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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제이 굴드의 『풀하우스』의 주요 내용은 “생명의 역사에서 진보에 대한 오해”이다. 

더이상 과학책에서 나와서는 안되는 그림. 마치 원숭이에서 사람으로 변화되어 온 모습을 진화를 상징하는 것으로 각인시켜서 진화에 대해 잘못된 인식을 심어 준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진화는 단선적인 변화가 아니라 수많은 가지들이 파생되어 온 현재의 모습일 뿐이다. 

1부 ‘플라톤에서 다윈까지 우수성의 확산’에서는 인간 중심적 사고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지금까지 진화론에 대한 잘못된 인식은 인간으로의 진화를 진화의 최종점으로 본다는 것에 있다. 우리 스스로는 인간이 지구의 주인 같고, 심지어 이 지구를 끝장낼 수 있는 무기도 가지고 있으며, 공기도 빛도 전혀 없는 물속 깊은 곳에서부터 아무것도 살지 않을 것 같은 추운 북극점까지 어디에서나 생존이 가능하다는 것 등으로 지구를 대표하는 생물종으로 생각한다. 정말 그럴까? 인간이 지구를 대표하는 생물종에 오를 수 있을까? 굳이 지구를 대표하는 생물종을 뽑는다면 굴드는 박테리아를 꼽을 수 있다고 말한다. 사실 코로나 19로 인해 갈피를 못 잡고 있는 전 지구적 혼란 상황을 보면 결코 바이러스나 박테리아를 무시할 수 없는 일이다. 인간은 지구상에서 가장 '우수한' 생물종이라는 오해. 우리가 가진 그 절대적 신념을 조용히 깨뜨리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과학의 역사에서 일어났던 모든 혁신들은 종류는 다르지만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절대적 확신이라는 인간의 오만을 차례로 뒤엎어 나간 것이다. – 프로이트

 

인간은 복잡성을 띤 생물종이다. 복잡성을 가졌다고 해서 우수하다고 할 수 있을까? 복잡할수록 갑작스런 환경 변화에 취약해질 수밖에 없다. 박테리아는 지구 상에서 가장 많은 종을 가지고 있고, 아주 단순한 구조를 가진 생물종이다. 수많은 지구 생물종이 멸종을 했지만 박테리아는 여전히 가장 많은 개체수를 가지고 온 지구에 퍼져 있다.

2부 ‘죽음과 말 - 변이의 중요성에 대하여’에서 저자는 우리가 보는 흔적이 모든 것을 밝혀주지 못하는 한계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말이 진화된 흔적을 보면 우리가 흔하게 이야기하는 직선적 변화와는 거리가 멀다. 말의 진화는 ‘진화 계통수’로 보았을 때는 풍부한 변화로 점철되어 있다. 점차적 단순적 변화로 보기 어려운 지점이 있다. 저자는 말의 진화를 통해 진화는 모든 종의 변화의 모습을 총체적으로 보는 것이 중요하며 단선적인 변화로 진화를 이해하는 것은 잘못임을 이야기하고 있다. 즉 현재의 일시적 지배력을 종의 우월성이나 영원한 생존 가능성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3부 ‘4할 타자의 딜레마’는 이 책의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챕터이다. 스티븐 제이 굴드는 야구에서 4할 타자가 사라진 현실을 수십 년의 야구 기록을 통계화하고 수치화하고 그래프로 만들어 이유를 설명했다. 결국 야구가 발전함에 따라 4할이라는 견고한 벽은 더욱 견고해졌고, 야구의 신이 만들어 놓은 2할 6푼의 중심점에 선수들이 더욱 집결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고, 지금의 규칙이 그대로 적용되어 계속 간다면 그 중심점이 오른쪽 벽(4할대)에 더 가거나 왼쪽으로 움직이는 변화는 있겠지만, 거의 변화하지 않을 거라 보았다. 

 

 

“최고의 선수들이 오랫동안 같은 규칙으로 경기할 때 그 시스템의 수준은 향상되며, 그것의 향상과 함께 변이 정도는 차츰 줄어들고 전체적으로 평준화된다. (중략) 이는 안정된 규칙 아래에서 승리라는 포상을 놓고 경쟁하는 개체들로 이루어진 시스템 전체의 일반적인 성질이다.”

제한된 조건과 규칙이 분명한 시스템에서는 이런 평준화가 일어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시스템이 안정화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야구 역사 초반에 다양한 변화들이 폭발적으로 일어나고 퍼펙트게임, 4할 타자가 등장할 수 있었던 배경이다. 마찬가지로 지구 역시 생명체의 등장이라는 시점에서는 다양한 변이들이 폭발적으로 일어났다. 그 와중에 지구 환경과 생태가 안정화되고 지구라는 제한된 조건과 자연이 정한 규칙이 안정화되면서 생명의 평준화가 이루어지고 있다. 어떻게 원숭이가 인간이 될 수 있으며 왜 지금은 그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느냐는 우문에 대한 굴드의 재치 있는 현답인 셈이다. 

4부 ‘생명의 역사는 진보가 아니다’는 결국 인간의 종 변화가 최종 목적지가 아니며, 인간의 탄생 역시 예견된 결과가 아니며 우연의 산물임을 말한다. 지구 역사가 다시 45억 년의 생을 다시 굴러간다고 해도 지금의 모습과 같은 인간이 지구 상에 존재할지는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인류가 뛰어난 종의 DNA를 내세워 우주까지 진출한다 할지라도, 설사 우주 밖의 새로운 생명체를 만난다 할지라도 인류가 진화의 결과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 굴드의 주장이다. 

이 책은 ‘진화’라는 단어를 발견한 이후 쌓아온 오해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우주를 통틀어 우리가 가장 진화한(?) 생명체라고 믿거나 우리보다 진화한(?) 생명체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진화를 단선적이고 결과론적으로 보는 시각이다. 인류는 생명체가 다양한 변이를 겪는 과정에서 나타난 우연의 산물임을 알고 우리 스스로 생명에 대한 존중과 겸양을 갖추어야 하며, 독선적인 자기애나 우월감에 빠지는 우를 범해서는 안될 것이다. 

풀하우스 - 10점
스티븐 J. 굴드 지음, 이명희 옮김/사이언스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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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해석 - 6점
말콤 글래드웰 지음, 유강은 옮김, 김경일 감수/김영사
  • 조지 플로이드라는 흑인 청년이 경찰의 강압적인 폭력에 의해 숨졌다. 그를 숨지게 한 경찰 데릭 쇼빈은 살해 혐의로 체포되었으며, 함께 있던 경찰 3명도 해고되었다. 조지 플로이드의 죽음 이후 미국 사회에 대한 인종차별에 분노하는 시위가 미국 각지에서 벌어지고 있다. 이 시위에는 흑인만이 아닌 다양한 인종들이 참가하고 있고, 일부 경찰들도 시위에 대해 지지 의사를 밝히기까지 했다. 
  • 그렇다면 이것은 인종차별 사건으로 분류될까? 그럴 수도 있다. 시위를 하는 사람들은 미국 사회의 인종 차별 문제를 사건의 원인으로 꼽고 있다. 하지만 사건은 그렇게 쉽게 단정지을 수 없는 여러가지 겹겹의 복선들이 있기 마련이다. 그를 제압하던 데릭 쇼빈과 경찰들은 무엇이 두려웠기에 그토록 강압적인 행동으로 그를 죽음으로 몰아 넣었을까?
  • 우리는 모르는 사람을 만났을 때, 다양한 시그널을 받아 상대방을 파악한다. 상대방을 파악할 때의 우리는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경험과 지식을 총동원한다. 그렇게 동원된 정보를 바탕으로 상대방의 외모와 행동, 말투와 표정으로 첫인상을 결정한다. 일단 그렇게 접수된 첫인상으로 상대방을 파악했다고 생각되면 쉽게 그를 이해했다고 생각한다. 첫인상을 가지는 것까지는 모든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일반적인 습성이다. 하지만 상대방을 이해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섣부른 과신이다. 우리가 낯선 이와 만나 대화할 때 간과하는 부분이 이것이다. 
  • 대부분의 경우 내가 만나는 낯선 이는 그동안 내가 보아온 보통의 사람과 같을 거라 생각한다. 상대가 말하는 것에 대해 의심은 할 수 있지만 근거가 없다면 이내 믿어 버린다. 인간 관계에서 거짓보다 신뢰가 더 많은 이익을 주었다는 것은 인류 역사가 지금까지 이어올 수 있는 근거였다. 이를 ‘진실기본값 이론’이라고도 부른다. 그러나 이를 이용한 거짓은 치명적이다. 대학 풋볼팀의 코치가 소아성애자로 밝혀지는 데는 첫 제보 이후 16년의 시간이 걸렸고, 국방부 고위 직원이 쿠바의 스파이였음이 밝혀졌을 때에도 동료 직원과 상사들은 믿겨지지 않는다고 했다. 그 스파이는 십수년간 정부 조직에서 뛰어난 성과를 보이며 활약했다. 
  • 보석을 신청하는 피의자를 직접 만난 판사가 내린 결정이 기록만 입력된 인공지능이 내린 결정보다 나을까? 그렇지 않다. 결과는 인공 지능의 압승이다. 히틀러를 3번이나 직접 만난 영국 총리 체임벌린은 히틀러가 평화를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동거인이 살해되었는데도 슬퍼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아무 증거도 없이 아만다 녹스를 살해범으로 몬 경찰의 사례도 있다. 단지 그가 슬픈 표정을 짓는 것을 보지 못했다는 게 이유가 될 수 있을까? 표정이나 말투가 그 사람을 나타낸다는 믿음은 오래전부터 내려온 우리의 착각이다. 하지만 타인은 투명하지 않다. 

영국 총리였던 네빌 체임벌린은 히틀러를 3번이나 만나 전쟁은 없을 거라고 말했다. 하지만 히틀러는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고 말았다. 

  • 대중의 인기를 한몸에 받은 시인 실비아 플라스는 오븐에 머리를 집어 넣고 가스를 틀어 자살했다. 일산화탄소 중독이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금문교는 유명한 관광지로 유명하지만 인기있는 자살 장소로서도 악명을 떨쳤다. 실비아 플라스는 지독한 우울증을 앓고 있었고, 그가 쓴 시에서는 죽음에 대한 찬양이 곳곳에 나타나 있으며, 실제로 자살이 성공하기 전까지 몇차례에 걸쳐 자살을 시도한 적이 있었다. 그가 오븐을 이용해 자살에 성공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다른 자살을 생각해 냈을 것이라는 추측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하지만 그가 자살했을 때 오븐을 이용한 일산화탄소 중독사는 영국 도처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도시가스가 천연가스로 바뀌면서 오븐에 머리를 넣어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자살하는 사람의 수는 급감했다. 금문교에도 비슷한 조치가 이루어졌다. 여기에 자살 방지 구조물이 생긴 것이다. 이후 이곳에서 자살하는 사람도 급격히 줄어들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줄어든 사람이 다른 곳에서 자살을 시도하고 성공했을까? 자살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자살의 방법이 어려워질수록 자살률은 떨어지기 마련이다. 특정한 행동은 대개 특정한 장소와 연관되어 있다. 
  • 범죄도 이와 비슷하다. 캔자스시티에서 있었던 강력 범죄 소탕 실험이 이를 증명한다. 미국에서 가장 심각한 강력 범죄율을 가진 캔자스시티에서는 다양한 범죄 소탕 실험을 진행했다. 그중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범죄가 가장 많이 발생했던 특정 구역에서 차량 불시 검문을 수시로 실시한 것이다. 그 결과 불법 무기가 다량 압수되었고, 강력 범죄율이 현격히 감소하는 결과가 나타났다. 
  • 캔자스시티의 성공은 곧바로 미국 경찰서 전역에 전파되었다. 곳곳에서 차량 불시 검문이 이루어졌다. 후미등이 깨졌다는 이유로 차를 세웠고, 깜빡이를 켜지 않았다는 이유로 면허증을 확인하는 일이다. 그 와중에 고속도로를 순찰하던 백인 경찰이 깜빡이를 켜지 않은 젊은 아프리카계 여성을 차에서 강제로 끌어내려 체포했고, 해당 여성은 며칠 후 자살에 이르게 된 사건이 일어났다. 
  • 캔자스시티에서 일어났던 실험이 잘못됐던 것일까? 그렇지 않다. 특정한 장소와 맥락을 구별하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진행된 경찰의 관행이 그 여성의 자살이라는 비극을 낳은 것이다. 캔자스시티의 실험 역시 ‘특정한 장소’로 지역을 한정했다. 가장 범죄가 많이 발생하는 지역에서 차량에 대한 불신 검문을 진행해 얻은 성과였다. 하지만 다른 경찰서들은 그렇게 하지 않고 장소라는 ‘맥락’을 무시한 상태에서 불신 검문만 남발했다. 곳곳에서 충돌이 일어났고, 결국 한 여성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던 것이다. 
  • 조지 플로이드의 비극도 잘못된 장소에서 특정한 행위에 대한 대화가 틀어지면서 벌어진 최악의 결과가 아니었을까? 데릭 쇼빈은 굳이 그를 8~9분여를 누르고 있어야 할 이유가 무엇이었으며, 순순히 따르는 것 같았던 조지 플로이드를 갑자기 제압해야 했던 맥락은 무엇이었을까? 
  • 우리는 낯선 이들을 만나야 한다. 사회는 진실기본값이 지배한다. 다만 타인의 태도와 내면을 일치시켜서는 안된다. 쉽게 첫인상으로 판단해 상대를 믿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표정은 얼마든지 꾸밀 수 있으며, 태도는 거짓이 쉽다. 상대를 만나는 상황과 조건을 잘 이해하고 해당 상황에 맞는 맥락의 언어를 구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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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해리포터 시리즈>의 충격적인 대반전은 세베루스 스네이프 교수가 자신이 사랑한 릴리 포터의 아들을 지키기 위해 볼드모트의 부하로 위장해 활동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다. 스네이프 교수의 숭고한 사랑과 헌신적인 희생을 접하면서 스네이프 교수를 미워했던 해리뿐만 아니라 독자들도 심적 충격이 만만치 않았다. <두 도시 이야기>에 대한 글을 쓰면서 왜 해리포터를 이야기를 하는 것일까? 두 책을 모두 본 사람이라면 앞에서 스네이프 교수를 이야기했을 때 <두 도시 이야기> 속의 시드니 칼튼을 생각해 냈을 것이다. 시드니 칼튼도 스네이프 교수처럼 이룰 수 없었던 사랑이지만 사랑했던 사람의 행복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인물이다. 

 

릴리의 죽음에 오열하는 스네이프

 

사람들은 정말 그런 사랑이 있을까에 대해 회의적일 거다. 판타지 이야기 혹은 아이들 동화 속에나 등장할법한 비현실적인 이야기라고 말한다. 대부분은 살면서 그런 사랑을 접해볼 수 없다. 하지만 스네이프의 사랑도, 시드니 칼튼의 사랑도 이야기의 끝에서 그 모습을 드러냈다. 아무도 예상치 못한 곳에서 그들은 사랑을 이어갔고, 이루어냈다. 극악한 볼드모트가 세상의 종말을 만들려는 상황을 막아냈고, 왕과 왕비를 비롯해 모든 귀족들이 단두대에 처형되는 과정에서 대신 사랑하는 이의 소중한 사람을 지켜냈다. 그래서 나는 <해리포터 시리즈>도 읽지 않고, <두 도시 이야기>도 본 적이 없는 사람에 대해 깊은 연민이 몰려온다.

 

<두 도시 이야기> 표지

 

<두 도시 이야기>는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기까지의 암울하면서도 역동적인 파리 빈민들의 모습을 매우 사실적으로 그려냈고, 혁명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인간 군상의 모습도 실감나게 묘사했다. 피에 굶주린 혁명의 종말적 상황에서도 사랑하는 사람을 구하기 위해 치밀하게 계획하고 실행하여 마침내 자신을 희생하는 시드니 칼튼의 모습은 죽은 연인의 아들을 위해 헌신하는 스네이프 교수의 모습처럼 숭고하다.

 

최고의 시대이자 최악의 시대요, 지혜의 시절이자 어리석음의 시절이었으며, 믿음의 세월이자 회의의 세월이요, 빛의 계절이자 어둠의 계절이었고, 희망의 봄이자 절망의 겨울이었다. 우리 앞에는 모든 것이 있으면서 아무것도 없었고, 우리는 모두 곧장 천국을 향해 가고 있으면서 곧장 지옥으로 가고 있었다. 요컨대 그 시대가 현재와 어찌나 닮아 있었던지, 당시의 가장 말 많은 일부 권위자들조차 선과 악, 즉 극단적인 대조만이 허락되는 세상이라고 주장할 정도였다.
- <두 도시 이야기> 첫 문장

 

<두 도시 이야기>의 첫문장은 양 극단이 부딪히는 파국의 시대의 모습을 담았다. 모순과 모순이 부딪히면서 파국을 만들어내고 질서를 만들기 위해 무질서가 용인되는 혁명의 시대였다. 지구 중력이 무색할 정도로 위와 아래가 섞이고 부딪히고 깨지고 흩어졌다.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이며, 어느 것이 선이고 어느 것이 악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던 시대였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던진 시드니 칼튼의 희생은 판도라 상자 속 희망과도 같다. 

‘두 도시’는 각각 런던과 파리라는 소설의 배경을 말하지만 이야기가 품고 있는 사건에서 파악할 수 있는 핵심은 파리라는 도시 안에 있는 두 계급의 갈등이다. 귀족과 왕정이 만든 세상의 반대편에는 굶주림과 핍박에 시달리는 빈민들이 있었다. 귀족들은 빈민의 가난과 굶주림을 외면하고, 그들이 가진 모든 것을 착취했다. 이미 결혼한 여인마저 빼앗기 위해 병든 남편을 혹사시켜 죽이고, 누나를 보호하려는 남동생을 살해하고, 자신의 마차에 치여 아이가 죽었는데도, 죽은 아이의 부모를 욕했다. 가난한 사람들은 아이 낳는 것을 두려워하면서 이 고통이 자신의 대에서 끝나야 한다며 울부짖었지만, 바닥에 흘린 포도주를 머릿수건으로 담아 쥐어짜 아이에게 먹여야 했다. 그럴 때 귀족들은 풍족한 파티와 초콜릿마저 하나씩 떠주는 하인을 따로 둘 정도로 호화로운 생활을 영위했다. 이런 상황에서 빈민들의 분노와 슬픔이 하늘에 닿았다.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외젠 들라크루아, 1830년작, 325 × 260 cm , 루브르 박물관

 

 

모순된 시대에는 모순된 행동이 나온다. 하나의 도시에 살고 있는 두 계급의 모순은 함께 살고 있지만 함께 살 수 없음을 드러냈다. 결국 억압에 시달리던 계급이 폭발하면서 바스티유 감옥이 점령되고, 왕과 왕비를 비롯해 수많은 귀족들이 단두대에 희생되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피의 복수극은 엉뚱한 희생자들에게까지 번졌는데, 혁명에 가담했던 마담 드파르지가 자신의 복수를 위해 한때 귀족이었던 찰스 다네이뿐만 아니라 그의 가족 전체(어린 딸 루시까지)를 죽이기 위한 음모를 꾸민다.

찰스 다네이의 사형이 선고된 후 24시간 동안의 사건들은 다네이와 그 가족들을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시드니 칼튼을 중심으로 매우 긴박하게 흘러갔다. 마침내 찰스 다네이를 구하고 단두대 형장으로 나아가는 시드니 칼튼의 옆에는 억울하게 죽음으로 내몰린 재봉사 소녀가 등장한다. 이 재봉사 소녀의 등장으로 시드니 칼튼은 자신의 죽음을 더욱 담담하게 추슬러 형장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재산도 없고 지위도 없는 가난한 재봉사 소녀가 사형을 선고받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이 혁명이 가진 모순을 여과없이 드러내면서 칼튼의 죽음이 얼마나 숭고한지를 더욱 빛내주는 역할을 했다. 또한 소녀와 함께 칼튼의 죽음이 쓸쓸하지 않을 수 있도록 독자들의 마음까지 세심하게 살핀 뛰어난 인물 배치였다.

 

나는 바사드와 클라이, 드파르주, 방장스, 배심원, 판사 같은 옛 체제의 붕괴 속에 생겨난 새로운 압제자들의 기나긴 서열이 이 보복적인 도구의 사용을 멈추지 않는 지금, 오히려 이 보복적 기구로 인해 저들이 사멸되어 가고 있는 모습을 본다. 이 아름다운 도시와 이 구렁텅이 속에서 떨치고 일어선 현명한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앞으로 이들이 진정한 자유를 위해 싸우며 승리와 패배를 맛보는 가운데, 이 시대와 (혁명을 잉태할 수밖에 없었던) 전 시대의 악행은 스스로 속죄하며 소멸하리라
내게는 보인다. 내가 목숨 바쳐 사랑했지만 다시 볼 수 없을 그들이 영국에서 보람 있게 성공을 누리며 행복하고 평화롭게 살아가는 모습이. 그녀가 내 이름을 딴 아이를 품에 안고 있는 모습을. 나이 들고 구부정해졌어도 다른 부분은 완전히 회복되어 자신의 진료실에서 차별 없이 모든 사람에게 헌신하는 그분의 모습이. 십 년이라는 세월 동안 자신이 가진 모든 것으로 그들을 풍요롭게 해준 그들의 오랜 친구인 한 인자한 노신사가 평안하게 세상을 떠나는 모습이.
나는 알고 있다. 내가 그들, 아니 세대를 지나 그 후손들에게도 마음의 성소가 되리라는 것을. 할머니가 된 그녀가 나를 추도하는 이 날, 나를 위해 우는 모습이 보인다. 그녀와 남편이 이승의 행로를 마치고 지상의 마지막 침대에 나란히 누운 모습이 보인다. 그들이 서로를 존경하는 만큼 나를 존경하리라는 것도 알고 있다.
내게는 보인다. 그녀의 품에 안긴, 내 이름을 딴 아이가 한때 나의 길이기도 했던 인생길을 훌륭히 걸어가는 모습이. 그 아이가 그 길을 훌륭히 걸어 내 이름을 빛내주리라는 것도, 그리하여 내 이름에 묻었던 오점이 지워지리라는 사실도 안다. 지극히 공정한 재판관, 명예로운 사람이 된 그 아이가 역시 내 이름을 딴 사내아이, 내가 잘 아는 이마와 금발을 지닌 그 아이를 이리로 데려와-그때가 되면 이 자리는 지금의 끔찍한 흔적도 사라지고 풍광이 아름다운 곳이 될 것이다-다정하고도 감정에 북받친 목소리로 내 이야기를 들려주리라.
내가 지금 하려는 것은 지금까지 해 온 어떤 행동보다도 훨씬 더 숭고한 일이다. 이제 나는 지금까지 내가 알았던 그 어떤 안식보다도 평안한 안식을 향해 갈 것이다.

- <두 도시 이야기>의 마지막 문단들

 

우리 시대는 프랑스 혁명의 세례를 받아 더 자유롭고 평등한 시대를 살고 있다. 하지만 언제 다시 절망과 어둠이 우리 앞에 나타날지 알 수 없다. 죽음이 삶보다 가벼운 시대가 온다면 사랑은 어떤 모습으로 우리를 위로할까? <두 도시 이야기>는 그런 시대를 살아갈 힘과 이유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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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이의 친구 헤나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클레이에게는 보통 친구가 아니다. 약간의 밀당도 있었다. 어색하지만 키스도 했다. 풋풋한 사랑이라고 여길 수 있는 사이였다. 그런 친구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2017년에 나온 미국의 웹드라마 루머의 루머의 루머(13 Reasons Why)”는 클레이가 헤나의 자살 이유를 찾아가는 미스터리 드라마이다. 테이프에서 헤나가 자신의 죽음의 이유로 언급한 인물들은 헤나의 고등학교 시절을 슬픔과 외로움으로 몰아 넣은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 사람 중에는 주인공 클레이도 포함되었다. 클레이는 헤나의 자살 이유를 하나하나 알아가면서 주변 인물들에 대해 증오와 미움을 드러내면서도 자신이 왜 이 테이프에 언급되는지를 내내 두려워하며 진실을 향해 한발씩 다가간다. 클레이의 신경을 팽팽하게 당기는 그 긴장감이 이 드라마의 핵심이다. 

드라마 속 미국의 고등학교는 우리 고등학교와는 너무나 다르다. 수업 때마다 교실을 옮기고, 과목마다 함께 공부하는 학생이 달라진다. 교실 복도에 가득한 사물함과 거기서 벌어지는 남녀 학생들의 과도한 스킨십 등은 상상하기 어려운 모습이다. 부모가 없는 빈집에서 파티를 열어 술을 마시는 모습도 이질적이다. 미국의 고등학교라는 공간은 우리에게는 너무나 낯설고 공감하기 어려운 곳이다. 자극적인 화면도 많이 등장한다. 자살을 소재로 했지만 마약, 섹스, 폭력(강간 포함)은 이것이 정말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드라마가 맞는지 의심이 든다

이렇게 이질적인데도 불구하고 이야기는 우리를 빠져들게 한다. 공간이나 환경, 소재가 주는 이질감보다는 질풍노도의 청소년 시기에 겪을 수 있는 우정과 고독, 사랑과 미움, 믿음과 배신의 이야기가 통속성을 뛰어넘는 인과관계로 짜임새 있게 엮여 있다. 주요 갈등은 헤나를 둘러싼 인물들 사이의 사건과 그로 인해 퍼지는 오해와 소문이 학생들 사이에서 독버섯처럼 자라는 과정이다. 그리고 그것은 헤나의 깊고 깊은 상처로 이어지고 마침내 헤나는 쓰러진다. 헤나가 이겨내려고 애쓰면서 발버둥치는 모습과, 그런 헤나를 생각하며 때로는 분노하고, 때로는 절망하는 클레이의 모습에서 우리는 함께 감정이입이 된다. 

헤나 베이커. 그는 절망끝에 죽음을 선택하고 그 이유를 녹음으로 남겼다. 

헤나는 전학을 온 이후 적응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 과정에서 클레이를 알게 되었고 둘은 친해진다. 그런데 헤나에 대한 좋지 않은 소문이 퍼지기 시작하고, 헤나 주변의 인물들은 헤나를 멀리하기 시작한다. 극심한 외로움과 존재에 대한 환멸을 느낀 끝에 자신이 자살하는 이유를 테이프로 남기고 자살한다. 드라마는 그 테이프를 클레이가 받고 그가 들으면서 시작한다.

청소년 시기는 민감하다. 성에 대한 관심도 사람에 대한 관심도 높다. 그 둘의 경계가 때로는 모호해지고, 욕망에서 타오르는 충동이 쉽게 자아가 잠식된다. 아이들의 관심과 애정은 소문을 낳고 소문은 다시 재미가 되어 퍼진다. 악의적이지 않은 장난은, 그러나 누군가에게는 치명적이다. 말들이 무성한 세상이다. SNS는 손쉽게 글과 이미지를 생성하고 그것이 퍼져가면서 헛된 이야기를 만들어 내며 돌고돌아 마침내 이야기의 주인공의 가슴을 정면으로 조준해 명중시킨다.

헤나가 느낀 가장 큰 절망감, 세상에서 나라는 존재는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 어떤 사람과도 닿아 있지 않은 떨어진 끈 같은 존재감에서 오는 절망이었다드라마에서 헤나의 죽음은 학교의 방관 혹은 구조적 문제에 대한 논란으로 소송까지 이어진다. 시즌2의 주요 내용은 헤나의 죽음을 놓고 학교와 부모가 벌이는 재판이 주요한 배경이 된다

 

클레이는 헤나가 나긴 테이프에서 헤나의 죽음을 둘러싼 진실을 찾아간다.

 

우리나라는 OECD 자살률 1위의 불명예를 달고 있다. 청소년들의 주관적 행복지수는 OECD에서 가장 낮다. 우리나라 청소년의 첫 번째 자살 이유는 원인은 가정불화-가정문제가 제일 많다. 의외로 성적 문제는 세번째 이유. 우울증과 염세비관이 두 번째를 차지하고 있다. 오른쪽 자료가 2000년대 후반부터 2012년까지의 자살 청소년에 대한 분석이다. 벌써 10년전의 통계인만큼 지금과는 좀 다를 수도 있을 것이다.

청소년 자살 소식은 이제는 흔한 뉴스가 되어 버렸다. 삶의 문제에 있어 죽음을 염두할만큼 우리 아이들은 진지하다. 그러나 돌파구가 없는 캄캄한 암흑의 결투장을 만들어 놓은 건 우리 사회이며 나와 같은 어른들이다. 

'학교 폭력'이라는 말의 법률적 정의는 ""학교폭력"이란 학교 내외에서 학생을 대상으로 발생한 상해, 폭행, 감금, 협박, 약취·유인, 명예훼손·모욕, 공갈, 강요·강제적인 심부름 및 성폭력, 따돌림, 사이버 따돌림, 정보통신망을 이용한 음란·폭력 정보 등에 의하여 신체·정신 또는 재산상의 피해를 수반하는 행위"라고 분명하게 규정되어 있다.

"루머의 루머"시리즈에서도 이와 관련된 내용들이 끊임없이 헤나를 괴롭히고 결국 그를 되돌아올 수 없는 절벽에서 밀어버렸다. 헤나의 죽음을 둘러싼 진실은 아이들 사이에서 논란이 되고, 누군가는 죄책감에 빠져들고 누구는 분노에 사로잡힌다. 한 아이를 죽음으로 몰고 간 행동에 대한 책임을 아이들은 저마다의 삶의 무게로 짊어지고 나아갈 것이다. 

우리는 행동에는 결과가 따라온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무심코 올리는 포스팅 하나도, 누군가의 글에 다는 댓글 하나도 결과는 있다. 타인에 대한 무관심 역시 마땅한 결과를 발생시킨다. 타인을 향한 폭력적인 관심도, 상처받고 있는 타인에 대한 무관심도 언젠가는 우리가 짊어질 책임으로 다가올 것이다. 그때가서 나는 몰랐다고 해도, 그럴 의도가 아니었다고 해도 소용없다. 세상은 내가 살아 있는 한 삶의 존재에 대한 책임을 요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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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을 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물론 장사라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책이라고는 편집일만 해본 내가 책을 사고파는 일을 잘 할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는다. 하지만, 시골에 북카페를 열어 놓고 가게를 찾는 사람들과 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상상하거나, 조용한 카페에서 홀로 차를 마시며 책을 보는 내 모습을 상상하는 일은 일상의 작은 행복이기도 하다. 

물론 실제 북카페나 서점들은 매우 바쁘다. 가게 운영을 위한 최소한의 수입이 필요하다. 게다가 서점 운영은 잠시도 틈을 주어서는 안되는 입출고 관리가 필수이다. 그리고 카페까지 운영하려면 이에 대한 기본 지식과 노하우도 쌓여 있어야 한다. 이렇게 신경써야 할 게 한두가지가 아니다. 따라서 내 머릿속의 여유로운 상상은 그야말로 망상에 불과할 것이다. 

아무튼 가끔 빠지는 망상을 더해줄만한 책으로 고른 게 "오수도 서점 이야기"라는 책이었다. 알라딘에 소개된 책에 대한 내용 중 한 구절은 다음과 같다. 

  • 벚꽃으로 뒤덮인 산골짜기 마을 사쿠라노마치의 작은 서점 오후도. 도시의 오래된 서점을 그만두고 오후도 서점을 찾아온 청년 잇세이. 책과 서점을 둘러싼 기적에 관한 이야기가 따뜻한 봄바람처럼 감동적으로 펼쳐진다.

결론적으로 이 책은 결코 감동적이지 않으며 너무나도 통속적이라서 허허롭기까지 하다. 게다가 재미도 없었다. 사람마다 취향이 다를 수 있지만 이 책은 요 몇년 사이 내가 본 책 중에 제일 재미없는 책으로 꼽고 싶을 정도다. 이 책에 대한 서평을 남겨야 하나 싶을 정도로 회의가 들긴 하지만, 그래도 시간을 들여 읽었으므로 그나마 좋았던 걸 남긴다. 

글이 원고가 되고, 원고가 책이 된 후의 일들, 여기까지는 내가 하는 일에 속한다. 하지만 책이 출판되어 독자에게까지 전해지기까지의 과정도 책을 만드는 일 못지 않게 디테일하면서도 정교한 관심과 사랑이 필요하다. 책은 그래서 저마다의 운명을 타고 나는 것일지도 모른다. 책이 독자에게 읽히기까지의 과정도 그 책이 가진 중요한 운명 중 하나일 것이다. 이 책은 바로 그 후자의 과정에 대한 내용이다. 

책의 이야기는 전형적인 일본 드라마적인 전개를 답습하고 있었다. 책을 보는 내내 교훈적인(?) 일본의 드라마를 보는 듯한데다가 재미도 없었다. 작중의 사람들의 관계가 너무나 작위적인 느낌에다가 전형적인 인물들의 모습은, 결코 동화되기 어려운, 읽으면 읽을수록 인물과 나 사이의 거리가 느껴지면서 객관화가 되어버리는 것이 곤혹스럽기까지 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북카페를 열어보고 싶다는 내 바람도 어쩌면 공허하기 그지 없다는 생각에 이르고 말았다. 이 책이 나에게 준 최대한의 절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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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되는 법(유유, 이옥란)

돌이켜보면 10대에서 20대 초반까지 책을 많이 읽었습니다. 20대 후반부터 책을 좀 덜 읽다가 마흔이 넘어가면서 책을 다시 좀 읽기 시작했죠. 책을 만든다는 저도 그렇게 책을 안, 아니 못 읽었습니다. 세상은 책 읽기 보다 재미있고, 해야 하고, 하고 싶은 일이 많습니다. 책 보다 세상에서 배우는 게 많다고 느껴질 때 책은 그다지 쓸모 없는 도구가 되고 맙니다. 그러다가 좀 겸손해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책을 좀 봅니다. 

이런 사람도 편집자 일을 합니다. 주변 편집자들을 봐도 책 읽는 편집자가 많지 않아 보입니다. 책에 대해 이야기하고, 무슨 책을 읽고 있는지 물어보면 어버버 하거나 말을 돌리거나 예전에 읽은 책 이름을 말합니다. 그만큼 책을 안 읽는 세태죠. 그런데도 편집자가 되고 싶은 사람이 많습니다. 책을 만든다는 일의 가치는 여전히 숭고하게 다가옵니다. 이미 시장에서 가지는 책의 가치는 저평가되고 있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편집자 되는 법"(유유)의 저자(이옥란)는 이런 시장 상황을 다양한 통계자료를 통해 한마디로 정의했습니다. 

"근속 연수 3년, 실무 정년 마흔"

저자는 냉혹한 출판 현실을 최신의 데이터로 설명합니다. 그러면서도 편집자로서 살아온 자신의 경험적 가치를 이야기해주고 있죠. 어차피 이 책을 사서 보는 사람들은 편집일을 하는 현실적 고통과 마주하고 있을테니 말입니다. 실무적인 조언부터 친근하게 다가오는 편집 업무의 에피소드까지, 초보 편집자라면, 편집 업무에 마음을 두는 이라면 읽어볼 만하다고 전 생각합니다. 

이제 저는 그가 말한 실무 정년 마흔을 넘겼습니다. 교과서 편집의 업무 특성 때문인지 기획자가 아닌 교과 편집 실무자로 여전히 활동하고 있습니다. 어느 정도 책이 나오기 위한 합리적 절차나 형식, 방법 등에 대해서는 감각적으로 따라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시장에서 성공할 수 있는 교과서를 만드는 일에는 확신을 갖지 못하고 있습니다(아마도 모든 편집자가 대부분 그러하겠지요). 성실, 인내, 끈기+체력만 믿고 책을 만드는 일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알면서도 막상 책에 대한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가면 누구보다 야근과 철야에 시달리면서 일하고는 합니다. 그래서 전 아직도 책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편집자, 편집 관련 책을 들여다보곤 합니다. 세상이 변해도 편집자들은 비슷해 보입니다. 생각도 고민도... 그래서 이 책이 마흔을 넘긴 저같은 편집자에게도 위안으로 다가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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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먹으면 취향이 변하는 게 맞나 봐. 난 원래 운동하는 거 질색했는데."
우리 팀 부동의 주전 풀백이 무심코 던진 이 말에 모두들 앞다투어 공감을 표했다. 이건 취향의 변화 정도가 아니라 유전자 변이 아니냐는 근본 없는 병리적 의심까지 제기됐다. 체육 시간이면 양호실 갈 궁리나 했었다는 사람들이 가만있어도 땀이 줄줄 흐르는 8월의 뙤약볕 아래로 스스로 기어 나와 이러저리 뛰어다니며 공을 차고 있으니 그럴 만도 했다.
-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 프롤로그 중에서


복잡한 대중교통 안에서 낑겨서 가다보면 이북리더기도 들기가 어려울 때가 많다. 그럴 때는 종종 소리로 듣는다. 주로 가벼운 소설이나 에세이가 좋다. 이북리더기에 내재된 기계음(제법 사람 목소리가 나온다)도 익숙해졌다. 그런데 마침 좋은 오디오북이 나왔다.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인데, 많은 분들이 추천해 주셨던 책인데, 아직 초반인데 재밌다. 목소리 고운 여성 성우가 읽어주는데 듣기가 좋다.

체육 교과서 편찬일을 하다보면 여학생을 위한 내용을 배려해야 한다. 체육 교과만큼 여학생 장애인 등이 참여하기 어려운 교과는 없다. 내용만이 아니라 삽화나 사진 등 이미지에서도 이들을 고려하는 편집이 필요하다. 특이 여학생 체육에 대한 사회적 관심은 매우 높다. 주요 신문사와 방송에서도 여학생 체육을 특별 기획으로 다루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학교 체육에서 여학생이 차지하는 위치는 약간 소외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의식 있는 체육 교사들도 여학생을 체육에 참여시키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찾고 있지만 쉽지 않은 게 현실이다. 그나마 여학생들이 표현활동(춤과 관련한 내용)이나 동작 도전에 많은 관심을 가지는 경우가 많아서 그와 관련한 시간을 많이 할애해 주는 게 일반적인 모습이다. 많은 여학생들이 체육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경쟁 활동(축구, 농구, 배드민턴, 탁구, 야구 등등)과 도전 활동(기록, 투기 스포츠 등)에서는 관심을 끊어버리는 경우가 많다.

최근 나이키 광고를 보면 꾸미지 않고 도전하는 여자들의 스포츠 모습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스포츠에 대한 여성들의 관심이 높아지는 틈새를 파고드는 전략이다. 그러면서 젠더 의식을 부각하고 차별적 성문화에 반기를 드는 듯한 이미지를 제품에 심어줌으로써 제품을 사용하는 이들에게 문화적 우월감을 갖게 만들어 주고 있다.


그만큼 여성의 스포츠 참여는 이제 이 시대의 중요한 문화적 흐름이 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 면에서 이 책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는 우리의 현실을 되돌아보게 하고, 우리가 갖고 있는 의식의 장벽과 그것을 뛰어넘기 위한 도전들이 이 사회에서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를 아주 잘 보여주고 있다.

미투 운동과 함께 불붙은 여성 운동이 비분강개형 투쟁으로 나아가는 것도 어느정도 필요하지만, 여성들의 우아하고 호쾌한 축구 모임을 살펴보면서 그들과 더 가까워질 수 있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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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계단 - 10점
다카노 가즈아키 지음/황금가지





남을 죽이면 사형이 된다는 것 정도는 초등학생들도 알고 있잖나.  ···· 중요한 건 그 부분이야. 죄의 내용과 그에 대한 벌은 사전에 모든 사람에게 알려진 상태야. 그런데 사형당하는 놈들이란, 잡히면 사형이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굳이 저지른 일행들이야. 이해가 되나. 이 뜻이? 그러니까 놈들은 누군가를 죽인 단계에서 스스로를 사형대로 몰아넣는 거야. 잡히고 울고 불고 해 봤자, 이미 늦어.

  • 난고가 준이치에게 하는 말



세상에는 여전히 나쁜 놈들이 많다. 그들은 사람들 틈에서, 혹은 깊숙한 골방에 숨어서 누군가의 빈틈을 찾기 위해 냄새를 맡고 다닌다. 게 중에는 다른 이의 생명을 빼앗아 자신의 즐거움을 충족하려는, 인간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는 죄를 저지르는 사람도 있다.


대표적인 연쇄 살인마 유영철은 2003년 9월부터 2004년 7월까지 단 10개월만에 20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그가 주로 살해한 사람은 노인이거나 출장 마사지 여성이었다. 마포의 한 오피스텔에서 출장을 오는 여성 마사지사를 상대로 성폭행을 한 후 하나님을 믿느냐고 묻고 그 대답에 따라 살해하거나 살려주는 등 괴기스럽기까지 한 행동을 보이기까지 했다. 대법원은 2009년 6월 9일 그에게 사형을 확정 판결하였다.


연쇄 살인마와 함께 용서받을 수 없는 극악한 범죄는 어린이에 대한 범죄이다. 2007년 성탄절, 예수의 축복과는 거리가 먼 사건이 일어났다. 경기도 안양시에 사는 초등학교 4학년 이혜진 양과 초등학교 2학년 우예슬 양이 동시에 납치되어 살해된 것이다. 범인은 당시 38세 정성현이었다. 그는 두 어린이를 납치, 성폭행 후 살해하였고, 시신을 훼손하여 땅에 묻거나 강에 버렸다. 대법원은 2009년 2월 26일 사형 판결을 확정했다.



죽어 마땅한 일이다. 극악한 범죄를 저질렀으면서도 버젓이 살아서 맨정신으로 밥을 먹고 똥을 싸고 있다고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치가 떨린다. 그들이 같은 하늘 아래에서 우리 가족과 같은 공기를 마시고 산다고 생각하니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그들은 사형 판결을 받았지만 여전히 감옥에서 생을 이어가고 있다.



만약 자기 자식이 살해당하기라도 한다면, 그리고 범인이 눈앞에 있었다면 난고는 상대에게 똑같이 갚아 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사적인 보복을 인정하면 사회는 완전한 무질서 상태가 된다. 국가라는 제삼자가 형벌권을 발동시켜 대신 해 줘야 한다. 인간의 마음에 복수심이 있고, 그 복수심이 이 세상을 떠난 타인에 대한 애정이며, 그리고 법이라는 것이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한 사형을 포함한 응보형 사상은 용인되지 않을까.



국가가 형벌권을 가지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또 임의적으로 행해지던 형벌에서 명문화된 법률에 의한 형벌을 내리게 된 것 역시 인류 전체 역사를 본다면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이른바 ‘문명 국가’에서 범죄 피의자에 대해 사적으로 고문하거나 처벌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사적 보복이 초래할 상황, 복수가 복수를 낳는 악순환의 고리를 경험해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국가가 범죄의 유무를 가리고, 범죄자를 격리하고 처벌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국가는 범죄를 막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사전에 예방하기 위해서도 노력해야 하지만, 사후에 피해를 복구하고, 피의자를 처벌하는 일에서도 세심한 신경을 써야 한다. 하나의 범죄가 발생했을 때, 국가는 세 가지 역할을 이행해야 한다. 첫째 범죄 피의자를 찾아내서 범죄 유무 및 처벌의 수준을 가리는 일이다. 보통 사법의 영역이다. 둘째, 피해자에 대한 피해 복구 및 지원이다. 이는 주로 행정의 영역이다. 마지막으로 범죄자를 사회로부터 격리하고 처벌을 하는 것이다. 역시 행정의 영역이며, 특별히 이를 교도 행정이라고 한다. 이 세가지 국가의 역할이 사적 보복을 막고, 또다른 범죄 가능성을 예방하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런데, 또 하나의 새로운 변수가 등장했다. 그것은 언론이다.


보도의 자유랍시고 폼잡고 다니는 사람들이 범인과 마찬가지로 저희를 습격했어요. 물론 의료비는 본인 부담이었죠. 머리를 다친 범인은 국가가 치료비를 대 주고 수술도 받았는데. 흉악범죄의 피해자가 되는 순간, 사회 전체가 가해자로 돌변합니다. 그리고 아무리 피해자를 괴롭힌들 사죄하는 사람도 없고, 책임지는 사람도 없어요. 결국 유족 입장에서는 모든 잘못을 범인에게 돌릴 수밖에 없어요.
- 범죄자에게 부모가 무참히 살해된 요시에의 말


유영철을 비롯해 최근까지 흉악하고 무자비한 범죄는 여전히 언론의 주요 관심사다. 언론을 통해 전달된 사건은 인터넷을 통해 더 확대 재생산되며 언론에 드러나지 않았던 자세한 내용까지 낱낱이 드러낼 때도 있다. 사람들은 이를 통해 피해자의 공포, 분노, 슬픔을 공감하는 바도 있겠지만, 그건 그때뿐이다. 오히려 언론들의 무차별적인 언론 보도와 취재활동이 오히려 피해자들을 괴롭히는 경우가 더 많다. 그러다보니 범죄 보도들이 피해자를 보호한다기 보다 많은 사람들의 복수심만 자극하게 된다.


범죄를 막기 위해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 여기에 국가의 형벌권과 관련한 두 가지 논쟁이 오랫동안 있었다. 더 무거운 형벌을 통해 범죄를 예방하자는 주장과 반대로 무거운 형벌이 오히려 범죄를 더욱 극악하게 만들고 예방 효과도 나타나지 않으므로 교화에 더 집중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실제 입법의 과정에서는 여러 특별법들이 만들어지면서 중형을 요구하고 있지만 재판의 과정에서는 선처의 기회를 주기 위해 가벼운 형벌이 내려지는 경우가 많다. 응보와 교화가 교묘하게 뒤섞이는 과정이다.


주인공 ‘난고’의 말대로 사형을 저지를만한 놈들이 따로 있을 수 있다. 하지만 형벌제도 자체는 인간이 만든 불안전한 제도의 하나일 수밖에 없다. 빈틈이 있고 허술한 구석이 나타나기 마련이며 그 틈으로 벌레들은 빠져나간다. 아무리 사회가 촘촘하게 구성되어 있어도 인간이 만든 제도의 불안정함과 인간의 영악함은 공존하기 마련이다.


그러한 일련의 관찰에서 난고가 얻은 결론은 사형수가 죄를 참회했다 해도, 이는 사형 판결을 받았기에 일어나는 결과라는 것이었다. 즉 응보형 사상이 지지하는 사형 판결에 의해 목적형 사상의 목표인 회오의 정(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뉘우침)을 유인해 냈다는 공교로운 현상 말이다.

그리고 지금 160번의 종교적 지도에 관한 내용을 접하며 난고는 또 하나의 얄궂은 감개를 느꼈다. 종교 지도에서 보이는 태도는 사형 확정수의 심적 안정을 측정하는 기준이며, 이는 형 집행시기의 결정 요인이 된다. 종교 지도자의 가르침에 따라 마음의 안식을 얻은 자일수록 빨리 처형당하고 마는 것이다.

  • 난고의 회상



인간 사회의 불안정함과 영악한 인간들의 비열한 시도들이 우리의 사법 제도를 흔들고 있다. 사형제는 그 논란의 핵심이다. 소설 “13계단”에서는 사형의 집행 과정에서 평범한 교도관들이 실행해야 하는 사형 집행에 관한 일을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그 행위가 그들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해 난고와 같은 교도관을 통해 전달해 주었다. 사형제라는 것은 살아 있는 한 사람의 목숨을 의도적으로 앗아가는 행위이다. 즉 엄밀히 말해 ‘살인’인 것이다.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절대로 행할 수 없는 일을 교도관들은 국가의 명령에 따라 행해야 한다. 주인공 ‘난고’ 역시 교도관 시절 2명의 사형 집행 과정에 직접 참여하면서, 그 후유증으로 가정이 위기로 내몰리고 말았다. 사형제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실질적인 사회 이익이 분명하지 않은 가운데, 사형을 집행하는 과정에서 누군가는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어야 한다.


영화 <집행자>의 한 장면


지금도 세계 어딘가에서는 돌을 던져서 죽이는 투석형, 사람의 목을 베는 참수형이 존재한다. 얼마전 북한에서는 총살형을 집행했다고 한다. 우리는 투석, 참수에 대한 말을 들으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라는 생각을 할 것이다. 북한의 총살형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주위에서 그런 반응은 어렵지 않았다. 물론 북한 정권에 대한 반감이 더 커서 그런 것도 이유지만, 사형을 집행하는 과정에서 누군가는 사람을 죽이는 일에 참여해야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여전히 살아 있는 사형수 유영철과 정성현의 사형을 집행한다고 하면, 그것이 참수이든, 투석이든, 총살이든, 교수형이든간에, 거기에는 어느 누군가가 직접 사람을 죽여야 하는 것이다.


1996년 헌법재판소는 사형제도의 위헌 심판 소송을 기각했다. 필요하다는 판결이다. 하지만 재판관 2명이 소수 의견으로 위헌 의견을 냈다. 재판관 김진우는 “사형제도는 나아가 양심에 반하여 법규정에 의하여 사형을 언도해야 하는 법관은 물론, 또 그 양심에 반하여 직무상 어쩔 수 없이 사형의 집행에 관여하는 자들의 양심의 자유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침해하는 비인간적인 형벌제도”라고 밝혔다. 결국 인간 같지도 않은 인간을 처벌하기 위해 우리는 선량한 인간(교도관은 성실하게 공부하고 깨끗하게 살아온 사람만이 될 수 있다)을 희생시켜야 하는 것일까.  


"너나 나나 종신형이다."

편지를 다 읽고 난 난고는 중얼거렸다.

"가석방은 없다."


다시 악의 평범성을 생각해 본다. 유영철을 인간이 아니라고 단정짓는 것은 아주 쉽게 우리 사회의 치부의 한쪽을 가리려는 것에 불과하다. 살인마 역시 그렇게 태어나는 게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는 분명 죽어 마땅한 짓을 했다. 우리는 사형제를 통해 그를 이 사회에서 사라지게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행한 일들과 우리 사회가 안아야 했던 상처들이 쉽게 지워질까. 정의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불의(사형제)의 모순을 우리는 언제까지 떠안아야 할까. 과연 그것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실익은 얼마나 될까. 소설 “13계단”의 난고가 가져야 했던 평생의 고통을 우리는 언제까지 외면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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