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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멸 - 8점
토마스 베른하르트 지음, 류은희.조현천 옮김/현암사



친애하는 토마스 베른하르트 씨에게

 

얼마전에 당신의 소설 <소멸>을 보았다. 정말 대단한 작품이다. 당신의 소설 <소멸>의 이야기 줄거리는 이러했다. 주인공 ‘나(프란츠 요셉 무라우)’는 여동생 결혼식을 다녀온 다음다음날(그러니까 이틀 후) 뜻밖에 가족(부모님과 형)의 교통사고 사망 소식을 접한다. 그리고 장례식에 참석한 후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았지만 모두 종교단체에 기부하고 생을 마감한다. 당신 소설의 이야기는 이게 전부다. 내 글만 보면 어떤 이는 스토리가 빈약하다고 할 수 있겠다. 사실 그런 오해도 살만하다.

 

이렇게 단순한 이야기가 장장 500쪽에 걸쳐 서술되고 있다. 그것도 단 두 문장으로 말이다. 1부 '전보'가 가족의 사망 소식을 접하고 사진을 보면서 가족에 대해 사유하는 장면이고, 2부 '유언'은 고향에 돌아가 장례식을 치루는 일련의 과정에서 떠오르는 사유들의 집합이다. 단 두 문단으로 서술되어 있는 이야기, 게다가 줄거리가 단순한 만큼 나머지는 당신의 온갖 사유들로 넘쳐나고 있었다. 난생 처음 접해보는 새로운 문체와 서술에 크게 놀랐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루하지 않았다. 당신 가족과 조국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온갖 비난과 모욕이 넘쳐났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주인공 ‘나’의 냉소다. 곧 소설가 당신의 냉소이기도 하다. 이렇듯 지독한 냉소는 힘이 될 수 있을까?

 

세기의 전환기에 이르면 사유하는 것으로, 사유하는 것을 통해 존재해 온 사람들이 자살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결론이며, 사유하는 인간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충고는 단 한 가지, 이 세기가 끝나기 전에 자살하라는 것입니다. 〈p.495〉

 

세상에 자살을 조언하다니, 어떻게 태어난 삶인데 사유하는 인간은 자살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올 수 있는가. 이런 지독한 냉소의 배경에는 자위적인 오만이 담겨 있음을 보았다. 당신은 오만함을 통해 자신을 경멸했다. 그리고 이것을 무기로 세상을 경멸하고, 물질 중심으로 흐르는 세상에 저항했으며, 끝내 세상에 잡아먹히지 않으면서 멋지게(?) 한방 날렸다. 그런 점에서 당신을 존경할 수 있을 법하다. 게다가 죽어서 남긴 실제 유언을 들으니 더욱 놀랍다.

 

“내가 쓴 것은 모두 저작권법의 유효기간 동안 오스트리아 국경 내에서 공연되고 인쇄되거나 낭독되는 것을 금한다.”

 

작가가 자신이 쓴 창작품이 자신의 나라에서 출판, 공연, 인쇄 되는 것을 금하다니, 이것은 국가에 대한 증오일까, 역설적인 사랑일까? 아무튼 미친 짓이다. 그만큼 이 세상을 향한 당신의 굳은 의지이자 절박한 메시지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국가의 권위와 폭력에 의해 셰어마이어와 같은 사람이 피해를 입고 아무 보상도 없이 여생을 살아가고, 나치와 협력해 수많은 사람을 살해하는 데 협력하거나 개입했던 이들에게 공로훈장을 떠안기며 터무니없는 연금을 송금하는 국가는 오스트리아에만 있는 게 아니다. 부끄럽지만 오늘날 한국 사회를 본다면 당신은 까무러칠 것이다. 아마도 환생이란 것이 있어 당신 같은 대작가가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우리나라는 가급적 피해서 태어나길 바랄 뿐이다. 아니, 제발 한국에 태어나 당신의 그 글로 멋진 한방을 대한민국에 날려주기를 기대하고 싶다.

 

21세기의 대한민국을 지도하는 이들은 물질에 사로잡혀 정신적 가치를 전혀 고려치 않는 사람들이 지배하고 있다. 모든 잣대와 기준을 경제적 가치에 두고 경쟁만이 최고의 선이라는 이데올로기를 전파하며 심지어 꼬맹이 아이들마저 경쟁 체제로 내몰고 있다. 이 권력은 국가의 권력에 도전하고 권위에 상처를 주는 글을 썼다는 것만으로 인신을 구속하고 있다. 물론 그런 지도자를 선택한 것은 대한민국 사람들이다. 부끄럽지만 물질에 현혹되어, 747이니 주가 3000이니 하는 말에 넘어간 사람이 내 이웃이고, 나 역시 그런 선택을 수수방관했음을 자백한다. 그러니 이 민주적 절차에 의해 선출된 권력을 욕하는 건 스스로의 얼굴에 침을 뱉어야 하는 일이다. 이럴 때이니 냉소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냉소 이전에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고 있다. 도대체 이런 세상에 저항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당신에게 묻고 싶다.



소멸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토마스 베른하르트 (현암사,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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