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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9일 실시된 제17대 대통령 선거 투표율은 62.9%인 것으로 잠정 집계됐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따르면, 총 선거인수 3765만 3518명 중 모두 2368만 3684명이 투표를 마쳐 투표율은 62.9%인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 대선 가운데 최저 투표율(70.8%)을 기록했던 16대 대통령선거보다 낮아 역대 최저 투표율 기록을 세웠다.”

어느 모 뉴스사이트에서 퍼 온 지난 대선 결과이다. 뉴스에서는 나오지 않았지만, 투표를 하지 않은 사람의 수는 정확히 1396만 9834명에 이른다. 이 중에서 정말 시간이나 여건이 안 되어 투표를 못하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할 것이다. 투표를 하지 않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이유는 다음으로 요약할 수 있다. 제일 많은 부분은, 어차피 내 한 표가 당락에 큰 영향을 끼치지 않음으로 차라리 놀러 가는 게 더 유익하다는 주장, 다음으로 더러운 정치판에는 관심 갖기 싫고 투표라는 행위가 귀찮기만 하다는 생각, 그리고 내 투표권을 기꺼이 양도할 만한 사람이 없어서 투표를 안 한다는 주장, 여기에 정말 아무 생각 없어서 투표를 안 하는 사람 등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태어나는 그 순간 평생 지킬 협정에 서명을 한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렇게 자문할 날이 온다, 누가 여기에 나 대신 서명을 했는가. -377쪽

이명박 정부 탄생 이후 나라 전체가 들썩거리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명박을 선택한 것을 후회하거나 투표를 하지 않음을 후회하고 있다. 누군가의 말처럼 우리는 우리가 선택한 것으로 이루어진다고 하지 않던가. 어쩌면 당신 주장대로 당신이 투표를 하건 안 하건, 세상은 돌아가기 마련이다. 하지만, 최근의 방송 드라마 시티홀의 남자 주인공 ‘조국’(차승원 분)은 좀 다른 생각을 가진 것 같다.

“여러분은 반성하셔야 합니다. 당신의 삶에서 당신이 원하는 걸 발견하지 못했다면 그건…당신의 선택이 잘못됐던 겁니다. 여러분은 지금 직장을 잃어도, 집을 잃어도, 그 흔한 문화시설 하나 없어도 다 내 팔자인 것입니다. 과연 여러분은 그런 팔자를 원하셨던 겁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여러분의 선택이 인주를 바꾸고. 인주가 바뀌어야 당신의 삶이 바뀌고. 당신 삶이 바뀌어야 당신 아이들의 삶이 바뀝니다…….”

소설 <눈뜬 자들의 도시>는 전작 <눈먼 자들의 도시>의 속편 격이다. 앞선 전작에서 작가 주제 사라마구는 눈을 뜨고 있으면서도 보지 않으려는 자들을 눈먼 자로, 그리고 눈뜬 자가 가져야 할 소명의식과 사명감을 어떻게 풀어갈 것인가를 세심하고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전작에서는 온 도시의 시민들이 눈먼 자가 되고 오직 한 명만 ‘눈뜬 자’였다면, <눈뜬 자들의 도시>는 시민들이 모두 ‘눈뜬 자’가 되어 부당하고 정의롭지 못한 사회 제도와 그런 제도를 유지하려는 기득권 세력에 맞서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온 나라가 백색 실명증에 걸리고 4년이 지난 후 치러진 총선. 그러나 유권자 중(투표자 중에서가 아니라 유권자 중에서다) 83%가 백지투표를 내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한다. 정부는 이 현상을 체제를 위협하는 불순분자의 선동으로 보고 비밀경찰을 이용한 불법 도감청 등의 방법으로 조사에 나섰지만, 뚜렷한 실체를 발견하지 못한다. 몇 번의 재선거에서도 똑같은 결과가 나오자 급기야 도시 전체를 반역자로 몰아 도시를 고립시킨다. 정부당국자들은 야밤에 수도를 빠져나가고, 계엄령을 내린 후 도시를 군대로 포위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정상적(?)으로 투표를 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마저 탈출을 거부당하고 사태가 일어나고 만다.

그러던 어느날 총리와 대통령 앞으로 편지가 한통 날아오는데, 4년전 온 나라가 백색실명증에 걸렸을 때 유일하게 눈이 멀지 않은 여인이 있었다는 내용으로, 정부 당국자들은 이것을 이번 백지투표와 연관시켜 수사하도록 경찰들을 도시로 보낸다.

경찰들은 도시를 오가면서 유일하게 눈이 멀지 않았던 의사의 아내를 비롯해 그와 함께 힘든 시기를 견뎌냈던 사람들을 만나며 탐문 수사에 들어가지만, 마땅한 혐의를 발견할 수 없었다.

그런 와중에 수사팀장인 경감은 수사에 회의를 느끼고, 정상적인 명령이나 지시가 아닌 의도적 함정 수사에 대해 의사의 아내에게 솔직히 털어놓게 된다. 정부는 이 사실을 모른 채 의사의 아내를 시민들의 반역(백지투표)의 주모한 반역자로 몰아가는 여론 몰이를 한다. 그러나 그들의 시도가 번번이 실패로 돌아가자 끝내는 극단적인 방법을 동원하기에 이른다.

우리는 반역자들이 이성에 귀를 기울이게 하려는 우리의 모든 시도가 하나하나 대실패로 끝나고 말았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한 실패의 원인은, 적어도 내 의견으로는, 우리가 선택한 탄압 조치가 가혹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지금까지 추구하던 전략을 계속 따른다면, 강압적인 방법들의 수위를 계속 높인다면, 또 반역자들의 반응이 계속 지금까지와 같다면, 즉 아무런 반응이 없다면, 우리는 독재적 성격을 가진 극적인 조치에 의지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 221쪽

지금으로부터 160여년 전에 핸리 데이빗 소로우는 이미 작은 정부의 필요성을 주창했다.

“우리는 먼저 인간이어야 하고, 그 다음에 국민이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법에 대한 존경심보다는 먼저 정의에 대한 존경심을 기르는 것이 바람직하다. 내가 떠맡을 권리가 있는 나의 유일한 책무는, 어떤 때이고 간에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행하는 일이다.”

우리는 우리가 속한 지금의 정부, 그리고 사회 제도는 지금의 우리가 원해서 된 것이 아니며, 과거의 잘못된 관행에서 이어져 온 온전치 못한 부당함과 비리를 품고 있음을 잘 알고 있다. 따라서 얼마든지 우리가 정의롭고 올바르다고 믿는 방향으로 바꾸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하루에도 수없이 많은 선택의 기로에 선다. 그리고 우리 자신의 정체성은 그 선택들로 이루어진다. 이 사회 역시 당신의 선택들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눈 감을 것인가, 눈 뜰 것인가.

검은 색과 빨간색으로 된 표제만 보더라도 각각의 신문에 어떤 내용이 담겨 있는지 우리도 대충은 짐작할 수 있다, 조국의 적들의 또 한 번의 전복 행위, 누가 복사기를 돌렸는가, 허위 정보의 위험, 누가 그 복사 값을 냈는가. - 419쪽

이 부분을 보면서 실소를 흘릴 수밖에 없었다. 언젠가 ‘그 많은 초들은 누가 돈을 댔느냐’며 화를 벌컥 냈다는 사람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눈뜬 자들의 도시 - 8점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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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인간이 되지 못한다 해도 괴물은 되지 말자. 맞다, 그런 말이 있다. 아무리 지금 상황이 고달프고 벼랑끝으로 몰린다 해도,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인간성을 잃어버리면 안된다. 우리는 누구나 그렇게 말하지만, 정작 인간성을 지킬 수 없는 극한 상황에 다달을 때면 어떻게 바뀔까. 이에 대해 주제 사라마구라는 작가는 <눈먼 자들의 도시>라는 소설에서 그의 상상력을 펼쳤다.




모든 사람들이 눈이 멀어버린단는 설정 자체부터 파격이다. 작가는 왜 사람들의 눈을 갑자기 멀게 했을까. 그리고 이런 사건을 통해 드러내고자 한 그의 이야기는? 여기에는 인간성에 대한 깊은 관심이 담겨있다. 시각을 잃어버린 인간은 감각과 본능에 의해 움직이기 시작했고, 우리가 말하는 인간성을 하나씩 하나씩 잃어갔다. 그리고 유일하게 시력을 가진 안과의사의 아내만이 이를 목격하며, 괴로워한다. 만일 내가, 그리고 당신이 그 도시에서 유일하게 앞을 볼 수 있는 사람이라면 어떤 일을 상상할 수 있을까. 도시는 점차 인간성을 잃어가고 사람들은 하나둘 동물과 다름 없는 나락으로 떨어져가고 있다. 유일하게 눈 뜬 사람으로서 눈먼 사람들의 안내자이며 보호자로서 자처할 수 있는가. 눈앞에서 뻔히 벌어지고 있는 폭력에 대해 유일하게 저항할 수 있다면 살인을 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인간성은 무엇인가.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 갖추어야할 인간의 존엄성의 가치는 어떻게 매김할 것이며, 무엇을 지키고자 하는가. <눈먼 자들의 도시>는 이런 문제을 던져주는 문제작이다. 자 다시 한번 생각해 보라.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당신만이 눈을 뜨고 있다.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참혹한 상황을 보면서 당신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어떤 행동을 취할 것인가.

그리고 다시 돌아와, 지금 당신이 보고 있는 지금의 세상.. 그래 지금 현실을 당신은 어떻게 보고 있는가? 야만과 폭력의 현장에서 지금 당신은 눈먼자가 아닌가? 아니 당신이 지금 그 현실을 목도하고 있다면 당신은 어떤 행동을 할 것인가. 책의 한 구절을 인용하자면, "가장 심하게 눈이 먼 사람은 보이는 것을 보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말은 위대한 진리에요."이다. 당신은 눈뜬 사람인가, 눈먼 사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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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노심초사한다.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엄마는 자녀의 노예다. 아니다. 한국 사회의 자녀들은 엄마의 노리개이다. 정반대되는 두 개의 명제가 어찌됐든 현재의 한국 사회에서는 통용될 수 있는 논리다. 다시 말해 이것은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엄마들의 모순이다.

엄마와 자녀가 맺고 있는 관계의 모습(형식)이야 어떻든 그 내용은 지구 어디나 같다. ‘모정’, 단 두음절의 단어로 요약할 수 있다. 순수할 것만 같은 ‘모정’이라는 말도 정작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드러나는 모습은 그렇게 두터워 보이지만은 않는다. 최근의 ‘알파맘 VS 베타맘’ 논쟁도 그런 엄마들이 가진 모정의 형식을 두고 나타난 말이다.





우리 사회 엄마들이 자녀들에게 가지고 있는 최대 관심이 ‘교육’인지 아니면 ‘성적’인지 헷갈리고, 욕심과 욕망을 자녀들에게 투과하면서 ‘모정’으로 포장하며, 학원을 보내지 않거나 과외를 시키지 않는 것이 ‘무관심’으로 매도되는 우리 사회의 모습에서 ‘모정’이란 말은 깃털처럼 가벼워진지 오래다.

영화 <마더>의 엄마는 사실 이런 모습의 ‘모정’과는 다른 듯하며 같다. 스스로 자본주의의 괴물이 되어 어떻게든 옆의 친구들을 밟고 올라서야 한다며 약육강식의 모범자로 우뚝 선 우리 사회 엄마들의 모습과 <마더>의 엄마가 어찌 다를 수 있을까. 영화 속 주인공 엄마가 아들 도준에 대해 지나친 집착과 희생을 하다가 끝내 광기와 히스테리로 파국을 보여주는 것은 우리 사회의 엄마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단지 우리 엄마들은 아이의 성적에 집착하고 있고, 영화 속 엄마는 아들의 무죄에 집착할 뿐이다.

물론 영화 <마더>의 엄마는 ‘알파맘 베타맘’과는 천지차이가 있다. 바로 ‘가난’과 ‘장애’다. 알파맘이든 베타맘이든 가난과 장애 앞에서는 무력할 수밖에 없다. 사회에 의해 방치된 가난과 장애가 영화 속 엄마의 파국을 불러온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엄마를 괴물로 만든 것, 그것은 자녀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모순이다. 괴물 같은 사회에서 아이가 성공하기를 바란다는 것이 가지는 의미를 되새겨 본다.





마더
감독 봉준호 (2009 / 한국)
출연 김혜자, 원빈, 진구, 윤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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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고통 - 10점
수잔 손택 지음, 이재원 옮김/이후



우리는 하루에도 수많은 이미지를 접한다. 일상적인 이미지도 있지만, 세계 곳곳의 매체들이 우리에게 전달하는 이미지들도 있다. 전 세계에서 보내서 우리 안방까지 들어오는 이미지들이 주는 느낌은 그리 유괘하지만은 않다. 이스라엘 폭격으로 피를 철철 흘리며 죽어가는 팔레스타인 아동도 있고, 자국의 내전에 시달리다 못해 이웃 나라의 국경지대의 텐트촌에서 생활하는 아프리카의 어느 모자의 모습도 있다. 가깝게는 기아에 시달리는 북한 아동의 갸냘픈 팔다리가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는 사진도 볼 수 있다.

요즘에는 더욱 잔인한 영상들이 눈앞에 펼쳐진다. 용산 참사 장면을 담은 여러 이미지들을 우리는 실시간으로 만날 수도 있었다. 아침 출근 시간 뉴스로 보여지는 영상들은 불과 한두시간 전의 영상들이 아침 밥상에 올라온 것이다. 그만큼 빠르게 그리고 더 적나라하게, 더 사실적으로, 더 현실감 있게 세상의 맨살을 보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런 이미지, 즉 타인의 고통을 담고 있는 현실을 목도하면서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과연 이런 이미지는 언론들의 먹잇감으로 사냥이 되어 스펙터클의 감각을 자극하는 소비재일 뿐일까? 이제는 너무나 닳고 닳아서 감흥이 오질 않는 진부한 흥미거리일 뿐일까?

누군가는 우리가 타인의 고통에 개입할 여지를 잃어가고 있다고 개탄한다. 누군가는 우리의 가슴이 너무나 닳고 닳아서 이제 석화되고 있는 것이라며 슬퍼한다. 그런걸까? 정말 나와 당신의 가슴은 그렇게 차갑게 얼어붙어 있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수전 손택은 아주 오래전부터 이미지들이 가지는 의미를 설명하면서, 지금의 이미지들을 보면서 우리가 느끼는 연민이라는 감정에 솔직하게 다가서자고 역설하고 있다.

"감정을 무디게 만드는 것은 수동성이다. 냉담한 것으로, 혹은 도덕적으로나 감정적으로 무감각한 것으로 묘사된 상황은 따지고 보면 감정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분노의 감정, 좌절의 감정으로 말이다."

연민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수동성이 문제다. 감정은 여전히 우리에게 살아 있는 양날의 검이다. 우리가 지구 저편의 고통에 대해 눈으로 보고 그친다면 그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 지구를 더욱 더 절망과 좌절로 이끄는 것이다. 타인의 고통에 귀기울이고, 그 고통을 없애거나 줄이기 위해 노력하는 것, 그것이 그들의 고통을 목도한 사람의 의무다. 

"특권(타인의 고통을 이미지로 보는 것)을 누리는 우리와 고통을 받는 그들이 똑같은 지도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의 특권이 (우리가 상상하고 싶어하지 않는 식으로, 가령 우리의 부가 타인의 궁핍을 수반하는 식으로)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 보는 것, 그래서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쌓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 말로 우리의 과제이다."              - <타인의 고통> 15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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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생명은 있는 힘껏 생을 살아간다. 생명이 붙어 있는 한 삶의 가느다란 끈을 결코 놓는 법이 없다. 하물며 함께 살아가는 인간과 동물에 대해서는 무슨 말이 필요할까? 하지만 딱히 그렇지만은 않은가 보다. 인간중심주의, 모든 생명들에게는 지옥의 묵시록과 같은 그 말. 다시 행복을 정의해야할 때이다. 영화 <워낭소리>가 말하는 참삶에 귀기울여 보자.

우리는 24개월령 미만의 소들만을 안심하고 먹을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 24개월의 소들도 온갖 항생제를 맞으면서 억지로 살을 찌우고, 깨끗한 풀이 아닌 가공된 사료만을 먹여 키운 것들이다. 평생 들판을 자유롭게 누비지 못하고 제 몸도 제대로 가누기 어려운 좁은 우리에 갇혀 자기가 쌓은 똥과 오줌 범벅으로 살아간다. 고작해야 30개월의 삶을 살다가 미치거나 주저앉거나 도살된다. 그게 우리 시대의 소들의 삶인가? 아니다.

우리는 우리 입으로 들어가는 그 고기의 가치를 자본의 가치로 환원시켜 생명이 가지는 고유한 가치에 대해서는 잊고 살고 있다. 그런 고기를 먹고 우리는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 그 뜨거운 우리의 촛불은 건강한 먹을거리를 요구하는 촛불이 아니라 그렇게 죽어간 소들을 향한 기도의 촛불이어야 했다.

삶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돈? 명예? 권력? 그래 그런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들은 모두가 공유할 수 없는 것들이다. 영화 <워낭소리>가 그 해답을 우리에게 알려주었다. 노동, 생명, 교감, 진정 행복한 삶의 근간은 바로 그곳에 있다. 누구나 공유할 수 있지만, 아무나 실천할 수 없는 것에 큰 기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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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행성에서 지적 생물이 성숙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생물이 자기의 존재 이유를 처음으로 알아냈을 때이다. 만약 우주의 다른 곳에서 지적으로 뛰어난 생물이 지구를 방문했을 때, 그들이 우리의 문명 수준을 파악하기 위해 맨 처음 던지는 질문은 "당신들은 진화를 발견했는가?"라는 물음일 것이다. - <이기적 유전자> 40쪽

어떤 나라에서 지적 사회가 성숙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사회가 자기의 존재 이유를 처음으로 알아냈을 때이다. 만약 지구의 다른 곳에서 문명이 뛰어난 사회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 그들이 우리의 문명 수준을 파악하기 위해 맨 처음 던지는 질문은 “당신들은 사회의 진화(진보)를 발견했는가?”라는 물음일 것이다.

원문을 쓴 리처드 도킨스에게는 참 미안한 말이지만, 우리 사회의 미개함을 꾸짖고 싶어 그의 글을 차용해 봤다. 이렇게 한 의도에는 작금의 현실의 야만성도 한몫했다. 쉽게 이야기되는 막장 문화는 둘째 치고, 여전히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벌어지는 연쇄살인의 극악함, 거기다가 밑도 끝도 없이 벌어지는 공권력의 무지막지함과 그 저열함에 있다. 우리 사회의 진보는 가능한가? 있기는 한가?

아,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얼마 전에 읽은 책 <이기적 유전자>(리처드 도킨스 저, 을유문화사)를 이야기하려는 의도였다. 그러니 본론으로 충실해 보자.

많은 이들(그러니까 나를 포함해서)이 이 책의 제목만으로 헛된 망상과 철학을 늘어놓았다. 이거 뭐지? 인간은 그러니까 그 근본부터 이기적 존재라는 것인가? 그러니 이 사회는 적자생존의 정글 논리가 지배하는 게 당연하고 약육강식에 따라 질서가 재편되어야 한다는 건가? 강한 놈이 이기는 것이니 재주껏 살아남을 수 있도록 강한 놈에게 빌붙어야 한다는 말인가? 그러고 보니 얼마전 강만수 장관이 돈 많은 사람들이 혜택을 보게 될 종부세 폐지를 밀어붙이고 감세정책을 발표하면서 "인간의 본성을 무시한 정책은 오래 가기 힘들다"라는 말을 했다고 하는데, 그 사람이 생각하는 인간의 본성이 아마 저런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이 책의 핵심은 이렇다.

지구 생명체의 진화는 유전자가 더 많은 복제품을 남기는 쪽으로 진행되었다. 이를 통해 유전자는 불멸의 생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에 따라 인간을 비롯해 모든 생명체는 그 유전자를 후세에 전달하기 위해 마련된 생체기계일 뿐이며, 생체 기계인 생명체는 유전자의 이익, 즉 후세에 유전자의 복제를 충실히 이행하기 위해 프로그램 되어 있다는 것이다. 진화의 기본단위는 유전자이며, 이 유전자를 이해할 때 진화를 이해할 수 있다고 그는 설명한다. 유전자의 자기 복제에 대한 욕구를 ‘이기적’이라는 말로 은유적으로 표현했는데, 나는 그런 엄청난 오해(?)를 하고 말았다. 무식해서 부끄러울 뿐이다. 강만수 당신도 무식한 건 마찬가지다.

생물학적으로 유전자 입장에서 본 이타성은 불가능한 개념이다. 그런 유전자가 있다면 애초에 사라지고 존재할 수 없는 것이 된다. 그러나 이것을 인간의 본성이라고 치환하는 오류를 범할 사람을 위해 리처드 도킨스는 이기적 유전자의 특성에 반하는 밈(Meme) 이론, 즉 문화유전론을 내놓았다.

우리에게는 우리를 낳아 준 이기적 유전자에 반항하거나 더 필요하다면 우리를 교화시킨 이기적 밈에게도 반항할 힘이 있다. 순수하고 사욕이 없는 이타주의라는 것은 자연계에는 안주할 여지가 없고 세계의 전 역사를 통해 과거에 존재한 예도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의식적으로 육성하고 교육하는 방법도 논할 수 있다. 우리는 유전자 기계로서 조립되었지만 밈 기계로서 교화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들의 창조자에게 대항할 힘이 있다. 이 지구에서는 우리 인간만이 유일하게 이기적인 자기 복제자들의 전제에 반항할 수 있는 것이다. - 349쪽

최근 우리 사회는 새로운 문화 유전자를 발견했다. 바로 집단지성이다. 물론 집단 지성은 대중의 의식과 별반 달라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단순한 의식의 반영이라는 대중 의식과 계속해서 발전하는 집단 지성 사이에는 가장 큰 차이가 있다. 바로 소통이다. 막장 드라마라면서도 계속해서 시청률을 상회할 수 있는 것은 소통이 없는 대중 의식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집단 지성은 이미 졸렬한 자극과 허무맹랑한 우연, 성찰이 없는 드라마를 막장으로 규정짓고 비판하고 있다. 소통이 만들어 낸 비판의식이다.

반면 소통을 거부하고 오로지 제 갈 길(?)만 가겠다고 외치며 앞에 거치적거리는 시민들을 무참히 살해하면서 나아가는 저 정부는 그야말로 막장 중의 막장이다. 시민들은 소통의 장에서 지금의 현실을 조목조목 비판하면서 그에 저항하고자 결집하고 있다.
권력과 전제에 대항할 수 있는 힘, 그것은 우리 스스로에게 있음을 <이기적 유전자>는 밝히고 있다.

다시 도킨스의 말을 차용해 와 정리해 보면,

우리에게는 우리가 먹여 살리는 공권력에 반항하거나 더 필요하다면 우리를 지배하려는 권력자에게도 반항할 힘이 있다. 순수하고 사욕이 없는 이타주의라는 것은 이 사회에는 안주할 여지가 없고 세계의 전 역사를 통해 과거에 존재한 예도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의식적으로 육성하고 교육하는 방법도 논할 수 있다. 우리는 시민의 한 사람이라는 형식으로 조립되었지만 국민으로서 교화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들 권력자들에게 대항할 힘이 있다. 이 대한민국에서 깨어있는 시민만이 유일하게 이기적인 권력자의 전제에 반항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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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대해

물론 <이기적 유전자>라는 책은 참 좋은 책이다. 하지만 이 책을 읽는데 참으로 오랜 시간이 걸렸다.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을 먼저 읽었던 나로서는 왜 이렇게 읽기가 더딘지, 이해가 안 가는 문장은 왜 이리 많은지 나의 무식을 탓해야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을유문화사에서 나온 책의 번역이 엉망이란다.

그러니 되도록 이 전에 나온 동아출판사 <이기적인 유전자>를 볼 것을 추천한다(물론 절판이다, 헌책방 뒤져야 한다). 나도 이 책 팔고 그 책을 찾아서 다시 볼까 생각중이다. 네이버에서 ‘이기적 유전자 번역’만 쳐도 관련 이야기는 쏟아져 나올 것이니 참고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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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멸 - 8점
토마스 베른하르트 지음, 류은희.조현천 옮김/현암사



친애하는 토마스 베른하르트 씨에게

 

얼마전에 당신의 소설 <소멸>을 보았다. 정말 대단한 작품이다. 당신의 소설 <소멸>의 이야기 줄거리는 이러했다. 주인공 ‘나(프란츠 요셉 무라우)’는 여동생 결혼식을 다녀온 다음다음날(그러니까 이틀 후) 뜻밖에 가족(부모님과 형)의 교통사고 사망 소식을 접한다. 그리고 장례식에 참석한 후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았지만 모두 종교단체에 기부하고 생을 마감한다. 당신 소설의 이야기는 이게 전부다. 내 글만 보면 어떤 이는 스토리가 빈약하다고 할 수 있겠다. 사실 그런 오해도 살만하다.

 

이렇게 단순한 이야기가 장장 500쪽에 걸쳐 서술되고 있다. 그것도 단 두 문장으로 말이다. 1부 '전보'가 가족의 사망 소식을 접하고 사진을 보면서 가족에 대해 사유하는 장면이고, 2부 '유언'은 고향에 돌아가 장례식을 치루는 일련의 과정에서 떠오르는 사유들의 집합이다. 단 두 문단으로 서술되어 있는 이야기, 게다가 줄거리가 단순한 만큼 나머지는 당신의 온갖 사유들로 넘쳐나고 있었다. 난생 처음 접해보는 새로운 문체와 서술에 크게 놀랐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루하지 않았다. 당신 가족과 조국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온갖 비난과 모욕이 넘쳐났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주인공 ‘나’의 냉소다. 곧 소설가 당신의 냉소이기도 하다. 이렇듯 지독한 냉소는 힘이 될 수 있을까?

 

세기의 전환기에 이르면 사유하는 것으로, 사유하는 것을 통해 존재해 온 사람들이 자살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결론이며, 사유하는 인간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충고는 단 한 가지, 이 세기가 끝나기 전에 자살하라는 것입니다. 〈p.495〉

 

세상에 자살을 조언하다니, 어떻게 태어난 삶인데 사유하는 인간은 자살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올 수 있는가. 이런 지독한 냉소의 배경에는 자위적인 오만이 담겨 있음을 보았다. 당신은 오만함을 통해 자신을 경멸했다. 그리고 이것을 무기로 세상을 경멸하고, 물질 중심으로 흐르는 세상에 저항했으며, 끝내 세상에 잡아먹히지 않으면서 멋지게(?) 한방 날렸다. 그런 점에서 당신을 존경할 수 있을 법하다. 게다가 죽어서 남긴 실제 유언을 들으니 더욱 놀랍다.

 

“내가 쓴 것은 모두 저작권법의 유효기간 동안 오스트리아 국경 내에서 공연되고 인쇄되거나 낭독되는 것을 금한다.”

 

작가가 자신이 쓴 창작품이 자신의 나라에서 출판, 공연, 인쇄 되는 것을 금하다니, 이것은 국가에 대한 증오일까, 역설적인 사랑일까? 아무튼 미친 짓이다. 그만큼 이 세상을 향한 당신의 굳은 의지이자 절박한 메시지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국가의 권위와 폭력에 의해 셰어마이어와 같은 사람이 피해를 입고 아무 보상도 없이 여생을 살아가고, 나치와 협력해 수많은 사람을 살해하는 데 협력하거나 개입했던 이들에게 공로훈장을 떠안기며 터무니없는 연금을 송금하는 국가는 오스트리아에만 있는 게 아니다. 부끄럽지만 오늘날 한국 사회를 본다면 당신은 까무러칠 것이다. 아마도 환생이란 것이 있어 당신 같은 대작가가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우리나라는 가급적 피해서 태어나길 바랄 뿐이다. 아니, 제발 한국에 태어나 당신의 그 글로 멋진 한방을 대한민국에 날려주기를 기대하고 싶다.

 

21세기의 대한민국을 지도하는 이들은 물질에 사로잡혀 정신적 가치를 전혀 고려치 않는 사람들이 지배하고 있다. 모든 잣대와 기준을 경제적 가치에 두고 경쟁만이 최고의 선이라는 이데올로기를 전파하며 심지어 꼬맹이 아이들마저 경쟁 체제로 내몰고 있다. 이 권력은 국가의 권력에 도전하고 권위에 상처를 주는 글을 썼다는 것만으로 인신을 구속하고 있다. 물론 그런 지도자를 선택한 것은 대한민국 사람들이다. 부끄럽지만 물질에 현혹되어, 747이니 주가 3000이니 하는 말에 넘어간 사람이 내 이웃이고, 나 역시 그런 선택을 수수방관했음을 자백한다. 그러니 이 민주적 절차에 의해 선출된 권력을 욕하는 건 스스로의 얼굴에 침을 뱉어야 하는 일이다. 이럴 때이니 냉소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냉소 이전에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고 있다. 도대체 이런 세상에 저항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당신에게 묻고 싶다.



소멸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토마스 베른하르트 (현암사,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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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바퀴로 가는 과학자전거 - 10점
강양구 지음/뿌리와이파리




지난여름이었다. 냉장고가 고장 났다. 전원은 들어가는데, 냉장고 기능을 전혀 하지 못했다. 일부 오래된 음식은 이미 썩어갔다. 냉장고 음식들 중에서 중요한 음식들은 김치 냉장고로 옮겼다. 음식들을 옮기면서 느낀 것은 냉장고에 쌓아 둔 식재료들이 정말 많았다는 것이다. 집안에서 그렇게 음식을 많이 해 먹지 않는데, 이 많은 식재료들은 왜 여기 쌓여 있는 것일까. 정작 제대로 챙겨 먹지 않아 일부는 냉동실에서도 썩어가고 있었는데 말이다.

우리 회사 냉장고도 마찬가지다. 도시락을 드시는 분들의 반찬도 있고, 야식용으로 먹다가 남은 음식들도 냉장고로 들어간다. 냉장고는 미어터질 것 같고, 이상한 냄새도 난다. 매번 자기 음식을 정리하자고 하지만, 정작 넣어둔 사람들도 잊어버려서 매번 대대적인 정리를 해 음식을 버려야 한다. 냉장고가 작아서 그런다는 사람도 있지만, 커진다고 이런 일이 없어질까?

냉장고만 그럴까? 아니다. 전 세계의 식량운용을 보면 더 아이러니하다. 전 세계에서 생산되는 식량은 전 세계인이 골고루 나누어 먹고도 남는 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쪽은 영양과잉으로 인한 질병에 시달리고, 지구 한편은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이 속출하고 있다. 식량 생산을 위한 과학기술이 발달한 지금, 우리는 왜 이런 세상의 고통을 목격해야 할까?

이제는 집집마다 있다는 자동차 이야기를 해볼까? 요즘 나오는 자동차 중에는 최고 300km까지 달릴 수 있는 엔진을 장착했다고 하지만, 출퇴근 도심의 자동차 평균 속도는 15km 내외라고 한다. 옛 문헌에 따르면 자동차가 등장하기 전 마차의 속력이 시속 17km였다고 하니 우리는 지금 마차를 타는 것보다 느리게 도시를 달리고 있다. 또 나는 자전거로 출근할 때 회사까지 약 16km의 거리를 한 시간 안에 간다. 자동차와 비슷한 셈이다. 그래도 자동차인데, 도심이 아니라면 더 멀리 더 빨리 갈 수 있는 자동차가 좋은 게 아니냐고 한다면 다음 이야기를 해 보겠다.

서울에서는 한 여름이면 창문을 열어놓기 어렵다. 창문을 닫고 에어컨과 공기청정기를 켜야 한다. 시골 바람과 서울 바람의 차이가 여기서 드러난다. 시골 바람은 논두렁을 내달려와 대나무 숲을 지나 대청마루로 올라오지만, 도시 바람은 공장 굴뚝의 연기를 품고, 자동차 배기가스를 지나, 열로 한참 달궈진 아스팔트와 시멘트 건물을 타고 올라온다. 여름이라지만 창문을 꽁꽁 닫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대기오염이 가져온 결과다. 최근의 대기오염의 주범이 자동차인 만큼 자동차가 좋을 이유가 없다.

이처럼 과학기술의 발달은 우리 삶에 다양한 불편을 주고 있다. 편리만을 추구하다 빚어진 모순이다. 더군다나 잘못 사용된 과학기술은 차별과 전쟁, 파괴에 활용된다. 그러기 때문에 과학기술은 단순한 편리를 넘어 인권과 평화, 환경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도 들어오면서 과학기술은 중요한 사회적 가치를 저버리고 자본의 이익에만 종사하는 일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황우석 사태에서 보이듯이 돈이 된다면 기꺼이 거짓과 왜곡을 벌이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은 과학기술가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이 된다고 하니 그것을 묵인해야 한다는 대중의 의식에 우리의 과학기술은 위태롭게 서 있다.

프레시안
의 강양구 기자는 오랫동안 돈에 지배되고 있는 과학기술의 위험성을 지적해 왔고, 이에 대비하기 위해 시민사회가 참여하는 과학을 이야기해 왔다. 황우석 사태에 대해서도 모두가 그를 떠받들 때부터 조용히 그 위험성과 편향성을 지적해 온 실력 있는 기자다(그가 <녹색평론> 2005년 1-2월 호에 보낸 '과학기술의 덫에 갇힌 언론'을 볼 것을 추천한다). 그가 쓴 <세 바퀴로 가는 과학 자전거>는 주로 과학기술자를 꿈꾸는 10대 청소년을 대상으로 쓰였지만 과학기술에 관심 있는 초심자들도 부담 없이 볼 수 있는 좋은 책이다.


세 바퀴로 가는 과학자전거 상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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