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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 하세요?”

상대방을 알고자 할 때 가장 쉽게 던지는 말이다. 그 사람이 하는 일이 그 사람을 말해 준다는 오래된 관념이 투영되어 있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때로는 편견을 담는 말이다.

“편집자에요. 책 만드는 일을 하죠.”


내 설명은 그것으로 끝이다. 그럼 상대방은 여러 가지 상상을 할 것이다. 상대방의 지인 중에 편집자가 있다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좀 절망스럽다. 세상의 모든 작가들이 어떻게 편집자를 묘사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라. 작가가 받는 스트레스의 근원은 보통 편집자 혹은 편집장의 마감 독촉이다. 마감 독촉을 하는 편집자의 모습을 작가들은 사악하고 이기적인 모습으로 그리고 있다. 마감 원고를 받기 위해서는 옆에서 밤새도록 방문앞을 지키는 것도 마다하지 않을 독종들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의 <천사의 게임>에 나오는 코렐리라는 편집자는 작가의 영혼마저 담보로 잡고 있지 않나.


사실 편집자야 말로 음지에서 양지를 지향하는 사람들이다. 예전 교과서 편집자들에게 오가는 속설 중에 이런 말이 있다. ‘편집자가 교과서에 나오면 그 책은 심사에서 떨어진다.’ 물론 지금은 편집자의 이름도 버젓이 박혀서 교과서가 나오고 있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편집자들은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꺼려했다.


한 권의 책이 나오기 위해서는 기획, 집필, 디자인, 조판, 교정, 제판, 인쇄, 제본 등등의 과정을 거친다. 이 과정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들이 책을 만드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만, 정작 자기가 만드는 책이 어떤 책인지 속속들이 알고 있는 사람은 저자도 아니고 바로 편집자다. 편집자는 저 모든 과정에 개입해서 일일이 조정하고 합의하며 때로는 피터지게 싸우면서 한권의 책을 독자에게 선사하는 것이다. 훌륭한 오케스트라 연주를 위해서 지휘자가 필요하고, 대중을 사로잡는 영화를 만들려면 뛰어난 영화감독이 필요하듯이, 역사에 길이 남을 책이 세상에 나오는 데는 편집자의 역할이 매우 중요한 것이다.


이 책 <편집자란 무엇인가>는 편집자에 대한 모든 것을 담고 있다. 이 책은 책에 관심이 있는 사람-편집자, 저자, 북디자이너, 인쇄공-이라면 반드시 읽어볼 많은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좋은 책을 만들기 위해 어떤 노력과 과정이 필요하며, 어느 과정에서는 무엇에 세심하고 이런저런 치명적인 실수에 유의해야 하는지 일목요연하게 잘 설명하고 있다. 무엇보다 이 책이 나에게 준 감명은 사명감과 자부심이다. 



미국의 대표적인 출판사 가운데 하나인 사이먼 앤드 슈스터사에서 41년 동안 편집자로 일한 집시 다 실바는 기고문 <편집자와 저자>에서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며 이렇게 고백한다. "편집자는 대부분 알려지지 않는다. 우리는 글, 창조적 아이디어, 책을 사랑하기에 이 일에 매진할 뿐, 우리가 주목받길 기대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의 공헌을 깊게 이해한 저자가 머리말이나 감사의 글에서 우리의 이름을 언급하고자 하면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허락할 뿐이다. 우리는 편집자라는 직업이 최선의 책을 위해 묵묵히, 무명으로 공헌하는 직업임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이로 인해 우리 스스로를 하찮게 여기지 않는다."



나는 사폰이 그의 책 <바람의 그림자>에서 이야기했듯이, 모든 책은 영혼을 가지고 있다는 말을 믿는다. 한 권의 책은 수많은 밤을 새우면서 글자 하나하나 눈에 박아 넣었을 편집자들의 피와 땀을 머금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영혼이 더욱 깊어질수록 이 세상은 더 풍요로워질 수 있는 것이다.


올해로 책 만드는 일을 한지 횟수로 10년을 채웠다. 그동안 내 손을 거쳐간 책들이 지금 이 시간에도 이땅 어디에서 누군가에게 읽히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의 영혼과 내 영혼이 그 책에서 만나고 있는 것이다. 편집자라는 직업을 결코 버릴 수 없는 매력이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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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지금이 집을 살 마지막 기회일까?


어제(12일) PD수첩의 제목은 ‘2010년 부동산 경제, 아파트의 그늘’이었다. 확실히 부동산, 특히 아파트 경기는 죽어가고 있다. 단순히 겨울철이라는 계절적 요인만 있는 건 아니다. 연일 경제가 좋아지고 있다고 하지만 부동산은 이미 거품이 잔뜩 끼어 있었던 터라 결코 다시 뛰지는 못할 것이다. 이렇게 미분양이 속출하고 분양가 이하에 나온 매물들이 쏟아져 나오는 요즘이 내집 마련 절호의 찬스라고 부추기는 언론들이 있다. 과연 그럴까? ‘정말 지금이 집을 살 마지막 기회일까?’ 여기에 대해 이 책 <위험한 경제학>은 “아니오!”라고 단호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선대인 씨가 쓴 '위험한 경제학'은 집을 사기 전에 사실 관계부터 바로 보자고 한다.


언론에 나온 보도와 다른 실제 부동산 경기의 흐름을 제대로 파악하라는 것이다. 저자는 최근의 아파트 가격의 흐름을 보여주고, 언론에서 이야기하는 ‘실거래가’라는 것은 실상 ‘호가’에 불과하며 거래량이 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실제 최고점이었던 2006년에 비하면 턱없이 낮은 수준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즉 거래량이 극히 떨어져 있는 상태-부동산 침체는 지속되고 있다.


저자는 그래서 ‘부동산 시장, 큰 그림을 보라’고 충고한다.


대부분 부동산이라는 아이템에 눈이 멀어 한국의 거시 경제의 흐름, 세계 경제의 흐름을 놓치고 있다. 한국은 인구 감소 시대, 저성장 시대로 이행할 가능성이 높다. 이런 흐름이 2010년대부터 본격화할 전망이다. 지금 잔뜩 껴 있는 거품이 꺼져야 정상적인 부동산 거래 시장이 확보될 수 있다. 아직 거품이 꺼지지 않고 있는 이유는 이명박 정부의 비정상적인 부동산 정책에 기대어 간신히 버티고 있을 뿐이라는 게 저자의 지적이다.


현재 투기성 주택 시장의 한 축을 이루고 있는 강남 재건축 집값 역시 재급락 가능성이 높은 이유는 PD수첩에서도 제시되었지만 강남아파트를 가지고 있는 많은 이들이 엄청난 은행빚을 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 은행빚에 따른 이자지급액만큼 아파트 값이 올라주지 않는다면, 결국 꾸준히 자산 가치를 까먹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부동산, 막차에 올라타지 말라’고 강조한다. 저자가 제시한 사례 하나를 보면 집에 대한 허망한 꿈을 접을 수 있지 않을까?


“A라는 사람이 자기 돈 3억 원과 은행에서 빌린 돈 2억 원으로 5억 원짜리 집을 샀다. 물가 상승률이 4%, 은행 대출 이율이 6%라고 할 때 A가 3년 후 각종 기회비용을 만회하고도 차익을 얻을 수 있는 집값은 얼마나 될까? 물가 상승률을 감안할 때 A의 자기 돈 3억 원이 같은 가치를 유지하려면 3억 3750만 원이 돼야 한다. 또한 대출액 2억 원의 연간 이자는 1200만원이므로 3년간 이자는 3600만 원이다. 이 두 가지만 해도 7350만원이다. 이 밖에 부동산 거래에 따르는 취등록세와 재산세, 부동산 중개 수수료, 이사 비용 등을 감안한다면 각종 기회비용은 1억 원에 육박한다. 이는 현재 5억 원짜리 집이 3년 후 6억 원으로 올라야 겨우 본전이라는 뜻이다. 현재 집값 수준에 비해 20%가량 오르는 것을 의미하는데, 현재 주택 시장의 사정상 20%가량 오를 수 있을까?”


연일 뉴스에서 쏟아져 나오고 있는 ‘미분양 사태’. 이 사태는 얼마나 갈까? 저자는 ‘미분양 물양 해소에 최소 4~5년 걸린다’고 한다. 1995년 공식적으로 15만여 호를 넘어선 미분양 물량이 해소되는 데에 최소한 4~5년이 걸렸으며, 지금 16만호가 넘는 미분양 물량이 해소되는 데에는 경기 흐름이나 사회 흐름을 봤을 때 더 걸리면 더 걸렸지 결코 짧게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특히 요새 ‘집 장만하려면 대출은 기본이라는 말’이 있는가 하면 ‘빚 없이 사는 게 행복’이라는 말처럼 대출과 빚이 일반 서민들에게도 일상적인 말처럼 다가오고 있다. 온갖 매체에서 수시로 돈을 빌려주겠다는 광고가 판을 치는 세상이니 빚이 없이 사는 게 행복이라는 말도 결코 우습지 않게 들리는 것이다.


저자가 밝힌 또 하나의 진실은 언론과 건설업자의 유착관계다. 지금 당장 TV를 켜보자. 아마 지상파 방송의 광고 중 아파트 광고가 얼마나 되는가 찬찬히 살펴보면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가장 비싼 광고인 TV광고가 이정도인데, 광고에 수익을 의지하는 신문들의 이해관계는 얼마나 될지는 어린애들도 짐작할 수 있다. 이러다 보니 언론을 통해 ‘아파트 가격부터 조작되고 있다’. 언론에 오르내리는 아파트 가격은 실거래가가 아닌 호가인 경우가 대부분이며 이 역시 아파트 부녀회를 거쳐 만들어진 가격일 뿐이라는 것이다. 언론은 이를 알면서도 팩트라며 아파트 가격을 올리고 있다. 왜냐하면 아파트가 죽으면 광고가 죽는 것이고, 광고가 죽으면 언론 특히 거대 신문사들이 막대한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 게다가 정부 인사에서 드러나듯이 해당 언론사 임원들의 부동산 투기 이력도 만만치 않을 것이며, 부동산에 이해관계가 있는 만큼 부동산 가격을 부추기기 위해 혈안이 될 수밖에 없다. 이러다 보니 사실보도는 버려진지 오래고, 기자 정신은 찾아볼 수 없으며, 사주의 딸랑이들로 전락한 조중동 기자들이 아파트 투기를 부추기는 신문 기사를 쓰지 않는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줄기차게 “집을 사라”고 주문하는 신문들의 기사를 아직도 신뢰하고 있다면 당신은 바보다.


사람들과 이야기하다보면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와 다르다”, “우리나라는 일본(혹은 미국)과 다르다. 집에 대한 애착이 남다르다” “우리 지역은 다른 지역과 다르다” 등의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심리적 기저에 대한 영향을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 심리 역시 경제 흐름에 의해 흔들리는 면이 크다. 또 심리는 어떻게 만들어지고 생성되었는지 잘 살펴보면 그 역시 언론에 의해 생산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즉, 언론에 의해 만들어진만큼 언론에 의해 조작될 수 있는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 ‘심리’를 말하는 것 역시 부동산 투기를 부추기는 말을 퍼뜨리려는 거대 신문사들의 주장에서 비롯되었으며 합당한 논리를 찾아볼 수 없는 꾸며낸 거짓일 뿐이다.


무엇보다 우리의 불행은 이명박 정부로 귀결된다. 이러한 사태의 책임이 그들에게 있는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이 사태를 해결해야 할 책임을 방관, 아니 오히려 악화시키고 있는 지금의 정부를 보고 있으면 절망스럽기만 하다.


하지만 내집에서 살고 싶은 소박한 꿈을 '부동산 재테크'로 바꾸었던 우리의 탐욕에 문제가 있던 것은 아닐까? 집을 ‘사는 곳’이 아닌 ‘사는 것’으로 여기고 있는 우리의 마음속 깊은 곳의 욕심이 부른 화가 아닐까?



** 본문에서 볼드(굵은 글씨)로 처리된 부분은 책의 제목에서 따온 것입니다.



위험한 경제학 - 8점
선대인 지음/더난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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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 - 10점
C. 더글러스 러미스 지음, 이반.김종철 옮김/녹색평론사




언젠가 우리는 모두 생활(수준)의 기준이 아니라 삶의 기준으로, 부(가진 것)의 척도가 아니라 나눔의 척도로, 표면적인 위대함이 아니라 내면적인 선함으로 평가될 것이다. -윌리엄 아서 워드

누군가가 그랬다, 성장은 본능이라고. 그렇다.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은 성장한다. 그러나 그 성장의 끝에는 반드시 소멸이 있다. 생성, 성장, 소멸 이 세 가지는 불변의 진리다. 이 책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는 그 중 성장과 소멸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경제신문의 한편에서는 오르내리는 환율과 주가와 함께 경제성장률이 어떻게 바뀔지 시시각각 전달한다. 도대체 경제성장률을 어떻게 계산하는지 알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일 같이 지면에 오르고 있는 경제성장률 수치는 마치 성장하지 않으면 곧 죽음이라는 마법의 주문 같이 사람을 현혹하고 있다.

그러나 정반대다. 빠른 성장은 오히려 소멸의 시간을 더 빨리 재촉하고 있을 뿐이다. 많은 학자들이 지구 환경의 위기를 이야기하면서 지금 당장 자원의 소비를 줄이고, 환경과 생태를 고려한 정책을 실시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현실적인 문제’를 들어 그런 경고를 일축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지구환경은 이미 재앙의 혼돈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 세계적인 경제위기가 두 번 다시는 안 일어날 거라는 확신을 아무도 할 수 없는 현실이 무엇을 말하는가를 곰곰이 생각해 본다면 경제성장에 대한 환상은 이제 접어도 되지 않을까. 문제는 성장의 수치가 아니라 성장의 질임을 다시 한 번 되새겨 봐야 하지 않을까.

이 책은 세상에 나온 것은 오래전 일이지만, 여전히 우리에게 시사 하는 바가 크다. 저자는 국가와 폭력에 관해 알기 쉽게 정리해 주었다. 20세기 국가에게 절대 권력을 주고 교전권을 준 결과가 1, 2차 세계대전이며, 최근의 대부분의 분쟁은 국가와 자국민 사이에 일어났다는 사실을 통해 과연 국가에게 전쟁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주는 것이 합당한지 묻고 있다. 그리고 결코 모두를 부자로 만들 수 없는 지금의 시스템을 지적하고, 빈부는 경제의 문제가 아니라 정의의 문제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정의’는 경제적인 결정이 아니라 정치적인 결정이라는 점을 말하고 있다. 나아가 경제 제도를 민주화하기 위해 정치적인 민주화의 중요성 등을 강조했다.

우리는 집단적 욕망과 개인적 두려움, 그리고 무기력 속에서 이명박 정부를 탄생시켰다. 이명박 정부의 신자유주의는 우리에게 만원 한 장의 행복이 사라진 팍팍한 일상을 선물했고, 허약한 민주주의를 뒷골목으로 쫓아내고야 말았다. 인간이 가지는 최소한의 권리, 결코 물러서서는 안 되는 인권을 무참히 짓밟고 게다가 한반도 남쪽의 산하를 온통 공사판 먼지구덩이로 만들고야 말 태세다.

이런 불합리와 부정과 반인권, 반생태가 판치는 사회에 살고 있는 나는 지금, 밤 11시로 향하는 사무실에 앉아 이 글을 마무리 짓고 있다. 넘어오지 않는 교정지를 기다리고, 책에 들어가야 할 사진을 찾아야 하는 시간인데 오래 묵혀둔 책을 뒤적거리며 정리하는 지금이 그래도 행복하다.

문득 책을 덮었더니 이런 말이 나온다.

이 책은 다음과 같은 사람들을 위해 씌어졌다.

- 과로에 지쳐 있는, 혹은 노동 현장의 부자유에 불만을 느끼고 있는 (샐러리맨이나 사무직 여성을 포함하여) 노동자.

이 외에도 권하는 유형의 사람은 많지만 꽤 나를 자극하는 저 말은 맨 위에 첫 번째로 나온 문장이다. 아, 마지막 문장도 나에게 딱 맞다.

“왠지 모르게 위기감을 느끼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막연하고, 분명히는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 할 것인가
카테고리 정치/사회
지은이 더글러스 러미스 (녹색평론사, 200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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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9일 실시된 제17대 대통령 선거 투표율은 62.9%인 것으로 잠정 집계됐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따르면, 총 선거인수 3765만 3518명 중 모두 2368만 3684명이 투표를 마쳐 투표율은 62.9%인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 대선 가운데 최저 투표율(70.8%)을 기록했던 16대 대통령선거보다 낮아 역대 최저 투표율 기록을 세웠다.”

어느 모 뉴스사이트에서 퍼 온 지난 대선 결과이다. 뉴스에서는 나오지 않았지만, 투표를 하지 않은 사람의 수는 정확히 1396만 9834명에 이른다. 이 중에서 정말 시간이나 여건이 안 되어 투표를 못하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할 것이다. 투표를 하지 않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이유는 다음으로 요약할 수 있다. 제일 많은 부분은, 어차피 내 한 표가 당락에 큰 영향을 끼치지 않음으로 차라리 놀러 가는 게 더 유익하다는 주장, 다음으로 더러운 정치판에는 관심 갖기 싫고 투표라는 행위가 귀찮기만 하다는 생각, 그리고 내 투표권을 기꺼이 양도할 만한 사람이 없어서 투표를 안 한다는 주장, 여기에 정말 아무 생각 없어서 투표를 안 하는 사람 등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태어나는 그 순간 평생 지킬 협정에 서명을 한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렇게 자문할 날이 온다, 누가 여기에 나 대신 서명을 했는가. -377쪽

이명박 정부 탄생 이후 나라 전체가 들썩거리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명박을 선택한 것을 후회하거나 투표를 하지 않음을 후회하고 있다. 누군가의 말처럼 우리는 우리가 선택한 것으로 이루어진다고 하지 않던가. 어쩌면 당신 주장대로 당신이 투표를 하건 안 하건, 세상은 돌아가기 마련이다. 하지만, 최근의 방송 드라마 시티홀의 남자 주인공 ‘조국’(차승원 분)은 좀 다른 생각을 가진 것 같다.

“여러분은 반성하셔야 합니다. 당신의 삶에서 당신이 원하는 걸 발견하지 못했다면 그건…당신의 선택이 잘못됐던 겁니다. 여러분은 지금 직장을 잃어도, 집을 잃어도, 그 흔한 문화시설 하나 없어도 다 내 팔자인 것입니다. 과연 여러분은 그런 팔자를 원하셨던 겁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여러분의 선택이 인주를 바꾸고. 인주가 바뀌어야 당신의 삶이 바뀌고. 당신 삶이 바뀌어야 당신 아이들의 삶이 바뀝니다…….”

소설 <눈뜬 자들의 도시>는 전작 <눈먼 자들의 도시>의 속편 격이다. 앞선 전작에서 작가 주제 사라마구는 눈을 뜨고 있으면서도 보지 않으려는 자들을 눈먼 자로, 그리고 눈뜬 자가 가져야 할 소명의식과 사명감을 어떻게 풀어갈 것인가를 세심하고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전작에서는 온 도시의 시민들이 눈먼 자가 되고 오직 한 명만 ‘눈뜬 자’였다면, <눈뜬 자들의 도시>는 시민들이 모두 ‘눈뜬 자’가 되어 부당하고 정의롭지 못한 사회 제도와 그런 제도를 유지하려는 기득권 세력에 맞서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온 나라가 백색 실명증에 걸리고 4년이 지난 후 치러진 총선. 그러나 유권자 중(투표자 중에서가 아니라 유권자 중에서다) 83%가 백지투표를 내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한다. 정부는 이 현상을 체제를 위협하는 불순분자의 선동으로 보고 비밀경찰을 이용한 불법 도감청 등의 방법으로 조사에 나섰지만, 뚜렷한 실체를 발견하지 못한다. 몇 번의 재선거에서도 똑같은 결과가 나오자 급기야 도시 전체를 반역자로 몰아 도시를 고립시킨다. 정부당국자들은 야밤에 수도를 빠져나가고, 계엄령을 내린 후 도시를 군대로 포위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정상적(?)으로 투표를 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마저 탈출을 거부당하고 사태가 일어나고 만다.

그러던 어느날 총리와 대통령 앞으로 편지가 한통 날아오는데, 4년전 온 나라가 백색실명증에 걸렸을 때 유일하게 눈이 멀지 않은 여인이 있었다는 내용으로, 정부 당국자들은 이것을 이번 백지투표와 연관시켜 수사하도록 경찰들을 도시로 보낸다.

경찰들은 도시를 오가면서 유일하게 눈이 멀지 않았던 의사의 아내를 비롯해 그와 함께 힘든 시기를 견뎌냈던 사람들을 만나며 탐문 수사에 들어가지만, 마땅한 혐의를 발견할 수 없었다.

그런 와중에 수사팀장인 경감은 수사에 회의를 느끼고, 정상적인 명령이나 지시가 아닌 의도적 함정 수사에 대해 의사의 아내에게 솔직히 털어놓게 된다. 정부는 이 사실을 모른 채 의사의 아내를 시민들의 반역(백지투표)의 주모한 반역자로 몰아가는 여론 몰이를 한다. 그러나 그들의 시도가 번번이 실패로 돌아가자 끝내는 극단적인 방법을 동원하기에 이른다.

우리는 반역자들이 이성에 귀를 기울이게 하려는 우리의 모든 시도가 하나하나 대실패로 끝나고 말았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한 실패의 원인은, 적어도 내 의견으로는, 우리가 선택한 탄압 조치가 가혹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지금까지 추구하던 전략을 계속 따른다면, 강압적인 방법들의 수위를 계속 높인다면, 또 반역자들의 반응이 계속 지금까지와 같다면, 즉 아무런 반응이 없다면, 우리는 독재적 성격을 가진 극적인 조치에 의지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 221쪽

지금으로부터 160여년 전에 핸리 데이빗 소로우는 이미 작은 정부의 필요성을 주창했다.

“우리는 먼저 인간이어야 하고, 그 다음에 국민이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법에 대한 존경심보다는 먼저 정의에 대한 존경심을 기르는 것이 바람직하다. 내가 떠맡을 권리가 있는 나의 유일한 책무는, 어떤 때이고 간에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행하는 일이다.”

우리는 우리가 속한 지금의 정부, 그리고 사회 제도는 지금의 우리가 원해서 된 것이 아니며, 과거의 잘못된 관행에서 이어져 온 온전치 못한 부당함과 비리를 품고 있음을 잘 알고 있다. 따라서 얼마든지 우리가 정의롭고 올바르다고 믿는 방향으로 바꾸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하루에도 수없이 많은 선택의 기로에 선다. 그리고 우리 자신의 정체성은 그 선택들로 이루어진다. 이 사회 역시 당신의 선택들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눈 감을 것인가, 눈 뜰 것인가.

검은 색과 빨간색으로 된 표제만 보더라도 각각의 신문에 어떤 내용이 담겨 있는지 우리도 대충은 짐작할 수 있다, 조국의 적들의 또 한 번의 전복 행위, 누가 복사기를 돌렸는가, 허위 정보의 위험, 누가 그 복사 값을 냈는가. - 419쪽

이 부분을 보면서 실소를 흘릴 수밖에 없었다. 언젠가 ‘그 많은 초들은 누가 돈을 댔느냐’며 화를 벌컥 냈다는 사람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눈뜬 자들의 도시 - 8점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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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인간이 되지 못한다 해도 괴물은 되지 말자. 맞다, 그런 말이 있다. 아무리 지금 상황이 고달프고 벼랑끝으로 몰린다 해도,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인간성을 잃어버리면 안된다. 우리는 누구나 그렇게 말하지만, 정작 인간성을 지킬 수 없는 극한 상황에 다달을 때면 어떻게 바뀔까. 이에 대해 주제 사라마구라는 작가는 <눈먼 자들의 도시>라는 소설에서 그의 상상력을 펼쳤다.




모든 사람들이 눈이 멀어버린단는 설정 자체부터 파격이다. 작가는 왜 사람들의 눈을 갑자기 멀게 했을까. 그리고 이런 사건을 통해 드러내고자 한 그의 이야기는? 여기에는 인간성에 대한 깊은 관심이 담겨있다. 시각을 잃어버린 인간은 감각과 본능에 의해 움직이기 시작했고, 우리가 말하는 인간성을 하나씩 하나씩 잃어갔다. 그리고 유일하게 시력을 가진 안과의사의 아내만이 이를 목격하며, 괴로워한다. 만일 내가, 그리고 당신이 그 도시에서 유일하게 앞을 볼 수 있는 사람이라면 어떤 일을 상상할 수 있을까. 도시는 점차 인간성을 잃어가고 사람들은 하나둘 동물과 다름 없는 나락으로 떨어져가고 있다. 유일하게 눈 뜬 사람으로서 눈먼 사람들의 안내자이며 보호자로서 자처할 수 있는가. 눈앞에서 뻔히 벌어지고 있는 폭력에 대해 유일하게 저항할 수 있다면 살인을 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인간성은 무엇인가.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 갖추어야할 인간의 존엄성의 가치는 어떻게 매김할 것이며, 무엇을 지키고자 하는가. <눈먼 자들의 도시>는 이런 문제을 던져주는 문제작이다. 자 다시 한번 생각해 보라.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당신만이 눈을 뜨고 있다.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참혹한 상황을 보면서 당신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어떤 행동을 취할 것인가.

그리고 다시 돌아와, 지금 당신이 보고 있는 지금의 세상.. 그래 지금 현실을 당신은 어떻게 보고 있는가? 야만과 폭력의 현장에서 지금 당신은 눈먼자가 아닌가? 아니 당신이 지금 그 현실을 목도하고 있다면 당신은 어떤 행동을 할 것인가. 책의 한 구절을 인용하자면, "가장 심하게 눈이 먼 사람은 보이는 것을 보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말은 위대한 진리에요."이다. 당신은 눈뜬 사람인가, 눈먼 사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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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고통 - 10점
수잔 손택 지음, 이재원 옮김/이후



우리는 하루에도 수많은 이미지를 접한다. 일상적인 이미지도 있지만, 세계 곳곳의 매체들이 우리에게 전달하는 이미지들도 있다. 전 세계에서 보내서 우리 안방까지 들어오는 이미지들이 주는 느낌은 그리 유괘하지만은 않다. 이스라엘 폭격으로 피를 철철 흘리며 죽어가는 팔레스타인 아동도 있고, 자국의 내전에 시달리다 못해 이웃 나라의 국경지대의 텐트촌에서 생활하는 아프리카의 어느 모자의 모습도 있다. 가깝게는 기아에 시달리는 북한 아동의 갸냘픈 팔다리가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는 사진도 볼 수 있다.

요즘에는 더욱 잔인한 영상들이 눈앞에 펼쳐진다. 용산 참사 장면을 담은 여러 이미지들을 우리는 실시간으로 만날 수도 있었다. 아침 출근 시간 뉴스로 보여지는 영상들은 불과 한두시간 전의 영상들이 아침 밥상에 올라온 것이다. 그만큼 빠르게 그리고 더 적나라하게, 더 사실적으로, 더 현실감 있게 세상의 맨살을 보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런 이미지, 즉 타인의 고통을 담고 있는 현실을 목도하면서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과연 이런 이미지는 언론들의 먹잇감으로 사냥이 되어 스펙터클의 감각을 자극하는 소비재일 뿐일까? 이제는 너무나 닳고 닳아서 감흥이 오질 않는 진부한 흥미거리일 뿐일까?

누군가는 우리가 타인의 고통에 개입할 여지를 잃어가고 있다고 개탄한다. 누군가는 우리의 가슴이 너무나 닳고 닳아서 이제 석화되고 있는 것이라며 슬퍼한다. 그런걸까? 정말 나와 당신의 가슴은 그렇게 차갑게 얼어붙어 있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수전 손택은 아주 오래전부터 이미지들이 가지는 의미를 설명하면서, 지금의 이미지들을 보면서 우리가 느끼는 연민이라는 감정에 솔직하게 다가서자고 역설하고 있다.

"감정을 무디게 만드는 것은 수동성이다. 냉담한 것으로, 혹은 도덕적으로나 감정적으로 무감각한 것으로 묘사된 상황은 따지고 보면 감정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분노의 감정, 좌절의 감정으로 말이다."

연민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수동성이 문제다. 감정은 여전히 우리에게 살아 있는 양날의 검이다. 우리가 지구 저편의 고통에 대해 눈으로 보고 그친다면 그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 지구를 더욱 더 절망과 좌절로 이끄는 것이다. 타인의 고통에 귀기울이고, 그 고통을 없애거나 줄이기 위해 노력하는 것, 그것이 그들의 고통을 목도한 사람의 의무다. 

"특권(타인의 고통을 이미지로 보는 것)을 누리는 우리와 고통을 받는 그들이 똑같은 지도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의 특권이 (우리가 상상하고 싶어하지 않는 식으로, 가령 우리의 부가 타인의 궁핍을 수반하는 식으로)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 보는 것, 그래서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쌓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 말로 우리의 과제이다."              - <타인의 고통> 15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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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행성에서 지적 생물이 성숙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생물이 자기의 존재 이유를 처음으로 알아냈을 때이다. 만약 우주의 다른 곳에서 지적으로 뛰어난 생물이 지구를 방문했을 때, 그들이 우리의 문명 수준을 파악하기 위해 맨 처음 던지는 질문은 "당신들은 진화를 발견했는가?"라는 물음일 것이다. - <이기적 유전자> 40쪽

어떤 나라에서 지적 사회가 성숙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사회가 자기의 존재 이유를 처음으로 알아냈을 때이다. 만약 지구의 다른 곳에서 문명이 뛰어난 사회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 그들이 우리의 문명 수준을 파악하기 위해 맨 처음 던지는 질문은 “당신들은 사회의 진화(진보)를 발견했는가?”라는 물음일 것이다.

원문을 쓴 리처드 도킨스에게는 참 미안한 말이지만, 우리 사회의 미개함을 꾸짖고 싶어 그의 글을 차용해 봤다. 이렇게 한 의도에는 작금의 현실의 야만성도 한몫했다. 쉽게 이야기되는 막장 문화는 둘째 치고, 여전히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벌어지는 연쇄살인의 극악함, 거기다가 밑도 끝도 없이 벌어지는 공권력의 무지막지함과 그 저열함에 있다. 우리 사회의 진보는 가능한가? 있기는 한가?

아,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얼마 전에 읽은 책 <이기적 유전자>(리처드 도킨스 저, 을유문화사)를 이야기하려는 의도였다. 그러니 본론으로 충실해 보자.

많은 이들(그러니까 나를 포함해서)이 이 책의 제목만으로 헛된 망상과 철학을 늘어놓았다. 이거 뭐지? 인간은 그러니까 그 근본부터 이기적 존재라는 것인가? 그러니 이 사회는 적자생존의 정글 논리가 지배하는 게 당연하고 약육강식에 따라 질서가 재편되어야 한다는 건가? 강한 놈이 이기는 것이니 재주껏 살아남을 수 있도록 강한 놈에게 빌붙어야 한다는 말인가? 그러고 보니 얼마전 강만수 장관이 돈 많은 사람들이 혜택을 보게 될 종부세 폐지를 밀어붙이고 감세정책을 발표하면서 "인간의 본성을 무시한 정책은 오래 가기 힘들다"라는 말을 했다고 하는데, 그 사람이 생각하는 인간의 본성이 아마 저런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이 책의 핵심은 이렇다.

지구 생명체의 진화는 유전자가 더 많은 복제품을 남기는 쪽으로 진행되었다. 이를 통해 유전자는 불멸의 생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에 따라 인간을 비롯해 모든 생명체는 그 유전자를 후세에 전달하기 위해 마련된 생체기계일 뿐이며, 생체 기계인 생명체는 유전자의 이익, 즉 후세에 유전자의 복제를 충실히 이행하기 위해 프로그램 되어 있다는 것이다. 진화의 기본단위는 유전자이며, 이 유전자를 이해할 때 진화를 이해할 수 있다고 그는 설명한다. 유전자의 자기 복제에 대한 욕구를 ‘이기적’이라는 말로 은유적으로 표현했는데, 나는 그런 엄청난 오해(?)를 하고 말았다. 무식해서 부끄러울 뿐이다. 강만수 당신도 무식한 건 마찬가지다.

생물학적으로 유전자 입장에서 본 이타성은 불가능한 개념이다. 그런 유전자가 있다면 애초에 사라지고 존재할 수 없는 것이 된다. 그러나 이것을 인간의 본성이라고 치환하는 오류를 범할 사람을 위해 리처드 도킨스는 이기적 유전자의 특성에 반하는 밈(Meme) 이론, 즉 문화유전론을 내놓았다.

우리에게는 우리를 낳아 준 이기적 유전자에 반항하거나 더 필요하다면 우리를 교화시킨 이기적 밈에게도 반항할 힘이 있다. 순수하고 사욕이 없는 이타주의라는 것은 자연계에는 안주할 여지가 없고 세계의 전 역사를 통해 과거에 존재한 예도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의식적으로 육성하고 교육하는 방법도 논할 수 있다. 우리는 유전자 기계로서 조립되었지만 밈 기계로서 교화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들의 창조자에게 대항할 힘이 있다. 이 지구에서는 우리 인간만이 유일하게 이기적인 자기 복제자들의 전제에 반항할 수 있는 것이다. - 349쪽

최근 우리 사회는 새로운 문화 유전자를 발견했다. 바로 집단지성이다. 물론 집단 지성은 대중의 의식과 별반 달라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단순한 의식의 반영이라는 대중 의식과 계속해서 발전하는 집단 지성 사이에는 가장 큰 차이가 있다. 바로 소통이다. 막장 드라마라면서도 계속해서 시청률을 상회할 수 있는 것은 소통이 없는 대중 의식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집단 지성은 이미 졸렬한 자극과 허무맹랑한 우연, 성찰이 없는 드라마를 막장으로 규정짓고 비판하고 있다. 소통이 만들어 낸 비판의식이다.

반면 소통을 거부하고 오로지 제 갈 길(?)만 가겠다고 외치며 앞에 거치적거리는 시민들을 무참히 살해하면서 나아가는 저 정부는 그야말로 막장 중의 막장이다. 시민들은 소통의 장에서 지금의 현실을 조목조목 비판하면서 그에 저항하고자 결집하고 있다.
권력과 전제에 대항할 수 있는 힘, 그것은 우리 스스로에게 있음을 <이기적 유전자>는 밝히고 있다.

다시 도킨스의 말을 차용해 와 정리해 보면,

우리에게는 우리가 먹여 살리는 공권력에 반항하거나 더 필요하다면 우리를 지배하려는 권력자에게도 반항할 힘이 있다. 순수하고 사욕이 없는 이타주의라는 것은 이 사회에는 안주할 여지가 없고 세계의 전 역사를 통해 과거에 존재한 예도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의식적으로 육성하고 교육하는 방법도 논할 수 있다. 우리는 시민의 한 사람이라는 형식으로 조립되었지만 국민으로서 교화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들 권력자들에게 대항할 힘이 있다. 이 대한민국에서 깨어있는 시민만이 유일하게 이기적인 권력자의 전제에 반항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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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대해

물론 <이기적 유전자>라는 책은 참 좋은 책이다. 하지만 이 책을 읽는데 참으로 오랜 시간이 걸렸다.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을 먼저 읽었던 나로서는 왜 이렇게 읽기가 더딘지, 이해가 안 가는 문장은 왜 이리 많은지 나의 무식을 탓해야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을유문화사에서 나온 책의 번역이 엉망이란다.

그러니 되도록 이 전에 나온 동아출판사 <이기적인 유전자>를 볼 것을 추천한다(물론 절판이다, 헌책방 뒤져야 한다). 나도 이 책 팔고 그 책을 찾아서 다시 볼까 생각중이다. 네이버에서 ‘이기적 유전자 번역’만 쳐도 관련 이야기는 쏟아져 나올 것이니 참고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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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멸 - 8점
토마스 베른하르트 지음, 류은희.조현천 옮김/현암사



친애하는 토마스 베른하르트 씨에게

 

얼마전에 당신의 소설 <소멸>을 보았다. 정말 대단한 작품이다. 당신의 소설 <소멸>의 이야기 줄거리는 이러했다. 주인공 ‘나(프란츠 요셉 무라우)’는 여동생 결혼식을 다녀온 다음다음날(그러니까 이틀 후) 뜻밖에 가족(부모님과 형)의 교통사고 사망 소식을 접한다. 그리고 장례식에 참석한 후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았지만 모두 종교단체에 기부하고 생을 마감한다. 당신 소설의 이야기는 이게 전부다. 내 글만 보면 어떤 이는 스토리가 빈약하다고 할 수 있겠다. 사실 그런 오해도 살만하다.

 

이렇게 단순한 이야기가 장장 500쪽에 걸쳐 서술되고 있다. 그것도 단 두 문장으로 말이다. 1부 '전보'가 가족의 사망 소식을 접하고 사진을 보면서 가족에 대해 사유하는 장면이고, 2부 '유언'은 고향에 돌아가 장례식을 치루는 일련의 과정에서 떠오르는 사유들의 집합이다. 단 두 문단으로 서술되어 있는 이야기, 게다가 줄거리가 단순한 만큼 나머지는 당신의 온갖 사유들로 넘쳐나고 있었다. 난생 처음 접해보는 새로운 문체와 서술에 크게 놀랐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루하지 않았다. 당신 가족과 조국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온갖 비난과 모욕이 넘쳐났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주인공 ‘나’의 냉소다. 곧 소설가 당신의 냉소이기도 하다. 이렇듯 지독한 냉소는 힘이 될 수 있을까?

 

세기의 전환기에 이르면 사유하는 것으로, 사유하는 것을 통해 존재해 온 사람들이 자살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결론이며, 사유하는 인간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충고는 단 한 가지, 이 세기가 끝나기 전에 자살하라는 것입니다. 〈p.495〉

 

세상에 자살을 조언하다니, 어떻게 태어난 삶인데 사유하는 인간은 자살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올 수 있는가. 이런 지독한 냉소의 배경에는 자위적인 오만이 담겨 있음을 보았다. 당신은 오만함을 통해 자신을 경멸했다. 그리고 이것을 무기로 세상을 경멸하고, 물질 중심으로 흐르는 세상에 저항했으며, 끝내 세상에 잡아먹히지 않으면서 멋지게(?) 한방 날렸다. 그런 점에서 당신을 존경할 수 있을 법하다. 게다가 죽어서 남긴 실제 유언을 들으니 더욱 놀랍다.

 

“내가 쓴 것은 모두 저작권법의 유효기간 동안 오스트리아 국경 내에서 공연되고 인쇄되거나 낭독되는 것을 금한다.”

 

작가가 자신이 쓴 창작품이 자신의 나라에서 출판, 공연, 인쇄 되는 것을 금하다니, 이것은 국가에 대한 증오일까, 역설적인 사랑일까? 아무튼 미친 짓이다. 그만큼 이 세상을 향한 당신의 굳은 의지이자 절박한 메시지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국가의 권위와 폭력에 의해 셰어마이어와 같은 사람이 피해를 입고 아무 보상도 없이 여생을 살아가고, 나치와 협력해 수많은 사람을 살해하는 데 협력하거나 개입했던 이들에게 공로훈장을 떠안기며 터무니없는 연금을 송금하는 국가는 오스트리아에만 있는 게 아니다. 부끄럽지만 오늘날 한국 사회를 본다면 당신은 까무러칠 것이다. 아마도 환생이란 것이 있어 당신 같은 대작가가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우리나라는 가급적 피해서 태어나길 바랄 뿐이다. 아니, 제발 한국에 태어나 당신의 그 글로 멋진 한방을 대한민국에 날려주기를 기대하고 싶다.

 

21세기의 대한민국을 지도하는 이들은 물질에 사로잡혀 정신적 가치를 전혀 고려치 않는 사람들이 지배하고 있다. 모든 잣대와 기준을 경제적 가치에 두고 경쟁만이 최고의 선이라는 이데올로기를 전파하며 심지어 꼬맹이 아이들마저 경쟁 체제로 내몰고 있다. 이 권력은 국가의 권력에 도전하고 권위에 상처를 주는 글을 썼다는 것만으로 인신을 구속하고 있다. 물론 그런 지도자를 선택한 것은 대한민국 사람들이다. 부끄럽지만 물질에 현혹되어, 747이니 주가 3000이니 하는 말에 넘어간 사람이 내 이웃이고, 나 역시 그런 선택을 수수방관했음을 자백한다. 그러니 이 민주적 절차에 의해 선출된 권력을 욕하는 건 스스로의 얼굴에 침을 뱉어야 하는 일이다. 이럴 때이니 냉소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냉소 이전에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고 있다. 도대체 이런 세상에 저항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당신에게 묻고 싶다.



소멸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토마스 베른하르트 (현암사,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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