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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직도 아버지가 '잊혀진 책들의 묘지'로 나를 처음 데리고 갔던 그 새벽을 기억한다.   - <바람의 그림자> 1권 처음 시작 문구.

나는 아직도 아버지가 커다란 박스를 들고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시던 어스름한 저녁을 기억한다. 그 박스 안에는 십중팔구는 책이 들어 있었다. 대부분 누가 버렸거나 헌책방에서 사가지고 오는 것이었고, 동서양 소설 전집류이거나 위인전, 백과사전류였다. 초등학생이 읽을만한 동화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작은 글씨만  빽빽하게 지면을 차지하고 있는 책들이었다. 소설들은 하나같이 어렵다는 느낌이었지만, 위인전만큼은 술술 넘어갈 수 있었다. 위인전이라는 것이 대부분 청소년을 위한 책이다보니 어린 나에게도 쉽게 읽혔을 것이다. 그래도 링컨이니 워싱턴이니 헬렌켈러니 하는 책들보다 지금도 가장 기억에 남는 책은 플루타르크 영웅전과 삼국지였다.

어린 나에게도 도전과 응전, 모험과 좌절, 실패와 성공, 용기와 두려움, 인내와 포용 등 인간사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여러 감정들을 스팩터클한 서사 속에 그려낸 두 책은 큰 영감을 주었던 것이다. 게다가 얼마나 많은 인물들이 역사의 도도한 흐름을 담았던 저 책들 속에서 명멸했던가. 단순히 한 인물의 삶을 다룬 책과 비견될 수 있는 내용이 아니었음은 두말하면 잔소리다.

돌아보면 내 어린 시절은 저 퀘퀘하고 지저분한 헌책들과 함께 한 시절이었다. 덕분에 또래의 보통의 남자 아이들보다 많은 독서량을 보유할 수 있었고, 그 많은 독서량 덕분인지 고등학교 가서도 국어 점수는 공부를 하지 않아도 상위권에 쉽게 들어갈 수 있었으니 말이다.


지금의 내 책장

쓸데없는 책들도 많다. 좀 버리자!




도서관이 하나 사라질 때, 서점 하나가 문을 닫을 때 그리고 책 한 권이 망각 속에서 길을 잃을 때, 이곳을 알고 있는 우리 수호자들은 그 책들이 이곳에 도착했는지를 확인한단다. 이곳에는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책들, 시간 속에서 길을 잃은 책들이 언젠가는 새로운 독자, 새로운 영혼의 수중에 들어가길 기다리며 영원히 살고 있지. 가게에서 우리는 책들을 사고 팔지만 사실 책들은 주인이 없는 거란다. 여기서 네가 보는 한 권 한 권의 책이 누군가에겐 가장 좋은 친구였었지. - <바람의 그림자> 1권 14쪽

돌아보면 정말 책이 많았다. 그 많은 책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집안 사정으로 인해 숱하게 많은 이사를 다니면서 책은 사라져갔다. 어쩌면 '잊혀진 책들의 묘지' 어느 한 구석에 내가 읽었던 플루타르크 영웅전이 누군가를 기다리며 잠들어 있지 않을까.

소설 <바람의 그림자>는 어느날 신비한 책을 발견한 다니엘이 그 책에 얽힌 비밀을 하나하나 풀어나가면서 진실한 사랑에 눈을 뜬다는 조금은 통속적인 소설이다. 그러나 글의 전반적인 구성과 짜임은 조금의 틈도 허락하지 않을만큼 촘촘하고 등장인물들의 개성이 가득한 묘사와 사건 사고들의 치밀한 짜임은 이 책을 쉽게 손에서 놓지 못하게 만든다.

지금의 내 삶은 먼저 죽어간 사람들이 간절히 살길 원했던 내일이라는 말이 있다. 지금의 내 삶은 먼저 죽은 사람들의 희생 속에서 만들어진 미래라는 말이다. 훌리안의 아픈 사랑과 비통함은 다니엘과 베아의 사랑을 통해 보상 받는다. 다니엘은 훌리안의 비극적이고 공포스러운 과거를 알아가면서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랑의 소중함을 깨닫는다.

인생에서 진정한 사랑은 단 한 번 있는 거다, 훌리안. 비록 그걸 깨닫지 못한다고 해도 말야. - <바람의 그림자> 2권 269쪽

우리는 지금 어떤 책을 보고 있을까. 누군가가 말한 것처럼 우리는 우리가 읽은 것들에 의해 만들어진다. 우리는 지금 어떤 사람을 만들고 있을까. 쏟아져 나오는 책들은 과연 10년 뒤 20년 뒤에도 나의 책장 속에서 의미있게 살아 숨쉬고 있을 수 있을까. 2~3년이 지나 "괜히 읽었어. 괜히 샀어. 괜히 가지고 있었어."라며 우스개 소리를 하지는 않을까.

책을 통해 우리는 그 책을 쓴 사람을 만난다. 책에는 글을 쓴 사람과 그 책을 만든 사람의 영혼이 새겨져 있다. 우리는 책을 읽는 행위를 통해 그 책이 나오는 과정에서 숨결을 불어넣은 영혼들과 만난다. 진정한 책읽기는 종이 위에 쓰인 글자들을
숙지하는 것이 아닌 그 책을 만드는 데 숨결을 불어넣은 영혼들의 읽어내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닐까.

네가 보는 책들, 한 권 한 권이 모두 영혼을 가지고 있어. 그것을 쓴 사람의 영혼과 그것을 읽고 살면서 꿈꾸었던 이들의 영혼 말이야. 한 권의 책이 새 주인의 손에 들어갈 때마다, 누군가가 책의 페이지들로 시선을 미끄러뜨릴 때마다, 그 영혼은 자라고 강인해진단다. 이곳에는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책들, 시간 속에서 길을 잃은 책들이 언젠가는 새로운 독자, 새로운 영혼의 수중에 들어가길 기다리며 영원히 살고 있지. - <바람의 그림자> 1권 13쪽.


인생이 심심한 사람들, 판타지와 사실의 경계가 그리운 사람들, 진정한 사랑에 의문을 품고 있거나 사랑을 찾아 방황하는 이들, 책을 읽을 때마다 뒤에 귀신이 서 있는 느낌이 드는 사람들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바람의 그림자 1 - 8점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 지음, 정동섭 옮김/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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