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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가 없던 시절 아이들의 놀이는 주로 야외에서 이루어졌다. 술래잡기, 다방구, 얼음땡, 오징어(일종의 야외 전투 게임) 등은 어릴 적 하루해를 짧게 만들었던 즐거운 놀이들이었다. 잘 못하는 아이들은 깍두기를 시키고, 나름대로 작전과 전략을 고민하면서 놀이를 즐겼다. 하지만 이런 놀이를 하다가 종종 다치는 일도 있었다. 찰과상 정도는 너무나 빈번히 일어났고, 멍듦, 타박상 등도 심심치 않게 생겼다. 심하면 탈골, 골절이나 인대 파열 등이 발생하곤 했고 아주 심한 경우 돌이킬 수 없는 장애를 입거나 사망 사고로 이어진 경우도 없지는 않았다. 돌아보면 우리의 놀이는 꽤나 격렬하고 다이내믹했었다.


그렇다면 요즘 아이들은 어떨까. 야외 놀이라고 해봐야 축구나 농구, 야구 등 성인들이 스포츠라고 했던 것들이 대부분이다. 요즘 아이들에게 다방구니 술래잡기니 오징어 같은 놀이는 생소하기만 할 거다. 놀고 싶어도 또래가 별로 없고, 있다고 해도 다들 학원을 가거나 과외를 받느라 동네 어귀는 쓸쓸하다. 적어도 오프라인에서 아이들 놀이의 다양성은 사라지고 있다. 일부 놀이들도 어른들에 휩쓸려 그들만의 문화는 종적을 감추고 있다.


그런 와중에 컴퓨터 게임이 사회적 문제라는 인식이 대두되고 있다. 게임 중독이란 말도 심심치 않게 언론에 오르내린다. 과연 컴퓨터 게임은 아이들을 위협하는 존재일까?


간단히 말해 컴퓨터 게임은 지금의 아이들이 즐기는 놀이 중에 가장 안전한 게임이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예전에는 아이들 부상의 제1원인이 놀이(게임)이었지만 컴퓨터 게임 때문에 아이들이 다치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하지만 뉴스에서는 심심치 않게 게임 중독으로 인한 사망, 절도, 사기, 살인 등의 사건사고 소식을 전하고 있다. 이런 일이 벌어질 때마다 게임 중독에 대한 규제의 목소리가 높다. 만일 그러한 강력사건들이 게임 중독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면 당연히 법과 제도로 게임을 규제하고 제한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는 또 다른 중독도 많다. 많은 직장인들이 주말이나 휴일도 없이 열정적으로 일하다가 돌연사하는 일이 비일비재다. 워커홀릭이란 말도 생겼다. 아무래도 일에 중독된 사람들이 너무나 많으니 일을 너무 열심히 하는 사람과 직장에 대한 규제가 필요하겠다. 많은 학생들이 아침 7시부터 밤 12시까지 공부하다가 우울증과 스트레스에 시달려 자살을 하고 있다. 공부가 사망의 원인이니 규제해야 마땅하다. 많은 산모들이 아이를 출산한 후 양육 스트레스로 인한 과로로 우울증에 시달려 주위 사람들을 괴롭히거나 심지어 자녀를 살해하고 자신도 자살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따라서 출산을 제한하고 규제하는 법안이 필요하겠다.


물론 엉뚱한 논리다. 우리가 어떤 단어에 ‘중독’을 붙이는 것은 그것이 필연적인 결과로 나타나는 증상들이 신체나 사회에 부정적인 영향을 직접적으로 끼쳤을 때 표현할 수 있는 말이다. 일하는 사람들 중에 과로사가 나온다고 일을 규제하지 않고, 산모 중에 우울증이 심하다고 해서 출산을 제한하는 법률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게임 역시 일부에서 나타나는 부작용만으로 게임 을 규제한다는 것은 일면 필요한 부분이 없지 않으나 너무 쉽게 이야기되는 경향이 있다. 여기에는 게임을 부정적으로만 보려는 시각과 게임에 대한 몰이해가 깊게 깔려 있다. 그토록 ‘게임 중독’에 대해 수많은 미디어들이 강력한 경고를 보냈지만 게임과 범죄를 직접적으로 연관 지을 수 있는 어떠한 연구 결과도 발표된 바가 없다는 점이 이를 시사한다. 지금 뉴스에 등장하는 사건사고의 원인을 가난, 소외, 따돌림, 과도한 스트레스  등으로 대처해 보라. 오히려 정답에 가까울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토록 게임에 대한 편견과 몰이해가 사회적으로 퍼져 있을까. 그것은 사회를 주도하는 어른들 대부분이 게임에 대해 모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우리 때는 저러지 않았는데, 요즘 젊은 것(혹은 어린 것)들은... 쯔쯔쯧”이라는 말로 쉽게 치부해 버린다. 일면 그런 인상을 받을 수도 있겠다. 게이머들을 제3자의 입장에서 보면 매우 우스꽝스러운 모습일 수도 있다. 아마 대부분의 부모들이 아이들이 컴퓨터 앞에 앉아서 게임에 몰두한 모습을 보면서 기겁을 하는 것도 그 이유일 것이다. 평소에는 똘똘하고 부모말 잘 듣는 아이가 컴퓨터 앞에 앉으면 입을 벌리고 정신없이 키보드와 마우스를 난타하며 혼잣말을 하는 모습은 이상하게 보일만하다. 그러나 그것은 집중하고 있는 모습일 뿐이다. 어른들이 고스톱이나 윷놀이에 집중하고 있는 모습도 이와 다르지 않다. 그저 아이들이라서 더욱 이상하게 보는 것일 뿐이다. 무언가에 몰입하고 집중하고 극한의 카타르시스를 느낄 때의 표정, 쉽게 말해 어른들이 섹스를 할 때의 표정도 그와 같지 않나.


스타크래프트의 정식버전은 18세 이상 가능이지만 그보다 수위가 낮은 12세 버전도 시중에 나와 있다.


본인이 유일하게 즐기는 월드오브워크래프트는 15세 이상 할 수 있는 게임이다.



세상은 많이 달라졌다. 지금은 21세기이며 아이들은 컴퓨터와 인터넷을 통해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하고 있다. 부모가 아이들이 게임을 즐기는 것을 그저 스트레스나 풀겠거니 하며 방치하거나 ‘게임은 나쁜 것’이라고 하면서 죄책감을 준다면, 아이들은 게임을 통해 스트레스와 폭력성을 키울 것이고, 죄책감을 털어내기 위해서 더욱 더 게임을 통한 일탈과 반항을 생각할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당연히 게임에 대해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아이들이 즐겨 하는 게임의 장점을 이해하고 그 게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즐기는 부모가 되어야 한다. 스타크래프트가 가진 전략성을 통해 종합적인 사고의 중요성을 이야기하고 월드워크래프트 속의 신화와 전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구성해 보자.


“아들, 밀려오는 저글링 러쉬를 깨려면 시즈 탱크를 언덕 위에 배치하는게 좋아.”

“아무래도 언덕 탱크를 공략하기 위해서 공중 공격을 해오겠죠?”

“그렇지, 그렇다면 터렛(대공미사일 기지)을 설치해서 방공 능력을 보강하는 건 어때?”


“아빠, 드워프들은 왜 키가 작고 뚱뚱하죠?”

“드워프는 북유럽 신화에 등장하는 인간보다 작은 난장이란다. 어두운 곳을 좋아하고 땅굴이나 동굴에 모여 사는 종족이지.”

“아, 그래서 채굴에 능하다는 거군요.”


아이들의 게임을 규제하는 것은 필요하다. 하지만 단순히 게임 시간을 통제하는 것만으로 가정이나 학교에서 할 일을 다한 것이 아니다. 교육의 진실은 수평적인 대화를 통한 이해와 공감에 있다. 게임을 즐기는 아이와 대화하고 그 게임을 이해하려고 하자. 얼마나 편한가, 만일 아이가 다방구나 술래잡기, 오징어를 하자고 했다면 아마도 당신은 부상의 위험이나 심신의 피로를 경험할 텐데, 고작 컴퓨터 게임 아닌가? 설마 클릭과 키보드 조작이 힘들다고 핑계될 것인가? 물론 지나치게 폭력적이고 선정적인 게임에 대해서는 단호히 못하게 해야 한다. 그렇지만 모든 게임이 그렇지는 않으며 아이들이 얼마든지 즐길 수 있는 게임이 많다. 아이와 대화를 하기 위해서 함께 게임을 하는 것도 반드시 필요하다. 겉으로 이해하는 척하는 것과 함께 몰입하고 즐기는 것은 천지 차이다. 부모가 함께 게임을 즐기고, 게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자. 아이들이 게임 안으로 숨어 들어 게임 속에서 방황하기 전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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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반나절 만에 집이 나갔다.


아내와 내가 이사를 결정한 것은 올해 초였다. 지금 사는 집의 임대차 계약 만료가 3월인 만큼 3월에서 4월 사이에 옮기자는 계획이었다. 그리고 지난 주 일요일, 아내는 주인집 아저씨를 만나서 우리의 계획을 알렸다.


그리고 2시간도 되지 않아 부동산에서 집을 보러 와도 되냐는 연락을 받았다. 주인집에서 부동산에 연락해 집을 내놓았던 것이다. 그로부터 2시간여 흐른 뒤 초로의 노부부가 집을 보러 왔고, 다시 1시간 여 뒤에 젊은 남녀가 집을 보러 왔다. 노부부는 뒤에 온 젊은 남녀(아마도 신혼 부부)의 부모였던 것 같다. 그리고 다시 1시간 뒤, 우리가 계약했던 금액에 500만원이 더 붙어서 집이 계약됐다는 연락을 받았다. 불과 반나절 만에 내가 살던 집이 다른 사람에게 넘어간 것이다.


따지고 보면 그리 나쁜 조건은 아니다. 전세값 대란의 와중에도 집주인은 지난 1년간 수도권 전세값의 평균 상승폭인 7%만 올려서 받았다. 우리가 들어와 살았던 가격이 2년전 가격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그렇게 많이 올린 것은 아니다. 이렇게 되자 이제 문제는 우리에게 떨어졌다. 몇 군데 부동산에 연락은 취했지만, 딱히 물량이 없는 상황이라 부동산에서 오는 연락도 없었다. 주중에 아내가 연락이 온 부동산 몇 곳을 다니면서 전세로 나온 집을 둘러보았지만 몇 곳은 터무니없이 낡았거나(그럼에도 불구하고 가격도 터무니없이 높았다) 아이를 키우기에 부적합하였다. 부동산은 오히려 돈을 조금 더 더해 집을 사는 것을 추천했지만, 아내와 내 생각은 달랐다. 아직은 집을 살만한 처지도 입장도 아니라는 데에 공감했다.



위 사진은 글과 전혀 관계가 없음^^;;



이사 날짜를 박아놓고 집을 구하러 다닌 것도 문제지만 요즘 같은 전세 대란의 와중에 집을 구하자니 쉽지 않다. 결국 어렵게 개봉역 근처의 10년 된 아파트를 잡을 수 있었다. 우리가 지불하는 전세값을 은행 이자로 계산해 보면 하루에 방값으로 25,000원 정도 내고 지내는 셈이다. 실질적인 비용으로 계산해 보니, 대한민국에 부동산은 숙명적인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 나이가 들면서 지불해야 하는 땅값은 점점 더 커진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보다 넓은 집, 보다 좋은 학군, 보다 쾌적한 환경 등을 쫓아다니며 살아간다. 그러나 그 꿈은 모두가 꾸는 꿈이지만 서로의 이기적인 마음과 사회 제도의 문제로 자꾸만 멀어져만 간다. 왜 국가와 사회는 사람들의 주거 문제에 대해 시장 논리만 이야기하고, 사람들은 재산의 70%이상을 부동산에 가압류 당한 상태에서 사는 것을 감수하며 사는 것일까? 그리고 그 70%의 재산 가압류의 이익은 누가 취득하고 있을까?


앞으로 4년여 정도 이 공간에 머물 계획이다. 그동안 내가 살아야할 집의 가치와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하루에 2만원의 비싼 비용을 지불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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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술자리에서는 SNS 이야기가 빠짐없이 나온다. 얼마 전의 술자리도 그랬다. 이날도 대표적인 SNS 서비스 ‘페이스북’에 대한 이야기가 술안주로 올라왔다.


“페이스북이 무서운 건 ‘알 수도 있는 사람’에 나오는 인물의 면면이야.”

“그렇지. 몇 년 전에 소개팅으로 만나서 두세 번 만났던 사람을 ‘알 수도 있는 사람’에서 보았을 때는 멍해지더라.”

“나는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을 소개하더라. 아무것도 모르고 클릭했다가 친구 요청이라는 걸 하게 되어서 얼마나 기겁을 했는지 몰라.”

“×표시를 누르면 또 다른 사람을 보여주잖아. 이건 꼭 페이스북이 ‘이 사람 모르니?’라고 자꾸 물어보는 것 같아. × 누르면 또 다른 사람을 보여주면서 ‘그럼 이 사람은?’ ‘이 사람 몰라?’ ‘이 사람은 알텐데?’……‘잘 기억해 봐. 당신이 아는 사람이 틀림없어!’”


이처럼 페이스북 등의 SNS 서비스의 강점은 내가 찾아가지 않아도 시스템이 알아서 정보를 찾아서 배달해 준다는 점이다. 블로그나 웹카페 등은 사용자가 필요하다면 직접 찾아가서 정보를 확인해야 하지만, SNS는 사용자 간의 정보들이 수시로 왕래하면서 점차 해당 사용자의 취향과 성향에 맞춤형 서비스로 발전하는 것이다. 이러한 점이 SNS의 성장 동력이기도 하지만 개인 프라이버시 문제 등은 심각한 사회 문제를 일으키기도 한다. 최근 트위터에 등장한 폭언남 ‘아톰’의 경우도 트위터의 대문에 적은 신상과 제시된 정보를 토대로 여성 회원에게 접근한 것으로 보인다. SNS 서비스를 이용한 성희롱 등의 성범죄를 비롯해 우후죽순처럼 증가하는 소셜 커머스를 이용한 사기 피해와 금융 피싱 등 신종 범죄의 등장은 이 서비스가 광범위하게 사용되면서 한편으로 현신 세계와 거의 차이가 없이 활용되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개인정보의 유출과 사생활 침해는 사실상 정부와 기업의 합작품이라는 주장도 있다. 검찰은 사소한 사안에 대해서도 수년치 이메일을 법원의 영장 없이도 들여다 볼 수 있고, 경찰 등 수사기관이 인터넷 포털 서비스에 개인의 신상 정보를 요구하면 포털 사이트는 당사자에게 정보 제공 요청 확인도 받지 않은 채 신상 정보를 쉽게 제공한다. 정보의 자기 결정권이 정부 기관, 특히 수사 기관에 의해 무시되는 상황은 자연스럽게 개인정보에 대한 가치를 평가절하하게 된다.


기업은 기업대로 고객 관리와 영업 마케팅 차원에서 개인 정보를 무차별적으로 수집하고 있다. 기업 사이트의 고객코너에서 글 하나 올리더라도 사이트에 가입을 해야 하고 그 과정에서 주민등록번호 등 내밀한 개인정보들을 적어야 하는 게 우리 인터넷 현실이다. 또한 회원 가입을 하는 과정에서 동의한 약관에서는 내 개인정보가 어떤 상업적 목적으로 쓰이고, 누구에게 양도되는지에 대해 정확히 알 수 없도록 애매한 내용으로 정리하고 있다.


이런 문제점 때문에 최근 국회와 정부는 ‘개인정보보호법안’을 발위한 상태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지난 1월 19일 개인정보 보호 기구와 관련한 의견을 냈다. (관련 보도자료)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 인터넷 세상의 흐름에서 인권 보호는 이제야 눈을 뜨려고 한다. 물론 법안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도 넘어야 할 산이 많고, 법안이 만들어지고 개인정보보호기구가 발족하더라도 산적한 사안을 어떻게 풀어갈지는 산넘어 산이다.


하루 빨리 관련 법안과 기구가 정상적인 활동을 할 수 있는 길이 열리길 바란다.




위 글은 국가인권위원회 블로그 별별이야기에 보낸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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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민서는 한밤 중에도 느닷없이 일어나 한시간 내내 울어대는 일이 잦았습니다. 불을 키고 어디 아픈데가 있나 온몸을 뒤져보아도 뚜렷한 증세는 보이지 않고 아무리 어르고 달래고, 집안 여기저기를 안고 돌아다니며 울음을 그치게 하려고 온갖 애를 써도 아기는 울음을 그칠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오래전에 떼었던 엄마젖을 다시 물고는 숨넘어가는 울음소리를 잦아가며 천천히 잠이 드는군요. 조심스레 체온기로 아이 열을 재보면 보통 38도를 오르내립니다. 그렇게 뜨거운 건 아닐텐데 부모 마음이 그런가, 아이가 불덩이같다고 엄마는 말하네요.

처음에는 감기인줄 알았습니다. 기침도 하고 콧물도 나오고 게다가 열까지 있으니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결론적으로 엄마 아빠의 생각은 절반은 맞았지만 절반은 틀렸더군요. 민서는 중이염에 걸린 것이었습니다. 요새는 날씨가 추워서 외출다 하지 않고 집에만 있는 아이가 아프니 엄마는 자책에 쉽게 빠져듭니다. 아빠도 그렇게 자유롭지는 않지요. 야근이다 특근이다 하면서 아기를 제대로 안아 보지도 못한지가 벌써 몇달이 되어가니까요. 그런데 중이염은 아기들이 쉽게 걸리는 질환 중의 하나였군요.

관련 자료를 찾아보니 세 돌이 될 때까지 영유아의 80%가 한번쯤 경험하는 일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중이염 발생의 주범은 감기였습니다. 아기들은 보통 모유 수유를 할 때는 엄마로부터 면역체를 받지만 모유수유를 끊은 이후부터는 외부의 바이러스에 쉽게 당할 수 있어서 감기 등을 달고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게다가 아기의 입과 귀를 연결해주는 신체 기관의 특성상 감기는 쉽게 중이염으로 발전한다는 것이라고 하네요. 따라서 특별한 증상 없이 아기가 열이 나거나 밤에 갑자기 울음을 터뜨려 잘 멎지 않을 경우에는 중이염을 의심해 볼만합니다. 특히 감기 증상과 비슷한 경우가 많으므로 반드시 병원 진찰을 통해 중이염 여부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고 의사들은 말합니다. 

민서는 지난주 초에 중이염 판정을 받아 3일에 한번씩 병원에 들려 진찰을 통해 항생제 처방을 받고 있습니다. 자주 병원에 가는 것은 병의 진행여부를 수시로 체크하고 항생제의 투여와 중지의 시기를 맞추어 봐야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항생제를 아침 저녁으로 먹고 있지만 병원측 이야기로는 2주 정도는 갈 것이라고 예상하더군요. 항생제 때문인지 민서는 평소보다 잠이 많아졌습니다. 대신 지난주보다 상태는 아주 호전됐습니다. 밥도 잘 먹지 못하고 밤중에 자주 깨서 울다가 잠도 제대로 못자곤 했는데, 밥 먹는 것은 조금씩 나아지고 있고, 잠은 항생제 때문인지 낮에도 낮잠을 쉽게 잡니다.

어디가 아픈지 말은 못하고 그저 악을 쓰며 울고 보채는 아기를 보면 속이 타들어가두군요. 아기들은 아프면서 큰다고 하지만, 아기가 겪어야 할 고통도 엄마 아빠들은 고스란히 겪게 마련입니다. 이런 걸 보면, 육아의 과정은 아기만 크는 게 아니라 엄마 아빠도 함께 크는 과정임을 틀림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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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서가 감기에 걸렸네요. 보통
갓난아기 보다 민서 나이 때에 잘 걸린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젖을  먹을 때는 엄마의 면역성 물질을 내려받기 때문에 괜찮은데, 젖을 땐 후에는 스스로 면역력을 강하게 키워야 하기 때문이라고 하죠. 그러다 보니 약한 아이는 감기를 달고 산다고도 하는데, 다행히 민서는 그렇지는 않은 듯하네요.

지난 번 열감기에서는 어느덧 스스로 낫더니 이번 감기는 쉽게 물러날 것 같지가 않습니다. 병원에 다녀온 민서 엄마 말로는 열뿐만 아니라 콧물과 기침도 하는 걸 봐서는 지난번과 사뭇 다르다고 합니다.


지난 밤에도 밤새 칭얼대고 우는 아이를 어르고 달래느라 밤잠을 설쳤는데, 오늘 밤은 무사히 넘길 수 있을까요? 잠을 못자는 게 힘든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아이가 아픈 것이 부모를 더 힘들게 하는 것임을 새삼 깨닫는 어제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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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너무 도움 많이 주셔서 감사합니다. 창피하지만, 며칠째 아무것도 못 먹어서 남는 밥이랑 김치가 있으면 저희 집 문 좀 두들겨 주세요.”   >>> 관련기사 바로 가기

한 젊은 여성 작가 최고은 씨가 남긴 마지막 유서 같은 쪽지입니다. 트위터에서도 최고은 씨의 안타까운 죽음에 대한 이야기들이 지금도 조용한 물결을 이루며 퍼지고 있습니다. 불공정한 영화계 관행이 또다시 도마에 올랐네요. 그러나 영화계만 그럴까요. 출판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교과서 출판물의 경우 합격 불합격에 따라 출판노동자들의 목숨이 왔다갔다 합니다. 책의 실패에 직접적 책임이 있을 교수 등의 저자는 이미 선인세라는 명목으로 기대 이상의 고료를 챙기고 다음 교과서 시즌이 되면 다시 아무일 없다는 듯 저자로 이름을 올립니다. 많은 편집 노동자들은 심의에서 탈락했다는 이유만으로 회사를 떠나고, 고통의 시절을 보내다가 다시 저임금의 아웃소싱 출판 시장이나 별로 나을 것 없는 타사에 좋지 않은 조건으로 재취업하게 됩니다.

고 최고은 씨의 일이나 출판노동자들의 현실은 영화사나 출판사가 떠 안아야 할 손해를 온전히 최하층 노동자에게 떠넘기는 전형적인 사례이며, 이런 일은 우리 사회에 비일비재하게 벌어지는 일이죠. IMF가 그러했고 최근의 외환 위기 사태가 그러했으며, 전세 대란과 물가 폭등으로 이어지는 지금의 현실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에게 부자들의 위기를 떠넘기는 것일 뿐이죠. 우리 사회는 계급 사회입니다. 그리고 그 계급에서 돈이 있는 사람들이 힘을 가진 사회입니다. 사회 지도층의 선행 따위를 기대하기 힘든, 혹여 있다고 하더라도 더 많은 악행을 감추기 위한 장치일 뿐인 그런 사회를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연대해야 합니다. 세상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두눈 부릅뜨고 지켜보고 여기저기서 거대한 힘과 맞서 싸우는 사람들에게 연대의 손길을 보내야 합니다. 이명박 욕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그것보다 실제로 고통받고 싸우고 있는 사람들을 지지하고 관심을 가지는 게 중요합니다. 우리를 기다리는 이웃들의 문을 두들겨 봅시다.

고 최고은 씨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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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배에게 보낸 트위터 메시지였다. 후배 @choan2 는 3주간 출장을 떠나는 아내를 배웅하고 집으로 돌아와 텅 비어 있는 집안의 모습을 보며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트위터에 띄웠다.



그의 메시지를 보며, 남다른 인연으로 살아가는 후배 부부의 모습이 좋아 격려의 메시지를 남겼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시간은 참 빨리 간다. 나도 벌써 결혼 4년차로 접어들었다. 아기가 태어났고 전세 계약이 끝나가고, 어머니 환갑이 얼마 남지 않았다. 내 인생에서 10분의 1을 아내와 같이 보내고 있다. 짧으면 짧고 길면 길다고 할 수 있는 시간. 작년 봄, 아내는 잠시 구례에 계시는 장모님 댁에서 몸을 의탁한 일이 있다. 해산 이후 조금은 무리한 듯해서 기왕이면 마음 편하게 어머니 집에서 봄을 나는 게 좋겠다는 생각에 합의하에 이뤄진 일이었다. 불과 한달도 안되는 시간이었는데도, 아내가 떠난 자리는 무척이나 크게 느껴졌더랬다. 한동안 아내가 쓸고 닦았을 방구석과 음식을 하고 설겆이를 했던 싱크대를 우두커니 바라볼 때가 있었다. 함께 생활했던 공간에 혼자 덩그러니 남겨졌을 때의 느낌. 내가 바쁘다고 늦게 오거나 외박을 했을 때 아내가 느꼈을 그런 마음들이 오롯이 가슴을 때렸다.

애틋한 마음이 자리잡자 그리움이 깊어갔다. 결국 2주만에 차를 몰고 구례까지 5시간여를 달려 내려갔다가 오기도 했다. 가끔, 아니 아주 자주, 결혼하기를 잘 했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그리움 애틋함을 선물해 준 사람이 내 곁에서 항상 나를 지켜주고 나를 아껴주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것, 그것만큼 행복한 일이 어디에 있을까.

지난 겨울부터 지금까지 내내 야근과 주말 특근으로 집에 머무는 시간이 적은 요즘, 아내는 무척 힘들어한다. 강추위도 한몫하고 있지만, 부부가 함께 살아가는 공간과 시간의 절대부족이 큰 원인이라고 본다. 이번 일이 끝나면 봄이 올 것이다. 다시 우리들의 화양연화를 그려 볼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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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사히 제출했다, 라는 말이 맞는지는 모르겠다. 물론 제출하는 데까지는 성공했다. 이제 내 손을 떠난 책이니 더이상의 미련도 괜한 정신 낭비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기는 필요하다. 과연 처음에 가졌던 초심이 잘 반영된 책일까. 책을  생각할 때 가졌던 그 마음들과 생각들과 의지들이 세상에 나온 책들에 잘 반영되어 있을까.

어디나 어려움은 있다. 천재적인 저자이지만 나태함은 어쩔 수 없고, 능력은 뛰어나지만 책임감이 없는 디자이너도 어쩔 수 없다. 실적만 요구할 뿐 비전을 이해하지 못하는 회사도 어디나 비슷하다. 예술적 투혼은 있어도 앞뒤로 꽉막힌 삽화가는 또 어떤가. 정책결정권자들에게 이상은 있을지 모르겠지만 인간에 대한 예의는 없어 보인다. 편집자? 어디서나 여기저기 치이기 마련이다.  그나마 편집자가 없다면 이런 책은 나올 수가 없다. 모든 이해당사자들의 입장을 조율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런 과정에서 책은 탄생하기 마련이다.

편집자는 이처럼 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다. 저자는 물론, 디자이너, 삽화가, 제작 관계자, 인쇄기장, 제본 관계자 그리고 마지막 독자까지. 여기저기서 삐걱거리며 책을 만들어간다. 편집자는 그 모든 관계에서 평형을 유지하고, 서로의 이해관계를 조정해야 한다.

이러한 조정은 곧 책을 만드는 과정의 하나하나에 초점을 맞추는 과정이다. 예전의 교과서가 저자와 학습자가 만나는 공간이라고 했다면, 최근의 교과서는 저자뿐만 아니라 다양한 관계자들이 학습자와 대면하게 하는 책이다. 위에서 말한 모든 사람들이 최근 교과서의 주요 참여자인 셈이다. 따라서 좋은 교과서가 나오기 위해서는 다양한 관계자들이 저마다의 몫을 충분히 할 수 있어야 하고, 각각의 참여자들이 정확한 지침을 가지고 구체적인 목표를 향해 작업을 했을 때 좋은 교과서가 나올 수 있다. 여기에 편집자의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이유가 있다.


교과서 외의 학습지나 교재가 개인이 스스로 학습하는 것을 지향하고 있다면, 교과서는 철저하게 학습자와 학습자, 학습자와 교사 사이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나아가 예전의 교육과정이 교사-학습자 사이의 관계를 중요시 한데 비해 지금의 교육 과정은 학습자-학습자 사이의 소통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 모둠 학습이나 다양한 토론 학습 등을 제시하는 이유다. 물론 이것이 지금의 교육현장의 현실에 비하면 너무 이상적이라는 지적도 있다. 하지만, 우리의 교육이 나아가야 할 길이기도 하고, 현재 사회가 일방적 교육이 아닌 다자간 소통을 중요하게 여기는 만큼 당연한 지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교육 현장의 흐름이 교과서에 투영되기 위해서는 편집자의 시대 인식과 현실 인식이 날카로워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편집자의 역할과 임무, 그리고 필요한 능력은 매우 중요해졌지만, 편집자 풀은 대단히 취약해지고 있다. 교과서 시장 역시 정부는 시장논리에 따르는 정책을 추진하고 있고, 게다가 수많은 업체들이 뛰어들어 나눌 수 있는 파이가 점점 적어지고 있고, 많은 야근과 집중적이고 고단한 업무, 사람 관계의 어려움, 무엇보다 적은 임금 등으로 이 업계로 들어오려는 신규 인력은 점차 줄어들고 있는 현실이다.

만만치 않은 변화의 큰 흐름을 보고 있다. 게다가 저 멀리 E-book이 열대성 저기압골을 형성하면서 점차 그 세력을 확대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지금도 따라가기가 벅찬데, 저 쓰나미처럼 몰아닥칠 폭풍우는 어떻게 견뎌낼 수 있을까 하는 걱정도 든다.

그러나 편집자는 성장하고 있다. 성장은 목표나 희망은 되지 못하겠지만 그 자체가 소중한 자산이 된다. 특별하지 않은 평범한 사람들이 가진 가장 강력한 무기가 바로 이 성장이다. 편집자는 한권의 책에서 자신의 성장판과 나이테를 발견해야 한다. 그럴 때 편집자로서의 존재의 이유가 발견될 수 있을 것이다.

교과서가 앞으로 어떻게 변화할까. 이북의 흐름이 교과서 시장에 어떤 식으로 영향을 미칠까. 다양한 질문과 기대감들이 올해를 채울 것이다. 올해는 그 질문들에 답하는 것이 중요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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