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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홍어다. 얼굴 생김새도 홍어처럼 네모지다. 수컷 홍어의 생식기가 두개라는 데 노름꾼에 건달인 아버지는 이웃 동네의 유부녀와 놀아나 야반도주를 했다.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를 속절없이 기다린다. 바다 깊은 곳에서 산다는 홍어를 어머니는 부엌에 매달아 놓았다. 홍어는 아버지가 좋아하는 음식이기 때문이다. 마치 피트 하밀(Pete Hamill)의 소설 "노란 손수건"처럼 아버지에 대한 용서와 기다림을 홍어로 표시하고 있는 듯했다.

그런데 눈이 온 세상을 뒤덮었던 어느날, 이름도 없이 거지 같이 떠돌던 여자 아이가 들어온 그날에 홍어는 감쪽같이 사라졌다. 어머니는 그 아이에게 매질을 했다.  겨울 들판을 들짐승처럼 떠돌던 그 여자 아이는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그 매질을 견뎌 냈다. 어머니는 그 아이에게 삼례란 이름을 붙이고 거두었다.




어머니는 그에게 삯바느질의 주문이나 배달을 하는 바깥 일을 맡겼다. 일을 싹싹하게 잘 하는 삼례와 어머니는 죽이 잘 맞는 듯했지만, 번번이 어머니의 뜻을 어기고 어머니를 속이는 삼례에게 여지없이 어머니의 매질은 이어졌다. 그렇지만 삼례는 듣는 시늉만 할 뿐 다시 시간이 지나면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했다.

그리고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왔다. 삼례는 사라졌다. 삼례가 떠난 이후의 삶은 다시 기다림의 시간이다. 이제 그 기다림은 특정한 아버지로 귀결되지 않았다. 지루한 산골구석에서 누구라도 숨막힐 듯한 정적을 깨뜨릴 수 있는 이라면 누구라도 환영했다. 그러나 뒤이어 찾아온 이는 삼례의 전남편과 아버지의 정부와 그 아이, 외삼촌 등이다. 속절없는 기다림의 끝에 아버지는 나타났다.





그리고 어머니는 떠났다. 기나긴 기다림에서 어머니가 절절이 기다린 것은 아버지가 아니라 자유였을지도 모른다. 그 마음에 불을 붙인 것은 삼례였을 것이다. 전통과 가부장제에 갇혀 살고 있는 어머니는 마치 날고 싶지만 실에 묶여 날지 못하는 새와 같았다.

어머니는 기다림 속에서 참자유를 생각했을 것이다. 자신이 기다리고 있는 실체가 드러났을 때 정작 자신이 찾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깨닫고 모든 것을 훌훌 버리고 새처럼 날아간 것이다. 기다리는 사람은 자유롭지 않고, 자유로운 사람은 기다리지 않는다. 어머니는 그렇게 자유를 찾아 멀리 멀리 떠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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