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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포스트에서 오사카에서 먹은 음식들을 소개한다.

도톰보리를 소개하는 포스트에서도 밝혔듯이 오사카는 먹을거리의 천국이다. 어떤 분들은 오사카를 ‘우리나라의 전라도’로 비교하곤 한다. 오사카는 해산물이 풍부하고 교역의 중심지로 각지의 특산물들이 모이는 곳이라 맛있는 먹을거리들이 예부터 아주 풍부했던 곳이다.

오사카에서 지낸 1박2일이 짧아 많은 것을 먹어볼 수도 없었고, 출장차 방문한 거라 가난하게 돌아다니다 보니, 일일이 유명한 식당을 찾아다닌다는 것도 사정상 어려웠다. 그래서 그다지 이름난 식당의 음식도 아닌데 여기에 올린다는 게 사실 좀 남사스럽기도 하다. 그러나 가난하게 찾아다녔어도 싸고 맛있게 먹은 몇몇 음식들이 인상에 많이 남아 간단히 정리해 보겠다.

인천에서 새벽 비행기를 탔기 때문에 오사카에는 이른 아침에 도착했다. 밤새 잠을 설쳐 피곤하기도 했지만 낯선 이국땅에 발을 딛는 기분 때문에 약간은 들떠 있었다.

그래도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니 우선 고픈 배부터 채울 일이 급했다. 이른 아침이라 문을 연 식당을 찾기도 쉽지 않아 한참을 헤매다가 마침 문을 연 ‘야요이켄’이라는 식당에 들어갔다. 이곳은 우리나라의 ‘김밥나라’ 같이 저렴한 가격에 식사를 할 수 있는 평범한 식당이었다. 이 가게는 자동판매기에서 식권을 끊어서 제출하는 형식이었다. 이런 형식의 식당은 일본에서 흔하게 볼 수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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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간 O대리님은 그냥 정식을 시켰고 나는 일종의 돈가스덮밥을 시켰다. 가격은 500엔 정도로 저렴한 편이다. 오사카에 와서 처음으로 접하는 맛은 어땠을까. 좋았다. 이런 평범한 가게에서 먹는 가벼운 아침식사가 이 정도일 거라고는 생각 못했으니까. 워낙 허기가 진 것도 있겠고 내 입맛이 싸구려라서 뭐를 먹어도 맛있기도 하지만 그래도 참 기분 좋은 아침식사였다.


그리고나서 하루종일 업무를 하느라고 돌아다녔다. 이른 아침부터 호텔과 게스트하우스 4곳을 돌아다니느라 점심도 걸렀다. 그리고 4시 쯤에 도톰보리에 들렸다. 낮에는 그다지 눈에 띄는 구경거리는 없었다.  O대리님과 나는 일본 라면(라멘)을 먹기로 했다. O대리님은 도톰보리에는 유명한 킨류라멘집이 있지만 다 비슷하다면서 다른 라멘집을 소개했다. 라멘집 이름은 ‘사쯔마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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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멘가격을 보고 좀 놀랐다. 850엔. 대충 800원으로 환산해도 7000원이 넘는 가격. 속으로 무슨 라면이 이리 비싼가 싶었는데, 막상 나온 라면을 보니 그럴만도 할 것 같기도 하고 너무 비싼 것 같기도 하고... 돼지뼈를 우려서 국물을 내고 돼지고기도 푹 삶아서 라면에 얹어서 내놓는데, 보기에는 굉장히 느끼해 보였다. 맛은 좀 느끼하긴해도 괜찮았다. 돼지고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만족할 만하다. 하지만 가격이 좀 부담스럽다는 느낌은 지울 수 없다.

도톰보리에서 라멘을 먹고 숙소로 돌아왔다. 숙소에서 잠시 쉬었다가 오사카의 밤거리를 구경하려고 했는데, 잠깐 눈을 붙인다는 게 그만 그대로 뻗고 말았다. 밤을 새고 날아왔다가 다시 하루종일 돌아다녔으니 견뎌낼 수가 없었나 보다.

아무튼 이튿날 날이 밝았고, 눈을 뜬 우리는 서로를 황당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일찍 일어나긴 했지만 하루밤이 그냥 지나간 것이 얼마나 원통하던지…. 그래서 이른 아침부터 부지런을 떨며 일찍 일어나 샤워를 하고 게스트 하우스의 자전거를 빌려 타고 주변 구경을 나갔다. 오사카타워 아래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왔다. 오사카의 아침은 매우 조용하고 집집마다 아기자기하게 꾸며놓은 화초와 화분들이 아침 햇살을 받으며 싱그럽게 빛났다.


우리는 체크아웃을 하고 거리로 나왔다. 우선 아침을 먹기로 하고 남바역 근처의 ‘요시노야’라는 식당에 들어갔다. 요시노야도 체인점인데, 작은 가게 안에서는 아저씨 한분이 혼자서 손님을 맞고 음식을 만들어 내놓고 있었다. 돼지고기 덮밥을 주문했는데, 가격은 350엔 정도. 우리나라로 치자면 불고기덮밥 정도라고 할 수 있는데. 가격은 3000원에 못 미치는 매우 저렴한 가격이다. 게다가 맛도 아주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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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식사를 마치고 아라시야마로 향했다. 아라시야마에서 돌아다니면서 먹은 말차아이스크림, 일종의 녹차아이스크림인데, 녹차의 싱그러운 자연의 맛과 아이스크림의 달콤함이 입안이 지금도 맴돈다. 아라시야마를 나오면서 다꼬야끼와 기린맥주를 들고 강가에 앉았다. 강가에 앉아서 맥주를 마시며 즐기는 여유는 우리나라나 일본이나 다를 게 없다.

그리고 다시 시내로 들어왔을 때는 오후 5시. 이제 우리나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아쉬움의 시간이 다가옴을 느끼면서 우리는 ‘와타미’라는 맥주집을 찾아 들어갔다. 일본통인 O대리님이 알아서 안주를 시켰는데, 기본 안주로 회 몇점이 나왔다. 역시 회의 본고장인 일본답고 해산물이 풍부한 오사카답다는 느낌이다. 맥주는 잔을 얼려서 나왔는데, 맥주가 아주 시원하고 맛도 색다르고 이색적이었다. 있는 돈 없는 돈 다 털어서 우리가 마실 수 있는 만큼의 맥주를 마셨다. 환전해 간 모든 돈을 다 털었지만 그래봐야 2잔씩 밖에 안돌아갔다. 시간은 얼마나 빨리 흘러가던지.

저녁도 먹지 않고 맥주로 때웠으니 배가 안고플 수가 없다. 간사이공항으로 가는 길에, O대리님의 제안에 따라 있는 잔돈을 다 털어서 호라이만두를 샀다. 호라이만두도 꽤 맛있다. 다음에 가면 꼭 다시 사먹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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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돌아보니 굉장히 가난한 여행이었다. 하루에 두끼만 챙겨먹고 그것도 간단히 먹었으니 일본 맛의 고장이라는 오사카를 너무 무모하게 다닌 게 아니었을까. 많지 않지만 그렇게 접한 오사카의 맛의 느낌은  꽤 좋다. 오사카에서는 ‘먹다가 망한다’는 말이 실감났으니 말이다. 가진 돈이 얼마 없어서 많이 털리진 않았지만 그래도 있는 잔돈까지 다 털고 나왔으니 그 말이 괜한 말은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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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카는 '먹다가 망한다'는 말이 생길 정도로 전통적인 일본 요리가 유명한 곳이다. 그 중에서도 도톰보리는 오사카에서 가장 유명한 먹자거리라고 할 수 있다. 음식 가격도 저렴하고 양도 많아.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은 곳이기도 하다.

도톰보리는 1612년에 공사를 개시해 완성시킨 물자 수송용 인공수로 주변의 거리를 말한다. 에도 시대부터 이 강가를 따라 술집과 카부끼 극장 등이 하나 둘 들어서며 유흥가로 발전했고, 지금은 오사카를 찾는 여행객들에게 반드시 들려볼만한 명소 중의 하나로 발전했다.

도톰보리 간판들을 보는 것도 재밌다. 그중 가장 널리 알려진 간판은 두 팔을 들고 트랙을 달리는 남성의 모습이 그려진 간판이다. 1935년 세워진 이 간판은 도톰보리의 상징적인 명물이다.

입구에서 조금만 들어가면 볼 수 있는 큰 게(킹크랩) 간판이 보인다. 너무 쉽게 눈에 띄는 만큼 잊을 수 없다. 1962년에 개업한 게요리 전문점인데, 지금은 전국 각지에 수십 개의 체인점을 운영하고 있다. 게의 모습이 좀 엽기적인데, 게 다리까지 움직이니 호러적인 분위기가 느껴졌다. 그래도 유명하다니까...

도톰보리의 낮과 밤은 너무나 다른 모습이다. 그 이유는 아무래도 현란한 네온사인과 특색있는 간판들 때문일 것이다. 도톰보리의 진정한 모습을 보고 싶다면 밤에 찾아가 볼 것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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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카에 있는 오사카성은 임진왜란을 일으킨 장본인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본거지였다. 이곳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을 통일하고 조선과 명을 도모했던 것이다. 실패로 끝나긴 했지만 그의 이름은 동북아시아에서는 잊을 수 없는 이름으로 각인됐다.









오사카성 입구

 

하지만 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영광도 한세대를 넘지 못했다. 그가 죽은 뒤에 이어진 토꾸가와 이에야스의 반란에 의해 아들이 이곳 오사카성의 한 쪽에서 자결을 했다. 그 자결 장소에는 현재 비석이 세워져 있다. 일본의 전국시대를 통일하고 조선을 침략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떨게 한 사람의 아들이 이렇게 초라한 곳에서 자결로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는 건 역사의 아이러니일까.


 



자결터와 비석



 

자결터와 비석을 지나 텐슈가쿠로 올라가는 언덕을 오르기 전에 나오는 공터에는 거대한 돌들이 아무렇게나 놓여져 있다. 여기를 ‘각인석 광장’이라고 부르는데 이 돌들에는 각 가문의 문장이 새겨져 있다. 이 오사카성을 지을 때 전국 각지의 돌들이 옮겨졌는데, 당시 성벽을 세우는 데 참여한 가문의 문장이라고 한다.

오사카성의 중심 건물인 8층 높이의 텐슈가쿠(天守閣). 여기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생애를 기록한 박물관이자 전시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간사이 쓰루 패스를 가지고 있다면 100엔의 입장료 할인을 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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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카성에 갔을 때가 5월 4일 토요일이라 그런지 많은 사람들이 오사카성에 나들이를 왔다. 이날 마침 성의 광장에서는 Family Festival과 관련된 행사가 곳곳에서 열렸다. 일본 전통 복장을 한 젊은이들이 춤과 노래가 어우러진 화려한 무대를 펼쳤는데 볼만했다. 일본 사람들은 그들의 전통복장을 즐겨 입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는 한복 입는 것을 보는 것이 점점더 보기 어려워지는 것을 생각하면 이들의 자부심이 대단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저글링 공연 사진



 

한쪽에서는 재미있는 저글링 공연도 펼쳐졌다. 삐에로 분장을 한 아저씨가 단순한 저글링만이 아니라 아슬아슬한 묘기도 부리고 코믹한 행동도 하면서 좌중의 분위기를 압도하고 있었다. 사람들의 맑고 호기심에 가득찬 눈동자를 카메라에 담아 보았는데 나름대로 만족스러운 사진이 나왔다.

오사카성의 시립 박물관은 휴관이어서 구경할 수 없었다. 길을 따라 내려오는데 새점을 치는 분이 보였다. 한글도 보이기에 유심히 보았지만, 문법과 어법이 맞지 않아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여하간 한국관광객도 주요 고객 중의 하나임을 짐작할 수 있다.




사꾸라몬을 지나 성밖으로 나오면 오사카성 주변을 도는 로드 트레인을 만날 수 있다. 이 로드 트레인은 오사카성의 돌면서 관광을 즐길 수 있으며 종착지인 대수문전에 내려 준다.

역시 오사카성에 가서 텐슈가쿠에 들어가지 않았으니 많이 아쉽긴 하지만 바깥에서 구경한 여러 공연들이 기억에 많이 남는다. 관광지 입장료들이 만만치 않다는 게 나를 소심하게 만들었다.

다음 포스트는 오사카의 이모저모를 찾아가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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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원재-중재에는 봄꽃들이 한창이었다. 진달래 철쭉은 흔하게 만나는 것들이지만 손톱만한 꽃들이 발치에서 방긋방긋 미소를 전염시키고 있었다. 어느 때보다 몸도 마음도 피곤했는데, 꽃들을 보니 편했다.

몇몇 무덤가에는 할미꽃이 다소곳하게 피어있었다. 예로부터 자손들의 효성이 지극한 묘 주변에서는 할미꽃을 볼 수 있다고 한다는데… 중국에서는 백두옹이라고 불렀고, 우리나라에서도 오래전부터 약재로 널리 알려져 있다고 한다. 동의보감은 할미꽃에 대해 ‘혈(血)에 들어가 열독을 제거하고 피를 맑게 함으로써 아메바성 적리 및 이질에 쓰인다’고 밝히고 있다.

신비로운 봄꽃들의 향연과 함께 했던 백두대간 여원재-중재 코스. 이제부터 하나씩 이야기해 보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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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왔다. 나름대로 성장의 고통과 아픔이 있었다. 자연과 만나는 감동이 있었고, 항구와 시장과 벌판, 공장에서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도 보았다. 가을이 깊어가는 한가운데서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과 땅을 보았고, 바람과 비도 원없이 맞아보았다. 가을볕에 타버린 얼굴과 더 탄탄해진 다리근육과 맑아진 머릿속을 가지고 돌아올 수 있어 기쁘다. 몸이 가벼워진 것처럼 마음도 가벼워졌다. 삶을 더 가볍게 살 수 있을 것 같다.


송탄역 근처의 여관방에서 눈이 떠진 것은 6시. 알람도 없고 창밖도 어두운데 눈이 떠졌다. 오늘이면 서울로 들어간다는 설렘 때문이었을까? 다시 잠들어보려 했지만, 잠은 다시 찾아오지 않았다. 뉴스를 틀어 세상 돌아가는 소식을 심드렁하니 듣는다. 건성건성 듣다가도 일기예보만 나오면 몸이 돌아간다. 버릇이 됐다.


터미널 근처에서 아침을 먹고 1번 국도를 따라 길을 나섰다. 아침부터 많은 차들이 오고간다. 서울에 가까운 국도라지만 도심을 빠져나오면 갓길은 엉망이다. 왼편으로 차들은 쌩쌩 소리를 내며 달리고 갓길은 아슬아슬하고 오른편은 논두렁인 길을 달린다. 도심내에서는 아예 차도로 달리는 것이 엄두도 나지 않는다. 인도쪽에 자전거 길을 만들어 놓은 곳도 많지만, 차도의 아스팔트에 비하면 울퉁불퉁하고 곳곳의 지반이 깨지거나 무너져 엉덩이가 무사하기가 어렵다. 그래도 안전하게 가자는 마음에 인도쪽을 택해서 조심조심 갔다. 사람도 피해야지 길도 살펴야지 신경써야 할 게 한두가지가 아니다. 지방에 비해 서울과 수도권 쪽이 자전거에 대한 배려가 훨씬 부족하다. 지방의 큰도시 뿐만 아니라 중소도시들 중 일부는 자전거 도로가 아주 잘 마련되어 있다. 이를 통해 인도로 다니는 사람도, 차도로 다니는 차량도, 그리고 자전거도 모두 안전을 도모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았다. 그런데 서울로 올수록 이런 정책적 배려는 찾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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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을 가는 길에 1번 국도를 도저히 타기가 어려워 샛길로 빠져 달렸다. 간신히 수원역까지 달려갔는데, 거기서 다시 안양 방향을 알 수 없다. 잠시 쉬어갈 요량으로 길가 간이매점에서 어묵을 사먹으며 길을 물었다.


“저, 자전거로 안양 방향으로 가려는데, 어디로 가야 하나요?”

“자전거로? 잘 모르겠네요. 그런데 자전거로 가려면 한참 걸릴 텐데, 어이구”


자전거 전국여행의 마지막 여정인데, 고작 수원에서 안양 가는 게 한참 걸릴 거라고 걱정해 주는 아저씨의 말에 속으로 웃고 말았다. 고작 10km도 되지 않는 거리인데, 수백km를 달려온 내가 그것이 두렵거나 걱정될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아무튼 우여곡절 끝에 어쩔 수 없이 1번국도를 타고 달렸다. 물론 수원에서부터는 계속 인도로 달렸다. 자출족(자전거 출퇴근족)들은 거침없이 차도를 달린다고 하는데, 자전거 전국여행을 한 나도 도심내 차도를 달린다는 건 꺼리고 싶은 일이다.


수원의 명물이라고 하는 팔달문과 장안문을 지나 의왕시를 향했다. 의왕시내로 진입하니 안양까지 8km라는 이정표가 보인다. 안양에 들어가서는 안양천을 따라 집으로 달렸다. 첫날 집에서 나와 안양천을 타고 시작한 자전거 여행이 이제 다시 안양천을 타고 마무리됐다. 안양천 길에서 만나는 자전거 라이더들이 반갑다. 어린아이부터 노인네까지 안양천 둔치에서 늦가을 맞이 나들이를 나온 모든 사람들이 나를 마중나온 사람처럼 반갑다. 여행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기 위해 떠나는 잠시의 일탈이라는 말이 새삼 떠오른다. 이렇게 나는 돌아가고 있었다. 모천(母川)으로 돌아온 한 마리 연어처럼 내가 다시 돌아간 세상에서 나는 무엇을 쏟아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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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장여관. 이름은 그럴싸한데, 별로 추천할만한 집은 아니다. 근처 다른 여관방들이 어떤지 모르지만 전국일주에서 다져진 여관에 대한 감각을 되살려 보면 그렇다는 말이다. 그래도 온돌이 좋긴 좋다.


김밥나라에서 아침을 해결하고 초지대교로 향했다. 원래는 섬의 서쪽 끝까지 해안가를 따라 가고 싶었다. 하지만 동행한 김 선배도 오후 일찍 집에 가야 한다고 하니 섬의 동쪽 해안만을 타고 초지진을 구경한 후 초지대교를 넘어 서울로 돌아가기로 한 것이다.


건너편 김포와 그다지 멀지 않다보니 큰 바다를 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갯벌이나 고기잡이배 등은 반갑다. 바다를 상징하는 것은 이런 것들이다. 갯벌, 갈매기, 고깃배, 파도, 비릿한 바다내음, 등대, 백사장 등등. 초지진으로 내려가는 길 일부에 이런 것들이 있었다. 비록 막막한 수평선은 보지 못했지만 이런 것들이 마음을 위로했다.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바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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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은 자전거 전용도로가 한편에 마련되어 있어서 달리기 편하다. 초지대교까지 조금 힘든 언덕길이 한번 정도... 강화도의 독특한 점은 바로 섬 자체가 하나의 요새라는 것이다.


서울로 통하는 수로는 반드시 이곳 강화를 거쳐야 했다. 때문에 강화는 예부터 독특한 군사기지들이 발전했고, 또 그만큼 치열한 접전이 벌어졌던 곳이며, 수많은 피가 뿌려진 전쟁의 기억을 가진 곳이다. 그것이 바로 ‘돈대’와 ‘진’, ‘보’로 대표되는 군사기지의 흔적이다. 강화도의 돈대-진-보 등은 해양에서 접근하는 적들을 맞아 싸우기 위해 세워진 군사기지들이다. 물론 강화도에는 점등사라든지 마니산, 첨성대 등도 있지만 지정학적 위치로서 강화도가 가지는 역사는 그렇게 아름답지만은 않다. 대몽골 항쟁의 본거지였고, 근대에는 신미양요, 병인양요 등의 서구 열강의 외침을 겪었던 장소다. 한국전쟁 당시 가족과 이웃 사이에도 학살과 보복이 처절하게 되풀이 되어 지금도 전쟁 당시를 떠올리는 것이 금기처럼 된 곳이다.


우리는 일정 때문에 대부분의 돈대나 진, 보를 그냥 지나쳤다. 자전거 여행을 하다보면 이렇게 지나치는 곳이 많다. 자전거는 차보다 느리기 때문에 도로에서 시간을 많이 뺏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달리는 그 과정이 중요하다. 그러다보면 고통스럽게 달리기보다 그것을 즐기는 법을 배우게 된다. 그리고 차로 지나가면 못보는 것들을 볼 수 있는 시선과 여유를 가질 수 있는 것이 자전거 여행의 장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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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초지진을 나온 시간은 11시 50분. 초지대교를 건너온 이후 김포 IC까지는 356번 지방국도를 타고 간다. 지방도로이지만, 자전거 도로와 갓길이 잘 되어 있어 안전한 편이다. 김포IC에서는 다시 48번 국도를 타고 갔다. 한강 제방둑길을 타고 가볼까 했지만, 아는 길로 빨리 가자는 김선배의 제안을 따르기로 했다. 48번 국도를 타고 행주대교까지 무사히 도착했다. 오후 2시가 좀 넘어 행주대교에 도착했다. 갈 때보다 상당히 빨리 왔다.


늦은 점심을 어제의 국수집에서 해결하려 했으나 다시 찾아가는 게 쉽지 않아 한참을 헤맸다. 그리고 찾아가니 국수집은 닫혀 있었다. 어쩔 수 없이 근처 식당을 찾아가는데, 4000원짜리 콩나물국밥에 맛깔난 반찬까지 꽤 괜찮았다. 어제의 국수에 이어 오늘의 콩나물국밥까지 행주산성 근처 식당은 주머니가 크지 않은 사람들에게 참 괜찮은 먹을거리를 제공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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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점심을 먹고 4월달 파주 원정을 다짐하고 헤어졌다. 김선배는 들어가는 대로 큰애의 조립장난감을 같이 만들어 주어야 하며, 작은애의 네발 자전거의 뒷바퀴를 떼어주기로 했단다. 결혼하고 아이가 생기면 주말에도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 많아진다. 나는... 딱히 할 일은 없다. 홀가분할 수도 있지만, 때로는 아이들과 함께 하는 즐거움이 부럽기도 하다.


왕복 120여km, 총 주행시간 약 12~13시간의 강화도 여행은 이렇게 무사히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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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로 오랜만에 자전거답게 달렸다. 작년 11월 이후로 이렇게 하루 종일 자전거 타보는 건 처음이다. 사실 많이 긴장하고 걱정했다. 체력은 될까? 자전거는 펑크 나지 않을까? 펑크나면 내가 고칠 수 있을까? 강화도까지 하루에 갈 수 있는 거리일까? 중간에 위험한 곳은 없을까? 길을 잃어버리면 어쩌나? 등등...

예전에 자전거 전국일주 떠나기전에도 그랬다. 걱정을 하다보면 하늘이 무너질까 걱정하는 것처럼 온갖 상황들이 다 떠오르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그냥 가는 게 좋다. 말이나 생각보다 위대한 것은 행동이기 때문이다. 최소한 목숨이 위태로울 정도의 걱정이 아니라면 페달에 과감하게 발을 얹고 돌려보는 거다.


안양천 자전거도로



안양천과 한강이 만나는 합수부 지역에서. 멀리 보이는 다리는 가양대교



행주대교 남단에서 다리위로 올라가는 길


집에서 나와 달리기 시작하니, 지난 번 보다 짐도 마음도 가볍다. 날씨도 비교적 따뜻하고 화창하다. 안양천을 타고 한강을 향해 달리니 윤비(자전거 이름)도 신이 난 것 같다. 씽씽 휘파람 소리를 내는 것을 보니 이 녀석도 기분이 좋은 거다.

함께 가기로 한 김 선배와는 행주대교 북단에 위치한 국수집에서 보기로 했다. 처음 가는 곳이라 한참 헤맸는데, 다행히 행주산성에서 선배와 만날 수 있었다. 시간은 12시 경. 점심은 국수로 하기로 하고 근처 <원주 국수집>을 찾아갔다.



원조국수집 주요 메뉴인 잔치국수, 건너편에 희미하게 보이는 그릇에는 비빔국수



원조 국수집, 벽에 세워놓은 자전거들.


우리가 찾아간 '원조 국수집'의 국수는 3,000원. 반찬은 달랑 김치 하나였지만, 양만은 어느 집 국수보다 푸짐했다. 아침을 늦게 먹고 출발한 나는 잔치국수를 다 먹지 못할 정도였다. 김선배는 비빔국수를 시켰는데, 그런대로 맛있단다.

선배 말에 따르면, 원래 이곳 원조국수집은 자출사(자전거로 출퇴근하는 사람들)의 본거지란다. 이곳에서 자주 모임을 가진다는데, 이날도 모임이 있었나보다. 김선배나 나도 회원이기는 한데, 가입인사만 했지 들러보지도 않았던 터라 그냥 모른체 했다. 다른 자전거 회원들은 우리가 누군가 싶은지 흘깃흘깃 쳐다본다. 민망했다.

밖으로 나와보니 좋은 자전거들이 즐비하다. 자전거를 잘 모르는 나는 그냥 좋아보인다 싶었는데, 김선배 말로는 보통 50만원 이상 되는 것들 같다고 한다. 우리 자전거는 20만원 대의 저렴한 자전거. 그래도 저 으리으리한 자전거 중에 과연 몇대나 한달간 전국일주를 해보았을까 생각하니 은근히 내 자전거가 자랑스럽다. (원조 국수집은 행주산성 입구에 있다. 매주 일요일은 휴무)

점심을 든든히 먹고 출발한 시간은 오후 1시경. 예상보다 꽤 늦은 출발이었다. 행주대교 남단에서 48번 국도와 만나는 지점이 있다. 거기서 48번 국도만 타고 내내 달리면 강화대교를 건널 수 있다. 처음 가는 것인만큼 48번 국도만 내내 따라 달리기로 했다.

행주대교 넘어 초반에 자전거 도로가 조금 있다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다시 김포 근처에 이르니 넓직한 갓길이 나오고 차량통행도 한산해졌다. 최고제한속도가 80km라고 하지만 한산한 도로에서 그렇게 달리는 차량은 없다. 전국일주 하면서 고속으로 달리는 차량 소음에 익숙한 나에 비해, 김선배는 약간 긴장하는 듯했다.

잘뻗은 국도변도 김포시내에 들어서자 없어지고 우리는 차도 위로 달렸다. 역시 시내주행이 까다롭다. 차량들이 속도는 많이 떨어졌지만 통행량이 증가하기 때문이다. 다시 김포시내를 벗어나면 얇은 갓길이 나온다.

김포를 벗어나 강화대교를 건넌 것은 3시 반. 행주산성을 떠난 후 2시간 반만에 강화대교를 건널 수 있었다.



시원하게 뻗은 서울-김포 48번 국도



나를 믿고 첫 자전거 여행을 나선 김선배



강화대교 건너기 전


강화대교 건너편 휴게소에 들려 쉬었다. 우리는 서로 엉덩이의 안부를 물었다. 목표한 강화도에 왔다고 생각하니 힘이 쭉 빠지는 느낌이다. 커피 한잔을 마시고 휴게소 매점에서 지도를 얻어 다음 목적지를 논의했다. 그래도 최대한 달려서 석양을 보자는 욕심에 아픈 엉덩이를 달래며 안장에 올랐다. 계획은 해안도로 북쪽길로 달려 섬의 서쪽까지 가는 것. 하지만 길을 잘못들어 그만 해안도로 남쪽길로 들고 말았다. 다시 길을 돌아오다 착한 동네 주민분을 만났다. 그분도 자전거를 타고 가시길레 붙잡고 물었다.

"아저씨 해안도로 북쪽길로 가려면 어디로 가나요?"
"아 연미정 가려고 하는구만요. 거기 좋지. 얼마전까지 군사지역이라서 못들어갔는데, 요즘에는 주말에 한해서 신분증을 제시하면 들어갈 수 있다고 하던데..."
"아네, 그쪽으로 가려면 어디로 가나요?"
"그게 휴게소에서 아래쪽으로 내려가는 길로 가는 거지. 군부대 옆으로 통과하는 거에요. 나도 연미정이나 한번 가볼까 생각중인데, 하하"

아저씨는 아주 유용한 정보 두가지를 알려준 셈이다. 해안도로 북쪽길과 '연미정'이라는 곳이 참 볼만하다는 것. 아저씨 말대로 휴게소에서 아래쪽으로 내려가는 길을 따라 가니 반듯한 자전거 길이 나온다. 하지만 그 옆으로는 견고한 철조망이 쳐져 있어 좀 삭막하다.


얕은 차단벽도 있는 자전거 전용 도로

아저씨가 안내해 준 길은 해안도로로 연미정 가는 길도 맞았다. 그런데, 우리가 간과한 정보가 있었으니... 강화도는 북한과 가까이 있다는 점이다. 연미정 가는 길에 해병대 군인 아저씨들이(무척 앳되 보였다) 도로를 막아섰다.

"무슨 목적으로 오셨습니까?"
"그냐 자전거타고 왔는데... 관광이죠."

물론 살풋이 웃어주는 것도 잊지 않았지만, 군인 아저씨들은 더이상 가는 것은 안된다며 돌아가라고 했다.

"민통선 안으로 출입하실 수 없습니다."

민통선이라니, 우리가 참 많이도 올라왔나 보다. 민통선이라는 개념을 순간 망각한 나는 개념없는 질문을 했다.

"그럼 혹시 다른 길로 갈 수 있는 길이 있나요?"

군인아저씨도 황당했을 텐데 친절하다.

"글쎄요. 아무튼 돌아가셔야 합니다."

씁쓸하게 웃으며 돌아서서 가려는데, 군인 아저씨들 우리에게 거수경례도 붙인다. 오랜만에 받아보는 거수경례에 웃으며 "수고하세요"라고 답했다. 나는 왜 군인을 보면 늠름하다는 생각보다는 참 고생한다는 생각이 들까.

제법 넓직한 평야지대를 형성하고 있어 우리는 어림짐작으로 강화군청(중심지)이 있을 만한 지역을 찍어 바로 농로로 들어섰다. 지도에도 없는 임시도로길을 달렸다. 논들은 한번 밭갈이를 해주었는지 객토가 잘 되어 있다. 오랫동안 가물었을 텐데도 한번 객토를 해놓으니 검고 찰진 흙들이 밖으로 드러나 보였다.


임시도로를 달리는 김선배. 평화로운 강화의 봄이 느껴졌다.



임시도로 위를 달리는 김선배

결국 우리는 강화군내로 들어왔다. 거기서 숙소를 잡았다. 김선배의 네비게이션에서 검색해 나온 유일한 여관 독일장 여관에 짐을 풀었다. 물론 군청 주변에 여관은 많았다. 결론적으로 여관 상태는 그다지... 아무튼 짐을 풀고 저녁식사를 하러 나왔다.

여기저기 둘러보다 마땅한 집이 없는데, <소문난 감자탕집>이 있어 어떤 맛이기에 소문났다고 자랑하나 궁금해 찾아들어갔다. 결론적으로 그냥 평범한 감자탕이다. 우거지가 많이 들어갔다는 것이 좋았다. 고기맛은 나쁘지 않다. 국물맛은 진한편이다. 감자는... 하나도 못먹고 다 뺏겼다.


<소문난 감자탕>집의 감자탕 가장 작은 것(1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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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을 떠나는 걸음이 다시 지리산으로 간 이유                              

백두대간 제3구간 종주 코스는 남원과 함양사이의 고원지대인 운봉고원을 통과한다. 여원재에서 출발, 고남산-유치재-사치재-복성이재-치재-봉화산-중치까지 갈 예정이었다. 즉 여원재에서 북쪽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여원재에서 거꾸로 남쪽으로 달렸다.

우리가 남쪽으로 가고 있다는 것도 출발하고 2시간 뒤에서야 알았다. 해는 이미 중천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고 우리는 돌아갈 길을 고심했다. 결국 가던 방향을 따라 지리산으로 가기로 했고, 여원재에서 출발한 백두대간 산행이 수정봉과 노치마을, 정령치로 이어져 다시 지리산의 품속으로 기어들어간 꼴이 됐다.

언젠가 가야할 길이었다. 5월달에 가려고 했던 구간이다. 하지만 1박2일로 달리기에는 벽소령-여원재가 너무 긴 코스다. 이 기회에 정령치까지 미리 끊어 줌으로써 5월 산행의 부담을 줄였다. 또 이번에 가지 못하고 다음 달에 찾을 봉화산 코스는 진달래 철쭉으로 유명한 곳이다. 다음달이면 만개해 있을 테니 아쉽지 않다. 마지막으로, 산은 정상에 오르는 것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을 즐기는데 있다는 말을 되새겨 보았다.

우리 나이 30대, 넘어야 할 산이라면 넘어갈 것이다                        

사실 준비는 아주 잘 됐다. 대장을 맡은 친구도 꼼꼼히 잘 챙겼다. 일행 모두 열정도 있고, 체력도 괜찮았다. 식량과 부식은 회사에서 집으로 오던 내가 간단히 장을 보아 마련했다. 지난번보다 알차고 풍부했다. 지도도 <백두대간24>라는 가장 최근에 나온 지도책을 구했다. 빈약하지만 나침반은 친구가 마련했다. 하룻밤 묵을 숙소도 확보했다. 고도계도 있으면 좋겠지만 나중에 구하기로 했다. 이 정도면 훌륭하다 싶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경험이 없었다. 지도와 나침반, 그리고 먼저 간 이들이 남겨둔 표식만으로 찾아가기에는 우리 경험이 부족했다.






3월 9일 영등포발 진주행 9시 52분차에 몸을 실었다. 낮에 사무실에서 일하다 오느라 친구 둘은 제대로 저녁식사도 못 챙겼단다. 준비해간 빵으로 대충 끼니를 채우고 맥주 한잔씩 마시고 잠을 청했다. 밤기차의 흔들거림에 몸을 실으니 잠도 쉽게 찾아들었다.

하지만 피곤을 싣고 달리는 거다. 일주일 내내 회사에서 시달리다가 주말에 이렇게 산행을 하는 일이 쉽지 않은 일이다. 이런 어려움들은 어쩔 수 없다. 한창 사회에서 일할 30대의 나이다. 여유롭게 산행 준비하고 느긋하게 집을 나오기가 쉽지 않은 세대다. 하지만 더 나이 들기 전에 추억거리 하나 만들어 보자는 일념, 그리고 삶을 더 의미있게 만들어보겠다는 욕심이 등을 떠민다. 어려움은 타고 넘어야 한다. 어차피 넘어야 할 산이라면 넘어가야 하는 것이다.


남원역 대합실


기차 안에서 설핏 잠드는가 싶더니 어느새 남원 도착 안내 방송이 나왔다. 친구들을 부랴부랴 깨워야 했을 만큼 나도 친구들도 깊이 잠들어 있었다. 남원역에 내린 시간은 새벽 2시경. 그 시간에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남원역은 시내에서도 한참 동떨어져 있어 할 수 있는 것도 없다. 잠에서 덜 깨 몽롱한 기운이 채 가시지도 않았는데, 여기서 가만히 기다리자니 그 시간도 속절없다.

결국 택시를 타고 남원 시내까지 나왔다. 아저씨에게 버스터미널 근처 PC방에서 내려달라고 부탁하면서 한마디 물어보았다.

“아저씨 백두대간 가는 사람들 요즘도 많아요?”
“요새는 좀 뜸하제요. 그라도 꾸준히 오갑니다.”


24시간 해장국집의 풍경                                                    





 

터미널에 도착했지만 PC방은 쉽게 나타나지 않았다. PC방을 찾기 위해 거리를 헤맸다. 조용한 지방 도시를 새벽에 거니는 기분도 남다르다. 아무도 없는 빈도시를 걷는 듯한 착각에 빠져들만큼 고즈넉했다. 고만고만한 2~3층 높이의 건물들이 꼬깃꼬깃 접힌 것처럼 늘어서 있는 모습이 아담하다.

PC방을 찾아 정보를 더 구하고 거기서 잠시 눈을 붙여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번에 대장을 맡은 기석이는 밤새 이번 구간에 대한 웹 정보를 검색하고 꼼꼼히 읽어갔다. 옆에서 보면서 간간히 쳐다 보았지만 이내 무거운 눈꺼풀을 닫아버렸다. 대장의 책임은 막중하다.

PC방을 나와 식당으로 향한 건 새벽 5시경. 근처 24시간 하는 밥집이 딱 2군데 있었다. 흔한 김밥집과 해장국집, 우리는 해장국집을 선택했다. 든든히 잘 먹고 가자는 데 의견이 모아진 것이다.

새벽의 해장국집에는 반드시 얼큰하게 취한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다. 취한 사람들의 구불텅한 말투는 힘든 고갯마루를 오르는 것처럼 알아듣기 힘들다. 술취한 이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계속 이어갔고, 상대편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이야기를 삼켜준다. 식어가는 해장국에는 멀건 기름때만 둥둥 떠다녔을 것이다. 소주잔은 바닥이 보일 틈이 없었고, 김치는 그 자리에서 내내 젓가락을 기다리며 쉰내를 풍겼을 텐데 말이다.

삶의 고단함을 등산에 비유한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하지만 그 고단함을 잊게 해주는 것이 산행이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수긍해 줄까. 나는 이 고약한 마약에 취해 오늘도 짐보따리를 이고 산행을 나섰다. 무엇을 잊기 위함이고 어떤 것을 버리기 위해 떠나는 것일까. 문득 <낮은 산이 낫다>라며 지리산 산줄기 밑의 한 야산에서 살고 있다는 남난희 선생의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새벽길을 알려준 운성대장군                                                 

새벽 6시 남원에서 운봉으로 가는 첫차를 탔다. 새벽 첫차를 타면 마음이 경건해진다. 첫차를 몰고 나오는 버스 기사 아저씨에게 감사하고, 새벽 첫차를 타고 일을 나가는 사람들의 부지런함을 보며 배운다.

남원에서 여원재까지는 대략 20분~30분이면 간다. 백두대간의 아름다운 고개 7선(選)에도 뽑힌 여원재(女怨峙). 북쪽에서는 지리산으로 향하는 첫 관문이다. 남원시를 뒤로 하고 고갯길을 올라서면 운봉 고원지대가 나온다. 여기서는 지리산 서부 산줄기를 감상할 수 있는데 동남쪽으로 세걸산과 바래봉이 펼쳐져 있고 북쪽으로 황산이 자리잡고 있다. 유명한 흥부마을도 여기에 있다. 여원재라는 말을 풀어보면 여인의 원한이 있는 고개라는 뜻이라 좀 무섭게 느껴진다. 익히 알려진 유래는 다음과 같다.

왜구침입으로 나라 곳곳이 몸살을 앓던 고려 말, 왜구들은 이 깊은 내륙까지 쳐들어와 노략질을 일삼았다. 왜구들이 쳐들어와 이곳의 주모를 희롱하자 이 여인은 칼로 자신의 왼쪽 가슴을 자르고 자결했다고 한다. 중앙에서 왜구를 물리치기 위해 내려온 이성계는 어느날 꿈속에서 노파가 나타나 전투날짜와 전략을 알려주었고, 그대로 실행하여 대승을 거뒀다고 한다. 훗날 이성계가 알아보니 그 노파는 바로 자결한 주모였다. 이성계는 이 주모를 기려 사당을 짓고 ‘여원’이라고 이름 붙였으며 이후로 이곳은 여원재라는 이름을 얻게 됐다.

나라가 위태롭고 정의가 사라진 곳에 약자들이 설 곳이 어디였을까. 중한 목숨마저 끊어내면서 지키고자 했던 것은 여인의 정절이었을까, 자존심이었을까. 어쩌면 남자들에게 유린당하고 노리개감이 되어야 했던 그릇된 시대의 아픔을 원망했던 것은 아닐까.

여원재에 도착해 본격적으로 등반 준비를 했다. 랜턴을 준비하고 스틱을 꺼내고 신발끈을 다시 묶는 일이다. 언제나 이 순간이 가장 긴장된다. 밤새 내려온 피곤함도 싹 가실 정도다. 하지만 우리는 바로 이 출발점에서 길을 정반대로 잡았다. 북쪽으로 가야하는데 남쪽을 잡게 된 것은 바로 ‘운성대장군’ 석상 때문이다.







산행 안내를 맡은 기석은 운성대장군 쪽으로 시작해야 한다고 했고 우리는 아무 의심 없이 그쪽으로 산행을 시작했다. 그러나 나중에 확인해 보니 고남산 방면으로 가고자 한다면 운성대장군의 건너편 쪽으로 가야 했다.

그야말로 깜깜한 밤이었다. 자신있게 운성대장군쪽으로 길을 갔던 기석이도 우리도 초반에 길을 찾는 데 애를 먹었다. 지도를 보며 어림짐작으로 길을 가늠해 보지만 어스름한 새벽 여명 빛으로는 제대로 찾아낼 수 없었다.


해는 서쪽에서 뜨지 않는다                                            




거기가 거기 같은가 하면 또 여기가 아닌가 싶기도 했다. 하지만 곳곳에서 고개를 내미는 색색의 리본이 백두대간 길을 안내하고 있었다. 사실 리본이 그리 반가운 것만은 아니다. 물론 리본이 반드시 있어야 할 만한 곳이 있다. 길을 찾기 어려운 곳이나 길이 여러 갈래인 곳에서 발견하는 리본은 참으로 반갑다. 하지만 필요 이상으로 리본을 묶어 놓는 것은 보기 좋지 않다. 특히 자신의 산악회를 자랑하거나 알리려는 목적으로 달아놓은 리본들은 더더욱 그렇다. 지리산을 처음 찾아 갔던 1991년에도 지리산에서 리본을 자주 볼 수 있었는데, 지금은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워낙 많은 사람들이 다니는 길이다 보니 따로 표시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길은 많은 사람들이 오가면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 길에서 먼저 길을 찾아간 이들이 후세에 오는 이들을 위해 안내표시를 하는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제는 인위적인 표시는 그만 했으면 한다. 한해 2만여명이 백두대간을 다닌다고 하니 조만간 백두대간 길이 환히 열리지 않겠는가.







7시가 넘어가자 멀리서 해가 뜨기 시작했다. 해가 반갑다. 그런데 이상하다. 해가 뜨는 곳이 내 왼쪽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내가 북쪽으로 가고 있다면 해는 내 오른쪽에서 떠올라야 맞다. 그런데 왼쪽이라니 이상한 일이다.

조금더 가다보니 해가 뜨던 왼편으로 큰 저수지가 보였다. 지도상에서는 큰 저수지가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지도를 펼쳐들고 나침반을 꺼냈다. 나침반이 가르치는 북쪽으로 지도를 놓고 보니 우리는 남쪽으로 가는 것이 거의 확실했다.

“우리 길 잘못 든 거 아냐?”
“그럴 리가 없어. 이 나침반이 잘못된 거 아닐까?”
“하기는 일전에 내 나침반도 완전히 잘못된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으니 말이야.”
“다음에는 내가 꼭 제대로 된 나침반을 사올게.”
“하지만 그래도 이상한 걸. 해가 지금 우리 왼쪽에서 뜨고 있잖아. 해가 북쪽으로 간다면 지금 해가 서쪽에서 뜨는 거야. 우리 길에서는 해가 오른쪽에 있어야 해.”
“…”

하지만 이때까지 우리는 단 하나의 이정표도 보지 못했다. 도상으로 문제가 있다고 확신하면서도 이정표를 하나도 보지 못해 결정하기 어려웠다. 이정표가 있었다면 이렇게까지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지는 않았을 것이다. 여원재를 출발한 지 1시간 반이 지났는데도 위치를 확인할 수 없었다. 결국 우리는 우리가 올라가는 봉우리 끝이 둘 중 하나라는 결론을 내렸다. 하나는 북쪽의 ‘고남산’, 하나는 남쪽의 ‘수정봉’.





사실 대장만의 잘못도 아니다. 서로의 처지를 누구보다 잘 이해하는 우리가 친구만을 탓할 수는 없다. 깊은 산중이 아니라 조금만 가면 마을이 있으니 이럴 때 좋은 경험을 한 것이 어쩌면 다행이다. 백두대간 종주에서 이번 산행은 두고두고 재미있게 얘기될 화제거리가 될 것이다.

결국 우리는 남행을 택했다. 그리고 수정봉에서 노치마을로 하산을 시작했다. 한시간 가량 내려가니 노치마을의 유명한 노송들이 보인다.


감미로운 봄햇살과 할머니의 꼬임에 넘어가 마신 막걸리                            








노치마을 노송은 이 마을의 자랑이다. 비석이 세워져 있는데 일조한 사람들의 이름이 빼곡하다. 여원재를 중심으로 하는 이 구간은 백두대간의 고원지대로 운봉고원으로 불리운다. 제법 높은 곳에 평야지대를 이루고 있으며 예부터 질좋고 영험하다는 소나무를 이용해 제기와 목기를 깎는 나무쟁이들이 많이 살았다고 한다.

우리가 노치마을의 노치샘에 들어섰을 때 지팡일 짚고 지나가던 마을 할머니가 우리를 발견하고는 관심을 보였다.

“산에서 오는개벼?”
“아, 네.”
“구람, 여그서 막걸리 한잔 마시구 가. 나두 한잔 주구.”
“아 여기 막걸리 파나요?”

그리고 고개를 들려보니 구판장이라는 간판이 보였다. 안으로 들어가 주인장을 찾아서 막걸리를 주문했다.



 


햇살 때문이다. 한 병만 마시고 가기로 한 것이 어느새 두병이 되고 세병이 됐다. 막걸리 한 병이 밥사발로 세잔이 나왔으니 셋이서 한 병씩 마신 셈이다. 우리보고 막걸리 마시고 가라던 할머니는 어느새 자취를 감추었다. 한잔 드리고 이야기나 들어보려 했는데, 사라지셨다. 우리가 세 병째 비워갈 즈음에 나타나셨는데, 한잔을 권하니 “나 원래 술 안 마셔.”라며 극구 사양하신다.

그런데 왜 아까는 술 한 잔 사달라고 하셨을까 궁금하다. 생각해 보니 햇살만이 아니라 꼬부랑 할머니의 꼬임에도 넘어갔던 것이다. 하지만 어떠랴. 1500원으로 한껏 기분이 좋아지니, 감사할 일이다.

오늘의 마지막 코스인 정령치로 향했다. 노치마을에서 정령치까지는 포장도로를 타고 가는 길이다. 정령치 꼭대기까지 가는 게 아니라 지리산 입구 바로 앞까지만 가는거라 더 이상의 오르막길도 산길도 없다.





그래도 이 길은 지리산으로 가는 길이다. 지리산을 떠나는 발걸음이 우여곡절 끝에 지리산 자락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4월달에 이번에 타지 못한 길을 가게 될 예정이다. 5월에는 다시 지리산 구간으로 돌아온다. 대장을 다시 내가 맡을 것이다. 참으로 질기고 질긴 지리산과의 인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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