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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행성에서 지적 생물이 성숙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생물이 자기의 존재 이유를 처음으로 알아냈을 때이다. 만약 우주의 다른 곳에서 지적으로 뛰어난 생물이 지구를 방문했을 때, 그들이 우리의 문명 수준을 파악하기 위해 맨 처음 던지는 질문은 "당신들은 진화를 발견했는가?"라는 물음일 것이다. - <이기적 유전자> 40쪽

어떤 나라에서 지적 사회가 성숙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사회가 자기의 존재 이유를 처음으로 알아냈을 때이다. 만약 지구의 다른 곳에서 문명이 뛰어난 사회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 그들이 우리의 문명 수준을 파악하기 위해 맨 처음 던지는 질문은 “당신들은 사회의 진화(진보)를 발견했는가?”라는 물음일 것이다.

원문을 쓴 리처드 도킨스에게는 참 미안한 말이지만, 우리 사회의 미개함을 꾸짖고 싶어 그의 글을 차용해 봤다. 이렇게 한 의도에는 작금의 현실의 야만성도 한몫했다. 쉽게 이야기되는 막장 문화는 둘째 치고, 여전히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벌어지는 연쇄살인의 극악함, 거기다가 밑도 끝도 없이 벌어지는 공권력의 무지막지함과 그 저열함에 있다. 우리 사회의 진보는 가능한가? 있기는 한가?

아,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얼마 전에 읽은 책 <이기적 유전자>(리처드 도킨스 저, 을유문화사)를 이야기하려는 의도였다. 그러니 본론으로 충실해 보자.

많은 이들(그러니까 나를 포함해서)이 이 책의 제목만으로 헛된 망상과 철학을 늘어놓았다. 이거 뭐지? 인간은 그러니까 그 근본부터 이기적 존재라는 것인가? 그러니 이 사회는 적자생존의 정글 논리가 지배하는 게 당연하고 약육강식에 따라 질서가 재편되어야 한다는 건가? 강한 놈이 이기는 것이니 재주껏 살아남을 수 있도록 강한 놈에게 빌붙어야 한다는 말인가? 그러고 보니 얼마전 강만수 장관이 돈 많은 사람들이 혜택을 보게 될 종부세 폐지를 밀어붙이고 감세정책을 발표하면서 "인간의 본성을 무시한 정책은 오래 가기 힘들다"라는 말을 했다고 하는데, 그 사람이 생각하는 인간의 본성이 아마 저런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이 책의 핵심은 이렇다.

지구 생명체의 진화는 유전자가 더 많은 복제품을 남기는 쪽으로 진행되었다. 이를 통해 유전자는 불멸의 생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에 따라 인간을 비롯해 모든 생명체는 그 유전자를 후세에 전달하기 위해 마련된 생체기계일 뿐이며, 생체 기계인 생명체는 유전자의 이익, 즉 후세에 유전자의 복제를 충실히 이행하기 위해 프로그램 되어 있다는 것이다. 진화의 기본단위는 유전자이며, 이 유전자를 이해할 때 진화를 이해할 수 있다고 그는 설명한다. 유전자의 자기 복제에 대한 욕구를 ‘이기적’이라는 말로 은유적으로 표현했는데, 나는 그런 엄청난 오해(?)를 하고 말았다. 무식해서 부끄러울 뿐이다. 강만수 당신도 무식한 건 마찬가지다.

생물학적으로 유전자 입장에서 본 이타성은 불가능한 개념이다. 그런 유전자가 있다면 애초에 사라지고 존재할 수 없는 것이 된다. 그러나 이것을 인간의 본성이라고 치환하는 오류를 범할 사람을 위해 리처드 도킨스는 이기적 유전자의 특성에 반하는 밈(Meme) 이론, 즉 문화유전론을 내놓았다.

우리에게는 우리를 낳아 준 이기적 유전자에 반항하거나 더 필요하다면 우리를 교화시킨 이기적 밈에게도 반항할 힘이 있다. 순수하고 사욕이 없는 이타주의라는 것은 자연계에는 안주할 여지가 없고 세계의 전 역사를 통해 과거에 존재한 예도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의식적으로 육성하고 교육하는 방법도 논할 수 있다. 우리는 유전자 기계로서 조립되었지만 밈 기계로서 교화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들의 창조자에게 대항할 힘이 있다. 이 지구에서는 우리 인간만이 유일하게 이기적인 자기 복제자들의 전제에 반항할 수 있는 것이다. - 349쪽

최근 우리 사회는 새로운 문화 유전자를 발견했다. 바로 집단지성이다. 물론 집단 지성은 대중의 의식과 별반 달라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단순한 의식의 반영이라는 대중 의식과 계속해서 발전하는 집단 지성 사이에는 가장 큰 차이가 있다. 바로 소통이다. 막장 드라마라면서도 계속해서 시청률을 상회할 수 있는 것은 소통이 없는 대중 의식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집단 지성은 이미 졸렬한 자극과 허무맹랑한 우연, 성찰이 없는 드라마를 막장으로 규정짓고 비판하고 있다. 소통이 만들어 낸 비판의식이다.

반면 소통을 거부하고 오로지 제 갈 길(?)만 가겠다고 외치며 앞에 거치적거리는 시민들을 무참히 살해하면서 나아가는 저 정부는 그야말로 막장 중의 막장이다. 시민들은 소통의 장에서 지금의 현실을 조목조목 비판하면서 그에 저항하고자 결집하고 있다.
권력과 전제에 대항할 수 있는 힘, 그것은 우리 스스로에게 있음을 <이기적 유전자>는 밝히고 있다.

다시 도킨스의 말을 차용해 와 정리해 보면,

우리에게는 우리가 먹여 살리는 공권력에 반항하거나 더 필요하다면 우리를 지배하려는 권력자에게도 반항할 힘이 있다. 순수하고 사욕이 없는 이타주의라는 것은 이 사회에는 안주할 여지가 없고 세계의 전 역사를 통해 과거에 존재한 예도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의식적으로 육성하고 교육하는 방법도 논할 수 있다. 우리는 시민의 한 사람이라는 형식으로 조립되었지만 국민으로서 교화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들 권력자들에게 대항할 힘이 있다. 이 대한민국에서 깨어있는 시민만이 유일하게 이기적인 권력자의 전제에 반항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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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대해

물론 <이기적 유전자>라는 책은 참 좋은 책이다. 하지만 이 책을 읽는데 참으로 오랜 시간이 걸렸다.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을 먼저 읽었던 나로서는 왜 이렇게 읽기가 더딘지, 이해가 안 가는 문장은 왜 이리 많은지 나의 무식을 탓해야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을유문화사에서 나온 책의 번역이 엉망이란다.

그러니 되도록 이 전에 나온 동아출판사 <이기적인 유전자>를 볼 것을 추천한다(물론 절판이다, 헌책방 뒤져야 한다). 나도 이 책 팔고 그 책을 찾아서 다시 볼까 생각중이다. 네이버에서 ‘이기적 유전자 번역’만 쳐도 관련 이야기는 쏟아져 나올 것이니 참고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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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멸 - 8점
토마스 베른하르트 지음, 류은희.조현천 옮김/현암사



친애하는 토마스 베른하르트 씨에게

 

얼마전에 당신의 소설 <소멸>을 보았다. 정말 대단한 작품이다. 당신의 소설 <소멸>의 이야기 줄거리는 이러했다. 주인공 ‘나(프란츠 요셉 무라우)’는 여동생 결혼식을 다녀온 다음다음날(그러니까 이틀 후) 뜻밖에 가족(부모님과 형)의 교통사고 사망 소식을 접한다. 그리고 장례식에 참석한 후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았지만 모두 종교단체에 기부하고 생을 마감한다. 당신 소설의 이야기는 이게 전부다. 내 글만 보면 어떤 이는 스토리가 빈약하다고 할 수 있겠다. 사실 그런 오해도 살만하다.

 

이렇게 단순한 이야기가 장장 500쪽에 걸쳐 서술되고 있다. 그것도 단 두 문장으로 말이다. 1부 '전보'가 가족의 사망 소식을 접하고 사진을 보면서 가족에 대해 사유하는 장면이고, 2부 '유언'은 고향에 돌아가 장례식을 치루는 일련의 과정에서 떠오르는 사유들의 집합이다. 단 두 문단으로 서술되어 있는 이야기, 게다가 줄거리가 단순한 만큼 나머지는 당신의 온갖 사유들로 넘쳐나고 있었다. 난생 처음 접해보는 새로운 문체와 서술에 크게 놀랐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루하지 않았다. 당신 가족과 조국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온갖 비난과 모욕이 넘쳐났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주인공 ‘나’의 냉소다. 곧 소설가 당신의 냉소이기도 하다. 이렇듯 지독한 냉소는 힘이 될 수 있을까?

 

세기의 전환기에 이르면 사유하는 것으로, 사유하는 것을 통해 존재해 온 사람들이 자살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결론이며, 사유하는 인간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충고는 단 한 가지, 이 세기가 끝나기 전에 자살하라는 것입니다. 〈p.495〉

 

세상에 자살을 조언하다니, 어떻게 태어난 삶인데 사유하는 인간은 자살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올 수 있는가. 이런 지독한 냉소의 배경에는 자위적인 오만이 담겨 있음을 보았다. 당신은 오만함을 통해 자신을 경멸했다. 그리고 이것을 무기로 세상을 경멸하고, 물질 중심으로 흐르는 세상에 저항했으며, 끝내 세상에 잡아먹히지 않으면서 멋지게(?) 한방 날렸다. 그런 점에서 당신을 존경할 수 있을 법하다. 게다가 죽어서 남긴 실제 유언을 들으니 더욱 놀랍다.

 

“내가 쓴 것은 모두 저작권법의 유효기간 동안 오스트리아 국경 내에서 공연되고 인쇄되거나 낭독되는 것을 금한다.”

 

작가가 자신이 쓴 창작품이 자신의 나라에서 출판, 공연, 인쇄 되는 것을 금하다니, 이것은 국가에 대한 증오일까, 역설적인 사랑일까? 아무튼 미친 짓이다. 그만큼 이 세상을 향한 당신의 굳은 의지이자 절박한 메시지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국가의 권위와 폭력에 의해 셰어마이어와 같은 사람이 피해를 입고 아무 보상도 없이 여생을 살아가고, 나치와 협력해 수많은 사람을 살해하는 데 협력하거나 개입했던 이들에게 공로훈장을 떠안기며 터무니없는 연금을 송금하는 국가는 오스트리아에만 있는 게 아니다. 부끄럽지만 오늘날 한국 사회를 본다면 당신은 까무러칠 것이다. 아마도 환생이란 것이 있어 당신 같은 대작가가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우리나라는 가급적 피해서 태어나길 바랄 뿐이다. 아니, 제발 한국에 태어나 당신의 그 글로 멋진 한방을 대한민국에 날려주기를 기대하고 싶다.

 

21세기의 대한민국을 지도하는 이들은 물질에 사로잡혀 정신적 가치를 전혀 고려치 않는 사람들이 지배하고 있다. 모든 잣대와 기준을 경제적 가치에 두고 경쟁만이 최고의 선이라는 이데올로기를 전파하며 심지어 꼬맹이 아이들마저 경쟁 체제로 내몰고 있다. 이 권력은 국가의 권력에 도전하고 권위에 상처를 주는 글을 썼다는 것만으로 인신을 구속하고 있다. 물론 그런 지도자를 선택한 것은 대한민국 사람들이다. 부끄럽지만 물질에 현혹되어, 747이니 주가 3000이니 하는 말에 넘어간 사람이 내 이웃이고, 나 역시 그런 선택을 수수방관했음을 자백한다. 그러니 이 민주적 절차에 의해 선출된 권력을 욕하는 건 스스로의 얼굴에 침을 뱉어야 하는 일이다. 이럴 때이니 냉소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냉소 이전에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고 있다. 도대체 이런 세상에 저항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당신에게 묻고 싶다.



소멸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토마스 베른하르트 (현암사,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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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바퀴로 가는 과학자전거 - 10점
강양구 지음/뿌리와이파리




지난여름이었다. 냉장고가 고장 났다. 전원은 들어가는데, 냉장고 기능을 전혀 하지 못했다. 일부 오래된 음식은 이미 썩어갔다. 냉장고 음식들 중에서 중요한 음식들은 김치 냉장고로 옮겼다. 음식들을 옮기면서 느낀 것은 냉장고에 쌓아 둔 식재료들이 정말 많았다는 것이다. 집안에서 그렇게 음식을 많이 해 먹지 않는데, 이 많은 식재료들은 왜 여기 쌓여 있는 것일까. 정작 제대로 챙겨 먹지 않아 일부는 냉동실에서도 썩어가고 있었는데 말이다.

우리 회사 냉장고도 마찬가지다. 도시락을 드시는 분들의 반찬도 있고, 야식용으로 먹다가 남은 음식들도 냉장고로 들어간다. 냉장고는 미어터질 것 같고, 이상한 냄새도 난다. 매번 자기 음식을 정리하자고 하지만, 정작 넣어둔 사람들도 잊어버려서 매번 대대적인 정리를 해 음식을 버려야 한다. 냉장고가 작아서 그런다는 사람도 있지만, 커진다고 이런 일이 없어질까?

냉장고만 그럴까? 아니다. 전 세계의 식량운용을 보면 더 아이러니하다. 전 세계에서 생산되는 식량은 전 세계인이 골고루 나누어 먹고도 남는 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쪽은 영양과잉으로 인한 질병에 시달리고, 지구 한편은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이 속출하고 있다. 식량 생산을 위한 과학기술이 발달한 지금, 우리는 왜 이런 세상의 고통을 목격해야 할까?

이제는 집집마다 있다는 자동차 이야기를 해볼까? 요즘 나오는 자동차 중에는 최고 300km까지 달릴 수 있는 엔진을 장착했다고 하지만, 출퇴근 도심의 자동차 평균 속도는 15km 내외라고 한다. 옛 문헌에 따르면 자동차가 등장하기 전 마차의 속력이 시속 17km였다고 하니 우리는 지금 마차를 타는 것보다 느리게 도시를 달리고 있다. 또 나는 자전거로 출근할 때 회사까지 약 16km의 거리를 한 시간 안에 간다. 자동차와 비슷한 셈이다. 그래도 자동차인데, 도심이 아니라면 더 멀리 더 빨리 갈 수 있는 자동차가 좋은 게 아니냐고 한다면 다음 이야기를 해 보겠다.

서울에서는 한 여름이면 창문을 열어놓기 어렵다. 창문을 닫고 에어컨과 공기청정기를 켜야 한다. 시골 바람과 서울 바람의 차이가 여기서 드러난다. 시골 바람은 논두렁을 내달려와 대나무 숲을 지나 대청마루로 올라오지만, 도시 바람은 공장 굴뚝의 연기를 품고, 자동차 배기가스를 지나, 열로 한참 달궈진 아스팔트와 시멘트 건물을 타고 올라온다. 여름이라지만 창문을 꽁꽁 닫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대기오염이 가져온 결과다. 최근의 대기오염의 주범이 자동차인 만큼 자동차가 좋을 이유가 없다.

이처럼 과학기술의 발달은 우리 삶에 다양한 불편을 주고 있다. 편리만을 추구하다 빚어진 모순이다. 더군다나 잘못 사용된 과학기술은 차별과 전쟁, 파괴에 활용된다. 그러기 때문에 과학기술은 단순한 편리를 넘어 인권과 평화, 환경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도 들어오면서 과학기술은 중요한 사회적 가치를 저버리고 자본의 이익에만 종사하는 일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황우석 사태에서 보이듯이 돈이 된다면 기꺼이 거짓과 왜곡을 벌이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은 과학기술가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이 된다고 하니 그것을 묵인해야 한다는 대중의 의식에 우리의 과학기술은 위태롭게 서 있다.

프레시안
의 강양구 기자는 오랫동안 돈에 지배되고 있는 과학기술의 위험성을 지적해 왔고, 이에 대비하기 위해 시민사회가 참여하는 과학을 이야기해 왔다. 황우석 사태에 대해서도 모두가 그를 떠받들 때부터 조용히 그 위험성과 편향성을 지적해 온 실력 있는 기자다(그가 <녹색평론> 2005년 1-2월 호에 보낸 '과학기술의 덫에 갇힌 언론'을 볼 것을 추천한다). 그가 쓴 <세 바퀴로 가는 과학 자전거>는 주로 과학기술자를 꿈꾸는 10대 청소년을 대상으로 쓰였지만 과학기술에 관심 있는 초심자들도 부담 없이 볼 수 있는 좋은 책이다.


세 바퀴로 가는 과학자전거 상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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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휴머니즘가난한 휴머니즘 - 8점
장 베르트랑 아리스티드 지음, 이두부 옮김/이후

다행히, 난 가난하지 않다. 그렇다고 부유하고 넉넉하게 살아가는 건 아니다. 출판사에서 일하는 삼십대 중반의 미혼 남성의 삶이란 게 거기서 거기다. 아침마다 부대끼는 대중교통에서 졸면서 출근하고, 점심시간마다 오늘은 얼마짜리 밥을 먹나 고민하고, 휴일도 반납하며 철야도 마다하지 않고 회사에 매달려 살아간다. 누구나 그렇지 않나?

열심히 산다면서 항상 불안하다. 노숙자나 거지를 보면 애써 피하는 이유는 미래의 내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지금 삶과 노동에 대해 불만이 가득하면서도 참고 사는 것은 그런 가난이 가져올 ‘충격과 공포’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 가난하지 않은 것에 안심하고 있다. 우리 의식은 노숙자나 거지를 피하듯이, 그렇게 가난을 외면하고 있다. 거기에 존엄한 가난, 가난한 휴머니즘은 없다. 그 이면에는 가난에 대한 지독한 냉소와 두려움과 멸시가 담겨 있다. 공선옥 소설가는 이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오늘날 가난은 무능력하고 낡은 것, 더러운 것, 혐오스러운 것, 그리하여 일종의 페스트 같고 에이즈 같은 것이다. 암과는 달리 그것들은 점염에 대한 공포를 야기하는 질병이다. 오늘날 가난은 바로 그처럼 전염에 대한 공포를 야기하는 몹쓸 질병과 같은 것으로 취급된다.”

그래서 장 베르트랑 아리스티드는 ‘존엄한 가난’을 이야기한다. 그는 아이티의 가난한 빈민가 사람들을 위해 싸워온 신부다. 끊임없는 내란과 독재에 시달리며 가난과 굶주림에 지친 아이티에서 네 번이나 대통령에 당선됐지만, 네 번 모두 군사 쿠데타에 의해 물러나야 했다. 그의 총 집권 기간은 불과 5년 8개월에 불과하지만 이 기간 동안 그는 군대를 해산하고, 국영기업의 조건 없는 민영화를 거부했는가 하면, 공공분야에 대한 투자와 지원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해, 교육과 보건의 사회적 질을 높였고, 최저임금의 인상을 이끌어 냈다. 이 책은 아리스티드가 세계인에게 보내는 편지다. 여기에는 그의 아이티 민중에 대한 사랑과 존경이 담겨 있고, 특히 어린이와 여성에 대한 무한한 관심과 배려가 나타나 있다. 또 부의 추구보다 인간다움을 추구하는 길에 대한 사유와 성찰 속에서 아이티가 나아갈 제3의 길을 제시하고 있다.

전 세계가 경제 불황에 시달리고 있다. 이 충격과 공포를 어찌해야 하나. 왜 우리는 아이티 같은 나라보다 잘 산다고 자부하면서도 이런 불안과 두려움을 지속적으로 겪어야 하나. 이 책에 그 해답은 없다. 하지만 두려움과 공포에 떨고 있는 우리 자신의 마음의 가난을 돌아볼 수 있게 할 것이다.
http://eowls.net2008-10-23T04:37:260.3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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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더듬다 - 8점
제이슨 로버츠 지음, 황의방 옮김/까치글방


산행 중에 만난 사람 중에 머릿속에서 또렷이 남아 있는 두 사람이 있다. 지난 여름 벽소령에서 만난 시각장애인과 비장애인이다. 지리산 능선길이 잘 가꾸어진 건 사실이지만, 시각장애를 가진 이가 산행을 한다는 건 보통의 평지를 걷는 것과는 달리 몇십 배는 어려울 수밖에 없지 않나 싶었다. 사실 이건 내 과장일 수도 있는데, 당시 그들의 말을 들어보면 2시간이 걸리는 거리를 4시간 만에 왔으니, 딱 두 배의 시간이 들었을 뿐이다. 시각장애인은 스스로 지리산을 가고 싶다는 마음을 먹었고, 그의 친구가 기꺼이 동행이 되어 길을 나섰다. 보지 못하는 그에게 산은 어떻게 느껴졌을까.

모든 이에게는 인간으로서의 가질 수 있는 욕구가 있다. 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열정이 많은 인간일수록 그 욕구는 더욱 강렬하다. 이 욕구는 온갖 난관과 고통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도전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며 열정은 그것을 성공으로 이끄는 기폭제가 된다. 19세기 증기기관도 발명되기 전 시대를 살던 영국인 제임스 홀먼은 신분상승을 위해 군에 들어갔다가 얻은 중병으로 그만 시력을 잃고 만다. 시각장애인이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은 구걸밖에 없던 그 시절에 그는 피나는 노력 끝에 해군기사단의 자리에 들어갈 수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세계일주의 꿈을 꾸었다.

말과 마차, 그리고 도보만으로 육지를 돌아다녔고 범선에 의지해 대륙을 오가며, 말라리아가 모기로부터 생긴 병이라는 것도 모르는 시절에 아프리카를 누비고 다녔고, 식인종들을 만나 그들의 풍습을 유럽에 전하기도 했다. 그가 다녔던 거리는 최소한 40만km에 이르고 그가 접한 문화권만 해도 역시 적게 추산해서 200여개에 이른다. 마르코 폴로의 여행이 2만3천km였으니 제임스 홀먼의 여행이 얼마나 길고 오랜 여행이었는지 상상하고도 남을 것이다. 그는 보지 못하는 대신 사람들의 말에 귀기울였고, 만져보고, 냄새를 맡았다. 현지에서 사람들의 도움과 호의를 받았지만, 대부분의 여행은 혼자 출발했고, 혼자 돌아오는 여행이었다.

따라서 그의 여행은 느린 여행이었다. 시각은 한꺼번에 대상을 받아들이고 그 정보를 분석하지만 촉각은 천천히 받아들이고 그 정보를 자꾸 되새기며 파악하는 일이다. 우리의 삶의 속도를 생각하면 제임스 홀먼처럼 느리게 여행하는 일을 견뎌낼 수 있는 사람은 앞으로도 나오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세상은 점점 바뀌고 있다. 거리를 정복하고 얼마나 멀리 얼마나 많은 곳을 다녀왔냐가 자랑인 여행에서 이제는 감각으로 넘치는 여행, 무엇을 느끼고, 어떻게 이해하느냐가 중요한 여행의 시대가 다시 오고 있는 것이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사람, 차마고도의 옛길을 이용해 티벳으로 가는 사람, 자전거를 타고 세계를 여행하는 사람들이 나오고 있다.

이 책은 그렇다고 해서 마냥 재미있지만은 않다. 400쪽이 넘는 분량에서는 다루고 있는 양도 방대하다. 제임스 홀먼의 일대기를 다루면서도 한편으로 당시의 시대상이나 풍습들도 상당히 면밀하게 다루고 있어서 사람에 따라서는 지루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제임스 홀먼의 호기심을 따라 살펴본다면 그다지 지루하지 않을 것이다.

나아가 장애에 대한 편견을 떨어 버릴 수 있다.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시각장애인은 눈으로만 보지 못하는 것일 뿐이다. 우리가 대상을 이해하는 방법은 단지 시각만 있는 것이 아니다. 제임스 홀먼이 보여준 용기와 모험은 이를 잘 나타냈다. 실제로 제임스 홀먼의 경우 아무리 처음 가는 방이라도 불과 몇분동안만 거닐어 보면 생활하는 데에 아무 지장이 없을 정도로 공간 파악능력이 뛰어났다고 한다. 게다가 높은 곳이나 어두운 곳에서는 오히려 비장애인들 보다 훨씬 뛰어난 활동을 보여주었다. 그에게 고소공포증이 있을 리가 없고, 어둠은 낮과 다를 게 없기 때문이다. 책의 첫부분, 활화산이었던 베이비오 화산을 올라가는 제임스 홀먼의 모습은 그가 정말 시각장애인이 맞을까 하는 의심이 들게 할 정도다.

문득 내 자전거 여행이 생각난다. 도시와 도시, 마을과 마을을 자전거로 달리는 그 중간중간에 스쳤던 가슴 뛰는 풍경들. 그것은 내 여행의 찬란한 아름다움으로 남아 있다. 하늘을 가득 덮었던 낙엽들, 벼 베기가 끝난 들녘에서 한가로이 이삭을 쪼고 있는 시골닭들의 풍경, 동네 어귀부터 나를 따라오며 짖어대던 강아지들, 길을 달리며 만나는 풍경들이 한가롭기만 했다. 명승지를 탐방하고 뛰어난 풍경이 있는 곳을 찾아다니는 여행과는 달리 바람을 벗하고 구름과 동행하는 여행의 기억은 여전히 내 삶에 강렬한 모티프가 되고 있다.

제임스 홀먼의 세계여행기를 다룬 <세계를 더듬다>는 그런 면에서 우리 안의 여행 본능을 일깨운다. 현지의 문화와 사람들에게 더욱 가깝게 다가서는 느린 여행의 멋과 맛을 알려주는 진정한 여행기의 진수를 우리에게 선물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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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우야, 여우야, 뭐하니?

- 밥먹는다.

- 무슨 반찬

- 개구리 반찬

- 살았니? 죽었니?



아마도 누구나 기억하는 전래놀이의 노랫말이다. 여기서 개구리가 살았는지 죽었는지에 따라 놀이는 긴박하게 전개된다. 아무튼 삶과 죽음은 이 놀이에서는 중요한 전환점이다. 인간은 아주 오래전부터 살아있는 음식을 먹지 않는다. 죽은 고기를 먹고 있다.(물론 가끔 '산낙지'도 먹어주고 있다) 불이라는 문명의 매체를 이용해 안전하게(?) 섭취하고 있다. 하지만 주변에서는 육식을 거부하고 채식을 하자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환경운동을 하는 후배는 채식주의자다. 유감스럽게도 그 후배와 술한잔도 못해봐서 채식주의자의 생활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다. 하지만 채식주의자가 살아가야할 이 세상은 보통의 사람보다 몇배는 힘들 것이다. 최소한 집밖에서 돈주고  먹는 음식 중에서 완전 채식을 찾기는 그야말로 하늘의 별따기이니 말이다.


작가 한강의 연작소설집 <채식주의자>를 읽게 된 것은 아무래도 지금의 쇠고기 정국도 한몫했다고 볼 수 있다. 다 읽고 나서 판단한 거지만, 난 한강이라는 소설가를 몰라도 너무 몰랐다. 채식주의와는 실상 그다지 관계가 깊지 않기 때문이다.

이 책에는 상처받은 영혼과 그 영혼에게서 식물적 상상력의 감화를 받지만 세속된 욕망을 추구햇던 예술가, 그리고 식물이 되어 죽음을 기다리는 동생을 바라보는 언니의 이야기이다. 상처와 욕망과 죽음, 세개의 이야기를 이처럼 잘 버무려 내기도 쉽지는 않을 것이다. 너무 과도한 상상을 끌어오지 않았나 싶으면서도 이야기들은 그 안에서 날실과 씨실이 촘촘히 연결되어 있다. 세개의 이야기는 연결되어 있지만 또한 각각의 독립적인 이야기로 잘 안착하고 있다. 하지만 식물적 상상력이 욕망과 어우러지는 두번째 작품 '몽고반점'은 이야기의 전개가 너무 극적이라서 이해하기가 매우 힘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 이야기의 탄탄한 구성과 깔끔한 문체는 막힘없는 독서를 가능케 했다. 이 책은 '채식주의'에 대한 호기심으로 책을 펼쳐들지 않기를 바란다. 잘 스여진 연작 소설, 풍부한 상상력을 이끌어 낼 수 있는 소설로서 충분히 만족할만한 느낌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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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자들은 생활에 지쳐 여행을 떠나지만, 그것이 며칠짜리 레저가 아니라면, 결국 여행이란 삶을 등지고 죽음의 냄새를 맡으러 가는 머나먼 길이다.
- <여행생활자> 유성용 | 갤리온 | 2007.6.1.


책 표지는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여행기’라고 버젓이 내보이고 있다. 쿨(cool)한 것도 지겨워 핫(hot)해 버린 세상에 ‘쓸쓸’이라는 못난 두글자를 내놓은 책이다. 도대체 이 작자는 어떤 여행을 했기에 이런 말을 표제에 내걸었을까.

제목도 생소하기 그지없다. <여행생활자>라니, 낯선 신조어 앞에서 고개만 갸웃거렸다. 책의 마지막 마침표를 핥고 나니 그 쓰디쓴 단어의 맛에 괜히 침울해진다. 여행이 생활이 된 자는 길위에서 죽음을 예고한다. 그것은 외롭고 구차한 삶이다. 생활을 잃어버리고 정처없이 떠돌다가 구천의 어느 하늘 아래에 조용히 숨을 거두어야 하는 삶은 슬프다. 그러니 쓸쓸한가.


여행생활자, 그 낯설고 우울하고 생소함


책의 시작은 여행의 시작처럼 설레임으로 시작된다. 여행자의 발걸음은, 리장의 축제에 어우러진 남녀의 춤처럼 가볍다. 아무도 두려워할 것도 없이 ‘무위(無爲)의 여정을 극진히 제 속에 새기’고 나아가는 일 뿐이 없다. 천장공로, 그러니까 중국의 시천에서 티베트로 이어지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에서는 눈 때문에 발이 묶여 끔찍하게 추운 밤을 지새워야 했다.

티베트에서는 일생동안 지은 죄의 업보를 씻겠다고 수미산 주위를 한바퀴 돌다가 중간에 쓰러지기도 했다. 이 산을 평생동안 여든두번째 돌고 있다는 칠순의 노인네도 만나고, 3개월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돌고 있다는 중년의 사내도 만나고, 오체투지로 산을 돌고 있는 여인네도 만났다. 이들은 이생에, 아니 전생에 무슨 업보가 그리 많아 이리도 많이 산을 돌고 있는 것일까. 여행자의 머릿속은 그저 ‘여행은 언젠가 끝이 날 것’이라는 생각만 맴돌았다고 한다.





인도에서는 이틀동안 버스를 타고 카슈미르 지역을 지나가야 했다. 군사적 긴장이 팽배하고 테러조직 알카에다의 그림자가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곳이다. 그의 여행은 이처럼 무모하기 그지없다. 그것이 세상의 끝이라 하더라도 길이 있다면 가야하는 여행생활자의 운명이기도 하다. 그래도 그 너머에서는 말도 통하지 않는 재봉사와 여러날 동안 깊은 교감을 나누었다. 교감은 이해를 바탕으로 이루어지며 이해는 말로만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지독히 가난한 나라, 불교의 나라, 스리랑카에서는 기원을 배운다. 수백명의 경건한 얼굴들에서 기원의 방법을 배운다. 기원은 자주 되뇌고, 암송하고, 잊지 않으면, 기원이 또한 나를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이다. 여행자는 여기서 무엇을 기원할까. 그 기원은 여행자를 기억해 줄까. 잊지 않을까.


여행, 그것은 제 밖으로 드러나는 길들을 오롯이 걷는 일


네팔에서는 ‘나마스테’, 만나는 이들을 위해 경배하였고, 묵티나르에 올라서 더 이상 길이 없는 길을 만나고야 만다. 나가르코트에서는 반군 게릴라 청년과 만나 지난 여름 불타올랐던 그의 열정, 지금은 차갑게 얼어붙고 있는 열정을 나에게 비춰본다.

인도에서 파키스탄으로 넘어가는 길목에서는 이라크에서 김선일 씨가 납치 피살됐다는 소식을 듣는다. 파키스탄이 어떤 나라던가. 알카에다의 은둔지로 점찍힌 곳이며 그에 못지 않은 보수적인 무슬림들의 분위기가 팽배한 나라 아닌가. 파키스탄에서도 금지된 곳, 아프가니스탄 접경지역까지 일부러 찾아가 거기서 살고 있는 아프가니스탄인들을 만나 삶의 팍팍한 일상을 엿본다. 죽어나가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는 난민촌까지 몰래 찾아들어가는 그 배포는 어디에 있었을까.




그리고 1년 반에 걸친 그의 여행은 끝났다. 그에게 여행은 무엇이었을까. 어쩌면 우리는 지금 생활이라는 삶이라는 여행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낯설고 무섭고 두려울 뿐이니까 말이다. 여행은 곧 ‘나’를 찾아가는 과정이고, ‘생활’을 찾는 과정이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온전히 ‘나’를 잊어야 하며 ‘생활’을 잊어야 한다. ‘알아도 모른척하며 온전히 제 밖에 드러나는 길들을 오롯이 걷는 일이 여행의 근간’이라고 여행자는 말한다.


여행생활자
카테고리 여행/기행
지은이 유성용 (갤리온,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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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블로그의 기업적인 활용을 강조하는 책입니다. 새로운 마켓팅 기법으로 블로그를 적극 활용해야 한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블로그와 기업 마켓팅은 어디에서 접점을 찾고 있을까 한번 볼까요.

먼저 고객과의 직접적인 만남입니다. 블로그는 그 특성상 일대일의 온라인 만남을 쉽게 합니다. 악의 화신 또는 기계(보그)로 불려왔던 마이크로소프트(MS)가 블로그를 하는 직원들의 활약으로 인간의 얼굴을 한 기업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MS직원들과 대중들이 부딪히고 만나는 블로그에서 새로운 기업이미지가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죠. 언론이나 광고를 통해 만난 MS의 또다른 모습에 대중은 관심을 보였으며, 그것이 과거의 MS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새로운 MS의 이미지로 바꾸고 있습니다.

많은 기업들이 언론과의 접촉을 시도하고 인터뷰를 하지만 언론에 제대로 노출되는 것은 쉽지 않죠. 또, 언론은 특성상 기업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편집하며, 심지어는 왜곡하기도 합니다. 이런 면에서 기업블로그는 고객과의 직접적인 소통이 가능한 독자적인 미디어입니다. GM의 밥 러츠는 블로깅을 하는 포천 10대 기업의 중역입니다. 그는 “블로그는 중요하고도 걸러지지 않은 목소리입니다. 이제 우리는 커뮤니케이션의 다이렉트 라인을 가진 거죠.”라고 말했습니다.

블로그는 작은 기업들에도 유리합니다. 영국의 재단사 마혼은 무너져 가던 그의 사업을 블로그로 일으켜 세웠습니다. 그는 자신의 블로그를 열고 자기가 어떻게 옷을 만들고 있으며 어떤 과정을 거쳐 고급 양장이 만들어지는지 소개하는 글을 계속해서 올렸습니다. 점차 그의 블로그가 사람들에게 알려졌고, 현재 그는 뉴욕에서 들어온 주문을 맞추기 위해 바삐 움직이고 있습니다.

블로그는 입소문 마케팅입니다. 온라인으로 유통되는 입소문의 진원지이자 전파자는 대부분 블로거죠. 블로그를 통해 뜨거나 찍히는 것은 이제 흔한 일입니다. 입소문에 매우 민감한 영화업계는 영화가 개봉되기 전부터 홈페이지와 함께 블로그도 개설합니다. 블로거들의 입소문을 유도하기 위해서죠. 물론 이는 때로 독이 되기도 합니다.

유럽의 어느 작은 식당은 블로그를 통해 자신을 소개하고 그곳을 찾는 손님들의 이야기를 올리면서 유명해졌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많은 블로거들이 이 지역을 찾으면 반드시 들리는 명소가 됐죠.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식당이나 숙소들이 블로거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식당가 기행 테마로 유명한 블로거-파찌아빠의 맛집순례의 글에는 게시물이 올라올 때마다 많은 이들이 댓글을 통해 자신의 경험을 덧댑니다. 식당주인이 모르는 사이에 무시무시한 총평이 만들어지는 것이죠.

책의 관점은 일관되게 블로그를 통한 마케팅의 변화를 이야기합니다. 그동안의 마케팅이 매스미디어를 통해 대중을 향한 일방적이고 주입식이었던 데에 반해 블로그 마케팅은 소규모로 이어지는 쌍방향 마케팅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블로그 마케팅은 이제 막 시작단계이며 그 가능성은 풍부하게 열려 있습니다. 누가 먼저 블로그의 특성을 이해하고 이곳을 먼저 선점하느냐는 비즈니스 마케팅의 중요한 포인트가 됐습니다. 블룸버그 마케팅의 설립자인 토비 블룸버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블로깅을 통합 마케팅 계획의 일환으로 두지 않는 기업들은 중요한 기회들을 놓칠 것이고, 경쟁사들이 블로그를 도입하면서 불리한 위치에 놓일 겁니다. 블로그는 조직이 고객에 가까이 가게 하고 고객들이 브랜드에 가까이 가게 하기 하기 때문에 무시할 수 없는 강력한 도구에요. 결론은 목표 오디언스가 블로그를 원하면 블로그를 하는 게 낫다는 거죠.”

미니홈피 1000만명 시대랍니다. 길가는 사람 4명 중 1명은 블로그나 미니홈피를 하고 있습니다. 지금의 이런 트렌드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웹 2.0 시대라고 한다. ‘참여, 나눔을 통해 보다 나은 삶을 실현한다’는 철학이 블로그 마케팅에 담겨 있습니다. 블로그는 이 기본철학에서 시작해 ‘참여와 공유’, ‘집단 지능’, ‘사용자 중심 철학’이 발현되는 공간입니다.

외국에서는 기업블로그의 사례가 많이 나오고 있지만 아직 국내에 제대로 된 기업 블로그는 없습니다. 풍요속의 빈곤이지만, 어쩌면 더 많은 가능성을 내포한 열린 시장일 수도 있습니다. 블로그, 조금만 관심을 가져 보시면 무한한 보물창고가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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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경제/경영
지은이 로버트 스코블 (체온365, 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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