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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란 무엇 하나로 정의 내리기 어려운 존재입니다. 스스로 저차원적인 욕망을 제어할 수 없는 동물과는 다른 존재로 비유하고 있으면서도 고차원적인 동작을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해내는 기계와도 다르다고 말합니다.


인간은 그렇게 복잡하고 알 수 없는 존재죠. 어느 하나로 결론지어 말하기 어렵기 때문에 우리는 다양성을 존중하고 차이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노동자가 일만 하는 기계가 아니듯이 아이들 역시 공부하는 기계가 아닙니다. 조금만 참고 바짝 쪼이면 잠시나마 성적을 올릴 수 있겠지만 아이들의 자주성과 창의성 등은 그 과정에 말살되기 쉽습니다. 많은 부모들이 아이의 장래(대개는 대학과 직업의 동의어입니다)를 위해 서로가 조금만 참고 노력하자고 합니다만 실상 보이는 현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성적을 통해 볼 수 있는 아이들의 미래는 극히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스스로 무언가를 하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끝까지 의지를 밀고 갈 수 있도록 책임감을 북돋우고, 필요한 조건과 환경을 같이 고민해 만들어 나아가고, 그 과정에서 절제와 인내의 힘을 배울 수 있게 하는 것, 그것이 우리 사회가 학교 공부를 통해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할 교훈이겠죠. 성적은 그 다음에 따라오는 긍정적 결과물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석차는 이 과정에서 교훈과는 전혀 관계없는 부산물일 뿐입니다. 석차는 사회가 필요로 해 아이들을 서열화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대학을 고르는 사회가 아니라 대학이 아이를 고르는 사회는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이런 모습은 바뀌어야 합니다.


뉴스뱅크F 서비스가 종료되었습니다


청소년들이 스스로 목숨을 버리고 있습니다. 지난해 통계청 결과에 따르면 15~24세의 사망 이유 중 자살이 1위를 차지하고 있다고 합니다. 물론 그 자살의 이유는 가족 문제나 이성 문제 등도 섞여 있겠죠. 하지만 학교 및 학업과 관련된 자살 기사는 심심치 않게 신문지면 한쪽을 채우고 있습니다. 청소년 자살률을 낮추기 위해 할 수 있는 사회적 노력이 무엇이 있을까 고민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조심스럽지만 학생인권조례에 대한 논의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한국 사회만큼 성적과 체벌을 통해 청소년의 삶을 옥죄고 있는 나라는 없습니다. 그들에게 책임과 의무에 대해 가르치기 위해서는 그에 따른 권리와 자유도 주어져야 합니다. 권리와 자유에 대한 경험이 없으니 책임과 의무에 대해 무지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책임과 의무에 대해 무지하다며 권리와 자유를 가르치지 않는다면 위의 악순환을 멈추게 할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그런 아이들에게서 우리의 미래를 볼 수 있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아이들을 험악한 원형경기장의 검투사로 만들어 옆의 친구를 쓰러뜨리고 살아남는 법을 가르치는 교육보다는 드넓은 자연에서 모험을 통해 협력과 협치를 이해하며 책임과 의무를 배울 수 있는 교육이 더 좋은 교육이 아닐까요? 틀렸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다르다고 말하고 서로의 가치들이 존중받을 수 있는 사회가 아이들을 죽음으로부터 구하고 미래를 지켜낼 수 있을 것입니다.





국가인권위원회 블로그 '별별이야기'에 기고한 글을 재수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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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들은 말이 통하지 않아! 지금 이건 너희들이 자초한 거다.”

“이게 다 너희들을 위해서다. 이렇게 해야 사고가 나지 않으니까.”

“역시 맞아야 제대로 돌아가지.”

“너희들한테 나쁜 감정이 있는 건 아니다. 우리도 어쩔 수 없다.”


내 군대 시절, ‘집합’이라고 불리는 얼차려 시간에 고참병들이 늘어놓는 말이었다. 공식적으로 군은 병사 간에 신체적 폭력을 동반하는 얼차려나 기합을 금지하고 있다. 내 군대 시절도 벌써 10년 전 일이고 실제 군대를 다녀온 많은 후배들이 지금은 ‘집합’ 같은 건 없다고 하니 다행이다.


“많은 아이들을 통제하려면 어쩔 수 없이 매를 들어야 합니다.”

“아이들을 위해서 하는 거죠. 우리도 그게 좋아서 하는 거겠습니까?”

“애들은 맞으면서 크는 거죠.”

“사랑의 매라는 것도 있지 않습니까. 감정 없는 체벌은 필요합니다.”


군대 내에서 들었던 고참들의 말과 다를 바가 없다. 학교 현장에서 수많은 아이들을 통제하려는 과정에서 체벌은 강력한 수단으로 이용되어 왔다. 하지만 신체적 체벌은 아동에게 장단기적인 잠재적 피해를 가져온다는 사실이 개인과 사회에서 확실하게 나타나고 있다. 2006년에 발간된 ‘UN아동 폭력에 대한 최종 보고서’에서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아동은 시종일관 모든 폭력이 없어지기를 간절히 바랬다. 어른들의 용인과 승인 하에서 이루어지던 폭력은 아동에게 신체적 그리고 심리적 피해를 가져왔다.”


전 세계의 아이들은 애타게 자신이 신체적․정신적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길 원하고 있다. 그것은 인간적인 권리이며, 아동청소년 역시 인권의 주체라는 점은 새삼 거론할 필요가 없다. 우리 사회가 헌법적․법률적으로 어떤 인간에게도 신체적 정신적 폭력에 대해 관대하지 않음에도 유독 아동에게만 체벌을 가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는 것은 왜일까.


많은 어른들이 아이를 때리는 것은 아이를 올바른 길로 안내하기 위한 수단으로 여기고 있고 실제로 그런 마음으로 매를 들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보통 여성이나 일반 성인에게 행해지는 신체적․정신적 폭력에 대해서 사회적으로 어떠한 것도 인정하지 않고, 최소한의 폭력 수준이라는 기준점도 마련하지 않고 있는 것처럼 아동 역시 그런 폭력의 허용이나 기준선 마련은 불필요한 것이다.


한편에서 법제정자들과 정부, 학교 당국자 등은 체벌과 관련한 기준선을 제시하는 규정을 통해 아동을 보호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실상 그 규정이라는 것은 ‘아동을 때리는 방법, 나이에 따른 강도, 몸의 부분, 사용되는 도구’ 등을 정하고 있는 것인데, 사실 이것은 매우 위험한 것이다. 이러한 규정을 세계에 내놓는다면, 선진화를 외치고 있고 G20 회의를 개최하는 나라로서 망신만 당하고 말 것이다. 이미 아동권리위원회가 지난 2003년 우리나라에 체벌 금지를 권고한바 있다.


체벌을 원천적으로 금지하는 규정을 두는 것 자체가 어쩌면 우리 사회가 아동청소년을 바라보는 전근대적인 문화적 수준을 보여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또한 세계에 내놓기 부끄러운 규정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라도 해서 보편화되어 있는 체벌에 대한 인식을 바꿀 필요가 있다.


국가인권위는 2002년 교육부가 발표한 학교생활규정(안)을 검토한 뒤, 직접적으로 체벌 금지를 권고했다. 당시 교육부 발표 내용은 위에서 언급했듯이 구체적인 체벌의 기준을 마련해 놓고 있었다. 그에 따르면 ‘별도의 장소에서 제3자를 동반하여 실시, 체벌 도구는 지름 1.5cm 내외, 길이 60cm 이하의 직선형 나무, 체벌 부위는 남자 둔부ㆍ여자 대퇴부, 1회 체벌봉 사용 횟수는 10회 이내’ 등으로 자세하게 나와 있었다. 국가인권위는 이에 대해 원칙적으로 체벌 금지를 권고했다.


체벌은 일시적으로 아동을 통제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체벌의 공포에 직면한 아동들은 불안감, 우울증, 학교강박증, 적개심 등 부정적 감정을 버리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오히려 아동들은 학교나 가정에서 어른들이 훈육이라는 논리로 아동을 때리는 것을 보아오면서, 자신보다 약한 다른 아동이나 동생들을 똑같은 논리를 이용해 폭력적으로 가르치려는 행동을 답습하게 될지도 모른다.


‘사랑의 매’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만일 ‘사랑의 매’가 있다면, 그 대상은 어른이 되어야지 아동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지난 해 3월 유엔아동권리협약 20주년을 기념해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열린 ‘학생체벌 금지와 교육적 대안 모색’ 국제워크숍에서 기조연설을 한 피터 뉴웰 대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성인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인격적 신체적 존엄성을 아동들은 아직 온전히 보호받지 못하고 있다. 체벌을 법으로 금지해야 하는 것은 부모를 기소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성인을 때리면 안 되는데 아동은 때려도 괜찮다는 인식과 상황을 바꾸기 위한 것이다.”






국가인권위원회 블로그 '별별이야기'에 보낸 글을 재수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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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HCR의 친선대사인 영화배우 ‘안젤리나 졸리'>




영화에 대해 문외한인 내가 처음 안젤리나 졸리를 알게 된 것은 영화 ‘툼레이더’였다. 캄보디아를 배경으로 한 이 영화에서 졸리는 섹시하고 지적인 여전사의 이미지를 한껏 풍기며 전 세계인의 시선을 끌어 모았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사라기 보다는 인권 천사가 더 어울린다. 그는 2001년 유엔난민기구의 친선대사로 임명받은 이후 30여 개국의 난민촌을 누비면서 난민들의 실상을 전 세계에 알렸고, 그가 직접 기부한 금액만도 수백만 달러에 달한다. 그가 캄보디아와 에티오피아의 아동을 입양한 일은 많은 사람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인권전문가들에게 졸리는 여전사이기 보다는 난민인권옹호가로서 난민들의 천사라는 점은 분명하다.

2001년 그가 처음 유엔난민기구(UNHCR)의 친선대사가 됐을 때만 해도 사람들은 그의 영화 ‘툼레이더’를 홍보하기 위한 것이 아니냐는 시선도 있었다. 영화 ‘툼레이더’가 그가 영화배우로서 인기를 얻는 데 큰 영향을 미친 건 사실이다. 그러나 그녀는 영화를 촬영하며 본 캄보디아의 난민 상황에 대해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영화촬영을 마치고 2년 후인 2001년 7월 그녀는 UNHCR의 초청으로 다시 캄보디아를 찾았을 때, 아마 그녀는 이미 난민들을 위해 살겠다는 각오를 하고 있지 않았을까. 거기서 그녀는 난민 정착 운동을 펴고 있는 크메르 루즈 지역을 집중적으로 돌아보았고, 공산반군이 최후까지 저항한 안롱방도 방문했다. 이 방문은 여정의 마지막 날에 언론에 공개되었다.

그가 캄보디아를 방문한 다음 달 8월 21일 UNHCR은 그녀를 유엔 친선대사로 선정한다고 발표했다. 사실 유엔의 친선대사로 선정되는 과정은 쉽지 않다. 유엔의 각 기구들은 친선대사 활동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 내부적으로 엄격한 조건과 자격 및 활동 기준을 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해당 분야에 대해 꾸준한 관심과 헌신적인 노력을 필요하기 때문에 친선대사 임무를 수행하는 것은 쉽지 않다.

이후 시에라리온, 탄자니아, 캄보디아, 에콰도르,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등 고통 받는 난민들이 있는 곳이면 어디라도 찾아갔다. 그 과정에서 캄보디아와 에티오피아 아동을 입양했고, 자신의 자녀들과 함께 난민촌 캠프를 찾아다니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2007년 3월 미국주간지 뉴스위크와의 인터뷰에서 처음 2년간의 친선대사 활동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처음 2년여간은 어떤 일도 감정적으로 되지 않고는 이야기를 할 수 없었다. 눈물의 시간을 보낸 다음에는 그들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정치인들에 대한 분노로 가득했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 국제문제와 관련된 많은 책을 읽으면서 보다 큰 그림 속에서 상황을 파악할 수 있게 됐다.”

그는 난민들을 진실한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보았으며, 시간이 흐르면서 이성적으로 난민 문제를 바라보는 안목을 키워갔던 지적인 여인이다. 2002년 유엔 기자협회는 그녀에게 ‘유엔 세계 시민상’을 수여했고, 2005년에는 유엔이 ‘유엔 글로벌 인권상’을 전달하기에 이른다.

그가 영화 홍보 차 우리나라를 방문했음에도 기자 회견에서는 영화 내용과는 관계없는 탈북난민 문제에 대한 질의가 나오기도 했다. 그녀가 유엔 친선대사이기 때문에 가능한 풍경이다.

하지만 국가인권위원회가 실시한 우리나라의 난민 실태 조사에 따르면, 우리 정부는 아직 갈 길이 멀다.

국가인권위원회는 2008년에 국내에 거주 중인 난민 신청자, 난민 인정자, 인도주의적 체류허가자 등 300여명을 대상으로 설문 및 심층 면접 조사 방식으로 실태조사를 벌였다. 그 결과, 국내 거주 난민들은 난민 신청 과정에서 법률적인 도움을 거의 받지 못하고 있고, 난민 신청 후 인터뷰하기까지 1년 이상의 시간이 소요되고 있었으며, 인터뷰 과정에서도 통역 서비스 등을 제공받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난민 신청자 중 취업 등을 이유로 장기 구금된 경우도 있었으며, 기초생활보장 수급권자의 지위 인정이 안될 뿐 아니라 아무런 사회통합 프로그램도 없었다.

안젤리나 졸리는 2005년 유엔글로벌 인권상을 받는 시상식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망명자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은 매우 큰 특권이며 우리의 아이들에게 관용과 이해의 세계에서 살 수 있도록 해주는 것보다 더 큰 임무는 없다고 본다.”

그의 말처럼 박해와 탄압을 피해 자유와 평화를 찾아 우리나라로 찾아 온 모든 이들에게 우리나라의 따뜻한 관용과 이해의 깊이를 보여줄 수 있는 난민 정책을 시행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국가인권위원회 블로그 '별별이야기' 에 기고한 글을 재수록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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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란 무엇 하나로 정의 내리기 어려운 존재입니다. 스스로 저차원적인 욕망을 제어할 수 없는 동물과는 다른 존재로 비유하고 있으면서도 고차원적인 동작을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해내는 기계와도 다르다고 말합니다. 인간은 그렇게 복잡하고 알 수 없는 존재죠. 어느 하나로 결론지기 어렵기 때문에 우리는 다양성을 존중하고 차이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노동자가 일만 하는 기계가 아니듯이 아이들 역시 공부하는 기계가 아닙니다. 조금만 참고 바짝 쪼이면 잠시나마 성적을 올릴 수 있겠지만 아이들의 자주성과 창의성 등은 그 과정에 말살되기 쉽습니다. 많은 부모들이 아이의 장래(대개는 대학과 직업의 동의어입니다)를 위해 서로가 조금만 참고 노력하자고 합니다만 실상 보이는 현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성적을 통해 볼 수 있는 아이들의 미래는 극히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스스로 무언가를 하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끝까지 의지를 밀고 갈 수 있도록 책임감을 북돋우고, 필요한 조건과 환경을 같이 고민해 만들어 나아가고, 그 과정에서 절제와 인내의 힘을 배울 수 있게 하는 것, 그것이 우리 사회가 학교 공부를 통해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할 교훈이겠죠. 성적은 그 다음에 따라오는 긍정적 결과물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석차는 이 과정에서 교훈과는 전혀 관계없는 부산물입니다. 석차는 사회가 필요로 해 아이들을 서열화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대학을 고르는 사회가 아니라 대학이 아이를 고르는 사회는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이런 모습은 바뀌어야 합니다.


아이들이 스스로 목숨을 버리고 있습니다. 지난해 통계청 결과에 따르면 15~24세의 사망 이유 중 자살이 1위를 차지하고 있다고 합니다. 물론 그 자살의 이유는 가족 문제나 이성 문제 등도 섞여 있겠죠. 하지만 학교 및 학업과 관련된 자살 기사는 심심치 않게 신문 지면 한쪽을 채우고 있습니다. 청소년 자살률을 낮추기 위해 할 수 있는 사회적 노력이 무엇이 있을까 고민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조심스럽지만 학생인권조례에 대한 논의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한국 사회만큼 성적과 체벌을 통해 청소년의 삶을 옥죄고 있는 나라는 없습니다. 그들에게 책임과 의무에 대해 가르치기 위해서는 그에 따른 권리와 자유도 주어져야 합니다. 권리와 자유에 대한 경험이 없으니 책임과 의무에 대해 무지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책임과 의무에 대해 무지하다며 권리와 자유를 가르치지 않는다면 위의 악순환을 멈추게 할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그런 아이들에게서 우리의 미래를 볼 수 있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아이들을 험악한 원형경기장의 검투사로 만들어 옆의 친구를 쓰러뜨리고 살아남는 법을 가르치는 교육보다는 드넓은 자연에서 모험을 통해 협력과 협치를 이해하며 책임과 의무를 배울 수 있는 교육이 더 좋은 교육이 아닐까요? 틀렸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다르다고 말하고 서로의 가치들이 존중받을 수 있는 사회가 아이들을 죽음으로부터 구하고 미래를 지켜낼 수 있을 것입니다.




국가인권위원회 블로그 '별별이야기' 기고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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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야유회를 다녀왔다. 사람들의 평점은 5점 만점에 4.18점. “참 잘했어요.”에서 “참”을 빼는 정도가 되겠다. 무난하게 끝났지만 스스로 평가해 보면 좋지 않다. 많은 사람과 함께 행사의 취지와 내용을 만들어 가는 과정, 그 안의 불만들을 받아 주고 서로가 다른 의견들을 하나로 모아가는 일, 야유회의 진행 과정에서의 부자연스러움 등은 나에게는 참으로 벅찬 일이었다. 거기다가 갑자기 몰려든 교재 편집업무까지 어느 것 하나 수월하게 진행된 것은 없었다.


돌아보면 사람들의 불만을 모으고 그 불만을 넘어 더 나은 결과를 내고자 했던 여러 실험들은 그다지 바람직한 결과를 내오지 못했다. 설문조사 자체에 대한 실험은 사람들에게 신선하게 다가갔으나 내용과 결과의 해석은 빈약하기 그지없었다. 사실 소집단의 의견수렴은 설문조사보다는 심층면접이나 익명성을 강조한 의견서 작성이 훨씬 효과적인 방법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 부분은 이후 다른 사례에 어떻게 극복될 수 있을지 미지수다. 충분한 시간과 지원은 꿈꾸기 힘들기 때문이다. 오로지 경험과 야근만을 강요하는 환경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야유회 행사에서도 미숙한 진행은 어쩔 수 없었다. 내 성격이 ‘다큐’에는 강해도 ‘예능’에는 젬병이라는 것도 하나의 이유다. 게다가 너무 자만한 것 아닌가 하는 의심도 든다. 내 능력을 넘어서는 일이었다. 남들 앞에 나서본 일이 없고, 하다못해 반장 한번 안 해 본 내가 뭘 행사를 진행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야유회가 재미없었던 것은 아니다. 행사를 준비하는 초기에만 해도 많은 사람들이 보이콧을 생각할 만큼 분위기는 무척 안 좋았다. 설상가상 설문조사 과정에서 팀장의 심기까지 건들고 만 일도 있다. 이때의 분위기는 험악하기까지 했었는데, 이런 과정을 무사히 넘겨 한 사람 빠짐없이 참여하는 야유회를 만들어 낸 것도 큰 성공이라고 자평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유회나 워크숍이 회사에 대한 애사심을 만드는 장이 되지 못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심지어 팀별 워크숍이나 야유회가 회사의 공식 행사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은 회사의 앞날을 암울하게 한다. 어디까지 믿고 따를 수 있을까에 대해 조직원들의 의심은 깊어만 간다. 물론 다른 회사의 경우를 본다면 그나마 인간적이라는 게 세간의 평이다. 하지만 회사는 '예능'이 아니라 '다큐'다.  조직은 그 무엇보다 살벌하게 돌아가기 나름이다. 그런 조직이 애사심을 갖게 하기 보다는 다른 탈출구나 요령만 생각하게 만든다면, 그 회사의 리더십은 바닥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다행인 것은 함께 일하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선한 사람들이 의지를 가지고 행동한다면 좋지 않은 조건과 환경에서도 충분히 좋은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다. 무엇보다 서로에게 불필요한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회사 생활을 엮어 나갈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이 회사의 가장 큰 자산이 아닐까. 야유회는 그런 성심들이 만들어낸 하나의 멋진 작품이었다. 미래는 결코 어둡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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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항의 "이제 됐어?"


끊임없이 홀로 전장터로 내몰리는 전사의 비애였을 것이다. 수없이 무찌르고 베어냈지만 여전히 몰려드는 검투사들, 끝나지 않을 원형경기장의 전투. 그렇게 원형경기장의 중앙에 우뚝 섰지만, 저 시체들 너머 더 큰경기장에서 더 잔인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고 누군가가 알려줬을 것이다. 아니, 이미 중앙에 올랐을 때 그는 알았을 것이다. 나는 누구를 쓰러뜨리고 내일을 기약해야 하는가. 더군다나 내 자리를 빼앗기 위해 달려드는 다른 검투사들과의 싸움은 언제쯤 끝날 것인가. 이 피의 비는 언제 그칠 것인가.

사실 우리 모두는 그렇게 경쟁 사회에 익숙해져갔다. 다행히 살아남았다는 이유로 우리는 더 강한 자라고 자위하고 있다. 사실 원형경기장의 전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대학에 들어가서도, 대학을 나와서도, 직장에 다니면서도, 그 치열한 전투의 트라우마는 번번이 삶의 한가운데서 불쑥 불쑥 고개를 내밀기 일쑤다. 그렇게 흔들리는 삶을 살아가며 끝나지 않은 전투를 벌이고 있다. 더 큰 원형경기장에서 더 큰 어른들과 벌이는 전투는 그저 성적표의 성적이 좀 떨어지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삶을 뭉텅이로 도려내고 나락으로 처박아 버릴 수 있는 잔인한 싸움이다.





어쩌면 그 아이는 물음표가 아닌 느낌표를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이제 됐어?"와 "이제 됐어!" 그가 마지막에 썼다는 그 물음표는 오히려 느낌표 보다 더 강렬하게 우리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지금 아이들은 포기하지 않고 극렬히 저항하고 있다. 그네들이 저항할 수 있는 모든 수단들은 철저히 막혀 있고, 아이들이 할 수 있는 마지막 저항인 자살로 내몰리고 있다. 절규하고 아파하는 아이들을 외면하는 사회는 결코 오래갈 수 없다. 학생인권조례를 통해 학교 안에서라도 아이들이 숨쉴 수 있게 하자는 것을 이념 갈등으로 치부하는 저 몰지각한 어른들에게 우리 아이들의 절규는 들리지 않는 것일까.

이 잔인하고 비열한 전투는 모두를 패배자로 만들었다. 단지 몇몇 한줌도 안되는 승자, 그것도 엄청난 재력과 권력을 이용해 등극한 승자들을 위한 요식행위에 동원되는 그저그런 사람들을 피할 수 없는 패배자, 루저의 나락으로 내볼고 있는 것이다.

다른 생각을 꿈꿀 수 있고, 더불어 사는 세상을 이야기하는 교육, 그것은 원형경기장의 담장을 허물어 버리는 시작이다. 틀렸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다르다고 말하고 서로의 가치들이 존중받을 수 있는 사회가 아이들을 구하고 미래를 지켜낼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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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회한 사회 노회한 조직                          


친구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내가 다니는 회사는 나이를 참 많이 먹었구나 싶다. 물론 회사가 45년이나 되었으니 사람으로 쳐도 중년을 달리고 있는 셈이지만 가끔 보면 그 이상의 연배를 느낀다. 한국 사회에서는 대립과 갈등이 있을 때 손쉽게 지위와 나이를 이용해 상대방을 제압하려는 경향이 있다. 유감스럽게도 우리 회사의 행동을 보면 45세가 아닌 60대 후반일 것 같은 고루함이 여기저기서 드러난다. 나이 듦에서 오는 신중함과 엄격함이 긍정적으로 보일 때도 있지만, 시대에 뒤쳐지는 프로세스나 시스템, 직원 복지 정책이나 회사 비전 등은 동종 업계 그 어떤 회사보다 노후화 되어 있는 회사가 아닌가 의심할 때가 많다.

2주 전부터 회사 워크숍을 준비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워크숍이라고 해서 어떤 중요한 이슈나 주제를 가지고 심층 토론이나 회의를 하겠다는 것은 아니다. 그저 구성원끼리 하루 잘 놀고 먹고 잘 수 있는 장소를 알아보라는 것이다. 문제는 회사는 모르는 비공식 워크숍이라는 점이다. 유감스럽게도 회사는 팀별 워크숍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러다 보니 예전 워크숍도 마치 007작전 수행하듯 몰래 회사를 빠져나가 개별적 혹은 조별로 해당 장소에 찾아가도록 지시를 받기 일수다. 그러니 지원금 등은 애초 바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런 문제에 대한 사람들의 불만은 팽배했다. 워크숍 이야기가 솔솔 나오기 시작한 몇달 전부터 "금요일 저녁에 출발하는 워크숍은 절대 갈 수 없다"는 불만이 나오기 시작했다. 사실상 회식도 아니고 토요일 오전까지 헌납해야 하는 워크숍에서 금요일 저녁 출발이라는 것은 누가 봐도 받아들이기 힘든 조건이다. 사실상 저녁에 출발해 술이나 마시고 놀다가 뻗어서 자고 다음날 아침에 돌아오는 그야말로 별 무의미한 일정만 소화하는 일에 사람들은 에너지를 낭비하고 싶지 않다고 공공연히 말했다. 팀별 워크숍에 대해 전혀 생각하지 않고 그 긍정적 효과나 발전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으며, 한푼도 지원하지 않는 우리 회사에 대한 반발, 조직의 고루함도 사람들의 불만을 부채질하고 있다. 이는 팀장에 대한 반발로 이어진다.



▲ 지난 해 영종도 워크숍의 한 장면



하지만 여기에는 조직원들 사이의 오묘한 이해관계의 대립도 없지 않다. 각각의 담당자들이 각자의 일을 수행하면서 겪는 상급자와의 오랜 갈등, 각 담당자들 간의 갈등, 조직원들간의 묘한 오해 또는 서먹함 등이 두껍게 쌓여 있다 보니 조직원들 간 소통의 장을 마련해 보려는 노력이 가치를 바랬다. 물론 1박2일 화려한 워크숍이 오래 쌓인 갈등의 때를 한번에 벗겨내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지만 적어도 속내를 편안하고 깊이 있게 이야기하고 서로의 입장에서 이해해 보려는 프로그램과 그것을 지원하는 회사의 노력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 아닐까.




아주 오래된 가치, 다양성의 회복                          


이렇게 부정적 분위기가 가득한 상황에서 워크숍을 준비하는 명을 받았으니 나로서는 곤혹스럽기만 했다. 윗사람에게는 금요일 일찍 출발하는 워크숍 일정을 받을 수 있도록 설득해야 하고 직원들에게는 부정적인 워크숍 인식을 긍정적 인식과 기대로 바꿔야 하는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구글 문서를 이용한 설문조사였다. 설문조사를 통해 직원 일반의 워크숍에 대한 인식을 윗사람들이 그대로 받아 안아야 하고, 그런 과정에서 서로의 입장을 설명하고 설득하여 워크숍에서는 즐겁게 이야기 나눌 수 있어야 한다는 과정을 그리고 있었다. 총 3차례에 걸쳐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내용은 부실하기 짝이 없었고, 오히려 상처를 덧내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과정도 부실했다. 그러나 전반적인 분위기는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결국 1박 2일 워크숍은 무산되고 대신 금요일 저녁의 바비큐 파티로 진행할 예정이다. 워낙에 다양한 개성과 업무로 어우러진 팀이라서 하나로 통일한다는 것이 굉장히 어렵다. 그러기 때문에 굳이 통일하기 보다는 서로의 이해를 요청하고 최대한 모두가 편안한 일정으로 잡아보려 하였다. 무엇보다 술자리 외에 무언가를 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인 일정이었다.

다양성은 조직에서 일을 진행하다 보면 힘들고 답답한 좁은 문처럼 보이지만, 그 문이 제대로 열린다면 누구나 오갈 수 있고 수많은 사람들이 드나들 수 있는 큰 문이 될 수 있다. 그러한 프로세스와 시스템을 갖추는 것이 어려운 일인 건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 사회에서 다양성을 버린다면 그건 윗사람의 입맛에 맞는 사람이 들어올 때까지 사람을 고르는 과정이 될 수밖에 없고 수많은 사람들이 나가고 들어오는 과정이 반복됨을 의미한다. 동료 직원이 수시로 바뀌는 것은 그만큼 일의 편차가 커짐을 의미하고 조직원들의 업무에 대한 스트레스는 자연히 급격히 늘어날 수밖에 없으며 이로 인해 퇴사하는 악순환이 반복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조직원들 사이에서도 다양성에 대해 폭넓은 이해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이번에 진행되는 워크숍(야유회)가 그런 계기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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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만의 투표다. 누구에게는 20년만의 투표일 것이다. 아니, 어떤 이에게는 평생 잊을 수 없는 투표가 될 수도 있다. 모두가 소중하다고 하는 그 선거권. 어찌 보면 성스럽기까지 하지 않는가. 이 투표용지 하나 얻어 보자고 우리는 1980년 광주에서 수많은 피들이 흩뿌려졌고, 1987년에는 넥타이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던 것이다. 투표용지를 볼 때마다 거기에 서려있는 피와 눈물을 느낄 때가 있다. 적어도 투표라는 행위는 민주주의에 있어 섬세하고 엄숙한 종교 의식과 다를 바가 없다.


얼마 전 드디어 집으로 선거공보물이 도착했다. 후보들의 면면이야 그동안 동네에 붙은 선거벽보를 통해 눈에 익어 있었는데, 내 눈에 가장 이색적으로 비친 것은 투표 장소였다. 이번 투표 장소는 이전의 종교 시설이 아닌 근처 경로당으로 잡혔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경로당은 바로 집 앞에 있었다.


생각해 보면 참 오랫동안 그 종교 시설에서 투표를 해왔다. 정확히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겠지만, 줄곧 한동네에서 20년 가까이 살고 있는 동안 그 종교시설이 세워진 이후로 한 번도 바뀌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특정 종교를 가지지 않은 나로서는 그다지 거부감을 느끼지는 않았다. 자원 봉사를 하는 청소년들의 친절한 안내를 동네 어귀부터 받을 수 있었고, 투표장 안도 적당한 넓이에 부산함 없이 줄을 서서 투표를 마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해당 종교시설도 번번이 투표 때마다 자신의 공간을 내어 주는 일이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대승적인 차원에서 공간을 내어 주고 민주주의의 성숙을 위해 희생한 것인만큼 그 장소에 대해 큰 불만은 없었다.


그런데 이런 생각도 들었다. 만일 기독교인이 절에 들어가서 투표해야 한다면? 만일 불교인이 성당 가서 투표를 해야 한다면? 만일 천주교인이 이슬람사원에 가서 투표를 해야 한다면? 물론 관광의 일환으로 절, 성당, 교회를 ‘구경’간다. 그러나 분명 엄숙하면서 즐거운 투표 행위가 종교적 신념과 다른 곳에서 치러진다고 할 때, 게다가 내밀한 나만의 비밀스러운 행위인 기표 행위가 부처님, 예수님, 하느님이 있다는 종교시설에서 치러질 때 느끼는 모종의 불안감(?)을 그냥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 정말 투표가 그런 사람들에게 민주주의의 축제일 수 있을까? 굳이 배타적일 이유는 없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종교적 신념을 존중하지 않는 투표소 설치는 재고될 필요가 있다.


2005년도 조사 결과를 보면 우리나라의 종교인은 절반을 넘는 53.6%라고 한다. 우리나라처럼 다양한 종교가 공존할 수 있는 배경에는 서로의 종교를 존중해 주는 전통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종교는 선택할 수 있지만, 투표 장소는 선택할 수가 없다. 17대 대통령 선거 당시 서울시만 해도 종교시설에 투표소를 설치한 곳이 2,210개 투표소 중 511개소(23.1%)로 꽤 많은 곳에 설치되어 있었다. 「공직선거법」 제147조 제2항은 투표소를 “투표구 안의 학교, 읍·면·동사무소 등 관공서, 공공기관·단체의 사무소, 주민회관 기타 선거인이 투표하기 편리한 곳에 설치”하도록 규정하고 있는데, 서울시처럼 사람들이 밀집해 있는 곳에 그런 공공장소가 없을 리가 없다. 물론 경로당이라는 공간을 투표 장소로 활용함으로써 경로당을 이용하는 노인들이 투표일 하루만큼은 불편을 겪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런 선거를 계기로 노인들의 사랑방인 경로당을 볼 수 있게 되었다. 더불어 많은 사람들이 경로당을 찾아와 그동안 소외된 공간이었던 경로당이 오랜만에 더 활기찬 모습을 보일 것으로 예상된다. 게다가 투표소 앞에서 사진을 찍어서 선관위로 보내면 추첨을 통해 경품도 준다고 하니, 경로당 앞에서 우리 세 식구 가족사진을 찍어봐야겠다. 이번 선거는 한결 더 신나고 재미있게 투표할 수 있어서 좋다.




2010. 5. 30. 국가인권위 블로그 기고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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