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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 8표다. 마음에 드는 후보들 이름 외우는 데도 한참 걸릴 것 같다. 얼마 전에 집으로 온 선거 공보물을 전부 펼치니 작은 방에 발 디딜 틈이 없다. 그래서 투표 당일에는 후보들 이름을 메모해 갈 생각이다. 내 소중한 한 표가 허투로 찍혀서는 안 될 일이니 말이다.


현대 사회로 오면서부터 선거 후보자들에 대한 정확한 정보 전달은 정책 선거의 중요한 바탕이 되었다. 후보자들이 거짓 공약을 내세우지 않는 것도 중요하지만 주어진 공약을 유권자들이 제대로 알 수 있게 하는 것도 민주 국가의 기본 의무로 자리 잡은 것이다.


이와 함께 투표 장소에 대한 차별성을 배제하려는 노력도 지속되고 있다. 비장애인과 달리 장애인들의 선거 편의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점점 높아지면서 다양한 변화들이 나타난 것이다. 또한 종교시설에 설치된 투표소도 인근 공공기관 등으로 대체되고 있다. 여기에 국가인권위의 권고가 한몫했다.


2004년 11월 10일 국가인권위는 선거방송에서 수화 통역이 임의조항으로 되어 있는 것에 대해 “장애인은 국가·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정치·경제·사회·문화 기타 모든 분야의 활동에 참여할 권리가 있으므로 국민의 대표자를 선출하는 국회의원 선거와 관련, 청각장애선거인의 선거권 행사의 편의를 위해 각종 시설 및 선거권 행사에 관한 홍보 등에 대해 자막 또는 수화 통역을 제공하는 것이 장애인의 사회참여를 보장하는 길이 될 것이라고 판단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이 사안은 현장에서 즉각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 사안은 헌법재판소까지 갔지만 아쉽게도 8:1로 기각 판정을 받았다. 그러나 김종대 재판관은 청구인들이 문제 삼은 법률조항들이 청각장애인에 대한 차별방지의무 및 평등의 원칙에 위배되므로 헌법에도 맞지 않는다며 청구인들의 손을 들어준바 있다.


“점자의 특성을 고려하지 않은 점자 선거공보 규격 제한은 시각장애인에 대한 차별행위”   - 2005/04/15


집으로 오는 선거 공보는 본격적으로 후보들을 비교해 볼 수 있는 가장 기초적인 자료라는 점에서 매우 의미가 크다. 그러나 시각장애인들의 점자 책 특성을 고려하지 않은 정책 때문에 시각 장애인들이 비장애인이 보는 선거 공보 책자보다 더 적은 내용을 수록할 수밖에 없다. 2005년 4월 15일, 국가인권위는 “점자의 특성을 고려하지 않은 점자 선거 공보 규격 제한은 시각장애인에 대한 차별행위”라는 권고를 했다.


이를 위해서는 점자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일반 묵자(黙字: 일반적으로 쓰이는 문자)에 비해 글씨 크기를 조절할 수 없는 게 점자이다. 게다가 점자 하나가 각각 하나의 자음과 모음을 표시하는 등 그 특성으로 인해 일반적으로 묵자의 약 3배 분량이 필요하다. 또 점자는 종이가 얇을 경우 글씨가 지워지는 등의 문제가 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120g/㎡ 이상의 종이를 사용하고 있지만 선거 규정은 120g/㎡ 이내의 종이를 사용하도록 하고 있어서 점자책을 배려하지 못한 규정이라고 판단했다.


2008년 7월 30일에는 “투표소 선정시 장애인의 접근성을 고려하지 않거나 시각장애인에게 투표보조용구 제공 않은 것은 차별”이라고 발표했다.


중앙선관위가 18대 총선이 끝나고 발표한 선거백서에 따르면, 투표소의 1층 설치율은 1990년대 80%에서 훨씬 높아진 95.7%에 이르고 활동보조인(2541명), 투표보조용구 등을 제공했다고 밝혔다. 활동보조인은 1000명당 1명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게 장애인들의 지적이다. 게다가 지난 초대 교육감 선거에서 일부 투표소의 경우 문턱이 높거나 계단으로 되어 있어서 장애인이 비장애인들의 도움을 받아야 투표소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선거권을 행사하고자 하는 장애인을 위해 다른 투표자나 선거관계인의 호의적 도움에 의존하지 않더라도 쉽게 투표소에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 부득이한 사유로 장애인의 접근이 곤란한 장소에 투표소를 설치하였다면 임시 경사로 등의 필요한 설비를 우선적으로 제공해야 한다. 휠체어를 탄 장애인을 투표도우미가 직접 들어서 이동시키는 방법에 의한 인적 서비스는 앞서의 다른 모든 실현가능한 방법이 없는 경우에 한하여 제한적으로 제공되어야 한다. 따라서 장애인의 선거권 보장을 위해 필요한 시설 및 설비를 설치하지 않은 것은 차별행위에 해당한다.


이와 함께 시각장애인의 편의 제공 역시 필요하다. 시각장애인이 다른 사람의 도움으로 기표행위를 한다는 것은 민주 선거의 기본원칙인 비밀선거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된다. 따라서 시각장애인도 독자적으로 기표를 할 수 있도록 특수 투표용지 또는 투표 보조용구를 제공해야 하는 게 민주국가의 의무다.


투표소 관련해 특색 있는 권고도 있다. 지난 2008년 3월 19일에 발표한 ‘종교시설내 투표소 설치 금지’ 권고이다.


제17대 대통령선거에서는 총 투표소 13,178개소 중 1,172(8.9%)개소가 각각 종교시설 내에 투표소가 설치되어 있었다. 게다가 유권자가 가장 많은 서울의 경우 2,210개 투표소 중 종교시설 투표소가 511개소(23.1%)로 전국에서 가장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국가인권위는 특정 종교 시설에 출입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 일부 유권자들이 다른 선택을 할 수 없어 종교의 자유를 침해 받는 일이 일어난다. 또한 이로 인해 일부 유권자가 투표를 거부한다면 투표권 행사를 제한하는 결과가 되어 더욱 신중하게 대처할 필요가 있다.


이처럼 국가인권위의 선거 관련 권고들은 하나같이 사회적 소수자들일지라도 똑같이 가지고 있는 1표를 제대로 행사할 수 있도록 차별적인 제도와 규정, 조항들을 바꾸기 위한 노력이었다. 여전히 자신이 주권자로서 가지고 있는 참정권을 법제도와 규정, 조항들로 인해 제대로 실현하기 어려운 사람들이 있다. 국가인권위는 앞으로도 모든 이들이 자신의 참정권을 아무 제한이나 장애 없이도 실현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가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10년전 유엔인권위원회는 장애인의 참정권을 보장하기 위해 권고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국가는 문자 의식 능력 결여, 언어상의 장애 등을 가진 유권자가 투표에 관한 충분한 정보를 얻을 수 있도록 투표방법을 궁리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에 대한 원조가 각각 독립적으로 보장되어야 마땅하다.'


지방선거를 앞둔 지금, 민주 국가라면 당연히 한번 더 새겨들어야 할 말이다.




2010.05.30. 국가인권위 블로그 기고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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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하 작가의 글
교과서에 실리지 않을 권리는 없는가?
여러분은 문학을 '배우'셨습니까?


이미 공공재로 돈을 내면 얼마든지 볼 수 있는 글을 교과서에 실린다고 반대한다는 건, "내 글은 돈 내고 볼 수 있으며, 어떠한 비평이나 교육, 보도, 연구의 목적으로도 사용할 수 없다"는 말일까? 이름 있는 작가가 생각할 깜량은 물론 아니다. 그의 글의 내용의 주는, 국어 교과서에 실리는 순간 자신의 작품이 가진 상상력의 세계와 작가의 의도가 교과서의 편저자에 의해 왜곡되거나 곡해되는 것, 나아가 자유롭게 상상하고 생각해야 할 학생들의 생각을 시험이라는 잣대에 따라 일관되게 만드는 것 등에 대한 심각한 문제제기로 보인다. 또, 지금의 문학 교육이 가지는 모순에 대한 불만과 지적도 엿보인다.

아동의 배울 권리는?

이야기에 앞서 국정 교과서가 아닌 검정 교과서 체제에서 문학 교육을 국가가 주도한다고 단정짓는 것은 어렵다는 말을 하고 싶다. 검정 교과서의 현재 심사 기준은 문학의 세세한 해석까지 간섭하고 있는 것이 아니며, 학생의 수준에 맞는 문학 지식이나 이해의 수준을 정하는 선에서 제시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국가가 문학 교육을 주도하고 있다는 오해는 접었으면 한다. 또 교과서에 실리지 않을 작가의 권리를 지키는 과정에서 현 시대의 문학을 배울 권리가 있는 아동청소년에 대한 권리 침해는 어떻게 할 것인가의 문제도 생각해 보자(아이들은 저작권법과 무관한 옛날 문학만 봐야 할까). 아동청소년들이 공공의 영역에서 시행되는 최소한의 교육으로 문학은 배울 '가치'가 있는가 없는가에 대해서도 고민해 보자.

문제는 대학지상주의에 있다. 전국적으로 단일하게 실시하는 대학 수능시험 때문에 문학 교육 뿐만 아니라 다양한 해석과 관점이 필요한 여타 다른 과목(예를 들어 역사나 윤리, 사회)마저 정량화되고 획일화되는 해석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문제는 조금씩 변화의 흐름이 감지되고 있다. 수학능력 시험이 대학의 당락에 미치는 결정적인 영향력이 줄어들고 있는 것이다. 말 그대로  대학 공부에 필요한 학습 능력을 시험한다는 본래의 취지에 맞게 변화되고 있다. 수학 능력 시험에 대한 변별력이 약화되고 시험에 대한 의존도가  낮아지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이는 대학 입시에서 다양한 해석과 관점을 가진 사람을 포용할 수 있는 방향으로 바뀌고 있다는 신호다. 예전처럼 암기와 이해식 학습능력만으로 대학 가던 시대는 아니라는 얘기다.

오히려 학생시절에 했던 다양한 활동이 대학 입시에 큰 영향을 주고 있다. 이는 문학에서 하나의 관점이나 해석을 강요하던 흐름도 바꾸어 놓았다. 중학교 1학년 학교 현장에서는 올해부터 새로운 개정 교육과정에 따른 교과서로 배우고 있다. 이번 개정 교육과정의 주요 시사점은 기존의 원론적 지식의 이해암기식 교육에서 '어떻게 학습할 것인가'에 더 주안점을 두었다고 볼 수 있다. 학습자들이 학습 과정에 충실할 것을 요구하며, 학생들 스스로 자신의 학습 목표와 방법 내용을 만들어가는 것을 중요시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활동에서도 토론과 토의 중심의 모둠활동을 강조하는 내용에서도 엿보인다. 소통을 중요시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의견을 존중하고, 내 의견을 조리있게 표현할 수 있는 힘을 요구하고 있다. 하나의 정답에 맞추어서 똑같은 대답을 요구하지 않고 다양한 의견이 존재하고 다양한 방법으로 접근하고 해석하여 답을 구할 수 있음을 알아가는 과정이다. 지금의 검정 교과서는 이런 개정교육과정의 취지에 적합한 교과서들이 합격해 교육현장에 배포된 것들이다.

물론 교과서 하나가 교육이라는 거함을 움직일 수는 없다. 큰 배가 움직이는데는 다양한 분야의 협업이 필요하고, 또 설령 협업이 잘 이루어진다고 하더라도 큰 이동 궤적은 필수적일 수밖에 없다.





문학의 가치를 생각하자


"문학을 '배울' 수 있는가"라는 작가의 질문에는 이렇게 답해 주고 싶다. 문학은 충분히 (학교에서) 배울 '가치'가 있다. 작가의 말대로 문학은 예전에 주요 과목이 아니었다. 지금도 고교 2,3학년에서는 선택 과목의 하나에 불과하다. 그러나 우리 사회가 양적 질적 성장을 거치면서 문화적 삶의 질을 높이려는 시도의 하나로 문학 교육이 기본 교육의 하나로 학생들이 갖추어야 할 교양이 되었다. 작가가 예를 들어 설명한 만화로 말하자면, 불과 10년 전에 '만화 비평가'라는 말은 잘 찾아보기 힘들었다. 이제는 '만화 비평가'에 '만화 전문 학과'까지 대학에 생겼다. 언젠가는 만화도 교과서에서 다루어야 할 주요한 문화 장르의 하나가 될 것이 분명하다. 그만큼 문화적 학문적 가치로 학생들이 학교에서 배울만한 '가치'가 확보되고 있는 것이다. 참고로 새로 나온 개정교육과정에 만화 컷이 들어가지 않은 교과서가 있다면 말해주기 바란다. 아마도 없을 것이다.

공교육에서 배우는 모든 것들은 실생활과의 접목에 중점을 두고 있다. 과목의 선정뿐만 아니라 그 과목의 내용 또한 현실에서 학생들이 부딪히고 만나야 할 문제들을 어떻게 풀 것이며, 스스로 해결해 나갈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비교적 젊은 작가이며 현존하는 작가의 최근 작품을 수록한 것도 이런 흐름 속에서 나타난 결과물이다. 수학은 지금까지 혼자 끙끙대며 풀어야 하는 문제였다면 지금의 개정교육과정에서는 함께 소통하며 문제를 푸는 능력을 요구하고 있다. 하물며 문학 교육은 소통의 가치를 배우며 인문학적 소양 기본이 되는 학문으로서 학생들이 배울 가치가 있는 학습의 하나라는 건 두말하면 잔소리다.

공교육은 최소한의 교육이라고 본다.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최소의 기준에 맞추어서 이것만큼은 우리 세대가 학생들에게 전수해야 하는 공통의 과제를 선정한 것이다. 여기서 문학 교육을 빼야 할 이유를 나는 찾을 수 없다. 비록 그 방법과 내용이 마음에 안들거나 잘못된 부분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빼자고는 할 수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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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에서는 매월 셋째 주 목요일 오후 7시에 다양한 신작 영화를 상영하고 있습니다. 참고로 이번 달에는 <식객2>를 상영했으며, 지난달에는 <전우치전>, 2월에는 <셜록 홈즈> 등을 상영했죠. 이 날이면 가족끼리, 또는 연인끼리 즐거운 국회 나들이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실제로 그런지는 잘 모르겠어요. 저도 이번에 글 쓰면서 처음 알게 됐으니까요^^

최근 들어 공공청사의 변신이 새롭습니다. 휠체어나 유모차가 드나들기 쉽도록 입구를 개조하는 건 기본이 된지 오래죠. 공공청사가 배려할 것은 단순한 기능적 측면을 넘어서고 있습니다. 많은 공공 청사들이 그 건립 취지에 맞게 여러 가지 행사를 청사 안팎에서 치루면서 국민에 보다 가까운 행정조직으로 새롭게 태어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다양한 문화 공연을 비롯해 주민의 눈높이에 맞춘 문화 강좌, 외국어 교육 등을 진행하는 모습을 흔하게 볼 수 있죠. 불과 십 수 년 전까지만 해도 공공청사는 평범한 국민들이 접근하거나 출입하기 어렵고 꺼려지는 곳이었는데, 지금은 찾기 힘든 자료를 찾을 때 가장 먼저 방문하는 곳 중의 하나가 국회 도서관이 되었습니다. 이런 인식은 기본적으로 공공청사가 주민들의 세금으로 지어진 것이며, 따라서 주민들의 편의와 편리, 행복 추구를 위해 복무해야 한다는 기본 이념이 깔려 있다고 볼 수 있죠.

공공청사는 국민의 소중한 세금으로 지어진 만큼 관리에 대한 규정이 엄격하다고 합니다. 나아가 국가중요시설로 규정되어 있는 건물들은 여전히 드나드는 데에 있어 까다로운 절차를 밟아야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 규정에 대해서 한번쯤 의문을 품어본 사람도 있을 것이입니다. 과연 그 규정은 누가 언제 어떻게, 어떤 기준으로 만들었을까. 그리고 그 규정은 합리적이고 적절한가.

지난 4월 26일 국가인권위원회는 국회 사무총장에게 국회청사 출입통제와 관련된 ‘국회청사관리 규정’을 개정할 것을 권고했습니다. 출입금지 대상자 선정 기준과 절차 및 출입금지 기간을 명시적으로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국가인권위 조사결과 ‘국회청사관리 규정’에는 “의장은 청사의 관리 및 보호를 위하여 필요하다고 인정할 때에는 청사출입의 제한 및 통제 등의 조치를 할 수 있다”라고 되어 있지만, 청사출입 통제 대상자의 선정 기준, 절차, 기간 등에 대한 규정을 따로 두고 있지 않았습니다. 이럴 경우 통제 대상자는 해당 국회가 완료되는 시점까지 최대 4년 동안 국회 출입이 금지되는 경우도 발생할 수 있는 것이죠.

오늘도 국회에서는 중요한 입법 활동을 비롯해 국회의원들의 의정 활동이 전개될 것입니다. 이와 함께 다양한 토론회와 포럼, 발표회, 기자회견도 진행되고 있습니다. 수많은 민의가 집중되는 현장이 바로 국회인 셈이죠. 그런 국회에서 국민의 출입을 통제하고 제한한다고 할 때, 입법 기관 다운 과정과 절차 기준이 없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공공청사로서의 국회는 민의와 가장 가까워야 하는 곳이며, 어떤 민의라도 들을 수 있는 열린 공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인권위 블로그 기고글 2010.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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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전 후배 Y를 만났다. 그 이는 이름만 들으면 알만한 출판사에서 편집자로 일하고 있으며 지난해 9월에 아들을 낳은 워킹맘이다. 적지 않은 나이에 결혼을 했고, 바로 아이를 갖게 되었지만, 아기를 어린이방에 맡기고 출근하는 일이 쉽지 않은가 보다.

이날의 만남은 후배의 고민 때문이다. 나와 만난 Y는 식당에 자리를 잡자마자 눈물부터 흘리며 그간의 사정을 이야기했다. 아기를 어린이방에 맡긴지 얼마 되지 않아 아기는 그만 요도 간염에 걸려 신장까지 바이러스에 간염 되어 열흘이나 병원에 입원 치료를 받아야 했단다. 그동안의 마음고생 몸고생이야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다행히 아기는 얼마 전에 퇴원해서 집에서 통원치료를 받고 있다고 하나 여전히 어린이집으로 보내야 하는 Y의 마음은 더할 수 없는 상처로 아파하고 있었다. 

"아이도 잘 키우고 직장일도 잘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자신이 없어요. 아이 키우는 것도 자신이 없고, 직장에서 일도 손에 안 잡혀요."
"그만두고 한 1~2년 쉬었다고 다시 일할까 생각도 해 보는데, 그럼 그 뒤에 다시 일자리가 나에게 주어질까 하는 걱정도 있고요."
"육아 휴직을 내려고 해도 나름 진보적인 출판사라는 우리 회사에서도 그런 선례가 극히 드물어서 말이에요. 또 일이 많아서 육아휴직 내는 게 괜히 눈치 보이고…"

내가 다니는 출판사는 교육관련 출판사이다 보니, 회사 신입사원 교육 때도 직원들에게 "아기 많이 낳는 게 회사에 충성하는 것"이라고 강조할 정도다. 그러면서 육아휴직 등 보육과 관련된 제도나 복지는 전무하다. 실제 육아휴직을 건의했던 직원은 받아들여지지 않자 결국 퇴사했다고 한다. 그런 걸 보면 지금의 정부와 하는 짓이 똑같다.

워킹맘 중에서 육아도 잘하고 일도 잘하는 슈퍼우먼은 극히 드물다. 또 그 이면에는 내부의 든든한 지원이 있거나 직장에서 무소불휘의 파워를 가지고 있을 경우가 아니면 쉽지 않다. 그러나 대부분의 워킹맘들이 슈퍼우먼을 꿈꾼다. 그러나 그 꿈이 하나씩 허물어지는 순간 떠났다 싶었던 산후 우울증이 다시 눈앞에서 어른거린다. 

이상이 하나씩 깨지고 자신이 겪고 있는 현실이 눈앞에 닥치면 문제는 쉽지 않다. 아기가 아프고 일은 산더미처럼 쌓이고, 산후 휴가 다녀와서 직장 관계도 적응하기 힘들어 질 때쯤에 겪는 워킹맘들의 스트레스는 이만저만한 일이 아니다. 그 상황에서 가정의 안정감이나 직장 업무가 원활하게 될리 없다. 악순환의 연속이다.

대부분 이럴 경우 육아휴직을 신청하는 게 정석이다. 하지만 어디 그게 쉬운 일일까. 앞의 후배 Y의 경우도 그렇고, 내가 다니는 직장의 경우도 그렇지만 선례도 없고 권장하지도 않으며, 대부분의 경우 퇴직을 종용당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권력은 멀고 현실은 눈앞이다 보니, 대부분 퇴사를 하고 전업주부의 길로 내몰린다. 물론 전업주부도 의미 있으며 결코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 선택이 자발성이 아니라는 점이다.

내일 아내는 육아휴직을 신청할 예정이다. 회사가 노동조합 연맹이라서 쉬운 게 아니라 연맹이 해체 수순을 밟고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육아 휴직이 가능해진 것이다. 만일 연맹이 정상적으로 돌아갔다면 연맹 사업의 대부분을 꿰뚫고 있는 아내가 이처럼 편안하게 육아휴직을 낼 수 있었을까는 미지수다.

제발 이 글을 보고 있는 조직의 관리자들은 이런 워킹맘들의 고충을 알아주기 바란다. 당장은 그 한 사람이 없으면 일에 지장이 있을 수도 있다. 또 단기 임시직을 뽑는 것도 어렵다는 것도 이해한다. 그러나 일하는 엄마들이 흘리는 눈물과 고충을 이해하고 그들이 다시 돌아와 회사와 업무에 있어서 자신의 자리를 지킬 때 조직은 더욱 튼튼하고 안정적으로 돌아가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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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동생이 가게를 내놓은 적이 있었다. 실제로 계약 직전까지 갔지만 막판에 건물주가 거부해서 계약이 틀어졌다. 당시 권리금으로 수천만 원이 이야기 되던 시점이다. 그리고 얼마 후 건물주가 바뀌었고, 새로 온 건물주는 건물을 새로 짓겠다고 했다. 재건축을 하겠다는 건데, 처음에는 새로 지어지는 건물에서 영업을 할 수 있게 하겠다는 듯이 이야기했다고 한다. 그런데 막상 작년 여름부터 말이 바뀌었다. 이주비(300~500만원)는 줄 수 있으나 다른 보상은 없단다. 동생 가게뿐만 아니라 옆에 있는 가게들에게도 똑같이 말했나 보다. 이런 조치로 이 건물주에게 돌아갈 이익은 약 2억원에 가까울 거라고 동생은 말한다. 동생의 바람은  많은 보상비를 요구하는 게 아닌, 새로 지어지는 건물에서 1층이 아닌 2층에서라도 다시 가게를 열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다.(동생 말에 따르면 건물주는 애초 2층에 가게를 내게 해줄 수 있다는 언급을 했다고 한다. 동생 말에 따르면 시간을 끌기 위한 거짓말이었다고 한다.)


누가 봐도 아담하고 정성스럽게 꾸려진 내 동생 가게. 사람들을 데리고 갈 때마다 다들 음식맛이 일품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더랬다. 꼭 내 동생 가게라고 해서 맛있다고 자랑하는 게 아니라 정말 가게의 분위기나 음식맛은 절대 다른 가게에 뒤질 바 없이 훌륭하다.


친구와의 동업으로 시작한 가게가 올해 위기에 처해 있다. 이와 비슷한 사례들이 바로 옆동네에서도 벌어지고 있다. "홍대앞 ‘작은 용산’ 두리반(철거민 운영 식당)의 싸움(한겨레 기사)"은 흡사 동생 가게의 상황을 그대로 옮겨 온 듯하다. 아직 본격적으로 철거가 시작되지 않았을 뿐, 건물주가 바뀌고, 그 건물주가 동생을 상대로 지금 명도소송을 내놓은 상태이며, 이 재건축은 민간사업자에 의해 실시되는 공사라서 용산참사 이후 개정된 ‘도시 및 주거환경정비법’(도정법)의 보호도 받지 못한다고 한다.


앞으로 명도소송이 끝나고 나면 그 다음은 어떤 일이 벌어질지 물어보면 동생은 한숨을 쉬며 먼곳을 바라본다. "어쩔 수 없는 일 아니겠냐. 일단 버텨봐야겠다"라고 말하지만, 진퇴양난에 사면초가에 빠진 얼굴이다. 


용산 참사의 이야기를 접하면서 설마 저렇게 억울한 일이 내 주위에 있을까 생각했는데, 바로 내 동생이 그런 상황에 처하니 할 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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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돌아가신 김대중 전 대통령은 역대 대통령 중에서 가장 오랜 기간인 5년여의 수감 생활을 하신 분이죠. 그러나 그는 감옥 생활에는 또 다른 즐거움이 있던 공간이었다고 회상했습니다.

“나의 경우, 감옥 안에서 네 가지 즐거움을 맛보았습니다. 그 첫째이자 가장 큰 것이 독서의 즐거움이었습니다. 과거 1977년 청주 교도소에서 2년간의 생활은 그야말로 독서의 생활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철학·신학·정치·경제·역사·문학 등 다방면의 책을 동서양의 두 분야에 걸쳐서 읽었습니다. (중략) 진주와 청주에서의 4년여의 감옥 생활은 나에게 다시없는 교육의 과정이었습니다. 그리고 정신적 충만과 향상의 기쁨을 얻는 지적 행복의 나날이었습니다.”
-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중에서

얼마전 사형수의 자살이 사회적 이슈가 되었습니다. 그가 남긴 글에서는 사형에 대한 두려움이 담겨 있었다고 합니다.

한나라당 박민식 의원에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2005년 이후 전국 교정시설에서 자사를 시도한 사람의 수는 422명에 달하며, 이중 72명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나왔습니다. 이중 살인(28명, 38.9%)으로 복역 중인 수용자가 가장 많았고, 다음으로 성폭력 범죄를 저지르고 자살한 수용자(15명, 20.8%)가 그 뒤를 따르고 있습니다.

타인의 신체에 직접적인 해를 끼치고 복역하는 수용자들의 자살이 절반을 넘습니다. 이런 이들에 대한 마땅한 교육 시스템은 여전히 부재한 실정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가난한 이들에게 인문학을 전파하는 클레멘트 코스를 창안한 인문학자 얼 쇼리스의 유명한 일화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1995년 얼 쇼리스 교수는 한 여죄수와 만나서 대화를 나눕니다. 가난과 범죄의 악순환을 고민하는 그에게 그 여죄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방법은 간단해요. 우리 아이들에게 시내 중심가 사람들의 ‘정신적 삶’을 가르쳐야 합니다.”

이에 얼 쇼리스는 범죄자를 포함해, 알콜 중독자, 노숙자, 실업자 등에 대한 ‘인문학’ 강의를 하는 클레멘트 코스를 전파합니다.

“당신은 이 수업을 통해 도대체 무엇을 얻으려 합니까?”

“인문학을 배우기 전에는 욕이나 주먹이 먼저 나갔어요. 그런데 이젠 그러지 않아요. (왜냐하면) 나를 설명할 수 있게 됐거든요.”*

나를 설명하는 힘, 그것은 상대를 이해하는 바탕이 되었고, 그들로 하여금 새로운 희망을 가지고 새로운 시각으로 사회를 바라볼 수 있는 눈을 가지게 하였습니다. 그들에 대한 인문학 과정은 사회적 약자로 만들었던 ‘조건들’에 대해 과거와 다르게 대응하는 힘을 갖게 한 것이죠.

범죄자들이 수형 시설에서 사회를 원망하고 이웃을 저주할 때, 인문학 과정은 새로운 대안이 되어 줄 수 있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감옥에서 읽었던 대부분의 서적들-철학·신학·정치·경제·역사·문학 등은 모두 인문학의 영역에 있는 책들입니다. 지금의 세상과 사람에 대해 보다 분명하고 구체적인 시각과 관점을 심어줄 수 있는 인문학 독서가 김대중이라는 시대적 위인을 만들어냈듯이 수용시설의 수용자들에게 펼쳐지는 인문학 강의도 그들 자신과 우리 사회에 매우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감옥에서의 독서를 통해 얻었다는 정신적 충만과 향상의 기쁨을 수용자들도 누릴 수 있기를 기대해 봅니다.



* EBS <지식채널e>의 일부를 옮겨왔습니다.



국가인권위원회 블로그 별별이야기에 보낸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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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계천에 있는 전태일 동상

지금 평화시장과 동대문 일대는 의류 패션 중심지로 거듭나고 있지요. 그러나 1970년 오늘 여기서 한 청년 노동자가 자신의 몸에 불을 붙였습니다. 그리고 시대의 어둠을 뚫고 빛나는 화염으로 세상을 밝히고 산화했습니다. 그의 이름은 전태일.


그는 매우 인간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어린 여공들이 점심을 굶는 것이 안타까워 서울 수유리 집에서 평화시장까지 걸어 다니면서 아낀 버스비로 여공들에게 점심을 사 먹인 일화는 그의 헌신과 희생이 깊은 인간애에게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또 연구자였습니다. 정규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어려운 한문이 가득한 근로기준법을 날이 새가면서 읽고 해석하며 스스로 이해하였습니다. 나아가 그는 이 근로기준법이 고통받는 여공들에게 따스한 햇살이 되어 줄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장기표 신문명연구원 원장은 전태일의 삶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한마디로 전태일은 고난 속에서 사랑을 얻는 사랑의 원리, 사랑을 통해 지혜를 얻는 지혜의 원리, 사랑과 지혜를 통해 높은 꿈을 이루는 꿈의 원리, 그리고 그 꿈을 이루는 가운데 법열을 얻는 인생의 원리를 보여주고 있으니, 이것 같이 소중한 교훈이 어디에 또 있겠는가?”(경향신문에서 재인용)


오늘 그가 산화하며 외쳤던 말을 다시 한번 되새겨 봅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노동자를 혹사하지 마라”


과연 지금 이 말은 얼마만큼 지켜지고 있을까 자문해 봅니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는 근로기준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일요일 공휴일도 없이 혹사당하고 있는 노동자들, 저의 시선에는 비정규직 노동자와 이주 노동자들의 모습이 겹쳐지고 있습니다.


노동자의 인권과 대우는 분명 나아지고 있는데, 우리 사회는 또 다시 한쪽에서 차별의 온상을 키우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다른 사람에 대한 차별과 그들의 희생을 담보로 우리의 삶을 지키고 있다면, 먼훗날 우리 아이들에게 올바른 삶을 살아왔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전태일은 정규교육을 거의 받지 못했지만, 당시로서는 안정적인 미래가 보장된 재단사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린 여공들의 고통과 아픔을 돌보다가 해고당하기까지 하죠. 그가 노동운동에 뛰어든 계기는 함께 일하던 여공이 가혹한 노동환경으로 인한 직업병인 폐렴으로 강제 해고를 당하는 것을 보고 느낀 충격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열악한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며 먼지구덩이 속에서 일하는 시다들을 ‘나의 나’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의 바탕은 누구나 누릴 수 있는 기본권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을 보며 ‘나의 나’를 볼 줄 아는 시선에 있습니다. 우리에게 전태일의 의미는 바로 ‘나의 나’를 보는 시선에 있는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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