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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둠즈데이북 1~2 세트 - 전2권 - 10점
코니 윌리스 지음, 최용준 옮김/아작


유럽 인구의 3분의 1, 아니 절반까지 죽었다. 그것은 쥐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때는 아무도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천벌이었다. 최후의 날이 도래했다고 생각했다. 어디는 마을 전체가 몰살해 죽은 사람을 묻어줄 사람도 없었다. 속수무책으로 퍼지는 흑사병의 공포 앞에서 어떤 사람들은 도망치려했지만 그것은 더 병을 퍼뜨리는 일이 됐다. 그렇게 퍼진 흑사병은 마을과 마을, 도시와 도시를 박살냈다. 그 병이 진행되는 모습도 끔찍했다. 고열을 동반하면서 환자는 망각을 보고 헛소리를 하기 시작하고, 겨드랑이나 사타구니 등에 큰 멍울이 생긴다. 그 멍울은 끔찍하게 커지고 어떤 감염자는 눈이 썩어들어가 손으로 긁어내야 했다. 1300년대 의사들은 멍울을 째보기도 했지만 터진 고름에 노출되어 병을 옮기거나 동맥을 건들여 죽이기 일쑤였을 것이다. 항생제라는 것은 커녕 아스피린도 없던 시절이다. 약초라는 걸 달여서 붙이거나 먹이는 게 전부였던 시기였다. 피부 밑의 핏줄이 터지면서 피부가 검게 변하면서 죽는다고 해서 흑사병으로 불렸다. 사람들은 이 공포스러고 괴기스러운 죽음에 좌절했다. 이런 떼죽음이 하늘의 분노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했고, 여자, 유대인들이 하늘의 분노를 불러왔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들을 산 채로 태워죽이거나 목을 매달았다. 


흑사병은 중세 유럽을 암흑기라고 부를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였다.



흑사병은 그저 피부가 검게 변하면서 죽음에 이르는 병으로만 알았다. 코니 윌리스의 "둠즈데이 북(Doomsday book)"은 흑사병이 발병하던 초기 모습을 사실적으로 보여주었다. 처참했다. 글이 줄 수 있는 상상력의 최대치를 살려내는 문장들이 여기저기서 바이러스처럼 뇌 속을 돌아다니는 것 같았다. 더러운 진흙 속에서 가장 아름다운 연꽃이 핀다. 세상의 끝에서 인간다움에 대한 진실이 나타난다. 키브린은 성녀였고, 로슈 신부는 성자였다. 흑사병은 신의 천벌도 분노도 아닌 그냥 질병이었다. 무시무시한 병 앞에서 사람들은 공포와 두려움에 떨었다. 서로를 의심과 비난으로 쳐다보며 신의 분노를 잠재울 희생양을 찾으려 했다. 하지만 키브린은 이 병이 어디서 왔으며 어떻게 퍼지는지 알고 있었다. 아픈 사람들을 죽음의 사신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자신이 알고 있는 현대 지식을 총동원하며 고군분투했다. 하지만 그는 정해진 역사를 바꿀 수 없었다. 시간 모순 때문이다. 이미 벌어진 일은 미래에서 왔다고 할지라도 바꿀 수 없다는 것. 키브린은 역사를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나마 희망을 걸었던 것은 중세시대를 뒤흔들었던 흑사병의 사망률은 2분의 1 혹은 3분의 1이었다는 것에 기댔다. 그러기에 최선을 다해 그들을 살리고자 노력했다. 


이미 과거는 정해져 있지만, 키브린은 그 결론과 관계없이 인간의 존엄성을 지켜내기 위해 사투를 벌인다. 사람들은 쉽게 진행되는 사건의 결론을 내고, 그에 따라 해야할 행동을 계산적으로 따지면서 이익을 쫓아 행동한다. 우리들에게 키브린은 묻고 있다. 지키고자 하는 것이 있다면 결말에 기대지 말고 나아가라고. 세상에 결정된 건 아무것도 없으며 무엇을 하든 나 자신을 변화시키며 나아가는 것. 그리고 그것은 인간의 존엄성에 기대며, 더 큰 자신이 되는 길이라고 말하고 있다. 책 앞머리에 있는 존 클린 수사의 기록이 그것을 말한다.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이 모든 일이 시간에 파묻히지 않도록, 그래서 결코 잊지 말아야 할 이 모든 일이 우리 후손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지 않도록, 이 땅 사악한 존재의 손아귀에 놓인 이곳에서 일어난 수많은 재앙을 보아온 나는, 이제 죽은 자들에 둘러싸여 죽음을 기다리며 그동안 내가 목도한 모든 일을 여기 적는다. 

기록은 글쓴이와 함께 소멸되지 않아야 하고 노동은 그것을 행한 사람과 함께 무위로 돌아가지 않아야 하므로, 내 오늘 이 작업을 계속하기 위해 양피지를 남기니, 만일 단 한 사람이라도 살아남아 아담의 후예 중 그 누구라도 페스트로부터 도망쳐 내가 시작한 일을 계속 이어갈 수만 있다면... 

- 존 클린 수사, 1349년


우리는 계속 나아가야 한다. 인간의 길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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