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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1월, 지리산둘레길 4구간인 금계-동강 구간을 지나온 이후로 벌써 6개월, 즉 반년이 흘렀다. 이토록 오랫동안 둘레길 자락을 찾지 않은 이유는, 겨울이라는 계절적 이유도 있었지만 봄부터 창궐하기 시작한 전염병(코로나19 바이러스)이 더 큰 원인이다. 

이 전염병이 언제까지 어떻게 이어질까? 두려움과 공포로 우리는 모두 칩거에 들어갔다. 어려운 말로 비대면 접촉이 늘어나고, 마스크 없이는 외출을 할 수 없었다. 3월 초 잠깐 둘레길을 가자고 했을 때에도 출발 전날까지 나와 아내는 망설였다. 아내는 장모님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전했다. 그 당시 시골 노인분들은 외지인들에게 민감했고, 같은 마을 사람들끼리도 길에서나 만나면 잠깐 인사나 나눌 뿐 교류가 거의 없어졌다는 것이다. 이런 와중에 둘레길을 걷겠다는 여행은 얼마나 무모한 일인가?

사실 어느 여행인들 그러지 않았나? 집을 떠나 낯선 곳에 간다는 것에는 많은 기쁨만이 아니라 알 수 없는 위험도 감수하겠다는 뜻이다. 오랜 옛날부터 집을 떠나 어딘가로 간다는 것은 때로는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었다. 지금은 너무나도 쉽게 나라와 나라를 드나들고 바다와 산을 넘나들 수 있다고 하지만, 어찌됐든 21세기에도 ‘이불 밖은 위험하다’는 유행어가 나올 만큼 집 밖을 나서는 일은 일단 마음가짐부터 단단해져야 한다는 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게다가 코로나가 창궐하고 있어 인심도 흉흉하다. 여행객을 곱게 볼 시선을 기대하기 어렵다. 

그런 모든 상황을 감수하기로 했다. 아내와 나는 오랜 상의와 숙고 끝에 5월 마지막주 주말 지리산 둘레길 5구간, 동강-수철 코스를 걷기로 결정했다. 

 

새벽 3시에 일어나 지리산으로 떠날 채비를 했다.

 

 

새벽 4시 출발. 5월 말, 사위는 5시부터 밝아오기 시작한다. 4시간 반을 달려 다시 함양군 휴천면 원기마을에 도착했다. 새벽길을 달렸던 피곤함은 임천강으로 흐르는 맑은 아침 기운 속에서 쉽게 털어버릴 수 있었다. 원기마을 앞의 엄천교를 건너면 동강마을이다. 여기서부터 5구간의 시작점이다. 5구간은 꾸준히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여정이다. 쌍재를 지나 산불감시초소를 지나면 고동재를 거쳐 수철마을까지 다시 내려오는 비교적 단순한 구간이다. 고도 변화는 그렇게 이어지지만 길 자체는 구불구불 산길이다. 

지리산 둘레길은 말하자면 2가지 특징이 있다. 하나는 구불구불이요, 다른 하나는 오르락 내리락이다. 아무래도 산을 치고 올라가는 산행이 아니라 마을과 마을, 계곡과 계곡을 따라가는 길이라서 산세에 따라 길은 구불구불 이어지거나 산등성이를 따라 오르락내리락하기 마련이다. 이런 길의 특성 때문에 도심에서 걷는 10km와는 비교할 수 없는 노고가 들어간다. 도심에서 10km는 오르막이 있어도 3시간 안에 끝나지만, 지리산 둘레길은 보통 6시간 정도는 걸어야 한다. 물론 숙련도에 따라 시간은 달라진다. 

 

쌍재와 고동재 사이 가장 높은 곳이 아마도 산불 감시 초소가 있는 곳일 듯하다. 전체적으로 완만하게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여정이다. 

 

 

 

동강-수철 구간 지도: 8번은 산불감시초소가 있는 곳이다. 

 

 

오전 8시 30분 경, 여정을 시작했다. 둘레길에서 만나는 마을 중에는 농촌 마을로서 노동의 현장성보다는 전원 마을이라는 여유로움이 더 짙게 느껴지는 마을이 있다. 잘 정돈된 담장과 여기저기에 그려진 벽화, 그리고 손님을 안내하는 팻말과 민박집 이름이 적힌 간판 등이 그런 느낌을 전한다. 반면 다양한 농기계나 농기구가 도로 한쪽에 있어 아무렇게나 사람의 손길을 기다리고, 오래된 돌담과 낡은 구옥들이 제멋대로 그늘을 드리우는가 하면, 소나 닭을 키울 것 같은 축사나 우리가 보이면 여기는 전형적인 농촌 마을의 느낌을 준다. 이 둘은 둘레길에서 항상 공존한다. 농촌이라는 노동의 현장성도 있고, 둘레길 마을이라는 여행의 공간성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마을길을 지나 한참 임도를 따라 걷다가 왕복 2차선 차도와 만난다. 거기서부터 산청함양사건 추모공원까지는 차도 옆으로 걸어야 하는데, 인도가 없어서 위험천만하다. 게다가 바로 옆 하천변 공사가 대대적으로 진행 중이다 보니 덤프트럭 등 공사 차량도 가끔 오간다. 여기는 둘레길 여행객들을 보호해 줄 수 있는 안전장치가 미흡하다. 따라서 5구간을 걷고자 하는 분들은 아예 산청함양 사건 추모공원에서 시작점을 잡는 것을 권한다. 

산청함양사건 추모공원은 한국전쟁 당시 국군에 의한 양민학살 사건의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만들어진 공원이다.(자세한 내용은 링크 참조) 이제 지구상에서 전쟁이라는 행위는 다시는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잔인하고 비이성적이며 비인간적인 전쟁 행위에 대해 끊임없이 되새기고 질문해야 한다. 이를 위한 기념비적 장소나 집회, 모임을 이어나가고, 책과 영상을 통해 전쟁의 참상을 다음 세대에도 이해시켜야 한다. 

최근의 위안부 논란에서도 우리는 결코 전쟁 중 일어났던 위안부 문제에 대해 간과해서도 안되며 이를 축소 은폐하려는 어떠한 시도에 대해서도 단호히 맞서 싸워야 한다. 비록 모임의 운영과 관련해 여러 의혹이 있다고 해도 위안부 피해자들을 기리고 전쟁 피해자들을 지원하는 일에서 주춤해서는 안될 것이다. 

아이에게 잠시 전쟁과 산청함양 사건에 대해 이해할 수 있을 정도의 수준에서 설명해 주었다. 그 잔인함과 비이성적 광기를 모두 알려주기는 어려웠지만 다시는 이 땅에 전쟁이 있어서는 안 되며, 평화를 지키기 위해 우리 모두 노력해야 한다고 말해 주었다. 이곳에 교육관이 있어서 방문하면 더 자세한 역사 교육이 되었겠지만, 코로나 사태로 인해 교육관이 휴관 상태였다. 나에게는 두 번째로 아쉬운 지점이었다. 



산청함양 사건 추모공원, 멀리 보이는 위령탑

 

산청함양 추모공원을 지나면 곧이어 산길로 이어지는 길이 나타난다. 5구간의 산행길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계곡길을 따라 쌍재까지 이어지는 오르막길은 가파르지 않다. 가다 보면(추모공원에서 2km 지점) 상사폭포를 만날 수 있는데, 우리가 갔을 때는 폭포를 직접 보기는 어려웠다. 수풀이 우거져 있고, 폭포를 보기 위해 계곡으로 직접 발을 들여놓기는 위험할 수도 있다고 판단했다. 초행길에서 지나치게 경관을 추구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주어진 길을 따라 눈앞에 나타난 길을 잘 즐기는 것도 걷기 여행의 방법이다. 특히 사람이 그다지 많이 다니지 않는 길에는 산짐승의 위험도 있다. 다람쥐나 청설모는 귀엽지만 멧돼지나 뱀은 매우 위험한 존재다. 길이 아닌 곳에서는 그런 위험이 더 커진다. 따라서 아이가 있거나 단출한 가족끼리 둘레길을 간다면 최대한 제시된 길을 따라가는 게 안전하다. 



천천히 오르다보면 어느새 쌍재에 다다른다. 상사폭포에서 어렵지 않다. 줄곧 오르막이라지만 구불구불 이어지면서 크게 힘들이지 않고 오를 수 있다. 오르다 보면 반가운 매점도 있다.  산청 막걸리 5000원에 몇 가지 산나물 안주는 공짜다. 아내와 둘이 한잔 마시는 시간은 아이에게도 휴식 시간이다. 아이는 여전히 산에서 만나는 곤충들에 민감하다. 도시 아이로 자라나면서 생성된 벌레에 대한 비호감이 둘레길 걷기로 극복되길 바라는 마음이다. 매점에는 막걸리나 맥주도 있지만 생수나 아이스크림도 있다. 안주류로 도토리묵이나 파전도 있고 간단히 요기를 때울 수 있는 라면도 팔고 있다. 

 

“와~ 멋지다.”
매점을 지나 고동재로 가려고 오르막길을 가다가 앞서 가던 아내의 탄성이 들렸다. 곧 갑작스럽게 조망이 확 트인 공간이 나타났다. 산불 감시 초소가 있는 곳이다. 그다지 높이 올라온 것 같지 않았는데, 사방 어느 한 곳도 막힘없이 트였다. 이곳이 최고의 조망지라고 불리는 이유일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지리산 천왕봉을 만났다. 멀리 흐릿하게 보이는 천왕봉을 아이에게도 설명해 주었으나 지리산 능선을 밟아본 일이 없는 아이에게 그저 먼산 바라보기 밖에 뭐가 더 있겠나. 아내와 나만의 추억일 뿐일 것이다. 

5구간 초입에서 느꼈던 아쉬움으로 막혔던 속이 여기서 시원하게 뚫렸다. 사방 어디를 내다 봐도 산과 들과 하늘이 가득하다. 바람도 여기서는 지나온 길과 가야 할 길을 되새겨볼 만했을 것이다. 한참을 그렇게 우리는 바람과 함께 머물렀다. 


산불 감시 초소가 있는 봉우리에서 바라본 풍경1
산불 감시 초소가 있는 봉우리에서 바라본 풍경2
산불 감시 초소가 있는 봉우리에서 바라본 풍경 - 저 뒤에 흐릿하게 보이는 봉우리가 천왕봉



 

산불 감시 초소를 지나면 얼마 안가 고동재가 나온다. 수철리와 방곡리를 연결하는 고갯길이다. 여기에는 장승 하나가 버티고 서 있다가 사람이 나타나면 간략한 안내말을 전한다. 모르고 다가섰다가 장승에서 나오는 소리에 깜짝 놀랄 수도 있을 것 같다. 고갯길에서부터는 임시도로를 따라 수철마을까지 연결된다. 산행길에서 만나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인적도 없는 길에 뱀 한 마리가 지나가는 걸 보았고, 뱀 껍질도 발견했다. 새소리만 가득한 길을 자박자박 걸어가니 발걸음도 가볍고 흥이 오른다. 오래 걸은 피곤함도 잊을 수 있었다. 

 

수철마을로 내려서니 여기저기 민박집도 보인다. 여행객들을 맞이하는 마을의 풍경이다. 여기도 마을회관 주변에 중장비가 오가면서 공사가 한창이다. 둘레길 초입 계곡쪽 공사와 함께 마을 회관 앞 개천 공사도 진행 중이라서 시끄럽고 소란스럽다. 

마을 앞 버스정류장에 붙어 있는 개인택시로 전화를 걸어 동강 마을까지 가는 택시를 문의했다. 10분만에 차가 한대 배정되었고 곧이어 택시가 마을회관까지 올라왔다. 이곳에서 동강마을까지는 2만 4천 원 정도 나온다. 코로나 때문인지 기사님은 말씀이 없으셨고, 새벽부터 이어진 여정 때문인지 아이는 잠이 들어버렸다. 

고동재를 내려와 걷는 임도
수철마을에서

 

수철 마을 회관 앞 평상에 앉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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