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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4. 26.

      아이의 중간고사 기간. 아이는 혼자 집에 있고 싶다고 했다. 조용히 아내와 단둘이 집을 나섰다. 쫓겨난 거 아니다. 부부 데이트의 날이다. 아무튼 그렇다. 때로는 그렇게 사는 거다. 무엇보다 아내가 좋아한다.  

      조계사에 들렸다. 관광객과 불자들로 북적였다. '부처님 오신 날'을 한 달여 앞두고 있다. 마당 한쪽에서는 법회 준비로 임시 의자들이 늘어서 있고, 또 다른 쪽에서는 힙한 찬불가에 맞춰 춤 공연 연습이 한창이다. 입구에 있는 북은 오가는 이들이 시시때때로 두들겨 대니 3초에 한 번씩 북소리가 울려 퍼진다. 북소리와 염불 외는 소리, 힙합 음악 소리까지 21세기 서울 한복판의 절에서 경험하는 꽤 신비하고 그로테스크한 풍경이다.

      그러나 저러나 아내는 또 아이의 복을 기원하겠다고 연등을 달자고 한다. 얼마나 하겠냐 싶어 그러라고 했는데, 연등 하나가 3만원이다. 연등 접수를 받던 아주머니는 가족 모두 하라고 영업(?)하신다. 물론 복을 기원하는데 어디 한 명만 하는 건 이상하긴 하지. 늙으신 어머니, 장모님의 건강도 기원해야 하고, 아직 장가 안 간 동생에게 좋은 배우자가 생기는 것도 바라야 하고, 우리 부부의 건강, 나의 안정적인 직장 생활도 기원하고... 복을 바라는 일들은 쎄고 쎘는데 딸아이 하나의 복만 바라는 것은 어딘가 뒤통수가 가려운 일임에는 틀림없다. 허나 그 복을 기원하는 것도 다 돈이다. 그러니 오늘은 아이 건강과 성공만 빌기로 한다.

      그렇게 연등이 달리는 모습도 보고, 사진도 찍고 차도 한잔 마시고 오늘의 두 번째 나들이 장소인 불교중앙박물관을 향하던 중이었다. 어, 그런데 조계사 문 바깥에서 외국 승려가 알수 없는 말로 뭐라고 하면서 웃으면서 우리 팔목에 염주를 들고 안아주고 법석을 떨며 사람 좋은 웃음을 짓는다. 예예~ 하다가 시주하라며 안내장을 보여 주었고, 어어 하다가 2만 원을 주고 돌아섰다.
      "응? 뭐지?" 
      그제야 나와 아내는 정신을 차리고 당했음을 직감했다. 역시 서울은 눈감으면 코 베어가는 곳이다. 아니 서울토박이들이 외국 승려에게 당했다. 두고두고 속이 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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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도 웃으며 불교중앙박물관을 찾았다. 오늘의 메인 이벤트. 도솔산 선운사의 삼지장보살. 
      1936년 선운사의 금동지장보살좌상이 도둑을 맞는다. 도둑맞은 불상은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런데 불상이 소유한 사람이 꿈을 꾼다. 불상이 꿈속에 나와 "나는 원래 전북 고창 선운사에 있었으니 속히 돌려보내 달라."라고 말하는 꿈이다. 대수롭지 않게 여긴 소장자들에게는 자꾸 이상한 일이 생긴다. 병이 생기거나 사업이 망하거나 하는데 다른 곳에 팔아넘기면 그 사람에게도 똑같은 꿈과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결국 마지막 소장자가 고창 경찰서에 자진 신고해 아무 조건 없이 불상을 넘기겠다고 밝히게 된 것.

      자고로 지장보살은 지옥에 단 한 명의 중생이라도 남아 있는 한 결코 성불하지 않겠다면서 지옥을 떠돌며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자신을 헌신하신 분이다. 인간들을 구제하겠다고 지상으로 내려왔다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와 같은 분이다. 자발적인 희생, 숭고한 사랑을 상징하는 분이다. 험악한 지옥을 떠돌며 단 한명의 중생이라도 구하겠다고 떠도는 지장보살을 만들어 낸 우리의 조상들은 도대체 어떤 삶을 살았던 것일까? 삼지장보살의 모습을 보면서 가슴 한쪽이 먹먹해진다. 

      이와 함께 익살스러운 승려들의 조각상도 그간 불교 사찰에서 보지 못했던 모습이다. 익살스러운 동작-곰방대로 자기 코를 위로 찌그려뜨리는 모습이라든지, 곰방대로 등을 긁는 모습, 앞니가 빠진 웃음으로 다른 중을 손가락질하는 모습, 품 안에 고양이와 노는 모습 등을 보니 사람 사는 모습이 천년전이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나 싶었다. 삶의 잔잔한 기쁨과 슬픔, 해학과 풍자로 고단하고 힘든 삶을 이겨내고 수도의 길을 걷는 것. 중이나 나나 다를 바 없다. 그저 스스로 추구하는 가치와 믿음을 다시 돌아볼 뿐.

      조계사 앞마당에 울려퍼지던 21세기 힙합 음악이, 500년 전 조상들이 만든 재미있는 승려 조각상과 통한다. 오래간만에 먼 조상들과 멋지게 인사한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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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물관을 나와 이제 경복궁을 갈 차례. 가기 전 점심을 먹어야겠다. 북촌손만둣국을 찾아들어갔다. 나는 북촌손만둣국, 아내는 북촌피냉면. 둘 다 얼큰하고 매운맛이다. 북촌손만둣국은 얼큰한 국물이 일품이다. 밥 말아 먹어도 맛있겠다 싶었지만 아내가 추가로 주문한 만두까지 먹으니 배가 불러서 밥은 못 먹겠더라. 피냉면은 알싸하다. 매우 맵다. 입이 좀 얼얼해진다. 

      배불리 먹었으니 걷자. 몇년만에 들린 경복궁. 역시 외국인이 절반이다. 그 절반 중 여자가 절반인데 절반 가까이가 한복을 입고 다닌다. 머리장식까지 예쁘게 하니 정말 어여쁜 외국처자들이 조선의 궁궐을 쏘다니며 사진을 찍고 다닌다. 아내와 나는 결혼 전 데이트할 때 고즈넉한 창경궁에서 비 오는 궁궐 안을 조용히 돌아다니며 소곤소곤 이야기하거나 조용히 자신의 발소리만 들으면서 걷거나 처마 밑에 앉아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을 보며 둘 다 아무 말 없이 시간을 보내기도 했었다. 그 기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우리는 시시때때로 그때의 이야기를 하곤 했고, 이번 경복궁도 그래서 오게 된 건데... 물론 15년도 훌쩍 넘기 옛이야기이고, 지금은 외국인 관광객 1천만 시대이고, 그 외국인들이 즐겨 찾는 경복궁이니 소란스럽기 그지없는 건 어느 정도 각오하고 갔더랬다. 

      그런데, 여기저기 이벤트로 펼쳐진 내용들을 살짝씩 구경했는데, 공연의 질이 좋지 않은 건 아니지만 궁궐 안에서 오일장 공연하듯, 마당놀이 하듯 공연하는 게 맞나 싶다. 관광객의 참여를 독려하고 끌어들이는 모습 등은 민속촌이면 족하다. 궁궐에서까지 그래야 할까? 생각해 볼 문제다. 

      그나마 소득이라면 최근 복원되었다는 건천궁이다. 명성황후가 일제의 자객들에게 시해된 역사적 장소이다. 다른 장소와 달리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여러 아이들이 강사 선생님과 함께 이곳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을미사변의 역사적 장소가 복원되었으니 보다 생생하게 역사적 사건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다시는 한 나라의 주권이 그렇듯 처참하고 잔인하게 밟히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어떤 나라이건 말이다. 그렇게 경복궁 구경까지 마치고 나니 아내와 나는 녹초가 된다. 경복궁을 나와 정부종합청사 옆길로 돌아서 세종문화회관을 건너 광화문 광장을 거쳐 시청 앞을 지나 버스정류장까지 한참을 걸었다. 서울시의회를 지날 즈음 성공회성당도 구경했다. 그리고 버스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내와 나는 다시 앞으로 몇 년간은 경복궁은 쳐다도 보지 않을 것 같다고 했다. 시간이 되고 여력이 되면 덕수궁이나 창경궁, 종묘로 발길이 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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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산 출렁다리 앞
소금산 출렁다리 앞 포토존
울렁다리로 가는 길에서 바라본 협곡의 모습. 멀리 보이는 다리가 울렁다리이다.
소금산 울렁다리. 출렁다리를 지나 한 20여분 가면 도착한다. 여기로 가는 길도 아찔함을 맛볼 수 있다.
울렁다리는 바닥이 유리인 구간이 있다. 바닥을 바라보며 그 위로 걷는 짜릿함을 느낄 수 있다.



소금산 출렁다리는 원주의 간현광광지 안에 있다. 날이 풀리면 줄서서 건너야 한다고 하는데, 새벽에 출발한 덕분인지 그나마 좀 한산했다. 다만 내려올 때에는 주차장도 거의 가득 찼고사람들이 오르는 인파도 제법 많았다. 만일 출렁다리를 여유롭게 즐기고 싶다면 이른 아침에 오르는 게 좋을 듯하다.

소금산 계곡에서는 포크레인을 비롯한 중장비들이 관광지 개발 공사에 한창이었다. 관광지에 차를 주차하고 식당을 찾아 식사를 먼저 했다. 아침부터 막걸리를 한 사발 돌리는 것도 아저씨 여행의 꿀맛이다. 소금산 출렁다리 입장권은 1인당 3000원. 하지만 2000원을 원주 사랑 상품권으로 돌려 준다. 원주시 식당이나 시장 등에서 사용할 수 있다. 우리는 나중에 원주 전통 시장에서 장을 보면서 상품권을 사용했다.

관광지 입구에서 출렁다리까지는 제법 가파른 오르막길이다. 물론 나무계단으로 잘 정비되어 있어 어렵지 않지만 다리가 불편한 분들은 쉽지 않을 것 같다. 잘 걷는 사람은 20여분 정도 부지런히 올라가면 다리 초입에 닿을 수 있지만, 그렇지 않아도 쉬엄쉬엄 올라가면 30분 정도면 도착할 수 있다. 출렁다리의 길이는 200m. 길이도 길이지만 협곡을 잇는 높이가 남다르다. 자그마치 100m높이에 설치되었기 때문이다. 100m 상공을 흔들리면서 걸어보는 느낌은 제법 짜릿하다. 바람이라도 세게 불면 더 흔들릴까?

출렁다리를 지나 최근에 개통된 울렁다리로 이동했다. 울렁다리로 향하는 길에서도 놀라움이 계속된다. 절벽에 심을 받고 거기에 받침을 얹어서 길을 만들었다. 사실상 산길이 아니라 절벽 옆길을 타고 이동하는 셈이다. 인간의 기술력에 다시 한번 감탄할 수밖에 없다. 울렁다리는 출렁다리보다 길고(353m) 높이도 더 높다(200m). 중간에 유리 바닥을 만들어 아찔한 느낌을 더해주었다. 그래도 다리 밑을 보기 보다 다리 중간에서 건너편 소금산 협곡의 절경은 꼭 눈에 담고 가자.

2000년대 들어오면서 이곳 출렁다리를 비롯해 여러 지자체들이 앞다투며 관광지 현수교 제작에 매달리고 있다. 원주 소금산 출렁다리를 비롯해, 울산 대왕암 출렁다리(303m), 충남 논산 탑정호 출렁다리(600m), 충남 예산 예당호 출렁다리(402m), 전북 순창 체계산 출렁다리(270m 높이90m), 충북 제천 청풍호 옥순봉 출렁다리(222m) 등등... 대충 인터넷에 '출렁다리'라고 검색하면 쏟아져 나온다. 산업 발전의 성과는 오래 걸리기 마련이지만, 이런 토목 사업을 통한 관광지 개발은 금방 눈에 띈다. 성과 위주 보여주기식 개발이라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물론 문화 산업의 측면에서 필요한 일이긴 할 거다. 그러나 미래의 먹거리 개발을 위해서는 지역의 지도자라면 보다 높고 큰 혜안이 필요하지 않을까. 우후죽순으로 생겨나는 출렁다리가 만일 찾아오는 관광객이 줄어 관리비만 먹는 하마가 되어 관리 인력과 재정이 줄어들었다가 큰 사고로 이어진다면 누가 책임질까? 성장만을 염두하는 개발이 갖는 한계다.

박경리 문학공원 내 전시관에 있는 시. 한국전쟁으로 남편을 잃고 아들마저 교통사고로 잃은 후 쓴 시. 온갖 고통을 글로써 극복하려는 사마천의 모습에서 자신을 보았던 것일까.
박경리 문학의 집 전시실에 마련된 전시물이다. 대하소설 <토지>의 주요 장면들의 내용을 펼쳐 놓고 사건에 관계된 여러 장치들로 실감있게 나타내 주었다. 텍스트와 책, 사물을 통해 전시 효과를 극대화한 것이다.
박경리 선생의 동상. 편안한 얼굴로 어느 한 곳을 지그시 응시하는 선생의 모습에서 <토지>의 마지막 부분을 집필하던 그이의 역사에 대한 깊은 통찰과 인간에 대한 애정이 느껴진다.




박경리 문학공원에도 들렸다. 2010년이었던가, 2011년이었던가. 아이가 2살일 때 안고 돌아다녔던 걸로 기억되는 곳이다. 그때도 이곳에 들렸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다. 전시관의 모습도 크게 달라지지 않은 듯하다. 때로는 그렇게 변함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에 안심한다. 벌써 10년이 훌쩍 넘은 시간인데도, 박경리 선생은 저 돌 위에 변함없이 한쪽 팔을 대고 기댄채 앉아 있다. '잘 지내셨어요?' 마음으로 재회의 인사를 나누니 편안해진다.

이곳은 선생께서 편안하게 말년을 보내며 대하 장편 소설 <토지>의 마지막 4부와 5부를 집필하고 완결지었던 곳이었다. 한국전쟁으로 남편을 잃고 힘들게 자식을 키워내면서도 자신의 속에 담긴 응어리와 한을 글로 풀어내었던 한 인간의 삶의 흔적을 본다.

알 것 같다. 쉽지 않고 힘든 일이다. 그런 그의 아픔과 고통이 그가 쓴 시 <사마천>에 잘 드러나 있다. 먼저 떠난 남편에 대한 원망도, 불의의 사고로 죽은 아들에 대한 애달픔도 글을 쓰면서 위로받았을까. 모든 사람이 그럴 거다. 내가 하는 일이 언제부턴거 경제적 문제와 삶의 철학의 경계에 서는 일이다. 그저 밥벌이로 하는 일이었는데, 그 일이 어느날부터 내 인생에 대한 깊은 연민과 통찰을 주는가하면, 반대로 인생의 깊은 철학에서 시작되었던 작업이 어느새 밥벌이로 연결되어 나와 가족을 연명하게 하는 일도 있는 거다.

원주를 간다면 그 어느곳보다 이곳 박경리 문학공원에 들려보기를 추천한다.

용소막 성당 앞 계단
용소막 성당 출입구 앞. 가지런히 벗어놓은 신발들. 안에서는 예배가 행해지고 있다.
성당의 역사보다 더 오래된 느티나무
나무에 잎이 무성해진 여름이면 붉은 벽돌 성당과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용소막 성당은 강원도에서 세 번째로 건립된 성당이다. 건물이 지어진 건 1915년. 약 100년이 넘는 세월을 이 자리에서 지역민들의 평안을 기도하는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성당도 성당이지만 성당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다섯 그루의 느티나무들이 영묘하다. 성당으로 모여들었던 사람들, 그 사람들이 모인 성당을 둘러싼 아름드리나무들. 성당보다 더 오랜 역사로 이 땅을 지키고 있는 나무들. 150번의 사계를 지나오고 처음 찾아왔던 사람의 자손과 그 자손의 자손이 찾아오는 것을 지켜보는 저 생명들은 이날 이곳을 찾은 우리를 어떻게 느끼고 있을까?

원주 여행의 마지막 경유지였던 용소막 성당을 한바퀴 돌면서 이번 여행의 이름을 생각해 본다. 그 겨울 원주, 우연 2022. 대학 선후배 동기 사이인 우리 넷은 실로 십여년의 세월을 건너 오랜만에 함께 긴 밤을 같이 보냈다.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들도 풀어 보았지만, 편안하고 시답지 않게 오고간 농담들이 어쩌면 우리가 가지고 싶었던 시간이 아닐까. 경직된 사람들이 서로에게 베푼 뜻하지 않은 여유. 이제 좀 마음의 짐들을 내려놓고 살면 좋겠다. 여전히 변하지 않는 내 주위의 사슬들을 끊어내긴 어려울 거다. 하지만 이제 스스로의 마음을 드넓은 평야에 선 초인처럼 깊은 협곡을 바라보는 의인처럼 잠시만이라도 자신만의 세상을 다시 꿈꿀 수 있었던 시간이었길 바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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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정사 전나무숲길을 걸었다. 
이곳에는 두 번 정도 왔다. 그때마다 내 옆에는 항상 아내와 아이가 같이 걸었다. 
이번에는 지인들과 함께 걸었다. 높이 솟은 나무들이 드리운 그늘과 향기가 좋다. 
자박자박 흙길 밟는 소리도 평화롭다. 
천천히 걷다 보니 어느새 월정사 앞에 다다른다. 

 

월정사 팔각구층석탑에 구름이 걸렸다. 
파란 하늘이 산사를 둘러싼 초록을 더 짙게 물들인다. 
처마 끝에 매달린 풍경소리가 바람에 흔들리면
꾸벅꾸벅 졸던 아이들이 이내 엎어져 잠이 들 것 같구나. 
가만히 앉아서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대웅전의 지붕 너머 소나무 숲과 하늘의 경계를 살핀다. 
이 시간이 아깝지 않다.

 

 

안목 커피 거리에는 차와 사람이 가득했다. 
은은하고 깊이 있는 커피향을 상상하면서 방문했지만
마땅히 차댈 곳도 찾지 못해 한참을 헤매이다가 
안목해변과 송정해변을 지나 더 북쪽으로 향했다.

그래, 꼭 커피가 거기만 있는 것도 아니고,
이미 인산인해를 이룬 그 거리에서 복작거리는 것보다
한산하고 조용한 곳이 더 좋다. 
소나무 방풍림을 지나니 바로 푸른 바다가 덥썩 안긴다. 
"어서와, 옥빛 바다는 오랜만이지?"
잘 지내고 있구나, 너도... 나도... 이렇게 뜻밖의 바다를 만나는 행운이 감사하다. 

 

휘닉스 평창에는 처음이다. 
스키를 즐기는 것도 아니고 어디 잘 쏘다니는 것도 아니니 이런 곳을 방문할 일도 드물다.
분명 콘도이지만 야외에서 바베큐를 즐길 수 있는 곳도 따로 마련되어 있다.
4명이서 3인을 주문했는데 많다. 라면과 맥주는 무제한이다. 
해가 저물 때까지 텐트 안에서는 이야기가 굽이굽이 펼쳐졌다. 
 

평창에 왔으니 이효석 생가도 방문해 본다. 
낡은 집 반석 위에는 오래된 텔레비전과 시계가 나와 있다. 
부서진 시계 바늘은 8시 35분 즈음에 멈춰있고, 
텔레비전 박스는 위태롭게 찌그러져 있어 언제 주저앉을지 알 수 없다. 
석유 곤로는 대청마루에 홀로 올라가 있는데, 
여기 물건들이 그렇듯이 어울리지 않는 장소에 
버려진 것들처럼 보인다. 
낡고 작동하지 않으며 필요가 사라진 물건들
이효석은 어떻게 생각했을까? 

찾아오는 이들이 금줄이 쳐진 마당에서 멀거니 집만 쳐다보고 
오래된 농기구와 예전 집안 가구들을 슬쩍 보고 떠난다. 
낡고 버려진 저 물건들처럼 집도 시나브로 낡고 버려지는 것 같다. 

생가 앞 식당 주인의 팻말에는
""메밀꽃 필 무렵"은 시가 아니고 소설입니다."
라는 안내 문구가 써 있다. 
싯구 같은 소설 제목이 말해 주는 것처럼 소설도 그렇게 시처럼 아름다웠다. 

 

돌아오는 길 영릉에 들렸다. 세종대왕의 묘이다. 
묘역은 최근에 새롭게 단장한 듯했다.
얼마전 올린것 같은 집들의 보와 기둥은 하얀 속살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언덕 위에 다시 커다란 봉분을 올려서 마련한 세종대왕 묘역은
주변의 푸른 소나무들이 빙 둘러져 있고, 초록의 잔디들은 잘 다듬어져 있었다.  
비바람에 아랑곳하지 않고 왕의 묘를 수백년간 지켜온 석상들도 여전하다. 
방문객들의 호기심 어린 눈빛에도 익숙해졌는지 지그시 감은 눈을 뜨지 않는다. 

걷는 걸음걸음마다 마음이 편하다. 여유로운 마음 덕분에 초여름의 열기도 그리 힘들지 않았다. 
다시 2021년 6월의 좋은 추억이 온전히 쓰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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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 여행0 - 프롤로그

혼자 갈 뻔했는데, 가기 이틀전 한명이 합류했습니다.
뒷모습만 봐도 알만한 사람이면 다 알겠죠.
오동도 가는 길, 
해양수산청 지방사무소 건물인 듯한데,
그 담장 안쪽으로 벚꽃들이 만개해 있었습니다.
잎이 떨어지려면 아직 멀었을 것 같더군요.
그리고 길 옆으로는 빨간 꽃이 보이실 겁니다.
동백꽃입니다. 역시 한창이었습니다.
가끔 거센 바람이 불면 꽃봉오리째 뚝뚝 떨어지는데,
그 모습은 어찌나 서글퍼 보이는지...
비와 바람과 구름이 가득한 여수 여행길 사진
하루에 조금씩 업데이트 합니다.


여수 여행 1 - 여수로 가자

여행 하루 전.

신명이의 전화가 왔다. 9일날 결혼식에 꼭 와달라는 전화였다. 일전에 했던 약속이 있어서 차마 못가겠다는 말은 못하고 또다시 가겠다는 허언을 늘어놓았다.

밤늦게 또 한통의 전화가 왔다. 친구였다. 4월 말에 결혼하는데, 9일날 저녁에 친구들한테 얼굴 한번 보자는 전화였다. 여수 간다고, 그래서 못가겠다고 말하는 목소리는 힘이 없었다. 끊고 나서 거짓말 하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생각했다.
먼길을 떠난다는 것은 설렘이다. 내면의 어떤 에너지가 점차 그 떠남을 준비하다 보면 밤잠을 이루기도 어려운가 보다. 일찍 잠들었지만 첫잠을 깬 것은 새벽 3시반이었다. 그렇게 시간마다 잠을 깨다가 5시 반에 일어나 전날 만들어 놓은 김치볶음밥을 데워 아침을 해결했다.

기차 시간은 7시 50분 용산발 여수행 새마을호. 평생 무궁화호만 이용하다가 새마을호를 타려니 기분이 묘하다. 용산역에서 기차를 타보는 것도 처음이다. 이게 다 KTX덕분이다. 분에 넘치는 영광이 아닐 수 없다. 덕분에 무궁화호는 보기 드물게 되었고, 교통비는 억지로 뛰어올랐으니 말이다.
 
열차가 출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비가 뿌려지기 시작했다. 하늘이 돕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심란한 이 마음을 하늘이 알아 준 것인지 모를 일이다. 기차는 빗속을 달려 12시 50분경 여수에 도착했다.

봄날 여행지로 여수를 선택한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먼저 어느 블로그에서 본 여수 여행일지에 혹했다는 것이 그 첫 번째 선택 이유가 될 수 있겠다. 다음으로 봄을 준비하는 바다를 보고 싶었다. 겨울이 막 물러가고 봄의 물컹거리는 생동감이 느껴지는 바다를 본다는 것에 마음이 끌렸다. 무엇보다 여수는 봉오리를 툭툭 떨어뜨리는 동백꽃이 잘 어울리는 항구가 아니겠느냐는 막연한 기대도 있었다.


여수 여행 2 - 자산공원과 오동도 

오동도는 여수역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다. 오동도까지 가는 길도 벚꽃과 동백꽃이 화사하게 어우러져서 매우 아름답다. 벚꽃은 봄의 시작을 알리는 꽃이지만 동백은 10월에서 4월까지만 피며 겨울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꽃이다. 그런 두 개의 꽃이 여수를 온통 정신없이 물들이고 있었다. 릴레이 경주의 마지막 주자가 배턴을 터치하는 것처럼 아슬아슬하지만 오묘한 조화가 멋들어지게 세상을 물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오동도 바로 옆에 자산공원이 있다. 여기에서 보면 여수 시내가 한눈에 보인다. 아름다운 미항이라고 불리는 여수는 작지만 알찬 도시라는 걸 느낄 수 있다.




자산공원에 오르면 멀리 경남 남해가 보이고 이순신 장군의 전라좌수영 앞바다가 훤하게 펼쳐져 있다. 오동도로 나있는 방파제 길로 사람들이 오간다. 방파제 입구에서는 오동도로 들어가는 관광열차(?)가 운행하고 있다. 오동도 입장료는 1600원. 관광열차 승차료는 500원. 우리는 걸어서 오동도로 들어갔다.

여수와 오동도를 잇고 있는 방파제.


 


 

여수 여행 4 

다음 일정은 방죽포 해수욕장. 녹동식당에서 나와 여수시내로 들어가는 택시를 탔다. 진남관까지 기본요금(1600원)이 나왔다. 그곳에서 돌산 향일암으로 들어가는 버스 111번을 탔다. 버스는 돌산대교를 건너 돌산갓김치로 유명한 돌산으로 들어가고 약 30여분을 달린 버스는 마침내 방죽포 해수욕장에 도착했다. 방죽포에 도착한 시간은 5시. 예상보다 많이 늦었다.


방죽포 해수욕장은 매우 작은 해수욕장이다. 모래톱이 약 200M정도 될까? 모래사장 뒤로는 키 큰 소나무들이 방풍림을 조성하고 있었다. 작지만 그래도 소담한 풍경으로 찾는 이들을 편안하게 해주는 곳이었다.

도착하니 다시 비가 뿌려지기 시작했다. 자잘한 비가 계속해서 내리고 바람도 거세게 불어왔다. 구름 덕분에 평소보다 주위는 빨리 어두워지고 있었다. 계속해서 여행을 수행하기는 어려운 조건이었다. 우리는 이곳에서 민박을 하기로 했다.
우리가 묵고 갈 방문에는 전라남도의 지원을 받은 시설이라는 것과 요금표가 적혀 있었다. 주중 2만원, 주말 3만원, 성수기 5만원의 표준요금을 받고 있었다. 큰 창문으로 방죽포 앞바다가 훤하게 보였다. 날씨만 좋다면 이곳에서 일출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주인아저씨도 날씨가 흐려 손님들이 일출을 보지 못함을 안타까워했다.

또다시 난관에 부딪힌 것은 근처에 식당이 없다는 거였다. 원래대로라면 향일암 근처에서 저녁을 해결할 예정이었는데, 방죽포 해안은 워낙 한적한 곳이라 변변한 매점도 찾기 힘들었다. 다행히 주인아저씨의 도움으로 차를 타고 나가서 몇가지 술과 요기거리를 사올 수 있었다. 간단히 요기를 마치고 술과 이야기로 한밤을 달렸다. 밤새 유리창을 때리는 바람소리와 창문 너머로 바닷가 콘크리트를 때리는 파도소리가 참 좋았다. 12시 즈음 잠자리에 들었고, 파도소리는 술기운과 어울려 오히려 기분을 좋게 만들었고, 쉽게 잠들 수 있었다.

새벽 즈음 눈을 떴으나 날이 흐려 일출맞이는 어려울 듯싶었다. 후배는 바람소리와 파도소리 때문에 걱정도 되고 겁도 나서 잠을 설쳤다고 했다. 9시가 넘어 민박집을 나왔다.

버스 정류장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향일암 방향 버스가 한대 지나가고 있었다. 여수 여행에서 대중 교통, 특히 버스의 시간대를 알아두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배차간격은 최소 30분이었고, 우리는 정류장에서 약 40분 정도 버스를 기다려야 했다.

 

△방죽포 해수욕장의 소나무 숲
△방죽포 해수욕장
△ 빗속에서 낚시를 하는 사람들
△방죽포 방파제에 정박된 어선들
△민박집에서 바라본 방죽포 해수욕장
△ 밤새 파도가 민박집 밑의 방파제를 때렸다.
△ 거센 파도와 바람 속에서도 낚시를 준비하는 사람.

 


 

여수 여행 5 - 향일암

9시반 경에 나왔지만 버스는 10시가 넘어서 탔다. 시간을 잘못 맞춘 것이다. 이곳을 오가는 버스가 30~50분 간격으로 온다는 사실은 나중에 알게 됐다. 방죽포에서 향일암까지는 약 20분 정도 걸렸다. 돌산도의 해안가를 달리는 버스는 작은 어촌마을에 멈추고 내 고향 산골마을과는 사뭇 다른 내음을 전해 주었다.

향일암의 아름다움 때문인지 향일암 주변에는 많은 민박집과 식당들이 즐비했다. 어제 저녁에 이곳에 와서 저녁을 먹을 걸 하는 후회가 들었다. 향일암으로 오르는 길 양옆으로 돌산의 명물 갓김치를 파는 상인들이 늘어서 있었다. 즉석에서 김치를 담그면서 오가는 손님들을 불러 한입씩 물려주었다. 그 틈에 나도 갓김치 맛을 보았는데, 짜고 매운 맛이 전라도의 손맛이라는 말이 아마 이 갓김치를 두고 한 말이 아닐까 싶었다.

향일암에 오니 또 가랑비가 오락가락 했다. 일주문을 지나 대웅전, 그리고 관음전까지 둘러보았다. 대웅전의 부처님은 먼 남해 바다를 지긋이 응시하는 모습이 속세인들의 발걸음 소리에 괘념치 않는 듯했다. 조그만 터에 오밀조밀하게 붙어 있는 절이지만 길목 하나 바위 하나가 오밀조밀한 멋을 보여주는 절이었다.

향일암에서 내려와 버스를 탄 시간은 대략 12시. 여수 시내 중앙동에서 점심을 먹었다. 좀 특별한 식당을 찾아보았지만 결국 전주식당에서 콩나물해장국을 먹고 말았다. 시장기가 원수다.

△향일암 오르는 길. 수많은 계단은 부처에게 다가가기 위해서 씻어야 하는 업보.
△향일암은 작은 절이다. 작고 오밀조밀한 절이 바닷가 절벽쪽에 붙어 있는데, 절도 아름답지만 절에서 바라본 경치는 더욱 아름답다.
△향일암의 대웅전 앞으로 남해 앞바다가 보인다. 이곳은 일출 전망대로 유명하다.
△ 곳곳에 동백이 피고 지고...
△바위에 동전을 붙이면 복이 온다는 얘기에 방문객들이 동전을 붙이고 있다.
△ 관음보살과 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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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현경 | 여수 돌산갖지 정말 맛있는데.. 김장할때 같이 담아서 일년이상 묵힌뒤에 잎을 쫙펴서 밥을싸서 먹으면.. 밥도둑이 따로 없는데..막 담근건 아무래도 짜고 맵기가 쉽습니다. 익혀서 먹어야 제맛이 나므로..


여수 여행 6 - 진남관

점심을 먹고 여수역을 향하던 중간에 잠시 들른 곳은 진남관. 이곳은 여수 8경중의 4경이라고도 불리우는 곳이다. 조선시대 전라좌수영에 속한 건물로 임진왜란이 끝난 직후에 축조되었다가 1716년에 불에 타서 1718년에 다시 지었다고 한다. 현존하는 지방 관아 건물로는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건물 하나하나에 새겨졌을 목수와 인부들의 땀과 눈물이 세월의 흔적에서도 역력히 드러났다. 규모면에서 보면 종묘의 영녕전에 비할 바가 못 되지만 나무와 돌에 새겨진 세월의 흔적은 여태껏 보아온 고건축물 중 단연 오래되어 보였다.
1시가 조금 넘어 진남관에 도착했고, 관람시간은 대략 30분 정도. 2시 20분 여수발 용산행 기차를 타기 위해 진남관을 나온 시간은 1시 50분경이었다. 진남관은 여수역에서 택시로 기본요금(1600) 거리에 있다.

에필로그.

아스팔트에 떨어진 동백꽃을 보면서 처연함과 함께 끝까지 아름다움을 놓지 않으려는 절규를 보았다. 어디까지나 나를 위로하는 여행이었는데, 든든한 동행이 되어 준 현상군에게 감사한다. 여행이란 어차피 돌아오기 위한 잠시의 일탈이다. 하지만 떠나기 전과 돌아온 이후의 내면을 바라보는 시선은 달라져야 할 것이다.

이번 여행이 그런 내 안의 변화에 얼마나 충실했는지 나로서는 알 수 없다. 자신의 마음의 깊이를 측량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여전히 흔들리면서 일상을 살고 있지만, 결코 넘어지지 않아야 한다며 내 어깨를 툭 치고 가는 동백꽃을 만나고 왔다는 데서 의미를 찾아본다.

△ 진남관의 전체 모습
△ 진남관에서
△ 현상이와 함께
△ 진남관의 보
△ 기둥과 처마

 

문현경 | 두사람의 그림도 훌륭하지만.. 두사람다 따로 따로 두사람이면 하는 마음입니다.

강대진 | 알았어^^ 담에는 그렇게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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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둘레길 5코스를 걷기로 하고 토요일 새벽에 배낭을 차에 싣고 떠났습니다. 이제는 익숙하다는 듯이 아이도 새벽 4시에 씩씩하게 일어나 짜증도 부리지 않고 냉큼 올라탔지요. 새벽 고속도로는 칠흑같이 어둡고 오가는 차량도 드물었습니다. 아내는, 보통 때라면 매화 축제 가는 사람들이 많았을 거라고 했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광양 매화마을을 찾아갈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습니다.

함양군 휴전면 원기마을에 도착한 건 오전 8시 정도 였습니다. 전날까지만해도 비는 저녁 늦게부터 올 거라는 예보를 확인했었는데요, 그에 따라 이날의 트레킹은 오후 3시에 끝낼 예정이었지요. 그런데 원기마을에 도착하자마나 살짝 싸리눈이 오기 시작했습니다. 금방 그칠 거라 생각하고 아이에게는 우비를 입혔고 전 그냥 맞으며 걸을 준비를 했습니다. 그런데 아내가 이 눈이 금방 그칠 거라면 차에서 조금 기다려 보자고 하더군요. 자고로 아내말을 잘 들어야 합니다. 차에서 1시간만 기다려 보기로 했는데 싸리눈이 함박눈이 되어 쏟아지기 시작하고 그치질 않았습니다.

그렇게 둘레갈 걷기는 포기했습니다. 그리고 뜻하지 않았던 새로운 여정이 시작되었습니다. 함양에서 광양으로 차를 몰기 시작하면서 눈은 비로 바뀌었고 양도 줄었지만 이미 질척해졌을 산길을 걷는 건 다음으로 미루었네요.

그렇게 광양 매화마을과 구례 산수유 마을을 다녀왔습니다. 걷기 여행을 하지 못한 아쉬움이 컸지만, 여행이라는 게 뜻밖의 사건들이 주는 재미와 풍경들로도 충분히 의미를 가지겠죠.

둘레길 이야기는 다음에 실어 보낼테니 이번에는 남녘에서 올라오는 꽃소식 이야기를 들어보세요.

산수유 나무에 핀 꽃들
튼튼한 두 다리만 있으면 어디든 간다.
산수유공원에 있는 지리산 마스코트
숙소 앞에 있던 한글공원
매화마을 초입의 두꺼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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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1일. 서울시 은평구에 있는 사비나 미술관을 방문했다. 

일요일 낮 12시 즈음에 출발했지만 1시간도 걸리지 않아 도착할 수 있었다. 반대로 은평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교통 체증이 심해서 그보다 훨씬 많은 시간이 걸렸다. 

이곳 미술관을 알게 된 것은 페이스북을 통해서다. 흥미로운 외관과 독특한 기획 전시, 그중에서도 아이가 흥미롭게 볼만한 전시가 열리고 있었다. 성인 6천원, 어린이와 청소년은 4천원이다. 관람권을 끊으면 1층 카페에서 음료를 1천원 할인해 준다. 

특히 주목한 전시는 "우리 모두는 서로의 운명이다-멸종위기 동물, 예술로 HIG"라는 전시전이었다. 아래는 이 전시와 관련한 설명을 홈페이지에서 가져왔다. 

...더보기

 <우리 모두는 서로의 운명이다–멸종위기동물, 예술로 HUG>(이하 멸종위기동물, 예술로 HUG)展은 ‘생물다양성 보존’이라는 인류의 당면과제를 예술적 시각으로 제시하고 그 해답을 찾기 위한 시도로 기획되었습니다. 유엔생물다양성과학기구(IPBES) 총회보고서에 따르면 현재 지구상에 존재하는 생물은 약 800만 종이며 그 중 인간이 저지른 자연환경 파괴와 기후변화로 인해 최대 100만 종에 달하는 동식물이 수십 년 안에 멸종위기에 처하게 된다고 합니다. 대표적인 멸종위기 동물로는 코끼리, 코뿔소, 호랑이, 기린, 눈 표범 등을 꼽을 수 있습니다.

이처럼 환경 문제는 종의 존폐 논쟁을 불러일으킬 만큼 가장 중요한 사회적 이슈 중 하나로 전 세계가 노력해야 하는 당면 과제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지구 보존을 위한 21세기 미술관의 사회적인 역할은 무엇일까요? 사비나미술관은 이번 전시를 통해 생태계를 이루고 있는 생명체의 소중함을 알리고 자연과 인간의 공존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합니다.

  - 전시 소개글 미술관 홈페이지에서

 

전시된 작품들은 많지 않지만 인상적이었으며, 상상력을 자극하면서 편안하게 둘러볼 수 있었다. 더불어 지구 환경과 생물다양성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다. 다만 아이에게는 충분한 설명을 해 주기 어려웠고, 그저 환경 오염으로 인해 동물들의 생명이 위협받고 있다는 사실 정도만 전달할 수 있었다. 

그외에도 4층과 5층에서 다른 전시물도 관람할 수 있었다. 2~3층의 멸종위기동물 전시와는 성격이 좀 다른 사진전이었는데, 약간 난해하다. 

사비나 미술관의 내부 주차장은 협소하지만 한국고전번역원과 미술관 사이에 있는 넓은 공터를 사용할 수 있어서 주차가 편하다. 

사비나 미술관 관람을 마친 후 카페에서 전시 관련 이야기를 나누기 좋다. 가까운 곳에 은평 한옥마을이 있으니 그곳에서 전통차를 마시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러나 우리가 은평 한옥마을에 방문했을 때는 차량이 너무 많았고, 산행을 마치고 내려온 사람들과 한옥마을 방문자들이 뒤엉켜 있는데다가 가장 뜨거운 한낮의 폭염이 길거리를 달구고 있어서 오래 둘러보기가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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춥다. 잔뜩 움츠린 목덜미로 서늘한 겨울 바람이 스쳤다. 붉은 벽돌 건물에 주눅들어 어깨와 허리가 접혔다. 빛이 들어오지 않는다는 먹방에서 아이는 떨었다. 똥오줌까지 스스로 처리해야 하고, 며칠이 지나가는 줄도 모른채 깜깜한 어둠 속에 사람을 가둔다는 상상만으로 정신적 공황에 빠질 것처럼 무섭다. 벽관에 들어갔을 때는 아이가 장난으로 문을 잠궜다. 꼼짝없이 갇혔는데, 잔뜩 쪼라든 몸뚱아리 한가운데 있는 심장은 더욱 커다랗게 요동쳤다. 아이가 풀어주기까지 1분도 채 안되는 시간에 일어난 그 끔찍한 현상에 나도 놀랐다. 사형장 앞 미루나무는 온갖 통곡들을 끌어안느라 잔뜩 말라버렸다. 컴컴한 사형장 안쪽에서는 지난 100년간 어떤 일들이 일어났던 것일까? 시구문 밖으로 난 통로 끝은 깜깜했다. 

한낮에 들어갔지만 해가 건물너머로 들어갈 때가 되어서야 나왔다. 시간이 부족해 차마 다 보지 못한 사연들은 이제 언제 다시 찾아와 인사할까. 이번 겨울 들어 찾아온 오랜만의 강추위를 뚫고 오길 잘했다. 그러지 않았다면, 이 감옥에 갇힌 북풍한설보다 차가운 원한과 슬픔과 고통을 내 좁은 속이 어찌 알 수 있었을까. 



수많은 사람들이 일제에 빼앗긴 나라와 주권을 되찾겠다고 싸웠다. 항쟁의 역사를 보면, 그리고 해방 후 우리나라 민주화의 역사를 보면, 이 땅의 백성들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끈기와 인내를 갖고 온갖 폭력과 고문을 이겨내며 지금의 나라를 일구었다. 그 처절한 역사를 보면서 난 한 가지 의문이 생겼다. 

"왜 우리나라는 일제에 의해 식민지화 되었을까?"

일제 점령 이후 투쟁의 역사만 보더라도 이 땅의 사람들은 그렇게 쉽게 굴복할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제의 식민지가 되면서 이 땅의 사람들이 그토록 고통을 받고, 그 고통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일까? 

 올해는 삼일운동 및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라고 한다. 나의 질문을 올해의 화두로 끌고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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