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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과의 두 번째 둘레길 여행이다. 10월 16일 토요일 출발하면서 이번에는 현지에서 하룻밤 묵고 올라오기로 했다. 친구들과의 외박 여행은 그야말로 오랜만이다. 셋 중 둘은 코로나 백신 2차 접종까지 마친 상태이고, 나는 다음주 2차 접종을 앞두고 있는 상황이었다.

우리를 머뭇거리게 하는 건 코로나가 아니었다. 일주일전부터 예보되어 있던 가을비. 비가 얼마나 올까 노심초사하면서 기다리는데, 현지 예보에 따르면 약한 비가 오전 중에 그칠 거라는 것. 한 달 전부터 잡았던 일정을 강행키로 하고 다시 새벽길을 나섰다.

운리마을에 있는 지리산둘레길 8-9구간 시종점 표지판
출발할 때 비가 왔다. 비를 맞으며 둘레길을 시작해야 했다.
밤새 내린 비와 바람으로 낙엽들이 길에 가득했다.
지리산의 마을마다 쉼터 같은 나무들이 있다. 때로 그 나무 아래에서 다리쉼을 하고 가도 좋다.
포장도로는 끊기고 자연 흙길이 시작됐다. 멀리 산으로 이어지는 길이 보인다. 
비는 오락가락, 바삐 걷는 친구들, 무엇이 그리 바쁜가. 천천히 가세.
겨울이 오기 전에 마지막으로 길가에 핀 꽃들에게도 눈을 돌려 보자고. 우리에게 인사하고 있지 않은가.
운리마을을 벗어나 완만한 오르막길 임도가 나왔고, 그 정상에 작은 정자와 함께 지리산둘레길 안내판이 있다. 
7구간 웅석봉에 대한 트라우마일까? 급한 오르막길을 앞두고 긴장감이 돌아 사진 한방 찍는다. 

비를 맞으며 걷는 일이 어려울까? 한여름 소나기라면 여행자에게 땀을 식혀 주는 바람보다 때로는 더 반갑다. 가을비는 어떨까? 숲속에서 만나는 가을비는 낙엽과 함께 떨어지면서 보다 우울한 정취를 깊게 해 준다. 후두둑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만 울리는 숲 한가운데서 우리는 떨어지는 빗방울과 낙엽들이 한데 어우러지는 슬픈 광경을 목도한다. 때로 우리 인생은 불운이 겹겹이 들이닥쳐 청구서처럼 펄럭일 때도 있겠지. 살다보니 정말 감당하기 어렵다고 느껴진 그 순간, 누군가가 옆에 있다면 견뎌지더라. 그 인연을 위해 우리는 삶을 살아가고 견뎌내고 나아가는 것 아닐까.

비는 서서히 그쳐갔다. 지리산 둘레길의 정자가 있는 곳에 이 길의 유례가 실린 표지판이 있다.

솔숲과 참나무 숲이 우거져 있으며 숲길과 게곡길, 임도를 번갈아 가며 걸을 수 있는 구간이다. 고령토를 운반하던 운재로가 남아 있으며 남명 조식 선생의 무덤에 이르는 길도 만난다. 마근담 계곡 따라 덕산 초입이 옛날 장터였다.


길을 가다 보니 우리는 어느새 참나무 군락지로 들어서고 있었다.

다행히 8구간에서 급한 오르막길은 없었다. 반대로 가장 멋진 길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보드라운 흙길이 내내 이어진다. 아침 산길을 걷는 기분이 좋다. 
이런 곳에 모셔진 무덤의 주인은 심심하지는 않겠다. 둘레길 여행객들의 심심치 않을 방문을 받을테니.
빽빽이 둘러싼 참나무 사이를 걸었다. 지리산둘레길의 참다운 아름다움을 여기 참나무숲에서 만난다. 
참나무숲 군락지를 걷는 일은 더없이 즐거운 일이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햇볕이 내리 쬐나, 바람이 부나...


이곳은 지리산둘레길 중에서 참나무가 가장 많은 곳이라고 한다. 참나무에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좋은' , '진실'의 의미를 지닌 접두어 '참~'이 붙었는데, 그만큼 우리 조상들에게 여러 가지로 의미있게 쓰인 나무였다. 집을 짓는 목재로서뿐만 아니라 다 타고 남은 숯도 참나무 숲을 '참숯'이라고 부르면서 높게 쳐 준 것이다. 반대 의미의 접두어인 '개~'를 생각해 보면 더 쉽게 다가올 것이다.

그런 참나무들이 거대한 숲을 이루고 있는 장관을 이곳에서 볼 수 있다. 밤새 내린 비 때문에 땅에서 올라온 황토흙 내음, 떨어지는 빗방울이 낙엽에 닿는 소리, 비에 젖은 숲의 나무와 땅이 주는 오묘한 빛이  함께 어우러져 자연의 오감을 한껏 느끼게 해 주었다. 지난달까지 울어 제끼던 매미 소리도 사라지고 새 소리마저 드물었던 이날의 숲은 인상적으로 내 기억에 남았다. 도시에서 사람들과 어울리며 쌓여 왔던 답답함과 긴장감이 이곳 참나무 숲에서 순식간에 씻겼다.  

참나무숲 군락지는 걷기 좋게 잘 다듬어져 있다. 
참나무 군락지를 안내하는 안내판

 

비도 많이 그치고 나뭇잎에 매달린 빗방울들만 간간히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10월 중순. 가을이 여기 지리산까지 내려오고 있었다. 

 

참나무 군락지를 지나면 백운 계곡이 나온다. 남명 조식 선생이 이곳을 매우 아겼으며 자주 찾았던 곳이다. 그와 관련된 일화들이 표지판에도 나와 있다.

조식 선생에 대해 아는 바는 없었다. 다만, 그가 평소에 "지식을 알면 행해야 한다"는 것(실천궁행實踐躬行)을 주장했다는 점에서 다시 찾아보게 되었다. 사회 생활을 하다 보면 알면서도 행하기 어려운 일들이 많다. 부조리와 비합리라고 생각하면서도 어쩔 수 없다고 인정하거나 체념하는 일이 많아진다. 수없이 조정으로 천거되고 높은 벼슬을 추천받았으면서도 결코 정치에 관여하지 않고 이곳 산청에서 후학 양성을 위해 평생을 살았던 이 분의 모습이 어쩌면 고고한 학자로서의 표상일 수는 있겠다.

게다가 조식 선생이 이러한 생각(실천궁행) 때문에 퇴계 이황과도 크게 다투었다고 하니 그가 큰 인물임에는 틀림없다. 생각해 보면 이황이나 이이의 유학이 세상의 일이나 인민의 안락과 거리가 멀었고, 오히려 조식 선생의 학문이 훗날 북학파, 실학파들에게 영향을 미쳤다고 하니 누가 더 세상 사람에게 이로웠는가는 물을 필요가 없겠다.

백운계곡의 모습
백운동 계곡
둘레길 안내 이정표와 돌무덤. 
쓰러진 나무가 위태롭게 보인다. 
작은 대나무들이 길 옆에서 여행객들의 손을 잡아준다. 떨어진 댓잎들이 바스락거리며 밟힌다.
울창한 숲이 산을 이룬다. 산이 숲을 가꾼다. 사람은 그저 머물다 갈 뿐이다.


백운계곡을 지나 다시 산길을 걷다보면 마근담을 만난다. 마근담의 어원은 '막은담'에서 왔다고 한다. 온 사방이 산으로 담을 쌓은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유래했다. 공기가 맑고 높은 산과 깊은 계곡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풍경을 자아내고 있는 곳이다.

마근담에서부터는 흙길이 아닌 시멘트-콘크리트 길이다. 여전히 주위는 높은 산으로 에워싸여 있어 묘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게다가 이날 따라 바람마저 거세어 온 산의 나무들이 춤을 추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약한 잎들이 바람에 떨어져서 하늘 여행을 떠나는 모습을 보니 가을이 실감난다.

내려가는 길에는 감농장이 지천이다. 산청은 감이 유명하고 이곳에서 생산된 감을 이용해 곶감을 만들어 도시로 내보내는 모양이다. 감나무에서는 감들이 한창 익어갔고, 감 농장의 한켠에서는 곶감을 만들기 위해 감을 매달아 말리기 위한 작업을 하는 사람들도 볼 수 있었다. 1월에는 산청 곶감 축제가 열릴 만큼 이곳 산청에서 곶감은 무척이나 중요한 생산물이다.

사실 곶감은 해외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우리나라 고유의 음식임에는 틀림없다. 물론 건조 과일은 다양한 형태로 만날 수 있긴 하지만 곶감이 주는 매력은 여타 마른 과일들에 비교하기 어려운 매력이 있다. 이곳 산청 곶감은 지리산의 깊은 산속에서 겨울을 난다. 이 곶감을 먹는다면 지리산의 맑은 공기를 함께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마근담으로 내려 서는 길. 
마근담길은 대부분 포장도로로 덕산까지 이어진다.
산청은 곶감으로 유명하다. 매년 1월 산청곶감축제가 열린다. 
감나무에는 곶감이 한창 익어가고 있었다. 주민들은 곶감에서 빨리 거둔 감들로 곶감을 말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마을 주민들이 모여 함께 빨래를 하던 공동 빨래터. 이제는 보기 드문 모습이다. 
남명 조식 선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선조가 내린 비
지리산둘레길 9-10구간 시종점 표지판. 

 

이날 9시에 운리마을에서 시작해 1시에 덕산(시천면 산천재)의 시종점에 도착하는 걸로 마무리했다. 우리는 조미원이라는 민박집에서 하룻밤을 묵었고, 다음날 서울로 상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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