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반응형



13계단 - 10점
다카노 가즈아키 지음/황금가지





남을 죽이면 사형이 된다는 것 정도는 초등학생들도 알고 있잖나.  ···· 중요한 건 그 부분이야. 죄의 내용과 그에 대한 벌은 사전에 모든 사람에게 알려진 상태야. 그런데 사형당하는 놈들이란, 잡히면 사형이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굳이 저지른 일행들이야. 이해가 되나. 이 뜻이? 그러니까 놈들은 누군가를 죽인 단계에서 스스로를 사형대로 몰아넣는 거야. 잡히고 울고 불고 해 봤자, 이미 늦어.

  • 난고가 준이치에게 하는 말



세상에는 여전히 나쁜 놈들이 많다. 그들은 사람들 틈에서, 혹은 깊숙한 골방에 숨어서 누군가의 빈틈을 찾기 위해 냄새를 맡고 다닌다. 게 중에는 다른 이의 생명을 빼앗아 자신의 즐거움을 충족하려는, 인간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는 죄를 저지르는 사람도 있다.


대표적인 연쇄 살인마 유영철은 2003년 9월부터 2004년 7월까지 단 10개월만에 20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그가 주로 살해한 사람은 노인이거나 출장 마사지 여성이었다. 마포의 한 오피스텔에서 출장을 오는 여성 마사지사를 상대로 성폭행을 한 후 하나님을 믿느냐고 묻고 그 대답에 따라 살해하거나 살려주는 등 괴기스럽기까지 한 행동을 보이기까지 했다. 대법원은 2009년 6월 9일 그에게 사형을 확정 판결하였다.


연쇄 살인마와 함께 용서받을 수 없는 극악한 범죄는 어린이에 대한 범죄이다. 2007년 성탄절, 예수의 축복과는 거리가 먼 사건이 일어났다. 경기도 안양시에 사는 초등학교 4학년 이혜진 양과 초등학교 2학년 우예슬 양이 동시에 납치되어 살해된 것이다. 범인은 당시 38세 정성현이었다. 그는 두 어린이를 납치, 성폭행 후 살해하였고, 시신을 훼손하여 땅에 묻거나 강에 버렸다. 대법원은 2009년 2월 26일 사형 판결을 확정했다.



죽어 마땅한 일이다. 극악한 범죄를 저질렀으면서도 버젓이 살아서 맨정신으로 밥을 먹고 똥을 싸고 있다고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치가 떨린다. 그들이 같은 하늘 아래에서 우리 가족과 같은 공기를 마시고 산다고 생각하니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그들은 사형 판결을 받았지만 여전히 감옥에서 생을 이어가고 있다.



만약 자기 자식이 살해당하기라도 한다면, 그리고 범인이 눈앞에 있었다면 난고는 상대에게 똑같이 갚아 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사적인 보복을 인정하면 사회는 완전한 무질서 상태가 된다. 국가라는 제삼자가 형벌권을 발동시켜 대신 해 줘야 한다. 인간의 마음에 복수심이 있고, 그 복수심이 이 세상을 떠난 타인에 대한 애정이며, 그리고 법이라는 것이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한 사형을 포함한 응보형 사상은 용인되지 않을까.



국가가 형벌권을 가지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또 임의적으로 행해지던 형벌에서 명문화된 법률에 의한 형벌을 내리게 된 것 역시 인류 전체 역사를 본다면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이른바 ‘문명 국가’에서 범죄 피의자에 대해 사적으로 고문하거나 처벌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사적 보복이 초래할 상황, 복수가 복수를 낳는 악순환의 고리를 경험해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국가가 범죄의 유무를 가리고, 범죄자를 격리하고 처벌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국가는 범죄를 막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사전에 예방하기 위해서도 노력해야 하지만, 사후에 피해를 복구하고, 피의자를 처벌하는 일에서도 세심한 신경을 써야 한다. 하나의 범죄가 발생했을 때, 국가는 세 가지 역할을 이행해야 한다. 첫째 범죄 피의자를 찾아내서 범죄 유무 및 처벌의 수준을 가리는 일이다. 보통 사법의 영역이다. 둘째, 피해자에 대한 피해 복구 및 지원이다. 이는 주로 행정의 영역이다. 마지막으로 범죄자를 사회로부터 격리하고 처벌을 하는 것이다. 역시 행정의 영역이며, 특별히 이를 교도 행정이라고 한다. 이 세가지 국가의 역할이 사적 보복을 막고, 또다른 범죄 가능성을 예방하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런데, 또 하나의 새로운 변수가 등장했다. 그것은 언론이다.


보도의 자유랍시고 폼잡고 다니는 사람들이 범인과 마찬가지로 저희를 습격했어요. 물론 의료비는 본인 부담이었죠. 머리를 다친 범인은 국가가 치료비를 대 주고 수술도 받았는데. 흉악범죄의 피해자가 되는 순간, 사회 전체가 가해자로 돌변합니다. 그리고 아무리 피해자를 괴롭힌들 사죄하는 사람도 없고, 책임지는 사람도 없어요. 결국 유족 입장에서는 모든 잘못을 범인에게 돌릴 수밖에 없어요.
- 범죄자에게 부모가 무참히 살해된 요시에의 말


유영철을 비롯해 최근까지 흉악하고 무자비한 범죄는 여전히 언론의 주요 관심사다. 언론을 통해 전달된 사건은 인터넷을 통해 더 확대 재생산되며 언론에 드러나지 않았던 자세한 내용까지 낱낱이 드러낼 때도 있다. 사람들은 이를 통해 피해자의 공포, 분노, 슬픔을 공감하는 바도 있겠지만, 그건 그때뿐이다. 오히려 언론들의 무차별적인 언론 보도와 취재활동이 오히려 피해자들을 괴롭히는 경우가 더 많다. 그러다보니 범죄 보도들이 피해자를 보호한다기 보다 많은 사람들의 복수심만 자극하게 된다.


범죄를 막기 위해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 여기에 국가의 형벌권과 관련한 두 가지 논쟁이 오랫동안 있었다. 더 무거운 형벌을 통해 범죄를 예방하자는 주장과 반대로 무거운 형벌이 오히려 범죄를 더욱 극악하게 만들고 예방 효과도 나타나지 않으므로 교화에 더 집중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실제 입법의 과정에서는 여러 특별법들이 만들어지면서 중형을 요구하고 있지만 재판의 과정에서는 선처의 기회를 주기 위해 가벼운 형벌이 내려지는 경우가 많다. 응보와 교화가 교묘하게 뒤섞이는 과정이다.


주인공 ‘난고’의 말대로 사형을 저지를만한 놈들이 따로 있을 수 있다. 하지만 형벌제도 자체는 인간이 만든 불안전한 제도의 하나일 수밖에 없다. 빈틈이 있고 허술한 구석이 나타나기 마련이며 그 틈으로 벌레들은 빠져나간다. 아무리 사회가 촘촘하게 구성되어 있어도 인간이 만든 제도의 불안정함과 인간의 영악함은 공존하기 마련이다.


그러한 일련의 관찰에서 난고가 얻은 결론은 사형수가 죄를 참회했다 해도, 이는 사형 판결을 받았기에 일어나는 결과라는 것이었다. 즉 응보형 사상이 지지하는 사형 판결에 의해 목적형 사상의 목표인 회오의 정(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뉘우침)을 유인해 냈다는 공교로운 현상 말이다.

그리고 지금 160번의 종교적 지도에 관한 내용을 접하며 난고는 또 하나의 얄궂은 감개를 느꼈다. 종교 지도에서 보이는 태도는 사형 확정수의 심적 안정을 측정하는 기준이며, 이는 형 집행시기의 결정 요인이 된다. 종교 지도자의 가르침에 따라 마음의 안식을 얻은 자일수록 빨리 처형당하고 마는 것이다.

  • 난고의 회상



인간 사회의 불안정함과 영악한 인간들의 비열한 시도들이 우리의 사법 제도를 흔들고 있다. 사형제는 그 논란의 핵심이다. 소설 “13계단”에서는 사형의 집행 과정에서 평범한 교도관들이 실행해야 하는 사형 집행에 관한 일을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그 행위가 그들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해 난고와 같은 교도관을 통해 전달해 주었다. 사형제라는 것은 살아 있는 한 사람의 목숨을 의도적으로 앗아가는 행위이다. 즉 엄밀히 말해 ‘살인’인 것이다.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절대로 행할 수 없는 일을 교도관들은 국가의 명령에 따라 행해야 한다. 주인공 ‘난고’ 역시 교도관 시절 2명의 사형 집행 과정에 직접 참여하면서, 그 후유증으로 가정이 위기로 내몰리고 말았다. 사형제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실질적인 사회 이익이 분명하지 않은 가운데, 사형을 집행하는 과정에서 누군가는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어야 한다.


영화 <집행자>의 한 장면


지금도 세계 어딘가에서는 돌을 던져서 죽이는 투석형, 사람의 목을 베는 참수형이 존재한다. 얼마전 북한에서는 총살형을 집행했다고 한다. 우리는 투석, 참수에 대한 말을 들으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라는 생각을 할 것이다. 북한의 총살형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주위에서 그런 반응은 어렵지 않았다. 물론 북한 정권에 대한 반감이 더 커서 그런 것도 이유지만, 사형을 집행하는 과정에서 누군가는 사람을 죽이는 일에 참여해야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여전히 살아 있는 사형수 유영철과 정성현의 사형을 집행한다고 하면, 그것이 참수이든, 투석이든, 총살이든, 교수형이든간에, 거기에는 어느 누군가가 직접 사람을 죽여야 하는 것이다.


1996년 헌법재판소는 사형제도의 위헌 심판 소송을 기각했다. 필요하다는 판결이다. 하지만 재판관 2명이 소수 의견으로 위헌 의견을 냈다. 재판관 김진우는 “사형제도는 나아가 양심에 반하여 법규정에 의하여 사형을 언도해야 하는 법관은 물론, 또 그 양심에 반하여 직무상 어쩔 수 없이 사형의 집행에 관여하는 자들의 양심의 자유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침해하는 비인간적인 형벌제도”라고 밝혔다. 결국 인간 같지도 않은 인간을 처벌하기 위해 우리는 선량한 인간(교도관은 성실하게 공부하고 깨끗하게 살아온 사람만이 될 수 있다)을 희생시켜야 하는 것일까.  


"너나 나나 종신형이다."

편지를 다 읽고 난 난고는 중얼거렸다.

"가석방은 없다."


다시 악의 평범성을 생각해 본다. 유영철을 인간이 아니라고 단정짓는 것은 아주 쉽게 우리 사회의 치부의 한쪽을 가리려는 것에 불과하다. 살인마 역시 그렇게 태어나는 게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는 분명 죽어 마땅한 짓을 했다. 우리는 사형제를 통해 그를 이 사회에서 사라지게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행한 일들과 우리 사회가 안아야 했던 상처들이 쉽게 지워질까. 정의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불의(사형제)의 모순을 우리는 언제까지 떠안아야 할까. 과연 그것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실익은 얼마나 될까. 소설 “13계단”의 난고가 가져야 했던 평생의 고통을 우리는 언제까지 외면할 수 있을까.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