photo by Adam Glanzman/Northeastern University

배움의 발견 - 10점
타라 웨스트오버 지음, 김희정 옮김/열린책들

 

책을 다 읽은 분들은 저자 타라 웨스트오버가 2019년 5월 3일 노스이스턴 대학교에서 한 졸업 축사도 읽어보기 바랍니다. 
링크: https://blog.naver.com/openbooks21/221851681287

 

한때 인문학 열풍이 불었다. 인문학이 사회생활에 필수적인 교양으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먹고사니즘과는 하등 관계가 없는데 인문학은 왜 인기를 끌었을까? 

2019년 OECD 자료에 따르면, 한국 성인(25~64세)의 49%가 대학교육을 이수했다. 이는 조사 대상 46개국 중 가장 많은 것이었다. 조사 연령대를 낮추어 25~34세의 성인은 거의 70%에 가까운 대학 교육 이수율을 보인다. (기사 링크

이처럼 높은 교육 수준을 가진 대한민국 사람들에게 ‘인문학’은 그리 어렵지도 않은 학문이다. 우리는 인문학의 주요 학문 분과를 ‘교양’이라고 부르며 대학 시절에 다양한 방법으로 접해 왔다. 이른바 ‘문-사-철’ 즉, ‘문학’ ‘역사’ ‘철학(윤리)’ 등이며, 여기에 ‘정치’ ‘경제’ 등도 엮여 있다. 시작은 아마도 애플의 창업자인 스티브 잡스의 한마디였을 것이다. 자신이 만든 회사 ‘애플’은 인문학과 기술의 융합을 중요시한다는 언급이었다. 시장은 인문학을 상품화했고, 다양한 책과 강연, 모임이 시장에 쏟아져 나왔고 새로운 소비 트렌드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 책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은 그런 흐름에서 대박을 터뜨렸다. 

 

“창의적인 제품을 만드는 비결은 우리가 항상 기술과 인문학의 교차점에 있고자 했기 때문이다.”

 

먹고사는 문제에서 어느 정도 여유가 생긴 사람들이 보다 품위 있는 관계(?), 즉 지적 대화를 위해 인문학을 탐하고 있다. 저자 채사장은 모 방송국 강연(유튜브)에서 인문학 공부 열풍을 비판했다. 인문학이 사회를 바꾸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이 되고 있는 모습을 지적했다. 

‘인문학’을 배우는 이유가 ‘교양’일 수도 있다. 그것은 지적 대화를 위한 폭넓고 상식적인 개념화된 지식을 익힌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보다 큰 의미로서 ‘인문학’은 ‘내가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이며, ‘사회는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이고, ‘나와 사회의 관계’를 찾아가는 여정이다. 

 

이를 위해 채사장은 ‘역사, 정치, 사회, 윤리’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풀었다. 인류가 쌓아온 지식의 그 깊이는 매우 깊을 수 있어서 책 한 권에 자세히 풀어내는 게 가능할까 싶지만, 재미있는 비유와 쉬운 어휘를 사용하는 저자의 능력은 우리를 보다 쉽게 인문학의 도입부에 발을 디딜 수 있게 해 주었다. 여기에 집필 당시의 사회적 문제를 대입하여 나름의 시각에서 해석을 얹었다. 인문학의 응용이다. 잘 쓰는 저자와 탄탄한 기획과 시대적 흐름으로 만들어진 책이다. 여기서는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1>의 내용을 간략히 정리해 보겠다.


먼저 ‘역사’ 편에서는 지금의 자본주의를 설명하기 위한 생산수단의 개념을 설명하고 원시 공산사회에서 고대 노예제 사회, 중세 봉건제 사회, 근대 자본주의까지의 단계별로 생산수단의 변화와 생산관계를 중심으로 살펴본다. 이후 근대 자본주의가 태동한 후 자본주의의 모순에 의해 세계대전이 벌어지기까지의 과정을 설명해 주고 있다. 

다음 ‘정치’ 편에서는 흔히 말하는 ‘보수’와 ‘진보’의 구분하는 기준과 방식이 결국 경제 체제를 무엇으로 할 것인가에 대한 이론적 구분에 따라 결정되는 것임을 설명하며 현실 정치 즉 FTA, 무상급식, 민영화 등에서 경제 체제적 관점에서 보수와 진보를 구분하고 있다. 나아가 민주주의의 문제점과 독재 정치와의 구분, 자유민주주의, 공산주의, 사회 민주주의를 구분하는 기준에 대해 설명하고, 생산수단과 자본을 가진 보수층이 사회의 프로파간다를 조작하거나 장악하면서 정치적으로 보수를 지지할 수 없는 서민, 노동자, 자영업자, 농민 등이 보수를 지지하는 기현상이 발생한다고 설명했다. 

세 번째는 ‘사회’ 편이다. 사회에서는 인간의 기본적 권리와 헌법에서 규정하는 의무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개인과 사회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개인주의와 집단주의의 개념적 차이가 무엇인지, 자연권의 탄생과 발전, 전체주의와 세금의 문제 등을 다루었다. 마지막으로 미디어에 대해서는 ‘미디어는 어떻게 거짓을 말하는가’를 통해 자본의 지배를 받는 미디어의 속성과 그로 인해 보수화될 수밖에 없는 언론의 문제를 지적했다. 

마지막으로 ‘윤리’ 편이다. 우리를 시험에 빠뜨리는 윤리적 상황, 즉 딜레마에 대해 다룬다. 그 상황에서 어떤 판단이 가장 윤리적일까에 대한 논란의 역사를 통해 윤리의 문제를 정리하고 있다. 먼저 윤리적 판단, 의무론과 목적론, 정언명법, 목적론과 공리주의 등 인류가 가진 윤리의 문제를 각각의 관점에서 살펴보고 있다. 나아가 어떤 사회가 윤리적인 사회인지에 대해서는 이 책이 쓰일 당시에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었던 ‘송파구 세 모녀 사건’을 화두로 던졌다. 사회 변화를 위한 과정과 절차, 그리고 최종 목적이 모두 조화로울 수 있을까? 여전히 우리가 가져가야 할 윤리적 화두다.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1 - 8점
채사장 지음/웨일북



 

스티븐 제이 굴드의 『풀하우스』의 주요 내용은 “생명의 역사에서 진보에 대한 오해”이다. 

더이상 과학책에서 나와서는 안되는 그림. 마치 원숭이에서 사람으로 변화되어 온 모습을 진화를 상징하는 것으로 각인시켜서 진화에 대해 잘못된 인식을 심어 준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진화는 단선적인 변화가 아니라 수많은 가지들이 파생되어 온 현재의 모습일 뿐이다. 

1부 ‘플라톤에서 다윈까지 우수성의 확산’에서는 인간 중심적 사고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지금까지 진화론에 대한 잘못된 인식은 인간으로의 진화를 진화의 최종점으로 본다는 것에 있다. 우리 스스로는 인간이 지구의 주인 같고, 심지어 이 지구를 끝장낼 수 있는 무기도 가지고 있으며, 공기도 빛도 전혀 없는 물속 깊은 곳에서부터 아무것도 살지 않을 것 같은 추운 북극점까지 어디에서나 생존이 가능하다는 것 등으로 지구를 대표하는 생물종으로 생각한다. 정말 그럴까? 인간이 지구를 대표하는 생물종에 오를 수 있을까? 굳이 지구를 대표하는 생물종을 뽑는다면 굴드는 박테리아를 꼽을 수 있다고 말한다. 사실 코로나 19로 인해 갈피를 못 잡고 있는 전 지구적 혼란 상황을 보면 결코 바이러스나 박테리아를 무시할 수 없는 일이다. 인간은 지구상에서 가장 '우수한' 생물종이라는 오해. 우리가 가진 그 절대적 신념을 조용히 깨뜨리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과학의 역사에서 일어났던 모든 혁신들은 종류는 다르지만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절대적 확신이라는 인간의 오만을 차례로 뒤엎어 나간 것이다. – 프로이트

 

인간은 복잡성을 띤 생물종이다. 복잡성을 가졌다고 해서 우수하다고 할 수 있을까? 복잡할수록 갑작스런 환경 변화에 취약해질 수밖에 없다. 박테리아는 지구 상에서 가장 많은 종을 가지고 있고, 아주 단순한 구조를 가진 생물종이다. 수많은 지구 생물종이 멸종을 했지만 박테리아는 여전히 가장 많은 개체수를 가지고 온 지구에 퍼져 있다.

2부 ‘죽음과 말 - 변이의 중요성에 대하여’에서 저자는 우리가 보는 흔적이 모든 것을 밝혀주지 못하는 한계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말이 진화된 흔적을 보면 우리가 흔하게 이야기하는 직선적 변화와는 거리가 멀다. 말의 진화는 ‘진화 계통수’로 보았을 때는 풍부한 변화로 점철되어 있다. 점차적 단순적 변화로 보기 어려운 지점이 있다. 저자는 말의 진화를 통해 진화는 모든 종의 변화의 모습을 총체적으로 보는 것이 중요하며 단선적인 변화로 진화를 이해하는 것은 잘못임을 이야기하고 있다. 즉 현재의 일시적 지배력을 종의 우월성이나 영원한 생존 가능성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3부 ‘4할 타자의 딜레마’는 이 책의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챕터이다. 스티븐 제이 굴드는 야구에서 4할 타자가 사라진 현실을 수십 년의 야구 기록을 통계화하고 수치화하고 그래프로 만들어 이유를 설명했다. 결국 야구가 발전함에 따라 4할이라는 견고한 벽은 더욱 견고해졌고, 야구의 신이 만들어 놓은 2할 6푼의 중심점에 선수들이 더욱 집결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고, 지금의 규칙이 그대로 적용되어 계속 간다면 그 중심점이 오른쪽 벽(4할대)에 더 가거나 왼쪽으로 움직이는 변화는 있겠지만, 거의 변화하지 않을 거라 보았다. 

 

 

“최고의 선수들이 오랫동안 같은 규칙으로 경기할 때 그 시스템의 수준은 향상되며, 그것의 향상과 함께 변이 정도는 차츰 줄어들고 전체적으로 평준화된다. (중략) 이는 안정된 규칙 아래에서 승리라는 포상을 놓고 경쟁하는 개체들로 이루어진 시스템 전체의 일반적인 성질이다.”

제한된 조건과 규칙이 분명한 시스템에서는 이런 평준화가 일어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시스템이 안정화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야구 역사 초반에 다양한 변화들이 폭발적으로 일어나고 퍼펙트게임, 4할 타자가 등장할 수 있었던 배경이다. 마찬가지로 지구 역시 생명체의 등장이라는 시점에서는 다양한 변이들이 폭발적으로 일어났다. 그 와중에 지구 환경과 생태가 안정화되고 지구라는 제한된 조건과 자연이 정한 규칙이 안정화되면서 생명의 평준화가 이루어지고 있다. 어떻게 원숭이가 인간이 될 수 있으며 왜 지금은 그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느냐는 우문에 대한 굴드의 재치 있는 현답인 셈이다. 

4부 ‘생명의 역사는 진보가 아니다’는 결국 인간의 종 변화가 최종 목적지가 아니며, 인간의 탄생 역시 예견된 결과가 아니며 우연의 산물임을 말한다. 지구 역사가 다시 45억 년의 생을 다시 굴러간다고 해도 지금의 모습과 같은 인간이 지구 상에 존재할지는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인류가 뛰어난 종의 DNA를 내세워 우주까지 진출한다 할지라도, 설사 우주 밖의 새로운 생명체를 만난다 할지라도 인류가 진화의 결과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 굴드의 주장이다. 

이 책은 ‘진화’라는 단어를 발견한 이후 쌓아온 오해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우주를 통틀어 우리가 가장 진화한(?) 생명체라고 믿거나 우리보다 진화한(?) 생명체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진화를 단선적이고 결과론적으로 보는 시각이다. 인류는 생명체가 다양한 변이를 겪는 과정에서 나타난 우연의 산물임을 알고 우리 스스로 생명에 대한 존중과 겸양을 갖추어야 하며, 독선적인 자기애나 우월감에 빠지는 우를 범해서는 안될 것이다. 

풀하우스 - 10점
스티븐 J. 굴드 지음, 이명희 옮김/사이언스북스

 

타인의 해석 - 6점
말콤 글래드웰 지음, 유강은 옮김, 김경일 감수/김영사
  • 조지 플로이드라는 흑인 청년이 경찰의 강압적인 폭력에 의해 숨졌다. 그를 숨지게 한 경찰 데릭 쇼빈은 살해 혐의로 체포되었으며, 함께 있던 경찰 3명도 해고되었다. 조지 플로이드의 죽음 이후 미국 사회에 대한 인종차별에 분노하는 시위가 미국 각지에서 벌어지고 있다. 이 시위에는 흑인만이 아닌 다양한 인종들이 참가하고 있고, 일부 경찰들도 시위에 대해 지지 의사를 밝히기까지 했다. 
  • 그렇다면 이것은 인종차별 사건으로 분류될까? 그럴 수도 있다. 시위를 하는 사람들은 미국 사회의 인종 차별 문제를 사건의 원인으로 꼽고 있다. 하지만 사건은 그렇게 쉽게 단정지을 수 없는 여러가지 겹겹의 복선들이 있기 마련이다. 그를 제압하던 데릭 쇼빈과 경찰들은 무엇이 두려웠기에 그토록 강압적인 행동으로 그를 죽음으로 몰아 넣었을까?
  • 우리는 모르는 사람을 만났을 때, 다양한 시그널을 받아 상대방을 파악한다. 상대방을 파악할 때의 우리는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경험과 지식을 총동원한다. 그렇게 동원된 정보를 바탕으로 상대방의 외모와 행동, 말투와 표정으로 첫인상을 결정한다. 일단 그렇게 접수된 첫인상으로 상대방을 파악했다고 생각되면 쉽게 그를 이해했다고 생각한다. 첫인상을 가지는 것까지는 모든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일반적인 습성이다. 하지만 상대방을 이해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섣부른 과신이다. 우리가 낯선 이와 만나 대화할 때 간과하는 부분이 이것이다. 
  • 대부분의 경우 내가 만나는 낯선 이는 그동안 내가 보아온 보통의 사람과 같을 거라 생각한다. 상대가 말하는 것에 대해 의심은 할 수 있지만 근거가 없다면 이내 믿어 버린다. 인간 관계에서 거짓보다 신뢰가 더 많은 이익을 주었다는 것은 인류 역사가 지금까지 이어올 수 있는 근거였다. 이를 ‘진실기본값 이론’이라고도 부른다. 그러나 이를 이용한 거짓은 치명적이다. 대학 풋볼팀의 코치가 소아성애자로 밝혀지는 데는 첫 제보 이후 16년의 시간이 걸렸고, 국방부 고위 직원이 쿠바의 스파이였음이 밝혀졌을 때에도 동료 직원과 상사들은 믿겨지지 않는다고 했다. 그 스파이는 십수년간 정부 조직에서 뛰어난 성과를 보이며 활약했다. 
  • 보석을 신청하는 피의자를 직접 만난 판사가 내린 결정이 기록만 입력된 인공지능이 내린 결정보다 나을까? 그렇지 않다. 결과는 인공 지능의 압승이다. 히틀러를 3번이나 직접 만난 영국 총리 체임벌린은 히틀러가 평화를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동거인이 살해되었는데도 슬퍼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아무 증거도 없이 아만다 녹스를 살해범으로 몬 경찰의 사례도 있다. 단지 그가 슬픈 표정을 짓는 것을 보지 못했다는 게 이유가 될 수 있을까? 표정이나 말투가 그 사람을 나타낸다는 믿음은 오래전부터 내려온 우리의 착각이다. 하지만 타인은 투명하지 않다. 

영국 총리였던 네빌 체임벌린은 히틀러를 3번이나 만나 전쟁은 없을 거라고 말했다. 하지만 히틀러는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고 말았다. 

  • 대중의 인기를 한몸에 받은 시인 실비아 플라스는 오븐에 머리를 집어 넣고 가스를 틀어 자살했다. 일산화탄소 중독이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금문교는 유명한 관광지로 유명하지만 인기있는 자살 장소로서도 악명을 떨쳤다. 실비아 플라스는 지독한 우울증을 앓고 있었고, 그가 쓴 시에서는 죽음에 대한 찬양이 곳곳에 나타나 있으며, 실제로 자살이 성공하기 전까지 몇차례에 걸쳐 자살을 시도한 적이 있었다. 그가 오븐을 이용해 자살에 성공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다른 자살을 생각해 냈을 것이라는 추측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하지만 그가 자살했을 때 오븐을 이용한 일산화탄소 중독사는 영국 도처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도시가스가 천연가스로 바뀌면서 오븐에 머리를 넣어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자살하는 사람의 수는 급감했다. 금문교에도 비슷한 조치가 이루어졌다. 여기에 자살 방지 구조물이 생긴 것이다. 이후 이곳에서 자살하는 사람도 급격히 줄어들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줄어든 사람이 다른 곳에서 자살을 시도하고 성공했을까? 자살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자살의 방법이 어려워질수록 자살률은 떨어지기 마련이다. 특정한 행동은 대개 특정한 장소와 연관되어 있다. 
  • 범죄도 이와 비슷하다. 캔자스시티에서 있었던 강력 범죄 소탕 실험이 이를 증명한다. 미국에서 가장 심각한 강력 범죄율을 가진 캔자스시티에서는 다양한 범죄 소탕 실험을 진행했다. 그중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범죄가 가장 많이 발생했던 특정 구역에서 차량 불시 검문을 수시로 실시한 것이다. 그 결과 불법 무기가 다량 압수되었고, 강력 범죄율이 현격히 감소하는 결과가 나타났다. 
  • 캔자스시티의 성공은 곧바로 미국 경찰서 전역에 전파되었다. 곳곳에서 차량 불시 검문이 이루어졌다. 후미등이 깨졌다는 이유로 차를 세웠고, 깜빡이를 켜지 않았다는 이유로 면허증을 확인하는 일이다. 그 와중에 고속도로를 순찰하던 백인 경찰이 깜빡이를 켜지 않은 젊은 아프리카계 여성을 차에서 강제로 끌어내려 체포했고, 해당 여성은 며칠 후 자살에 이르게 된 사건이 일어났다. 
  • 캔자스시티에서 일어났던 실험이 잘못됐던 것일까? 그렇지 않다. 특정한 장소와 맥락을 구별하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진행된 경찰의 관행이 그 여성의 자살이라는 비극을 낳은 것이다. 캔자스시티의 실험 역시 ‘특정한 장소’로 지역을 한정했다. 가장 범죄가 많이 발생하는 지역에서 차량에 대한 불신 검문을 진행해 얻은 성과였다. 하지만 다른 경찰서들은 그렇게 하지 않고 장소라는 ‘맥락’을 무시한 상태에서 불신 검문만 남발했다. 곳곳에서 충돌이 일어났고, 결국 한 여성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던 것이다. 
  • 조지 플로이드의 비극도 잘못된 장소에서 특정한 행위에 대한 대화가 틀어지면서 벌어진 최악의 결과가 아니었을까? 데릭 쇼빈은 굳이 그를 8~9분여를 누르고 있어야 할 이유가 무엇이었으며, 순순히 따르는 것 같았던 조지 플로이드를 갑자기 제압해야 했던 맥락은 무엇이었을까? 
  • 우리는 낯선 이들을 만나야 한다. 사회는 진실기본값이 지배한다. 다만 타인의 태도와 내면을 일치시켜서는 안된다. 쉽게 첫인상으로 판단해 상대를 믿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표정은 얼마든지 꾸밀 수 있으며, 태도는 거짓이 쉽다. 상대를 만나는 상황과 조건을 잘 이해하고 해당 상황에 맞는 맥락의 언어를 구사해야 한다. 

 

 

나에게 <해리포터 시리즈>의 충격적인 대반전은 세베루스 스네이프 교수가 자신이 사랑한 릴리 포터의 아들을 지키기 위해 볼드모트의 부하로 위장해 활동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다. 스네이프 교수의 숭고한 사랑과 헌신적인 희생을 접하면서 스네이프 교수를 미워했던 해리뿐만 아니라 독자들도 심적 충격이 만만치 않았다. <두 도시 이야기>에 대한 글을 쓰면서 왜 해리포터를 이야기를 하는 것일까? 두 책을 모두 본 사람이라면 앞에서 스네이프 교수를 이야기했을 때 <두 도시 이야기> 속의 시드니 칼튼을 생각해 냈을 것이다. 시드니 칼튼도 스네이프 교수처럼 이룰 수 없었던 사랑이지만 사랑했던 사람의 행복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인물이다. 

 

릴리의 죽음에 오열하는 스네이프

 

사람들은 정말 그런 사랑이 있을까에 대해 회의적일 거다. 판타지 이야기 혹은 아이들 동화 속에나 등장할법한 비현실적인 이야기라고 말한다. 대부분은 살면서 그런 사랑을 접해볼 수 없다. 하지만 스네이프의 사랑도, 시드니 칼튼의 사랑도 이야기의 끝에서 그 모습을 드러냈다. 아무도 예상치 못한 곳에서 그들은 사랑을 이어갔고, 이루어냈다. 극악한 볼드모트가 세상의 종말을 만들려는 상황을 막아냈고, 왕과 왕비를 비롯해 모든 귀족들이 단두대에 처형되는 과정에서 대신 사랑하는 이의 소중한 사람을 지켜냈다. 그래서 나는 <해리포터 시리즈>도 읽지 않고, <두 도시 이야기>도 본 적이 없는 사람에 대해 깊은 연민이 몰려온다.

 

<두 도시 이야기> 표지

 

<두 도시 이야기>는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기까지의 암울하면서도 역동적인 파리 빈민들의 모습을 매우 사실적으로 그려냈고, 혁명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인간 군상의 모습도 실감나게 묘사했다. 피에 굶주린 혁명의 종말적 상황에서도 사랑하는 사람을 구하기 위해 치밀하게 계획하고 실행하여 마침내 자신을 희생하는 시드니 칼튼의 모습은 죽은 연인의 아들을 위해 헌신하는 스네이프 교수의 모습처럼 숭고하다.

 

최고의 시대이자 최악의 시대요, 지혜의 시절이자 어리석음의 시절이었으며, 믿음의 세월이자 회의의 세월이요, 빛의 계절이자 어둠의 계절이었고, 희망의 봄이자 절망의 겨울이었다. 우리 앞에는 모든 것이 있으면서 아무것도 없었고, 우리는 모두 곧장 천국을 향해 가고 있으면서 곧장 지옥으로 가고 있었다. 요컨대 그 시대가 현재와 어찌나 닮아 있었던지, 당시의 가장 말 많은 일부 권위자들조차 선과 악, 즉 극단적인 대조만이 허락되는 세상이라고 주장할 정도였다.
- <두 도시 이야기> 첫 문장

 

<두 도시 이야기>의 첫문장은 양 극단이 부딪히는 파국의 시대의 모습을 담았다. 모순과 모순이 부딪히면서 파국을 만들어내고 질서를 만들기 위해 무질서가 용인되는 혁명의 시대였다. 지구 중력이 무색할 정도로 위와 아래가 섞이고 부딪히고 깨지고 흩어졌다.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이며, 어느 것이 선이고 어느 것이 악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던 시대였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던진 시드니 칼튼의 희생은 판도라 상자 속 희망과도 같다. 

‘두 도시’는 각각 런던과 파리라는 소설의 배경을 말하지만 이야기가 품고 있는 사건에서 파악할 수 있는 핵심은 파리라는 도시 안에 있는 두 계급의 갈등이다. 귀족과 왕정이 만든 세상의 반대편에는 굶주림과 핍박에 시달리는 빈민들이 있었다. 귀족들은 빈민의 가난과 굶주림을 외면하고, 그들이 가진 모든 것을 착취했다. 이미 결혼한 여인마저 빼앗기 위해 병든 남편을 혹사시켜 죽이고, 누나를 보호하려는 남동생을 살해하고, 자신의 마차에 치여 아이가 죽었는데도, 죽은 아이의 부모를 욕했다. 가난한 사람들은 아이 낳는 것을 두려워하면서 이 고통이 자신의 대에서 끝나야 한다며 울부짖었지만, 바닥에 흘린 포도주를 머릿수건으로 담아 쥐어짜 아이에게 먹여야 했다. 그럴 때 귀족들은 풍족한 파티와 초콜릿마저 하나씩 떠주는 하인을 따로 둘 정도로 호화로운 생활을 영위했다. 이런 상황에서 빈민들의 분노와 슬픔이 하늘에 닿았다.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외젠 들라크루아, 1830년작, 325 × 260 cm , 루브르 박물관

 

 

모순된 시대에는 모순된 행동이 나온다. 하나의 도시에 살고 있는 두 계급의 모순은 함께 살고 있지만 함께 살 수 없음을 드러냈다. 결국 억압에 시달리던 계급이 폭발하면서 바스티유 감옥이 점령되고, 왕과 왕비를 비롯해 수많은 귀족들이 단두대에 희생되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피의 복수극은 엉뚱한 희생자들에게까지 번졌는데, 혁명에 가담했던 마담 드파르지가 자신의 복수를 위해 한때 귀족이었던 찰스 다네이뿐만 아니라 그의 가족 전체(어린 딸 루시까지)를 죽이기 위한 음모를 꾸민다.

찰스 다네이의 사형이 선고된 후 24시간 동안의 사건들은 다네이와 그 가족들을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시드니 칼튼을 중심으로 매우 긴박하게 흘러갔다. 마침내 찰스 다네이를 구하고 단두대 형장으로 나아가는 시드니 칼튼의 옆에는 억울하게 죽음으로 내몰린 재봉사 소녀가 등장한다. 이 재봉사 소녀의 등장으로 시드니 칼튼은 자신의 죽음을 더욱 담담하게 추슬러 형장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재산도 없고 지위도 없는 가난한 재봉사 소녀가 사형을 선고받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이 혁명이 가진 모순을 여과없이 드러내면서 칼튼의 죽음이 얼마나 숭고한지를 더욱 빛내주는 역할을 했다. 또한 소녀와 함께 칼튼의 죽음이 쓸쓸하지 않을 수 있도록 독자들의 마음까지 세심하게 살핀 뛰어난 인물 배치였다.

 

나는 바사드와 클라이, 드파르주, 방장스, 배심원, 판사 같은 옛 체제의 붕괴 속에 생겨난 새로운 압제자들의 기나긴 서열이 이 보복적인 도구의 사용을 멈추지 않는 지금, 오히려 이 보복적 기구로 인해 저들이 사멸되어 가고 있는 모습을 본다. 이 아름다운 도시와 이 구렁텅이 속에서 떨치고 일어선 현명한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앞으로 이들이 진정한 자유를 위해 싸우며 승리와 패배를 맛보는 가운데, 이 시대와 (혁명을 잉태할 수밖에 없었던) 전 시대의 악행은 스스로 속죄하며 소멸하리라
내게는 보인다. 내가 목숨 바쳐 사랑했지만 다시 볼 수 없을 그들이 영국에서 보람 있게 성공을 누리며 행복하고 평화롭게 살아가는 모습이. 그녀가 내 이름을 딴 아이를 품에 안고 있는 모습을. 나이 들고 구부정해졌어도 다른 부분은 완전히 회복되어 자신의 진료실에서 차별 없이 모든 사람에게 헌신하는 그분의 모습이. 십 년이라는 세월 동안 자신이 가진 모든 것으로 그들을 풍요롭게 해준 그들의 오랜 친구인 한 인자한 노신사가 평안하게 세상을 떠나는 모습이.
나는 알고 있다. 내가 그들, 아니 세대를 지나 그 후손들에게도 마음의 성소가 되리라는 것을. 할머니가 된 그녀가 나를 추도하는 이 날, 나를 위해 우는 모습이 보인다. 그녀와 남편이 이승의 행로를 마치고 지상의 마지막 침대에 나란히 누운 모습이 보인다. 그들이 서로를 존경하는 만큼 나를 존경하리라는 것도 알고 있다.
내게는 보인다. 그녀의 품에 안긴, 내 이름을 딴 아이가 한때 나의 길이기도 했던 인생길을 훌륭히 걸어가는 모습이. 그 아이가 그 길을 훌륭히 걸어 내 이름을 빛내주리라는 것도, 그리하여 내 이름에 묻었던 오점이 지워지리라는 사실도 안다. 지극히 공정한 재판관, 명예로운 사람이 된 그 아이가 역시 내 이름을 딴 사내아이, 내가 잘 아는 이마와 금발을 지닌 그 아이를 이리로 데려와-그때가 되면 이 자리는 지금의 끔찍한 흔적도 사라지고 풍광이 아름다운 곳이 될 것이다-다정하고도 감정에 북받친 목소리로 내 이야기를 들려주리라.
내가 지금 하려는 것은 지금까지 해 온 어떤 행동보다도 훨씬 더 숭고한 일이다. 이제 나는 지금까지 내가 알았던 그 어떤 안식보다도 평안한 안식을 향해 갈 것이다.

- <두 도시 이야기>의 마지막 문단들

 

우리 시대는 프랑스 혁명의 세례를 받아 더 자유롭고 평등한 시대를 살고 있다. 하지만 언제 다시 절망과 어둠이 우리 앞에 나타날지 알 수 없다. 죽음이 삶보다 가벼운 시대가 온다면 사랑은 어떤 모습으로 우리를 위로할까? <두 도시 이야기>는 그런 시대를 살아갈 힘과 이유가 될 것이다.

 

 

 

 

 

서점을 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물론 장사라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책이라고는 편집일만 해본 내가 책을 사고파는 일을 잘 할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는다. 하지만, 시골에 북카페를 열어 놓고 가게를 찾는 사람들과 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상상하거나, 조용한 카페에서 홀로 차를 마시며 책을 보는 내 모습을 상상하는 일은 일상의 작은 행복이기도 하다. 

물론 실제 북카페나 서점들은 매우 바쁘다. 가게 운영을 위한 최소한의 수입이 필요하다. 게다가 서점 운영은 잠시도 틈을 주어서는 안되는 입출고 관리가 필수이다. 그리고 카페까지 운영하려면 이에 대한 기본 지식과 노하우도 쌓여 있어야 한다. 이렇게 신경써야 할 게 한두가지가 아니다. 따라서 내 머릿속의 여유로운 상상은 그야말로 망상에 불과할 것이다. 

아무튼 가끔 빠지는 망상을 더해줄만한 책으로 고른 게 "오수도 서점 이야기"라는 책이었다. 알라딘에 소개된 책에 대한 내용 중 한 구절은 다음과 같다. 

  • 벚꽃으로 뒤덮인 산골짜기 마을 사쿠라노마치의 작은 서점 오후도. 도시의 오래된 서점을 그만두고 오후도 서점을 찾아온 청년 잇세이. 책과 서점을 둘러싼 기적에 관한 이야기가 따뜻한 봄바람처럼 감동적으로 펼쳐진다.

결론적으로 이 책은 결코 감동적이지 않으며 너무나도 통속적이라서 허허롭기까지 하다. 게다가 재미도 없었다. 사람마다 취향이 다를 수 있지만 이 책은 요 몇년 사이 내가 본 책 중에 제일 재미없는 책으로 꼽고 싶을 정도다. 이 책에 대한 서평을 남겨야 하나 싶을 정도로 회의가 들긴 하지만, 그래도 시간을 들여 읽었으므로 그나마 좋았던 걸 남긴다. 

글이 원고가 되고, 원고가 책이 된 후의 일들, 여기까지는 내가 하는 일에 속한다. 하지만 책이 출판되어 독자에게까지 전해지기까지의 과정도 책을 만드는 일 못지 않게 디테일하면서도 정교한 관심과 사랑이 필요하다. 책은 그래서 저마다의 운명을 타고 나는 것일지도 모른다. 책이 독자에게 읽히기까지의 과정도 그 책이 가진 중요한 운명 중 하나일 것이다. 이 책은 바로 그 후자의 과정에 대한 내용이다. 

책의 이야기는 전형적인 일본 드라마적인 전개를 답습하고 있었다. 책을 보는 내내 교훈적인(?) 일본의 드라마를 보는 듯한데다가 재미도 없었다. 작중의 사람들의 관계가 너무나 작위적인 느낌에다가 전형적인 인물들의 모습은, 결코 동화되기 어려운, 읽으면 읽을수록 인물과 나 사이의 거리가 느껴지면서 객관화가 되어버리는 것이 곤혹스럽기까지 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북카페를 열어보고 싶다는 내 바람도 어쩌면 공허하기 그지 없다는 생각에 이르고 말았다. 이 책이 나에게 준 최대한의 절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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