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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으로 간 구상나무

운봉-인월-금계 | 좀더 가볍게 살 수 있다면 말이지 본문

생활 여행자/지리산둘레길

운봉-인월-금계 | 좀더 가볍게 살 수 있다면 말이지

구상나무 구상나무 2019. 11. 4. 22:33

서울에서 4시간 반을 달려 인월읍 둘레길 안내센터에 차를 주차시켰다. 미리 준비한 삼각김밥과 컵라면으로 아침을 간단히 해결했다. 다시 먹을만한 끼니를 어디서 먹을지는 정하지 못했다. 아무리 시골길이라도 라면 하나라도 파는 식당 없을까. 이제 길을 걷는데 익숙해지다 보니 끼니에 대한 걱정을 좀 덜었다. 필요할 때마다 준비한 간식거리로 약간의 허기는 채워진다. 그렇게 점심때를 건너 뛰고 걷다가 뒤늦게 밥을 먹는 일이 이제 익숙하다. 그래도 그렇게 먹는 밥이 맛있다. 그래서 굳이 식당을 미리 알아보거나 하지 않는다. 피곤한 다리를 쉬고 싶을 즈음, 아이가 배고프다고 보챌 즈음이 가장 맛있는 밥을 먹을 시기이다. 힘들었을 다리를 주무르고 있으면 상이 차려지고 따뜻한 밥과 국이 상 위에 오르면 그 맛과 향으로 그곳은 벗어날 수 없는 미식의 감옥이 된다. 잠깐의 식사 시간이지만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맛과 향의 종신형을 선고받는다. 이렇게 둘레길을 다니면서 가벼워 지는 짐과 함께 입맛도 가벼워진다.

둘레길을 걸으며 입맛도 소박해지더니 짊어져야 할 짐도 가벼워진다. 몇 번의 걷기 여행에서 필요한 것과 필요 없는 것이 더 분명해졌다. 필요 없겠다는 판단이 서면 짐은 가벼워진다. 입맛도 마찬가지다. 산해진미를 찾아다닐 필요가 없다는 걸 알았다. 허기가 최고의 반찬이 되는 이치다.

가끔씩 짐을 꾸리고 떠나는 일은 더 간소한 삶을 생각해 보게 한다. 가족을 이끌고 현관문을 나서면서 집을 다시 훑어 본다. 우리 식구가 다 함께 집을 비우지만 여전히 집안의 온갖 물건들은 이 집을 지키고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그 물건들은 살아가면서 짊어진 짐이다. 필요에 의해 들여놓았던 것들이다. 하지만 지금 떠나는 내 등에 짊어진 짐을 생각하면 참 별 것 아니다. 결혼 후 네 번째 보금자리다. 이사를 많이 다녔다. 이사를 다니면서 집은 좀 더 커졌다. 아이가 하나 생겼다. 살림은 그만큼 많아졌다. 삶이 풍부해졌을까? 모르겠다. 여전히 난 빈곤하다. 머물면 쌓이고 떠나면 버리는 것이 사람의 삶과 죽음과 같다. 둘레길 좀 걷는다고 참 많은 생각에 빠진다. Why so serious?

 

인월면에서 2구간 시작점인 운봉읍으로 가는 버스를 타려면 인월버스터미널을 이용한다. 주말 이른 아침부터 버스를 기다리는 분들이 제법 있다. 시골의 버스 터미널에서 표를 팔고 있는 인심좋은 아주머니(라고 하기에는 할머니)가 귀찮을법한 물음들에도 친절하고 상세히 답해 주신다. 시골 버스는 번호가 없다. 행선지를 잘 보고 타야 한다. 잘못 타면 한참 돌아 목적지로 갈 수도 있다. 당연히 기사님에게 내가 가는 행선지를 물어보고 타는 것이 좋다. 

 

운봉읍에서 이날의 둘레길이 시작됐다. 이번 일정은 1박 2일 일정으로 잡았다. 비교적 쉬운 2구간 운봉-인월 구간(약 9.9km)과 좀 긴 구간인 3구간 인월-금계 구간(약 20.5km)을 묶어서 한 번에 넘어갈 계획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첫날 운봉-인월 구간을 지나 3구간의 일부 구간을 마저 걸어야 한다. 1박을 할 집은 장항마을이나 매동마을 정도로 잡고 갔다. 어느 정도 걸을 수 있을지 미리 예측하기 어려워 민박을 예약하지도 않았지만, 마음 한편에서는 민박 정도는 쉽게 잡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짜임새 있는 일정도 중요하지만 결국 여행은 변수가 좌우한다. 물론 그 변수는 어느 정도 관리가 가능해야겠지만, 숙박 집을 잡는 것 정도는 해볼 만한 변수 중의 하나일 거다. 민박집 예약은 점심시간을 넘어서 이루어졌다. 그리고 무사히 알맞은 시간에 민박집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이건 지금 생각해도 나름 천운이다. 아이가 너무 지쳐 있었고, 길이 좀 더 길어졌으면 예약을 취소하고 눈에 보이는 민박집으로 들어가거나 택시를 불러야 했을 거다. 그럴 때 민박집에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나에겐 기적 같은 일이었다.

 

아이가 있으니 같이 어려진다. 

 

지리산 자락에서 흘러나온 물들이 모여 람천을 이루고 흐른다. 둑방길에는 풀들이 가득했지만 나그네와 농부들이 지나가면서 길을 만들었다.

 

운봉읍을 빠져나와 운봉고원을 적시며 흐르는 람천을 따라 걷는다. 둑방길은 흙길이다. 나무가 적어서 한 여름에는 힘들 수도 있다. 또 지루할 수도 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일주일 내내 아스팔트길만 돌아다니다가 하루쯤은 이런 흙길을 밟아주는 것도 좋다. 사실 트레킹은 참 단순한 일이다. 그냥 걷는 일이다. 걸으면서 보고 듣는 일은 그냥 작은 선물이다. 누구에게나 주어지고 아무나 가질 수 있는 선물이지만 받으려 해야 가질 수 있는 선물이다. 둘레길 걷기는 그것을 받는 일이다. 단순하게, 간소하게, 담백하게...

 

송흥록 생가에 있는 동상. 생전 송흥록 선생의 모습을 표현한 듯. 

 

황산대첩비지를 지나면 비전마을이다. 비전마을 초입에는 가왕 송흥록, 박초월의 생가가 있다. 여기에 들어가면 옛집을 잘 보존하고 있으며, 송흥록 박초월의 판소리가 흘러나온다. 천천히 둘러보면서 판소리 한 대목을 들어보는 것도 좋겠다. 우리가 들어갔을 때는 박초월 선생의 별주부전 중 별주부가 토끼를 만나는 대목이 흘러나왔다. 

 

마을마다 마을을 지키는 나무들이 있다. 당산나무라고도 불린다. 마을들은 때마다 이곳에서 제를 지냈다. 
운봉은 흥부의 고장으로 불린다. 이곳에서는 곳곳에서 흥부를 상징하는 여러 표현물과 지명과 상표를 볼 수 있다. 둘레길에 만난 흥부와 박과 제비.
늦은 점심을 먹었다. 비빔밥이다. 나온 나물들이 푸짐하다. 부족하면 더 준단다. 넘칠만큼 넣고 싹싹 비벼서 배불리 먹었다. 

 

이튿날 3구간 등구재 오르는 길에서 바라본 계단식 논. 일부는 이미 추수가 끝났지만 아직 추수 전인 논들도 많았다. 

 

등구재, 또는 등구령이라고 불리는 곳. 인월에서 등구재를 넘어가기 전에 있는 쉼터. 여기서 막걸리 한잔을 할 법도 하건만 재를 넘어야 하는 여정을 앞에 두고 발목이 잡힐 거 두렵다. 등구재를 넘어 온 이들이라면 기꺼이 막걸리 한사발과 김치 한입으로 목을 축여도 좋을 곳이다. 
등구재 고갯길 위에서 올라오는 모녀를 찍었다. 길은 넓직해 우마차는 지나다녔을 것 같았다. 소형차 한대는 쉽게 지나갈 수 있을 만큼 넓다.
등구재에서 한 컷
등구재에서 내려가는 길
금계마을 초입에서 만난 배추밭. 배추가 잘 익고 있다. 김장철이 돌아오고 있다. 
지리산둘레길 2~3구간을 마치고 난 후 금계마을에서.

 

 

미국의 호피족 명언에는 이런 말이 있다고 한다.

'인생에 있어 가장 긴 여행, 그것은 머리에서부터 마음에 이르는 여행이다.'

우리는 머릿속에 지식과 정보를 채우기 위해 수많은 시간을 학교에서 보내고 졸업 이후에도 정보를 찾아 신문과 뉴스와 인터넷을 뒤지고 다닌다. 그렇지만 정작 마음 속에 오랫동안 쌓아온 나의 모습, 관습과 습관, 전통, 예의, 우정, 사랑 등은 시간이 걸리고 비효율적이기까지 하다. 그렇지만 지금의 머릿속 지식들은 산업화 이후 발견된 지식이 대부분이다. 씨앗을 언제 심고, 바람에 따라 내일의 날씨를 생각하고, 별을 보면서 길을 찾아가는 일은 지금의 우리에게 비효율적이고 어리석은 일에 불과하겠지만, 이는 인류가 수많은 시간을 쌓아오면서 내면에 체화한 지혜일 것이다. 가끔은 그런 일이 내 속에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내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가 해 왔던 일을 생각하는 일이다. 그것이 어쩌면 머리에서 마음에 이르는 여행일 수도 있다. 둘레길 여행은 그런 일들의 하나가 되어 줄까. 여전히 길은 내게 어렵고 번번이 헤매게 하지만, 난 이 길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앞으로 계속 이 길을 걷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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