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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종일 비가 왔다. 비 오는 소리가 좋아 창을 열었다. 차가운 창살이 창 앞에 가지런히 서있다. 지금 당신의 집 창문은 어떤가. 아마도 당신이 도시 생활을 하고 있다면, 특히 서울에 살고 있다면, 아마도 절반 이상은 쇠창살 창문을 보고 있을 것이다. 열린 창으로 보여야 할 푸르른 하늘이 창살로 쪼개져 있을 거다. 우리는 스스로를 가두고 있다. 가늠되지 않고 보이지 않는 외부의 적을 상정하고 우리를 스스로 속박하고 있다. 스스로 눈을 가리며 살고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근대 역사에서 결코 함께 설 수 없는 이웃이 되어 버린 두 나라. 영화 <레몬트리>는 그 두 나라의 경계에 있는 레몬 농장의 팔레스타인 여인 살마와 그 옆으로 새로 이사온 이스라엘 국방장관 나본과 그의 부인 미라의 이야기다.

 

셀마의 레몬농장 옆으로 이사온 국방장관 때문에 셀마의 농장과 미라의 집 경계에는 철책선이 세워지고, 높다란 초소가 만들어졌으며, 검은 선글라스를 낀 경호원들이 24시간 경호를 서고 있다. 게다가 최첨단 감시시스템이 집을 빙 둘러싸고 있어 팽팽한 긴장감마저 느껴지는 곳이다. 한편 셀마는 그녀의 옆에서 평생 그를 도와온 아버지의 친구와 함께 레몬 농장을 일구고 있다. 셀마에게 레몬농장은 아버지가 물려준 유일한 유산이고 일찍 남편을 여읜 외로운 삶에 깊은 위안이 되는 곳이다.

 

하지만 팔레스타인 장벽을 추진하고 있는 국방장관 나본의 눈에는 레몬농장은 테러리스트가 잠입하기 쉬운 곳에 불과하다. 언제 어디서 총알이 날아오고 수류탄이 던져질지 불안한 장소일 뿐이다. 국방장관 부부가 이사온 며칠 뒤 셀마는 지역사령부 사령관 명의로 레몬농장을 없애야 한다는 통보를 받는다.

 

영화는 이제 법정으로 간다. 이 과정에서 셀마와 변호사 지아드는 서로에게 깊은 감정을 가진다. 하지만 이마저도 아랍 사회인 팔레스타인에서는 결코 용납될 수 없다. 영화는 이스라엘과 싸우는 셀마의 모습 외에도 보수적인 팔레스타인 전통에 고통받는 셀마의 모습도 그려주고 있다.

 

한편 국방장관의 부인 미라는 레몬 농장을 없애야 한다는 결정에 고민한다. 농장을 빼앗길 수밖에 없어 고통받고 있는 셀마의 모습을 보며 미라는 깊은 연민을 느낀다.

 

영화는 셀마와 미라가 마주치는 시선에 오랫동안 머무른다. 셀마가 던지는 원망의 시선과 미라의 연민의 시선은 그렇게 교차하지만 접점을 찾지는 못한다. 고작 기자에게 속마음을 털어놓는 정도였지만, 그것이 기사화되자 곧 취소하는 결정을 내린다.

 

영화는 마지막 반전을 숨기고 있다. 과연 국방장관이 그렇게 지키고자 한 안전은 무엇일까. 그리고 인간의 삶과 영혼을 지키는 것은 무엇일까. 이스라엘 출신의 감독이 그려낸 영화 <레몬트리>는 그에 대해 명쾌한 해답을 던져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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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명 : 레몬 트리 (2008) 
감독 : 에란 리클리스


출연 :
히암 압바스, 알리 슐리만, 로나 리파즈-미셸, 도론 타보리  더보기


개봉정보 :
독일, 프랑스, 이스라엘 | 드라마 | 2008.07.10 | 전체관람가 | 10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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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발 ----------

영화는 재미있다. 베를린영화제에서 관객상을 탈만하다.
현재 광화문 씨네큐브에서 상영중.
마지막 장면에서 새삼 명박산성이 얼마나 웃긴 짓인지 느껴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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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명의 인물들이 등장해 각각 밥딜런의 일생을 보여주었던 영화.

하지만 밥 딜런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이 영화의 행간을 읽기에는
그 속도감을 쫓아가기도 힘들뿐더러,
여러 배우들의 연기들이 각각의 파편화로 인해 난해하기만 할 것이다.
하지만 예술과 예술가가 분리되고,
노래와 가수를 함께 바라보지 않으며,
예술가가 살아야 하는 삶과 시대를 작의적으로 동일시하려는 이들에게
영화는 예술가가 살아야 할 삶의 무게를 진지하게 말해주고 있다.

영화가 모두 끝나고 엔딩자막이 올라오며 흐르는 노래는
어쩌면 시대에 희생당하는 예술가의 좌절을 담은 것처럼
슬프게 슬프게 흘러갔다.

"Knock knock knocking on heaven's door"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I'm not there>,
그 존재감의 상실만큼이나 내 가슴을 두드리는 마지막 음악.

"똑똑, 천국의 문을 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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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우야, 여우야, 뭐하니?

- 밥먹는다.

- 무슨 반찬

- 개구리 반찬

- 살았니? 죽었니?



아마도 누구나 기억하는 전래놀이의 노랫말이다. 여기서 개구리가 살았는지 죽었는지에 따라 놀이는 긴박하게 전개된다. 아무튼 삶과 죽음은 이 놀이에서는 중요한 전환점이다. 인간은 아주 오래전부터 살아있는 음식을 먹지 않는다. 죽은 고기를 먹고 있다.(물론 가끔 '산낙지'도 먹어주고 있다) 불이라는 문명의 매체를 이용해 안전하게(?) 섭취하고 있다. 하지만 주변에서는 육식을 거부하고 채식을 하자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환경운동을 하는 후배는 채식주의자다. 유감스럽게도 그 후배와 술한잔도 못해봐서 채식주의자의 생활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다. 하지만 채식주의자가 살아가야할 이 세상은 보통의 사람보다 몇배는 힘들 것이다. 최소한 집밖에서 돈주고  먹는 음식 중에서 완전 채식을 찾기는 그야말로 하늘의 별따기이니 말이다.


작가 한강의 연작소설집 <채식주의자>를 읽게 된 것은 아무래도 지금의 쇠고기 정국도 한몫했다고 볼 수 있다. 다 읽고 나서 판단한 거지만, 난 한강이라는 소설가를 몰라도 너무 몰랐다. 채식주의와는 실상 그다지 관계가 깊지 않기 때문이다.

이 책에는 상처받은 영혼과 그 영혼에게서 식물적 상상력의 감화를 받지만 세속된 욕망을 추구햇던 예술가, 그리고 식물이 되어 죽음을 기다리는 동생을 바라보는 언니의 이야기이다. 상처와 욕망과 죽음, 세개의 이야기를 이처럼 잘 버무려 내기도 쉽지는 않을 것이다. 너무 과도한 상상을 끌어오지 않았나 싶으면서도 이야기들은 그 안에서 날실과 씨실이 촘촘히 연결되어 있다. 세개의 이야기는 연결되어 있지만 또한 각각의 독립적인 이야기로 잘 안착하고 있다. 하지만 식물적 상상력이 욕망과 어우러지는 두번째 작품 '몽고반점'은 이야기의 전개가 너무 극적이라서 이해하기가 매우 힘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 이야기의 탄탄한 구성과 깔끔한 문체는 막힘없는 독서를 가능케 했다. 이 책은 '채식주의'에 대한 호기심으로 책을 펼쳐들지 않기를 바란다. 잘 스여진 연작 소설, 풍부한 상상력을 이끌어 낼 수 있는 소설로서 충분히 만족할만한 느낌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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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존

<살아있는 미술관>에서는 명화속의 한장면을 셋트장으로 만들었다.

외워야 할 것은 어찌 그리 많았는지, 생각해 보면 미술시간은 가끔 곤혹스러운 일의 연속이었다. 표현의 재미를 느끼기는 커녕 어찌하면 선생님한테 핀잔듣지 않을까 전전긍긍해야 했고, 어쩌다 준비물을 빼먹으면 다른반을 돌아다니면서 준비물 챙기느라 바빴다. 미술감상은 감상이 아니라 암기였고, 표현도 표현이 아니라 공장에서 물건 찍어내는 일과 다를게 없었으니 말이다. 그래, 아주 오래전 일이다. 


그렇게 대학에 다니기 전까지는 미술관 근처도 가지 못했다. 그리고 대학에 들어갔다. 선배가 미술관 가자고 했다. 그리고 찾아간 미술관은 인사동의 학고재 화랑. 당시 강요배 화백의 4.3제주항쟁 그림들을 전시하고 있었다. 그것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러나 대학생활하면서 미술관에 갈 일이 별로 없었다. 그러다가 시청 근처의 직장을 다니면서부터 서울 시립미술관이나 덕수궁내 미술관을 종종 구경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미술감상의 재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요즘 아이들은 얼마나 좋은가. 물론 우리때보다 더 힘든 사교육에 치여 살고 있긴 하지만, 미술관이나 음악회 등 다양한 통로로 문화활동을 접할 수 있으니 말이다.


지난 금요일 <살아있는 미술관>에 다녀왔다. 최첨단 IT기술이 도입된 기술로 마치 사이버체험관에 온듯한 재미를 맛볼 수 있다. 어른들이 보기에는 좀 유치하다 싶을 정도로 아이들 눈높이에 많이 맞추어져 있었다. 아이들과 함께 간다면 무척 재미있어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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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자들은 생활에 지쳐 여행을 떠나지만, 그것이 며칠짜리 레저가 아니라면, 결국 여행이란 삶을 등지고 죽음의 냄새를 맡으러 가는 머나먼 길이다.
- <여행생활자> 유성용 | 갤리온 | 2007.6.1.


책 표지는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여행기’라고 버젓이 내보이고 있다. 쿨(cool)한 것도 지겨워 핫(hot)해 버린 세상에 ‘쓸쓸’이라는 못난 두글자를 내놓은 책이다. 도대체 이 작자는 어떤 여행을 했기에 이런 말을 표제에 내걸었을까.

제목도 생소하기 그지없다. <여행생활자>라니, 낯선 신조어 앞에서 고개만 갸웃거렸다. 책의 마지막 마침표를 핥고 나니 그 쓰디쓴 단어의 맛에 괜히 침울해진다. 여행이 생활이 된 자는 길위에서 죽음을 예고한다. 그것은 외롭고 구차한 삶이다. 생활을 잃어버리고 정처없이 떠돌다가 구천의 어느 하늘 아래에 조용히 숨을 거두어야 하는 삶은 슬프다. 그러니 쓸쓸한가.


여행생활자, 그 낯설고 우울하고 생소함


책의 시작은 여행의 시작처럼 설레임으로 시작된다. 여행자의 발걸음은, 리장의 축제에 어우러진 남녀의 춤처럼 가볍다. 아무도 두려워할 것도 없이 ‘무위(無爲)의 여정을 극진히 제 속에 새기’고 나아가는 일 뿐이 없다. 천장공로, 그러니까 중국의 시천에서 티베트로 이어지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에서는 눈 때문에 발이 묶여 끔찍하게 추운 밤을 지새워야 했다.

티베트에서는 일생동안 지은 죄의 업보를 씻겠다고 수미산 주위를 한바퀴 돌다가 중간에 쓰러지기도 했다. 이 산을 평생동안 여든두번째 돌고 있다는 칠순의 노인네도 만나고, 3개월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돌고 있다는 중년의 사내도 만나고, 오체투지로 산을 돌고 있는 여인네도 만났다. 이들은 이생에, 아니 전생에 무슨 업보가 그리 많아 이리도 많이 산을 돌고 있는 것일까. 여행자의 머릿속은 그저 ‘여행은 언젠가 끝이 날 것’이라는 생각만 맴돌았다고 한다.





인도에서는 이틀동안 버스를 타고 카슈미르 지역을 지나가야 했다. 군사적 긴장이 팽배하고 테러조직 알카에다의 그림자가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곳이다. 그의 여행은 이처럼 무모하기 그지없다. 그것이 세상의 끝이라 하더라도 길이 있다면 가야하는 여행생활자의 운명이기도 하다. 그래도 그 너머에서는 말도 통하지 않는 재봉사와 여러날 동안 깊은 교감을 나누었다. 교감은 이해를 바탕으로 이루어지며 이해는 말로만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지독히 가난한 나라, 불교의 나라, 스리랑카에서는 기원을 배운다. 수백명의 경건한 얼굴들에서 기원의 방법을 배운다. 기원은 자주 되뇌고, 암송하고, 잊지 않으면, 기원이 또한 나를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이다. 여행자는 여기서 무엇을 기원할까. 그 기원은 여행자를 기억해 줄까. 잊지 않을까.


여행, 그것은 제 밖으로 드러나는 길들을 오롯이 걷는 일


네팔에서는 ‘나마스테’, 만나는 이들을 위해 경배하였고, 묵티나르에 올라서 더 이상 길이 없는 길을 만나고야 만다. 나가르코트에서는 반군 게릴라 청년과 만나 지난 여름 불타올랐던 그의 열정, 지금은 차갑게 얼어붙고 있는 열정을 나에게 비춰본다.

인도에서 파키스탄으로 넘어가는 길목에서는 이라크에서 김선일 씨가 납치 피살됐다는 소식을 듣는다. 파키스탄이 어떤 나라던가. 알카에다의 은둔지로 점찍힌 곳이며 그에 못지 않은 보수적인 무슬림들의 분위기가 팽배한 나라 아닌가. 파키스탄에서도 금지된 곳, 아프가니스탄 접경지역까지 일부러 찾아가 거기서 살고 있는 아프가니스탄인들을 만나 삶의 팍팍한 일상을 엿본다. 죽어나가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는 난민촌까지 몰래 찾아들어가는 그 배포는 어디에 있었을까.




그리고 1년 반에 걸친 그의 여행은 끝났다. 그에게 여행은 무엇이었을까. 어쩌면 우리는 지금 생활이라는 삶이라는 여행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낯설고 무섭고 두려울 뿐이니까 말이다. 여행은 곧 ‘나’를 찾아가는 과정이고, ‘생활’을 찾는 과정이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온전히 ‘나’를 잊어야 하며 ‘생활’을 잊어야 한다. ‘알아도 모른척하며 온전히 제 밖에 드러나는 길들을 오롯이 걷는 일이 여행의 근간’이라고 여행자는 말한다.


여행생활자
카테고리 여행/기행
지은이 유성용 (갤리온,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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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블로그의 기업적인 활용을 강조하는 책입니다. 새로운 마켓팅 기법으로 블로그를 적극 활용해야 한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블로그와 기업 마켓팅은 어디에서 접점을 찾고 있을까 한번 볼까요.

먼저 고객과의 직접적인 만남입니다. 블로그는 그 특성상 일대일의 온라인 만남을 쉽게 합니다. 악의 화신 또는 기계(보그)로 불려왔던 마이크로소프트(MS)가 블로그를 하는 직원들의 활약으로 인간의 얼굴을 한 기업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MS직원들과 대중들이 부딪히고 만나는 블로그에서 새로운 기업이미지가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죠. 언론이나 광고를 통해 만난 MS의 또다른 모습에 대중은 관심을 보였으며, 그것이 과거의 MS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새로운 MS의 이미지로 바꾸고 있습니다.

많은 기업들이 언론과의 접촉을 시도하고 인터뷰를 하지만 언론에 제대로 노출되는 것은 쉽지 않죠. 또, 언론은 특성상 기업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편집하며, 심지어는 왜곡하기도 합니다. 이런 면에서 기업블로그는 고객과의 직접적인 소통이 가능한 독자적인 미디어입니다. GM의 밥 러츠는 블로깅을 하는 포천 10대 기업의 중역입니다. 그는 “블로그는 중요하고도 걸러지지 않은 목소리입니다. 이제 우리는 커뮤니케이션의 다이렉트 라인을 가진 거죠.”라고 말했습니다.

블로그는 작은 기업들에도 유리합니다. 영국의 재단사 마혼은 무너져 가던 그의 사업을 블로그로 일으켜 세웠습니다. 그는 자신의 블로그를 열고 자기가 어떻게 옷을 만들고 있으며 어떤 과정을 거쳐 고급 양장이 만들어지는지 소개하는 글을 계속해서 올렸습니다. 점차 그의 블로그가 사람들에게 알려졌고, 현재 그는 뉴욕에서 들어온 주문을 맞추기 위해 바삐 움직이고 있습니다.

블로그는 입소문 마케팅입니다. 온라인으로 유통되는 입소문의 진원지이자 전파자는 대부분 블로거죠. 블로그를 통해 뜨거나 찍히는 것은 이제 흔한 일입니다. 입소문에 매우 민감한 영화업계는 영화가 개봉되기 전부터 홈페이지와 함께 블로그도 개설합니다. 블로거들의 입소문을 유도하기 위해서죠. 물론 이는 때로 독이 되기도 합니다.

유럽의 어느 작은 식당은 블로그를 통해 자신을 소개하고 그곳을 찾는 손님들의 이야기를 올리면서 유명해졌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많은 블로거들이 이 지역을 찾으면 반드시 들리는 명소가 됐죠.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식당이나 숙소들이 블로거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식당가 기행 테마로 유명한 블로거-파찌아빠의 맛집순례의 글에는 게시물이 올라올 때마다 많은 이들이 댓글을 통해 자신의 경험을 덧댑니다. 식당주인이 모르는 사이에 무시무시한 총평이 만들어지는 것이죠.

책의 관점은 일관되게 블로그를 통한 마케팅의 변화를 이야기합니다. 그동안의 마케팅이 매스미디어를 통해 대중을 향한 일방적이고 주입식이었던 데에 반해 블로그 마케팅은 소규모로 이어지는 쌍방향 마케팅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블로그 마케팅은 이제 막 시작단계이며 그 가능성은 풍부하게 열려 있습니다. 누가 먼저 블로그의 특성을 이해하고 이곳을 먼저 선점하느냐는 비즈니스 마케팅의 중요한 포인트가 됐습니다. 블룸버그 마케팅의 설립자인 토비 블룸버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블로깅을 통합 마케팅 계획의 일환으로 두지 않는 기업들은 중요한 기회들을 놓칠 것이고, 경쟁사들이 블로그를 도입하면서 불리한 위치에 놓일 겁니다. 블로그는 조직이 고객에 가까이 가게 하고 고객들이 브랜드에 가까이 가게 하기 하기 때문에 무시할 수 없는 강력한 도구에요. 결론은 목표 오디언스가 블로그를 원하면 블로그를 하는 게 낫다는 거죠.”

미니홈피 1000만명 시대랍니다. 길가는 사람 4명 중 1명은 블로그나 미니홈피를 하고 있습니다. 지금의 이런 트렌드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웹 2.0 시대라고 한다. ‘참여, 나눔을 통해 보다 나은 삶을 실현한다’는 철학이 블로그 마케팅에 담겨 있습니다. 블로그는 이 기본철학에서 시작해 ‘참여와 공유’, ‘집단 지능’, ‘사용자 중심 철학’이 발현되는 공간입니다.

외국에서는 기업블로그의 사례가 많이 나오고 있지만 아직 국내에 제대로 된 기업 블로그는 없습니다. 풍요속의 빈곤이지만, 어쩌면 더 많은 가능성을 내포한 열린 시장일 수도 있습니다. 블로그, 조금만 관심을 가져 보시면 무한한 보물창고가 될 수 있습니다.





블로그 세상을 바꾸다
카테고리 경제/경영
지은이 로버트 스코블 (체온365, 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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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박게 부는 바람, 죽음의 시늠소리도 드러쓸 것이고 갓 태어난 아기의 숨소리도 거쳐 왓슬 것이다. 잠 못 이르는 이 밤, 바람에게 마는 사연을 듣는다.”

-홍영녀님의 ‘가슴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에서-


홍영녀님은 포천에서 혼자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습니다. 칠순에 한글을 배워 주욱 일기를 쓰고 계십니다. 자손들이 팔순 생신 기념으로 일기를 책으로 엮어드렸습니다. 슬하에 6남매를 두었지만, 혼자 사는 것이 편하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한 마디 하시는데, 씩씩하기 그지없습니다.

“자유롭기 위해서는 외로워야 한다.”


 



 


지난 1월25일 정기적으로 받는 메일의 일부였다. 70이 넘어 글을 깨우쳐 매일 쓴 일기가 벌써 8권에 이르는데 그 할머니와 가족의 이야기였다. 80이 넘으신 할머니가 “자유롭기 위해서는 외로워야 한다”고 썼다. 그러기 위해 같이 살자는 자녀들 다 뿌리치고 혼자 포천에서 농사를 짓고 있다. 무엇이 할머니로 하여금 자유를 갈망하게 했을까. 여기저기 검색을 통해서 사람들의 글을 보았다. 책이 보고 싶어졌다.


하지만 책은 구하기 어려웠다. 교보와 영풍, YES24, 인터파크 어디를 뒤져봐도 보이지 않았다. 책은 1995년 11월에 나온 책인데, 모두 절판으로 나왔다. 책이 많이 팔리지도 않고 사람들의 관심도 끌지 않았나보다. 그래서 더더욱 욕심이 갔다.


이제 인터넷 헌책방을 찾아다녔다. 역시 찾기 쉽지 않았다. 결국 실낱같은 기대를 가지고 ‘헌책사랑’의 게시판에 책을 구한다는 글을 띄어보고 기다렸다. 2월1일 메일로 답이 왔다.


안녕하세요

'헌책사랑' 사이트에서 책을 구한다는 내용을 읽고 이메일을 드립니다.

홍영녀 할머니의 <가슴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 책을 제가 갖고 있습니다.

(생략)


정말 연락이 올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너무 기뻤다. 다시 이메일이 오가고 택배비 3000원에 책값 3000원 해서 6000원. 책값이 4500원인데 6000원을 쓰면서도 아깝지 않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오늘 책이 도착했다. 군데군데 형광펜으로 칠한 자욱이 있다. 헌책이 정이 가는 건 사람의 손때가 묻었다는 정감 때문이다. 그렇다고 너무 낡으면 그 정이 떨어지는데, 그리 낡지도 않고 표지도 깨끗하다.


앞쪽의 몇 쪽을 읽어보았는데, 좋다. 일부분을 여기에 옮겨 본다.



 




 

무남이 이야기


무남이는 생으로 죽였다. 에미가 미련해서 죽였다. 우리 시아버지 상 당했을 때는 무남이 난 지 일곱 달 되어서였다. (글줄임) 동생이 장사 치르는데 젖먹일 시간 있겠냐며 우유를 가방에 넣어 주었다. 시댁에 도착하자마자 상제 노릇하랴 일하랴 정신이 없었다.

무남이는 동네 애들이 하루 종일 업고 다녔다. (글줄임) 젖이 퉁퉁 부었어도 먹일 시간이 업었다. 그런데 애들이 무남이가 우니까 우유를 찬물에 타 먹였다. 그게 탈이 났다. 똥질을 계속했다.

시아버님이 돌아가시자 시어머님이 앓아 누우시게 되었다. 그 경황에 자식 병원에 데리고 갈 수도 없었다. 그땐 애를 병원에 데리고 가는 것도 흉이었다. 이번엔 시어머님이 또 한 달만에 돌아가셨다. 초상을 두 번 치르는 동안에 무남이의 설사는 이질로 변했다. 애가 바짝 마르고 눈만 퀭했다. 두 달을 앓았으니 왜 안 그렇겠나. 그제서야 병원에 데리고 가니까 의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늦었다고 했어. 그땐 남의 집에 세들어 살았는데 주인집 여자가 자기 집에서 애 죽이는 것이 싫다고 해서 날만 밝으면 애를 업고 밖으로 나가곤 했지. 옥수수밭 그늘에 애를 뉘여 놓고 죽기를 기다렸다. 그러다 날이 저물면 다시 업고 들어가곤 했지.

지금도 그때 생각을 하면 눈물이 나서……. 애를 업고 밭두렁을 걸어가면 등에서 가르릉가르릉 가느다란 소리가 났어. 그러다 소리가 멈추면 죽은 줄 알고 깜짝 놀라 애를 돌려 안고 ‘무남아!;하고 부르면 힘겹게 눈을 뜨곤 했어. 사흘째 되는 날인가, 풀밭에 애를 뉘여 놓고 들여다 보며 가여워서 ’무남아!‘하고 부르니까 글쎄 그 어린 것 눈가에 눈물이 흐르더라구.

그날 저녁을 못 넘길 것 같아서 시집 올 때 해 온 개끼 치마를 뜯어서 무남이 입힐 수의를 짓는데, 어찌나 눈물이 쏟아지는지 바늘 귀를 꿸 수 없어서 서투른 솜씨로 눈이 붓도록 울면서 옷을 다 지었지.

겨우 숨만 걸린 무남이에게 수의를 갈아 입히니 옷이 너무 커서 어깨가 드러났어. 얇은 천이라서 하얗고 조그만 몸이 다 비쳐 보였어.

그렇게 안고 들여다 보고 있으려니 첫닭 울 때 숨이 넘어갔어. 죽은 무남이를 들여다 보니 속눈썹은 기다랗고, 보드라운 머리칼은 나슬나슬하고, 고사리 같은 자근 손이 에미 가슴을 저며 내는 거 같았어. 나는 이 얘기를 할 때마다 울지 않고 못 배겨.

게다가 그땐 이 에미가 얼마나 독하고 야박스러웠나 몰라. 무남이 싸 안았던 융포대기나 그냥 둘 걸, 물자가 너무 귀한 때라 융포대기를 빼 놨어. 그리고는 헌 치마에 새처럼 말라 깃털 같은 무남이를 쌌지.

즈이 아버지가 주인 여자 깨기 전에 갖다 묻는다고 깜깜한데 안고 나가 묻었어. 어디다 묻었냐고 나중에 물으니까 뒷산 상여집 뒤에 묻었대. 그땐 왜정 때라 부역하듯이 집집마다 일을 나갔는데 나도 나오래서 밥도 굶고 울기만 하다 나갔떠니 하필이면 일하러 가는 곳이 상여집 뒷산이었다.

그곳을 보니까 새로 생긴 듯한 작은 돌무덤이 봉긋하게 있어서 그걸 보고 그냥 그 자리에 까무러쳐서 정신을 잃었었지.

(글줄임)


아가야 가여운 내 아가야

에미 때문에 에미 때문에

아가야 불쌍한 내 아가야


열 손가락에 불 붙여 하늘 향해 빌어 볼까

심장에서 흐른 피로 만리장성 써 볼까

빌어 본들 무엇하리 울어 본들 무엇하리


아가야 아가야

불쌍한 내 아가야


내 사랑하는 아가야

피어나는 국화 꽃이 바람에 줄기째 쓰러졌다고 울지 말아라

겨우내 밟혀 죽어 있던 풀줄기에서

봄비에 돋아나는 파란 새움을 보지 않았니.

돌쩌귀에 눌려 숨도 못 쉬던 씨 한 알이

그 돌을 뚫고 자라 나온 것도 보았지.

뿌리가 있을 동안은 울 까닭이 없다.

생명이 있는 동안은 울 까닭이 없다.


밝은 아침 해가 솟아 오를 때 눈물을 씻고

뜰 앞에 서 있는 꽃줄기를 보아라.

햇빛에 빛나는 꽃잎을 보아라.


아가야, 눈물을 씻어라.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웃어 보아라.

쥐암쥐암 손짓 재롱을 부려 보아라.

옹알옹알 옹알이로 조잘대 보아라.

예쁜 나의 아가야.


우리 아기 피리를 불어주마.

우리 아기 우지 마라

네가 울면 저녁별이 숨는다.


-어려서 죽은 무남이를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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