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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막 마을 지나 논 한가운데 나 있는 도로를 따라 걷는 길에서 강아지풀을 들고 장난치는 아이

 

 

들녘이 누렇게 변했다. 추수를 앞둔 벼들이 고개를 한껏 숙이고 있다. 한가위를 지나 풍요의 시간이다. 넉넉한 곳간처럼 마음도 넉넉해질 수 있는 시간이다. 그런데 왜 이리 공허할까. 사람 사는 세상의 흐름은 이제 더 이상 자연의 흐름과 같아질 수 없는 거다. 땅과 하늘은 풍족한 곡식과 과일을 주고 있는데, 우리는 지금 눈에도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에 갇혀 있다. 오랫동안 발이 묶이면서 시간의 흐름도 묶이길 바랐지만, 시간은 바이러스 따위 쳐다보지도 않고 제 갈길을 달려 갔다. 

매달 걷기로 한 지리산 둘레길이었다. 5월 이후로 5개월만에 다시 길을 나섰다. 모가 심어졌던 논들은 이제 그 모가 자라 벼가 되었고, 수확만 기다리고 있다. 또다시 시간은 훌쩍 넘어갔고, 아이는 금세 엄마의 키를 넘볼 만큼 자랐다. 좀 천천히 자라주면 안되겠니, 속으로 말해 본다. 

그래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 채워지지 않는 것들을 채우려는 마음, 채워질수록 공허한 마음은 가을이 죽는 숙명이다. 이 난국은 끝이 보이지 않고, 혼란은 더욱 깊어간다. 불안한 사람들의 아우성이 광장을 가득 메우고, 힘을 가진 이들도 해결책을 찾지 못해 갈팡질팡하고 있다.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 정답이 있을까? 누구도 알 수 없는 낯선 상황에서 우리는 최선의 해법을 찾기 위해 동분서주 중이다. 사실 할 수 있는 것도 많지 않다. 아무렇지도 않게 출근을 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일을 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밥을 먹고,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퇴근해 집으로 돌아오는 일상을 이어가는 것. 비정상적인 생활을 정상적으로 이어갔던, 그런 생활이 벌써 1년을 채워가고 있다. 이렇게 2020년이 다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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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둘레길 6구간(수철-성심원)(출처: 네이버 지도)

 

둘레길을 걷는다는 것은 이렇게 속절없이 흘러가는 시간을 잠시 눈앞에 붙잡아 둘 수 있는 공간으로 들어가는 일이다. 걸으면서 만나는 강과 들과 산의 모습은 내가 놓치고 지나온 자연의 시간들을 돌아보게 한다. 지난 5월, 찰랑찰랑한 논에 심어져 있던 모들이 이제는 어린아이 키만큼 자라 무거운 벼이삭을 늘어뜨리고 있고, 막 연초록 새잎들을 틔우던 나무들도 어느새 빛바랜 나뭇잎을 하나둘씩 떨어뜨리고 있다. 감나무의 감들은 잘 익어 어서 따달라고 가지를 늘어뜨리고, 대추는 매달린 채 쪼그라들었으며, 지천에는 밤송이들이 어지러이 널려 있는 풍경을 만난다. 저 벼들과 감과 대추와 밤이 그동안의 시간을 훌쩍 뛰어넘어 내 앞에 나타난 것 같았다. 얼마나 많은 낮과 밤, 비와 바람을 그 안에 품고 있을까. 잘 커 줘서 고맙다. 

 

 

벼들을 말리는 모습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었다. 

 

 

 

아직 추수가 다 끝나지는 않았다. 멀리 웅석봉 자락이 보인다. 저 너머 지리산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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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막마을에서 금서 농공단지 옆을 지나는 길. 논밭 사이로 난 길을 지나 마을과 마을을 지난다. 

 

수철리 마을 회관 앞 공터에서는 이삭을 말리고 있다. 고속도로를 나와 지방도로를 달릴 때에도 한적한 곳에는 여지없이 벼를 말리는 풍경을 볼 수 있다. 벼를 잘 말려야 썩지 않고 오래 보관할 수 있다. 요새는 다들 건조기에서 말리지만 일부러 건조기를 쓰지 않는 경우도 많다. 이렇게 들판에 벼를 말리는 일은 여간한 일이 아니라고 한다. 매번 요리조리 잘 뒤집어 골고루 말리는 일도 번거롭지만 안 본 틈에 짐승들이 접근해 먹어치우는 것도 감시해야 할 것이다. 자칫 지나가는 차량들이 실수로 밟고 지나가는 일도 벌어진다. 정말 재수 없으면 일기예보에도 없던 비가 내리는 일이다. 대부분이 노인들인 시골에서는 벼를 말리는 일도 거두는 일도 뒤적거리는 일도 모두 수작업이라 보통 힘이 드는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편리한 건조기를 마다하고 굳이 여기 아스팔트 바닥 위에 말리는 건, 가을 햇살이 주는 오묘한 맛이 있기 때문이다. 고추도 건조기에 말리는 것보다 햇볕 아래 말리는 것을 더 높게 쳐주듯이 밥맛도 건조기로 말린 쌀보다 이렇게 햇볕에 말린 쌀이 더 좋다고 한다. 널어놓은 벼가 바싹 말라가는 시간은 밥이 맛있어지는 시간이다. 

수철마을을 지나면 곧 지막마을로 들어선다. '지막'은 '종이로 만든 막'을 뜻한다. 지리산 산골마을 중에는 종이를 만들던 곳이 많았다. 지막마을 역시 산에서 닥나무를 베어다 닥종이를 만드는 일을 마을의 업으로 삼았다고 한다. 옛날에는 삶은 닥나무 섬유를 발에다 건져 종이 모양을 만들고 나무판에 붙여 햇볕에 말렸는데, 여러집에서 그렇게 말리고 있으면 커다란 하얀 막이 마을을 덮은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 그래서 이름이 '지막' 마을이 된 것이라는 유래다. 

지막마을을 지나고 평촌마을을 지날 때면 금서 농공단지가 옆으로 펼쳐진 모습이 보인다. 유독 눈에 띄는 것이 한국항공우주산업(KAI) 산청공장이다. 여기가 비행기나 헬리콥터 등을 만드는 공장인 셈이다. 수철마을로 들어오다 보면 정문 앞을 지나가게 되고 이렇게 둘레길을 가다 보면 또 옆으로 지나치게 된다. 농공단지에 제법 크게 지어진 건물이라서 이색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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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서 농공단지 옆을 지나 경호강을 만난다. 

 

농공단지를 지나면 큰 물줄기를 만나게 된다. 경호강이라고도 불리는데, 남강의 상류부의 명칭이다. 경호강은 남강으로 바뀌고, 진양호에서 잠시 머물다가 북동쪽으로 물의 흐름을 바꾸어 함안군에서 낙동강과 합류한다. 경호강은 래프팅 장소로 인기가 많다. 여름철 이 길을 걷다 보면 래프팅을 즐기는 사람들도 만날 수 있다. 지금은 래프팅 시기가 아닌 데다 코로나로 인해 이곳의 휴양 산업도 큰 타격을 입었을 것으로 예상된다. 래프팅을 안내하는 표지판이나 강변이 을씨년스럽기까지 하다. 하지만 강이 훔친 사람 마음이 어디 래프팅뿐일까. 걷는 내내 경호강 주변에서 낚시를 즐기는 사람을 쉽게 볼 수 있었다. 경호강 낚시는 보통의 대낙이 아닌 릴낚시가 대부분인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은어낚시가 유명한데, 5월에서 8월까지가 한창때이다. 10월인 지금도 강에 들어가 낚시를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은 심심치 않게 보인다. 은어 철이 지났는데, 저들은 무엇을 낚기 위해 차가운 강으로 들어가 낚싯대를 흔들고 있는 것일까? 래프팅과 낚시 말고도 ATV(4륜차)를 즐기는 이들도 만날 수 있었다. 온 가족이 함께 왔는지 할머니부터 초등학생까지 10여 명 되는 사람들이 둘레길 코스에서 먼지를 풀풀 날리며 ATV를 타고 우리 옆을 지나갔다. 한참을 엔진 냄새를 맡으며 걸어야 했던 불쾌감이 좀처럼 가시지 않는다. ATV들이 많이 낡아 보였고, 바퀴마저 똑바로 굴러가지 않아 보여 위험해 보였다. ATV를 타고 어디까지 구경을 가는 건지 알 수는 없었지만, 걸으면서 구경하는 경호강의 풍경이 훨씬 조용하고 여유로움을 느낄 수 있어 좋다. 

경호강 풍경을 따라 한참을 걷다보면 어느새 이 구간의 가장 높은 고개, 바람재를 오른다. 높다고는 했지만, 실상 언덕 정도다. 하지만 아이가 많이 힘들어했고, 다리가 아프다고 칭얼대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5학년이나 됐지만, 부모 앞에서는 아직도 아기같이 군다. 이번 둘레길 구간의 특징은 마을과 강을 따라 걷는 길이 많아 평지길이 대부분이라는 점이다. 그러다 보니 마땅히 쉴만한 공간을 찾기 어렵다. 바람재를 넘어갈 때도 쉴만한 곳을 찾을 수 없어 길 옆에 자리를 깔아 아이를 앉히고 다리를 주물러 주었다. 조금만 가면 끝난다는 말로 구슬려 다시 길을 나섰다. 거짓말은 아닌 게 바람재를 넘으면 곧 성심원이 나오기 때문이다. 이날의 종착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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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심원은 한센인들의 노후를 위한 복지시설이다. 천주교에서 운영하고 있으며 한센인 또는 중증장애노인들의 생활을 보살피고 있는 곳이다. 우리가 도착한 시점에는 입구에서부터 코로나 방역을 위한 열체크와 문진을 하고 있는 듯해 보였다. 면역력이 취약한 고령의 중증 장애 노인들이 있는 시설인만큼 초긴장 상태일 것이 분명하다. 안에서 생활하는 노인들도 외부에서 찾아와 주는 사람이 아예 없다시피하는 요즘은 외롭고 쓸쓸함이 더할 것이다. 더불어 그들을 돕는 이곳 종사자들 역시 노인 시설에서 일하는 직업적 사명감으로 외부와의 만남이나 접촉을 일체 끊고 살아가야 하는 힘든 시절이다. 

오랜만에 둘레길 걷기를 나섰지만, 마음은 가볍지가 못했다. 여전히 코로나와의 싸움 최전방에서 고전분투하고 있을 여러 종사자들의 면면을 생각하면 발걸음이 가벼워질 수 없다. 게다가 우리가 걷는 둘레길에는 대부분 노인들이 사는 시골마을이라서 말소리 숨소리 하나 쉽게 나가지 못한다. 지나가는 어르신들에게 말을 건다는 건 언감생심이다. 그저 조용히 주어진 길을 걸으며 마을을 소리 없이 지나치는 것이 코로나 시대 여행자의 양심일 것이다. 

성심원 앞에서 산청택시를 불러 차를 주차해 둔 수철마을로 갔다. 요금은 17000원 정도. 아이는 피곤했는지 뒷좌석에 잠들었다. 

 

성심원 앞길

 

 

그래서 이번 둘레길이 공허한 마음을 채웠을까? 아직은 어설프다. 세상이 분명 나아지고 있다고 믿지만, 말들의 전쟁이 난무하는 온라인 공간을 보면 심란하다. 한편으로는 총칼이 부딪히는 것이 아니고 말로만 서로를 죽고 죽이는 게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저 많은 말들에 쌓인 업보는 어떻게 풀려고 저러는 것인지 안쓰럽다. 어지러운 온라인 공간에 이렇게 글과 사진을 남기는 건, 그럼에도 우리의 삶이 나아지고 있다는 작은 희망이 되고 싶은 소망 때문이다. 물론 무엇보다 내 마음 안의 공허를 채우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아내에게 다음 지리산둘레길 일정을 서둘러 잡자고 했다. 걷는 일은 명상과 사색이 함께 어우러지는 일이다. 마음의 평안을 찾는 여정이다. 어질러진 일상을, 흐트러진 마음을, 늘어진 몸가짐을 바로잡는 일이 될 것이다. 

 

 

새벽길을 달려 온 여정이라 아이가 힘들어했다. 길은 평이했지만, 걷기 여행은 약간의 고단함을 견뎌내는 것. 아이가 알아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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