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되는 법(유유, 이옥란)

돌이켜보면 10대에서 20대 초반까지 책을 많이 읽었습니다. 20대 후반부터 책을 좀 덜 읽다가 마흔이 넘어가면서 책을 다시 좀 읽기 시작했죠. 책을 만든다는 저도 그렇게 책을 안, 아니 못 읽었습니다. 세상은 책 읽기 보다 재미있고, 해야 하고, 하고 싶은 일이 많습니다. 책 보다 세상에서 배우는 게 많다고 느껴질 때 책은 그다지 쓸모 없는 도구가 되고 맙니다. 그러다가 좀 겸손해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책을 좀 봅니다. 

이런 사람도 편집자 일을 합니다. 주변 편집자들을 봐도 책 읽는 편집자가 많지 않아 보입니다. 책에 대해 이야기하고, 무슨 책을 읽고 있는지 물어보면 어버버 하거나 말을 돌리거나 예전에 읽은 책 이름을 말합니다. 그만큼 책을 안 읽는 세태죠. 그런데도 편집자가 되고 싶은 사람이 많습니다. 책을 만든다는 일의 가치는 여전히 숭고하게 다가옵니다. 이미 시장에서 가지는 책의 가치는 저평가되고 있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편집자 되는 법"(유유)의 저자(이옥란)는 이런 시장 상황을 다양한 통계자료를 통해 한마디로 정의했습니다. 

"근속 연수 3년, 실무 정년 마흔"

저자는 냉혹한 출판 현실을 최신의 데이터로 설명합니다. 그러면서도 편집자로서 살아온 자신의 경험적 가치를 이야기해주고 있죠. 어차피 이 책을 사서 보는 사람들은 편집일을 하는 현실적 고통과 마주하고 있을테니 말입니다. 실무적인 조언부터 친근하게 다가오는 편집 업무의 에피소드까지, 초보 편집자라면, 편집 업무에 마음을 두는 이라면 읽어볼 만하다고 전 생각합니다. 

이제 저는 그가 말한 실무 정년 마흔을 넘겼습니다. 교과서 편집의 업무 특성 때문인지 기획자가 아닌 교과 편집 실무자로 여전히 활동하고 있습니다. 어느 정도 책이 나오기 위한 합리적 절차나 형식, 방법 등에 대해서는 감각적으로 따라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시장에서 성공할 수 있는 교과서를 만드는 일에는 확신을 갖지 못하고 있습니다(아마도 모든 편집자가 대부분 그러하겠지요). 성실, 인내, 끈기+체력만 믿고 책을 만드는 일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알면서도 막상 책에 대한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가면 누구보다 야근과 철야에 시달리면서 일하고는 합니다. 그래서 전 아직도 책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편집자, 편집 관련 책을 들여다보곤 합니다. 세상이 변해도 편집자들은 비슷해 보입니다. 생각도 고민도... 그래서 이 책이 마흔을 넘긴 저같은 편집자에게도 위안으로 다가옵니다. 

 

 

 

"나이 먹으면 취향이 변하는 게 맞나 봐. 난 원래 운동하는 거 질색했는데."
우리 팀 부동의 주전 풀백이 무심코 던진 이 말에 모두들 앞다투어 공감을 표했다. 이건 취향의 변화 정도가 아니라 유전자 변이 아니냐는 근본 없는 병리적 의심까지 제기됐다. 체육 시간이면 양호실 갈 궁리나 했었다는 사람들이 가만있어도 땀이 줄줄 흐르는 8월의 뙤약볕 아래로 스스로 기어 나와 이러저리 뛰어다니며 공을 차고 있으니 그럴 만도 했다.
-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 프롤로그 중에서


복잡한 대중교통 안에서 낑겨서 가다보면 이북리더기도 들기가 어려울 때가 많다. 그럴 때는 종종 소리로 듣는다. 주로 가벼운 소설이나 에세이가 좋다. 이북리더기에 내재된 기계음(제법 사람 목소리가 나온다)도 익숙해졌다. 그런데 마침 좋은 오디오북이 나왔다.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인데, 많은 분들이 추천해 주셨던 책인데, 아직 초반인데 재밌다. 목소리 고운 여성 성우가 읽어주는데 듣기가 좋다.

체육 교과서 편찬일을 하다보면 여학생을 위한 내용을 배려해야 한다. 체육 교과만큼 여학생 장애인 등이 참여하기 어려운 교과는 없다. 내용만이 아니라 삽화나 사진 등 이미지에서도 이들을 고려하는 편집이 필요하다. 특이 여학생 체육에 대한 사회적 관심은 매우 높다. 주요 신문사와 방송에서도 여학생 체육을 특별 기획으로 다루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학교 체육에서 여학생이 차지하는 위치는 약간 소외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의식 있는 체육 교사들도 여학생을 체육에 참여시키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찾고 있지만 쉽지 않은 게 현실이다. 그나마 여학생들이 표현활동(춤과 관련한 내용)이나 동작 도전에 많은 관심을 가지는 경우가 많아서 그와 관련한 시간을 많이 할애해 주는 게 일반적인 모습이다. 많은 여학생들이 체육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경쟁 활동(축구, 농구, 배드민턴, 탁구, 야구 등등)과 도전 활동(기록, 투기 스포츠 등)에서는 관심을 끊어버리는 경우가 많다.

최근 나이키 광고를 보면 꾸미지 않고 도전하는 여자들의 스포츠 모습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스포츠에 대한 여성들의 관심이 높아지는 틈새를 파고드는 전략이다. 그러면서 젠더 의식을 부각하고 차별적 성문화에 반기를 드는 듯한 이미지를 제품에 심어줌으로써 제품을 사용하는 이들에게 문화적 우월감을 갖게 만들어 주고 있다.


그만큼 여성의 스포츠 참여는 이제 이 시대의 중요한 문화적 흐름이 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 면에서 이 책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는 우리의 현실을 되돌아보게 하고, 우리가 갖고 있는 의식의 장벽과 그것을 뛰어넘기 위한 도전들이 이 사회에서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를 아주 잘 보여주고 있다.

미투 운동과 함께 불붙은 여성 운동이 비분강개형 투쟁으로 나아가는 것도 어느정도 필요하지만, 여성들의 우아하고 호쾌한 축구 모임을 살펴보면서 그들과 더 가까워질 수 있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도 좋겠다.









13계단 - 10점
다카노 가즈아키 지음/황금가지





남을 죽이면 사형이 된다는 것 정도는 초등학생들도 알고 있잖나.  ···· 중요한 건 그 부분이야. 죄의 내용과 그에 대한 벌은 사전에 모든 사람에게 알려진 상태야. 그런데 사형당하는 놈들이란, 잡히면 사형이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굳이 저지른 일행들이야. 이해가 되나. 이 뜻이? 그러니까 놈들은 누군가를 죽인 단계에서 스스로를 사형대로 몰아넣는 거야. 잡히고 울고 불고 해 봤자, 이미 늦어.

  • 난고가 준이치에게 하는 말



세상에는 여전히 나쁜 놈들이 많다. 그들은 사람들 틈에서, 혹은 깊숙한 골방에 숨어서 누군가의 빈틈을 찾기 위해 냄새를 맡고 다닌다. 게 중에는 다른 이의 생명을 빼앗아 자신의 즐거움을 충족하려는, 인간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는 죄를 저지르는 사람도 있다.


대표적인 연쇄 살인마 유영철은 2003년 9월부터 2004년 7월까지 단 10개월만에 20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그가 주로 살해한 사람은 노인이거나 출장 마사지 여성이었다. 마포의 한 오피스텔에서 출장을 오는 여성 마사지사를 상대로 성폭행을 한 후 하나님을 믿느냐고 묻고 그 대답에 따라 살해하거나 살려주는 등 괴기스럽기까지 한 행동을 보이기까지 했다. 대법원은 2009년 6월 9일 그에게 사형을 확정 판결하였다.


연쇄 살인마와 함께 용서받을 수 없는 극악한 범죄는 어린이에 대한 범죄이다. 2007년 성탄절, 예수의 축복과는 거리가 먼 사건이 일어났다. 경기도 안양시에 사는 초등학교 4학년 이혜진 양과 초등학교 2학년 우예슬 양이 동시에 납치되어 살해된 것이다. 범인은 당시 38세 정성현이었다. 그는 두 어린이를 납치, 성폭행 후 살해하였고, 시신을 훼손하여 땅에 묻거나 강에 버렸다. 대법원은 2009년 2월 26일 사형 판결을 확정했다.



죽어 마땅한 일이다. 극악한 범죄를 저질렀으면서도 버젓이 살아서 맨정신으로 밥을 먹고 똥을 싸고 있다고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치가 떨린다. 그들이 같은 하늘 아래에서 우리 가족과 같은 공기를 마시고 산다고 생각하니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그들은 사형 판결을 받았지만 여전히 감옥에서 생을 이어가고 있다.



만약 자기 자식이 살해당하기라도 한다면, 그리고 범인이 눈앞에 있었다면 난고는 상대에게 똑같이 갚아 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사적인 보복을 인정하면 사회는 완전한 무질서 상태가 된다. 국가라는 제삼자가 형벌권을 발동시켜 대신 해 줘야 한다. 인간의 마음에 복수심이 있고, 그 복수심이 이 세상을 떠난 타인에 대한 애정이며, 그리고 법이라는 것이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한 사형을 포함한 응보형 사상은 용인되지 않을까.



국가가 형벌권을 가지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또 임의적으로 행해지던 형벌에서 명문화된 법률에 의한 형벌을 내리게 된 것 역시 인류 전체 역사를 본다면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이른바 ‘문명 국가’에서 범죄 피의자에 대해 사적으로 고문하거나 처벌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사적 보복이 초래할 상황, 복수가 복수를 낳는 악순환의 고리를 경험해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국가가 범죄의 유무를 가리고, 범죄자를 격리하고 처벌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국가는 범죄를 막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사전에 예방하기 위해서도 노력해야 하지만, 사후에 피해를 복구하고, 피의자를 처벌하는 일에서도 세심한 신경을 써야 한다. 하나의 범죄가 발생했을 때, 국가는 세 가지 역할을 이행해야 한다. 첫째 범죄 피의자를 찾아내서 범죄 유무 및 처벌의 수준을 가리는 일이다. 보통 사법의 영역이다. 둘째, 피해자에 대한 피해 복구 및 지원이다. 이는 주로 행정의 영역이다. 마지막으로 범죄자를 사회로부터 격리하고 처벌을 하는 것이다. 역시 행정의 영역이며, 특별히 이를 교도 행정이라고 한다. 이 세가지 국가의 역할이 사적 보복을 막고, 또다른 범죄 가능성을 예방하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런데, 또 하나의 새로운 변수가 등장했다. 그것은 언론이다.


보도의 자유랍시고 폼잡고 다니는 사람들이 범인과 마찬가지로 저희를 습격했어요. 물론 의료비는 본인 부담이었죠. 머리를 다친 범인은 국가가 치료비를 대 주고 수술도 받았는데. 흉악범죄의 피해자가 되는 순간, 사회 전체가 가해자로 돌변합니다. 그리고 아무리 피해자를 괴롭힌들 사죄하는 사람도 없고, 책임지는 사람도 없어요. 결국 유족 입장에서는 모든 잘못을 범인에게 돌릴 수밖에 없어요.
- 범죄자에게 부모가 무참히 살해된 요시에의 말


유영철을 비롯해 최근까지 흉악하고 무자비한 범죄는 여전히 언론의 주요 관심사다. 언론을 통해 전달된 사건은 인터넷을 통해 더 확대 재생산되며 언론에 드러나지 않았던 자세한 내용까지 낱낱이 드러낼 때도 있다. 사람들은 이를 통해 피해자의 공포, 분노, 슬픔을 공감하는 바도 있겠지만, 그건 그때뿐이다. 오히려 언론들의 무차별적인 언론 보도와 취재활동이 오히려 피해자들을 괴롭히는 경우가 더 많다. 그러다보니 범죄 보도들이 피해자를 보호한다기 보다 많은 사람들의 복수심만 자극하게 된다.


범죄를 막기 위해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 여기에 국가의 형벌권과 관련한 두 가지 논쟁이 오랫동안 있었다. 더 무거운 형벌을 통해 범죄를 예방하자는 주장과 반대로 무거운 형벌이 오히려 범죄를 더욱 극악하게 만들고 예방 효과도 나타나지 않으므로 교화에 더 집중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실제 입법의 과정에서는 여러 특별법들이 만들어지면서 중형을 요구하고 있지만 재판의 과정에서는 선처의 기회를 주기 위해 가벼운 형벌이 내려지는 경우가 많다. 응보와 교화가 교묘하게 뒤섞이는 과정이다.


주인공 ‘난고’의 말대로 사형을 저지를만한 놈들이 따로 있을 수 있다. 하지만 형벌제도 자체는 인간이 만든 불안전한 제도의 하나일 수밖에 없다. 빈틈이 있고 허술한 구석이 나타나기 마련이며 그 틈으로 벌레들은 빠져나간다. 아무리 사회가 촘촘하게 구성되어 있어도 인간이 만든 제도의 불안정함과 인간의 영악함은 공존하기 마련이다.


그러한 일련의 관찰에서 난고가 얻은 결론은 사형수가 죄를 참회했다 해도, 이는 사형 판결을 받았기에 일어나는 결과라는 것이었다. 즉 응보형 사상이 지지하는 사형 판결에 의해 목적형 사상의 목표인 회오의 정(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뉘우침)을 유인해 냈다는 공교로운 현상 말이다.

그리고 지금 160번의 종교적 지도에 관한 내용을 접하며 난고는 또 하나의 얄궂은 감개를 느꼈다. 종교 지도에서 보이는 태도는 사형 확정수의 심적 안정을 측정하는 기준이며, 이는 형 집행시기의 결정 요인이 된다. 종교 지도자의 가르침에 따라 마음의 안식을 얻은 자일수록 빨리 처형당하고 마는 것이다.

  • 난고의 회상



인간 사회의 불안정함과 영악한 인간들의 비열한 시도들이 우리의 사법 제도를 흔들고 있다. 사형제는 그 논란의 핵심이다. 소설 “13계단”에서는 사형의 집행 과정에서 평범한 교도관들이 실행해야 하는 사형 집행에 관한 일을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그 행위가 그들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해 난고와 같은 교도관을 통해 전달해 주었다. 사형제라는 것은 살아 있는 한 사람의 목숨을 의도적으로 앗아가는 행위이다. 즉 엄밀히 말해 ‘살인’인 것이다.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절대로 행할 수 없는 일을 교도관들은 국가의 명령에 따라 행해야 한다. 주인공 ‘난고’ 역시 교도관 시절 2명의 사형 집행 과정에 직접 참여하면서, 그 후유증으로 가정이 위기로 내몰리고 말았다. 사형제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실질적인 사회 이익이 분명하지 않은 가운데, 사형을 집행하는 과정에서 누군가는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어야 한다.


영화 <집행자>의 한 장면


지금도 세계 어딘가에서는 돌을 던져서 죽이는 투석형, 사람의 목을 베는 참수형이 존재한다. 얼마전 북한에서는 총살형을 집행했다고 한다. 우리는 투석, 참수에 대한 말을 들으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라는 생각을 할 것이다. 북한의 총살형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주위에서 그런 반응은 어렵지 않았다. 물론 북한 정권에 대한 반감이 더 커서 그런 것도 이유지만, 사형을 집행하는 과정에서 누군가는 사람을 죽이는 일에 참여해야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여전히 살아 있는 사형수 유영철과 정성현의 사형을 집행한다고 하면, 그것이 참수이든, 투석이든, 총살이든, 교수형이든간에, 거기에는 어느 누군가가 직접 사람을 죽여야 하는 것이다.


1996년 헌법재판소는 사형제도의 위헌 심판 소송을 기각했다. 필요하다는 판결이다. 하지만 재판관 2명이 소수 의견으로 위헌 의견을 냈다. 재판관 김진우는 “사형제도는 나아가 양심에 반하여 법규정에 의하여 사형을 언도해야 하는 법관은 물론, 또 그 양심에 반하여 직무상 어쩔 수 없이 사형의 집행에 관여하는 자들의 양심의 자유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침해하는 비인간적인 형벌제도”라고 밝혔다. 결국 인간 같지도 않은 인간을 처벌하기 위해 우리는 선량한 인간(교도관은 성실하게 공부하고 깨끗하게 살아온 사람만이 될 수 있다)을 희생시켜야 하는 것일까.  


"너나 나나 종신형이다."

편지를 다 읽고 난 난고는 중얼거렸다.

"가석방은 없다."


다시 악의 평범성을 생각해 본다. 유영철을 인간이 아니라고 단정짓는 것은 아주 쉽게 우리 사회의 치부의 한쪽을 가리려는 것에 불과하다. 살인마 역시 그렇게 태어나는 게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는 분명 죽어 마땅한 짓을 했다. 우리는 사형제를 통해 그를 이 사회에서 사라지게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행한 일들과 우리 사회가 안아야 했던 상처들이 쉽게 지워질까. 정의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불의(사형제)의 모순을 우리는 언제까지 떠안아야 할까. 과연 그것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실익은 얼마나 될까. 소설 “13계단”의 난고가 가져야 했던 평생의 고통을 우리는 언제까지 외면할 수 있을까.



아이의 상상력, 수다, 꿈...

"아빠, 그 얘기 알아? 내 친구 수연이는 저번에 바람 많이 불고 비오던 날 우산 쓰고 점프를 했더니 공중으로 3초간 떠 있었데."

우산을 쓰고 집으로 가는 도중 아이가 재잘거리며 말한다. 이것을 시작으로 그 아이 동생도 하늘을 날았다는 이야기가 이어진다. 아이의 상상력을 돋우려고 난 꿈속에서 하늘을 날았던 경험을 이야기한다. 몸을 꿈틀거리면서 거미줄처럼 엉켜있던 전깃줄 사이를 지나 제비처럼 낮게 지면을 수평으로 비행했다가 다시 공중으로 붕 떠서 어느 순간 구름 위를 날았던 순간을 잊을 수가 없었다고 어릴 적 꿈 이야기를 풀어 놓았다. 이제 그런 꿈은 꾸지 않는다. 아니 못하는 게 맞는 말이겠지. 


"아빠 나 나가니까, 바로 전화해야 해, 알았지?"

이제 혼자서도 놀이터나 심부름 정도는 갈 수 있는 나이가 됐지만 여전히 무서움이 많다. 외출하는 데 있어 가장 큰 두려움은 엘리베이터 귀신이다. 엘리베이터 문을 제외한 3면에는 거울이 붙어 있는데, 혼자 있으면 그 거울에서 귀신이 나와서 붙잡을 거라는 게 아이의 믿음이다. 터무니 없는 믿음이라고 아무리 설명해 주고 온갖 이야기를 새로 꾸며 주어도 여전히 공포심이 남아 있어서, 꼭 엘리베이터 안에서 통화를 하고 있어야 한다. 


"아빠, 사춘기는 언제부터 와?"

"글쎄, 사람마다 다르겠지. 그건 왜?"

"응 난 4학년 때부터 오는 거 같아. 자꾸 요즘에 짜증이 많이 나고 그래."

곧 질풍노도의 시기가 오겠지. 짜증 많고 신경질적인 아이가 되면 어쩌나 고민이다. 제발 석판으로 자신을 놀리는 남자 아이를 후려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학폭위에 나가 고개숙이는 일은 피하고 싶다. 빨강머리 앤이 자신을 '홍당무'라고 놀리는 길버트를 석판으로 후려쳤을 때는 아마 사춘기라서 그런 것이 아닐까? 하긴 못생겼다고 대놓고 말하는 린드 부인 앞에서 얼굴이 벌겋지도록 화를 내던 모습도 딱 사춘기의 앤일 것이다. 그래서 궁금했다. "빨강머리 앤"을 원작으로 읽어 볼까?



다시 만난 빨강머리 앤 

2013년에 다시 돌아온 빨강머리 앤 애니메이션


다시 만났다. 얼마만일까? 앤을 만났던 건 일본 애니메이션이었다. 그리고 작년인가 재작년인가 아이를 위해서 빨강머리 앤 극장판 애니메이션을 보여 준 일이 있다. 추억 속에서 자라던 앤이, 그 말많고 실수투성이 앤이 성큼 내 앞에 다가왔다. 최근 서점가에서는 <빨강머리 앤이 하는 말>(백영옥, arte)이 화제가 된 일이 있다. 어릴적 조실부모한 소녀 앤이 프린스 에드워드 섬의 초록 지붕 집 커스버트 남매에게 키워지면서 겪는 과정에서 온갖 실수와 사건들이 얽히는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넘어 큰 위로와 위안을 주었다. 내 또래의 중년에게도 1980년 대에 접했던 <세계 명작 극장> 중 '빨강머리 앤'의 이야기는 큰 재미를 주었던 시리즈 중의 하나였다.[각주:1] 

그래서 다시 꺼내 보았다. 집에 있는 빨강머리 앤은 어린이용 문고판으로 있어서 '더클래식'에서 나온 이북판으로 구입했다. 읽는 내내 즐거웠다. 옆에서 아이가 재잘거리는 걸 실감하며 즐겼다. 실제 내 아이도 수다스럽기는 마찬가지였지만, 그것과는 좀 다른 세계였다. 1900년대 초반 아이의 상상력과 21세기를 달리는 아이의 상상력은 다를 수밖에 없겠고, 어른이 만들어 낸 이야기 속의 앤을 최첨단 도심 속에서 현실을 살아가는 아이와 비교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겠지만, 어린 아이의 감성이야 옛날과 지금이 크게 다르지 않다. 


작가 루시 모드 몽고메리는 캐나다의 작가로 소설의 배경인 프린스 에드워드 섬 출신으로 풍경에 대한 묘사가 매우 사실적이면서 낭만적이었다. 소설 속에서 앤이 매튜 아저씨를 처음 만나서 초록 지붕집으로 가는 여정에서 아름다운 벚꽃길을 지나는 장면은 많은 이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특히 애니메이션에서는 매우 아름답고 환상적으로 그려졌는데, 앤의 상상력이 환상적으로 묘사되어 인상깊게 남아 있다. 그러나 소설은 영상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글이 주는 여유와 틈이 더 넉넉한 마음을 품게 한다. 애니메이션이 주는 화려함보다는 글에서 느껴지는 편안함이 더 좋다. 물론 영상과 글은 매우 다르다. 글은 읽는 사람의 상상력만큼 펼쳐지겠지만, 잘 만들어진 영상은 보통 사람의 상상력 그 이상의 자극을 줄 수도 있다. 하지만 이야기의 힘은 보다 깊은 생각과 상념으로 이끈다. 이것이 아마도 이야기의 힘일 것이다. 


110년 전의 앤, 그리고 현실의 앤

넷플릭스에서 제작한 ‘빨간 머리 앤’ 한 장면. 주인공 에이미베스 맥널티는 원작 속 앤을 그대로 옮긴 듯하다는 평을 받고 있다.


올해 2018년은 앤이 세상에 나온지 110년이 되는 해란다. 한 세기를 넘어서 사랑받는 앤의 매력은 아이다운 순수함과 끝없이 재잘거리는 활기, 엉뚱하기 그지 없는 상상력에 있을 것이다. 여전히 지금을 사는 아이들에게는 이런 것들이 보인다. 마릴라 역시 그런 앤의 모습을 사랑하면서도 앤에게 너무 시끄러다고 핀잔을 주었고, 얌전히 굴어야 한다고 야단쳤으며, 착한 아이가 되라고 훈계하고, 아이들끼리 어울려 엉뚱한 짓하지 말고 공부나 하라고 잔소리한다. 지금의 어른들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 110년 전의 앤과 지금 아이들의 생각과 행동은 별반 다르지 않고, 110년전의 마릴라나 지금의 어른이 그렇게 다르지 않다. 더 풍요로운 세상이라고 말하면서도 이야기는 고갈되고 상상력은 말라가며, 대화는 줄어들고 시간에 쫓기며 산다. 


앤이 지금까지 사랑받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말썽도 많고 엉뚱하기도 했던 앤을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믿어주었던 매튜 아저씨, 언제나 잔소리를 하고 혼냈지만, 앤에 대한 책임감과 사랑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던 마릴라, 앤의 마음의 친구 다이내나, 앤의 재능에서 가능성을 보고 적극 지원한 스테이시 선생님, 앤이 슬프고 힘들 때 좋은 멘토가 되어 준 앨런 부인 등 많은 이들이 앤의 성장에 영향을 끼쳤다. 지금을 사는 아이들에게 온 마을이 주는 도움을 느끼게 할 수 있는 길은 아직 열려 있는 것일까 문득 생각해 본다. 


앤의 탄생 110주년을 맞아 넷플릭스에서는 지난해 새로운 버전의 '빨강머리 앤' 드라마 시리즈를 내놓았다. 대본을 쓴 작가(월리-베켓)은 앤이 그저 순수하고 낭만적인 수다스러운 아이라는 것에 더 깊이 현실적인 아이로 그려내려고 했다. 

당시 진단이 있었으면 앤은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ADHD)’예요. 무엇 하나에 집중하지 못하고, 혼자 상상에 빠지며 가상의 친구와 얘기하잖아요. 넷플릭스 버전은 귀엽게만 생각했던 앤의 특징을 병리적으로까지 밀어붙인 거죠. 해외 리뷰를 보면 앤의 증상을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TSD)’로 보기도 합니다. 어려서 학대를 당한 아이가 새로운 가정을 찾았다고 한 번에 치유되기가 어렵다는 걸 보여준 거죠. 이게 흥미로운 지점이라 생각했어요. 앤을 꿈과 희망을 주는 예쁜 친구로만 볼 게 아니라 하나의 인간으로서 성장하는 과정을 통해 기쁨과 아픔을 같이 보자는 취지거든요.  

원문보기:  경향신문(2017. 6. 9.) 기사 '너무나 현실적인 넷플릭스의 앤... 그래도 너는 나의 앤'



한 아이가 성장하는 데에 있어 주위의 지원과 응원, 그리고 관심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하지만 어디 그것이 쉬운 일일까?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어찌보면 매튜와 마릴라의 사랑을 비롯해 주위 사람들의 관심이 없었다면 어려웠을 일이다. 




  1. <세계명작극장>과 관련한 좋은 글 추천 http://slownews.kr/60436 [본문으로]
[세트] 둠즈데이북 1~2 세트 - 전2권 - 10점
코니 윌리스 지음, 최용준 옮김/아작


유럽 인구의 3분의 1, 아니 절반까지 죽었다. 그것은 쥐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때는 아무도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천벌이었다. 최후의 날이 도래했다고 생각했다. 어디는 마을 전체가 몰살해 죽은 사람을 묻어줄 사람도 없었다. 속수무책으로 퍼지는 흑사병의 공포 앞에서 어떤 사람들은 도망치려했지만 그것은 더 병을 퍼뜨리는 일이 됐다. 그렇게 퍼진 흑사병은 마을과 마을, 도시와 도시를 박살냈다. 그 병이 진행되는 모습도 끔찍했다. 고열을 동반하면서 환자는 망각을 보고 헛소리를 하기 시작하고, 겨드랑이나 사타구니 등에 큰 멍울이 생긴다. 그 멍울은 끔찍하게 커지고 어떤 감염자는 눈이 썩어들어가 손으로 긁어내야 했다. 1300년대 의사들은 멍울을 째보기도 했지만 터진 고름에 노출되어 병을 옮기거나 동맥을 건들여 죽이기 일쑤였을 것이다. 항생제라는 것은 커녕 아스피린도 없던 시절이다. 약초라는 걸 달여서 붙이거나 먹이는 게 전부였던 시기였다. 피부 밑의 핏줄이 터지면서 피부가 검게 변하면서 죽는다고 해서 흑사병으로 불렸다. 사람들은 이 공포스러고 괴기스러운 죽음에 좌절했다. 이런 떼죽음이 하늘의 분노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했고, 여자, 유대인들이 하늘의 분노를 불러왔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들을 산 채로 태워죽이거나 목을 매달았다. 


흑사병은 중세 유럽을 암흑기라고 부를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였다.



흑사병은 그저 피부가 검게 변하면서 죽음에 이르는 병으로만 알았다. 코니 윌리스의 "둠즈데이 북(Doomsday book)"은 흑사병이 발병하던 초기 모습을 사실적으로 보여주었다. 처참했다. 글이 줄 수 있는 상상력의 최대치를 살려내는 문장들이 여기저기서 바이러스처럼 뇌 속을 돌아다니는 것 같았다. 더러운 진흙 속에서 가장 아름다운 연꽃이 핀다. 세상의 끝에서 인간다움에 대한 진실이 나타난다. 키브린은 성녀였고, 로슈 신부는 성자였다. 흑사병은 신의 천벌도 분노도 아닌 그냥 질병이었다. 무시무시한 병 앞에서 사람들은 공포와 두려움에 떨었다. 서로를 의심과 비난으로 쳐다보며 신의 분노를 잠재울 희생양을 찾으려 했다. 하지만 키브린은 이 병이 어디서 왔으며 어떻게 퍼지는지 알고 있었다. 아픈 사람들을 죽음의 사신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자신이 알고 있는 현대 지식을 총동원하며 고군분투했다. 하지만 그는 정해진 역사를 바꿀 수 없었다. 시간 모순 때문이다. 이미 벌어진 일은 미래에서 왔다고 할지라도 바꿀 수 없다는 것. 키브린은 역사를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나마 희망을 걸었던 것은 중세시대를 뒤흔들었던 흑사병의 사망률은 2분의 1 혹은 3분의 1이었다는 것에 기댔다. 그러기에 최선을 다해 그들을 살리고자 노력했다. 


이미 과거는 정해져 있지만, 키브린은 그 결론과 관계없이 인간의 존엄성을 지켜내기 위해 사투를 벌인다. 사람들은 쉽게 진행되는 사건의 결론을 내고, 그에 따라 해야할 행동을 계산적으로 따지면서 이익을 쫓아 행동한다. 우리들에게 키브린은 묻고 있다. 지키고자 하는 것이 있다면 결말에 기대지 말고 나아가라고. 세상에 결정된 건 아무것도 없으며 무엇을 하든 나 자신을 변화시키며 나아가는 것. 그리고 그것은 인간의 존엄성에 기대며, 더 큰 자신이 되는 길이라고 말하고 있다. 책 앞머리에 있는 존 클린 수사의 기록이 그것을 말한다.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이 모든 일이 시간에 파묻히지 않도록, 그래서 결코 잊지 말아야 할 이 모든 일이 우리 후손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지 않도록, 이 땅 사악한 존재의 손아귀에 놓인 이곳에서 일어난 수많은 재앙을 보아온 나는, 이제 죽은 자들에 둘러싸여 죽음을 기다리며 그동안 내가 목도한 모든 일을 여기 적는다. 

기록은 글쓴이와 함께 소멸되지 않아야 하고 노동은 그것을 행한 사람과 함께 무위로 돌아가지 않아야 하므로, 내 오늘 이 작업을 계속하기 위해 양피지를 남기니, 만일 단 한 사람이라도 살아남아 아담의 후예 중 그 누구라도 페스트로부터 도망쳐 내가 시작한 일을 계속 이어갈 수만 있다면... 

- 존 클린 수사, 1349년


우리는 계속 나아가야 한다. 인간의 길을 찾아서...

황야의 이리 - 6점
헤르만 헤세 지음, 김누리 옮김/민음사


난감한 일이다. 흔들리는 지하철에서도 보고, 침대 머리맡에서도 보았다. 작정하고 의자에 앉아서 열심히 탐독도 해 보았다. 그의 이전 작품 "데미안"에 대한 기대를 이어갈 수 있으리라 보았다. 그러나 달랐다. 재미도 감동도 없이 철학적 사유와 몽환적 상상력, 이해되지 않은 이야기의 연결 구조, 도저히 현실적 인물이라고 보기 힘든 등장인물들까지, 어느 하나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었다. 내 사유의 빈곤함인지, 아직 무르익지 않음인지 모를 일이다.

 

주인공 하리는 고집스럽게 자신의 사상을 고수하며 전쟁으로 치닫는  세상과  타협하지 않으면서도 소시민적인 삶과 명확히 구분되며 홀로 좁은 방에서 고전을 탐닉하며 살아가는 사상가이다. 세상에 대한 희망도 기대도 없고 삶의 즐거움도 행복도 모른다. 마침내 거칠고 황막한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 자신의 가슴 속에서 야수를 불러내고 말았다. 그 이리는 그의 영혼의 살점들을 뜯어먹으며 끝내 그의 숨통을 끊어 놓으려고 한다. 그러던 그가 헤르미네를 만나서 변화하기 시작한다. 혐오하던 대중 음악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속물적이라고 보았던 가면 무도회에 참석해 어린 소녀부터 중년의 부인까지 희롱하며 춤을 춘다. 자신의 변화를 설명할 수 없었던 그가 마지막에 찾아간 이상한 장소에서 몽환적 상상을 경험하고 수많은 자신의 개성들을 어떻게 취할 것인가에 대해 깨닫는다. 


50대의 헤르만 헤세는 삶에서 회한과 절망을 경험했던 것일까. 세상과 불화하거나 또는 세상에 너무 예민하거나 했을지도 모르겠다. 자고로 시인이라면, 소설가라면 보다 예민하고 불만족스러운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그 이유와 해답을 찾으려 노력할 것이다. 이 소설은 그런 그의 모습을 담은 자화상이라는 말이 있다. 그래서였을까, 책을 읽는 내내 상황에 담긴 은유의 의미를 찾기 바빴고, 맥락없이 빠져드는 독서를 다시 주워담기에 정신없었다. 너무 어렵게 책을 읽는 것은 아닐까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고 바삐 행간을 넘어가기도 했다. 그러다가 문득 가슴 속에서 한마리 야수가 정신없이 심장을 뜯어 먹는 것은 아닐까 생각됐다. 영혼 없는 책읽기... 내 영혼에게 참 미안한 책 읽기였음을 고백해야겠다. 



▲ 딸과 함께 간 실내 놀이터에서도 열심히 탐독했더랬다.






가끔 그 순간이 그립다. 양 옆으로는 곧게 뻗은 참나무들이 적당하게 나 있는 숲의 오솔길, 숲의 향을 온전히 맡을 수 있는 그 길을 걷던 순간 말이다. 그렇게 걷다 보면 숲과 나라는 인간은 온전히 하나되는 합일의 경험에 다가선다. 경계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경계조차 서로 다른 종의 경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나는 그 순간 숲에 들어온 낯선 동물의 하나다.


                                                                                       ⓒ강대진(eowls@eowls.net)


지리산을 비롯해 남도의 여러 산을 돌아다니고, 백두대간에 도전한다고 꼬박 열흘 동안 지리산부터 덕유산까지 걸을 때도 그런 순간은 매번 찾아왔다. 어쩌면 이제는 잃어버린 시간이 된 것일까? 산, 숲을 떠나온지 너무 오래됐다. 숲에 대한 그리움으로 이 책 “숲에서 우주를 보다”라는 책을 들었다.


이 책은 생물학자 데이비드 조지 해스컬이 숲 속 오두막에서 생활하면서 숲의 생태계에 대한 관찰과 그 속에 담긴 생물학적 이야기를 에세이 형식으로 담아 낸 책이다. 숲이 가지는 생태적 환경의 조화, 그리고 그 속에 담긴 태고적 신비, 그로부터 수만년 동안 진행되 온 진화의 오묘함 등을 쉽고 아름다운 문체로 담았다. 이 책에 담긴 인간과 자연에 대한 철학적 고찰은 내 좁은 시야를 다시 한 번 넓혀주었다.


작가는 한 겨울의 추위를 맨 몸으로 도전해 보면서 박새가 겨울을 나는 방법과 그러기 위해 발달할 수 있었던 신체의 비밀들을 비교해 설명한다. 이 과정에서 그는 극심한 추위 속에서 죽음의 공포를 느껴야 했다고 서술했다. 이 책에는 이처럼 동물만이 아니라 다양한 식물 생태계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끼, 꽃, 풀, 나무들은 동물들과 함께 공존한다. 나무 하나가 쓰러져 죽으면 그 죽은 나무 주위로 더 많은 풀과 동물들의 보금자리가 싹튼다. 곰팡이부터 도롱뇽까지 수많은 무척추 동물들이 썩어가는 줄기 속과 밑에서 번식한다.

그래서 숲의 건강함은 고사목의 밀도를 기준으로 삼는다고 한다. 죽은 나무들이 숲을 살리는 것이다. 그렇다고 인간이 억지로 나무를 베어 넘어뜨리는 것이 정당화되지 않는다. 언제나 그렇지만 숲의 자연스러운 경쟁과 협력 과정에서 일어나는 일이 ‘자연’스러운 것이다.

자연이 진화의 과정을 통해 일궈낸 위대한 작품은 여럿 있지만 그 중에 여기서는 ‘반딧불이’에 대해 소개해 본다.


어둠의 장막이 하늘을 완전히 덮었다. 하지만 만다라[각주:1]를 떠나려고 일어선 찰나 숲이 빛으로 가득 찼다. 반딧불이들은 땅 위 60~90센티미터 높이에 머물기 때문에, 선 채로 내려다보면 바다에 빛나는 부표가 가득 떠 있는 것처럼 지면이 울렁거린다.(생략) 이 비교는 공정하지 못하다. 아기를 현자(賢者)와 비교하는 셈이니 말이다. 우리의 손전등은 기껏해야 200년 전에 발명되었으며 화석 에너지와 화학적 에너지가 풍부한 시대에 발전했다. 사람들은 전구를 개선하려는 노력을 거의 기울이지 않았다. 연료가 무한한데 왜 쓸데없는 수고를 들이겠는가? 이에 반해 반딧불의 설계는 수백만 년의 시행착오를 거쳤다. 반딧불이는 늘 에너지가 부족했기에, 채굴된 화학 물질이 아니라 자신의 식량을 연료로 사용하며 낭비가 거의 없는 전구를 만들어냈다.


자연을 보호하자는 말이 또한 얼마나 인간중심적인 말인지 되새겨 보기도 하였다. 작가는 숲에 버려진 골프공 하나를 치울 것인가 말 것인가를 두고 깊은 고민에 빠진다. 골프공이 가진 인간적 환경의 특성, 인간은 자연과 동떨어진 존재인지, 인간과 자연은 전지구적 관점에서 하나의 자연을 이루고 있는 것인지, 그렇다면 인간이 만든 그 골프공도 자연의 일부로 보아야 하는지 등등 생각이 뻗어나간 자리에서는 또다른 건강한 싹이 움트는 것이 느껴진다. 


그래서 처음 든 충동은 골프공을 치워서 만다라의 ‘순수함’을 회복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충동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 골프공을 치워도 만다라가 산업 부산물로부터 완전히 깨끗해지는 않는다. 산, 황, 수은, 유기 오염 물질이 끊임없이 비에 섞여 내리기 때문이다. 만다라에 있는 모든 생물의 몸 속에는 바깥 세상의 분자 골프공이 흩뿌려져 있다. 나 또한 옷에서 떨어진 섬유 가닥, 외부의 세균, 숨으로  내쉰 외부 분자 혼자 따위를 만다라에 더했다. 심지어 만다라 생물들의 유전 부호에도 산업의 낙인이 찍혔다. 날아다니는 곤충, 특히 사람 가까이에 살던 조상의 후손들에게는 많은 살충제에 대한 내성 유전자가 들어 있다. 따라서 골프공을 치우는 것은 인간의 이 모든 인공물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을 눈에 보이지 않게 하여 인간과 분리된 ‘순수한’ 존재라는 환상을 유지할 뿐이다.

순수의 충동은 심층적인 두 번째 차원에서 무너질 것이다. 인간의 인공물은 자연에 묻은 얼룩이 아니다. 이런 시각은 인간과 나머지 생명 공동체를 갈라 놓는다. 골프공은 똑똑하고 놀기 좋아하는 아프리카 영장류의 마음이 물질로 구현된 것이다. 이 영장류는 신체적·정신적 솜씨를 겨루는 놀이를 고안하는 일을 좋아한다. 일반적으로 이런 놀이가 펼쳐지는 무대는 이 영장류가 떠나온, 지금도 무의식적으로 갈망하는 사바나를 꼼꼼하게 재구성한 복사판이다. 똑똑한 영장류는 이 세계에 속한다. 영장류의 생산물도 이 세계 속할 것이다. 이 유능한 영장류가 자신의 세계를 통제하는 데 능숙해지는 과정에서, 의도하지 않은 부작용이 생긴다. 이를테면 지금껏 보지 못한 화학 물질을 합성할 수 있는데, 그중 일부는 생명체에 유독하다. 대다수 영장류는 이러한 역효과를 미처 생각하지 못한다. 하지만 이 사실을 아는 영장류는 자신의 종이 세상에 미친 영향을 굳이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특히 아직까진 비교적 멀쩡해 보이는 곳에서라면 더더욱 그렇다. 나도 그런 영장류 중 하나다. 따라서 골프공이 숲에 떨어진 것을 보았을 때 내 마음은 골프공과 골프장, 골프객, 이 모두를 낳은 인류 문화를 욕한다. 하지만 자연을 사랑하고 인류를 증오하는 것은 비논리적이다. 인류는 전체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세상을 진정으로 사랑하려면 인류의 창의성과 놀이 본능 또한 사랑해야 한다. 인간의 인공물이 남아 있다고 해서 자연이 아름답지 않거나 일관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물론 우리는 덜 탐욕스럽게 덜 어지르고 덜 낭비하고 덜 근시안적이어야 한다. 하지만 책임감을 자기 혐오로 바꾸지는 말자. 우리의 가장 큰 실패는 세상에 대한 연민을 품지 못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는 우리 자신도 포함된다.    


세상에 대한 연민을 품는 것, 그것은 아프리카 영장류인 나를 비롯한 인간이 세상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갖고 한 걸음 더 자연 속으로 동화되어 가는 과정일지도 모르겠다. 자연을 바라보는 시각은 인간을 향한 연민으로 나아간다. 나아가 세상을 더 사랑할 수 있는 힘을 독자에게 불어넣어 준다. 이 책이 가진 힘이다. 숲을 그냥 바라보는 것이 아닌 숲 속에 있는 나를 상상하게 한다. 오롯이 숲 한가운데로 걸어가는 나와 가쁘게 몰아쉬는 숨소리 사이로 들리는 바람소리, 새소리를 상상한다. 모든 살아있는 것에 대한 경외감으로 가슴이 떨릴 때 스스로 살아있는 것에 대해 기쁨을 느끼게 된다. 이런 생각이 들 즈음, 이 책은 죽음을 풀어내는 자연의 순환에 대해서도 이야기해 주고 있다. 기술의 발전으로 인도에서 독수리가 멸종 위기로 몰리면서 일어난 일이다. 들판이나 숲에서 죽어간 동물들을 1차적으로 분해하고 해체하는 독수리들은 다른 동물과는 다른 특별한 위장을 가지고 있다. 독수리들은 썩어가는 사체에서도 영양분을 흡수하고 열량을 만들어내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 독수리들이 멸종 위기로 몰리자 가축이나 야생동물들이 들판에서 그대로 썩어가야 했고, 이로 인해 파리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감염된 들개들이 창궐하기 시작하면서 이로 인한 질병과 광견병이 인도 사회를 괴롭혔다. 또한 독수리의 멸종은 '풍장'을 전통으로 여기는 인도의 파르시 공동체에도 위기를 가져왔다. 인도 사회를 지키기 위해서는 결국 독수리의 보호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비슷한 예는 북미에서도 나타났다. 숲을 복원하고 사슴을 숲으로 돌려보내는 과정에서 사슴의 개체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해 숲이 오히려 망가지는 현상이 나타나자 결국 늑대를 넣어 숲의 균형을 유지한 예도 나온다(관련 기사).[각주:2] 하나의 숲이 온전히 유지되기 위해서는 수천년 간 이어져 온 질서가 필요하다. 그것이 무너지는 것은 한순간이지만 복원은 수천년이 걸릴지도 모를 일이다. 인간의 유기화학적 공산물로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진화의 신비는 이런 자연의 질서 앞에는 한낱 어린 아이의 손장난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의 연민을 바탕으로 자연 앞에 더 겸손해야겠다.

조만간 아이와 함께 봄이 움트고 있는 작은 숲을 찾아가 보아야겠다. 아이가 보는 숲이 내가 보는 숲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다만, 그것이 좀 더 소중하고 아름답게 보일 것이라고 자신한다.




숲에서 우주를 보다

저자
데이비드 조지 해스컬 지음
출판사
에이도스 | 2014-06-27 출간
카테고리
과학
책소개
2013년 교양과학 부문 미국 최고의 화제작2013년 미국 국립...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1. 작가는 자신이 살고 있는 숲을 '만다라'라고 표현하고 있다. 온갖 자연만물이 조화롭게 어울려 살아가는 곳을 의미한다. [본문으로]
  2. 기사가 인용한 논문: William J. Ripple et. al., Status and Ecological Effects of the World’s Largest Carnivores, Science 10 January 2014: Vol. 343 no. 6167 DOI: 10.1126/science.1241484 [본문으로]

칼 맞고 잘게 부서진 쪽파의 비극이 여기까지 번지지는 않았을까. 무도 감자도 단단함을 잃지 않았다. 늦도록 장터를 지키다가 떨이로 딸려온 노각이 몸을 구부린다. 물정을 안다는 몸짓이다. 문밖의 상황에 따라 순서가 정해짐을, 뒤집을 수 없음을 예감한 안색이다. 그마저 포기한 쑥갓 한 묶음이 구석에서 시커멓게 절망한다. 물러지는 전신을 바라보기만 한다. 

터주 노릇 하는 김치가 칸칸 일가를 이뤘다. 고춧가루와 젓갈에 휘둘린 배추가 겉절이라는 이름으로 들어왔다. 말끔한 백김치는 도시 출신처럼 보인다. 밭에서는 제법 우락부락했을 총각무가 가지런히 통에 누워 순화되는 중이다. 억센 허리로 소금기가 스민다. 갓김치는 남도 출신답게 몸짓이 중모리로 늘어진다. 손가락으로 집으면 육자배기 한 자락이 묻어날 것만 같다. 종횡으로 잘려 한 무더기 깍두기가 된 무가 원래 자리를 찾느라 부산하다. 반투명 통으로 부석거림이 비친다. 묵은지는 길게 누워 풋것들의 살뜰함과 무력감을 보기만 한다. 겨울을 넘겨본 존재만이 가질 수 있는 표정이다. 숙성이라 불리지만 자신들에게는 인내의 시간이다. 적멸로 가는 길은 짜고 맵고 종내는 시큼하다.

- 냉장고, 전영관, 69~70쪽



냉장고 안을 묘사한 표현이 찰지다. 




시인의 사물들

저자
강정, 고운기, 권혁웅, 김경주, 김남극 지음
출판사
한겨레출판사 | 2014-06-16 출간
카테고리
시/에세이
책소개
쉰두 명의 시인이 새롭게 빚어낸 쉰두 개의 사물에 대한 이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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