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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干證)  1. 자신의 종교적 체험을 고백함으로써 하나님의 존재를 증언하는 일. 
               2. 예전에, 남의 범죄에 관련된 증인

 

타라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타라가 떠난 뒤에도 여전히 자신들의 과거를 간증하러 다녔다. 타라의 가족에게 일어났던 사건은 아버지에게는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그 사건은 책임져야 할 누군가의 무지에서 비롯된 비참한 사고였을 뿐이다. 타라는 이 책 <배움의 발견(원제 Educated)>에서 그 무지에 대해 고발하고 있다. 

 

아버지는 정부가 강제로 우리를 학교에 가도록 만들지 않을까 걱정하지만, 그럴 일은 없었다. 왜냐하면 정부는 우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부모님의 일곱 자녀 중 네 명은 출생증명서가 없다. 가정 분만으로 태어나서, 한 번도 의사나 간호사에게 가본 적이 없기 때문에 의료 기록도 전혀 없다.”

 

타라에게 아버지는 곧 하나님이었고, 아버지의 명령은 곧 하나님의 명령이었다. 아버지의 명령에 따라 학교에 가지 않았고, 지저분하고 위험한 폐철 처리장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으며, 아버지의 일을 돕기 위해 단 하루 만에 크레인의 조종간을 잡아야 했고 위험한 고철더미에 올라갔다가 큰 부상을 입기도 했음에도 병원 치료 대신 엄마가 만든 오일과 약초로 치료를 받아야 했다. 

주체적 자아로 성장할 수 없었던 막내딸 타라에게 선택권은 없었다. 모든 결정은 아버지가 내렸고, 그 다음의 권력은 오빠들이었다. 어머니는 순종했다. 나아가 딸들을 지키지 않았고, 아버지의 권력에 동조하였으며 오빠의 폭력을 은폐하면서 타라를 속였다. 아버지의 병력을 물려받은 오빠는 자신의 분노를 극단적인 폭력으로 쏟아냈다. 오빠의 무자비한 폭력에 시달렸던 타라는 그 사실을 부모에게 이야기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부모님은 오빠가 달라졌으며, 하나님에게 회계를 했다며 타라에게 용서를 강요했다. 하지만 오빠는 달라지지 않았다. 오빠의 폭력은 타라가 떠난 이후 그의 아내에게로 이어졌고 이를 알아챈 타라가 부모에게 다시 재차 경고했지만, 아버지와 어머니는 오히려 타라가 오해한 것이며, 심지어 그것은 거짓된 환각이고 악마의 유혹에 굴복한 것이라고 비난했다. 다른 가족들은 타라의 말을 믿지 않았고, 그녀를 악마의 꾐에 넘어가 정부가 주는 돈을 받고 공교육을 받으며 타락한 여자라며 비난했다. 

 

“이제 ‘창녀’라는 단어는 행동보다 본질에 관한 묘사가 됐다. 내가 잘못된 행동을 해서가 아니라 내 존재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뜻이었다.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뭔가 불순한 요소가 들어 있었다.”

 

어쩌면 타라는 그냥 순종적인 딸이 되었을 수도 있다. 오빠의 폭력을 받아내는 건 이제 그의 아내 몫이 되었으니 더이상 폭력에 시달릴 일도 없었을 거다. 아버지의 말을 듣고 아버지가 내린다는 ‘축복’을 받았다면, 가족과의 인연을 이어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어머니의 사업이 번창하였기 때문에 보다 풍요로운 삶의 공간도 확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어머니를 따라 산파가 되었을 것이고 산약초를 이용한 오일을 만들어 팔면서 살다가 어느 평범한 몰몬교 청년을 만나 결혼해 조용히 삶을 마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타라는 그러지 않았다.

 

“나는 잘못 알고 있던 사실을 바로잡히는 일이 어떤 느낌인지 안다. 잘못 알고 있던 규모가 너무도 커서 그것을 바로잡으면 세상 전체가 변할 정도였다. 이제 역사를 이해하는 길로 통하는 문을 지키는 위대한 문지기들이 어떻게 자신들의 무지와 편견을 해결했는지를 알아야만 했다.”

 

OMR카드의 사용법도 모르던 16살 소녀가 혼자 독학을 시작했다. 17살에 대학수학능력 시험을 통과하고 난생처음으로 학교(브리검 영 대학교)라는 곳에 들어간 뒤의 그녀는 너무나도 다른 두 개의 세상에서 혼란을 겪었다. 하나는 몰몬교의 정신을 가진 아버지 밑에서 자란 아이다호의 산골 아이의 모습이고, 다른 하나는 역사와 철학을 탐구하며 세상의 지식을 탐하는 대학생의 모습이다. 산골 아이는 단순히 남자아이 앞에서 살짝 웃었다는 이유로 ‘창녀’라는 욕을 들으며 오빠에 의해 머리가 변기 속에 처박혔던 소녀였다. 하지만 대학생이 되면서 ‘홀로코스트’에 대해 알아가고, ‘페미니스트’의 뜻을 탐구하면서 홀로 서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과정은 순탄치 못했다. 그 과정은 피부를 온통 벗겨내는 것처럼 아픈 과정이었다. 그 누구보다 아버지를 부정하고 그 아버지의 막내딸로 살아온 자신의 이전 삶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일이었다. 가족 모두가 그녀를 비난하고 그녀를 집단적으로 따돌려 버렸다. 타라는 자신이 가족을 오해한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에 시달리다가 심각한 우울증에 시달리기까지 했다. 

타라는 결국 멈추지 않고 계속 나아갔다. 그리고 독립적이며 존엄한 인간으로 다시 태어났다. 이 책이 ‘배움의 발견(원제: Educated)’인 것은 그녀가 배움을 통해 자신의 삶을 아이다호의 산골에서 전 세계로 확장할 수 있었으며, 그 과정에서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무지와 폭력을 이겨낼 수 있었음을 드러내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삶의 주인은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너무나도 자명한 사실을 받아들이기까지 무척 힘들고 어려운 과정을 담아낸 이야기인 것이다. 누구의 말대로 이 이야기가 소설이 아니라 실제했던 내용이라는 점에서 믿어지지 않을 만큼 가슴이 먹먹해 온다. 

이 책이 배움에 대해 생각해 보는 모든 이들에게 한줄기 찬란한 빛이 되어 줄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배움은 세계와 나를 잇는 과정이며, 세계 속에 묻힌 ‘나’가 아닌 ‘나’ 안에서 세계가 이해되는 과정이다. 

 

[누가 역사를 쓰는가?] 나는 [바로 나]라고 생각했다.

 

Photo by Adam Glanzman/Northeastern University

배움의 발견 - 10점
타라 웨스트오버 지음, 김희정 옮김/열린책들

 

책을 다 읽은 분들은 저자 타라 웨스트오버가 2019년 5월 3일 노스이스턴 대학교에서 한 졸업 축사도 읽어보기 바랍니다. 
링크: https://blog.naver.com/openbooks21/221851681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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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턴가 유튜브 동영상을 열심히 보고 있다. 주로 출퇴근 시간을 이용한다. 보통은 책을 보는데, 그 시간에 책을 읽는다는 것은 사실 어려운 일이다. 워낙 사람이 많아서 책을 들고 읽는 게 민폐가 되는 경우도 있고, 사실상 책을 읽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에 처할 때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우연히 유튜브에 올라온 교육, 과학, 인문학 관련 강연이나 다큐멘터리를 접하게 되었다. 가장 먼저 접했던 것은 조성택 교수의 플라톤 아카데미 강연, '어떻게 살 것인가? - 경계와 차이를 넘어 함께 사는 지혜'를 우연히 케이블TV에서 접했는데, 이를 유튜브에서 다시 들었던 것이 내가 유튜브에 빠진 계기가 됐다. 이를 계기로 플라톤 아카데미 TV의 여러 강연들을 들어 보았다. 


강연의 경우 한국 사람들이 주로 나오는 강연을 듣는다. 따로 PPT를 활용하는 경우는 그렇게 많지 않다. 주로 인문학 강연들이 여기에 속한다. 그러다가 다큐멘터리 프로그램도 보기 시작했다. ‘총, 균, 쇠’의 제러드 다이아몬드 교수의 책을 다큐멘터리로 만든 프로그램[각주:1]으로 시작됐다. 이전의 인문학 강연은 그냥 듣기만 하고 화면은 볼 필요가 없었던데 비해, 다큐멘터리 프로그램, 특히 외국 다큐멘터리는 영어가 많이 나와 자막을 반드시 봐야하는 번거로움이 있지만, 책을 들고 있는 것보다는 훨씬 편리하다. 최근에는 교육 다큐멘터리인 EBS의 '학교란 무엇인가 10부작'을 보고 있다. 여러모로 생각할 거리를 많이 준다. 


이러한 학습(?)은 책에 비해 집중도는 약간 떨어지는 면이 있지만 단시간에 꽤 많은 정보들을 편리하게 접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지금까지 꽤 많은 다큐와 인문학 강연, 교육 프로그램을 접했다. 그럼에도 너무나 많이 흘려보낸 것이 아닌가 하는 아쉬움에 이제부터 그런 프로그램들을 소개하고 나의 느낌을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이것이 내 안의 철학으로 성장하고 내 삶을 밝혀줄 것이라 생각된다. 기록은 기억을 돕고, 그 기억은 가혹한 세상을 향해 나서는 내 자신의 인간적인 힘이 되어 줄 것이다. 



최근 본 동영상


  1. 많은 사람들이 이 프로그램을 올려 놓아 따로 링크를 달지 않는다. 유튜브에서 '총균쇠'만 검색해도 쉽게 찾을 수 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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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러운 출장이었다. 현장 교사 포럼이라서 교육과정에 대한 내용을 기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가기로 결정됐다. 전날 미리 내용을 다운로드 했지만, 자세한 내용을 들쳐볼 시간이 없었다. 아무 지식 없이 출발했다. 

날은 좋았다. 처음 가보는 김대중컨벤션센터에 대한 호기심도 동했다. 건축미학적으로 문외한이지만, 지리산처럼 푸근하면서도 천왕봉의 거친 기상이 서린 듯한 느낌이다. 

근처 비행장에서 공군 전투기들이 수시로 오갔다. 공기를 날카롭게 가르는 소리가 매우 거슬렸다. 그때마다 하늘을 보게 된다. 낯선 소리에 대한 민감함 때문이지만 푸르른 날 덕분에 인상을 찌푸리면서 고개를 들다가도 새파란 하늘 모습 때문에 다시 푸근해진다. 하늘은 파랗고 나무는 울긋불긋, 노란 은행잎들이 팔랑팔랑 날아다닌다. 가을 출장답게 사치스러운 하루였다. 


현장 교사들이 차기 교육과정에 대해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한다는 취지의 현장 교사 포럼은 이번이 네 번째였다. 발표자들은 학교 현장 교사들이었고, 수업의 과정에서 겪는 다양한 에피소드를 중심으로 성공적인 학교 수업에 대한 실천적 방안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번에 내가 집중해서 들었던 분야는 정보, 연극, 진로적성 분야였다. 정보는 미래 중심적인 가치와 논리적 사고를 중심으로 소개되었다. 학생들의 논리적 사고력을 기르는 데 효과적이라는 주장이 있다. 교육은 그 이상의 가치를 가질 수 있어야 하는데 좀 아쉽다. 연극은 좀 이상적이다. 포럼 중간에 단막극으로 나온 아이들이 10여분간 펼친 연극을 준비하기 위해 최소 40시간이 필요했다는 교사의 말이 사실이라면, 사실상 학교에서 연극을 가르쳐 극을 올리는 일은 매우 현실적인 문제와 맞닿을 수밖에 없다. 차시 배정 문제다. 무엇보다 교과서 편집자로서 가장 큰 고민은 그래서 교과서는 어떻게 해야할까이다. 자칫 체육처럼 학생들만 시험때 들쳐보는 시험 대비용 책이 되는 것이 아닐까싶다. 마지막으로 진로는 인성교육과 연결하고 있다. 진로교육이라는 타이틀이었지만 인성교육 프로그램 소개 등 지나치게 인성에만 초점이 맞추어진 듯했다. 어쩌면 그것이 학교 현장의 현실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인성은 모든 과목에서 수업 내용 안에 함께 녹아 있어야 하는 부분인데, 따로 프로그램과 수업을 통해 교육한다는 것은 옥상옥이 아닐까 싶다.


무엇보다 준비된 내용들이 모두 발표되지 못하고 시간에 쫓겨 서둘러 마무리해야 하는 점이 좀 아쉬웠다. 교사들이 준비한 많은 내용이 수박겉핥기보다 못하게 스쳐지나가고 말았다. 결국 마지막 토론 부분은 기차 시간 때문에 보지 못하고 나와야 했다. 그러나 발제 자체가 가을 하늘을 음속으로 돌파하던 전투기처럼 지나갔는데, 그 흔적을 쫓는 토론도 그렇게 충실하게 진행됐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광주까지 내려와 광주 지인들을 못보고 바로 올라오려니 무척 아쉬웠다. 출장 자체가 갑작스러워 그런 여유를 둘 수가 없었다. 그런 틈으로 그나마 점심 시간의 여유를 광주 공기로 채우고 왔으니 그것으로 위로를 삼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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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가 없던 시절 아이들의 놀이는 주로 야외에서 이루어졌다. 술래잡기, 다방구, 얼음땡, 오징어(일종의 야외 전투 게임) 등은 어릴 적 하루해를 짧게 만들었던 즐거운 놀이들이었다. 잘 못하는 아이들은 깍두기를 시키고, 나름대로 작전과 전략을 고민하면서 놀이를 즐겼다. 하지만 이런 놀이를 하다가 종종 다치는 일도 있었다. 찰과상 정도는 너무나 빈번히 일어났고, 멍듦, 타박상 등도 심심치 않게 생겼다. 심하면 탈골, 골절이나 인대 파열 등이 발생하곤 했고 아주 심한 경우 돌이킬 수 없는 장애를 입거나 사망 사고로 이어진 경우도 없지는 않았다. 돌아보면 우리의 놀이는 꽤나 격렬하고 다이내믹했었다.


그렇다면 요즘 아이들은 어떨까. 야외 놀이라고 해봐야 축구나 농구, 야구 등 성인들이 스포츠라고 했던 것들이 대부분이다. 요즘 아이들에게 다방구니 술래잡기니 오징어 같은 놀이는 생소하기만 할 거다. 놀고 싶어도 또래가 별로 없고, 있다고 해도 다들 학원을 가거나 과외를 받느라 동네 어귀는 쓸쓸하다. 적어도 오프라인에서 아이들 놀이의 다양성은 사라지고 있다. 일부 놀이들도 어른들에 휩쓸려 그들만의 문화는 종적을 감추고 있다.


그런 와중에 컴퓨터 게임이 사회적 문제라는 인식이 대두되고 있다. 게임 중독이란 말도 심심치 않게 언론에 오르내린다. 과연 컴퓨터 게임은 아이들을 위협하는 존재일까?


간단히 말해 컴퓨터 게임은 지금의 아이들이 즐기는 놀이 중에 가장 안전한 게임이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예전에는 아이들 부상의 제1원인이 놀이(게임)이었지만 컴퓨터 게임 때문에 아이들이 다치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하지만 뉴스에서는 심심치 않게 게임 중독으로 인한 사망, 절도, 사기, 살인 등의 사건사고 소식을 전하고 있다. 이런 일이 벌어질 때마다 게임 중독에 대한 규제의 목소리가 높다. 만일 그러한 강력사건들이 게임 중독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면 당연히 법과 제도로 게임을 규제하고 제한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는 또 다른 중독도 많다. 많은 직장인들이 주말이나 휴일도 없이 열정적으로 일하다가 돌연사하는 일이 비일비재다. 워커홀릭이란 말도 생겼다. 아무래도 일에 중독된 사람들이 너무나 많으니 일을 너무 열심히 하는 사람과 직장에 대한 규제가 필요하겠다. 많은 학생들이 아침 7시부터 밤 12시까지 공부하다가 우울증과 스트레스에 시달려 자살을 하고 있다. 공부가 사망의 원인이니 규제해야 마땅하다. 많은 산모들이 아이를 출산한 후 양육 스트레스로 인한 과로로 우울증에 시달려 주위 사람들을 괴롭히거나 심지어 자녀를 살해하고 자신도 자살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따라서 출산을 제한하고 규제하는 법안이 필요하겠다.


물론 엉뚱한 논리다. 우리가 어떤 단어에 ‘중독’을 붙이는 것은 그것이 필연적인 결과로 나타나는 증상들이 신체나 사회에 부정적인 영향을 직접적으로 끼쳤을 때 표현할 수 있는 말이다. 일하는 사람들 중에 과로사가 나온다고 일을 규제하지 않고, 산모 중에 우울증이 심하다고 해서 출산을 제한하는 법률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게임 역시 일부에서 나타나는 부작용만으로 게임 을 규제한다는 것은 일면 필요한 부분이 없지 않으나 너무 쉽게 이야기되는 경향이 있다. 여기에는 게임을 부정적으로만 보려는 시각과 게임에 대한 몰이해가 깊게 깔려 있다. 그토록 ‘게임 중독’에 대해 수많은 미디어들이 강력한 경고를 보냈지만 게임과 범죄를 직접적으로 연관 지을 수 있는 어떠한 연구 결과도 발표된 바가 없다는 점이 이를 시사한다. 지금 뉴스에 등장하는 사건사고의 원인을 가난, 소외, 따돌림, 과도한 스트레스  등으로 대처해 보라. 오히려 정답에 가까울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토록 게임에 대한 편견과 몰이해가 사회적으로 퍼져 있을까. 그것은 사회를 주도하는 어른들 대부분이 게임에 대해 모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우리 때는 저러지 않았는데, 요즘 젊은 것(혹은 어린 것)들은... 쯔쯔쯧”이라는 말로 쉽게 치부해 버린다. 일면 그런 인상을 받을 수도 있겠다. 게이머들을 제3자의 입장에서 보면 매우 우스꽝스러운 모습일 수도 있다. 아마 대부분의 부모들이 아이들이 컴퓨터 앞에 앉아서 게임에 몰두한 모습을 보면서 기겁을 하는 것도 그 이유일 것이다. 평소에는 똘똘하고 부모말 잘 듣는 아이가 컴퓨터 앞에 앉으면 입을 벌리고 정신없이 키보드와 마우스를 난타하며 혼잣말을 하는 모습은 이상하게 보일만하다. 그러나 그것은 집중하고 있는 모습일 뿐이다. 어른들이 고스톱이나 윷놀이에 집중하고 있는 모습도 이와 다르지 않다. 그저 아이들이라서 더욱 이상하게 보는 것일 뿐이다. 무언가에 몰입하고 집중하고 극한의 카타르시스를 느낄 때의 표정, 쉽게 말해 어른들이 섹스를 할 때의 표정도 그와 같지 않나.


스타크래프트의 정식버전은 18세 이상 가능이지만 그보다 수위가 낮은 12세 버전도 시중에 나와 있다.


본인이 유일하게 즐기는 월드오브워크래프트는 15세 이상 할 수 있는 게임이다.



세상은 많이 달라졌다. 지금은 21세기이며 아이들은 컴퓨터와 인터넷을 통해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하고 있다. 부모가 아이들이 게임을 즐기는 것을 그저 스트레스나 풀겠거니 하며 방치하거나 ‘게임은 나쁜 것’이라고 하면서 죄책감을 준다면, 아이들은 게임을 통해 스트레스와 폭력성을 키울 것이고, 죄책감을 털어내기 위해서 더욱 더 게임을 통한 일탈과 반항을 생각할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당연히 게임에 대해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아이들이 즐겨 하는 게임의 장점을 이해하고 그 게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즐기는 부모가 되어야 한다. 스타크래프트가 가진 전략성을 통해 종합적인 사고의 중요성을 이야기하고 월드워크래프트 속의 신화와 전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구성해 보자.


“아들, 밀려오는 저글링 러쉬를 깨려면 시즈 탱크를 언덕 위에 배치하는게 좋아.”

“아무래도 언덕 탱크를 공략하기 위해서 공중 공격을 해오겠죠?”

“그렇지, 그렇다면 터렛(대공미사일 기지)을 설치해서 방공 능력을 보강하는 건 어때?”


“아빠, 드워프들은 왜 키가 작고 뚱뚱하죠?”

“드워프는 북유럽 신화에 등장하는 인간보다 작은 난장이란다. 어두운 곳을 좋아하고 땅굴이나 동굴에 모여 사는 종족이지.”

“아, 그래서 채굴에 능하다는 거군요.”


아이들의 게임을 규제하는 것은 필요하다. 하지만 단순히 게임 시간을 통제하는 것만으로 가정이나 학교에서 할 일을 다한 것이 아니다. 교육의 진실은 수평적인 대화를 통한 이해와 공감에 있다. 게임을 즐기는 아이와 대화하고 그 게임을 이해하려고 하자. 얼마나 편한가, 만일 아이가 다방구나 술래잡기, 오징어를 하자고 했다면 아마도 당신은 부상의 위험이나 심신의 피로를 경험할 텐데, 고작 컴퓨터 게임 아닌가? 설마 클릭과 키보드 조작이 힘들다고 핑계될 것인가? 물론 지나치게 폭력적이고 선정적인 게임에 대해서는 단호히 못하게 해야 한다. 그렇지만 모든 게임이 그렇지는 않으며 아이들이 얼마든지 즐길 수 있는 게임이 많다. 아이와 대화를 하기 위해서 함께 게임을 하는 것도 반드시 필요하다. 겉으로 이해하는 척하는 것과 함께 몰입하고 즐기는 것은 천지 차이다. 부모가 함께 게임을 즐기고, 게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자. 아이들이 게임 안으로 숨어 들어 게임 속에서 방황하기 전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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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들은 말이 통하지 않아! 지금 이건 너희들이 자초한 거다.”

“이게 다 너희들을 위해서다. 이렇게 해야 사고가 나지 않으니까.”

“역시 맞아야 제대로 돌아가지.”

“너희들한테 나쁜 감정이 있는 건 아니다. 우리도 어쩔 수 없다.”


내 군대 시절, ‘집합’이라고 불리는 얼차려 시간에 고참병들이 늘어놓는 말이었다. 공식적으로 군은 병사 간에 신체적 폭력을 동반하는 얼차려나 기합을 금지하고 있다. 내 군대 시절도 벌써 10년 전 일이고 실제 군대를 다녀온 많은 후배들이 지금은 ‘집합’ 같은 건 없다고 하니 다행이다.


“많은 아이들을 통제하려면 어쩔 수 없이 매를 들어야 합니다.”

“아이들을 위해서 하는 거죠. 우리도 그게 좋아서 하는 거겠습니까?”

“애들은 맞으면서 크는 거죠.”

“사랑의 매라는 것도 있지 않습니까. 감정 없는 체벌은 필요합니다.”


군대 내에서 들었던 고참들의 말과 다를 바가 없다. 학교 현장에서 수많은 아이들을 통제하려는 과정에서 체벌은 강력한 수단으로 이용되어 왔다. 하지만 신체적 체벌은 아동에게 장단기적인 잠재적 피해를 가져온다는 사실이 개인과 사회에서 확실하게 나타나고 있다. 2006년에 발간된 ‘UN아동 폭력에 대한 최종 보고서’에서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아동은 시종일관 모든 폭력이 없어지기를 간절히 바랬다. 어른들의 용인과 승인 하에서 이루어지던 폭력은 아동에게 신체적 그리고 심리적 피해를 가져왔다.”


전 세계의 아이들은 애타게 자신이 신체적․정신적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길 원하고 있다. 그것은 인간적인 권리이며, 아동청소년 역시 인권의 주체라는 점은 새삼 거론할 필요가 없다. 우리 사회가 헌법적․법률적으로 어떤 인간에게도 신체적 정신적 폭력에 대해 관대하지 않음에도 유독 아동에게만 체벌을 가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는 것은 왜일까.


많은 어른들이 아이를 때리는 것은 아이를 올바른 길로 안내하기 위한 수단으로 여기고 있고 실제로 그런 마음으로 매를 들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보통 여성이나 일반 성인에게 행해지는 신체적․정신적 폭력에 대해서 사회적으로 어떠한 것도 인정하지 않고, 최소한의 폭력 수준이라는 기준점도 마련하지 않고 있는 것처럼 아동 역시 그런 폭력의 허용이나 기준선 마련은 불필요한 것이다.


한편에서 법제정자들과 정부, 학교 당국자 등은 체벌과 관련한 기준선을 제시하는 규정을 통해 아동을 보호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실상 그 규정이라는 것은 ‘아동을 때리는 방법, 나이에 따른 강도, 몸의 부분, 사용되는 도구’ 등을 정하고 있는 것인데, 사실 이것은 매우 위험한 것이다. 이러한 규정을 세계에 내놓는다면, 선진화를 외치고 있고 G20 회의를 개최하는 나라로서 망신만 당하고 말 것이다. 이미 아동권리위원회가 지난 2003년 우리나라에 체벌 금지를 권고한바 있다.


체벌을 원천적으로 금지하는 규정을 두는 것 자체가 어쩌면 우리 사회가 아동청소년을 바라보는 전근대적인 문화적 수준을 보여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또한 세계에 내놓기 부끄러운 규정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라도 해서 보편화되어 있는 체벌에 대한 인식을 바꿀 필요가 있다.


국가인권위는 2002년 교육부가 발표한 학교생활규정(안)을 검토한 뒤, 직접적으로 체벌 금지를 권고했다. 당시 교육부 발표 내용은 위에서 언급했듯이 구체적인 체벌의 기준을 마련해 놓고 있었다. 그에 따르면 ‘별도의 장소에서 제3자를 동반하여 실시, 체벌 도구는 지름 1.5cm 내외, 길이 60cm 이하의 직선형 나무, 체벌 부위는 남자 둔부ㆍ여자 대퇴부, 1회 체벌봉 사용 횟수는 10회 이내’ 등으로 자세하게 나와 있었다. 국가인권위는 이에 대해 원칙적으로 체벌 금지를 권고했다.


체벌은 일시적으로 아동을 통제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체벌의 공포에 직면한 아동들은 불안감, 우울증, 학교강박증, 적개심 등 부정적 감정을 버리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오히려 아동들은 학교나 가정에서 어른들이 훈육이라는 논리로 아동을 때리는 것을 보아오면서, 자신보다 약한 다른 아동이나 동생들을 똑같은 논리를 이용해 폭력적으로 가르치려는 행동을 답습하게 될지도 모른다.


‘사랑의 매’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만일 ‘사랑의 매’가 있다면, 그 대상은 어른이 되어야지 아동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지난 해 3월 유엔아동권리협약 20주년을 기념해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열린 ‘학생체벌 금지와 교육적 대안 모색’ 국제워크숍에서 기조연설을 한 피터 뉴웰 대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성인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인격적 신체적 존엄성을 아동들은 아직 온전히 보호받지 못하고 있다. 체벌을 법으로 금지해야 하는 것은 부모를 기소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성인을 때리면 안 되는데 아동은 때려도 괜찮다는 인식과 상황을 바꾸기 위한 것이다.”






국가인권위원회 블로그 '별별이야기'에 보낸 글을 재수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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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하 작가의 글
교과서에 실리지 않을 권리는 없는가?
여러분은 문학을 '배우'셨습니까?


이미 공공재로 돈을 내면 얼마든지 볼 수 있는 글을 교과서에 실린다고 반대한다는 건, "내 글은 돈 내고 볼 수 있으며, 어떠한 비평이나 교육, 보도, 연구의 목적으로도 사용할 수 없다"는 말일까? 이름 있는 작가가 생각할 깜량은 물론 아니다. 그의 글의 내용의 주는, 국어 교과서에 실리는 순간 자신의 작품이 가진 상상력의 세계와 작가의 의도가 교과서의 편저자에 의해 왜곡되거나 곡해되는 것, 나아가 자유롭게 상상하고 생각해야 할 학생들의 생각을 시험이라는 잣대에 따라 일관되게 만드는 것 등에 대한 심각한 문제제기로 보인다. 또, 지금의 문학 교육이 가지는 모순에 대한 불만과 지적도 엿보인다.

아동의 배울 권리는?

이야기에 앞서 국정 교과서가 아닌 검정 교과서 체제에서 문학 교육을 국가가 주도한다고 단정짓는 것은 어렵다는 말을 하고 싶다. 검정 교과서의 현재 심사 기준은 문학의 세세한 해석까지 간섭하고 있는 것이 아니며, 학생의 수준에 맞는 문학 지식이나 이해의 수준을 정하는 선에서 제시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국가가 문학 교육을 주도하고 있다는 오해는 접었으면 한다. 또 교과서에 실리지 않을 작가의 권리를 지키는 과정에서 현 시대의 문학을 배울 권리가 있는 아동청소년에 대한 권리 침해는 어떻게 할 것인가의 문제도 생각해 보자(아이들은 저작권법과 무관한 옛날 문학만 봐야 할까). 아동청소년들이 공공의 영역에서 시행되는 최소한의 교육으로 문학은 배울 '가치'가 있는가 없는가에 대해서도 고민해 보자.

문제는 대학지상주의에 있다. 전국적으로 단일하게 실시하는 대학 수능시험 때문에 문학 교육 뿐만 아니라 다양한 해석과 관점이 필요한 여타 다른 과목(예를 들어 역사나 윤리, 사회)마저 정량화되고 획일화되는 해석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문제는 조금씩 변화의 흐름이 감지되고 있다. 수학능력 시험이 대학의 당락에 미치는 결정적인 영향력이 줄어들고 있는 것이다. 말 그대로  대학 공부에 필요한 학습 능력을 시험한다는 본래의 취지에 맞게 변화되고 있다. 수학 능력 시험에 대한 변별력이 약화되고 시험에 대한 의존도가  낮아지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이는 대학 입시에서 다양한 해석과 관점을 가진 사람을 포용할 수 있는 방향으로 바뀌고 있다는 신호다. 예전처럼 암기와 이해식 학습능력만으로 대학 가던 시대는 아니라는 얘기다.

오히려 학생시절에 했던 다양한 활동이 대학 입시에 큰 영향을 주고 있다. 이는 문학에서 하나의 관점이나 해석을 강요하던 흐름도 바꾸어 놓았다. 중학교 1학년 학교 현장에서는 올해부터 새로운 개정 교육과정에 따른 교과서로 배우고 있다. 이번 개정 교육과정의 주요 시사점은 기존의 원론적 지식의 이해암기식 교육에서 '어떻게 학습할 것인가'에 더 주안점을 두었다고 볼 수 있다. 학습자들이 학습 과정에 충실할 것을 요구하며, 학생들 스스로 자신의 학습 목표와 방법 내용을 만들어가는 것을 중요시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활동에서도 토론과 토의 중심의 모둠활동을 강조하는 내용에서도 엿보인다. 소통을 중요시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의견을 존중하고, 내 의견을 조리있게 표현할 수 있는 힘을 요구하고 있다. 하나의 정답에 맞추어서 똑같은 대답을 요구하지 않고 다양한 의견이 존재하고 다양한 방법으로 접근하고 해석하여 답을 구할 수 있음을 알아가는 과정이다. 지금의 검정 교과서는 이런 개정교육과정의 취지에 적합한 교과서들이 합격해 교육현장에 배포된 것들이다.

물론 교과서 하나가 교육이라는 거함을 움직일 수는 없다. 큰 배가 움직이는데는 다양한 분야의 협업이 필요하고, 또 설령 협업이 잘 이루어진다고 하더라도 큰 이동 궤적은 필수적일 수밖에 없다.





문학의 가치를 생각하자


"문학을 '배울' 수 있는가"라는 작가의 질문에는 이렇게 답해 주고 싶다. 문학은 충분히 (학교에서) 배울 '가치'가 있다. 작가의 말대로 문학은 예전에 주요 과목이 아니었다. 지금도 고교 2,3학년에서는 선택 과목의 하나에 불과하다. 그러나 우리 사회가 양적 질적 성장을 거치면서 문화적 삶의 질을 높이려는 시도의 하나로 문학 교육이 기본 교육의 하나로 학생들이 갖추어야 할 교양이 되었다. 작가가 예를 들어 설명한 만화로 말하자면, 불과 10년 전에 '만화 비평가'라는 말은 잘 찾아보기 힘들었다. 이제는 '만화 비평가'에 '만화 전문 학과'까지 대학에 생겼다. 언젠가는 만화도 교과서에서 다루어야 할 주요한 문화 장르의 하나가 될 것이 분명하다. 그만큼 문화적 학문적 가치로 학생들이 학교에서 배울만한 '가치'가 확보되고 있는 것이다. 참고로 새로 나온 개정교육과정에 만화 컷이 들어가지 않은 교과서가 있다면 말해주기 바란다. 아마도 없을 것이다.

공교육에서 배우는 모든 것들은 실생활과의 접목에 중점을 두고 있다. 과목의 선정뿐만 아니라 그 과목의 내용 또한 현실에서 학생들이 부딪히고 만나야 할 문제들을 어떻게 풀 것이며, 스스로 해결해 나갈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비교적 젊은 작가이며 현존하는 작가의 최근 작품을 수록한 것도 이런 흐름 속에서 나타난 결과물이다. 수학은 지금까지 혼자 끙끙대며 풀어야 하는 문제였다면 지금의 개정교육과정에서는 함께 소통하며 문제를 푸는 능력을 요구하고 있다. 하물며 문학 교육은 소통의 가치를 배우며 인문학적 소양 기본이 되는 학문으로서 학생들이 배울 가치가 있는 학습의 하나라는 건 두말하면 잔소리다.

공교육은 최소한의 교육이라고 본다.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최소의 기준에 맞추어서 이것만큼은 우리 세대가 학생들에게 전수해야 하는 공통의 과제를 선정한 것이다. 여기서 문학 교육을 빼야 할 이유를 나는 찾을 수 없다. 비록 그 방법과 내용이 마음에 안들거나 잘못된 부분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빼자고는 할 수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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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학교 다닐 때 새 교과서를 받으면 그 냄새부터가 기분이 좋았어요. 집안이 넉넉지 못해서 새 책을 사주는 일이 드물다 보니 새 교과서를 받는 날이면 눈코입귀손 등 오감을 동원해 책을 느끼며 좋아했지요. 그리고 지난 달력을 가져와 교과서를 표지를 싸는 일도 즐겁기만 했는데요.

그런 시절에도 누구나 한번쯤은 교과서에 낙서 한 번 안해 본 사람이 없었을 겁니다. 표지의 ‘국어’를 ‘북어’로 ‘수학’을 ‘잠수함’으로 고치는 장난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한 듯합니다. 무엇보다 교과서 삽화에 장난하는 것도 똑같습니다. 인터넷에 올라온 아이들의 교과서 낙서를 보면 순정만화 그림부터 성적인 호기심을 드러내는 그림, 코믹한 그림 등 아이들의 재기발랄한 낙서들이 넘쳐납니다.



  





인터넷 검색으로 본 청소년들의 낙서를 보면서, 일찍부터 경쟁 체제에 내몰린 아이들이 그 스트레스를 교과서에 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간혹 무시무시한 폭력 장면, 살인이나 폭행 등을 그려 넣은 엽기적인 그림도 더러 볼 수 있는데, 그 정도로 청소년들의 낙서에서는 날이 시퍼렇게 서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지요. 칼이나 총, 살인, 폭력, 욕설 등이 예사로 등장하는 것을 보면, 지금 이 청소년들이 아프다고 아우성치는 소리를 듣는 것 같습니다.







학업에 대한 부담감도 크고 학교 수업보다 학원 수업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풍조로 인해 교과서가 무시되고 있는 현실도 한몫하고 있습니다. 학생들은 수업시간이 졸리거나 지루하면 교과서에 낙서를 합니다. 지금의 교육 현실에서 모든 아이들을 만족시키는 수업을 한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걸 알지만, 선생님들이 좀더 아이들이 집중할 수 있는 수업을 고민하고 개발한다면 교과서 낙서도 줄지 않을까요.

물론 그러기 위해서 교과서 역시 잘 만들어야져야 합니다. 교과서에 인권침해나 차별적인 요소가 있다는 것, 그것도 어느 누군가에게는 폭력이 될 수 있죠. 그런 폭력을 교과서가 청소년들에게 심어주는 역할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전 교과서들은 무심결에 인권침해, 혹은 차별적인 요소들을 삽화로 사용한 경우가 간혹 있었습니다.




위 그림은 지난 교과서입니다. 두 삽화에서 여성이나 여아는 집안일, 육아를 담당하는 것으로 성역할을 고정화하는 편견을 담고 있습니다.




왼쪽 삽화에서는 여성은 치마, 남성은 바지, 그리고 직업군인은 모두 남자로 그렸습니다. 오른쪽 삽화에서는 의사와 조종사, 경찰은 남성으로 교사와 간호사는 여성으로 묘사했습니다. 이 역시 남녀를 차별하는 그림입니다.




왼쪽 삽화는 남성은 일, 생산에 종사하는 반면, 여성은 가사, 양육을 전담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또 오른쪽 삽화에서는 국제협약을 소개하는 것은 바람직하지만 각국 대표를 모두 남성으로만 그리고 있습니다.

교과서의 삽화는 아이들에게 해당 학습 내용을 좀더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돕는 중요한 학습 도구가 됩니다. 그러나 해당 학습 내용에만 국한되어 인권적인 내용을 소홀히 한다면, 작은 걸 얻고 큰 것을 잃는 결과가 되고 말 것입니다.

오늘 저녁에라도 댁의 자녀들이 학교에서 돌아오면 함께 교과서를 펼쳐 보세요. 자녀분들의 교과서에는 어떤 낙서가 되어 있나요? 창의적이고 재기발랄한 낙서들이 있다면 무조건 야단칠 것이 아니라 그 아이의 가능성을 가늠해 보시는 것도 좋겠습니다. 반면 아이들의 그림이 폭력적이라면 자녀와 진지한 대화를 나누어 보는 것이 어떨까요.

그리고 나서 아이들과 함께 교과서 안의 삽화들을 살펴보세요. 살펴볼 때는 다음 2가지 관점에서 보는 것이 좋습니다.

첫째, 고정관념에 따라 삽화를 구성한 것을 찾아보세요.

남자는 바지, 여자는 치마만 입고 있는 삽화, 여자만 집안일을 하고 있는 삽화, 여성이나 여아를 집안일이나 비역동적인 놀이를 하는 삽화 예를 들어 남아는 축구, 여아는 공기놀이 등을 하는 삽화, 중요하거나 고위직 등의 직업이나 직종은 남성 중심인 삽화 등을 찾아봅시다.

둘째, 삶의 다양성이 드러나도록 그려진 삽화를 찾아보는 거죠.

외국인을 그릴 때 긍정적인 모습에는 유럽계 외국인, 부정적 모습에는 아프리칸계 외국인으로 구분지어 그린 삽화는 없을까요? 또 놀이를 하거나 활동을 할 때 장애인을 넣지 않은 삽화도 생각해 볼 문제죠. 그리고 국제결혼 2세대 자녀의 모습도 삽화에 담겨져 있어야 할 것입니다.

어찌 보면 사소할 수 있는 문제겠지만, 세심한 배려나 관심으로 세상은 더 따뜻해질 수 있습니다. 작은 편견이나 차별이라도 그것이 누군가에게는 아픔이고 상처일 수 있다는 마음을 가질 때 세상은 더 아름다워질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인권위 기고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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