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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구간 마지막 마을인 금계 마을의 배추밭 풍경. 

 

지리산 들녘의 가을 추수는 거의 끝났다. 하지만 밭에서 자라는 배추들은 찬이슬을 맞으며 속을 채우고 딴딴해지는 시기이다. 배추의 수확은 보통 11월 초순경이다. 이때부터 집집마다 김장 준비에 바빠진다. 대개는 11월말에 김장을 담근다. 둘레길에서 만난 배추들은 무척 먹음직스럽게 익어갔다. 배추의 속이 단단해야 좋은 배추다. 속이 텅빈 배추는 무르기 쉽다. 속이 단단한 배추가 되기 위해서는 배추가 다 자란 뒤가 아니라 배추잎이 땅위에 나오기 시작할 때 정해진다. 처음부터 배추잎이 풍성하게 나와야 커서도 속이 꽉찬다. 배추만 그런 게 아니다. 어떤 일이든 시작이 반이라지만, 그 시작을 풍성하고 단단하게 해야 마무리가 꽉 찰 수 있다. 

배추들이 김치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상상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배추를 볼 때마다 맛있게 갓담근 김치를 떠올리는 것은 당연하다. 김치를 담그는 시기는 기온에 영향을 받는다. 너무 따뜻하면 김치가 빨리 익어서 안되고, 너무 늦으면 김치가 얼어서 안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의 기술은 김치의 익는 속도를 인위적으로 조절할 수 있을 정도로 발전하였다. 그렇다 하더라도 김치의 주재료인 배추의 수확 시기마저 조절할 수는 없다. 배추의 파종과 수확은 자연의 영향을 절대적으로 받기 때문이다. 100년전이나 지금이나 배추의 수확은 11월 초순경이다. 생각해 보면 아무리 기술이 발전해도 자연의 시간은 늘 한결같다. 나와 아내와 아이는 11월 2일 그 시간 속으로 달려갔다. 속을 꽉 채운 배추처럼 우리의 여정도 꽉 차길 기대하면서 말이다. 


이른 새벽에 눈을 떠 다시 차를 몰아 4구간의 마지막 지점 동강마을에 도착한 건 8시 40분 정도. 하지만 눈앞에서 버스를 놓치고 난 후 한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시골에서 대중교통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기다림에 익숙해져야 한다. 스마트폰도 보지 않고 떨어지는 낙엽과 흘러가는 구름으로 바람과 계절을 온전히 느끼는 시간도 나쁘지 않았다. 도시 속에서 언제 이런 고요와 평화를 느껴볼까. 그렇지만 한자리에서 오랫동안 주변 풍경을 보는 일이 어색해서인지 자꾸 서성거렸다. 아무래도 계속 걷기 여행을 하겠다면 이런 시간에 빨리 익숙해져야겠다.  

동강마을에서 금계마을까지는 버스로 30분 정도. 3구간 종착지였던 금계마을에서 이날의 지리산둘레길 4구간을 시작한다. 이번 둘레길은 엄천강을 따라 6개의 마을을 이어주는 길이다. 산길도 있지만 용유담을 지나서는 시멘트나 아스팔트길도 걸었다. 의중마을을 지나 이어진 산길과 송전마을을 빠져나오면서 맞이한 낙엽떨어지는 길, 운서마을과 구시락재로 이어진 산길 등이 호젓하게 걷기 좋았다.  

 

아침은 쌀쌀했다. 동강마을 옆 원기마을에서 금계마을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는 중이다. 아이가 춥다고 해서 담요를 둘러주었다. 12월에도 겨울의 시골 들녘을 걸어보고 싶은데, 아이가 떠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흔들린다. 강하게 키우려면 스스로 강해져야 한다. 난 준비되어 있는가?
원기마을에서 금계마을까지 버스로는 30분이면 이동한다. 다만 버스를 한시간이나 기다려야 했다. 먼저 온 버스를 간발의 차로 놓쳤고, 다음에 왔던 버스는 금계마을로 가지 않는다고 하여 보냈고, 세번째 온 버스를 탔다. 두번째 버스가 금계마을로 가지 않는다고 했는데, 여전히 의문이다. 그 기사님은 금계마을로 가지 않는다고 말했을까?
의탄교를 건너면서 임천을 사진으로 담았다. 임천은 용유담에서부터 엄천이라는 다른 이름으로 부른다. 수량은 적었지만 맑았다. 용유담을 지나면 지리산 칠선계곡에서 내려온 물이 이곳에서 합류한다. 
지리산둘레길 4구간은 의탄교를 건너 의중마을에서 벽송사-서암정사 방향으로 가는 산길과 임천을 끼고 가는 길로 갈라진다. 우리는 좀더 편한 임천길을 택했다.  
의중마을 쪽 큰 나무. 나무들이 가을에 물들어 간다. 
대숲에서 바람 소리를 들었다. 소나무는 홀로 대숲과 함께 자랐다. 치고 올라오는 대나무의 성장 속도와 바닥에서 우후죽순으로 뻗어가는 생명력을 소나무가 어찌 혼자 감당했을까. 그저 신기하고 기특할 뿐이다. 
물들인 나뭇잎은 보기가 쉽지 않았으나 떨어진 나뭇잎들이 지천에 깔렸다. 지난밤 이슬로 젖어 있어서 그런지 낙엽밟는 소리가 축축하다. 

 

대숲으로 난 계단을 올라가면서 맞는 아침햇살은 경험해 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멋진 풍경이다. 
보호수들은 200년 이상을 살았다. 이제 막 10년을 살고 있는 아이와 50년도 채 못 산 우리 부부가 우러러 볼만하다. 

 

다른 나무들이 서둘러 겨울을 준비하며 가을에 물들어가는데, 대나무는 홀로 초록으로 한껏 멋을 부리고 있다. 자연의 오묘함이다. 색의 향연이다. 
햇살이 잘 드는 곳의 낙엽은 잘 말랐다. 두텁게 쌓인 낙엽들을 밟으니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난다. 하늘에서는 계속해서 이파리가 비처럼 떨어졌다. 고요한 시골 숲길을 거닐면 자연히 말은 줄어든다. 
지리산 둘레길 주변의 나무들은 이제사 물이 들기 시작했다. 이때가 11월 초순이다. 멀리 산꼭대기 주변은 진작에 울긋불긋했다. 단풍을 보기에는 아직 이른 것이었나 보다. 

 

멀리 보이는 다리는 용유교. 그곳이 용유담이다. 기암괴석들이 모여 잔치를 하는 것 같다. 

용유담을 중심으로 하는 엄천강은 뛰어난 장관을 이루고 있는 곳이다. 이 곳이 한때 지리산 댐의 예정지였다고 하는데, 아름다운 절경이 모두 수장될 뻔했다. 엄천강을 따라 이어지는 절경에 옛사람들도 정자를 짓고, 시를 읊으며 풍류를 즐겼다고 한다. 

가만히 보고만 있으면 넋을 놓게 되는 풍경들이 있다. 하나는 장작불이 타는 모습이고 하나는 개울이 여울진 곳을 소리내며 흘러가는 모습이다. 엄천강에도 여러 여울목들이 있다. 큰 기암괴석들이 여기저기에 자리하고 있는가 하면 자잘한 돌들 틈으로 물이 흘러들었다가 빠져나가는 곳도 있다. 용우담을 기점으로 엄천이라 불리는 이곳은 운봉고원에서 흘렀던 임천과는 그 폭과 넓이가 사뭇 다르다. 평원을 가로지르며 흘렀던 임천은 들판을 촉촉히 적셔주기 위해 오랫동안 인간의 손길로 다듬어진 강이다. 그것에 비해 엄천은 지리산 깊은 계곡으로부터 수만년에 걸쳐 내려온 물들이 거칠게 형성해 온 모습 그대로 자신을 드러내고 있었다. 

용유담부터 이어진 임천의 절경을 두고 옛사람들도 멋진 시를 지어 읊었다. 그것이 강용하의 '화산십이곡(華山十二曲)'이다. 엄천의 12곳의 풍경을 담은 5언 율시이다. 지금 사람들은 풍경을 사진으로 찍고, 동영상으로 남기며 아름다운 풍경을 기리지만 옛사람들은 풍경을 시로 남겨서 후세에 전하니 더 기품이 있다. 그림이나 사진만으로는 100년 전 사람들이 무엇을 느꼈는지 알 수 없다. 옛사람과 우리의 감회가 다르지 않음은 남겨진 글로 알 수 있지 않을까. 한자 한자 새겨넣은 글자들이 풍경에 대한 느낌과 생각을 전해 준다. 그렇지만 글을 쓰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쉽지 않다. 누구나 글을 읽고 쓸 수 있고, 우리말을 넘어 외국어까지 능수능란하게 하는 사람이 많은 시대이지만 정작 아름다운 풍경을 두고 자신의 마음을 담는 글을 남길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나또한 그러하다. 

화산십이곡에 관한 이야기 (관련 블로그로 연결됩니다.)

 

국화꽃의 종류로 보인다. 꽃검색을 해 보니 개국이라는데... 이런 꽃이 여러 곳에 무리지어 지천으로 피었다. 겨울이 되면 이런 꽃들도 다 지고 황량한 풍경을 맞이할 것이다. 
계곡에서 내려와 엄천으로 흘러들어가는 물

 

엄천강을 따라 걷는 길은 지리산에서 가장 깊고 신비한 계곡이라는 칠선계곡 주변을 걷는 길이기도 하다. 깊은 계곡에는 당연히 신화와 전설이 깃들어 있다. 신비한 풍경 앞에서 사람들은 이야기를 지어냈다. 보통의 인간이 살기 어려운 세계를 신화나 전설로 풀어내는 방법으로 자연에 대한 경외감을 표현했을 것이다. 

칠선계곡은 설악산 천불동계곡, 제주도 탐라계곡과 함께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3대 계곡으로 알려져 있다. 이곳은 탐방예약제를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다고 알고 있지만, 예약제 구간은 계곡 깊숙한 곳에 한정되어 있으며, 입구부터 비선담까지 4.3km구간은 개방되어 있다고 한다. 예약 탐방을 통해 천왕봉까지 올라가는 것도 좋겠지만, 이것도 체력적인 부담이 상당하다. 산을 즐겨타는 사람이 아니라면 오르막산길로 9.7km를 올라갔다가 내려가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러므로 좀더 가볍게 칠선계곡의 비선담까지만 갔다 오는 것도 좋을 듯하다.  

근처에 서암정사와 벽송사를 방문해 보는 것도 좋겠다. 지리산둘레길 4구간에는 이 곳도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우리가 그곳까지 걸어서 찾아가는 일은 아이 때문에 어려웠다. 그래서 빠른 길을 택하고 대신 둘레길이 빨리 끝나면 그곳을 차량으로 이동해 가보려 했다. 그러나 이 마저도 아이가 힘들어해서 결국 숙소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아이에게는 매우 이색적인 경험이 되리라 기대했지만, 아이가 힘들어하니 어쩔 수가 없다. 

 

운서마을 초입 고갯길에 있는 운서쉼터 

 

둘레길을 걷기 시작하면서 여러 고갯길을 넘었다. 고갯길을 넘으면서 점점 차오르는 숨을 오롯이 느껴 보는 일은 참으로 소중하다. 평상시에는 숨쉬는 것에 대해 자각하지 못하던 내가 천천히 차오르는 숨을 느끼기 위함이 이 둘레길을 찾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쉼터는 숨을 쉬기 위한 터이면서 다리를 쉬기 위한 터이기도 하다. 쉼터가 있는 고갯길이 좋다. 

대표적인 경우가 지난번 3구간의 등구령 고갯길 쉼터이다. 여기는 3구간 순방향에서는 등구령을 넘기 전이지만 역방향에서 오는 사람들이라면 등구령을 넘은 다음이라서 막걸리 한사발 하고 남은 길을 가늠해 보면서 쉬어가기 좋은 곳이다. 이름있는 고갯길은 그곳을 넘나들었던 사람들의 땀과 눈물과 웃음과 한숨이 깊이 배어 있기 마련이다. 

4구간에서는 구시락재가 있다. 구시락재를 지나면 동강마을이 멀리서 나타난다. 우리가 버스를 기다리던 자리까지 훤하게 드러났다. 아이가 아주 좋아했다. 

 

구시락재를 넘으면 재미있는 장승이 하나 있다. 장승은 입을 삐쭉 내밀고 나그네를 맞이해 주었다. 

 

지리산둘레길 4구간 근처에는 용유담과 오도재, 서암정사-벽송사가 볼만하다. 이번 여행에서는 시간이 없어서 서암정사를 들리지 못한 것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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