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벽걸이 달력이 줄어든 대신 탁상달력이 넘치고 있다. 안방 책상에도, 체중계 근처에도, 아기 머리맡에도 탁상 달력이 놓여 있다. 달력에 무언가를 기록하는 데는 젬병에 가까운 수준인 나에게 탁상달력은 그저 요상한 물건일 뿐이다. 결혼하고 난 후 체중계 옆에 있는 탁상 달력에는 매일 아침 아내와 나의 몸무게를 적어 놓는다. 처음에는 임신한 아내의 몸무게 변화를 통해 건강 여부를 체크하려고 했던 것인데, 이제는 내가 더 적극적이다. 몸무게를 줄여보겠다는 신념으로 열심히 적고 있지만, 실상 줄어들기 보다는 더 늘어나는 걸 막고 있다는 쪽에 더 가깝다. 성실하게 기록하다 보면, 한 달 동안의 몸무게의 변화가 혼란기 주가지수처럼 출렁이는 모습이 그려지기도 한다. 무엇보다 이 겨울 동안 몸무게를 지켜내는 데는 이 탁상 달력과 체중계가 큰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민서의 탁상 달력도 있다. 아기 머리맡에 놓아 둔 탁상 달력은 아내의 꼼꼼한 기록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민서가 똥을 몇 번을 싸고, 몇 시에 젖을 물렸으며, 목욕은 언제 했는지의 기록들이 자세히 정리된 것이다. 아기에게 특별한 이상이 있을 때나 기념할 만한 사건이 있는 날도 메모가 되어 있다. 민서 태어난 이후의 날들을 하루하루 셈해서 적어 넣는 정성도 아끼지 않는다. 또 따로 포스트잇을 사용하여 아기의 특이사항을 메모해 놓고 이후 병원 검진 때의 질문 목록으로 활용하기도 한다.


아내의 기록에서 아기의 미래를 본다. 기록은 적는 순간 이미 과거가 된 이야기지만, 거기에는 지향하고 나아가려는 방향을 담았다. 우리의 체중 기록이 서로의 건강을 챙기기 위한 이정표였듯이, 아기의 일상을 메모한 달력은 건강하고 무럭무럭 자라나는 우리 아기의 미래를 그려보는 조감도를 보는 것과 같다. 탁상 달력 하나에 적혀 있는 소소한 메모도 하나의 역사가 되는 순간이다.



반응형

'구상나무 아래에서 > 일상의 발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무실에 핀 봄꽃  (0) 2010.02.24
아내의 외출  (10) 2010.02.07
접란의 점령기  (4) 2010.01.28
연말정산  (4) 2010.01.27
겨울비 안개 속으로  (0) 2010.01.20
반응형






‘스펙’.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도 몰랐다. 졸업할 때만 해도 그런 말은 없었다. 학점이 좀 부족해도 자기소개서와 면접에서 점수를 딸 수 있다는 황당한 자신감을 가지고 살던 때였다. 그런데 사정이 달라졌다.


“스펙이 딸려서.”
“스펙을 키워야 해요.”
“거기는 어느 정도 스펙이 되어야 해요.”


스펙 때문에 대학에 대학원까지 졸업하고도 다시 학원을 쫓아다니고도, 토익 토플 시험 보러 다니고, 영어 외에 2개 외국어를 배우느라 머리 터지게 싸우고 있다. 스펙의 내용을 보면 딱히 자기개발과는 다른 내용들이다. 대부분 기업과 사회가 요구하는 추상적인 내용의 구체화에 불과하다. 학원들만 신이 났다. 불과 10여년 차이 밖에 나지 않는 그들과 나의 괴리는 세대차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큰 간격을 가지고 있다.


지금의 20대에게 우리 사회가 요구하는 능력이 이렇게 대단한 거였을까? 그들은 적어도 이전 세대에 비해 사회가 요구하는 자질(?)과 능력(?)에 구체적으로 반응하고 직접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세대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년실업의 수치는 왜 이렇게 높은 것일까? 왜 그들은 자꾸 졸업을 늦추고, 휴학을 필수로 선택하고, 해외로 어학연수를 떠나면서도 취업 준비로 수개월 심지어 1~2년을 보내는 것일까. 물론 자살 같은 극단적인 경우는 언급하지 않겠다. (20대 자살율 또한 만만치 않게 높다.)


이렇게 스펙을 쌓아온 이들의 연봉은 어떨까? 10년 전에 비해 크게 달라진 우리 경제 규모만큼 늘었을까?


지금의 20대는 대부분이 비정규직이며, 곧 비정규직이 될 운명 앞에 서 있다. 8백만 명을 넘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임금 평균은 119만원이며, 전체 임금에서 20대가 평균적으로 받는 비율을 적용하면 88만원이 된다. 그나마도 세전 금액이다. 따라서 하루 8시간을 일하는 20대 비정규직이 한 달에 확보할 수 있는 경제력은 그보다 적다. - <88만원 세대> 197쪽


여성의 첫 출산이 늦어지는 이유 중에는 늦어지는 결혼이 있고, 늦어지는 결혼에는 늦은 취업활동이 있고, 늦은 취업활동에는 늦은 대학졸업과 늦은 독립이 자리 잡고 있다. 평균 학력이 계속 높아지고 있으니 그만큼 대학에서 보내야 하는 시간도 많아졌고, 휴학이라도 해서 어학연수라도 다녀와야 그나마 평균치에 가까워지고 있는 현실, 대학 등록금 1천만원 시대를 살다 보니 대학 졸업하자마자 빚더미에서 시작해야 하는 현실, 빵빵한 스펙에도 불구하고 88만원의 비정규직으로 직장생활을 시작해야 하는데 그것도 언제 짤릴지 모르는 불안을 안고 살아야 하는 현실을 살고 있는 게 지금의 젊은 세대가 처한 상황이다.


미래 세대의 불행을 저당 잡아 기성세대가 부를 쌓는다면, 실패와 좌절의 공포 속에서 보내야 하는 젊은 세대에게 어떻게 이 사회의 미래를 기대할 수 있을까. 국가라는 존재도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다. 얼토당토 않는 사업을 벌여 대규모 재정 적자를 일삼아 미래세대가 갚아야 할 부채를 더욱 부풀리고 있다.


단지 10여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내 주위에서는 ‘요즘 젊은 것들’이라며 혀를 차는 사람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들은 젊기 때문에 서툴 수도 있고, 실수할 수도 있으며, 버릇없을 수 있다는 걸 인정하지 않는다. 함께 일을 추진하고 함께 배우며 가르치는 과정보다는 다른 사람으로 대체할 생각부터 한다. 언젠가 당신도 그 위의 누군가에 의해 쉽게 갈아낄 수 있는 배터리가 될 수 있음을 모르지 않을 텐데, 생각은 그렇게 얄팍하고 가볍다.























지금의 20대에게도 말하고 싶다. 승자독식 개별경쟁을 요구하는 사회에 맞서야 한다. 스펙이 아닌 자기개발에 뛰어들어야 하고, 20대를 옥죄고 있는 사회 제도와 차별에 싸워야 한다. 지금의 20대의 고통은 우리 경제의 구조적 문제에서 비롯됐다. 세대의 문제가 아니라 가난과 빈곤의 문제로 부의 재분배, 복지와 인권이 보장되는 국가와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사회적인 문제에 좀더 깊은 관심을 가지고 올바른 정치적 선택과 책임을 고민해 보아야 한다. 경쟁의 관계가 아닌 협업과 연대의 관계를 지향해야 한다. 기업이나 더러운 정치인들에게 생각없는 소비 대상이자 없어서 좋은 표 한장으로 인식되고 있는 지금의 현실을 뒤집어야 한다. 당신들은  경제에서 생산과 소비의 주체이며, 정당한 투표 권력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 지금의 문제 해결에 적합한 정치 세력을 정책 결정권자로 내세울 수 있는 파워가 있고, 그런 정치적 선택 과정에서 스스로 세상의 주체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자기 권리에서 낮잠 자지 마라. 아무도 당신들의 권리를 챙겨주지 않는다. ‘88만원 세대’의 저자 우석훈 씨가 책에서 말했듯이, 당신들만의 ‘바리케이트와 짱돌’이 필요하다.



88만원 세대 - 8점
우석훈.박권일 지음/레디앙



88만원 세대 상세보기



반응형
반응형


작년 6월 달에 길거리 접란을 들여온 적이 있다(관련글 >> 접란이 들어오다). 식물 카페에서 보니, 접란이란 종자는 어디서나 잘 죽지 않으며, 아주 건강하게 자라고 번식도 활발하다고 들었더랬다. 내가 들여온 접란도 아주 잘 자라주었다. 게다가 삐죽하게 올라왔던 줄기에서 여러 개의 새끼 접란을 틔우기까지 했다. 사실 분양이나 옮겨 심는 것에 대해 전혀 모른다. 모르면 더 용감해지는 것. 과감하게 옮겨 심는 걸 시도해 보았다. 새끼 접란을 줄기에 최대한 가깝게 잘라내서 사무실의 빈 화분에 대충 심고 물을 듬뿍 주었다. 그렇게 지금은 다섯 개의 화분에서 접란이 자라고 있다. 모두 건강하다.


지금은 본 화분에서 벌써 또 다른 줄기가 하나 자라고 있다. 옮겨 심어야 할 새끼 접란들이 쑥쑥 자라고 있다. 이러다가 사무실 곳곳이 접란으로 수북해지는 날이 오고야 말 것이다.


사무실로 오자마자 더피(줄고사리과 식물>>관련글)로 시작한 화초 키우기는 어느덧 내 책상 주변을 화초들로 가득 채우고 있다. 식물과의 거리를 가까이 하는 것은 온갖 최첨단 기계와 통신 장비로 내 삶을 채우기는 여전히 공허한 느낌 때문이었다. 특히 생명의 자람은 기계가 주는 딱딱한 느낌과는 사뭇 다르다. 인간이 자연에 대한 동경을 잃어버린다면 삶은 더 황폐해질 것이다.


사무실 책상이라는 한정된 공간을 식물로 채우다 보면 반대로 비워야 할 일도 많아진다. 공간의 효율적 활용을 고민하는 것부터 이미 살아있는 것들과의 공존을 생각하는 것이다. 식물이 주는 여유는 그것만이 아닐 것이다. 분양을 하면서 다른 이에게 이런 마음을 줄 수 있는 여유도 생겼다.


물론 키우다가 죽인 화초도 여럿 있다. 모든 식물들은 저마다 최선을 다해 자신의 목숨을 이어간다. 죽어가는 것들은 나의 정성이 부족했을 수도 있고, 어찌할 수 없는 병충해에 원인이 있을 수도 있다. 내 책상의 한켠에서는 이렇게 삶과 죽음이 끊임없이 오간다. 그런 것들이 삶에 자극이 된다. 그리고 그런 자극 속에서 나의 항상심은 반짝반짝 빛이 난다.






반응형

'구상나무 아래에서 > 일상의 발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내의 외출  (10) 2010.02.07
아내의 탁상 달력  (0) 2010.02.01
연말정산  (4) 2010.01.27
겨울비 안개 속으로  (0) 2010.01.20
하군과 민서  (2) 2010.01.18
반응형





자고로 연말정산의 계절이다.

올해는 나를 세대주로 등록했다. 동거인도 두명이나 생겼고, 그 중 한명-딸, 민서-은 내 부양가족으로 등록됐다. 달라진 나의 지위에 다시 한번 움찔했다. 키가 1cm는 작아지지 않았을까.

지난해 내가 썼던 카드값에 또 손발이 오그라든다. 결혼으로 인해 들어간 비용이 만만치 않았으니 예상했던 바이지만... 그래도 급여액의 3 %에 훨씬 못미치는 저렴한 의료비를 보면서 위로해 본다(아내의 병원비와 출산비 등은 아내쪽에서 등록하기로 했다). 그래도 크게 아픈 데 없이 한해를 보냈구나 싶어 뿌듯해 한다. 그렇게 생각하니 그동안 몸 곳곳에서 이상 신호를 보냈던 것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치부해 버릴 수 있다.

매해 해온 연말 정산, 해가 갈수록 간소화되는 걸 느낀다.  책상 서랍을 뒤집어 가며 먼지 폴폴 날리는 영수증을 찾아, 이면지에 덕지덕지 풀칠해 붙이던 게 엊그제 같다. 요새는 주민등록등본도 인터넷을 바로 뽑을 수 있으니, 간단해졌다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인생도 살수록 복잡해 지는 거다. 세대주가 되고 가족이 생기고 신용카드 사용 금액이 늘고 여러가지 적어야 하고 준비해야 할 증명 서류들이 늘어난 걸 보면 연말정산 보다 복잡한 건 인생임에 틀림없다. 국가나 사회는 그게 성장이라고 한다. 심지어 '성장률'이라는 복잡한 수치로 친절하게 위로하려 들 때도 있다. 성장... 인생의 무게를 대치할 만큼 매력적인 단어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단순히 키만 크고, 가진 돈이 늘어나고, 집이 커지고, 자동차가 생기는 것이 성장일까.  당장 기부금 목록은 '0'이다. 그래도 2008년 소득공제 신청할 때는 얼마 안되는 유니세프 기부금 영수증이라도 붙여서 흐뭇했지만 이번에는 아무것도 없다. 내 성장의 이면에 있는 빈곤 그림자를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보다 따뜻하고 온기 있는 성장을 생각해 본다.



주룩주룩 비가 내린다.
이 겨울이 길고 지루하게 느껴지는 건, 아마도 겨우내 쏟아졌던 눈비 때문일 것이다. 봄되면 그 많은 눈비들이 그야말로 봄물처럼 쏟아지겠지. 작아지는 내 키를 재잘재잘 놀리면서 말이다.





반응형

'구상나무 아래에서 > 일상의 발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내의 탁상 달력  (0) 2010.02.01
접란의 점령기  (4) 2010.01.28
겨울비 안개 속으로  (0) 2010.01.20
하군과 민서  (2) 2010.01.18
존엄한 가난을 위해 - 아이티를 돕자  (0) 2010.01.15
반응형













반응형
반응형




“무슨 일 하세요?”

상대방을 알고자 할 때 가장 쉽게 던지는 말이다. 그 사람이 하는 일이 그 사람을 말해 준다는 오래된 관념이 투영되어 있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때로는 편견을 담는 말이다.

“편집자에요. 책 만드는 일을 하죠.”


내 설명은 그것으로 끝이다. 그럼 상대방은 여러 가지 상상을 할 것이다. 상대방의 지인 중에 편집자가 있다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좀 절망스럽다. 세상의 모든 작가들이 어떻게 편집자를 묘사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라. 작가가 받는 스트레스의 근원은 보통 편집자 혹은 편집장의 마감 독촉이다. 마감 독촉을 하는 편집자의 모습을 작가들은 사악하고 이기적인 모습으로 그리고 있다. 마감 원고를 받기 위해서는 옆에서 밤새도록 방문앞을 지키는 것도 마다하지 않을 독종들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의 <천사의 게임>에 나오는 코렐리라는 편집자는 작가의 영혼마저 담보로 잡고 있지 않나.


사실 편집자야 말로 음지에서 양지를 지향하는 사람들이다. 예전 교과서 편집자들에게 오가는 속설 중에 이런 말이 있다. ‘편집자가 교과서에 나오면 그 책은 심사에서 떨어진다.’ 물론 지금은 편집자의 이름도 버젓이 박혀서 교과서가 나오고 있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편집자들은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꺼려했다.


한 권의 책이 나오기 위해서는 기획, 집필, 디자인, 조판, 교정, 제판, 인쇄, 제본 등등의 과정을 거친다. 이 과정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들이 책을 만드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만, 정작 자기가 만드는 책이 어떤 책인지 속속들이 알고 있는 사람은 저자도 아니고 바로 편집자다. 편집자는 저 모든 과정에 개입해서 일일이 조정하고 합의하며 때로는 피터지게 싸우면서 한권의 책을 독자에게 선사하는 것이다. 훌륭한 오케스트라 연주를 위해서 지휘자가 필요하고, 대중을 사로잡는 영화를 만들려면 뛰어난 영화감독이 필요하듯이, 역사에 길이 남을 책이 세상에 나오는 데는 편집자의 역할이 매우 중요한 것이다.


이 책 <편집자란 무엇인가>는 편집자에 대한 모든 것을 담고 있다. 이 책은 책에 관심이 있는 사람-편집자, 저자, 북디자이너, 인쇄공-이라면 반드시 읽어볼 많은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좋은 책을 만들기 위해 어떤 노력과 과정이 필요하며, 어느 과정에서는 무엇에 세심하고 이런저런 치명적인 실수에 유의해야 하는지 일목요연하게 잘 설명하고 있다. 무엇보다 이 책이 나에게 준 감명은 사명감과 자부심이다. 



미국의 대표적인 출판사 가운데 하나인 사이먼 앤드 슈스터사에서 41년 동안 편집자로 일한 집시 다 실바는 기고문 <편집자와 저자>에서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며 이렇게 고백한다. "편집자는 대부분 알려지지 않는다. 우리는 글, 창조적 아이디어, 책을 사랑하기에 이 일에 매진할 뿐, 우리가 주목받길 기대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의 공헌을 깊게 이해한 저자가 머리말이나 감사의 글에서 우리의 이름을 언급하고자 하면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허락할 뿐이다. 우리는 편집자라는 직업이 최선의 책을 위해 묵묵히, 무명으로 공헌하는 직업임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이로 인해 우리 스스로를 하찮게 여기지 않는다."



나는 사폰이 그의 책 <바람의 그림자>에서 이야기했듯이, 모든 책은 영혼을 가지고 있다는 말을 믿는다. 한 권의 책은 수많은 밤을 새우면서 글자 하나하나 눈에 박아 넣었을 편집자들의 피와 땀을 머금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영혼이 더욱 깊어질수록 이 세상은 더 풍요로워질 수 있는 것이다.


올해로 책 만드는 일을 한지 횟수로 10년을 채웠다. 그동안 내 손을 거쳐간 책들이 지금 이 시간에도 이땅 어디에서 누군가에게 읽히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의 영혼과 내 영혼이 그 책에서 만나고 있는 것이다. 편집자라는 직업을 결코 버릴 수 없는 매력이 여기에 있다.











반응형
반응형





1.
좀 갑작스러웠다. 겨울비라니. 물론 기상청 예보를 믿지 않은 건 아니다. 그래도 느낌이란 게 있는 건데, 좀 머쓱한 일임은 분명하다. 며칠동안 내내 꽁꽁 얼어붙게 만들었던 강추위였다. 이렇게 쉽게 녹을 수도 있는 걸까. 그렇다면 그동안 왜 그렇게 쌀쌀맞게 군걸까? 아무리 계절탓을 한다고 해도 이건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다. 어제까지 있었던 옥상의 눈들이 모두 사라졌다. 어떻게 할 거야. 이제, 이렇게 겨울을 떠나 보내야 하는 거야?

2.
회사 근처 새마을 금고에 강도가 들었단다. 어쩐지 어제 출근할 때 경찰차들이 왔다갔다 하고 등에 과학수사대라고 써 있는 조끼를 입은 사람이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 자세로 다른 경찰과 담배피고 있는 것도 보았다. 강도가 들었다는 긴장감은 별로 없었다. 그저 낯선 풍경 하나였을 뿐.
황당한 상상이지만 이 시대에 은행털이들은 정말 순진하기 그지없는 놈들이 틀림없다. 아, 그 강도는 얼마 못 도망가서 잡혔다고 한다.

3.
오늘이 용산 참사 1주년이란다. 그래서 그렇게 비가 왔던 것일까? 저 멀리 아현동 고갯길에서 무너져가는 집들이 보인다.





반응형

'구상나무 아래에서 > 일상의 발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접란의 점령기  (4) 2010.01.28
연말정산  (4) 2010.01.27
하군과 민서  (2) 2010.01.18
존엄한 가난을 위해 - 아이티를 돕자  (0) 2010.01.15
옥상 휴게소의 눈  (0) 2010.01.12
반응형







장모님은 아기가 병원에서 퇴원하기 전에 매번 하시던 말씀이 있다.

"애기 퇴원하기 전에 자둬라이~. 아가 오면 그렇게 단잠이 그리울 수 없단다. 지금 많이 자 둬."

그렇다. 아기가 온 후 난 5시간 이상 푹 자본 일이 없고, 아내는 4시간 이상을 자본 일이 없다. 꼬물꼬물 노는 아기 재롱이 귀엽고, 나날이 살이 조금씩 오르는 아기 볼살에 빠져 있는 사이 아내는 피곤이 조금씩 쌓이고 있을 지도 모른다. 아니 아기를 자주 안기 시작하고 아기와 눈을 마치면서 뒷목의 뻐근함으로 호소해 왔다. 지병이던 손목 통증도 또다시 시작됐다고 한다. 그런 와중에도 내 아침밥과 도시락은 꼼꼼이 싸주려고 무진장 애쓰고 있다.

주말에는 내가 아기를 보고 아내를 푹 재워야겠다.




반응형

'구상나무 아래에서 > 일상의 발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연말정산  (4) 2010.01.27
겨울비 안개 속으로  (0) 2010.01.20
존엄한 가난을 위해 - 아이티를 돕자  (0) 2010.01.15
옥상 휴게소의 눈  (0) 2010.01.12
블로그 글로 보는 나의 2009년  (2) 2009.12.31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