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일 저녁 자전거 나들이 4.5km / 22일 아침 자전거 출근 10.1km 🎉 2020년 누적 자전거 주행거리 829.1km
1. 햇살이 뜨겁네요. 갈아입을 옷까지 준비하고 나왔습니다. 6월도 이제 하순에 접어들었군요. 오늘 낮 최고기온은 35도까지 올라간답니다. 더위 조심하세요.
2. 한강에서도 물고기들이 수면 위로 펄쩍 뛰어오르는 걸 볼 수 있었어요. 포식자를 피하려는 것일 수도 있고 숨을 쉬겠다고 뛰어오르는 것일 수도 있다는데... 수온이 올라가는만큼 물고기들도 이 여름을 나려면 고생 좀 할 것 같군요.
3. 2015교육과정에 대한 모니터링 결과를 보고 있습니다. 추후 평가도 나오겠지만 코로나 사태로 인한 비대면 수업 등으로 인한 교육 환경의 변화가 다음 교육과정에서는 어떤 식으로 반영될 수 있을지 궁금하네요. 다음 교육과정이 대한 교육당국과 연구자들의 고민이 더 깊어질 것 같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나도 경직된 인간이다. 그래서였는지, 경직된 인간들을 보면 난 항상 느꼈다. 어린 시절의 그늘들이 느껴졌다. 그 그늘을 만든 게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학창시절 만난 또래일 수도 있고, 가족일 수도 있다. 대학 시절에 만났던 많은 사람들 중에 그런 그늘을 가진 후배들이 있었다. 그 친구들을 만날 때면 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나처럼 살아왔겠구나 라는 슬픈 예감이었다.
이지안(이지은 역)에 대해 박동훈(이선균 역)이 느꼈던 감정들은 어쩌면 연민의 감정과 맞닿아 있다. 인간이 다른 이에게 약점을 드러내는 것은 위험하다는 것을 어렸을 적부터 몸으로 배워 온 이지안은 주위 사람들에게 냉랭하고 불친절하게 대하면서 자기를 가리고 보호한다. 다시는 상처받지 않기 위해 찬 바람으로 자신을 보호하지만 오히려 그러한 행동들이 박동훈에게는 안쓰럽고 불쌍하게 다가왔다.
연민의 마음은 인간 본성이지만, 그 연민을 모두가 느낄 수 있는 건 아니다.연민은 또다른 연민과 맞닿을 때 의미있다. 때로 우울하고 깊이를 알 수 없는 슬픔에 잠길 때에도 가급적 감추고 함부로 꺼내 남에게 드러내지 못한다. 그럴려면 자존심이 나서서 머릿속에 수치심을 쏟아 붓는다. 그래서 연민은 동정과 다른 것이다. 연민은 연민을 알아보고 수치심의 수치를 낮추어 주며 자존심을 달래 준다. 나와 같은 인간, 나처럼 아픈 사람, 함께 아파할 사람...
박동훈은 위기에 처해 있다. 하루하루 숨 가쁘게 달려가지만 도저히 메꿔지지 않는 공허한 가슴 한쪽의 아픔들. 가족을 위해 살아오고 희생했다고 위로하지만 내 아들이 나처럼 살지 않기를 바라는 삶을 살아왔다는 자괴감. 다시 이렇게 살아도 될까라는 계속된 의문에 답을 할 수 없는 수렁에 빠진 인생. 나름의 전문성으로 대기업 부장까지 올라왔지만 아내는 잘 나가는 변호사가 되었고, 대학 후배가 대표이사로 발탁되어 들어왔다. 아내는 점점 일에 빠져서 가정이나 남편에게는 관심이 없다. 형과 동생마저 폐인이 되어 어머니 집에 의탁해 살아간다. 통장 잔고는 29만원밖에 없고, 집을 담보로 은행 대출을 받아 형제들 분식집이라도 차려주자는 엄마를 만류한 그 때, 어디서 누가 보낸지도 모르는 5천만원 어치 상품권 뇌물의 유혹.
이지안은 지칠 수가 없다. 할머니 요양원 비용을 대고, 빚 독촉을 핑계로 괴롭히는 광일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밤낮을 제대로 누워보는 일도 없이 일을 한다. 접시닦이 일을 하는 곳에서 음식을 훔쳐와 저녁을 때우고, 회사 탕비실의 커피믹스를 훔쳐 불면의 밤을 만든다. 빚은 끝이 없고, 할머니 요양원 비용도 밀려서 야반도주를 해야 했다. 가난한 조손 가정이라고 도움을 주는 손길이 없었을까? 열심히 살아가는 지안의 모습을 안타깝게 봐준 이가 없었을까? 하지만 그것도 네 번까지. 이지안이 살인을 했었다는 과거를 알면 눈빛이 흔들리고 도망가 버렸다.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은 삶. 삼만 살을 살았는데도 자꾸 왜 태어나는지 모를 삶.
상처 받은 아이들은 너무 일찍 커버려. 그래 보여. 걔 지난날들을 알아보기가 겁난다.
많은 사람들의 값싼 동정에 시달려 보았던 이지안은 그녀가 불쌍하다는 박동훈의 말에 욕을 한다. 복수를 생각한다. 이지안에게는 월 오륙백만 원씩 받으면서 출근하는 박동훈의 그 말이 마치 고양이 쥐 생각하는 것처럼 고깝게 여겨진다. 부족할 것 없는 박동훈이 매일같이 지옥에 끌려가는 인상을 쓰는 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박동훈에게 배달된 뇌물 봉투를 훔치고, 그를 회사에서 쫓아내려는 도준영의 음모를 돕는 것도 이지안에게는 생존을 위한 지옥 같은 삶의 연장일 뿐이다. 박동훈의 삶은 그에게 의미 없다.
박동훈은 우연히 만난 이지안이 홀로 할머니를 모시고 산다는 것을 알게 됐다. 억척같이 살아가면서도 할머니를 정성스럽게 모시는 이지안의 모습은 착하다. 싸가지없이 굴지만 지안의 깊은 곳에 있는 측은지심의 마음을 박동훈이 알았다. 이지안을 돕고 그녀의 과거를 연민의 마음으로 알아간다. 언제부터인지 확실하지 않지만, 이지안이 사람을 죽였다는 걸 박동훈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아는 척하지 않고,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는다.
모른 척 해 줄게. 너에 대해서 무슨 이야기를 들어도, 모른 척 해 줄게. 약속해 주라. 너도 모른 척 해 준다고. 겁나. 너는 말 안 해도 다 알 것 같아서····
그러면 누가 알 때까지 무서울 텐데, 누가 알까···· 만나는 사람마다 이 사람은 언제쯤 알게 될까, 혹시 벌써 알고 있나···· 어쩔 땐 이렇게 평생 불안하게 사느니 그냥 세상 사람들 다 알게 광화문 전광판에 떴으면 좋겠던데····
처음 이선균, 이지은 주연에 <나의 아저씨>라니! 오해받기 딱 좋았다. 드라마 안에서도 그랬지만 드라마 밖에서는 더욱 시끄러웠다. 아저씨와 어린 소녀의 사랑? <도깨비>가 대박을 내니 판타지가 아닌 현실 내용으로 재탕하려는 것이냐는 비난도 있었다. 나 역시 그런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삐닥하게 본 것이다. 시리즈가 전개된던 시기에는 프로젝트 작업으로 한창 바쁠 때여서 못 보다가, 아내의 시청 평이 워낙 좋아 나중에 보자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야 봤다. 이런 드라마를 지금에서야 보다니 내가 나쁜 아저씨다.
좋은 이야기는 스스로의 삶을 돌아보게 한다. 이 드라마의 박동훈은 나의 삶을 돌아보게 했고, 나는 박동훈과 박상훈(맏이)과 박기훈(막내)의 어디쯤에 있는 아무개라고 생각할만큼 인물들에 공감했다. 때로는 박상훈처럼 지질하고 눈물 많고 겁도 많은 데다 개저씨 같을 때도 있고, 어떨 때는 개폼 잡으며 큰소리치고 싶은 박기훈 같은 면도 있다. 나름 회사 중간 간부라는 직책에 회사-집-회사 외에는 별 볼 일 없이 사는 박동훈 같은 면도 있다.
하지만 박상훈의 인간성에는 부족하고, 박기훈의 용기에는 못미치고, 박동훈의 실력과도 거리가 멀다. 드라마는 판타지라지만 열패감이 드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 그럼에도 볼수록 빠져드는 매력에 정신줄을 놓아버릴 것만 같았다. 드라마를 보면서 저 세 형제보다 못하다는 열패감은 깊어졌지만, 더 나아질 수 있다는 기대감은 그것을 상쇄할 만큼 거대해졌다. 희망이 보이는 삶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다···· 그말을 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없어.
어른이 되면 홀로서야 한다. 행동에 책임져야 하는 것이다. 처음 책임질 일을 맡아서 진행할 때의 그 두려움을 기억해 보자. 실패하면 어떻게 할까, 두려움에 떨었던 일들이 엊그제 같았는데, 어느새 큰 프로젝트일들을 여러 사람을 지휘하며 해내고 있다. 그렇지만 두려움은 항상 등 뒤에 따라온다.
게다가 비슷한 또래의 주위 사람이 실패를 맛보고 떨어져 나가는 모습도 자주 보인다. 작은 실수들에 조금씩 내상을 입게 되면서 그런 두려움은 커져간다. 아무도 나에게 괜찮다,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해 줄 사람이 없어진다. 홀로 섰다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기댈 곳을 찾는 게 사람이다. 경제적인 독립을 위해 달리고 있지만 여전히 삶은 간당간당 외줄타기 같다. 마음도 지치고 몸도 지치는 나이가 되었지만 멈추면 쓰러지는 자전거처럼 계속 달린다. 둘 중 하나가 아닐까 겁먹는다. 지쳐 쓰러지거나 실패해 쓰러지거나····
"너···· 나 왜 좋아하는 줄 알아? 내가 불쌍해서 그래. 네가 불쌍하니까, 너처럼 불쌍한 나, 끌어안고 우는 거야." "아저씬 나한테 왜 잘해줬는데요? 똑같은 거 아닌가? 우린 둘다 자기가 불쌍해요."
20대와 40대의 화해는 이렇게 서로의 슬픔과 고충을 알아가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로맨스가 아니다. 우리 사회가 끌어안고 가야 할 슬픔을 직시하고 그 안에서 서로의 기댈 곳이 되어 주려는 작은 움직임들이 필요하다. 서로의 상처를 치유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좀더 좋은 어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 이 드라마에 감사를 전한다.
1. 넷플릭스에 tvN드라마 <나의 아저씨>가 올라왔습니다. 이 드라마할 때가 한창 바쁜 아니였고, 초반부터 <도깨비>처럼 중년의 아저씨와 소녀의 사랑 얘기냐는 비판도 드셌던 걸로 기억합니다. 당시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죠. 그러다가 보기 시작했는데... 마음이 참 따뜻해지는 드라마였네요. 나도 좋은 어른이 되고 싶다는 마음을 갖게 해주는 드라마.
2. 현실은 크게 달라질 일이 없지만 한번쯤 내 삶을 돌아보고 어디쯤 왔으며 어디로 가는지, 내 주위에 누가 있으며 어떤 사람인지, 내가 하는 일의 가치를 얼마나 귀하게 두고 있는지를 생각합니다. 이런게 희망이겠죠. 다시 삶을 추스르게 하네요.
간증(干證) 1. 자신의 종교적 체험을 고백함으로써 하나님의 존재를 증언하는 일. 2. 예전에, 남의 범죄에 관련된 증인
타라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타라가 떠난 뒤에도 여전히 자신들의 과거를 간증하러 다녔다. 타라의 가족에게 일어났던 사건은 아버지에게는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그 사건은 책임져야 할 누군가의 무지에서 비롯된 비참한 사고였을 뿐이다. 타라는 이 책 <배움의 발견(원제 Educated)>에서 그 무지에 대해 고발하고 있다.
“아버지는 정부가 강제로 우리를 학교에 가도록 만들지 않을까 걱정하지만, 그럴 일은 없었다. 왜냐하면 정부는 우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부모님의 일곱 자녀 중 네 명은 출생증명서가 없다. 가정 분만으로 태어나서, 한 번도 의사나 간호사에게 가본 적이 없기 때문에 의료 기록도 전혀 없다.”
타라에게 아버지는 곧 하나님이었고, 아버지의 명령은 곧 하나님의 명령이었다. 아버지의 명령에 따라 학교에 가지 않았고, 지저분하고 위험한 폐철 처리장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으며, 아버지의 일을 돕기 위해 단 하루 만에 크레인의 조종간을 잡아야 했고 위험한 고철더미에 올라갔다가 큰 부상을 입기도 했음에도 병원 치료 대신 엄마가 만든 오일과 약초로 치료를 받아야 했다.
주체적 자아로 성장할 수 없었던 막내딸 타라에게 선택권은 없었다. 모든 결정은 아버지가 내렸고, 그 다음의 권력은 오빠들이었다. 어머니는 순종했다. 나아가 딸들을 지키지 않았고, 아버지의 권력에 동조하였으며 오빠의 폭력을 은폐하면서 타라를 속였다. 아버지의 병력을 물려받은 오빠는 자신의 분노를 극단적인 폭력으로 쏟아냈다. 오빠의 무자비한 폭력에 시달렸던 타라는 그 사실을 부모에게 이야기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부모님은 오빠가 달라졌으며, 하나님에게 회계를 했다며 타라에게 용서를 강요했다. 하지만 오빠는 달라지지 않았다. 오빠의 폭력은 타라가 떠난 이후 그의 아내에게로 이어졌고 이를 알아챈 타라가 부모에게 다시 재차 경고했지만, 아버지와 어머니는 오히려 타라가 오해한 것이며, 심지어 그것은 거짓된 환각이고 악마의 유혹에 굴복한 것이라고 비난했다. 다른 가족들은 타라의 말을 믿지 않았고, 그녀를 악마의 꾐에 넘어가 정부가 주는 돈을 받고 공교육을 받으며 타락한 여자라며 비난했다.
“이제 ‘창녀’라는 단어는 행동보다 본질에 관한 묘사가 됐다. 내가 잘못된 행동을 해서가 아니라 내 존재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뜻이었다.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뭔가 불순한 요소가 들어 있었다.”
어쩌면 타라는 그냥 순종적인 딸이 되었을 수도 있다. 오빠의 폭력을 받아내는 건 이제 그의 아내 몫이 되었으니 더이상 폭력에 시달릴 일도 없었을 거다. 아버지의 말을 듣고 아버지가 내린다는 ‘축복’을 받았다면, 가족과의 인연을 이어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어머니의 사업이 번창하였기 때문에 보다 풍요로운 삶의 공간도 확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어머니를 따라 산파가 되었을 것이고 산약초를 이용한 오일을 만들어 팔면서 살다가 어느 평범한 몰몬교 청년을 만나 결혼해 조용히 삶을 마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타라는 그러지 않았다.
“나는 잘못 알고 있던 사실을 바로잡히는 일이 어떤 느낌인지 안다. 잘못 알고 있던 규모가 너무도 커서 그것을 바로잡으면 세상 전체가 변할 정도였다. 이제 역사를 이해하는 길로 통하는 문을 지키는 위대한 문지기들이 어떻게 자신들의 무지와 편견을 해결했는지를 알아야만 했다.”
OMR카드의 사용법도 모르던 16살소녀가 혼자 독학을 시작했다. 17살에 대학수학능력 시험을 통과하고 난생처음으로 학교(브리검 영 대학교)라는 곳에 들어간 뒤의 그녀는 너무나도 다른 두 개의 세상에서 혼란을 겪었다. 하나는 몰몬교의 정신을 가진 아버지 밑에서 자란 아이다호의 산골 아이의 모습이고, 다른 하나는 역사와 철학을 탐구하며 세상의 지식을 탐하는 대학생의 모습이다. 산골 아이는 단순히 남자아이 앞에서 살짝 웃었다는 이유로 ‘창녀’라는 욕을 들으며 오빠에 의해 머리가 변기 속에 처박혔던 소녀였다. 하지만 대학생이 되면서 ‘홀로코스트’에 대해 알아가고, ‘페미니스트’의 뜻을 탐구하면서 홀로 서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과정은 순탄치 못했다. 그 과정은 피부를 온통 벗겨내는 것처럼 아픈 과정이었다. 그 누구보다 아버지를 부정하고 그 아버지의 막내딸로 살아온 자신의 이전 삶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일이었다. 가족 모두가 그녀를 비난하고 그녀를 집단적으로 따돌려 버렸다. 타라는 자신이 가족을 오해한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에 시달리다가 심각한 우울증에 시달리기까지 했다.
타라는 결국 멈추지 않고 계속 나아갔다. 그리고 독립적이며 존엄한 인간으로 다시 태어났다. 이 책이 ‘배움의 발견(원제: Educated)’인 것은 그녀가 배움을 통해 자신의 삶을 아이다호의 산골에서 전 세계로 확장할 수 있었으며, 그 과정에서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무지와 폭력을 이겨낼 수 있었음을 드러내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삶의 주인은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너무나도 자명한 사실을 받아들이기까지 무척 힘들고 어려운 과정을 담아낸 이야기인 것이다. 누구의 말대로 이 이야기가 소설이 아니라 실제했던 내용이라는 점에서 믿어지지 않을 만큼 가슴이 먹먹해 온다.
이 책이 배움에 대해 생각해 보는 모든 이들에게 한줄기 찬란한 빛이 되어 줄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배움은 세계와 나를 잇는 과정이며, 세계 속에 묻힌 ‘나’가 아닌 ‘나’ 안에서 세계가 이해되는 과정이다.
한때 인문학 열풍이 불었다. 인문학이 사회생활에 필수적인 교양으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먹고사니즘과는 하등 관계가 없는데 인문학은 왜 인기를 끌었을까?
2019년 OECD 자료에 따르면, 한국 성인(25~64세)의 49%가 대학교육을 이수했다. 이는 조사 대상 46개국 중 가장 많은 것이었다. 조사 연령대를 낮추어 25~34세의 성인은 거의 70%에 가까운 대학 교육 이수율을 보인다. (기사 링크)
이처럼 높은 교육 수준을 가진 대한민국 사람들에게 ‘인문학’은 그리 어렵지도 않은 학문이다. 우리는 인문학의 주요 학문 분과를 ‘교양’이라고 부르며 대학 시절에 다양한 방법으로 접해 왔다. 이른바 ‘문-사-철’ 즉, ‘문학’ ‘역사’ ‘철학(윤리)’ 등이며, 여기에 ‘정치’ ‘경제’ 등도 엮여 있다. 시작은 아마도 애플의 창업자인 스티브 잡스의 한마디였을 것이다. 자신이 만든 회사 ‘애플’은 인문학과 기술의 융합을 중요시한다는 언급이었다. 시장은 인문학을 상품화했고, 다양한 책과 강연, 모임이 시장에 쏟아져 나왔고 새로운 소비 트렌드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 책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은 그런 흐름에서 대박을 터뜨렸다.
“창의적인 제품을 만드는 비결은 우리가 항상 기술과 인문학의 교차점에 있고자 했기 때문이다.”
먹고사는 문제에서 어느 정도 여유가 생긴 사람들이 보다 품위 있는 관계(?), 즉 지적 대화를 위해 인문학을 탐하고 있다. 저자 채사장은 모 방송국 강연(유튜브)에서 인문학 공부 열풍을 비판했다. 인문학이 사회를 바꾸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이 되고 있는 모습을 지적했다.
‘인문학’을 배우는 이유가 ‘교양’일 수도 있다. 그것은 지적 대화를 위한 폭넓고 상식적인 개념화된 지식을 익힌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보다 큰 의미로서 ‘인문학’은 ‘내가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이며, ‘사회는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이고, ‘나와 사회의 관계’를 찾아가는 여정이다.
이를 위해 채사장은 ‘역사, 정치, 사회, 윤리’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풀었다. 인류가 쌓아온 지식의 그 깊이는 매우 깊을 수 있어서 책 한 권에 자세히 풀어내는 게 가능할까 싶지만, 재미있는 비유와 쉬운 어휘를 사용하는 저자의 능력은 우리를 보다 쉽게 인문학의 도입부에 발을 디딜 수 있게 해 주었다. 여기에 집필 당시의 사회적 문제를 대입하여 나름의 시각에서 해석을 얹었다. 인문학의 응용이다. 잘 쓰는 저자와 탄탄한 기획과 시대적 흐름으로 만들어진 책이다. 여기서는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1>의 내용을 간략히 정리해 보겠다.
먼저 ‘역사’ 편에서는 지금의 자본주의를 설명하기 위한 생산수단의 개념을 설명하고 원시 공산사회에서 고대 노예제 사회, 중세 봉건제 사회, 근대 자본주의까지의 단계별로 생산수단의 변화와 생산관계를 중심으로 살펴본다. 이후 근대 자본주의가 태동한 후 자본주의의 모순에 의해 세계대전이 벌어지기까지의 과정을 설명해 주고 있다.
다음 ‘정치’ 편에서는 흔히 말하는 ‘보수’와 ‘진보’의 구분하는 기준과 방식이 결국 경제 체제를 무엇으로 할 것인가에 대한 이론적 구분에 따라 결정되는 것임을 설명하며 현실 정치 즉 FTA, 무상급식, 민영화 등에서 경제 체제적 관점에서 보수와 진보를 구분하고 있다. 나아가 민주주의의 문제점과 독재 정치와의 구분, 자유민주주의, 공산주의, 사회 민주주의를 구분하는 기준에 대해 설명하고, 생산수단과 자본을 가진 보수층이 사회의 프로파간다를 조작하거나 장악하면서 정치적으로 보수를 지지할 수 없는 서민, 노동자, 자영업자, 농민 등이 보수를 지지하는 기현상이 발생한다고 설명했다.
세 번째는 ‘사회’ 편이다. 사회에서는 인간의 기본적 권리와 헌법에서 규정하는 의무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개인과 사회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개인주의와 집단주의의 개념적 차이가 무엇인지, 자연권의 탄생과 발전, 전체주의와 세금의 문제 등을 다루었다. 마지막으로 미디어에 대해서는 ‘미디어는 어떻게 거짓을 말하는가’를 통해 자본의 지배를 받는 미디어의 속성과 그로 인해 보수화될 수밖에 없는 언론의 문제를 지적했다.
마지막으로 ‘윤리’ 편이다. 우리를 시험에 빠뜨리는 윤리적 상황, 즉 딜레마에 대해 다룬다. 그 상황에서 어떤 판단이 가장 윤리적일까에 대한 논란의 역사를 통해 윤리의 문제를 정리하고 있다. 먼저 윤리적 판단, 의무론과 목적론, 정언명법, 목적론과 공리주의 등 인류가 가진 윤리의 문제를 각각의 관점에서 살펴보고 있다. 나아가 어떤 사회가 윤리적인 사회인지에 대해서는 이 책이 쓰일 당시에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었던 ‘송파구 세 모녀 사건’을 화두로 던졌다. 사회 변화를 위한 과정과 절차, 그리고 최종 목적이 모두 조화로울 수 있을까? 여전히 우리가 가져가야 할 윤리적 화두다.
1. 오랜 숙원이 해결될 것 같습니다. 속을 꽉 막고 있던 문제가 풀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관계가 복원되긴 어렵습니다. 너무 멀리 와버린 거죠. 갈라서는 건 쉽지만 다시 뭉치는 건 어려운 일이죠. 돌아보면 갈라서는 과정도 질기게 엉켜있어요. 오랫동안 상처에 소금을 뿌리고 아물어가는 피딱지를 들쳐내 고름이 생기는 과정의 반복이었죠. 그렇게 입은 상처는 아물지 않아요. 흉터가 남죠. 보면 계속 생각납니다. 아프게 한 사람이 떠오르며 진저리가 쳐지는 일이 반복되는 일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여하튼 일단락을 집니다. 이제 새로운 가능성으로 나아가야죠.
2. 어제는 간만에 늦은 시간까지 아내와 함께 소주잔을 채우고 비우기를 반복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정말 편안한 시간이었네요. 나이가 들수록 감정은 시간을 많이 요구합니다. 감정을 쌓는 시간도 길어지고 비우는 시간도 오래 걸리죠. 어린 딸은 아직 감정도 덜 자라있고 아마도 조만간 감정이 하루에도 몇번씩 널뛰기를 할 시점이 오겠지요. 중년의 나와 아내는 그렇지가 못해 감정도 느리게 움직입니다. 그런데 그게 나쁘지 않아요. 올라오는 것도 느리지만 내려가는 것도 느려서 긴 시간 자기 감정의 파도를 탈 수 있으니까요. 어제는 그런 즐거움이 있던 시간이었습니다. 이게 행복이죠, 별거 있을까 싶네요.
더이상 과학책에서 나와서는 안되는 그림. 마치 원숭이에서 사람으로 변화되어 온 모습을 진화를 상징하는 것으로 각인시켜서 진화에 대해 잘못된 인식을 심어 준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진화는 단선적인 변화가 아니라 수많은 가지들이 파생되어 온 현재의 모습일 뿐이다.
1부 ‘플라톤에서 다윈까지 우수성의 확산’에서는 인간 중심적 사고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지금까지 진화론에 대한 잘못된 인식은 인간으로의 진화를 진화의 최종점으로 본다는 것에 있다. 우리 스스로는 인간이 지구의 주인 같고, 심지어 이 지구를 끝장낼 수 있는 무기도 가지고 있으며, 공기도 빛도 전혀 없는 물속 깊은 곳에서부터 아무것도 살지 않을 것 같은 추운 북극점까지 어디에서나 생존이 가능하다는 것 등으로 지구를 대표하는 생물종으로 생각한다. 정말 그럴까? 인간이 지구를 대표하는 생물종에 오를 수 있을까? 굳이 지구를 대표하는 생물종을 뽑는다면 굴드는 박테리아를 꼽을 수 있다고 말한다. 사실 코로나 19로 인해 갈피를 못 잡고 있는 전 지구적 혼란 상황을 보면 결코 바이러스나 박테리아를 무시할 수 없는 일이다. 인간은 지구상에서 가장 '우수한' 생물종이라는 오해. 우리가 가진 그 절대적 신념을 조용히 깨뜨리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과학의 역사에서 일어났던 모든 혁신들은 종류는 다르지만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절대적 확신이라는 인간의 오만을 차례로 뒤엎어 나간 것이다. – 프로이트
인간은 복잡성을 띤 생물종이다. 복잡성을 가졌다고 해서 우수하다고 할 수 있을까? 복잡할수록 갑작스런 환경 변화에 취약해질 수밖에 없다. 박테리아는 지구 상에서 가장 많은 종을 가지고 있고, 아주 단순한 구조를 가진 생물종이다. 수많은 지구 생물종이 멸종을 했지만 박테리아는 여전히 가장 많은 개체수를 가지고 온 지구에 퍼져 있다.
2부 ‘죽음과 말 - 변이의 중요성에 대하여’에서 저자는 우리가 보는 흔적이 모든 것을 밝혀주지 못하는 한계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말이 진화된 흔적을 보면 우리가 흔하게 이야기하는 직선적 변화와는 거리가 멀다. 말의 진화는 ‘진화 계통수’로 보았을 때는 풍부한 변화로 점철되어 있다. 점차적 단순적 변화로 보기 어려운 지점이 있다. 저자는 말의 진화를 통해 진화는 모든 종의 변화의 모습을 총체적으로 보는 것이 중요하며 단선적인 변화로 진화를 이해하는 것은 잘못임을 이야기하고 있다. 즉 현재의 일시적 지배력을 종의 우월성이나 영원한 생존 가능성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3부 ‘4할 타자의 딜레마’는 이 책의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챕터이다. 스티븐 제이 굴드는 야구에서 4할 타자가 사라진 현실을 수십 년의 야구 기록을 통계화하고 수치화하고 그래프로 만들어 이유를 설명했다. 결국 야구가 발전함에 따라 4할이라는 견고한 벽은 더욱 견고해졌고, 야구의 신이 만들어 놓은 2할 6푼의 중심점에 선수들이 더욱 집결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고, 지금의 규칙이 그대로 적용되어 계속 간다면 그 중심점이 오른쪽 벽(4할대)에 더 가거나 왼쪽으로 움직이는 변화는 있겠지만, 거의 변화하지 않을 거라 보았다.
“최고의 선수들이 오랫동안 같은 규칙으로 경기할 때 그 시스템의 수준은 향상되며, 그것의 향상과 함께 변이 정도는 차츰 줄어들고 전체적으로 평준화된다. (중략) 이는 안정된 규칙 아래에서 승리라는 포상을 놓고 경쟁하는 개체들로 이루어진 시스템 전체의 일반적인 성질이다.”
제한된 조건과 규칙이 분명한 시스템에서는 이런 평준화가 일어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시스템이 안정화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야구 역사 초반에 다양한 변화들이 폭발적으로 일어나고 퍼펙트게임, 4할 타자가 등장할 수 있었던 배경이다. 마찬가지로 지구 역시 생명체의 등장이라는 시점에서는 다양한 변이들이 폭발적으로 일어났다. 그 와중에 지구 환경과 생태가 안정화되고 지구라는 제한된 조건과 자연이 정한 규칙이 안정화되면서 생명의 평준화가 이루어지고 있다. 어떻게 원숭이가 인간이 될 수 있으며 왜 지금은 그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느냐는 우문에 대한 굴드의 재치 있는 현답인 셈이다.
4부 ‘생명의 역사는 진보가 아니다’는 결국 인간의 종 변화가 최종 목적지가 아니며, 인간의 탄생 역시 예견된 결과가 아니며 우연의 산물임을 말한다. 지구 역사가 다시 45억 년의 생을 다시 굴러간다고 해도 지금의 모습과 같은 인간이 지구 상에 존재할지는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인류가 뛰어난 종의 DNA를 내세워 우주까지 진출한다 할지라도, 설사 우주 밖의 새로운 생명체를 만난다 할지라도 인류가 진화의 결과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 굴드의 주장이다.
이 책은 ‘진화’라는 단어를 발견한 이후 쌓아온 오해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우주를 통틀어 우리가 가장 진화한(?) 생명체라고 믿거나 우리보다 진화한(?) 생명체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진화를 단선적이고 결과론적으로 보는 시각이다. 인류는 생명체가 다양한 변이를 겪는 과정에서 나타난 우연의 산물임을 알고 우리 스스로 생명에 대한 존중과 겸양을 갖추어야 하며, 독선적인 자기애나 우월감에 빠지는 우를 범해서는 안될 것이다.
1. 누구나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안에서는 모든 것을 포기하라고 유혹하는 목소리가 강하게 흔들어 댑니다. 때로 양심은 모두의 손을 들어주려 합니다. 하지만 하나는 가짜. 그것은 꾸며진 자기 논리에 불과하죠. 거기에 흔들리는 건 약해져서입니다. 내면의 자유, 그것을 위해 우리는 유혹에 더 강해져야 할 겁니다.
2. '나는 그대가 과거의 추억을 굳이 현실로 꺼내려는 게 답답하다. 그것은 이제 허상이다. 아무리 노래와 영화와 책들이 우리의 젊은 날들을 이해하고 심지어 위로한다 할지라도 추억은 추억에 머물러야 한다. 현실로 소환해서는 추억도 잃고 현실마저도 망가진다. 그러니 이제는 돌아와라. 그대가 있어야할 곳으로. 도망가지 말고 이제껏 잘 지켜왔던 그대의 자리로.'
3. 어떻게 자유로워질까요? 자유로운 사람이 강한 사람일까요, 강한 사람이 자유로운 것일까요? 내적 자유를 위해 때로는 강한 규율로 스스로를 통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과정에서 나라는 존재가 가진 가치에 대해 스스로 답할 수 있다면 그것을 강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4. '나와 가까운 사람들이 맺었던 오랜 시간의 기억들이 어쩌면 족쇄처럼 다가올 수 있지만 그것은 눈을 가리고 벼랑 끝으로 다가서는 나의 바짓자락을 잡아주는 가녀린 손일 수도 있다. 뿌리칠려면 뿌리칠 수도 있겠지만 내 눈을 가린 것부터 풀고 나를 잡는 그 손과 내 앞의 벼랑을 봐야한다. 스스로 눈가리개를 풀어라.'
5. 존재는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배경이 없는 존재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 어떤 일이 벌어졌다면 그것은 한 사람만의 문제가 아닐 겁니다. 그 일은 사람들이 만든 배경 안에서 우연과 필연이 지어낸 주머니입니다. 돌이킬 수 있을 때 바로잡아야 합니다. 주머니가 이상하게 만들어지기 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